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을 주십니다.
(마태복음 10 : 1-15)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부르실 때 권능, 기쁨, 평안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승리교회 성도들을 부르시고 무엇을 주셨습니까?
고치는 권능,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그 권능으로 평안을 빌라입니다.
1.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시듯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본문 1절에서 “예수께서 그의 열두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셨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시고 권능을 주셨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셨을까요?
더러운 귀신에 들려 고생하고 있는 잃어버린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귀신에 사로 잡혀서 고생하고 있는 사람이 지금도 있습니다.
제가 전도하다가 어느 아줌마랑 대화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남편은 술만 먹고 일을 안한다. 자기보고 일하라고 하고 일을 하지 않으면 행패를 부린다. 아이들에게 폭력을 쓴다고 한다. 남편이 전에는 교회에 다니던 사람이고 남편 때문에 교회에 나갔는데 지금은 교회에 나가면 날리를 친다>고 합니다. 자기가 교회에 다니면 남편이 교회에 와서 행패를 부릴거라고 했습니다.
왜 이런 사람이 있을까요?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서 그렇습니다. 그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고 더러운귀신을 쫓아내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더러운 귀신에게 사로 잡혀 있는 사람을 쫓아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에 권세와 능력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더러운 귀신은 떠나가라> 예수의 이름을 사용할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떠나가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든자는 고침을 받으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이 일어날지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불가능에 도전할지어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데가볼리"지경에서 "갈릴리"호수로 이르게 될 때 귀먹고 어눌한 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예수님께 찾아 왔습니다. 이에 동정 많으신 예수님은 그 환자의 양귀에 손가락을 넣고, 침을 벧어 바르며, 그의 혀에는 손을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하시니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맷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고 했습니다.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었으며 곧 말을 하게 되었고 귀는 들을 수 있는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의 말씀 <에바다><열리라>고 전해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 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문제를 말씀으로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소개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왜 부르셨나요?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 고생하고 있는 영혼을 구해라고 부르셨습니다.
질병과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참된 행복과 기쁨을 찾을수 있도록 예수님을 소개하라고 부르셨습니다.
2. 예수님은 기쁨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 “병든자를 고치며 죽은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예수님은 잃어 버린양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서 전파하기를 <천국이 가까이 왔다>하라고 했습니다. 천국이 무엇인가요?
천국은 기쁨의 축제가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병든자를 고쳐 주어서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려서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를 깨끗하여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귀신을 쫓아내서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이 이 기쁨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특징이 <항상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조오지 피바디라는 사람은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자선사업과 교육사업을
위해 내놓은 다음,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내 평생에 걸쳐 피와
땀을 흘려 모은 재산을 내놓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결
단을 하고 내놓았을 때, 재산을 모으는 기쁨에 비할 수 없는 신비로운 기
쁨이 있었다." 또한 폴 투르니에도 "선물을 주는 것은 사실상 다른 사람
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는 일 !", 당신은 얼마나 잘하고 계십니까 ?
주는 일을 잘하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줄 줄을 모르고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을 일컬어 일종의 "유아기적 고착"에 빠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 혹, 아직도 유아기적 고착에 빠져 계시지는 않는지
요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주님, 저희로 주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되게 하시옵소서."
당신은 주는 것과 받는 것 중 어느 쪽을 더 즐겨하고 계십니까 ?
받는 것이 표면적인 기쁨이라면 주는 것은 내면으로 승화된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안에서 항상 기쁘게 살아가라는 것이다.
예수님안에서 이미 기쁨이 왔다는 것입니다. 죄에서 질병에서 가난에서 해방시켜주시는 예수님이 나의 소망이며 나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을 나의 주로 고백되어지는 삶은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수밖에 없습니ㅣ다. 사도바울이 고백하잖아요...<나의 나된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그래요. 예수님을 믿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살아갑니다.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지금도 기뻐하면서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돈이 없어도 건강이 없어도 즐거운 일이 없어도 항상 기쁘게 살아갈수 있는 권능을 주십니다.
3. 그 권능으로 평안을 비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평안은 빌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미 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이미 은혜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모두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십니다.
크리스천을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 “당신은 왜 교회에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40%에 해당하는 사람이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라고 응답했습니다. 성도들의 60% 정도가 평소에 불안을 느낀다고 대답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평안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안은 사실 모든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 시작은 인간이 에덴에서 추방당하던 거슬러 올라갑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사람은 진리의 빛을 잃었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밀어내고서라도 자신이 살고자 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공격하서라도 자신이 옳음을 증명할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칩니다.
우리는 불안을, 빛이신 주님께 나아가는 수단으로 삼아야 합니다. 빛이신 주님 앞에 가야 합니다.
마치 어머니 배 속에 있다가 갓 태어난 아기가 앞이 보이지 않아 불안해하며 우는 것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어둠과 불안뿐입니다. 인간은 빛이신 주님과 연결될 때에만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참포도나무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생명의 떡이십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권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복과 은혜와 평강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안에서 받아드리고 누리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권능, 기쁨, 평안을 주셨습니다.
불안 걱정 염려하는 다스리는 예수님의 권능과 기쁨과 평안으로 승리하고 형통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