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숙자 글 모음 2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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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을 산
한숙자
누가 산야에 저리곱게
물감을 뿌렸을까
형형색색 세상 물감
온통 산으로 이사를 한다
너도 나도 뒤질세라
산야는 온통 북새통이다
미인대회 여는 걸까
서로 잘났다 폼을 잡는다
계곡물 시샘 하느라
졸졸 소리 높여 흐르고
상수리나무 밤나무 바람을
참지못해 하품한다
노을빛 물든시월
서리맞은 단풍잎 햇빛비춰
더욱 붉은빛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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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파도
한숙자
외로운 섬
파도가 결결이 고독을 읽고 간다
파도는 언제나 되돌아가고
섬이 홀로 어두워 갈 때
푸른 별빛 은은히 굽이치면
등성이 보리밭도 푸른 물결이다
오고 가는 바람결
어느덧 푸렁푸렁 물들었다
사람들은 가끔 찾아와
이국의 여정을 더듬는다.
나 홀로 외딴 섬에 올라
이 세상에 없는 임을 그리워하며
나는 진한 추억을 떠올린다
갈매기 떼가 깃을 치며
일으키는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며
바다의 신화를 쓴다
나의 한 생이 신화 속으로 가물거리고
우리네 마음도 연초록 청 보리밭
발길은 터벅터벅 이국의 여정을 더듬는다
님 계신 곳은 너무 멀어
파돗소리는 아득한 환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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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개망초 꽃
한숙자
아무도 눈길 한 번 보내지 않았지만
소망을 끌어 모아 전신으로 꽃 피었네
무의미의 자태 모금모금 꽃의 한바탕
그대 드디어 꽃 무데기
밤 되어도 초롱초롱 별빛 마주하여
은밀히 의미를 빚는 하얀 함성
가슴 가슴 우리들은 울렁거렸네
전생을 허허벌판 떠돌던 조그만 흔적들
고운 영혼들이 꽃으로 치장하며
이렇게 순백으로 왈칵 터지는 웃음
저 꽃들을 보며
서러워하지 않으리
가신임도 되돌아 와
저리 환한 꽃에 깃들여 있으리
어둠의 층층을 넘어
내 가슴에 여울지는 꽃의 벌판
뒤돌아보면 멀리 확연한 너울거림
꽃, 개망초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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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운님
한숙자
님이 오신다기에
치맛자락 부여안고
버선발 달려 가 보니
오색 찬란한 꽃구름 타고
오시여 가시는 듯
내게 아니 오시는 그님
저 멀리 수평선만 가물가물
아, 자꾸 부서지누나
물을 향한 파도의 연정은
외기러기 홀로 울면서 떠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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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리움
한숙자
도려낼 수도 약을 바를 수도
그렇다고 딱히 처방전이 있는 것도 아닌
암덩이 하나 가슴으로 키운다
가슴앓이 할 때마다 도지는 아픔
밤새 보채다 새벽닭 울음으로 지새면
가시기는커녕
되려 가슴 죄며 다가오는
그리움이라는 아픈 마음에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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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금낭화
한숙자
동짓섯달 기나긴 밤을
꼬깃꼬깃 주름 접으며
한없는 기다림일레라
생의 마디마디
그리움의 망울 매달아
간절한 염모를 내거는 지등
임은 천 리 밖에 계시는가
쑥국새 울음 앞 산 능선을 넘어
어둠 짙은 계곡을 건너고
봄바람 한 줄기 굽이쳐 오는데
동구 밖에 마중 나서리
가슴 활활 열고, 붉으레 볼 익혀
전설의 설원을 넘던 선구자인 그대
마중 길에 청사초롱 줄줄이 매달리라
주머니 주머니 꼭 모아 쥔 사랑의 금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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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느티나무
한숙자
고향 동구 밖에 서 서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
그냥 그대로 향수의 나부낌이다.
조선 왕조만큼 긴 세월 키를 높이며
사대의 역사와 고을의 전설을
나이테로 여미는 한 채의 우리네 무속신앙
우리는 늙어가도 그는 날마다 싱싱하다
시야에 차 오르던 앞 산 성황당 고개
가난한 사람들 발자국 소리로 귀 열고
밤바다 은하의 물굽이를 익히며
아침을 파다하게 받드는 느티나무
마을 수호신으로 넉넉한 풍속 여미어
모진 바람 막아서는 느티나무
고향 떠난 사람들의
그리움으로만 채워 가는 우리들의 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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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님의 기도
한숙자
적막한 산사의 깊어 이슥한데
스님의 목탁소리 산 계곡에 낭낭하고
기도로 보살의 애간장은 숯처럼 타오른다.
저승과 갈림길을 허위허위 넘어가서
먼저 보낸 지아비 혼혼한 정리마냥 가없는 기다림인데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훔치면서
돌계단 내려오는 허적허적 내 인생은
보살의 발걸음 마냥 서러워 느꺼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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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달맞이꽃
한숙자
달빛 처연하여도 눈물은 없다
멀리 떠나는 강줄기가
처억처억 애절함을 대신할 뿐
아득한 언덕위에
이 세상 서글픔 다 거두어 선 자태로
너는 홀로 달맞이꽃
마디마디 한의 맺힘인가
온 세상 풍상을 품어 안고
너는 홀로 쓸쓸한 밤을 흔드는가
네가 지면 비로소
먼동이 트고 해가 떠오른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운명이 아닌가
너는 모든 밤을 홀로 지새는 달맞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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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산
한숙자
진경산수로 산은
화적 일번지다
붓끝 하나로 진경을 둔갑시키는
노화사의 손
검붉은 바위 곁에 허리 휜 늙은 소나무
산이 내 사이로 말없는 폭포소리
손끝에서 수묵향기로
산은 그려졌다 지워졌다
개벽을 하고 있다
붓 한 자루
신의 손에 쥐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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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살아지는 것
한숙자
귀한 물건이 쓰리기 통에
버러져 있어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미제 파이렉스 금테접시라
부잣집 식탁위에나 올라
귀한 대접을 받던 물건이다
감히 없는 가정집에서는
갖고 싶어도 부러워만 했지
돈이 없어 갖지 못한 물건들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젊고 잘살때는 귀한 대접을 받지만
늙고 병들면 요양원 신세나 지며 살다가
마지막 삶을 마치는 날
한 계절 환한 기쁨으로 설레게 했던
봄날의 꽃들이 소명을 다하면
조용히 다가오는 계절을 위해 비워주듯이
말없이 지는 노을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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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솔바람 공원
한숙자
솔바람 쌩쌩 강산의 미열까지 실어간다.
어린 산새들 깃 속을
바늘처럼 찔러오는 아픈 계절
푸르던 숲은 전설이 된지 오래고
산새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울지 못한다.
솔바람 공원은 솔바람만 떠돌았다.
아직 먼동의 시간은 멀고
건기의 계절, 산새들은 무서움으로 떨었다
아득한 능선을 넘어오는 여명
마침내 동백꽃 봉오리 언뜻 붉은 눈빛
겨울바람도 멈칫거리기 시작했다
한 줄기 온기가 울을 넘을 때
영춘화는 마디마디 필 것인가
포로롱 멧새 한 마리 강어구로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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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양지 끝 참새들
한숙자
겨울 참새들
양지 끝 의자에 앉아 있다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면
더 정다워진 눈빛들
지난 일들은 가슴 치며
몇 낱씩 떠오르고
호된 시집살이 재잘재잘
대밭에 한 바가지씩 쏟던
그 울음들 먼 강물로 흘렀겠지
깃을 서로 부비면
슬픔도 어느새 녹고
서러워라, 서리치는
계절의 뒤안에서
참새들은 울다 웃다
한 세기의 역사를 다 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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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억새꽃
한숙자
그림자까지 하르르 떨며
하이얗게 짓는 몸짓
달무리는 은빛 화관
내가 그대 마중 할 때
샛강은 은빛 여울로 빛났네
그대 고운 뜻 머금어
바람은 읊고 또 읊고 있었고,
옛날 함께 걷던 그대와의 동행
길섶 훼이 그대 진정 그립네
엷은 어둠이 서서히 다가오고
그대는 마냥 고개 떨구며
다소곳 하이얗게 억새꽃이었네.
가슴에 묻었던 뜻은
끝내 소리가 되지 못하고
깊은 의미는 몸짓으로 사운댈 뿐
세월은 그렇게 흘러가고
나는 묵묵히 갈대의 꿈결에 잠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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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고향의 글벗 동생들을 만나고
한숙자
‘따르릉!’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고향에서 문인들의 신년하례식과 임원개편이 있고 신인들의
인사소개가 있으니 꼭 참석해달라는 전화였다.
나는 전북문인협회 행사에 가려고 약속했는데 고향에서 소식이 오니
잠깐 갈등이 생겼다.
서울에서 등단해서 전주에 연고가 없어서인지 낯선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내 고향 내 식구와 같이 웃고 떠들고 지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전북문협에 같이 가자고 약속한 일행에게 어떻게 이야기할까
고민하는 중에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참석을 못하게 됐다는 연락을 받고
고향으로 가기로 결정한 뒤 버스를 타고 가는 내 마음은
어린아이 마냥 들떠 있었다.
옆자리 젊은이와 얘기를 하다 보니 노후를 농촌에서 보내려고 울산에서
귀농 했다는 것이었다.
어느 마을에 사는지 물어보니 오천리 소토실에 정착한 젊은 부부인데,
아직 울산에 자식들이 있단다.
남편이 퇴직하고 정착한 지가 5년이 지났다고 한다.
처음에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인심이 옛날과 달라 마을주민들과
어울려 생활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했다.
자기는 농사를 짓지 않고 펜션을 운영 중이라 했다.
귀농은 5억 원 정도가 있어야 토지를 매입하고 집과 농기구를
장만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농사를 지어도 겨우 먹고 살 정도라 하니 평소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은 펜션을 지어 관리인에게 맡겨 그분들이 일정비율의 수익금을
가져간다고 했다.
여러 군데 펜션을 관리하는 기업형 관리인들이란다.
요즘엔 정보화시대라 직접적인 관리보다는 이러한 전문적인 관리인들을
이용하는 게 더 편리하다고 했다.
많은 후회를 하며 5년 세월이 흘러 이제는 공기가 좋고 물이 맑아
장류 같은 식품을 해볼까 생각중이고, 조금씩 안정되어 가는 것 같다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진안에 도착했다.
모임시간보다 10분 정도 늦게 도착하니 회의는 벌써 진행 중이었다.
지난해 결산보고와 임원진을 새로 선출하고 끝을 맺고 회식에 들어갔다.
회식장소로 가니 그 유명한 진안돼지고기 파티가 열렸다.
여기저기서 나를 반기며 자기가 뉘집 아들, 누구의 몇째 동생이라며
인사들을 했다.
정말 반가웠다.
기억 속의 어린아이들이 훌륭한 어른들이 되어 누나라고 부를 때
다정한 막내 동생들 같았다.
술자리들이 무르익을 때쯤 슬며시 그 자리를 떠 버스를 타고 전주로 돌아왔다.
버스 안에서 만난 귀농 젊은이의 명함을 받지 못한 게 아쉽지만,
귀여운 막내 동생들과 동석했다는 기쁨 때문에 오늘 고향 나들이는
잊지 못할 좋은 시간이었다.
자주 만나 깊은 정을 나누고 내 고향 동생들과 글벗이 되어서
즐거운 생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지나쳤던 동생들의 글들을 다시 꺼내 읽어보며 더욱 좋은 나들이였다.
고향은 내 어린 시절의 꿈과 추억이 서려있는 어머니 품속 같은 정겨운 곳이다.
나도 그 곳에 묻혀 그 후배들과 더불어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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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국선도
한숙자
몇 년 전에 나는 국선도라는 이름을
위봉사 상적 스님(비구니 스님)에게 들었다.
스님은 일주일에 한 번씩 속가에 오셔서 국선도 도장에서 운동을 하고
가끔 우리 집에 들려 바쁜 나를 도와주시고 같이 절에 올라가시곤 했다.
스님은 운동을 하셔서 그런지 몰라도 체격이 크시고 몸도
튼튼하고 날렵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국선도가 과격한 운동인 줄 알았는데 스님께서 다른
사찰로 떠나신 뒤 마침 옆집 서점을 운영하는 아가씨가 국선도 도장에
다닌다면서 국선도 관련 책을 나에게 주어서 읽어보았다.
국선도는 우주의 기를 온몸으로 받아 대자연의 생명력과 하나 되는 의미였다.
몸과 마음을 하나로 하여 아랫배 중심에 집중하여 대자연의
기운과 하나가 된다.
기혈의 흐름에 따라 배꼽 밑 단전으로 들숨 날숨을 쉬며 호흡을
조절하여 몸에 나쁜 기氣는 빠지고 좋은 기氣를 만나게 하여
마음과 몸을 가다듬으며 온 우주기宇宙氣를 내 몸에 불어넣은
단전호흡을 하는 방법이다.
삼국시대 이후 비전되어 오던 산중수련법을 청산선사가 청운도사로부터
물려받아 심산유곡에서 오랜 수련 끝에 현대인에게 맞게 체계화시킨
전통단전호흡법이다.
1967년에 속가에 내려와 제자들한테 전수한 우리나라의 순수한
기氣운동이다.
기혈순환유통법氣血循環流通法, 단전행공법團轉行空法, 명상법 등
여러 가지의 기체조라 노약자나 임신부도 할 수 있는 운동이다.
말과 책으로만 읽고 듣는 것으로 끝이었는데 남편 직장을 따라
서울 삼선동으로 이사를 하면서 마침 성북구청에 국선도교육과정이 있기에
무조건 찾아가 등록을 했다.
오전 5시 30분에 시작하는 수업에 맞추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성북구청 강당으로 갔는데 많은 사범들이 앞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불안과 초조로 어리둥절하여 서있는데 선생님이 오셔서 뒷줄에 세워주셨다.
내가 있던 구역엔 나 같은 초보자들과 같이 가부좌를 하는 방법 단전위치를
사범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입문호흡을 시작했다.
선생님들은 군데군데 서 계시며 자세하게 가르쳐 주시는데 난생 처음으로
도복을 받아 입고 초급자임을 나타내는 흰 띠를 두르고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 대로 따라 했다.
기(氣)를 돌리는 방법, 호흡조절법 등은 하면 할수록 어렵고 신기했다.
옆 사람한테 지지 않으려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다니며
한 단계씩 오르다보니 흰 띠, 노란 띠, 빨강 띠까지 따게 되었다.
축법(거꾸로 물구나무서는 법)과 온몸 전체 기를 순환시키는 법까지 하면서
내 자신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운동을 한 날과 결석을 한 날은 몸 상태가 다르다는 걸 느끼며
건강한 몸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
고향 친구들을 만나면 국선도가 좋다고 자랑하곤 했다.
다시 전주로 돌아온 뒤 전북도교육문화회관에서 수련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과 함께 등록을 해서 운동을 하게 되었다.
친구들은 난생 처음 해보는 운동이라 떠들고 웃고 자리가 비좁아 부딪치면서
못한다고 선생님한테 야단을 맞으며 서로 즐겁게 수련을 했다.
특히 이 운동은 연령과 성별에 관계없이 같은 동작을 할 수 있어 좋고
준비운동으로 기혈순환유통법을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명상을
30분가량 하고 나면 내 마음의 잡념이 사라지는 것 같다.
친구들과 같이 여행을 다녀도 피곤하지 않았다.
운동을 하는 친구들이 좋은 운동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단전호흡을 하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해졌다.
우리는 운동이 끝나면 국선도 이야기도 하며 이렇게 좋은 운동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정택)이 계셔서 노후가 즐겁고, 이런 교육장소를
제공해주신 교육문화회관 관장님과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
오늘도 힘차게 정심(正心), 정시(正視), 정각(正覺), 정도(正道),
정행(征行)을 소리높이 훈(訓)을 외치며 노후의 하루를 즐겁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게 해주신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다.
*기혈순환유통법=근육과 관절을 골고루 풀어주어 온몸의 기혈순환을
촉진시키고 체형을 바로잡아 준다.
*단전행공법(단전호흡)=단전행공으로 흐트러진 기를 모으고 경근을
발달시켜 기력을 증진시켜 준다.
*정체운동 =(기혈순환유통법)단전호흡을 통해 모은 기를 전신으로
돌려주는 것.
*기신법=수화목금토 오행에 따라 오장육부 한 곳에 기운을 보내 장부를
건강하게해주는 운동.
*입단행공=근력과 기력을 건강하게 하며 몸과 마음을 동시에
정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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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선거
한숙자
평소 이웃에서 형님동생 하면서 친절히 잘 지낸 사이도
선거철만 되면 고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앙숙이 되어
생전 안 볼 것처럼 지역감정을 폭발시킨다.
어느 때부터 이렇게 지역감정이 생겼는지 한심한 노릇이다.
우리 지역은 꼭 여당이어야 되고 우리 지역은 야당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어느 후보가 진정 우리 고장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지
살펴보지도 않고 전쟁을 방불케 싸움만 한다.
과연 이들이 공약대로 진정 나라와 내 고장을 위해 성실히
국민의 편에 서서 일할 수 있을까.
초심을 잃지 않고 일할 수 있는지 당리당략만 위한 정치인가, 선거인가,
국회에 나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한 번쯤 생각해서 당선시켰으면
이런 후회와 좌절은 없을 것이다.
무조건 당선시킨 우리 탓이 더 큰 것 같다.
말로는 선진국이라면서 행동은 아직도 후진국 수준이니 무엇 때문에
학문을 배우는가.
우리 자신이 먼저 반성해서 감언이설에 속지말고 냉정하게 따져 참다운
내 고장의 인물을 뽑을 수 있어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는 기반이 되고 후손한테 부끄럽지 않게
바르게 심어주는 것이 의무임과 동시에 꼭 개선되어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선거문화가 바르게 서야 국민의식도 선진국 대열에 당당히 설 수 있고
과거 우리 선조들이 당파 싸움에 휩쓸려 싸움만 하니, 외부세력이
끊이지 않은 수모를 당한 역사가 증명하듯 이제라도 우리 자신부터
후손 대대로 부끄럽지 않은 선거문화를 이루었으면 한다.
선 거
국민 의무 한답시고
선거에 참여 한 표 던졌더니
웬걸 무성했던 공약 쑥밭 되고
핏대 세워 내세운
지역 발전 뒷전이고
제 욕망 명예에만 혈안이니
내 탓 네 탓이니 다 무슨 소용
잘못 본 눈과
잘못 들은 귀가 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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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아름다운 제주도 여행
한숙자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짓는데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제주도 여행을 떠나자는 친구 전화였다.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일이다.
한 달 전부터 여행 가방을 꾸리기 시작하며 즐거웠다.
고향친구들과 같이 떠날 준비를 하니 마음은 벌써 제주도로 달려갔다.
5월 22일 1시 30분, 군산비행장 가는 버스를 타고 가서 4시 30분
제주도 비행기를 탔다. 날씨가 흐려져 비가 오기 시작했다.
하느님이 우리를 시샘하나 보다.
오후에 구경을 가기로 했는데 비 때문에 못하고 숙소에서 여장을 풀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방이 따뜻하고 넓어 좋았다.
2시간정도 하기로 하고 3천 원씩 내놓고 게임을 시작했다.
게임은 많든 적든 서로 열을 올리며 웃고 떠드니 즐거웠다.
이날 모인 돈이 7천원이었다.
참으로 재미있는 게임이었다.
이튿날 일어나 보니 여전히 궂은비가 내리고 있었다.
야외 구경을 접어 두고 실내구경으로 대처했다.
코끼리 쇼와 기마병 싸움을 관람했다.
저녁에 또 게임을 해서 7천원을 모아 14,000원이 되었다.
이틀을 이렇게 보내고 3일째 되는 날, 비가 개어 야외구경을 할 수 있었다.
미술관과 분재를 구경했다.
미술관을 관람하는데 김홍도와 신현복 등 대가들이 인간의 본능을
해학적으로 적나라하게 그림으로 묘사해서 웃음도 나고 부끄럽기도 했다.
남자 관람객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마음껏 떠들고 웃었다.
분재를 구경하는데 너무 잘 관리를 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인간의 재능은 무한한 것 같았다.
700년 된 분재, 150년~250년 된 분재 등이 모두 장관이었다.
어떤 분재는 20억 원을 호가한단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다음날은 일찍 일어나 한라산을 끼고 돌기 시작했다.
비가 와서 목욕 한 것처럼 맑은 한라산은 마치 푸른 초원에 머리를 푼
나신(裸身)처럼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 같았다.
한라산은 우리를 좋아해 온종일 웃으며 따라왔다.
가파도 올레길로 가고자 배를 타고가 올레길 7코스를 가는데
키 큰 친구들은 앞장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키 작은 우리는 그 뒤를 따라 가느라 구경도 제대로 못하고
땀만 흘리며 바빴다.
키 큰 친구들이 조금 배려했으면 좋았을 텐데, 가이드가 너무 빨리 왔다면서
마라톤선수들이냐고 해서 우린 서로 웃었다.
올레길은 계절이 좀 늦어 이미 청보리가 익어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저녁 식사 때 제주도 특산품이라는 가이드의 추천에 딸 말고기를 먹기로 했다.
우리는 생전 처음 먹어보는 고기라 거부감이 들었다.
돈이 조금은 아까웠다.
친구들은 어찌나 알뜰한지 남은 밥을 모아서 숙소에 와
누룽지를 만들어 먹었다.
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그 어느 간식보다 맛이 있었다. 비가 와서 회를 먹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우리는 서로 나이를 잊은 채 어린아이마냥 실수를 연발하며 마음놓고
웃고 떠들 수 있었다.
38년이나 된 모임이라 모이면 목소리 큰 사람이 제일이다.
모두 정겨운 친구들이다.
친구 하나가 요즘 몸이 조금 불편해서 걱정이다.
이번 여행에 같이 동행을 못할 줄 알았는데 함께 참가해줘서 기뻤다.
빨리 회복하길 기원한다.
가장 허물없는 친구들이다. 이제는 황혼이 들었는데 소리는
변하지 않았다.
다음 달에 모이면 얼마나 소리들을 칠까?
게임에서 모은 돈으로 먹고 떠들며 1년 내내 여행이야기로 즐거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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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아버님과 뚝배기
한숙자
맨 처음 시집와서 부엌을 들어가 보니 모든 것이 낯설고
우리 친정집 하고 너무 많이 식생활이 차이가나 어리둥절하여
절절매었다 친정 집은 남의 식구들을 많이 거느리고 사는 생활이었는데
시댁은 조용히 오봇한 자기 가족만 아는 생활이었다
한의사였던 아버님께서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뚝배기만 고집하고
사시는 어른이셨다.
우리 집은 밥그릇 국그릇 찌개그릇 모든 것이 질그릇이다.
한번 데워지면 식지 않은 따뜻한 온기를 간직한 질그릇이다.
어르신 밥상에 올려놓으면 진지 다 드실 때까지 식지 않고
제 할 일 다 하는 뚝배기 옹기그릇이기 때문에 조상님 대대로 사
용하고 있었다.
남들이 우리 집에 오면 옛 풍습 그대로 살림살이한다고 웃는다.
아버님은 요즘 시대에 걸맞지 않은 옛날 방식대로 식생활을
고집하고 사셨다.
남들 눈치 보지 않으시고 당신 편하신 대로 사시는 어른이었다.
냉장고에 들어간 음식은 맛이 없다고 당신 음식은 따로 아이스박스에
얼음을 채워 보관을 해서 드셨다.
여름 김치도 이틀에 한 번씩 고추를 갈아서 담가 샘물에 채워 놓고 드셨다.
김장도 경종배추만 고집해서 담게 하셨다.
경종배추는 땅속에 장독을 묻어 담으면 쉽게 무르지 앓고 여름철까지
그 맛이 일품이며 변하지 않은 게 특징이다.
모든 음식이 옛날 방식대로 양념도 그대로 우리 집 음식은 지금까지
웰빙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사계절 음식을 제철 따라 봄에는 굴비, 두릅, 여름에는 마른명태,
다슬기, 피문어, 가을에는 송이, 참게탕, 겨울에는 대구, 조기,
생선 등을 주로 즐겨 드셨다.
음식은 손맛 따라 다르다 하시면서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며
아무리 늦어도 재촉을 아니했던 어른이었다
재촉을 하면 제대로 맛을 낼 수가 없다고 늦어도 많이 기다리시다가
드시곤 하셨다 .
음식의 참맛을 아시는 미식가이시며 뚝배기의 진가를 제대로 아시는
어른이었다.
17년이 넘게 4대가 한집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나는 항상 긴장 속에서
살았고 그 생활이 지루하고 피곤하기만 했던 철없는 시절이었다.
나이 들어 생각하니 어르신들 지혜가 옳으신 것 같아 그 생활방식대로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살아 계실 때 잘 모셨으면 후회가 없었을 텐데 돌아가시고 아니 계신
지금에야 철이 들어 후회하니 송구스러운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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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언니와 나
한숙자
진안 시골 오지마을에서 태어난 언니와 나는 어린 소녀시절을
부모님 덕에 철없이 지냈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던 시절이었다.
먹고사는 것이 그리 힘들었는지 보릿고개가 오면 쑥으로 연명하면서
부황(영양실조)이 나는 등 고단한 삶을 살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때는 산아제한도 없는 때라 형제들이 많아 부모님들이 들에 나가셔서
일을 할 때면 학교로 동생들을 데리고 와서 앉혀놓고 공부를 했었다.
학교에는 군인들이 주둔했기 때문에 우리는 창고에서 수업을 받은
어수선한 시대였다.
옷은 세탁을 자주 안했기 때문에 이가 득실거려 몸은 가려웠고,
머리는 자주 감지 않아 이와 서캐가 많았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때라 미국의 원조와 세계 여러 나라의 도움으로
연명하고 있을 때였다.
그걸 보고 미국인이 디디티(D.D.T) 약을 보내주어서 학교에서는
어린이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옷과 머리에 약을 뿌려 이를 없애기도 했다.
중학교 진학은 한 반에서 몇 명 정도였다. 교복도 무명베에 검정물감을 들여서
만들어 입었던 그 시절에도 언니는 멋쟁이 여학생이었다.
시골학생인 언니는 전주남부시장 구호물자 골목을 찾아가 그곳에서
세루바지와 바바리코트, 시계, 사진기 등을 구입한 멋쟁이였다.
성격이 활발하고 사교적이던 언니는 웅변과 달리기를 잘해서
학교 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시골 5일장이 열리면 학생 대표들은 시장에 나가 시국강연을 하여
주민들을 설득했다.
동네마다 좌익과 우익이 있어 좌익을 설득하기 위한 강연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세상은 어수선한 시절이었으나 다행히 부모님 덕에
우리는 전주로 고등학교를 진학할 수 있었다.
언니와 나는 자매이면서도 성격은 전혀 달랐다.
언니는 아버지를 닮아 성격이 급하고 나는 어머니를 닮아 차분했다.
우리는 성격 탓으로 서로 다툼이 심했다.
활발한 언니는 친구가 많았고, 그 시절에는 언니동생을 삼는 것이
유행이라 많은 학생들과 언니 동생을 삼았다.
언니는 S언니를 삼아서 학비까지 대 주었다.
자기 친동생인 나보다 그 언니를 먼저 챙겼다.
나는 그런 언니가 정말 싫었고, 그 언니도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다.
그렇게 챙겨준 언니인데 결혼하고는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다.
나도 S동생을 삼았는데 언니같이 요란하지는 않았다.
방학 때면 선생님들께서 가정방문 때문에 시골에 오셔서 우리 집에서
숙식을 하셨다.
그때 어머니는 얼마나 많이 수고하셨을까?
수줍음 많은 나는 어쩌다 길에서 고향 남학생을 만나도 속으로는
반가우면서도 그냥 모른 체하며 지나쳤다.
언제나 혼자 낙서하며 외로움을 잘 타는 성격이었다.
언니는 학교 졸업 후 남부럽지 않게 결혼을 했는데 딸 하나를 낳고
일찍이 사별한 뒤 친정에 와서 직장에 다니다 서독 간호사로 떠나 30여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몇 년 만에 한 번씩 고국에 들어 올 때는 선물을 많이 사왔는데
본인이 고급스러운 것을 좋아하다보니 선물도 고급스러운 게 많았다.
고국에 올 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왔으나 다시 돌아갈 때는 눈물을 흘렸다.
지금은 아득한 추억이지만 얼마나 서러웠던지 언니가 마치 가난한 집에서
부잣집으로 식모살이 떠나는 것처럼 느껴져 마음이 아팠었다.
그때 우리도 ‘잘살아보세’ 하며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었고,
산아제한도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산아제한은 안하는 게
좋았을 것 같은데 그때는 그게 최우선이었을 것이다.
언니는 30여년 만에 영구귀국을 하게 되었다.
부모님과 형제 곁에서 같이 살려고 독일에 있었던 물건들을 가지고 왔는데
이삿짐이 무려 200상자가 넘었다.
꿈에 부푼 귀향이었는데 안타깝게도 2년 만에 언니는 중풍으로
쓰러지게 되어 지금까지 10년도 넘게 고생하고 있다.
독일에서 생활했던 강한 의지력으로 피나는 노력과 운동을 하지만
호전되지 않아 결국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
고국에 돌아 올 때는 부모님과 형제들과 내 나라에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요양원에 찾아가면 몸을 움직이지 못해도 정신은 또렷해서 입원실 문만
열면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이 처량하다.
이제는 가망이 없어 죽음만을 기다리는 언니를 볼 때면 인생무상이 느껴진다.
모든 면이 뛰어났던 젊은 시절의 언니를 회상하면서 하느님 곁으로 가는
순간까지 언니가 편안한 모습이었으면 한다.
며칠 전에 ‘국제시장’이란 영화를 감상하면서 언니를 생각하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언니가 한 말이 생각이 난다.
“외국 사람들은 몸이 비대해서 목욕을 시키려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고 했었다.
언니와 함께 이 영화를 감상했다면 언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반성을 했다.
‘남의 단점을 보지 말고 장점만 보는 눈을 주소서.
내 흉은 등뒤에 두고 남의 흉은 앞에서 보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건강을 지키며 행복한 하루가 되게 살며 생(生)을 마감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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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우울한 하루
한숙자
감귤을 사들고 큰언니를 찾아갔다.
캄캄한 방에서 전기장판을 깔고 누워있는 언니를 보니 눈물이 났다.
말씀이 없는 형부가 돌아 가신지 몇 년이 지났다.
사람은 항상 여럿이 있으면서도 혼자라는 생각이 든다.
자식들이 여럿 있지만 떨어져 사니 언니는 혼자나 다름이 없다.
약간의 치매증상이 있는 언니는 자기 나이(88세)조차도 모르면서도
자식들과는 같이 살고 싶지 않다고 한다.
젊었을 때는 깔끔하고 얌전한 언니였다.
시골처녀가 전주 총각과 호화로운 혼례를 치렀다.
형부는 전주농림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언니는 초등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똑똑한 편이었다.
내가 초등학교1학년 때 시집을 갔다.
어머니가 언니와 함께 트럭을 타고 시댁에 가는데 내가 따라가겠다고
울면서 떼를 썼었다.
어머니가 언니 집에 갔다 오면서 이바지로 엿을 많이
가지고 와 맛있게 먹었다.
형부가 군청 다니면서 퇴근길에 우리 집에 들러 저녁식사를 자주하셨다.
식성이 좋은 형부는 국수를 좋아하셨는데 양푼으로 하나씩 드셨다.
첫아이인 쌍둥이 조카가 태어날 때는 어머니가 출산수발을 하셨다.
6.25때는 언니가족과 우리가족이 함께 시골 큰댁으로 내려가
어린 조카들을 봐주며 한집에서 피난살이를 했었다.
어릴 때였지만 그 시절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사촌이었지만 친자매처럼 한마을에서 같이 살았다.
언니는 내 기억에 좋은 언니로만 남아있다.
그런데 이렇게 같이 인생 황혼 길을 걸어가면서 서로 한 이불 속에
몸을 묻고 옛 노래를 부르고 있다.
언니와 나는 입을 모아 노래를 부르며 언니도 울고 나도 울었다.
정신이 조금 들었는지 언니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는데
동생이 왔다면서 울었다.
평소 깔끔했던 언니라 정신이 들 때면 청소도 하고, 빨래도
정갈하게 해놓았다.
정신이 자주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자기가 너무 물어 본다 면서도 친척들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언니가 하는 대로 말벗이 되었다.
언니의 기억에는 내가 어린 시절의 동생으로 생각되는지
“너는 젊어서 좋겠다.”라는 말을 자꾸 되풀이했다.
마음으로는 같이 잠도 자고 더 위로해주고 싶었는데 그냥 되돌아오는
내 마음은 우울하기만 했다.
막 집에 도착하니 전화벨이 울려 받아보니 인천에 사는 친구였다.
몸이 너무 쇠약해져 집에만 있다면서 친구가 보고 싶다고 울먹였다.
가까운데 산다면 찾아가 위로해주고 싶었다.
얼마나 사람이 그립고 외로웠으랴. 자식들은 자기를 요양원에
보내려고 하는데 자기는 절대 가고 싶지 않다면서 계속 울었다.
말벗이 있으면 좋을 텐데 우리 집이 너무 멀어서 올 수가 없다면서
자기와 며칠 같이 있으면 안 되냐고 물을 때 나는 선뜻 대답을 못했다.
그 친구는 서운하겠지만 나도 역시 내일이란 기약이 없다.
언제 병원신세를 지며 정신을 놓을지 모르는 처지다.
오늘은 그리운 사람들의 소식이 나를 우울하게 하는 하루였다.
나는 올해부터 한 달에 한 분씩이라도 외로운 사람들을 방문하기로
마음먹고 첫 달에는 요양원에 있는 언니를 찾아가고, 두 번째로는
사촌언니를 방문했고, 다음엔 친구와 친척 그리고 외로운 이웃들을
차례로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내일도 건강한 내 몸을 더욱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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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위봉사의 추억
한숙자
음력 4월 8일 초파일 부처님 탄생일만 되면 30년 전 일이 생각난다.
내가 처음 위봉사에 갔을 때만 해도 어느 고장에 있는지도 몰랐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우리나라 문화유산이란 것만 알고 물어서
하루 종일 찾아간 곳이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있는
위봉 산성의 위봉사였다.
백제 무왕 5년(604년)에 축성했고 임진왜란 때 오백 승군이 주둔하고있던
대가람이었던 위봉사는 조선 태조 영정을 경기전에서 옮겨 대중스님들이
성을 지켜 왜군을 막은 역사에 기록된 유명한 사찰이었다.
찬란했던 옛 모습은 어디로 가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폐허가 되었다.
나는 처음에 불교가 무엇인지 부처님이 어떠한 분 이신지도 잘 모른 채
내 자신 내 가정만 위한 기도만 했다.
잿빛이 된 부처님을 처음 뵙는 순간 눈물이 나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집에 돌아와 생각하니 위봉사에 계신 부처님이 눈에 선했다.
위봉사에 부처님 말씀을 드렸더니 선뜻 같이 가서 기도를 하자고
동의를 얻어 나는 뛸 듯이 기뻐 7월 7일 칠석에 자식을 위하여
기도를 하자고 했다.
그런데 막상 가려니 위봉사에는 아무것도 없는 형편이었다.
우리는 서로 뜻을 모아 그릇도 사고 공양미와 향, 초, 과일, 등을 사서
25인승 미니버스를 대절해 30명이 타고 갔다.
위봉사를 다시 찾는 내 마음은 하늘에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차에서 내려 우리 일행은 일주문 앞에서 스님을 찾으니 혼자 계시던
스님이 깜짝 놀라셨다.
스님이 계시는 동안(1년) 처음으로 보살들이 찾아 왔단다.
우리는 서둘러 부처님 앞에 준비해온 공양을 올려 기도하는 사이
이미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다시 올 것을 스님에게 기약하고 험한 산길을 내려오는
발길은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그때부터 우리 몇몇 신도들은 열심히 기도를 하면서 신도 모으는 일에
온 정성을 다했다.
절에 다녀온 날은 집안 일을 더욱 열심히 했고, 매일 같이 전화로
위봉사 이야기만 나오면 좋아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곤 했다.
몇 안된 신도이지만 뜻을 모아 우리 부처님만을 믿고 다니던 중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도량석이(새벽에 절 도량을 돌며 일체중생을 깨우치는것)무엇인지
모른 체 새벽 3시에 나와 무슨 기도를 올려야 되는지 몰라
관세음보살하며 목탁을 치면서 절 둘레를 한 바퀴 돌아 법당에 들어가
예불을 드리려 하는 순간 법당지붕위에 빨간 달덩이 같은 둥근달이
방광을 비쳤다.
우리는 놀란 체 예불을 끝내고 스님한테 달려가 달 같은 빛을 보았다고
말씀드렸더니, 스님이 우리를 보고 합장하셨다.
앞으로 좋은 일이 절에 생길 거라 하셨다.
우리는 뜻도 모른 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더 열심히 다니며
우리 절을 도와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그러던 중 서울에서 기도스님(도의 비구니스님)이 오셔서
우리는 꾸중도 많이 들었다.
불교란 불자도 모르는 보살들이 법당 청소를 제대로 못한다고
스님한테 야단을 맞으면서도 기도가 좋아 합장하고 밤새며 기도를 했다.
그 정성이 닿았는지 4월 초파일이 지난 뒤 우연히 서울 보살님
한 분과 인연을 맺어 곧장 불사를 시작했는데 장애가 많았다.
끝내는 불사를 중단하는 위기에 몰린 채 스님들까지도 몇 분이
이동하는 바람에 자연히 불사는 지연되었다.
그러던 중 부처님 가피신지 법중 스님(현재 비구니 스님)이
우리 곁에 오셨고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맙고 환희심이 생겼다.
스님이 오셔서 선방불사를(대중스님들이 선(禪)공부 하시는 곳)하신다하니
우리는 그저 고맙고 좋아서 춤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몇 안 되는 신도들은 스님이 마치 부처님처럼 생각되었고 오늘날까지
어려운 불사를 하시느라 몇 번 쓰러지기도 하셨다.
불사가 계속되어 폐허가 된 위봉사 지도를 완전히 바꿔놓기에 이르니
법중 스님이야말로 대단한 원력을 가지신 스님이시다.
우리 신도들은 복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스님은 바쁘신 중에도 우리를 선방 큰스님을 친견할 수 있도록
인도를 많이 해주셨다.
덕분에 참선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이제 위봉사가 긴 잠에서 깨어나
절 이름 그대로 봉황새의 날개를 펴기 위해 부처님께서
스님을 우리 곁에 보내시어 지금껏 아무 탈 없이 대중스님들과
보살들이 한마음 한 뜻으로 법등명, 자등명을 밝히며 오늘도
“이 무엇고?” 화두를 든 채 열심히 기도하는 소리가
내 귓전에 쟁쟁하게 맴돈다.
*이 무엇 고=일어나는 한 생각을 의심하며 마음을 단속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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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조기항아리
한숙자
해마다 겨울에 띄운 메주로 1월에는 음식 중 가장 으뜸인 간장을 담근다.
그리고 2월에는 고추장을, 3월엔 조기를 담근다.
매년 이맘때만 되면 일년 먹거리를 장만하느라 분주하기 마련이다.
조기는 이른 봄 음력 2~3월이면 가장 크고 알이 많이 찬다.
그러기에 그 기간에 조기를 소금에 절여 항아리에 담아왔다.
일년이 지나면 먼저 담은 조기는 항아리에 두고 새로운 조기는
다른 항아리에 담는다.
그 일을 반복해서 조기가 삭으면 먼젓번 항아리에 같이 둔다.
이때 소금으로 간을 적당히 해야 오래 저장해도 그대로 있다.
소금을 너무 강하게 해도 맛이 없고 약하게 하면 전부 풀어진다.
항아리는 숨을 쉬는 질그릇이라 온도가 저절로 조절되고 그 안에 있는
조기를 상하지 않게 하는 그릇이다.
또한 장소도 햇빛이 너무 강하면 안 되고 통풍이 잘 드는 곳에 두어야 한다.
항아리 속의 조기는 몇 년를 넘게 저장해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
이런 현상들은 조상님들의 경험에서 나온 지혜로 보인다.
삭힌 조기는 여름에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김장을 담글 때는 조기머리를 잘라 끓여 그 국물로 고춧가루를 개고,
몸통은 포를 떠서 양념과 함께 배추 속에 넣어 김장을 한다.
제사 때나 명절에 삭힌 조기를 올려 차례를 지냈다.
집안 어르신들이 찾아 오셔서 가끔 조기 이야기를 하신다.
간을 잘 맞춰 보관을 잘했기 때문에 맛이 있다고 칭찬해 주시던 어른들이셨다.
이것을 40년 넘게 해 온 일이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 힘들기도 하고
또 지금은 식생활이 변해서 소금에 절인 음식은 몸에 해롭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조기항아리를 몇 번이나 버리려 하였으나
귀중한 물건을 잃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아쉬운 마음에 지금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혹 시장에 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음이 달라진다.
크고 알이 꽉 찬 참조기를 보면 나도 모르게 조기 앞에서 흥정를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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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숙자 시인약력
전북 진안 출생
덕성여자 평생교육원 수료
2010년 생활문학(시) 등단
2011년 생활 문학(수필)등단
2016년 한국시인 대표작 수록
전북문협 회원
전북문예 회원
진안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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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을산에 다녀갑니다
올 추석 잘 보내셨지요
남은 연휴 잘 보내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