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지 10년이 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해 마음고생이 심하셨던 할머니는 내가 딸이고 머리가 짱구라는 이유로 나를 구박하셨다. 셋째인 나는 위로 오빠가 둘, 바로 아래 남동생이었다. 7살 터울의 막내 여동생이 생기기 전까지 아들 셋 사이의 귀한 딸 하나였지만 할머니는 딸은 무조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큰딸인 나를 유난히 사랑하셔서 할머니로부터의 차별이 상쇄되기는 했으나 나는 손자들만 유별나게 챙기는 할머니를 구습의 대표적 표상으로 느끼곤 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을 돌아보며 할머니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많았다. 우리 할머니야말로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사 전체에 빠지지 않는 동반자였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와 혼인한 순간 할머니의 삶은 이미 한 명의 여성 독립운동가가 되는 길에 들어선 것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먼저 내어주는 할아버지의 선택에 불만을 가지거나 훼방을 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늘 뒤에서 그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당신의 몫을 충실히 살아내신 것이다.
1915년 최운산 장군이 토성을 쌓을 때 강도를 높이기 위해 흙과 짚을 섞어 말이 커다란 연자맷돌로 켜켜이 다졌다고 전해주셨던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봉오동을 독립군기지로 건설하는 모든 과정에도 함께 하셨다. 손위 동서인 최진동 장군의 부인은 병약했고, 할머니는 수백 명의 장정을 먹이고 입히는 큰 부대의 살림을 혼자서 책임지셨다. 할아버지 3형제가 군무도독부와 북로독군부를 창설하여온 온 집안이 군사기지가 되었을 때도 아무 불만 없이 그 모든 살림살이를 해내셨다. 할머니는 독립군들의 군복이며 식사준비 등의 규모가 정말 컸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당신이 한 끼에 최고로 많이 밥을 해먹인 독립군의 숫자가 3000명가량이었다고도 하셨다.
독립전쟁을 치르는 할아버지는 자주 집을 비웠고 할머니도 급할 때는 직접 총을 들기도 했다. 당시 봉오동에 살던 아낙네들은 독립군의 가족이 많았고 대부분의 아낙네들도 총을 쏠 줄 알았다고 한다. 한 달 가량의 준비와 매복전으로 이어졌던 봉오동전투 당시, 최운산 장군 부재시에 산위에 자리한 독립군 부대의 본진에 첩보를 전하는 역할도 할머니가 해야 했다. 긴요한 첩보를 남에게 맡길 수 없었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 주야를 불문하고 본인이 직접 본부에 달려가곤 했다는 것이다.
남편을 사랑하고 존중했으나 할머니는 할아버지께 가끔 불만을 표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이 긴 세월 군사를 모아 훈련하고, 도독부, 북로군정서, 독군부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군단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모두 소모시키는 것을 보면서 아무런 불만이 없던 할머니였지만, 할아버지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일을 형님인 최진동 장군의 이름으로 처리하는 것을 볼 때는 가끔 불만을 표하셨다는 것이다. 항상 형님의 뒤에서, 군자금이나 성금을 내어놓는 일을 비롯해 모든 일에 형님을 앞세우고 마치 그림자처럼 지내셨던 할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허허 웃으시며 ‘내 일이 곧 형님의 일이요. 나는 아무래도 괜찮소’ 하고 답하셨다고 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고향을 떠나 평양에 자리 잡은 큰아들을 보러 오셨다가 갑자기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초상을 치른 후 할머니는 어린 자식들이 기다리는 봉오동의 집으로 돌아가시려 했으나 당시 중국의 정치 상황이 급변하던 때라 봉오동으로 돌아가지 못하셨다. 할머니는 평양에 머무르며 손자를 출산한 며느리를 도우셨고 6.25가 터지자 아들 내외와 함께 남한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1.4 후퇴 때 아기였던 큰오빠와 부모님, 할머니는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까지의 긴 여정을 대부분 걸어서 이동하셨다고 한다.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지만 일제 강점기와 6.25를 온몸으로 겪어내신 어른들의 삶은 언제나 그렇게 진하고 눈물겹다.
큰아들인 아버지의 선택을 따라 남한으로 넘어와 대한민국의 가장 남쪽 도시 부산에 정착한 할머니는 평생 봉오동에 남겨두고 온 자식들을 가슴에 품고 사셨다. 그러나 독립군 대군단의 살림을 이끌었고, 첩보를 전하고 총을 들기도 했던, 여성 독립운동가로 불러 마땅한 할머니는 수천의 독립군 조직을 이끈 독립운동가 최운산 장군의 아내답게 언제나 당당하셨고 마지막까지 할아버지의 업적을 밝히려고 노력하셨다.
▲ 남동생의 첫 돐 가족사진 속 할머니, 막내여동생이 태어나지 전, 최진동장군의 손녀인 6촌 언니도 함께
1961년 독립유공자로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의 서훈이 결정되었다는 통보를 총무처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당시 담당직원이 아버지에게 뒷돈을 요구했고, 격분한 아버지는 그 직원에게 주먹을 날렸다. 할아버지의 서훈은 보류되었고 세월이 무작정 흘러갔다. 1969년 할머니는 요로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집에 사본이 남아있지도 않았고 당시 아직 어렸던 우리 형제들은 그 존재를 알지 못했다.
2015년 가을 도서관에서 최운산 장군의 자료를 찾던 중 당시 연합부대 중 하나였던 ‘국민회군’에 대해 기록한 책 「항일국민회군」을 살펴보다가 이 '진정서'를 발견했다. 진정서의 입수 경로는 알 수 없으나 저자는 “최운산장군의 처 김성녀의 기록은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봉오동전투의 전황을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고 밝히며 그 당시 현장에 없었던 사람은 알 수 없는 내용이 실려 있으니 향후 자세한 연구가 되어야 한다.”는 주석을 달아 진정서를 참고자료로 첨부하였다.
다음은 진정서의 내용이다.
“본인은 독군부 총사령관 최진동의 제수이며, 도독부 독군부의 창설자이며 참모장으로써 모든 군자금을 맡아 조달하였으며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최진동 장군의 친제인 최운산(일명 만익)의 미망인이며, 도독부 독군부의 지략가이며 작전참모였고, 최진동 장군과 최운산의 친제인 최치흥(일명 명순)의 형수되는 사람입니다.
3형제가 혼연일체가 되어 도독부 독군부를 창설하여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시다가 작고하신 분들의 공적이 사록에 누락 및 오기된 사정을 시정코저 하오며, 물론 독립 운동한 것은 개인의 명예욕에서 행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본인은 국민과 후손들에게 최진동 3형제의 혁혁한 독립운동 투쟁사를 사실대로 명백히 밝히고자 아래와 같은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하나이다.
1. 최진동 장군은 1963년 3월1일에 독립유공훈장 단장(제374호)을 수여 받았음,
최진동 장군의 공적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한국독립운동사 제3권 및 제4권에서만도 수십 페이지에 달하도록 공적이 수록되어 있으나 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 복장이나 중장을 수여받고 있기에 사실을 공명코저 하오며, 모든 공적을 사실과 동일하게 남기고자 하오며 품격의 승격도 원하는 바입니다.
2. 최운산(일명 문무, 만익)은 1961년 1월 29일 공적심사위원회에서 대통령 포장으로 결정되었다고 총무처로부터 통보받은 사실이 있으며, 1968년 2월 12일 공적심사위원회에서 다시 심사하여 보류되었으며, 1969년 12월 17일에 총무처에 사료를 보완하여 제출하였습니다. 공적으로는 국사편찬위원회 발행 한국독립운동사 제3권 및 제4권과 공보차 발행 무장독립운동비사 및 대지의 성좌 제1부 망명지대와 애국동지회 발행 한국독립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 최치흥(일명 명순)은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회 발행) 및 국사편찬위원회 발행 한국독립운동사 제3권 및 제4권에 수록되어 있는 것과 같이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투사이다.
이와 같이 최진동 장군을 위시하여 3형제가 혼연일체가 되어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시다가 작고하시었는데, 조국광복을 맞아 독립운동 당시 하급지휘관 및 졸병으로서 생존한 독립인사가 자신의 공적을 과대 선전하기 위하여 허무맹랑한 사실과 왜곡되고 과장된 조작 사실로 인하여 독립운동사에 오점을 남겼으며 일생을 독립운동과 조국광복을 위해 생명과 재산을 총투입하여 투쟁하였으나 공적이, 사록에 수록이 뒤바뀌어져 있기에 반드시 사학가들에 의하여 사실이 입증되리라 보며 독립운동을 하시고 생존해 계시는 분들의 양심에 호소코자 합니다.
“가. 북만주 지역에는 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있었으나, 그 단체들이 왜 통합을 하여야 했으며, 통합 후에는 누가 총사령관에 취임하였으며, 통합 후에는 누가 자금을 지원하였는가요?
나. 북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 당시 누가 거처와 모든 장비 및 피복, 식량과 모든 군자금을 제공하였는가요?
다. 일본군에서 독립군의 근거지라 하는 왕청현 봉오동 일대와 서대파는 누구의 소유였는가요?
라. 도독부, 독군부에서 사재를 투입하여 서대파에 군정서겸 군사교련소를 창설한 사실을 알고 계시며, 창설 당시 자금은 누가 조달하였는가요?
마. 한국에서 북만주로 독립운동을 위하여 입만 하신 분 중에 누가 자금을 가지고 들어가셨던가요? 유일한 분으로서는 이시영선생(2대 부통령 취임한 분)이시며, 그 외에는 북만주에 거주하는 교민의 도움으로 지탱하였고, 그 외 자금은 누가 지원하였던가요?“
본인은 이상과 같은 사실의 진부를 가려서 한국독립운동사의 오점을 시정하고, 일생 독립운동에 헌신하시다가 작고하신 최진동장군 3형제의 명예를 위하여 흑백을 가려서 모든 역사의 산 증거에 의하여 사실대로 밝히고자 하여, 여러 사학가 제씨들에게 호소하며, 자에 진정서를 제출하나이다.“
할머니는 총사령관인 최진동 장군이 공적에 비해 격이 낮으며 더구나 부하들보다 수품이 낮은 사실을 안타까워하며 시정되길 요청하고, 독립군부대의 창설자가 최운산 장군이라고 적시하며 3형제의 독립유공자 수훈이 제대로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었다. 또한 할머니는 안타까움과 분노를 담아 누군가에게 묻고 있었다. 당시 생존한다는 이 독립운동가는 필력이 좋아 자신이 가담했던 활동을 감동적 소설로 그려 영웅을 탄생시켰고 다른 자료가 전무하던 한국에서 간도의 무장 독립운동사는 그를 비롯한 몇몇 영웅의 서사로 채워지게 된다.
할머니는 당시 ‘우등불’이라는 소설로 자신의 공적을 극화하고 정치인으로 성공한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에게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라고 호소한다. 청산리전투 당시 20세의 청년에 불과했던 그의 소설로 인해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의 활동뿐만 아니라 독립군 연합부대 북로군정서의 사령관 서일총재의 이름도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왜곡하고 과장한 독립운동사는 그를 독립운동가 출신의 성공적 정치인으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할머니의 말씀처럼 그 소설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역시 진실은 힘이 세다.
할아버지는 1977년에야 서훈되셨고,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서훈을 보지 못하고 1975년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할머니의 말씀처럼 역사학자들의 연구로 하나씩 사실을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청산리전투 당시 20살이었던 그는 단지 하급지휘관에 불과했으며, 청산리전투도 김좌진 장군의 영웅적 투쟁을 넘어 독립군 연합부대의 승리였다는 사실, 북로군정서도 할아버지가 주동 설립했으며, 군사연성학교도 최운산의 땅 서대파에 설립했고, 북로군정서가 그렇게 단기간에 완전무장을 할 수 있었던 배후에 최운산의 자금력이 있었다는 것까지 점점 역사적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제 할머니가 남기신 자료를 모아 할아버지의 삶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과 더불어 한 영웅의 온전한 동반자로써 여성 독립운동가의 면모를 충실히 보여주신 할머니의 삶을 새롭게 인식하고 재조명하는 작업도 시작해야겠다.
할머니와 다시 만나야 한다.
출 처 http://m.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