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원 베드로 신부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1코린토 7,25-31 루카 6,20-26
마태오 복음의 참행복 선언(마태 5,3-12 참조)은 ‘산상 설교’(5─7장)의 첫머리에 놓여,
시나이산에서 주어진 구약 율법을 완성하는 ‘신약의 새 모세’로 예수님을 내세웁니다.
한편 오늘 루카 복음의 참행복과 불행 선언은(루카 6,20-26 참조) ‘평지 설교’(6,17-49)에
속한 대목으로, 산에서 평지로 내려오시어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백성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각각 네 가지로 구성된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은 대칭을 이루며 서로 그 뜻을 밝혀 줍니다.
‘가난한 이들’이 ‘부유한 이들’과 달리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까닭은, 자신의 미소함을 인정하고
오직 하느님께만 의탁하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그분의 현존과 은총 속에서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특히 저 먼 미래의 무엇이 아닌
“지금”(21.25절)의 삶을 잘 살피고, 하느님 없이 자만자족하는 부자가 되기보다는
그분께 희망을 두기에 당장의 불편과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겨 낼 줄 아는
‘스스로 가난하게 된 사람’, 곧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상속자가 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부유하고 즐겁기만 한 삶에 익숙해진 이는 그것을 잃어버릴까 늘 두려워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데 필요하다면 스스로 세상의 가치를 내려놓는 ‘결핍’에 익숙해진
신앙인은(제1독서 참조), 세상일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평정심과 확신을 잃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께서만 주시는 그 온전한 ‘자유’를 현세에서부터 미리 누리며 살다가,
장차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우리야말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 아닐까요?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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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1코린토 7,25-31 루카 6,20-26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유시화의 글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분의 책 중에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말에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도 있습니다. 남이 보기에는 불행해 보이지만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이 보기에는 행복해 보이지만 불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라고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의 떡이 커 보인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2005년에 ‘ME’ 주말을 다녀왔습니다.
그 뒤로 엠이 모임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엠이는 결혼한 부부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대화하며 보다 행복한 부부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모임입니다.
결혼하고 부부가 되어 가정을 꾸미는 것도, 저처럼 사제가 되어 독신으로 사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모두가 감사할 일입니다.
신학생 때는 사제가 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보좌신부 때는 본당신부가 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본당신부 때는 보좌신부가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작은 본당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이 갖추어진 성당에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20년이 지나서 안식년을 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어진 순간을 감사드리고,
그 시간에 충실한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니듯이
행복은 결코 내가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행복 역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우리가 늘 추구하지만 그것으로는 얻을 수 없는 행복의 조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현실의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마음은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욕심, 욕망, 출세, 성공, 권력, 명예’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불꽃 속으로 날아드는 불나방처럼 모든 것을 불태우려 합니다.
하지만 그 끝은 ‘허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이야기하십니다.
그것은 진흙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연꽃’과 같습니다. 시련 속에서도, 절망 중에서도,
고통의 한 가운데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행복은 어떤 조건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물론 행복은 소유에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가난할지라도, 병중에 있을지라도, 시련과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하느님을 믿고 따르면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재물을 가졌을지라도, 높은 자리에 있을지라도,
많은 능력을 가졌을지라도 하느님을 떠나 있으면 행복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라고 권고하였습니다.
반면에 불행은 불평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매사에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사람은
건강해도 재물이 많아도 능력이 있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노래도 잘하였고,
말도 잘하였고, 외모도 잘 생겼습니다. 제게 없는 것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런데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이 많으면 많아서 힘들다고 했습니다. 일이 적으면
무시당한다고 원망했습니다. 상사에게는 대화가 안 된다고 불만이 있었습니다.
젊은 직원에게는 예의가 없다고 불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행복은 늘 곁에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이
가득한 사람 곁에는 행복이 머물 수 없습니다. 행복하고 싶다면 감사의 문을 활짝 열면 됩니다.
계속 행복하고 싶다면 불평의 문은 꼭 잠가 놓으면 됩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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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정 안드레아 신부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1코린토 7,25-31 루카 6,20-26
세상 십자가를 진 자가 행복합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6,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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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굶주림 모욕 등 이런 세상 십자가를 진 자가 행복하다고 하셨어요. 예수님은
세상의 천한 삶을 하늘 기준의 가치로 다시 풀어 주셨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행복을 찾는 사람
하늘 기준으로 보는 시력을 가져야겠죠.
예수님이 권하시는 행복은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천상적이며 영원하죠.
하늘의 행복뿐 아니라 받을 상도 커서 예언자들 대접과 같다는 겁니다.
하늘 볼 줄 모르는 눈에다 세상 욕심 독재까지 권력 횡포 참 어이없어요.
북한 소련 중공 외 독재 공산독재자 자신을 신으로 착각하는 멍청이들!
인간 목숨 가치를 자신들이 밟아 버린 걸 죽을 때 느껴도 때는 늦으리.
서울대교구 이기정 안드레아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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