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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신 8:1-10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CisYlGSXPGs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간 살았습니다. 초창기에는 애굽 사람들과 관계가 좋았고 편안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애굽이 7년 흉년을 당했을 때 요셉의 지혜로 위기를 넘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요셉을 모르는 왕들이 나왔는데, 그들이 볼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위협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애굽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었습니다. 위협을 느낀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는 법까지 만들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께서는 구원자 모세를 보내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니 광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 한 포기 제대로 나지 않는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1년 내내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물이 없어 살 수 없는 곳이고 그러니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곳이고, 낮에는 섭씨 45도 이상의 고온이고 저녁에는 쌀쌀하게 추운 곳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그 길로 인도 하셔서 40년을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처럼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상황과 환경으로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데,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하는데,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신 것처럼 육체도 질병이 없이 건강하게 하시고, 물질적인 어려움도 없이 풍족하게 하시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하시면 좋을 텐데, 오히려 반대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러시는 것일까요?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설교는 그 이유를 통해서 이 시대의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이 왜 광야와 같은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낮추셔서 겸손케 하시려고
2절을 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여기서 ‘너를 낮추시며’를 영어 성경 킹 제임스 버전에서는 ‘to humble 겸손하게 하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생활을 40년간이나 시키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고 겸손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잠 6:16-19입니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17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18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19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을 피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 중에 첫 번째가 교만한 눈입니다. 하나님은 교만을 가장 싫어하시기에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벧전 5:5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베드로 사도는 우리들에게 겸손하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겸손한 마음과 자세를 갖는 것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데 있습니다. 왜 우리는 마음대로 겸손해질 수 없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아담의 교만한 피가 우리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마음은 깨져야 합니다. 교만을 깨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초라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초라한 내가 어떻게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예배와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고난을 통과하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세상에는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 겸손해집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면서 이 두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낮추시고 겸손하게 하셨습니다. 호두의 단단한 껍데기가 깨져야 부드러운 알맹이를 먹을 수 있는 것처럼, 교만이 깨져야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교만함은 절구에 넣고 찧어도 잘 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고난이 계속해서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빛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완악한지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의 고난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교만을 깨셨던 것입니다.
고난의 필요성, 광야의 필요성을 두 가지 비유로 설명하겠습니다. 우리 어릴 때는 북어를 먹기 위해서 북어를 다듬이돌 위에 올려놓고 방망이로 두들겼습니다. 방망이로 한 번만 치는 것이 아닙니다. 북어가 부들부들해질 때까지 칩니다. 북어가 부들부들해지면 그것을 간식으로 먹기도 했고 반찬으로 먹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고난이라는 방망이로 치셔서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또 하나의 비유는 조각품입니다. 조각가가 큰 돌을 가지고 작품을 만든다면 어떻게 할까요? 조각가는 큰 돌 속에서 작품을 바라보고 작품에 불필요한 부분을 정과 망치로 두들겨서 깨고 그라인더로 갈아라버릴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작가는 작품을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광야가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잘 아는 유명한 의사에게 꾸준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사는 차갑게 거절했습니다. 자신은 유능하니까 무능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에게나 전도해서 위로해주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의 무지와 오만함 때문에 전도를 그만 두었습니다. 그런데 수년이 흐른 후, 그 의사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그는 고개 숙여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암에 걸린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고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라며 애원을 하더랍니다. 사람은 등 따뜻하고 배부르고 모든 것이 편안할 때는 교만해집니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나면 자기가 의지하던 것들이 산산조각 나기 때문에 겸손히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김병삼목사님은 겸손이 주는 유익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①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존귀하게 하십니다. 벧전 5:6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여러분! ‘두더지 잡기’라는 오락을 아시죠? 기계에 구명이 몇 개 뚫려 있는데, 거기서 두더지 머리가 나올 때 방망이로 때리는 게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만하여 스스로를 높이면 고난이라는 망치로 치십니다. 그 이유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기 때문이고 겸손한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은 대적하시고 겸손한 사람을 때가 되면 높여주십니다.
②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잠 11:2입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김병삼목사님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교만은 자아가 살아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자는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의 부족함을 알기에 하나님의 지혜를 구합니다. 반면에 교만은 사람은 잘난 척하며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에게는 욕이 오고 겸손한 사람에게는 지혜가 옵니다.
경제신문에 나온 자동차 세일즈 왕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나는 출근할 때, 신발 끈을 매며 자존심을 두고 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세일즈를 하면서 자존심 상하는 일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자신이 준 명함을 가지고 밥을 먹고 이를 파는 사람도 있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렇게 생각을 했답니다. ‘저건 단순히 종이에 불과하다. 나는 자동차를 팔려고 여기 온 것이지, 내 자존심을 확인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은 교만함을 내려놓은 사람입니다. 겸손히 사람을 대하니 그것이 지혜가 되어서 자동차 세일즈 왕이 된 것입니다.
③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부흥의 특권을 주십니다. 대하 7:14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부흥이 무엇입니까? 철저한 회개를 통해서 메마른 곳에서 샘물 나는 것이 부흥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지고 영적으로 황무한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부흥은 어떤 사람에게 옵니까? 악한 길에서 떠나고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겸손한 사람에게 옵니다. 하나님은 광야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고 겸손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를 고난이라는 방법으로 낮추시고 겸손하게 하셔서 부흥을 주십니다.
2. 시험하여 옥석을 가리시려고
2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40년 광야생활을 하게 하신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을 시험하여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 또 그들이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시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시험'은 유혹이 아니라 Test입니다. 이 시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올무에 빠뜨리는 유혹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지 아닌지를 테스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시려고 종종 우리를 Test하십니다.
어느 한 집에 아버지와 아들이 살았습니다. 아들에게는 친구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놓고 말했습니다. “애야, 너는 친구가 많은가 보구나?”, “예, 아버지, 저는 친구가 많아요.”, “그래, 나는 친구가 하나 밖에 없는데, 그래, 하나만 물어보자. 내 친구는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버리는 귀한 친구인데, 네 친구들은 어떠니?”, “예, 아버지, 제 친구들도 저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친구들이에요. 다 의리 있는 친구들이에요.”, “그래, 그러면 내 친구와 네 친구들을 시험해 보면 어떻겠니?” 아버지와 아들은 새끼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가마니에 둘둘 말아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짊어지고 각자의 친구 집을 방문했습니다. 먼저 아들의 가장 친한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친구 집에 도착한 아들은 힘차게 대문을 두드리고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친구! 나야. 내가 실수로 사람을 찔러 죽였어. 이 시체를 잠시만 맡아 주면 고맙겠네. 나는 너의 가장 친구잖아!” 그 말을 들은 친구는 문도 열어주지도 않고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 같은 친구를 둔 적이 없어요.” 하고는 나와 보지도 않았습니다. 아들은 그 다음 친구 집에 갔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들의 친구 중에 누구도 가마니를 맡아주지 않았습니다. 이제 아버지 차례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친구 집에 도착하여 큰 소리로 “친구! 나야, 내가 실수로 사람을 죽였어!”라는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그 친구가 문을 열면서 “어서 들어와. 걱정하지 말아. 내가 자네 친구 아닌가?”라고 하며 아버지를 집으로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짊어지고 간 시체가 아닌 새끼 돼지를 가지고 그 날 저녁 잔치를 벌였습니다. 진실한 친구는 평소에는 구분하지 못하지만 어려울 때에는 알 수 있습니다.
진짜 믿음은 고난 중에 알 수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똑같습니다. 똑같이 기도하고, 똑같이 찬양하고, 똑같이 봉사합니다. 그러나 고난과 역경이 찾아올 때, 생각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할 때, 내 마음이 힘들고 괴로울 때, 믿음의 진위가 드러납니다.
광야 길은 빠르면 일주일에 통과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은 40년이나 걸렸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 하나님의 테스트에 불합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12명의 정탐꾼을 보내셔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셨습니다. 정탐군들이 돌아와서 보고할 때 두 패로 나뉘었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그 땅은 과연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긴 한데, 그곳에 거하는 족속들은 너무나 장대하고 강력해서 자신들은 그들 앞에 메뚜기 같다고 보고했습니다. 그 보고를 들은 백성은 불신앙에 사로잡혀서 밤새도록 통곡하고,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까지 원망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들을 그리로 인도하여 망하게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상반된 보고를 했습니다. 그들이 강하지만 그들의 신은 그들에게서 떠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보고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고, 20세 이상의 장년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 생활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테스트에 통과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광야를 통해서 사람들을 테스트 하시고 그 사람들의 믿음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옥석을 가리십니다. 우리가 광야를 통과할 때 그때가 우리 믿음이 진짜인 것을 보일 때입니다.
3. 가르쳐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려고
‘광야’는 히브리어로 ‘מִדְבָּר’(미드바르)인데 ‘말하다’라는 뜻의 ‘다바르’에서 유래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모세를 만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고, 그들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셨습니다. 광야는 침묵이 흐르는 적막한 곳이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음성을 큰 소리로 듣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에서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은 ’네게 가르치려 함이니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게 하신 것은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광야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셨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할 때 만나를 먹었습니다. 만나는 작은 씨앗처럼 생겼는데, 그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꿀꽈배기나 맛동산 같은 맛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만나는 농사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공급해 준 것도 아닙니다. 만나는 하나님이 매일 아침 하늘에서 내려주셨습니다. 광야는 삭막하고 메마른 곳, 농사도 지을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서 하나님께서 40년 간 하늘 만나를 먹여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배워야 했습니다.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공급자이시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했던 것처럼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지정학적으로 보나 지형이나 기후를 볼 때,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견딜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시기에 적합한 땅이었습니다. 가나안은 남북으로는 240km, 동서로는 75km입니다. 우리나라 강원도 정도 되는 작은 땅입니다. 이스라엘 동쪽은 아라비아 사막이고, 서쪽은 지중해 바다입니다. 남쪽은 네게브 사막이고, 북쪽은 레바논 산지입니다. 가장 높은 산지는 해발이 2,815m이고, 가장 낮은 곳은 사해 바다로 -421m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215m입니다. 예루살렘 감람산은 해발 826m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사해 바다의 거리는 약 19km인데, 고도의 차이가 약 1,200m입니다. 19km이면 우리 교회에서 직선거리로 여의도 63빌딩에도 미치지 못하는 정도인데, 고도가 1,200m 차이라면 어느 정도로 험한 지형인지 그림이 그려지시지요. 남쪽의 1년 강우량은 30mm인데, 북쪽의 강우량은 1,300-1,600mm입니다. 계절이 바뀔 때는 아라비아 사막에서 모래 바람이 불어옵니다. 동풍인데, 동풍이 불면 유대 광야의 풀들이 하루 만에 말라버립니다.
이스라엘은 주변 국가와의 관계도 복잡합니다. 열악한 환경을 가지고 있는 나라임에도 역사에서 중심을 이루었는데, 그 이유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가 만나는 지점이었기 때문입니다. 강대국들이 정복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수천 년 동안 강대국에 짓밟혔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 주변 3,000Km 반경은 이스라엘을 원수로 역기는 무슬림국가들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불리하고 좋지 않은 환경을 가지고 있는 땅에 거하게 하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시켜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특별한 장소인 것입니다.
할렐루야교회 김상복 원로목사님은 인생의 초기에 광야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1939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가족과 함께 산정현 교회를 다녔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과 조만식 장로님 같은 분들의 순교 신앙을 보고 자란 그는 학교 조회 시간 때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 서 있었으며, 해방 후에는 “자신의 영웅이 누군지 쓰라”는 문제의 답으로 ‘김일성 장군’이 아닌 ‘예수님’ 이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일 성수 때문에 학교에서 매를 수 없이 맞았습니다. 6.25 전쟁 때 부모님과 동생들을 두고 남하하여 온갖 시련을 겪었습니다. 인생 자체가 수많은 매듭이 있는 밧줄 같았습니다. 겨우 하나가 풀리면 또 다른 매듭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피난을 온 부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싶었습니다. 형님들은 “서울이 어디라고 네가 서울엘 간다는 거냐? 네가 서울에 아는 사람이 있냐? 아니면 돈이 있냐? 말도 안 된다!”라고 강하게 반대했지만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밤기차를 타고 무작정 서울로 향한 그는 차 안에서 하나님께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서울에 아는 사람도 없고 돈도 한 푼 없습니다. 저에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하나님이 계시니, 하나님이 도와주세요, 하나님이 저 공부시켜주세요!”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는 경복고등학교에 합격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등록금이 없었습니다. 등록 마지막 날까지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분명하게 마음에 들렸습니다. “너 학교에 가서 돈 없다고 해라.” 그는 학교에 가서 교장선생님 등 7명의 학교 대표들이 모인 자리에 가서 인사를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평양에서 왔습니다. 부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이 학교에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등록금이 없습니다. 저 공부하고 싶습니다. 공부시켜주십시오.” 결국 등록금을 면제 받고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고 서울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김상복 목사님은 광야의 길을 걸어왔으나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였습니다.
김목사님은 「고난은 있어도 절망은 없다」는 책에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사람의 일생에 어려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시련과 아픔이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고난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께 소리 높여 기도할 수 있는 기회와 동기가 되는 것이지요. 가난해도 괜찮고, 부모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은혜의 빛이 비칩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과정이 훗날 하나님의 종으로 쓰시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과 준비 과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난 후에는 하나님께 깊이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멘!
‘광야를 지나며’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 있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광야에 서게 하십니다.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십니다. 어두운 밤과 같은 광야는 참 깁니다. 하나님은 나를 고독하게 낮아지게 하시고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다음의 가사에 답이 나옵니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님은 광야를 통해서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내 빛이 되시고, 내 친구 되시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나는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나는 광야에 서 있습니다. 나는 주님 손만 잡고 살아야 합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곳이기에 하나님만 의지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광야와 같습니다. 우리는 간혹 또 어떤 사람은 자주 눈물 골짜기를 통과합니다. 우리는 광야에 서 있으며 우리도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도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4. 마침내 복을 주어 찬송케 하시려고
여러분! 위대한 미술가 미켈란젤로는 잘 아시겠지만 ‘버톨도 지오바니’는 잘 모르실 것입니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스승입니다. 미켈란젤로가 14세가 되었을 때 버톨도의 문하생이 되었습니다. 그가 미켈란젤로를 테스트를 해 보니까 놀라운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승이 묻습니다. “너는 위대한 조각가가 되고 싶으냐?”, “예! 그렇습니다.”, “위대한 조각가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저의 재능과 기술을 더욱 열심히 닦아야 합니다.” 그때 이 스승이 남겨준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네 기술만으로는 안 된다 너는 네 기술을 무엇을 위하여 쓸 것인가에 관해서 반드시 결정해야 한다.”
스승은 어린 미켈란젤로를 두 곳에 데려가 조각상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먼저 간 곳은 술집 이었습니다. 술집입구에는 아름다운 천사의 조각상이 있었습니다. 스승은 그 천사상을 가리키면서 “이 조각은 아름답다. 그러나 이 조각상을 만든 조각가는 이 조각상을 술집을 위해서 사용했단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스승은 다시 어린 미켈란젤로를 거대한 성전 입구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세워진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너는 이 천사의 조각상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느냐? 아니면 아까 그 술집 입구에 있던 조각상이 더 마음에 드느냐? 두개의 조각은 모두 똑 같은 조각이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워졌고, 또 하나는 술 마시는 사람들의 쾌락을 위하여 세워졌단다. 너는 네 기술과 재능을 무엇을 위하여 쓰기를 원하느냐?” 이때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대답 했다고 합니다. “스승님!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쓰겠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이런 정신으로 작품 활동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놀라운 재능을 더하셨던 것입니다.
16절을 보겠습니다.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난의 장소인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1차적으로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그냥 고생 시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고 마침내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서혜경씨를 아시나요?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까 세계 3대 피아니스트로 나옵니다. 서혜경씨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5학년인 어린 혜경이를 새벽 5시에 깨워 “혜경아, 체력이 약해서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단다. 운동도 큰 공부이다.”라며 어린 혜경이에게 줄넘기를 200회씩 시켰습니다. 줄넘기 운동이 끝나면 두 시간이나 피아노를 치게 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보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와서 밤늦도록 피아노를 쳤습니다. 어머니는 피아노 옆에서 뜨개질을 하면서 피아노 연습을 감시했습니다. 건성으로 건반을 두드리면 “너 음이 왜 자꾸 틀리니?”하면서 지적했습니다. 어린 혜경이는 친구들처럼 자유롭게 뛰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때문에 그럴 수 없었습니다. 피아노 대회를 앞두고 레슨을 갔다 오면 어머니는 물었습니다. “너 자신 있니? 충분히 연습했니?”, “예, 자신 있어요.” 그 대답을 들은 어머니는 방 불을 껐습니다. “자, 이제 오늘 연습한 것을 한번 쳐보아라.” 불 없이 연주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어린 혜경이는 할 말이 없어 밤이 늦도록 연습을 했습니다. 결국 서혜경씨는 이러한 엄청난 훈련을 통해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는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혹독한 훈련의 결과였습니다. 어머니께서 훈련을 시킬 때는 어머니가 미웠지만 그 결과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신앙의 훈련도 이런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광야에 두십니다. 우리를 광야로 이끄셔서 가르치시고 훈련하십니다. 광야 생활이 힘들지만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난의 장소인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는 1차적인 목적은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2차적인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7-10절을 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10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이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하게 하셔서 아름다운 땅을 주십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마침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10절 하반절에 나옵니다. “마침내 복을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송하리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광야를 통과하여 마침내 복을 주시고 결론은 우리가 그 복을 받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 광야, 광야에 서 있네 ”라는 제목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광야와 같은 환경을 허락하시고 광야와 같은 훈련을 하시는 이유를 살펴봤습니다.
1. 낮추셔서 겸손케 하시려고
2. 시험하여 옥석을 가리시려고
3. 가르쳐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려고
4. 마침내 복을 주어 찬송케 하시려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