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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7. 묵상글 (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 겸손한 죄인인 우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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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7.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겸손한 죄인인 우리 <2023.07.07. 05:54>
며칠 전 늘 식당 건너편에 하릴없이 모여 담배 피고 떠들고 하는
조선족 남자들에게 가서 몇 마디 얘기를 나누고 오는데 지나가던
동네 어른이 저에게 ‘쟤네들한테 잘해주지 말라.’고 하는 거였습니다.
별로 잘해준 것도 없는데, 그 조금도 잘해주지 말고 냉대하라는 말이지요.
왜 그러는지 말하지 않아도 제가 알지만
그 말을 듣고 제가 ‘그래도 잘해줘야지요.’라고 대답하고는 더 생각했지요.
내가 여기에 와 있는 이유가 뭔가?
내가 <여기 선교 협동조합>을 세운 이유가 뭔가?
내가 <여기 밥상>을 하는 이유가 뭔가?
우리 조선족 형제들을 포함하여 다 여기에 와 있는
이주민들을 위해 나도 여기에 온 것 아닌가?
‘여기’가 지금 내 존재 이유이고 온 이유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설사 여기에 와 있는 이주민들이 아무리 밉상이어도
저는 그들을 위해 왔기에 그들은 제 존재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제 존재 이유로 삼은 것은
오늘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범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세리 마태오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고,
당신을 찾아온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를 함께하십니다.
그런데 이를 본 바리사이들은 주님의 이런 행위를 못마땅해합니다.
왜 그들을 자기들처럼 냉대하지 않고 오히려 함께하느냐는 거지요.
이에 주님께서는 그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게 합니다.
하나는 사랑의 존재 이유입니다.
엄마는 아기가 없으면 엄마도 아닙니다.
스승도 제자가 없으면 스승도 아닙니다.
의사도 환자가 없으면 의사가 아닙니다.
스승은 말썽꾸러기도 사랑하고 그를 올바로 이끌 때 훌륭한 스승이고,
의사도 환자가 난치병 환자일수록 그를 고쳐 줄 때 명의라고 하는 법입니다.
사실 사랑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면
그래서 돈만 아는 선생이나 의사라면 말썽꾸러기 학생이나
돈은 안 되고 치료하기 까다로운 환자는 포기하거나 배제할 것입니다.
사랑할 때 너는 나의 존재 이유이고,
너 없으면 나는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욕심의 사람은 내게 필요한 사람만 내 곁에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주님 말씀이 또 생각게 하는 것은 누가 죄인이고,
누가 의인이고 죄인 아니냐? 하는 점입니다.
우리 인간 중에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겸손한 죄인과,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교만한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은
우리 모두를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인데 이 말씀에
겸손한 죄인은 오늘 세리와 죄인들처럼 그 부르심을 따르고,
교만한 죄인은 오늘 바리사이처럼 주님을 비판하고 따르지 않겠지요?
이것을 오늘 묵상하는 겸손한 죄인인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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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7.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오늘 <복음>은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다람쥐처럼 행실로만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단순이 겉으로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인격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전환입니다. 곧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의 방식이요, 용서와 자비의 삶의 방식이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마태 9,10 참조) 방식입니다. 죄인이기에 단죄하고 처벌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눈과 방식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눈과 방식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요, 나아가서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로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되는 것”(로마 8,29;필립 3,10)이요, “그분의 형상을 지니는 것”(1코린 15,49)이요, “그리스도를 입는 것”(로마 13,14;갈라 3,27;콜로 3,10;에페 4,24)을 말합니다. 곧 단순히 도덕적 치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방을 넘어서는 신비주의적 차원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단죄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식사를 하신 것은 단순히 그들과의 타협도, 그들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였습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다.’고 비난하는 것은, 마치 의사가 병자들과 함께 있다 하여 비난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을 나누는 것이요,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 놀라운 감격인가? 이는 죄인을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보다 ‘먼저’ 당신을 건네주십니다.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해야 할 입니다. 오늘도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마태 9,9)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마태 9,12)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라시는 바를 알게 하시고,
당신이 바라시는 것을 바치게 하소서.
희생제물이 아니라, 제 행실을 바치게 하소서.
제 자신이 자비의 산제물이 되게 하소서.
당신께 바치되, 제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내어놓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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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7.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더불어 사는 기쁨
우리는 기왕이면 깔끔하고 멋있어 보이는 사람, 아름다운 사람과 만나길 원합니다. 얼굴도 잘생기고 돈도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호감이 가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은총이요 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매력이 흘러넘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갈수록 밥맛인 사람도 있습니다. 겉보기와는 너무도 달라서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모두를 공평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다가 세금 징수원으로 천대받는 사회계급에 속해 있는 마태오라는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당시 세리는 매국노처럼 인식되는 사람으로 자국민에게 세금을 거둬들여 로마에 바치는 나쁜 놈이었습니다. 그런 질이 좋지 않은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준은 분명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길을 가시다가 부르셨다는 것은 하루하루 삶이 펼쳐지는 현장에서 부르셨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삶의 현장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길이란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에 이르는 통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현장인 이 세상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 세상은 간이역입니다. 종착역은 하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천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필이면 악명 높은 사기꾼이나 탐욕이 가득한 사람으로 간주 되어 공개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던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 집의 식탁에 앉아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자리를 함께하셨을까요? 세리는 부정한 수단과 방법으로 돈을 버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주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혐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자기가 번 돈을 가치 있게 쓸 줄을 몰랐던 인색한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고 따돌림받던 계층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야말로 질이 좋지 않은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누구보다도 앞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품은 넓습니다. 그 품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문을 크게 열어도 스스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바리사이들이 꼭 그러했습니다. 당시 바리사이들은 배운 사람, 품위를 가진 사람으로 인정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위 노는 물이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인정해 주는 것은 다행이지만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처신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마태오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바로 영적 성장이 멈춘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안주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따돌림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고 그곳을 떠나는 것이 두려웠고, 그곳을 떠나면 죽는 줄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을 생각하면 떠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은총의 날, 진정한 행복의 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여전히 옛 생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는 안주를 탈피하여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안주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큰 품을 우리의 마음으로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고 하시고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할 때,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게 될 때 거기서 치유하시고 용서하시는 사랑의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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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7.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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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7.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 삶의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
-버림, 떠남, 따름-
하루하루 살기로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하루하루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미하며 살기로 했습니다.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기로 했습니다. 하루하루 사랑하며 살기로 했습니다. 하루하루 내 성경의 한쪽을 써가며 때로는 내 미완의 성경을 렉시오 디비나하며 살기로 했습니다. 하루가 한쪽, 내 나이 곱하기 365일 하면 내 삶의 성경 쪽수가 나옵니다.
저에겐 성경이 셋입니다. 하나는 신구약성경, 하나는 자연성경, 하나는 내 삶의 성경입니다. 그러니 렉시오 디비나 성독의 대상은 셋이 됩니다. 말그대로 렉시오 디비나의 확장이요 관상적 삶의 실현입니다. 그래서 요즘 제 독서의 대상은 아름답게 산 이들의 평전評傳입니다. 성경을 읽듯이, 삶의 스승에게 배우는 마음으로 아름답고 치열하게 산 이들의 평전을 읽습니다.
또 면담성사를 위해 수도원을 찾는 이들이 저에게는 살아 있는 성경책처럼 참으로 소중합니다. 성경을 렉시오 디비나 하듯 귀기울여 경청합니다. 때로 성경을 안 듯이, 보물을 안 듯이 감격에 벅차 안기도 합니다. 얼마전 그림 전시회를 갖는다는 옛 초등학교 교편시절 영적도반 교사의 소식을 듣고 반가웠습니다.
70대 초반에도 영원한 현역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이번 전시회의 제목은 “사랑의 찬미”라 하니 이름도 멋집니다. 돌고래가 바다에서 솟구치며 뛰노는 찬미의 모습을 신비로운 아름다움으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하루하루 아름답게 사랑의 찬미의 삶의 성경을 써가는 자매님입니다.
요즘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중에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자체가 하나의 살아있는 성경이 된 것입니다. 하느님이 없는 아브라함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중에 참 파란만장하게 펼쳐지는 삶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희로애락, 생노병사가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아브라함의 생애도 종반에 치닫는 느낌입니다. 백이십칠 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을 때 빈소에 들어가 사라의 죽음을 애도하며 슬피 우는 모습에서 아브라함의 인간적 면모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어 동굴에 자기 아내 사라를 안장합니다. 참으로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다음 묘사가 아브라함이 얼마나 하느님 중심의 순종의 삶에 충실했는지 말그대로 순종의 축복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늙고 나이가 무척 많았다. 주님께서는 모든 일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
이런 노년의 삶이라면 얼마나 축복된 삶이겠는지요! 이젠 아브라함에게서 그의 아들 이사악으로 자연스럽게 초점이 이동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자연스럽습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우연이 아닌 섭리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는 후손들입니다. 아브라함의 뒤를 잇는 이사악이요 사라의 뒤를 잇는 며느리 레베카입니다.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세대교체입니다. 다음 묘사가 참 아름답습니다.
‘이사악은 레베카를 자기 어머니 사라의 천막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그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사악은 레베카를 사랑하였다. 이로써 이사악은 어머니를 여읜 뒤에 위로를 받게 되었다.’
어제 성무일도시 새벽 독서의 기도중 2사무6,1-23 까지는 그대로 다윗의 치열한 삶이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그대로 다윗의 삶의 성경이야기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치열하게 사랑한 삶이었는지 그와 그의 아내 미칼에 대한 다음 대목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다윗은 아마포 에폿을 입고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다윗 임금이 주님 앞에서 뛰며 춤추는 것을 사울의 딸 미칼이 창문으로 내려다보고 비웃었다...그 뒤 사울의 딸 미칼에게는 죽는 날까지 아이가 없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세관에 앉아있던 마태오가 주님을 만남으로 마태오에게는 획기적 전환점이 됩니다. 이제부터 주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주님을 따름으로 새롭게 펼쳐지는 마태오 삶의 성경이야기입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마태오가 부름받지 않았다면, 우리가 부름받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낼른지요.
믿는 이들에게는 만약도, 우연도 없습니다. 알게 모르게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 방법대로 최선, 최상의 길로 인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태오는 무의미하고 허무하고 무지했던 삶에서 벗어나 주님의 제자공동체에 참여함으로 존재감있고 의미충만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삶의 허무와 무지에서 벗어나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보다 큰 축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의를 제기하는 바리사이들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우리가 평생 담고 살아야 할 금과옥조의 말씀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세상에 넘쳐나는 주님도 자기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무지의 병자들이요 무지의 죄인들입니다. 구원의 출구는, 답은 단 하나뿐입니다. “나를 따라라” 병자요 죄인인 우리를 부르시는 자비하신 주님께 날마다 응답하여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주님을 따를 때 주님은 우리를 치유하시고 용서하시며, 날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자비와 지혜, 찬미와 감사로 가득한 우리 삶의 성경을 쓰게 하실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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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7.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튼튼한 이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 정도는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병원에 가 보셨지요? 그들은 의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왜 의사를 필요로 할까요?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요? 튼튼한 사람인가요? 약한 사람인가요? 우리는 정상인가요? 아니면 비정상인가요?
정상인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누가 정상인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천재 발명가 아인슈타인은 정상인인가요? 천재 음악가 베토벤은요? 천재적인 예술가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요? 정상인인가요? 우리보다 뛰어난 사람들이라서 정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 정상은 주님 한 분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상으로 다가가는 비정상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허물을 지니고 있습니다. 단점도 지니고 있고, 실수도 하며 죄를 저지릅니다. 이런 테두리를 벗어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허점을 마귀는 이용합니다. 호시탐탐 우리를 죄의 사슬에 묵혀두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튼튼한 사람이 아닌 약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의사가 되어주십니다. 치유와 사랑을 베풀고 빛의 따스함으로 아버지 하느님께 인도합니다.
또한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고 말입니다. 우리 자신이 튼튼한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모두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비롭지 못하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은 튼튼하다고 말하며 다른 이들의 고통이나 아픔은 외면하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약한 우리 안에 주님께서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치유의 은총이 우리는 더욱 겸손하게 만들어 겸손함이 자비가 되어 우리 안에서 밖으로 퍼져 나오기를 희망합니다.
그냥 그러고 싶은 날
그냥 고장 나고 싶은 날
그냥 멍때리고 싶은 날
그냥 맛난 거 실컷 먹고 싶은 날
그냥 뜨거운 물에 들어가 있고 싶은 날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날
그리고….
그냥 기도하고 싶은 날
그냥 울고 싶은 날
그냥 주님 안에 머물고 싶은 날
뭐든 좋습니다. 그 모든 날에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대의 오늘은 어떤 날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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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7.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하시던 자매님의 체험 수기를 읽었습니다. 이 자매님께서는 이 병동을 방문하면서 죽음을 앞둔 환자를 위해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자매님께서 곧 운명하실 것만 같았습니다. 이분은 주님 믿기를 계속 거부하셨던 분이라 특별히 신앙적인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마지막 순간에 꼭 주님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얼마 사시지 못할 거예요. 그러나 겁내지 마세요. 자매님 생명을 예수님께 드리면 영원히 살게 될 겁니다.”
병원 침대에 누워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셨던 이 자매님께서는 숨을 헐떡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당신 같은 사람이면 빨리 만나 뵙고 싶어요.”
‘나’는 예수님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즉, 나를 통해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닌 나만 세상에 드러내려고 합니다. 나를 통해 예수님이 보이지 않으니 더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질 뿐입니다.
말로만 주님을 증거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말만이 아닌, 행동으로도 주님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 주님의 품 안에서 하나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드러낼 수 없는 이유만을 이야기합니다. 능력과 재주가 없어서, 죄 많은 죄인이라서, 시간이 없어서, 언젠가 할 것이라면서…. 그러나 주님께서는 세상의 기준으로 당신을 따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향해서도 “나를 따라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마태오는 곧바로 일어나 주님을 따릅니다. 그는 죄 많은 죄인으로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마태오를 가리켜서 의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를 불러내서 당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커다란 인재로 만드셨습니다.
능력과 재주가 주님을 따르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죄의 많고 적음 역시 주님을 따르는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모든 것을 다 떠나 주님을 첫 번째 자리에 놓을 수 있는 마음, 무조건 지금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결단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야 주님의 도구로 세상에 주님을 환하게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나를 통해서 세상은 주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할 일이 참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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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당신이 일하는 곳보다 당신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가 더욱 중요하다(마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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