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11일(주)
* 시작 기도
주님...
이 새벽, 주를 바라봅니다.
잠자는 나의 영혼을 깨우사 주님으로 가득 채워주소서.
세상 만물 안의 것들로 채우기 원하는 나의 육신은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게 하소서.
어제는 현지 신학교 방문을 하였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감사함으로 학업에 임하는 젊은 신학생들이 그렇게 귀하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억압된 나라에서 예수를 믿고 그것도 신학을 공부하여 예수를 증거하고자 하는 그 열정이 너무도 귀합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성령으로 붙들어 주시고 어떠한 환경의 파도에도 포기하고 않고 꿋꿋하게 일어설 수 있는 주의 종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들은 이미 삶 자체가 무덤이오니 그 무덤의 자리에서 예수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여 서게 하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전 2:1-11
제목 : ‘나를 위하여 살아온 인생’이 다 무너지고 흩어져 힘이 빠지니 이제야 주님의 은혜가 보입니다.
1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2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였노라.
3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을 꼭 붙잡아 둘까 하여
4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5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6 나를 위하여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기 위하여 못들을 팠으며
7 남녀 노비들을 사기도 하였고 나를 위하여 집에서 종들을 낳기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도 내가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더 많이 가졌으며
8 은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9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
10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11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 나의 묵상
전도자는 인생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시도해본다.
1절의 원문은 자기와의 대화형식으로 표현된다.
“나는 즐거움을 가지고 너를 시험하고 싶다”
인생의 즐거움은 어디서 오면 그것은 무슨 유익이 있을까?
웃음에 대해 말하건대 그것은 미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즐거움에 대하여 말하건대 그것이 인생에 무슨 유익이 있다는 말인가!
지혜를 깨치려고 술에 빠져보기도 하였고 어리석은 일을 붙잡고 늘어지기도 하였다.
하늘 아래에서 한시적으로 사는 인생들에게 무엇이 선한 것인지 알아보려고 하였다.
4-10절까지는 전도자가 의미 있는 인생을 얻고자 한 일들을 열거한다.
나는 큰 사업을 해보았다. 나는 집을 짓고 포도원을 가꾸었다.
여러 동산과 정원을 손질하고 그곳에 온갖 과일나무를 심었다.
나를 위하여 못을 만들어 그 나무 숲이 우거지게 물을 대었다.
나를 위하여 남종과 여종을 사들였으며 집에서 태어난 종도 있었다.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도 내가 소와 양떼의 소유를 더 많이 가졌다.
나를 위하여 은금과 왕들의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다.
이처럼 나는 위대하였고 예루살렘에서 일찍이 나보다 더 많은 (재산을) 증식시킨 사람도 없었다.
내 지혜가 늘 내 곁에 있었다.
나는 보고 싶은 것을 다 보았고 누리고 싶은 즐거움을 다 누렸다.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으니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다.
코헬렛 곧 전도자인 지혜의 왕 솔로몬은 인생을 회고한다.
솔로몬은 모든 지혜와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한다.
해 아래에서, 만물 안에서 행하는 모든 일은 헛되고 무익하다.
일반적인 지혜는 인생의 안정과 성공과 풍요에 이르는 길을 소개한다.
그러나 회한에 가득찬 솔로몬의 고백은 일반적인 지혜가 목적하는 인생의 성취들을 헛되고 무익하다고 결론 내린다.
전도자는 인생의 지혜를 찾는데 힘을 다하여 궁구한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시도를 하였다.
먼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을 살펴보았다(1:14).
그러나 그것은 헛되고 헛되었다.
그리고 지혜가 무엇인지 미친 것과 어리석은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1:17).
그런데 그것도 헛되었다.
이제 인생의 즐거움이 어디서 오는지 시도하였다.
‘나를 위하여’ 큰 사업을 하고 그것을 성공하였다.
‘나를 위하여’ 집과 포도원과 동산과 정원을 만들고 과목들을 심는 등 에덴동산의 낙원을 만들어 누렸다.
‘나를 위하여’ 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많은 가축들을 길렀다.
‘나를 위하여’ 금은보화를 쌓고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다.
전도자는 ‘나를 위하여’ 사는 인생이 창대하게 되었다.
보고 싶은 것을 다 보고 누리고 싶은 즐거움을 다 누렸다.
이 모든 일은 그가 수고하여 얻은 인생의 보상이다.
그러나 그가 시도해본 것에 대한 결론은 이전과 동일하다.
이 모든 것이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다!
전도자가 시도한 인생의 즐거움!
그것을 위해 수고한 결과들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는 인간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다 누렸다.
그 즐거움을 위해 얻고자 하는 것들을 다 얻었다.
그러나 그의 수고는 헛되며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헛되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모든 수고가 ‘나를 위하여’ 행한 것이었다.
해아래 사는 인생, 나를 위한 인생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그런 인생의 결말은 수고와 슬픔뿐이 아니던가!
(시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이는 우리의 인생이 죄악 가운데 있으며 그로 인해 주의 진노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시 90:8-9).
아담 안의 실존된 인생, 그의 인생은 오직 ‘자기를 위한 인생’이며 그 수고는 헛되고 무익할 뿐이다.
죄인의 수고는 사망의 열매 외에 무엇을 거둘 수 있겠는가?
해 아래에 갇힌 인생, 전도자는 그 역력한 한계상황 속에서 참 하나님을 앙모한다.
그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 하늘로부터 오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만물 위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구원을 열망하는 것이다.
‘자기를 위한 인생의 모든 수고가 헛되다’는 전도자의 지혜는 확실히 정당하다.
이는 예수께서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는 그의 인생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결론 내리셨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 주와 복음을 위해 사는 자는 그의 인생을 얻을 것이다!
그런 인생만이 참된 인생이며 의미 있는 인생이다.
이는 자기를 부인하며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다.
(막 8:34-35)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그리스도인의 명제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는 것’이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자, 새 생명을 얻은 자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살도록 부름 받았다.
(롬 14:7-9)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오늘 전도서를 묵상하면서 지나온 60년의 인생을 돌아본다.
그 인생은 한 마디로 ‘나를 위하여’ 살아온 인생이었다.
본문에 나오는 전도자는 인생의 최고점을 찍으며 그런 부귀영화를 누리며 남부러울 것이 없는 인생을 살았지만, 나는 그리 내세울 것도 없는 인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한 인생을 산 것이다.
이른 나이에 학원사업을 시작하여 그래도 또래에 비하여 훨씬 삶의 안정을 꾀할 수 있었다.
이런 사업도 명분은 주를 위하여 한다고 하였지만 이것마저도 정작 나를 위한 사업이었다.
학원사업을 하다가 신학을 하였지만 이 신학 역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목사가 되기 위한 발판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한 인생을 살아왔는가?
그렇게 몸부림치며 쌓아올렸던 나의 인생, 사업과 목회는 다 무너지고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철저히 무너져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았다.
파산 당한 자의 심정이 이런 것이라면 나는 두 번 다시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그 무덤 같은 자리에서 복음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만날 수 있었다.
욥이 고백했던 것처럼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다.
이런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으며 다만 불안만이 나의 친구가 되었다.
이런 불안함 속에서 내가 바라볼 것은 오직 만물 위에 계신 우리 주님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까지도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위로와 나의 평안을 위하여 복음을 듣고 말씀을 묵상하였던 자이다.
하지만 오늘 이 시간, 내 몸에서 많은 의와 욕심 그리고 정욕으로 쓰려고 쌓아두었던 것들이 다 빠져나갔음을 본다.
나의 유일한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이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흩어진 자리에서 시편 88편 곧 무덤의 노래가 터져나온다.
(시 88:4-5,19)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다 떠나고 무너지고 흩어져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주님은 그 자리에서 손을 내밀어 주셨다.
그리고 이곳 베트남으로 보내신 것이다.
여기서는 내가 나서서 할 수 있는 일, 사역, 그 무엇이 없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서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홀로 얻어먹으며 그 말씀을 우리 성도들과 함께 나누는 것밖에는 없다.
그래도 마음은 평안하다.
여호와 샬롬의 은혜를 여기서 누린다.
만물 안의 것을 얻으려고 갖은 노력과 수고를 하였으나 그것은 진짜로 바람 잡는 것과 같이 허무할 뿐이다.
하지만 내 육신의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이 바람 잡는 것 같으나 그 안에 성령께서 주시는 복음의 삶이 있음을 느끼며 오늘도 그 나라를 누리며 오늘 주일을 시작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60년 인생을 돌아보니 손에 잡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 무너지고 깨지며 흩어졌나이다.
그런데 그런 무덤의 자리에 우리 주님의 생명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원망도 하고 불평도 했습니다.
왜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 거두어 가시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을 거두어가지 않으시면 나는 언제까지 바람만 잡으려 날뛰었을 터, 허무와 허상만이 나의 전부가 되었을 것입니다.
내 몸에서 힘이 다 빠진 지금, 오직 주님만 바라볼 수 있는 최적의 시간임을 믿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주시는 것만 받기 원합니다.
내게 주님의 긍휼을 베푸소서.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주옵소서.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오늘 주일 아침, 주님과 말씀으로 연합하여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