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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혁주의신앙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이천우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서 교회가 부를 수 있는 찬송에 대하여 생각함
이천우 목사
에베소서 5장 19절 /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한국교회의 찬송가 역사
한국 교회가 부르는 찬송가는 여러 번의 변신이 있었습니다. 알기로는 1893년에 ‘찬양가’가 처음 나온 후 각 교단별로 찬송가가 출판되어 사용되었으며, 그 후 1945년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당시 사용되었던 신정 찬송가, 시편 찬송가, 그리고 부흥성가를 하나로 묶은 '합동 찬송가'가 발행이 되어서 모든 교파가 통일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 후 1962년에 새로이 찬송가를 발행해야 할 필요성으로 인해 '새찬송가'가 나왔으며, 1967년에 합동찬송가가 개편된 ‘개편 찬송가’가 나왔습니다. 이때 통일을 이루었던 찬송가는 다시 교파의 이해 관계와 각 교회가 가진 입장에서 선택한 찬송가를 부름으로 인해서 한국 교회는 한 찬송가를 불렀던 데서 다시 여러 찬송가가 불렸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하나의 찬송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고 1983년인 기독교 100주년에 때를 같이하여서 지금의 우리가 사용하는 통일 찬송가인 '찬송가'가 발행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찬송가의 역사에서 보듯이 우리나라에서는 해방 시점에서 비록 다른 찬송가들과 함께이지만 시편 찬송가가 사용이 되어서 교회에서 불렸었습니다. 그러나 온 교회가 하나의 찬송가를 부르고자 하는 데 따른 찬송가의 발행으로 시편 찬송가는 교회에서 더 이상 불리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시점에서 교회는 통일 찬송가인 '찬송가'를 예배 찬송가로 삼아서 주일 예배에서 부릅니다. 그리고 주일 예배 외의 예배적 성격을 갖는 집회나 성경공부 집회에서는 복음송가가 많이 불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상 주일 예배에서도 복음송가가 대부분 불리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것은 찬송가 곡의 대다수가 복음송가인 까닭입니다.
찬송의 대상
우리는 찬송을 합니다. 이 찬송은 '찬미', 또는 '찬양'으로도 불리는데, 찬송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신약에는 48회, 그리고 구약에는 무려 351회 가량 나옵니다. 이 단어의 전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하나님께", 또는 "여호와께", "여호와를" 등의 말이 함께 따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찬송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찬송가입니다. 찬송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 한 분밖에는 찬송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찬송을 받으실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참으로 위엄 있으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만 찬송을 드려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복음송가
그런데 찬송으로 이름 붙여진 곡에서 복음송가는 예배 찬송이 아닙니다. 지금 찬송가는 부를 수 있는 노래요 복음송가는 우리가 부를 수 없는 노래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송가를 부를 수 있으며 그렇듯이 또한 복음송가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찬송은 각기 특성을 띠고 있습니다. 복음송가는 대중전도 집회용으로 만든 찬송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람으로 무디, 웨슬레가 있는데 이 분들이 전도 집회를 하는 데는 함께 따라다니며 복음 찬송을 작사하고 작곡하여 집회에 참석한 대중들이 쉽게 불러서 전도 집회의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중전도 집회용으로 만든 찬송인 까닭에 대개의 가사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속죄의 은혜와 그에 따르는 믿음과 그 신앙고백적인 자세와 삶인 회개와 성결과 충성과 제자의 삶, 내세의 소망 등 다양합니다.
찬송은 목적과 의미에 맞게 올바른 자세로 불러야 함
복음송가는 분명 예배 찬송과 더불어서 ‘신령한 노래'의 하나이긴 합니다. 그렇지만 그 찬송이 만들어진 이유와 목적이 있는 만큼, 그래서 예배 찬송의 노래가 아닌 각 개인의 신앙고백적인 노래인 만큼 하나님께서 주님 안에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와 그 감사의 마음에서 부르면 됩니다.
하지만, 예배의 의식(儀式)의 개혁에서 찬송의 개혁을 하고자 하는 것은 일상에서, 그리고 성도의 교제에서 복음송가를 부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서의 찬송을 제대로 바르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에 찬양 그 자체의 정의와 성경적인 의미부터 알아야겠습니다. 성경에서 ‘찬송’이라는 말과 함께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는 말인 ‘찬양’, ‘찬미’이 모든 말은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덕을 칭송한다”는 것인데, 이를 노래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찬송은 이런 것이기에 여기에 담고 있는 가사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권능을 높여 세상에 선양(宣揚)하는 노래 말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찬송은 단지 노래하는 것으로에 그 역할과 기능이 있지는 않습니다. 찬송은 구약 경륜 하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신“제사가 의미하고 있는 정신”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할 때는 “노래한다”는 분위기와 그 기분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구약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가 지닌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에 의한 속죄의 은혜와 경배 및 헌신의 이해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찬양은 "예배의 요소"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따라서 예배에서 찬양이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찬양은 이것이 갖는 위치에서 하나님께 예(禮)를 다하여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결코 가볍게 다루어져 불릴 수 없으며 찬양하는 자세 또한 이것이 우리의 주[왕]이신 하나님께 갖는 것인 만큼 천박하게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이에 찬양하는 곡의 가사는 참으로 신중하게 작사되어야 하며, 작곡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합당한 찬양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현재 우리네 교회가 예배 찬양으로 사용하는 찬송가는 645곡이란 많은 곡을 수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00장 전후의 곡 외에는 대부분이 예배 곡으로서는 합당하지 않은 곡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사실은 대부분이 복음송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개혁교회의 예배 찬송가인 시편 찬송
역사적 전통을 잇는 개혁교회는 예배시(禮拜時)에 찬송의 규범으로 시편 찬송(Psalter)을 예배 찬송가로 삼았습니다. 먼저 시편은 구약 교회 성도인 이스라엘이 부른 찬송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언어인 히브리어로 시편을 찬송하여 하나님을 높여 선양하였습니다. 그 후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 성경은 당시 헬레니즘 문화권에 살던 일반 대중들이 사용하는 코이네 헬라어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 나가시는 일과 관련하여 필연적인 일로 성경은 다른 나라 말로 번역되어 그 나라 말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으며, 해서 그 나라 말로 시편을 찬송하는데 여기에는 그 나라의 음악적 문화가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의 히브리인들이 시편에 곡을 붙여서 부르던 곡은 역시 다른 나라 말들이 낳은 문화와 같은 산물인 음악으로 옮겨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칼빈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스트라스부르크와 제네바 교회에서 부를 시편 찬송을 위하여 프랑스인 루이 부르좌(Louys Bourgeois)로 하여금 작곡하도록 했습니다. 강약의 박자를 가진 서양 음악은 강약의 대조가 뚜렷한 거센 엑센트를 가진 서양말과 잘 어울립니다. 이렇게 해서 불린 시편 찬송가는 그 나라만이 아니라 사실 모든 나라의 교회가 자기네들 나라의 언어로 번역하여서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한 각 나라는 자기네의 음악적 문화를 사용하여서 그것으로 시편 찬송가를 만들어 찬송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에 따라서 서양 음악을 통해서든 또는 우리는 우리의 음악적 특성으로든지 간에 시편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시편으로 하나님을 찬송한 것은 구약 교회에서나 신약 교회에서나 동일합니다. 물론 신앙을 가진 음악가들이 예배에 적합한 찬송곡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찬송을 할 수도 있습니다만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신약 교회에서도 곧 그 교회가 초대교회이건 또는 종교 개혁 이후의 개혁교회이건 간에 시편으로 찬송을 하였으며 이것이 교회의 예배 찬송의 전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사에서는 시편 찬송이 4세기 이후 교회가 로마에 흡수되고 국교가 되면서 점차 그 순수성을 잃어버리다가 7세기 이후에는 교회 음악의 세속화 속에서 시편 찬송을 부르는 정신이 희미해져가고 사라져 갔습니다만, 16세기의 종교 개혁이 있고 존 칼빈이 제네바 교회에서 편찬한 제네바 시편 찬송가(Geneva Psalter)를 통해서 다시 개혁교회 안에서 중요한 찬송가로 자리 잡고 사용이 되었습니다. 비록 다른 개혁교회들인 영국이나 스코틀랜드 그리고 미국에서도 자체적인 '시편 찬송가'를 편찬하여서 불렀을지라도 '제네바 시편 찬송가'는 개혁 교회의 '시편 찬송가'의 역사(歷史)에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 1장이 바로 '제네바 시편 찬송가'의 가락으로 부르는 찬송입니다.
예배 찬송의 변질
그러나 교회는 그 후 후대에 이르러서 시편 찬송가는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찬송과 대체하여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시편 찬송가에 다른 가사를 첨부하거나 시편 찬송가의 가사를 전부 삭제하고 개인적인 신앙의 체험으로 찬송을 지어서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노래들은 더욱 후대가 되면서 새로운 찬송가 편집에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새로운 실험적인 가락을 넣어서 대중적인 여흥을 띠워 흥겹게 찬송을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정신이 후대 미국 교회에 전해져서 찬송의 본래 특성인 장엄하고 엄숙하고 거룩하고 정결한 음악성은 사라지고 지극히 감성적이거나 빠른 템포에 의한 튀는 곡조의 노래들로 점차적으로 교회 음악이 채워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시편 찬송가의 부패 역사는 대중전도 집회를 이끄는 자들에 의해서 불러진 복음송가의 대다수가 오늘날 우리가 예배에서 부르는 찬송가에 포함됨으로 해서 찬송가가 주일 예배에 부르기에 적합하지 않은 노래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배 찬송으로 시편 찬송가를 불러야 하는 이유
예배 찬송으로 시편 찬송가를 부르고자 하는 것은 시편 찬송가의 곡들이 시편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그대로를 가사말로 하고 곡으로 하고 있어서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을 섭리하시며 행하신 구원의 은혜로운 일들을 말하며, 그에 대한 성도의 기도와 감사와 기쁨을 노래하고 하나님을 높여 경배하는 내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느 신앙의 음악가가 만든 찬송곡보다 가장 신앙적입니다. 물론 신약 시대에서는 단지 시편만을 찬송곡으로 삼을 수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예배에서 시편을 찬송하는 것만이 아닌 그보다 더 많은 것으로 찬송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복음의 풍부한 내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을 암송하고 그 시편으로 찬송하여 거룩한 노래를 부를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난 노래를 불러 생명의 주님을 찬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만을 찬송곡으로 삼는 제한을 두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시편으로 찬송하는 것을 결코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이 시편으로 찬송하며 또한 시편 찬송과 같은 신앙적인 찬송을 담은 찬송곡을 담은 찬송가를 예배 찬송으로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예배 찬송 실태에서 갖는 바람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회가 사용하는 찬송가로서는 그런 찬송가가 없습니다. 지금의 찬송가 645곡에서 예배 찬송으로 부를 수 있는 곡을 선택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정도입니다. 만일 과연 시편 찬송가를 포함하여서 하나님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의 영광과 그에 대한 신앙을 바르게 찬송할 수 있는 더욱 풍부한 내용을 지닌 찬송가가 나온다면 교회는 그 찬송가를 예배 찬송가로 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찬송가가 지금은 나와 있지를 않습니다. 비록 우리나라의 모든 교회가 보편적으로 사용하고는 있지 않지만, 그래도 예배 찬송가로 사용할 수 있는 찬송가로서 우리가 부르고 있는 친숙한 찬송가곡에 시편을 가사로 사용한 모출판사에서 발행한 시편 찬송가가 있고 구하면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 만으로서는 오늘날에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것보다 더 나은 찬송가가 없는 현실적 상황에서는 이 시편 찬송가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것이 그래도 다행입니다. 제네바의 시편 찬송가가 있었듯이 교회가 공예배에서 부를 수 있는 예배 찬송가다운 찬송가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그 날이 속히 와서 예배 찬송으로 합당하지 않은 찬송가를 인하여 매 예배 때마다 고민하고 마음 아파하거나, 고육지책으로 현재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통일 찬송가 외에 시편 찬송가를 따로 소유하여 찬송하거나 독자적으로 예배용 찬송가를 제작하여 사용하는 불편이 해소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불편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 바람을 갖는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에서 찬송가의 곡으로 자리하고 있는 모든 곡들이 제자리의 위치에서 바르게 불리기를 바라는데 있기에 말입니다.
해서 말입니다. "시1)와 찬미2)와 신령한 노래3)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4)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에 있는 그 날이 속히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습니다. 이는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7-18)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바인 술이 아닌 성령의 지배에 의해서 불리는 것이며, 어리석음에서가 아닌 지혜에 의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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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편을 악기를 사용하여 연주하며 부름을 의도하고 있슴
2) 시편이 의미하고 있는 하나님이 온 세상에 널리 행하신 일을 칭송하여 노래하여 부름을 의도하고 있슴
3) 개역 및 개역개정성경, 새번역성경, 우리말성경은 ‘신령한 노래로 번역하고 있으나, 공동번역 ‘영가’, 현대어성경 ‘거룩한 노래’, 쉬운성경, 바른성경, 현대인의성경, 킹제임스흠정역 및 한글킹제임스 ‘영적인 노래’로 번역되고 있다. 어떤 표현으로 번역하고 있든지 간에 이 노래는 성령의 충만에 의한 감동하심에 의해 고무된 성도들이 서로 화답하며 부름에 있는 영적인 노래임을 의도하고 있다.
4) 개역 및 개역개정성경, 바른성경은 ‘너희(의) 마음으로’라고 번역하였으며, 쉬운성경, 우리말성경, 현대인의성경 ‘마음으로’. 공동번역 ‘진정한 마음으로’, 새번역성경 ‘여러분의 가슴으로’, 킹제임스흠정역 ‘마음 속에서’, 현대어성경 ‘마음 속에서 우러난’으로 각각 번역하고 있다.
*2021년 5월 2일, 9일 주일예배 / 개혁주의신앙공동체 ‘개혁주의신앙’ 127번, ‘질문과답’ 50번(일부) 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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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혁주의신앙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이천우
첫댓글 오래전 글이지만, 교회개혁과 관련된 좋은글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