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람시 이론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옥중수고'는 이탈리아어 제목 그대로 '감옥에서 쓴 수고'라는
뜻이다. 그람시가 수형생활을 하던 1926년부터 1935년까지 대학노트 32권에 2,848쪽에 이르는
필사본으로 남겨진 것으로, 그 주제는 이탈리아의 역사, 교육, 문화, 철학, 지식인의 역할, 국가이론,
여성의 지위, 종교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방대하다. '옥중수고'는 그야말로 이빨이 다
빠져나가고, 위장이 망가지고, 폐결핵과 오랫동안의 지병이었던 척추질환의 고통 속에서 필사적인
노력으로 정리해낸 그람시의 가장 큰 유작이다. 그람시는 돌연히 끌어오르는 총파업과 각성한
프로레타리아라는 주체의 홀연한 등장, 그리고 여기서 방향성을 주입하는 엘리트 혁명가의 조합으로
상정되는 혁명을 신뢰하지 않았다. 결국 그람시에게 있어 사회주의는 대중의 지적 수준을 자발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선결 과제였다. 이러한 과업을 위해서 지식인을 겨냥한 투쟁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그람시는 전통적인 지식인 또는 부루주아의 전문가들과 구별되는 '유기적 지식인'이라는 존재를
제시했다. 유기적 지식인은 명확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면서 실천적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항상적인 설득자'이자 노동계급 내에서 조직구성원이 되는 이들이다. 그람시에게 있어 사회주의는
'진지전(war of position)'이라 표현되는 장구하고 어려운 과정을 의미하게 된다. 이는 '어떤' 사회
주의인가와 함께 '어떻게 건설되는' 사회주의인가 라는 두 가지 물음이 함께 제기되고 대답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파괴와 건설의 과정이자 의식적인 교육과 조직의 과정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전복 또는 해체에 관한 노동자혁명의 파괴적인 측면보다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
그람시의 일관된 특징이었다. 즉 그는 파괴나 해체를 넘어서는 새로운 '질서'를 강조한 것이다.
그람시는 이 모든 것을 마르크스주의 정치라고 사고했으며, 곧 '실천의 철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중심적인 성격, 즉 이론과 실천, 사상과 행동 사이의 불가분한 연계를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람시는 마르크스 이론의 역동적이고 의지적인
측면을 포착하고 발전시켰다. 제2인터내셔널의 실패와 노동자의 혁명이 아닌 농민혁명의 성격이
짙은 볼세비키가 이끌어낸 러시아 혁명을 목도하면서 그람시는 마르크스가 예언한 사회주의 혁명이
자본주의 경제의 붕괴로부터 자연적으로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건설되어야 할 어떤 것,
즉 역사적인 배경과 맥락 속에서 인간 행위를 통해 성취되어야 하는 것을 확신했다. 그람시가 '자본에
반하는 혁명'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경제적으로 후진국이어 노동자 계급층이 제대로 조직화되지
못했던 러시아에서 프로레타리아 혁명을 성취하게 된 예외적인 상황을 묘사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레닌과 볼세비키의 적극적인 행동주의와 지도력, 즉 '자코뱅주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한 언급이었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옥중수고'에서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뱅을 재평가하면서 도시와 농촌,
농민과 노동자들을 결집시키는 '국민적-민중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혁명세력은
국민적인 동시에 민중적이어야 하며, 혁명의 과정에서 양자는 결합될 수밖에 없음을 뜻했다.
그람시를 이야기할 때마다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헤게모니'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 용어에 대해
영국의 역사학자 패리 앤더슨은 1977년 '신좌파평론'에 기고한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율배반'이라는
논문에서 헤게모니의 기원에 대해 분석하였다. 그에 따르면 1833년경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아버지인 플레하노프의 저작에서 이 용어가 처음으로 나타났는데, 여기서 그는 러시아 노동계급이
고용주에 대항하는 경제투쟁뿐만 아니라 짜리즘에 대항하는 정치투쟁을 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10년뒤 악셀로드는 한발 더 나아가 러시아 사회에서는 다른 정체계급들이 무능력하기 때문에 노동
계급이 反절대주의 투쟁에서 독립적이고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며 프로레타리아의 '주도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노동계급의 특별한 임무에 대한 강조는 자연스레 레닌에게 받아들여져서 유명한
팸플릿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노동계급이 '실질적인 헤게모니'를 준비하는 유일하고도 효과적인
수단으로 '정치신문'을 요구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헤게모니에 대한 레닌의 협소한 정치적인
정의와는 달리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이를 계급기제의 다자원적인 속성을 분석하는데 도입했다.
즉 '부루주아 혁명기의 노동계급의 전망'이라는 원래의 의미로부터 '안정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
계급에 대한 부루주아지의 지배 매커니즘'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그람시는 정치적인 행위에 대한 '이중적 관점', 즉 '강제와 동의' 또는 '지배와 헤게모니'의 관점을
요청했고, 여기서부터 헤게모니를 서구 부루주아 권력에 대한 차별화된 분석에 이용한다.
부루주아지의 지배는 물리적인 강제 또는 그에 관한 위협을 통하는 것만큼이나 시민사회에서
성취되는 대중의 '동의'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국가기구를 통한 교육, 미디어, 문화,
법적 제도가 강력하고 평범한 의식을 형성하는 서구 사회에서 두드러진다. 말하자면 특정한 계급은
지배와 강제를 통해 한 사회에서 우위를 지킬 수 있다. 그러나 그 '범위'는 제한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동의보다는 강압적인 수단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국가를 변형시키거나 사회를
혁신시키기 위한 역사적인 프로젝트에서 적극적인 참여를 끌어낼 수 없다.
이러한 '헤게모니' 개념의 확장을 강화하는 것은 그람시가 또 다른 역사적인 테제들의 구분인 '국가/
시민사회'에서 비롯된다. '옥중수고'에 실린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에세이에서 그람시는 몇 가지
방식으로 이 구분을 정교화했다. 우선 그는 투쟁의 두 유형을 구분해 냈다. 하나는 '기동전'인데
여기서는 모든 것이 하나의 투쟁과 전선으로 집중되어 '짓쳐 들어가서 결정적인(전략적인) 승리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전술로. '적의 방어'에 단 하나의 전략적인 틈새가 있는 경우에 사용할 수 있는
투쟁유형이다. 두 번째로 '진지전'이 있는데 이는 상이한 그리고 다양한 투쟁전선을 가로질러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며 여기에는 '전광석화'처럼 승리할 수 있는 돌파구는 거의 없다. 진지전에서
중요한 것은 적의 '전진참호들'이 아니라 '전장의 군대 후방에 위치한 조직, 산업적인 체계, 즉 시민
사회의 구조와 제도들을 포함하는 사회의 전체구조'이다. 그람시는 1917년 레닌혁명을 성공적인
'기동전'의 최후의 사례로 간주했다. 그는 '서구'의 조건이 근대 정치영역의 특성으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진지전'이 점차 '기동전'을 대체하고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서구'는 지리적인 동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시민사회에서 새로이 나타나는 형식들 및 그들 사이의 새롭고 보다 복합적인
관계에 의해 창출된 정치의 새로운 영역을 나타낸다. '옥중수고'에서 그람시는 '선진적인' 사회들에서
시민사회의 상부구조는 '근대적인 전쟁의 참호체계'와 같다고 적고 있다. 상이한 유형의 정치투쟁은
이러한 새로운 지형에 적합하다. 따라서 '기동전'은 전략적인 기능보다도 전술적인 기능을 지닌 것으로
축소되고, 전쟁은 '전면공격'에서 일단 승리하면 '명백하게 결정적'이기 때문에 헤게모니의 전례없는
집중을 필요로 하며, 어렵지만 이례적인 인내와 창의성을 필요로 하는 '진지전'으로 이행된다는 것이다.
결국 '진지전'의 문제들은 두 가지 중요한 함의를 갖는데, 하나는 시민사회의 변형이 국가권력을
둘러싼 투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국가체제는 소수가 아닌 대중적인
기반위에서 건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헤게모니와 진지점 기동전의 문제는 다시 이데올로기라는 전장(戰場)으로 집약된다. 그람시가
는 그의 옥중수고에서 "모든 철학적 흐름은 '상식'이라는 침전물을 남긴다. 상식은 그것들의 역사적
효력을 기록한 것이다. 상식은 고정적이고 비유동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으로 들어와 과학적
사고와 철학적 견해들로 풍부해지면서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변형시킨다. '상식'은 미래의 민속, 즉
특정한 공간과 시간에 대한 민중의 지식의 비교적 고정된 단계를 창조한다."고 쓰고 있다. 그가 이데
올로기를 취급하는 방식을 특징짓는 것은 바로 대중적 사고의 구조들에 대한 이러한 관심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대중의 믿음, 인민의 문화는 자체의 논리대로 움직이도록 내버려 둘 수 있는 투쟁역역이
아니다. 그것들은 혁명의 가정에서 '물질적인 힘, 그 자체'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람시는 사상은
유동적인 것이며, 이데올로기는 자생적으로 그리고 아무런 정해진 방향없이 발전하는 것이라고 보는
일체의 관념을 거부했다. 그는 상식과 철학의 상위 수준 사이의 관계는 '정치'에 의해 보장된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주요 매개자들은 문화와 이데올로기의 순환과 발전에 대해 전문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유기적 지식인이 된다. 그는 혁명적 변혁이 사회의 모든 측면들, 즉 인간 존재의 모든
차원을 포괄하여 '총체적'으로 진행되어야 진정한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 문화, 사회적 관계, 이데올로기를 포함하는 관계의 총체를 인식하는 한, 하나를
변혁하려는 투쟁은 모든 것, 즉 총체적인 것들을 변혁하고자 하는 투쟁과 필연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선진 자본주의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마르크스주의적 문화혁명의 단초라 할 것이다.
첫댓글 당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