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덕 崔用德 (1898~1969】 「의열단 활동, 한국광복군 고위간부 역임」
1898년 9월 19일 서울 성북동(城北洞)에서 대한제국 2등 군의관인 최익환(崔益煥)의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창석(滄石)이다. 이명은 최용덕(崔容德)이다.
1915년 서울 황금정(黃金町, 현 을지로 일대)의 사립 봉명(鳳鳴)학교를 졸업하고, “자주독립의 주권을 회복하려는 굳은 결의를 품고서”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北京)의 숭실학교를 2년간 다니며 중국어와 중국문물을 익혔다. 1916년 베이징의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가 운영하는 군관학교 단기과정에 들어가 수료하고, 돤치루이(段祺瑞)군의 제2사단에서 초급 지휘관으로 복무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자, 중국 군대를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때 상하이(上海)·베이징·펑톈(奉天)·안둥(安東) 등지에서 선전문과 무기 등을 운반하다가 중국 관헌에 체포되었다. 펑톈 헌병사령부로 이송되었으나, 사령관 첸싱(陳興) 장군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1920년 중국군에 복무 중이던 한인 비행사 서왈보(徐曰甫)의 강력한 권유와 추천으로, 돤치루이 관할하 즈리성(直隸省, 현 허베이성[河北省]) 바오딩푸(保定府)의 육군항공학교(일명 바오딩항공학교)에 들어가 3년간 수학하였다. 1921년 4월 이승만(李承晩)·정한경(鄭翰景) 등의 대미(對美) 위임통치 청원에 대한 성토문을 신채호(申采浩)가 기초하여 발포하자, 54명의 서명자 중 1명으로 참여하였다. 1922년 6월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톈진(天津)에서 국내 거사용 폭탄 확보와 투척 계획을 김원봉(金元鳳) 등과 함께 협의하였고, 베이징-안둥 간 폭탄 운반을 도왔다. 또한 남녕득(南寧得)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할 것을 권유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난항을 거듭하고 유지·개조·창조 3파간 분규가 계속되던 중에 의열단을 탈퇴하고, 창조파에 설 목적으로 서왈보·송호(宋虎)·김사집(金思潗) 등과 함께 신의단(伸義團)을 조직하였다. 1924년 7월 한진산(韓震山)·신숙(申肅)·원세훈(元世勳)·서왈보 등과 함께 베이징경찰청과 교섭하여 친일분자와 밀정을 배제한 순수 독립운동가 조직을 표방하고 북경한교동지회(北京韓僑同志會)를 발기·조직하였다.
1923년 바오딩항공학교를 졸업하고 우페이푸(吳佩孚) 군대의 비행사가 되었고, 1924년 제2차 직봉전쟁(直奉戰爭)에 참전하였다. 펑위샹(馮玉祥) 휘하의 국민군 제3군 항공대 제2대를 허난(河南)·톈진 전선에서 지휘하였고, 원협항공대대(援挾航空大隊)의 부대장(副隊長)이 되어서는 난커우전쟁(南口戰爭)에도 출전하였다.
1926년 7월 중국 국민당 광둥군정부(廣東軍政府)의 북벌이 개시되었을 때, 쑨촨방군(孫傳芳軍)의 항공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이때 국민혁명군 참모부에 몸담고 있던 김홍일(金弘壹)이 혁명군으로 넘어오라고 포섭·공작하였다. 국민혁명군이 쑨촨방군을 격파하고 양쯔강(楊子江)까지 진격하자 혁명군 진영으로 투신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27년 국민혁명군이 광저우(廣州)에서 항공대를 창설하려 할 때, 윈난(雲南)항공학교 출신 이영무(李英茂)·권기옥(權基玉), 소련비행학교 출신 장성철(張聖哲)·김진일(金震一) 등과 함께 참여하여 중화민국 공군 창설의 공로자가 되었다. 그 후 국민혁명군 항공처의 일등비행사로 동로(東路)항공사령부에 근무하였고, 동양인으로는 유일하게 최고 450마력 전투기를 조종하였다. 1928년 공군군관학교 교관 재직시, 동료 비행사의 동생 후융꿔(胡用國)와 결혼하였다.
난징(南京)항공대에 소속되어 있던 1932년 1월, 상해사변(上海事變)에 참전하였다. 같은 해 4월 난징에서 윤기섭(尹琦燮)·신익희(申翼熙) 등의 주도로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이 창당될 때 참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다. 1934년 2월한국혁명당이 난징으로 내려온 만주 한국독립당의 간부·당원 40여 명과 통합하여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창립하자,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년 만에 사임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중소(中蘇)연합항공대가 창설되자 그 난창(南昌)기지 사령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940년 중국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이 사이 공군학교 교관대장, 교도총대(敎導總隊) 훈련부장, 수면(水面)항공대장, 공군 지휘부 참모장, 공군기지 사령관 및 학교장 등을 역임하며 쌓은 공적으로 중국항공총본부로부터 보정훈장(寶鼎勳章)을 받았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성립하고 그해 10월 기구가 확정될 때, 공군 대령으로 중국 항공대 간부직을 유지한 채 비서처장(秘書處長)으로 임명되었다. 얼마 후 총무처장(總務處長)으로 직명이 바뀌었다. 1943년 7월 고급참모 채원개(蔡元凱)와 서로 직을 바꾸어 맡았다. 1944년 11월 참모처장(參謀處長)으로 전임(轉任)하였고, 1945년 광복 때까지 참장(參將) 계급으로 계속 복무하였다.
1943년 5월, 입당한 지 얼마 후에 개최된 한국독립당 전당대회에서 중앙감찰위원 5인 중 1인으로 선출되었다. 임시정부에 공군설계위원회(空軍設計委員會) 설치를 건의하였고, 그해 8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 군무부(軍務部) 직할로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공군설계위원회 부주임(주임은 군무부장이 겸임)이 되어 광복군 비행대 창설을 추진하였다.
1944년 「현단계 공군건설 개시공작을 미군과 합작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필리핀 등지에 한국 공군훈련소와 한미 혼성 연락통신부대를 설립하고, 한국항공대 편성 후 미 공군과 연합작전을 실행하는 것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1945년 3월 이청천(李靑天)·이복원(李復源)과 함께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에 장문의 당 군사정책안과 한국광복군 확대강화안을 제출하였다. 1945년 7월 한국독립당 4기 전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 15인 중 1인으로, 그리고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중앙상무위원 5명 중 1명으로 선임되었다.
1945년 광복 후 베이징으로 이동하여 임시정부가 11월에 설치한 화북한교선무처(華北韓僑宣撫處) 군사조장으로 활동하였다. 동시에 한국광복군 주화북판사처(駐華北辦事處) 관할의 북평잠편지대(北平暫編支隊) 책임자가 되어 일본군에 복무하였던 한인 청년들을 흡수 결속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12월 난립 단체들을 통합하여 만든 한국광복군 주평판사처(駐平辦事處)의 처장이 되어 화북지역의 광복군 관련 업무를 총괄하였다. 화북선무단이 베이징에 조직한 건국간부훈련반(建國幹部訓練班)의 명예 부이사장(副理事長)이 되어 그 운영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1946년 7월에 환국하였고, 이후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주역이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