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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성취론(業成就論)
천친(天親) 지음
비목지선(毘目智仙) 한역
김월운 번역
업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이다. 수다라(修多羅)에서 어떤 이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몸으로 짓는 업을 신업이라 하고, 입으로 말하여 짓는 업을 구업이라 하는데 이 둘에는 모두가 유작(有作:有表)과 무작(無作:無表)에 있고 뜻과 서로 응하는 업인 쪽으로 보면 의업이 되니 이 업 그대로가 생각[思]이다.”
위에서 소개한바 저들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뜻이란 어떤 법인가? 모든 몸과 뜻에서 모두 형상(形相)이 있는데 그것[思業]이 몸을 반연하여 몸이 생겼으니, 어떤 형상인가?
몸의 형상 그대로이다.
몸의 형상이라면 어찌하여 굳이 몸으로 짓는 업[身所作業]이라 하는가?
몸은 총체적인 지분[分]이어서 몸에 섭속되기 때문이며, 신대(身大:몸)를 반연하여 생겼기에 몸으로 짓는 업이라 하니, 부분[別]에 속하는 말을 총체적인 이름으로 부른 것이다.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성 안에 살고 있다 하는 경우나 숲속에 있다 하는 경우와 같다.
몸을 반연으로 생겼다면 무슨 까닭에 그렇게 말하는가?
입술 따위의 동작에서 생겼다거나 생각이나 형상에서 생겼다는 생각을 차단하려는 까닭이다. 그 마음은 입술 따위의 동작을 반연하여 생기는 것도 아니며 형상을 반연하여 생기는 것도 아니니 말[語]하려는 생각을 반연하여 생기기 때문이다.
또 앞의 원(願)에 의해 생긴다는 생각도 인정하지 않나니, 그 마음은 앞의 원을 반연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보(異報:異熟)의 인연으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뜻으로 일으킨 업[意起業]이라 하는가?
마음을 움직여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형상(形相)이라 하는가?
이른바 길이[長] 따위이다
무엇을 길이 따위라 하는가?
이른바 길게 보이는 것들을 말한다.
그것은 어느 부류[入]에 속하는가?
색입(色入)에 소속된다.
길이 따위는 미진(微塵) 그대로의 색인가, 미진이 모인 집합체인가, 아니면 어떤 한 물건이 색진 따위에 두루해 있는 것인가?
만일 길이 따위가 미진 그대로의 색진이라면 그 길이 따위는 마치 물질을 부분부분 취하는 것과 같이 부분부분[分分]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길이 따위가 미진이 모인 덩어리라면 저 색의 미진과 그들의 모인 덩어리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 미진의 모임은 길이 따위와 다름이 없어야 할 것이다.
만일 한 물건이 색 따위에 두루했다면 그 한 물건이 길이 따위에 두루 있어야 하고, 만일 한 물건이 부분부분 속에 두루했다면 모두에서 잡을 수 있어야 하리니, 모든 곳에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가 아니라면 부분부분으로 잡을 수 있어야 한다. 아함(阿含)의 열 가지 입[十入]을 미진이 합해 모인 것이라고 한다면 부처님의 법은 무너지고 가나타(迦那陀:勝論派의 시조) 외도의 법이 성립할 것이다. 미진을 모은 무더기 중에 한쪽에서 긴 것을 보면 길다는 앎[知]을 내고, 국한된 것을 보면 짧다는 앎을 내고, 반듯한 것을 보면 방정(方正)하다는 앓을 내고, 두루한 것을 보면 둥글다는 앎을 내고, 중간에 튀어나온 것을 보면 높다는 앎을 내고, 낮은 것을 보면 꺼졌다는 앎을 내고, 가지런한 것을 보면 바르다는 앎을 내고, 갖가지 방면을 보면 들쭉날쭉함을 알고, 담요ㆍ털ㆍ비단 따위를 여여하게 보면 그 갖가지 형상에 따른 앎을 내나니, 그 갖가지로 다른 물건을 하나로 볼 수는 없고 색의 차별대로 보아야 한다.
만일 다시 생각하기를 모든 방위에 모든 형상이 있다고 한다면 인 이치가 옳지 못하니 이런 형상은 다른 물건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빛깔[色]도 그러하여서 방위와 곳에 따라 길고 짧은 따위를 보되 마치 나무나 새나 개미 떼 따위 같다 하면 그 논리에는 허물이 없다.
만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어둡거나 멀 때에는 빛[色]은 보지 못하며, 모여진 겉모습을 볼 때엔 어찌하여 전체는 보되 형상을 보지 못하는가? 마치 가로수의 행렬 따위에서 그 행렬의 무더기만 보고 형상은 보지 못하면서도 거기에 딴 물건이 없다고 하는 경우처럼 모인 무더기에 대하여 어둡거나 멀 때에 두 가지(개체와 전체)를 보지 못하거나, 보더라도 분명치 않으므로 ‘그게 어떤 물건인가, 저 보이는 것은 무슨 물건인가?’ 하거니와 비록 저 색(色:物)을 보되 분명치 않다. 그러므로 이것이 뜻의 형상이라 한다면 이치가 성취되지 않나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또 어떤 이가 말하기를 마음이 그것[境]을 반연해서 생기는데 경계가 가므로 뜻[意]이라 한다고 하거니와, 그것을 반연해서 생긴다 함은 무슨 뜻인가? 입술 따위의 움직임에서 생긴다는 주장을 막아 정지하기 위한 까닭이다.
무슨 까닭에 감[往]이라 하는가?
이른바 저쪽을 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입(入)에 속하는가?
색입(色入)에 섭속된다.
어떻게 해서 이것이 저쪽으로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다르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불ㆍ눈ㆍ술[苦酒:또는 식초]ㆍ햇볕 따위가 변해 익는[變熟] 인연 때문에 들어왔다가는 곧 나가는데, 변해 달라짐[變異]은 볼 수 없으나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닌 경우와 같다. 또 불에 탈 수 있는 허수아비나 풀ㆍ나무 따위를 태울 때 별다른 불꽃을 볼 수는 없으나 불꽃과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닌 것과도 같다.
처음 불에 들어갔을 때 변하지 않는다면 나중에도 변하지 않아야 하나니, 그 까닭은 그 인연이 별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섶나무나 풀 따위가 거칠고 고움이 균등치 않다면 불꽃의 분량과 밝음과 열량이 모두 달라서 같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같지 않게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쪽으로 가는 데서 생한다는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만일 사라져 없어지는 원인[滅因]이 없기 때문에 감[往]에서 업이 생긴다고 한다면 무슨 까닭에 마음[心]과 마음붙이[心數] 등의 법을 잡을 수 없는가? 소리[聲]나 등불 따위가 사라질 때에도 무엇인가 인연이 있을 것이요, 그 밖의 것도 그러하다.
그 멸하는 인연이란 스스로의 인연으로 파괴되는 것이거늘 그 밖의 다른 법의 인연인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또 그 법에 멸하는 인연이 없다면 다른 법도 그래야만 할 것이다.
만일 처음으로 불에 들어간 풀이나 나무 따위의 색(色:형체)이 본래와 같아서 다르지 않다면 뒤에도 그러하여서 다름이 없어야 할 것이거늘 어찌하여 등불의 빛이나 방울의 소리 따위가 바람이나 손이 닿자마자 곧 꺼지거나 그치는가? 그러나 이것(바람)이 끄는 것이 아니며 이것(손)이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불 따위나 나무 따위를 태우거나 말 때에 형체 따위가 사라지거나 하는 것이라면 처음으로 불에 들거나 나올 때엔 어찌하여 달라지지 않는가? 밖의 인연이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물건이 익어지는 데는 미(微:下)ㆍ중ㆍ상이 있을 수 없거늘 처음으로 물건이 익어 변할 때엔 무슨 인연으로 변하는가? 인연은 오직 하나이지만 생기게도 하고 멸하게도 한다 하면 이는 바른 도리가 아니니, 하나의 인연이 두 법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중간에 다시 사라져 없어지게 하는 원인이 있다면 앞에서와 같이 취하고 버림에 다르게 상속(相續)할 것이니, 그렇게 알아야 한다. 만일 사라지는 데 원인이 있다면 법도 없고 원인도 없다는 말이 되나니, 마치 마음 따위가 생기는 경우와 같아서 멸하는 법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일체 법이 모두가 원인이 있기 때문이니, 사라지면 원인이 없어짐이 마치 불ㆍ눈ㆍ술ㆍ햇볕 따위가 익어 변하는 인연과 같다.
만일 사라짐이 원인이 있어 사라지는 것이 색과 같다면 이렇듯 없는 법이 인연이 있어서 사라지는 것이 된다.
생길 때에도 원인이 없거늘 그 달라지는 법칙을 보고서 이 법이 생기는 데는 실제로 원인이 있다고 한다면 앞 마음[前心]과 뒤 마음[後心]이 다 같은 마음이지만 중간에 익어 변했다는 말이 된다. 변해 익어진다 함은 마치 우유가 소락이 되고, 포도즙이 술이 되고, 술이 식초[苦酒]가 되는 것과 같으니 이렇듯 조그마한 법도 머무는 모습[住相]이 없다.
머무는 물건[住物]에는 지어감[行:변천]이 없고, 지어감이 없으면 머무름[住]인데, 만일 이렇게 본다면 그 본다는 것은 어떤 물건인가?
이곳의 물건을 보는 것이 그 어찌 저쪽의 땔감을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쪽의 땔감이지만 보기에는 풀이라는 그림자 같을 뿐이요, 저쪽의 그림자를 여기에서 보는 것이 아니니, 마치 해가 머무른 것을 보는 것 같다. 이와 같이 해가 가깝고 멀게 회전하면서 그림자가 같이 늘고 주는 것을 도는 대로 보되 해는 일정한 방위와 자리에 있으나 그림자가 가릴 때에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만일 또 어떤 사람이 따져 묻되, “이는 어느 곳의 물건인가? 앞의 물건이 회전해서 이리로 왔는가?” 하거든, 그에게 대답하되 이는 어느 곳의 물건인가와 그 향한다는 이치를 이제 설하리라.
이렇듯이 머무는 물건은 지어감이 없고, 지어감이 없으면 그 물건은 머무르나 밖의 인연들이 무너짐을 기다렸다가 나중에는 달라짐을 보고 잠깐잠깐 사이에 다르게 안다.
만일 다르게 알지 않는다면 그 물건은 달라진 것이 아니요 그 물건이 달라진 것이 아닌 줄 안다면 어찌 다르다 하지 않겠는가?
이렇듯 이 두 가지에서 모두 볼 수 없으므로 이렇듯 지어간다[行往]고 함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실제에는 지어감이 없건만 유위의 법체는 잠깐잠깐 사이에 스스로 무너지거든 그 과정에서 원인이 생기나니, 일어난 마음을 원인으로 하여 손ㆍ발 따위를 움직이게 하기 때문에 지어가는 뜻[行意]이라 할 수 있다.
일출제자(日出弟子)는 이렇게 대론(對論)한다.
이는 어느 입(入)에 속하는가?
색입(色入)에 섭속된다.
그들(의업)은 무슨 까닭에 푸른 빛 따위처럼 분명하게 눈에 띄지 않는가?
만일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인다면 뜻[意:意表]이라 하겠지만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니 어찌 뜻이라 하겠는가?
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어찌하여 몸속에서 딴 곳으로 움직여 지어갈 때, 마음의 바람[心風界]이 생기는가? 이 바람의 요동이 이른바 다른 방위의 인연으로 생긴 것이라면 어찌하여 풀이나 잎사귀 따위가 바람을 따라 기우는가?
지어감[行]이란 것도 이와 같아서 다른 방위와 장소에서 생긴 것인데 지어감의 힘[行力]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분별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日出論者)이 이렇듯 몸 쪽[身方]에서 원인이 생겼다 하나니, 마음에서 바람(風界)이 나는 것, 이런 것들을 뜻이라 한다. 어찌 뜻 아닌 것을 뜻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석가자(釋迦子:種子)의 법에 촉입(觸入)은 선(善)도 불선(不善)도 모두 아니지만 저들은 이러한 마음이 다론 쪽의 몸에서 생긴다 하는데 이 생긴 것을 뜻이라 한다.
만일 그렇다면 뜻이란 오직 겉모습일 뿐이요, 실다운 물건이 없고, 몸은 여러 부분인지라 뜻 또한 뜻이 아니니, 마치 다른 사람이 맛 따위를 보는 것 같으리라 하거니와 석가자의 법은 그렇지 않으니, 맛 따위는 선도 아니며 불선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이 색(色)을 내기 때문에 그를 뜻이라 말할 수 있다.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체인 바람의 종자에서 생긴다 하거니와 석가자의 법은 그렇지 않으니 색입(色入)은 선도 아니며 불선도 아니기 때문이다.
색이 저쪽 방위에서 생긴다면 뜻[意]이란 것을 얻을 수 없으리라 하거니와 만일 그 물건이 하늘에 공양하고 얻어진다거나 또는 그 물건이 하늘이 없으면 줄 수 없으므로 얻을 수 없다 한다면 만들어내는 사람이나 물건이 다름이 없으니 무엇이 다름을 이루리오. 그런 이치는 얻을 수 없다.
이렇듯이 색 따위는 눈으로 볼 수는 있거니와 물건을 만들어내는 이치는 그렇지 않다.
이미 볼 수 없으면 어떻게 뜻이라 말하리오. 이는 전에 이미 말하기를 생하는 것이 그렇지 않다고 설하였듯이 색도 이미 그렇게 설해 마쳤다.
오직 지음 없음[無作]이 몸의 업이다. 무엇을 지음 없음이라 하는가? 법입(法入)에 섭속되는 것이니 두려움 따위의 색이다.
무엇이 지음 없음이기에 지음 없음이라 하는가? 만일 욕계의 일이 마음과 합해 움직인다면 앓[知]이요 색계와 합한다면 마음과는 다르려니와 무심(無心)이 될 때에는 두려움과 두려움 아닌 것을 마음과 함께 모두를 잃으리라. 만일 느낄 때에 세력이 있으면 뒤까지 항상 잃지 않는다.
계경(戒經)에 말씀하시기를 비구들이 잠자코 있었는데도 어찌하여 망어를 하느냐고 하셨다.
또 무기(無記)로는 업이 이루어지지 않지만 지음 없음인 무작(無作)은 두 종류, 즉 선(善)과 불선(不善)이 있다. 그들은 찰나 사이에 지음 없음과 합해서 움직이는 것이 마치 신업과 구업의 색을 분별하는 것과 같으나 만일 선과 불선이 다 성립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몸을 버리면 미래 세상의 사랑스럽고 사랑스럽지 않은 과보를 끊어 없애기 때문에 얻을 수 없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과거의 업이 있거늘 어찌하여 이루어지지 않는가?”라고 하거니와 만일 과거의 업이 미래 세상에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못한 두 가지 과보를 이룬다면 이는 종기[癰] 위에 종기를 보태는 격이요, 과거의 업에 다시 과거가 있다고 하면 이는 앞에서 있다가 뒤에는 없는 것이라 할 것이다.
여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록 백 겁을 지난다 하여도
업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아
인연이 화합됨을 만나게 되면
그 때에 과보가 변하여 익어진다.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능히 과보를 주는 것이 과보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으로 처음의 두 구절을 풀이해 마쳤으니 뉘라서 영구히 과보를 얻는 일을 믿지 않겠는가?
과보를 얻는다 함은 무슨 뜻인가? 상속하는 것이 벼의 종자와 같고, 머무르는 것이 제 모습[自相]이러니, 이렇게 알아야 한다.
만일 머무르는 제 모습이 능히 결과를 준다면 잃어 파괴치 않는 것이다. 항상 결과를 내어 주느라 그의 제 모습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잃어 파괴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작용[作]하고는 다시 작용치 않는다는 뜻이니, 어찌하여 작용치 않는가? 과보를 거듭 주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더 주지 않는가?
주는 일이 끝났기 때문이니 준 뒤에 다시 거듭 줄 수 없는 도리가 마치 물건이 생긴 뒤에 다시 생길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들 같은 부류의 과보[同類果]야 어찌하여 다시 주지 않는가? 어찌하여 과보를 다 준 뒤에는 생하는 법의 인연에 이러한 힘이 없는가? 누(漏)가 다한 사람이 마지막 생각에 누가 다하여 과보를 받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나중에 적멸[滅]이라 하겠는가? 이러한 힘으로 능히 과보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만일 종자의 인이 결과에 대하여 힘이 있다면 인의 힘[因力]이 능히 과보를 준다 할 수 있으리라.
만일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과거가 있다면 미래도 있다고 한다면, 무슨 까닭에 미래는 과보를 주지 않는가? 모든 시각[時]에 있다면 있다는 것이 어떤 물건이며 어느 때에 없어지는가?
그들이 다시 말하기를 화합할 수 있다면 과가 익어진다 하거니와 이는 옳지 못하다.
만일 어떤 사람의 힘이며, 어느 시각의 힘이며, 어떤 물건의 힘인가 하면 이 사람의 과보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나니, 과거의 업을 가지고 있다가 미래 세상에 과보를 얻는다면 성립되지 않는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저 선과 불선의 신업ㆍ구업 따위가 가만히 [陰] 상속하는 과정에서 마음 법[心法:意業]의 훈습을 여읜 것을 혹은 집(集)이라 하고 흑은 잃지 않음[不失]이라 하여 뒷세상에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못만 과보를 얻게 한다고 한다. 그러나 만일 의업이 마음의 생멸과는 다르게 움직이거나 만일 마음을 훈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후세에 과보를 얻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읽고 외우기를 오래하면 그가 보고 들은 사물들을 기억하는데 이렇게 훈습하는 것을 어떤 법으로 훈습하는가?
만일 어떤 사물을 기억해 낼 때에 그는 외웠던 것 따위를 분명히 보거니와 그 뒤로부터는 어디에서 기억하는 마음이 생기는가? 멸진삼매(滅盡三昧)에 들어 첫 마음이 이미 멸했거니 뒤에는 어디에서 마음이 생기겠는가?
자광즙(紫鑛汁)을 마등릉가수(摩登隆伽樹) 꽃에 바르면 그 두 가지가 모두 사라지는데 이런 과정에서 무엇이 그 과일을 물들였기에 나중에 적양(赤瓤:과일의 속이 볶은 것)이 생기는가?
법(法)에서의 문(聞)ㆍ사(思)도 이와 같아서 마음이 상속하는 힘과 훈습하는 힘이 뒤섞이면서[轉變] 후세에 과보를 얻게 하나니, 이렇게 알라.
마치 자광즙으로 저 마등릉가수 꽃에 물들이면 과일 속에 적양이 생기듯이 신업이 이와 같이 상속하면서 마음을 훈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렇듯 그 마음은 선ㆍ불선과 상대하지 못한다.
만일 이 사람이 선ㆍ불선의 업을 지으면 그 사람이 다시 애(愛)ㆍ불애(不愛)의 과보로 힘을 주어 상응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업이 멸해도 마음이 상속하기 때문에 후세에 과보를 얻는다면 어찌하여 무심(無心)인 멸진삼매를 얻거나 무상심(無想心)이 되면 상속심(相續心)이 멸하는가 하거니와 전세의 업과 과보가 그 몸을 의지하여 뒤에 생겨난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것이 마음에 훈습하여 상속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면 저 멸진삼매는 어디에서 상속하며, 삼마발제(三摩跋提)의 초심인연(初心因緣)은 어찌하여 오래되면 사라지며 어떤 인연으로 그렇게 되는가 하거니와 내가 이미 말하기를 과거에서 얻는 과보가 어느 곳이기에 이러한 마음의 과정에서 생기는가 하였다.
다시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색근(色根)이 종자니, 그 종자 위에서 심왕[心]과 심소[心數]의 종자를 얻되 두 곳에 의지하나니, 말하자면 마음[心身]의 속과 색신[色根]의 속이다. 이런 순서로 마음이 차례대로 법을 만연하여 의식(意識)을 낸다.”
그렇다면 중간에는 마음이 없거니 그가 어떻게 생기겠는가? 또 종자가 있어야 의식의 모습[意相]이라 할 수 있나니, 응당 이렇게 알라. 인(因)이 곧 과(果)라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기갈(飢渴)과 촉감[觸]의 경우와 같거늘 심왕과 심소에 어찌 모두 두 가지 종자가 있겠는가? 하나의 종자에 두 싹이 없듯이 이러한 한 인연 속에 여러 가지가 생기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들의 허물도 이와 같으니 무심삼매와 무상정(無想定)에는 마음이 끊어졌다 하였거늘 어찌하여 업과(業果)를 뒷날에 받느냐고 한다면 동일한 허물[一箱過]이 된다. 어떤 종류의 동일한 허물이며, 어떤 사람의 경지인가? 무심삼매를 주장하는 사람이다.
다시 어떤 사람은 유심삼매(有心三昧)를 들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비바사론(毘婆沙論)』에 5백 아라한이 모인 가운데 바수밀다(婆修蜜多)대덕이 말하기를, ‘만일 어떤 사람이 멸정(滅定)의 무심(無心)을 얻었다고 한다면 그는 이 허물을 얻으리니, 나의 멸삼매(滅三昧)는 유심(有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수다라(修多羅)를 인용하여 증언하되 몸이 지어감[身行]이 사라지면 모든 감관[根]은 움직이지 않으나 식(識)은 몸을 여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떤 식을 받아들이는가?
어떤 이는 의식(意識)이라 하고서 여래의 말씀을 인용하되 “의의 인[意因]이 법(法)을 연함으로써 의식이 생기는데,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촉(觸)이라 하고, 촉은 수(受)ㆍ상(想)ㆍ사(思) 따위와 함께 생긴다”고 한다.
그렇다면 의식이 있으면서도 세 가지 일에 화합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혹은 화합하되 쪽이 아닌 것도 있고, 혹은 촉은 되나 수(受)ㆍ상(想)도 아닌 것도 있는데, 이 경우 상(想)과 수(受)가 멸한다면 멸진(滅盡)이라 할 수 있다.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수다라에서 수(受)는 모두가 애(愛)의 연이 된다고 말씀하셨는가?
모든 수가 모두 애의 연이 되는 것이 아니요, 촉(觸) 또한 그러하여서 모든 촉이 모두가 애의 연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래께서는 다시 수다라에서 달리 그 이치를 말씀하시기를 무명(無明)이 촉(觸)을 내고, 촉이 수(受)를 내고, 수는 애(愛)의 인연이 된다 하여 어디에서도 촉이 수와 상을 여의었다고 설한 곳은 없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그의 허물이 이루어져서 막을 길이 없다.
세 가지 일이 구족하여야 화합이라 할 수 있나니, 그 세 가지 일이 없으면 상과 수가 생기지 않는다.
만일 이렇지 않다면 삼마지 속에도 그런 촉이 없거니 어디에 수와 상이 있겠는가 한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오직 하나의 의식(意識)이라 하는데 어떤 것이 식인가, 선인가, 물듦[染]인가, 더럽히는 무기[穢汚無記]인가? 하는데 이 이치를 이제 설하리라.
만일 선이라면 무탐(無貪) 따위의 선근과 서로 어울려야 하는데 선과 무탐 따위가 어찌 쌓임[觸]이 없다 하는가?
만일 선이 때와 인연의 힘으로 선해진 것이라면 선함 따위의 마음과 서로 여의지 않았다는 것인데 세 가지 마음[善ㆍ惡ㆍ無記]은 선함 따위를 내는 힘이므로 마음을 돌이킬 원인이 없다.
만일 물듦이라면 어찌하여 번뇌와 서로 어울리지 않으며 만일 물든 번뇌라면 어찌 닿음이 없다 하리요.
또 여래께서 십난수다라(十難修多羅)에서 말씀하시기를, “수음(受陰)ㆍ상음(想陰)ㆍ행음(行陰) 등이 있다면 그 음(陰)들은 모두가 닿임의 인연이 된다. 무상삼매에도 물듦이 없거늘 하물며 멸삼매(滅三昧)이겠는가?” 하였다.
만일 더럽히지 않는 무기[不穢汚無記]라면 그는 또 어떤 것인가? 보생(報生:異熟의 無記)인가, 위의(威儀:動作을 할 때의 無記)인가, 공교(工巧:工作을 할 때의 無記)인가, 변화(變化:神通變化를 보일 때의 습관)인가?
이제 그들에게 묻는다. 만일 보생이라면 어찌하여 유정삼마제(有頂三摩提)의 마음은 아래로 팔지(八地)까지는 중간에 끊겼거늘 욕계의 보식(報識:業識)이 마음과 상속하는가?
이렇듯 요동치 않았던 마음이 다시 일어난다면 어떻게 상속하는가?
마하구치라수다라(摩訶拘絺羅修多羅)에서 여래께 묻기를, “멸삼매에서 일어나는 데는 몇 가지 촉에 닿습니까?” 하니, 여래께서 대답하시기를, “혜명구치라(慧命拘絺羅)야, 세 가지 촉에 닿아야 하나니, 이른바 무동(無動)ㆍ무상(無相)ㆍ무소유(無所有)이다” 하셨다.
앞의 마음이 시기를 맞추려는 힘 때문에 멸삼매에 들고, 앞의 마음이 꼭 시기를 맞추므로 시기를 지나지 않고 일어나는데 이 이치는 무엇인가?
어찌하여 모두가 멸진삼매를 반연하는가? 유정(有頂)의 마음이 마치더라도 앞의 욕계의 업이 마음을 훈습하여 과보를 얻거늘 무슨 까닭에 앞의 마음이 과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는가?
무슨 까닭인가? 만일 앞의 과보의 색(色)이 거기에 끊어져서 상속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뒤의 마음이 다시 상속하는가?
만일 위의(威儀) 따위가 거기에서 닿음이 없다면 어떻게 마음으로 위의 따위를 반연하겠는가?
그 유위의 선[有爲善]인 구차제정(九次第定)과 팔해탈(八解脫)과는 서로 응하지 않아야 할 것이요, 또 물듦 없는 마음과 무기의 마음[無記心]은 상속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유정삼매(有頂三昧)는 멸진정에 의지하여 기억해내고 반연함으로써 상(想)과 수(受)가 멸하는 경지에 드는데 만일 멸진정예 든다면 심식(心識)이 있은들 무엇을 반연할 것이며, 만일 멸진정을 반연한다면 어찌 선(善)이 아닌가? 만일 선이라면 탐욕과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만일 서로 어울린다면 그것이 어찌 닿임[觸]의 인연이 아니며, 만일 다른 반연으로 멸진정삼매에 든다면 어찌하여 중간에 어지러운 마음과 서로 어울리는가?
스스로의 마음으로 분별하되 이것이 무기라 한다면 이렇듯 두 가지가 모두 서로 어울리지 못하리라. 이런 일은 모두가 아함(阿含)의 진실한 이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 논사(論師)가 펄펄 뛰면서 말하되 멸진정의 삼매에도 역시 의식이 있음을 이렇게 분별할 수 있다 하거니와 어떤 것이 그 마음 있는 삼매[有心三昧]인가? 수다라법사(修多羅法師:經部論師)가 분명히 말한 것이 있다.
수다라법사가 어떻게 분명히 말했는가? 저 보식(報識:異熟果의 滅)의 모든 종자가 은밀히 업행(業行)을 속박하여 끊임이 없으므로 곳곳에서 보식을 내고, 그 무너지는 모습이 다시 계속하여 지어가며, 나아가 열반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의 이런 말대로라면 분명 마음이 있어 육식신(六識身)과 다르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육식신이 움직이지 않는다. 처음으로 멸진정의 마음에 들어가서 힘이 늘어나면 그 때의 종자는 모두가 닫혀 숨기 때문에 무심(無心)이라 한다.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모든 종자를 거두어 모으는 마음[聚集諸種子心]이요, 둘은 갖가지 반연에 무너지는 마음[種種攀緣壞心]인데 이 중 둘째 마음을 여의었으므로 무심이라 한다. 마치 다리가 하나뿐인 평상을 두고 또 하나의 다리가 없으므로 다리 없는 경상이라 하는 경우와 같다.
그 종자가 닫혔을 때 보식의 생각[念]이 움직이는 데는 하ㆍ중ㆍ상의 차등이 있는 것이 마치 물이 끓는 것이나 화살이 날아가는 형세와 같아서 여기에서 저기에 이른다.
그 종자인 식(識)은 시기가 오면 다시 생기는데 어떤 인연을 따라 뒷날 다른 모습으로 갖가지 종자를 이루는가? 보식(報識)은 갈무리[藏]인지라 저마다의 다른 식이 법과 상대하여 함께 선과 불선의 훈습을 내되 마치 차례차례 종자의 힘으로 훈습한 것과 같이 된다.
만일 상속한다면 그 세력과 같이 미래의 몸을 훈습하여 그들에 맞는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못한 과보를 얻게 하나니, 이것은 식의 인연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게송을 설한다.
이 심식(心識)의 종지는
끝없이 상속해서 지어가나니
스스로의 마음 속 인연으로
갖가지 종류의 힘이 생긴다.
그 차례는 잃어지지 않아서
때가 이르면 과를 얻는 것,
마치 마등륭가 나무에 자광즙을 바르면
화양(花瓤)이 생기는 것 같다.
이런 이치를 여래께서는 『심밀해탈대승경(深密解脫大乘經)』에서 이런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아타나(阿陀那)의 종자가
깊고 가늘게 고은 비같이 지어 감을
어리석은 자에겐 말하지 않노니
나라고 분별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이 게송은 무엇을 밝히는가? 거기에는 깊고 은밀하게 몸을 얽어매는 기능이 있으므로 아타나식이라 하고, 일체 법의 종자가 의지하는 곳이므로 아리야식(阿梨耶識)이라 하고, 전생의 업에 의한 과보이기 때문에 보식(報識)이라 한다.
만일 식이 없으면 몸이 어찌 느끼며[覺], 몸이 다하기 전에는 온몸에 두루하여 여의지 않는 것으로 이 외에 다른 식이 없다.
만일 이 식이 무언가를 대할 수 없는 것이라면 무엇이 번뇌의 근본을 대치(對治)하는가? 번뇌와 근본은 합해진 것인데 어떻게 대치하겠는가? 그 이유는 두 법이 없기 때문이다.
물든 행과 선한 행과 무루의 마음으로 짓는 행이 상속하는 것이라면 무색계에 태어날 때엔 어떤 행이 어떤 물건에 의지했다가 과보로 나타내는가?
만일 과보가 없어도 행할 수 있다면 그것(과보)과는 서로 응하지 못하리라.
유정천에서 닦아 익히어 누가 다한[漏盡] 아나함(阿那含)에게 무소유처(無所有處)에서 무루(無漏)가 나타났을 때 무슨 아소(我所)가 있어 유정천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있는가?
여러 구분[衆同分]이 화합된 것을 목숨[命根]이라 할 뿐, 딴 물건이 없다. 그 법에는 오직 보음(報陰)의 비슷해지는 세력[相似勢力]이 있어 움직이고 변할 뿐, 다른 물건이 없다.
비슷한 세력이란 마치 벼와 줄기[稻稈]들의 비슷한 세력과 같은 것이니, 마땅히 이렇게 알라.
다시 딴 의식이 있으니 식이 있음을 말한 것과 같다. 그들은 무엇을 반연하는가? 결정되지 않은 반연[不決定緣]이다.
어찌하여 이 식의 반연을 결정되지 않은 연이라 하면서 또 말하기를 식과 다른 것[異識]이 마치 멸진정[滅三昧]과 같다 하는가?
저 동색대덕(銅色大德)의 제자들은 이를 유분식(有分識)이라 하고, 다시 어떤 사람은 근본식(根本識)이라 하는데 어느 취음[取陰:蘊]에 속하는가? 이 이치는 식취음(識取陰:識蘊)에 속한다.
이를 수다라의 문자장구(文字章句)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했으며, 어느 식의 취음이라 했는가? 말하자면 육식신(六識身)이다. 이는 경에서 “행(行)이 식(識)에 반연이 되어 줄 때 그 식은 어떤 식인가? 육식신이다”라고 설한 경우와 같기 때문이니, 이 법설을 기억하건대 이 저 행음(行陰)에 있어서 “무엇이 행음인가? 육사신(六思身)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행음이라 할 때 육사신 이외에 다른 법은 섭속되지 않거늘 다시 무엇을 기억하는가?
『심밀해탈경(深密解脫經)』 등에서 여래께서 모두 설하기를 “어리석은 범부에게는 내가 말해 주지 않노니 나라고 분별할까 두렵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다시 다음에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분별하는가? 저 유위의 법인 행(行:변천)이 곳곳에서 은은히 흘러 도는 것은 사람들이 알지 못할까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이렇게 말할 때 의지(依止)와 반연(攀緣)을 갖가지로 분별해 아는 쪽으로는 증상(增上)의 수승한 마음일 것이요, 번뇌를 대치할 때에 염(染)ㆍ정(淨)에 상응(相應)하는 쪽으로는 그를 종자식(種子識)이라 한다.
만일 과식(果識)으로써 이 식을 견주어 설했을 때 인식(因識)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하면 그는 전도된 말이다. 이런 뜻에서 석기에 신식(身識:有分識)이 있다. 다시 다른 곳에서 신식을 차례대로 설한 것이 있는데 이 이치와 상응한다.
모든 수다라에 그런 말씀이 보이는 것은 아니나 뜻으로 보아 상응한다. 이렇듯 모든 수다라의 말씀은 아니나 모든 수다라에서 흔하지 알았다 하여 아뢰야식이 없다고 불쑥 말해서는 안 된다.
이렇듯 두 가지의 심식(心識)이 함께 흐르나 한 곳에 모두 있으니, 이른바 보식(報識)과 이식(異識)이다.
만일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생기는가? 만일 두 가지 식신(識神)이 상속한다면 이는 두 생명[二衆生]이 있어야 하니 마치 몸 안의 식과 같은 것이다.
이렇지는 않으리니 저 종자와 과(果)가 서로 어울려 움직여서 보식이 흐르기 때문에 능히 이식(異識)을 훈습한다.
신식에는 이런 법이 아니니, 만일 이렇다면 이는 허물이 없을 것이다
또 종자와 종자에서 생긴 종자가 다른 것과 다르게 무너진다고 보는 일이 있다. 마치 사로가(奢盧迦:新譯에는 靑色) 우발라(優鉢羅:신역에는 蓮華)의 뿌리와 뿌리에서 생긴 것이 보일 듯도 하고 보이지 않는 듯도 한데, 진실로는 그렇지 않은가? 만일 이렇게 말한다면 그는 허물이 없다.
그렇다면 실제로 아리야식과 육식(六識)이 있는데 무슨 까닭에 육식은 나에 의지하지 않는다 하는가? 어떤 식이 되는가?
만일 아(我)가 아리야식처럼 상속하는 인연으로 움직인다면[轉] 저것[識]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만일 저것과 동일하다면 끝내 움직이지[動] 않는 터인데, 어찌하여 식 따위가 훈습을 이루는 것이 마치 자광즙(紫礦汁)으로 저 마등륭가(摩登隆伽) 나무의 꽃을 훈습하는 것과 같은가?
만일 훈습하는 기능이 없다면 수승한 쪽으로 변하는 법칙이 없을 터인데 어찌하여 먼저 알았던 일, 즉 욕심을 익힌 것 따위가 오랜 시간 뒤에 다시 기억나거나 욕심 따위가 자라나게 하는가?
나 속에는 마음이 없다면 어디에서 뒷날의 마음이 생기는가?
만일 나가 없다면 마음에 어떤 힘이 있기에 거기에 나가 의지해서 분별하는가?
만일 나가 있다면 그 마음이 어떻게 차례대로 생길 수 있으며 만일 공동의 인연으로 저 다른 것들이 힘을 낸다면 어떻게 그 실상을 앞 수 있는가?
만일 그 힘으로 생기고 머무는 생각이 움직인다면 그는 과연 어떤 법인가? 만일 그렇다면 서로 비슷하지 않은 물건이 함께 의지한다는 것이니, 일체 법은 모두가 나가 없다고 한 아함(阿含)의 이치에 어긋난다.
이렇듯 이치에 맞지 않게 자의대로 분별과 생각으로 나라고 계교한다. 그러므로 생각[思]으로 아리야식을 훈습하기를 상속함으로써 후생 몸으로 과보를 얻는다 하면 이치가 설립되나 명상 있는 몸이나 입의 업 같은 것을 말하는 것과 같지는 않다.
또 이러한 몸과 입의 업이 수다라에서 설한 삼업(三業)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 이치가 무엇인가? 이 이치는 여래께서 설하신 바와 어긋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이는 허물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어찌하여 허물이 없는가? 이 도리를 이제 말하리라. 무슨 까닭에 세 가지 업을 설하는가? 무엇이 몸이며, 무엇이 업인가? 무슨 까닭에 몸이라 하며 무슨 까닭에 몸의 업이라 하는가? 무엇이 몸의 업인가 하듯이 입의 업도 그렇게 설하리라.
무슨 까닭에 몸 따위의 업이라 하고, 눈의 업 [眼業]이라 하지 않는가? 무슨 까닭에 이런 이치를 설하는가?
십선업도(十善業道)를 삼업(三業)에 섭속시켜 보이기 위한 것이니 많이 말하면 사람들을 두렵게 하기 때문이다.
비리지자(毘離支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 가지 계를 배울 때 세 가지 업을 말해 주거든 몸으로 지을 뿐이요, 입도 아니고 뜻도 아니다.”
오직 하나만을 분별하고는 다시 다른 사람에게 걸해 준다 한다.
“몸의 업의 모습에서 몸은 다시 근대(根大)에 섭속되니, 대(大)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몸의 업이라 하면 이는 생각이 집결했다는 뜻이요, 신대(身大)라 함은 대(大)로 이루어진 미진의 무더기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정한 것을 몸이라 하나니, 부정한 물건이 화합해서 모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하늘 사람의 몸은 몸이라 하지 않는다.”
뜻으로 짓는 지어감[行:행위)을 뜻의 업[意業]이라 하고, 몸으로 짓는 업을 몸의 업[身業]이라 한다.
생각[思]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이른바 생각함[思量]과 결정함[決定]과 나아감[進趣]이다.
몸으로써 몸을 움직여 상속하는 동안에 생긴 원인[因]인 바람[風界]에 의해 불리어진 것을 몸의 업이라 하는데, 그 중간 구절은 생략했다. 마치 사라유(沙羅油)라 하는 것 같고 혹은 바람에 의해 날리는 미세한 먼지를 줄여서 바람 먼지[風塵]라고 부르는 경우와 같으니, 신업을 말할 때 삼업도(業道), 즉 살생ㆍ투도ㆍ사행(邪行)은 생략되는 것과 같다.
그들을 어찌하여 생각[思]이라 하는가? 그 몸붙이[身數] 섭속되기 때문이니, 그 몸의 업이 움직여 살생ㆍ투도ㆍ사행을 할 때, 그 몸의 업이 움직임에 따라 몸이 상속하여 일으키는데 그것을 일러 짓는다 할 수 있다. 마치 도적이 마을과 섶나무[薪草]를 태우는 일이나 밥을 익히는 일과 같다.
생각[思]을 어찌하여 업의 길[業道]이라고도 하는가? 악도(惡道)를 행하는 업이기 때문에 업의 길이라 한다. 혹은 몸을 움직여 굴리기 때문에 업의 길이라 한다.
또 세 가지로 생각하는 업이기 때문에 업의 길이라 하나, 그 생각이 제자리에 머무르면 살생과 투도와 사행을 한다.
또 세제(世諦)에 의해 몸의 업에는 선(善)과 불선(不善)이 있다고 말하며, 또 그 문(門:身)에는 그 생각이 있으므로 세간을 왕복하면서 서로 응하는 도리가 있다고 한다.
만일 생각이 이렇듯이 건과 불선의 업이라면 수다라에는 어찌하여 몸으로 짓는 세 가지라 하는가? 생각의 업[思業]이 모이면 불선한 일을 지어 고통의 씨를 내고, 괴로운 과보를 받게 하기 때문이다. 그 문[身]이 그 반연들을 지탱[住持]해 주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뜻[意]이 있으시다
저 생각이 여러 가지로 다르기 때문에 사의업(思意業)이라 하니, 오직 뜻과 상응할 뿐 몸과 입에는 움직이지 못한다. 무슨 까닭에 여래께서는 사사업(思思業)을 말씀하셨는가? 앞에 말하기를 생각에 세 가지가 있다 했는데 그 중 두 가지는 생각[思]이요, 셋째는 나아감[進趣]이다.
그 생각 그대로가 업이요, 말[語言]은 곧 메아리인데 메아리는 이해할 수 잇겠거니와 그 업이 생각으로 전진해 나아가는 이름과 모양으로 말하기 때문에 말[言語]이라 하고, 기억해 생각해내는 이치로 말하기 때문에 말이라 한다.
업은 앞에 말한 바와 같으니, 말[言語]로써 업을 일으키기 때문에 입의 업 [口業]이라 하되, 중간의 말을 제외한다.
식(識)의 뜻[意]을 뜻[意:意業]이라 하는데 뜻(의업)이 곳곳에서 생길 때, 의업의 경계 또한 마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앞에 말한 바와 같다.
만일 몸의 업에 생각하는 자[思者]가 꼭 있어야 하나니, 그것은 심(心)이나 무심(無心)과는 다르다. 그럴 때에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 두려움과 두렵지 않음이 있겠는가? 생각하고 훈습하는 기능이 무너지지 않으므로 두려움과 두렵지 않음이 있게 되니, 사의(思議:생각과 말)의 기능이 가장 수승하기 때문이다. 두려움과 두렵지 않은 뜻이 일어나서 분별한다.
그 뜻에 훈습된 것을 어떻게 하여야 파괴하겠는가? 만일 스스로 증득해서 막힘[遮]과 막하지 않음[不遮]을 알면 생각[思]이 다시는 생겨날 원인이 없어진다.
그 중에서 무엇이 무너지는가? 두려움을 버리거나 두렵지 않음을 버릴 때에는 생각이 그 원인이요, 뜻이 일어나 분별한다.
또 버림으로써 인을 삼는 법이 있으니, 눈[眼業]ㆍ말[語業] 따위의 업이다.
각업(覺業)을 설했고 조작업(造作業)은 설하지 않았다. 어떤 것이 각업인가? 말하자면 뜻 지음[作意:노력]으로 행하는 일이요, 어떤 것이 조작업인가? 눈 따위가 어디에서나 차례대로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여래께서 말씀하시되 세 가지 업은
법과 이치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셨는데
내가 해설한 업으로 복을 이루어서
중생들과 함께 성불하게 하여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