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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영적 장자여! 감동과 열망을 가지라!”
+ 본 문 : 요한복음 5장 1절 - 9절 (신약성경 149쪽)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아멘!
서로 인사하겠습니다. / “잘 되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하면 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면 잘 됩니다.” “믿고 기도한 대로 됩니다.”
언젠가 우리나라에서 유럽 미술전이 있었는데, 그 성화 전시실에 백발노인이 들어왔습니다.
그 백발노인은 외딴섬에서 작은 예배당을 지키던 목사님이셨는데, 성화를 감상하러 올라오신 것입니다.
이 그림 저 그림 구경을 하시다가 어느 예수님의 상 앞에 그의 발길을 멈추었고,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그 예수님의 모습은 갈대처럼 머리칼은 솟구쳐 있는 것이, 자신을 전혀 돌보지 못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크게 뜬 예수님의 두 눈은 그 누군가를 열심히 찾고 계시는 듯이, 살아 움직이는 눈이었습니다.
크고 깡마른 예수님의 손은 병든 자를 어루만지고, 상처 받은 자를 치유하시던 바로 그 손이었습니다.
남루한 옷차림에 신은 맨발이었습니다. 그 발은 바로 물 건너 산 넘어 잃은 자를 찾던 목자의 발이었습니다.
감격스런 마음으로 그 그림을 한참 쳐다보던 백발의 목사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말았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 뭉클하게 끓어오르는 그 무엇,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그림 앞에 목사님이 무릎을 꿇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늙은 종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목사님 곁에서 함께 그 그림을 지켜보던 한 여학생이 할아버지의 고백을 듣게 되었고 눈물을 보았습니다.
“할아버지, 저도 주님을 사랑해요.” 그리고 할아버지 목사님의 손을 움켜쥐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서로의 뜨거움은 통했고, 가슴과 가슴이 함께 주님 때문에 동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삽시간에 7 - 8명이 사람들이 그 그림 앞에 모여,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님 찬양을 시작합니다.
“이와 같은 때엔 난 노래하네. 사랑을 노래하네. 주님께. 이와 같은 때엔 손 높이 드네.
손 높이 드네. 주님께. 주님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성화전시실은 함께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망과 감동의 자리로 변해 버렸습니다.
세상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말합니다. “지금은 무한 고객 감동시대라.” 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지금, 주님을 향한 무한감동이 있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지금, 주님을 향한 무한열망이 있으십니까?
예배의 감동과 열망, 주님을 만나는 감동과 열망, 찬송하는 감동과 열망, 기도하는 감동과 열망 말입니다.
주님을 향해 사랑의 감동과 열망이 있고, 영혼구원을 향한 감동과 열망, 비전이 불타오르는 감동과 열망.
주님 앞에 자신의 거룩한 소원을 내어 놓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열망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지금 예배드리는 이 시간, 우리 주님께서 그런 감동과 열망이 있는 사람들을 눈을 크게 뜨고 찾고 계십니다.
움직이지 않는 물, 고여 있는 물은 보기는 좋을지 모르나 역사하는 힘이 없습니다.
물이 농토로 흘러 들어가야 농사를 지을 수 있고, 물이 힘차게 흘러 주어야 발전소가 전기를 생산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이 성령의 감동과 열망으로 움직일 때에, 품성함의 기적이 활발하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요한복음 5장 1절 - 9절 말씀을 가지고 “영적 장자여! 감동과 열망을 가지라.” 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받고, 우리의 심령이 감동과 열망으로 요동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어떤 성경 주석가는 성경에서 기적을 빼고 나면, 앞 껍데기 뒷 껍데기 두 장만 남는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창조의 기적인 창세기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성육신의 기적과 공생애의 구원역사의 기적,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예수님의 재림 기적으로 인한 우리 성도들의 영광의 부활의 기적으로 끝이 납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일곱 가지 기적 가운데, 세 번째로 나타나는 예수님의 기적사건입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이 수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기적을 표적이라고 하여, 영적인 의미가 분명한 일곱 가지만 골라서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본질을 바꾸실 수 있는 분이요. 질적인 변화는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다음 네 번째 오병이어의 이적사건도, 예수님은 양적인 변화를 가져오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이 외에도 우리 예수님은 작은 것을 크게, 적은 것을 많게 하시는 이적을 많이 베푸셨던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명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흔히 우리나라에서는 명절만 되면, 도시에서 시골 고향으로 내려가느라 한바탕 귀향전쟁을 치루곤 합니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은 그 반대입니다. 시골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명절을 지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명절이 고향중심이라면, 이스라엘의 명절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 성전 중심이었습니다.
바로 그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명절에,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 예수님의 표적 속에 숨은 영적이고, 상징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베데스다 연못! 병든 사람이 물이 동하는 그 연못에 들어가면 무슨 병이든 낫게 된다는 신통한 연못입니다.
이 사실은 입소문을 타면서 각색 병든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구름떼처럼 몰려 장사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바로 그 베데스다 연못에 찾아가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성경의 예수님은 언제나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찾아가 만나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누구를 찾아 가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시 권력가들을 찾아가 자기 삶의 보장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명절날 축제 속에서, 희희낙낙 즐기는 사람들을 찾아가 함께 즐기시지도 않았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축제와는 거리가 먼 곳에서 절망과 한숨을 끌어안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다리 저는 사람, 맹인, 중풍병자들, 가난에 지쳐 무리들,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간 수고하고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아파하시는 분들 계십니까?
사업의 실패, 가정의 아픔, 자녀들로 인한 마음의 무거운 짐, 남편과의 불화를 안고 오신 분들 계십니까?
몸과 마음 - 삶이 아프신 분이 계십니까? 지금 이 시간 우리 주님이 여러분을 찾아오셨습니다. 믿습니까?
오늘 본문 2절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 이 말씀에 의하면,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 연못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동쪽엔 실로암 샘으로 가는 샘문이 있고, 서쪽엔 망대문이 있고, 남쪽엔 배설물을 버리는,
일명 똥문이라고도 하는 분문 있고, 북쪽에는 성전에 이르기 전 양을 사고파는 양문이 있었습니다.
양문은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할 때, 가장 먼저 수축했던 문입니다. 무너진 나라와 무너진 백성들,
무너진 신앙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 제사, 즉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느혜미야가 세운 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께서는 지금 여러분 모두를 양문으로 안내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무엇이 무너졌습니까? 양문이 수축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가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리석은 사람, 망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사업과 가정이 힘들다고, 죄 지었다고 예배에 나오지 않습니다.
스스로 양문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예배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여러분의 양문이 다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무너진 예배가 세워지고, 예배 성공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양문에 찾아 오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지금 이 예배에 찾아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왜 찾아오십니까? 양문 곁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양문 곁에 베데스다 연못이 있었습니다.
여기 “베데스다” 에서 “베” 는 집이란 뜻이고 “데스다” 라는 말은 “은혜, 자비”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자비와 은혜의 집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자비의 집, 은혜 충만한 집 베데스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배시간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여러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이 베데스다 연못에 특별한 전설이 하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 4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아멘!
가끔 한 번씩 연못의 물이 솟구치면 천사들이 물을 움직인다고 생각했고, 그 순간 제일 먼저 뛰어들면,
그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 전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몸이 아픈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습니다.
그래서 전설 하나 믿고,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며, 수많은 병자들이 거기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전설은 전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 가족이 가끔씩 친구 목사님들 가족과 함께 놀러 갈 때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늘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특히 궁금증이 많은 한 목사님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63빌딩 수족관 앞에서 이 아이가 대뜸 묻더랍니다. “왜 물고기는 입만 벙긋거리고 말을 못해요?”
목사님이 장난삼아 말했습니다. “자이 자이 자슥아, 너도 물 속에 머리 한 번 처박고 있어봐야.
아, 이래서 물고기가 입만 뻐금 뻐끔거리기만 하고 말을 못하는구나 할거야!”
한 이년 후, 목사님 친구가족이 다시 모였습니다. 목사님이 그 아이에게 장난삼아 한 말이 생각이 나서,
미안한 마음으로 이번엔 목사님이 궁금증이 많은 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왜 물고기가 말을 못하는지,
이제 알고 있니?” 그랬더니 아이가 이렇게 되받아칩니다. “목사님! 목사님도 너도 물 속에 머리 한 번,
처박고 있어봐야. 아 이래서 물고기가 입만 뻐금 뻐끔거리기만 하고 말을 못하는구나 하실겁니까!”
목사님이 심는 대로 거둔 것입니다. 그래서 잘 가르쳐야 됩니다.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은혜의 집 베데스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고관대작들이 아니라 난치병 환자들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고칠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 물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가는 사람의,
그 어떤 병도 다 낫는다는 정말 우수꽝스럽고 모순된 전설의 현장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은혜의 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오직 예수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통쾌한 결론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 은혜의 집인 베데스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또 하나의 넌센스가 있었습니다
은혜는 아무 대가나 노력 없이 받는데 은혜의 집에 와서도 은혜와 상반되는 짓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물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가야 된다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물이 동할 때 재빨리 몸을 날려 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은 물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물이 동할 때 1등으로 들어가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건강한 사람입니다. 아니면 신체에 쬐금 이상이 생긴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이 언급하고 있는 환자는, 세 종류 - 맹인, 다리 저는 사람들, 중풍병자입니다.
맹인이 어떻게 물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다리 못 쓰는 사람이 주섬주섬 일어서면,
이미 몇 사람 물 가운데서 수영을 하고 있습니다. 중풍병자가 걷기는 틀렸고 몸을 딩굴딩굴 굴려 보면,
이미 사람들은 수건으로 몸을 닦고 나오고 있습니다. 들어갈 방법과 힘이 없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들,
뇌졸중환자들이 끊임없이 무슨 생각을 하느냐? “내가 먼저 들어가기만 하면 될텐데.” 하고 말합니다.
베데스다가 정녕 그 이름에 합당하게 자비의 샘물이 되려면,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가장 필요한,
사람부터 우선적으로 배려하고, 궁극적으로 모두가 은총을 누리도록 넉넉히 베풀었어야 옳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규칙에 의해 베데스다가 운영되었다면 거기에는 ‘38년 된 병자’ 가 있을 턱이 없습니다.
그러나 베데스다에는 그런 협력과 배려와 보살핌이 아닌, 철저하게 능력에 따른 경쟁만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은혜를 베푸실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도 아무도 예수를 바라보지 아니하고,
오직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며, 물이 동하면 이번에는 내가 들어간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은혜의 집에 어울리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입니까? 여기 모여 있는 난치병 환자들은,
당시 유대인의 정신적 상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의 집, 교회에 모여 있는,
오늘날의 신앙인의 영적인 상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바로 내 얘기요 너의 얘기라는 겁니다.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는 소경들. 신령한 세계가 보이지 않는 영안이 열리지 않은 사람들,
영감을 잃어버린 사람들, 수많은 사단의 공격을 받고 살지만 그것을 물리칠 힘, 영력을 잃어버린 사람들,
하나님의 자녀 된 삶의 능력을 잃어버린 중풍병자들, 사랑과 자비의 혈기가 마른 가련한 손길들...,
베데스다 못가의 이 난치병 환자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 나의 모습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베데스다로 가 보십시다. 물이 움직일 때 1등으로 연못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들입니다.
정작 난치병 환자들은 들어갈 힘이 없습니다. 이게 베데스다의 모순이요. 인생의 딜렘마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야 하고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의인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한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힘이 전혀 없습니다.
내가 구원받으려면 누군가 싸워서 이겨야 한답니다. 그런데 전혀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나는 안 된다는 절망과 좌절, 낙심과 포기, 낙망..., 그곳이 바로 베데스다요. 인생 현장입니다.
이러한 문제의 현장에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다만 생존경쟁에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스스로 싸워 이기겠다고 바라고 있습니다.
진정한 위기는 여기에 있습니다. 영적인 위기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친히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여기 한사람은 이천 년 전 그 환자가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응시하셨단 말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내 죄를 보십니다. 내 아픔을 보십니다.
나의 문제를 살피십니다.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길과 마주치십시오. 이 세상 권력자와 과학자들이,
다 모여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 우리 주님이 1초만 당신을 도와주시면 그 문제는 해결됩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얼마나 엉뚱한 질문입니까?
아마 보통 사람 같으면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병신이 되어있으니 네가 나를 조롱하는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때 “네가 나를 놀리냐?” 그랬을 거예요.
“그것도 질문이라고 하냐?” 라고도 할 수 있지요. 예수님은 이때 기껏해야 33살인데 이 환자는,
태어나자마자 병이 들었어도 38살은 되었을 겁니다. 예수님보다 나이가 많아도 한참 많찮아요?
충분히 그럴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말은 대단히 의미 깊은 질문입니다.
38년 동안 앓아누웠던 이 환자를 보십시오. 그 눈에는 희망의 빛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몸은 거동할 힘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때문에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말은 참으로 낫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소망이 부글부글 끓어올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이 예수님의 질문은,
“이 베데스다 물이 동해야 낫는 것이 아니고, 네 심령의 물이 동해야 하느니라.” 이 말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진정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있느냐? 죄악 속에 파묻힌 그대여,
참으로 거기서 헤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느냐? 오랜 세월 앉아있던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겠다는,
열망이 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도전의 말씀입니다. 38년 된 환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이 물음은 그를 일깨우는 소중한 물음이었습니다. 가슴에 물을 휘젓는 값진 질문이었습니다.
심령에 불을 붙이는 강력한 도전이었습니다. 물이 끓어야 쌀이 익어 밥이 되고, 물이 끓어야,
고기가 익어 반찬이 되듯이 심령이 끓어야 기도가 익어 응답이 되고, 소원이 익어 축복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 여러분은 이 시간 하나님을 향하여 가슴이 동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향하여 사랑의 물이 끓고 있습니까?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습니까?
은혜 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지만, 사실 천당 가는 은혜만 받고 다른 은혜 받고 싶지 않은,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특히 성전건축 할 때 은혜 받을까봐 겁내는 사람 - 얼마든지 있지요.
베데스다 물이 아니라 심령의 물이 동하는 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도로 네 입이 동하게 하라. 내가 채우리라. 네가 참으로 변화되기를 원하느냐?
네가 참으로 거듭 나서 달라지기를 원하느냐? 네가 진정 예수 만나기를 원하느냐?
네가 진정 낫기를 원하느냐? 네가 심령이 하늘을 향하여 말씀을 향하여 동하고 있느냐?
소원이 적은 사람은 믿음도 적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절망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나는 힘이 없다고 낙심하는 것은, 우리 힘의 원천인,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낫고자 하는 소원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인 바클레이는 “절망에 주저앉아 있는 자도,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는 자도,
게으름에 널 부러져 있는 자도, 하나님의 도움과 기적을 절대로 볼 수 없다.“ 고 말했습니다.
죄가 있다고 낙심하는 것은 십자가 위에서 보혈 흘리신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 하나님 앞에 나와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고 고백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합니다. 은혜를 덧입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우리가 요청하기만 하면,
우리의 죄를 기억도 하지 않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잊어버리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이상한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타락한 우리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기억하지 아니하겠다고 말씀하시면, 기억하지 아니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여러분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너의 실패 속에서 새롭게 시작하기를 원하느냐?” “너의 심령에 성령의 물이 동하고 있느냐?”
“정말로 거룩한 열망이 이글거리고 있느냐?” “아멘! 주 예수여! 주님만이 나의 소망입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내가 달라지기를 원합니다. 나의 심령이 은혜를 사모하여 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주님을 향하여 끓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을 향하여 불이 붙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오시옵소서. 이 백성이 새로워 지고자하는 소망으로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달라지게 하옵소서. 부흥되게 하옵소서. 이 땅이 당신으로 끓게 하소서! 불이 붙게 하소서.“ 아멘!
오늘 본문에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물음에 38년 된 중풍병자는,
“아이구, 선생님 살려주세요.” 한다든지 ‘낫고 싶고 말구요.’ 한다든지 ‘한번만 걸어본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동문서답을 합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러니 내가 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나를 좀 밀어 넣어주시든지,
아니면 내 손을 좀 붙들어 물이 동할 때에, 저 못에 넣어주십시오.” 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구세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조력자로만 바라보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항복하고 나아와 나의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나를 도와주실 내 인생의 조력자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길이 전혀 없습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병 낫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원 대신에,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남에 대한 원망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 병이 낫지 않는 것은 내 탓이 전혀 아니올시다.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고, 그래서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가는 바로 그 사람 때문에,
나는 이렇게 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불행이 남의 존재로 말미암는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의 근원을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서 찾으려는 것과 똑같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열쇠는 다른 사람의 손이 아니라, 바로 너의 손에 있다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환경을 바꿈으로 행복을 맛보려는 것은 뿌리 없는 나무에서 열매를 거두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 - 이 말을 원문에 보면 “나를 도와줄 사람들이 없다.” 가,
아니라 단 한사람도 가지지 못했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영어로 “I have not a man” 입니다.
“지금 나는 나를 도와줄 그 어떤 사람, 단 한사람도 가지지 못했다.” 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한줄기 희망도 없을 때 “One man - 단 한사람” 의 소망마저 사라졌을 때,
바로 그 순간, 우리 예수님께서 38년 된 중풍병자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막다른 절박한 상황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때 하늘을 우러러 보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주님이 나를 찾아오십니다.
여러분, 세상은 우리의 못남을 비웃고, 우리의 죄를 조롱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지금 나의 사정을 있는 그대로 아뢰는 사람에게, 우리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시고 용납하셨습니다. 고쳐주셨습니다.
♪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 (찬송가 214장 후렴)
“그래, 지금의 네 모습 그대로 내가 다 받아주마! “그러므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아멘!
38년 된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는 말씀을 듣고 일어났습니다.
자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걸어갔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서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물에 들어가기 위해 아귀다툼을 하고 싸우는 종교가 아닙니다.
안식일에 가만히 누워 있거나, 영적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 눈치나 살피는 종교가 아닙니다.
마귀와 질병을 대적하고 치유하는 종교입니다. 병들어 신음하는 곳을 찾아가는 종교입니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는 종교입니다. 내가 흐트러 놓은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종교입니다.
사람을 병들게 하고, 사람을 죽이는 율법을 깨부수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선포합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합시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라. 네 자리를 들어 걸어가라!” 아멘!
여러분의 심령이 끓어올라 뜨겁게 움직이고, 나와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라. 네 자리를 들어 걸어가라!” 고 선포하는 믿음으로,
나도, 너도, 교회도, 가정도 치유되고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