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1코린토 2,10ㄴ-16 루카 4,31-37
오늘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더러운 영이란
악한 세력을 말합니다. 어떻게 본다면 하느님을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하는 마음이
더러운 영이 들린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오늘날에도 악한 세력은 많습니다. 그중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세력은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누구와 가장 대립하셨는지를 보면 알게 됩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와 같은 기득권층입니다. 그들은 율법과 계명을 빈틈없이 지키며
스스로 거룩하고 권위 있는 것처럼 처신하였지요.
반면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힘든 사람들은 많은 계명을 다 지키지 못하기에 자신들은
하느님께 버림받았다고까지 여긴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을
독점하고는 율법과 계명을 잣대로 하여 거룩한 사람과 거룩하지 않은 사람으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더 가까이하셨습니까?
하느님을 절실하게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더러운 영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땀 흘려 일하는 직장에 있었습니까,
회당에 있었습니까? 오늘날 거룩한 성전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것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와 같은 형태의 신앙심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동하지만, 실상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회당 안에 있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며 우리의 신앙심을 정화해 주십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의 참된 본질을 깨닫고, 그 뜻을 실천함으로써
언제나 거룩한 영으로 충만해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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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1코린토 2,10ㄴ-16 루카 4,31-37
마태오, 마르코, 루카, 세 복음서는 공통으로 예수님께서 이루신 첫 번째 기적이
마귀의 추방이라고 말합니다(마태오 4,24 ; 마르코 1,23-26 ; 루카 4,33-35 참조).
예수님께서는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우셨습니다. 오늘 복음처럼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시어 그를 해방하십니다. 마귀가 떨어져 나간 사람은
다시 의식을 회복하고 자유를 얻어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마귀의 영”이라는 말이 자칫 고리타분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사실 우리는
이름만 바뀌었을 뿐 다양한 것들에 사로잡혀 살아갈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를 현혹하는
광고와 황당한 뉴스에 눈과 귀를 빼앗겨 소비주의의 노예가 되기도 하고, 소중한 자유를
잃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많은 나쁜 것에 중독될 수 있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자신은 그 어떤 것에도 매여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조차도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을 신봉하고 그것에 매여 살 가능성이 높습니다.
루카 복음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미리 유산을 받아 멀리 떠난 작은 아들이
세상의 화려함에 눈이 멀어 방탕한 생활을 하며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한 이야기를 전합니다(루카 15,11-19 참조).
마귀들은 똑똑하고 교활합니다.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창세기 3,1). 마귀들은 신학에도 밝습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들은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선을 거슬러
거세게 저항합니다. 우리 안에서 소리를 지릅니다.
조용히 차분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마귀와 대적할 힘을 주님께 청합시다.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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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1코린토 2,10ㄴ-16 루카 4,31-37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국 교회의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전직 목회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종의 자기고백과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분은 한국교회의 문제는 대부분 ‘담임목사’에게
있다고 하였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복음 선포와는 거리가 먼 설교라고 하였습니다.
축복과 저주의 설교, 번영의 설교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시대의 표징을
잘 읽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목사님의 교회운영이 투명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교회의 재정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식에게 교회와 교회의 재산을 물려주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목사님의 언행이 상식적이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목사님의 생활이 너무 사치스러운 경우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동차, 집, 옷이 호화스러운 경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공동체가 분열되고, 가나안 신자가 늘어나고(가나안은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가 된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대부분 담임목사의 책임이 크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목사님이 수준이하인가?’라고 물으면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전도사 시절 열심히 전도하였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목사님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목사님의 생활이, 삶이 변하게 된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특별한 존재라고 존경하는 것은 좋지만, 목사님은 예수님은 아닙니다.
마치 목사님을 예수님처럼 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모든 결정은 목사님이
내릴 수 있는 교회의 구조에도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정기구에 덕망 있는 신도가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교회에는 정관이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정관에 따라서 목사님의 임기를 정하고,
교회에서 ‘재신임’ 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목사님은 처음 가졌던
순수한 마음으로 목회를 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주어진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목사님은 대부분 ‘재신임’을 받고
목회를 계속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변하지 않는 제도, 견제 받지 않는 제도는 부패하기 마련이라는 말은 가톨릭 사제인 저에게도
‘타산지석’이 되었습니다. 한국 가톨릭에 문제가 있다면 대부분 영적으로 눈이 먼 사제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에 소홀한 사제, 세상의 것들에 관심이 많은 사제,
재정에 투명하지 않는 사제, 성사를 성실하게 집전하지 않는 사제,
말과 행동이 상식적이지 않은 사제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강조하셨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악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맞습니다.
사제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늘 마음에 새기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면
교회는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그것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한 가지 제안이 있다면 사목에 대한 키워드를 뽑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목의 기간 동안
‘겸손, 희생, 인내, 열정, 화합’이라는 키워드가 많이 있었다면 그렇게 평가하면 좋겠습니다.
사목의 기간 동안 ‘독단, 독선, 상주의무 위반, 지나친 음주, 불성실’이 많이 있었다면
이 또한 평가 되면 좋겠습니다. 좋은 평가를 받은 사목자들은 그에 합당한 곳에서
사목을 하면 좋겠습니다. 부정적인 평가가 많은 사목자들은 재충전의 시간을 주면 좋겠습니다.
치유의 시간을 갖도록 배려하면 좋겠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평가를 하셨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허영을 비판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따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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