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7 나해 연중33주일
사무상 1:4-20 / 사무상 2:1-10 / 히브10:11-25 / 마르 13:1-8
한나의 노래와 마리아의 노래
성공회 기도서에는 성무일과가 있습니다. 성무일과는 모든 교인들이 아침, 낮, 저녁, 그리고 자기 전 밤에 경문을 따라 기도드릴 수 있도록 하는 일상의 기도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는 수도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이 매일 그 시간이 되면 모여서 함께 바쳤던 공동기도문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수도자들뿐만 아니라 성직자들도 하는 매일의 기도로 확대되었습니다. 성공회는 종교개혁 시기 성무일과를 성직자와 수도자들만의 기도에서 모든 신자들도 할 수 있는 기도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개인적으로나 혹은 공동체적으로 성무일과를 하면서 일상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무일과 중 아침기도에는 즈가리아 노래가, 그리고 저녁기도에는 마리아의 노래가 나옵니다. 오랫동안 성무일과를 해 온 저는 이 두 노래가 주의기도 못지않게 친숙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성모 마리아의 노래를 라틴어 첫 낱말을 따서 ‘찬양하다’라는 뜻인 ‘망니피캇(Magnificat)’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내용과 형식이 오늘 예배에서 우리가 노래한 한나의 노래와 유사합니다. 성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망니피캇은 실제로 성모 마리아가 읊은 노래라기 보다는 루가 복음이 집필되기 전,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가 예배 때 부른 노래라고 합니다. 아마도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히브리어 혹은 아람어로 이 노래를 불렀고, 해외에 사는 유대계 신자들이 이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지중해 여러 교회에 전파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루가는 이를 수집하여 자신이 쓴 복음서에 실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망니피캇이 왜 한나의 노래와 유사하다고 하는 건가요?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생긴 교회는 오늘날처럼 27권으로 된 신약성경이 아직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모여 예배드릴 때 구약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이 말씀에 대해 설교할 때, 예수님 체험을 통해 깨달은 새로운 관점으로 구약을 재해석했던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그들은 사무엘서에 나타난 한나의 이야기와 한나가 어렵게 얻은 아기를 얻고 감격하여 부른 노래를 읽을 때 마다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으신 성모 마리아가 떠올랐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구약과 신약의 두 사건이 하느님의 구원섭리라는 커다란 역사의 연결점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이들을 통하여 그들은 자신들에게도 또 신앙의 후손들에게도 이어질 하느님의 신비한 구원 경륜이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노래했던 것입니다. 그럼, 이제 망니피캇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한나의 노래 그리고 그러한 노래로 주님을 찬양했던 한나의 삶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한나는 엘카나의 첫째 부인입니다. 그리고 엘카나는 한나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나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아이가 없다는 것은 가문의 입장에서 볼 때, 굉장히 큰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그 공동체가 일구어 온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유산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음을 뜻했기 때문입니다. 엘카나 가문은 그래서 가문을 이어줄 둘째 부인이 필요했고, 둘째 부인으로 맞이한 브닌나로부터 후손들을 얻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엘카나와 한나가 아무리 금슬이 좋다고 하더라도 가문 내 권력은 자연스럽게 둘째 부인인 브닌나와 그의 자손들에게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한나는 점점 힘없고 초라해져 갔습니다. 남편이 한나한테 “내가 당신한테는 아들 열보다도 낫지 않소? (사무상 1:8)”라고 위로했지만, 실질적으론 아무런 힘이 되어 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하느님께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고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그녀의 사정을 몰랐던 엘리 사제는 그녀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정신나간 사람이 아닌가 오해했지만, 그녀의 딱한 사정을 듣고 나선 그녀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녀에게 안심하라고 위로의 말을 건넵니다. 엘리 사제의 말에 한나는 위로와 힘을 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 다행히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힘입어 그녀는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아이를 얻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가문으로부터 잃어버린 지위를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이 아이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장차 이 아이를 하느님 일을 하는 사람으로 봉헌했습니다.
오늘 전례에서 우리가 노래한 한나의 노래는 그러한 그녀의 신앙이 담겨있는 찬양(Magnificat)입니다. 이 찬양에서 우리는 구약의 한나와 신약의 성모 마리아 간의 닮은 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볼 점은 그들 모두 하느님이 자신들에게 베푸신 놀라운 일에 경탄과 기쁨, 감사와 찬양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나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내 마음은 야훼님 생각으로 울렁거립니다. 하느님의 은덕으로 나는 얼굴을 들게 되었습니다. 이렇듯이 내 가슴에 승리의 기쁨을 안겨주시니 원수들 앞에서 자랑스럽기만 합니다. (사무상 2:1)” 마리아 또한 다음과 같이 찬양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렙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한 신세를 돌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 주신 덕분입니다. (루가 1:46-48)”
다음으로 그녀들의 찬양에서 보여지는 공통점은 하느님의 자비가 인간들이 규정한 차별과 서열화된 질서와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한나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땅바닥에 쓰러진 천민을 일으켜 세우시며 잿더미에 뒹구는 빈민을 들어 높이셔서 귀인들과 한자리에 앉혀 주시고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사무상 2:8)” 이에 비해 마리아의 노래는 단지 하느님의 자비만 노래한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의 정의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 배고픈 사람은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요한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루가 2:51-53)”
마지막으로 한나와 마리아는 자신들이 낳을 아이가 장차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그리고 정의와 구원을 실현할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고백합니다. 이로써 두 여인은 우리들에게 신앙의 어머니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이 세상을 영원불변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지금 내가 있는 현실, 그것이 좋을 때건 나쁠 때건 간에 그 상황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께 웅장한 성전을 가리키며 감탄할 때, 예수께서는 그 성전이 영원하지 못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장차 흉흉한 소문과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 사람들은 당황하고 절망에 빠질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 고통에 압도되지 말고 환란 이후에 올 평화의 세상을 희망하며 믿으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구약의 한나, 신약의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 모두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일관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은 결코 우리의 고통과 상처를 마지막 단어로 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살면서 고난의 순간이 오더라도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우리는 인내롭게 그 어려운 시기를 이겨 나갈 힘을 얻습니다. 그렇지만 그 방식은 인간의 방식이 아닌 하느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나의 삶, 그리고 우리의 삶 더 나아가 인류의 삶은 하느님 나라라는 최종적 목표를 향해 한 걸음씩 완성되어 나아갈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 각자가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걸으면서 하느님의 자비가 나를 돌보고 있음을 느낄 때마다 한나처럼 그리고 마리아처럼 “Mangnificat!” 즉 “당신을 찬양합니다!”라고 노래합시다. 만일 내가 배고프고 보잘껏 없이 되었다면 하느님의 자비는 나를 일으켜 세워주실 것이고, 만일 내가 교만하게 되었다면 하느님의 정의는 나를 겸손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나에게 큰 일, 즉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으로 충만케 해 주시려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임을 믿읍시다.
이 예배를 통해 우리도 한나처럼 그리고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느끼고, 기뻐하며, 찬양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