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원 베드로 신부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1코린토 9,16-19.22ㄴ-27 루카 6,39-42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지붕을 만들 때, 삼나무나 돌무화과나무로 만든 대들보를 올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얹은 다음 거기에 진흙을 발랐습니다. 옥상은 작은 방을 만들거나 작물을
널어 말리는 장소였고, 지붕 위에 누가 올라가면 천장의 대들보 사이에서 바싹 마른 나뭇가지
부스러기나 티가 떨어져 집 안에 있는 사람의 눈에 들어가기 일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군중에게 친숙한 소재인 들보와 티를 예로 들어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남을 심판하지 마라.”(루카 6,37) 하신 말씀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다고, 잘못된 스승이 자신을 넘어서는 제자를 키워 낼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
정작 자신이 눈먼 이요 부족한 스승임을 외면한 채, 한 줌도 채 되지 않는 지식과 소유를 내세워
형제와 이웃을 단죄하고 가르치려고만 드는 이를 가리켜 위선자라고 꾸짖으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눈이 먼 줄 알면서 눈을 뜨려고 노력하지 않는 나태함도, 앞이 보이는 척하며
자신을 과시하는 위선도 모두 경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시선을 두는 사람의 눈에는 티가 오래 머무르지 못합니다. 코린토 신자들에게 스승임을
자처하거나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고, 복음을 전하고도 스스로 실격자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자신을 단련하였던 바오로 사도의 모범을 기억합니다(제1독서 참조).
내 눈 속의 들보는 빼내고 가족과 형제의 눈에 든 티를 사랑으로 발견하여 조심히 꺼내 줄 수 있는
혜안을 하느님께 청합시다. “주님, 저희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마태오 20,33).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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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호 베드로 신부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1코린토 9,16-19.22ㄴ-27 루카 6,39-42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삶을 성찰합시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루카 복음 6장 39-42절)
성찰
사제로 살면서 거의 매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고해실에서 죄 고백을 듣는 일입니다.
성사 준비를 잘 하여 눈물로 통회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 준비 없이 고해실에 들어오는
분들도 종종 만납니다. 그럴 때면 짜증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 옹졸한 마음이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가 구현되는 신비를 방해하지 않도록 인내의 은총을 청하며 그 자리를
지킵니다. 그런데도 듣기가 참 어렵고 민망할 때가 있습니다. 고해실에 들어와서 내 죄는
고백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남의 죄만을 고백하는 경우입니다.
교회 공동체에는 ‘성찰’이란 좋은 기도 관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찰하려고 앉았다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내 죄가 아니라 남의 죄가 먼저 떠오릅니다.
내 죄는 성찰하기 힘든데 반해 남의 죄는 참 쉽게 발견합니다.
우리의 눈은 어둡습니다. 참된 것과 거짓된 것,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저마다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볼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눈이 밝아져 참된 것을
볼 수 있을까요? 다른 이에 대한 판단을 멈추고 밖으로 향해 있는 시선을 돌려 내 안에 머무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께서는 참된 것을 우리에게 밝히 보여 주실 것입니다.
의정부교구 신중호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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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1코린토 9,16-19.22ㄴ-27 루카 6,39-42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예수님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는 말씀에
이어서,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그런데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무엇일까?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심판한다는 것은 그것을 그렇게 심판하게 하는 기준이 되는
‘준거 틀’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관점, 태도, 사고방식의
틀(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입관이나 편견 등 고정관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형제의 눈에서 ‘티’를 바라보게 하는
우리 눈의 ‘들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2)
그런데 우리 눈의 ‘들보’를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곧 ‘보여주는 대로’, ‘들려주는 대로’를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선입관이나 편견 없이, 곧 사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복음 정신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그를 ‘위하여’(ùπερ), 그가 잘 되기를 바라고
구원되기를 위하여 ‘호의와 자애’(헤세드)로 받아들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빛이 되어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비추어주는 빛으로 보는 일,
곧 자신 안에 심어진 사랑의 빛을 밝히는 일입니다.
결국 빛이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보는 일,
곧 빛으로 보는 일이 ‘들보’를 몰아냅니다. 곧 용서하는 일, 사랑하는 일이 우리 눈의 ‘들보’를
빼내고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7)
결국 심판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것을 넘어, 그것을 '호의로 보는 것,
곧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부어주신 은총이요 빛입니다.
결국 ‘들보’를 몰아내는 이는 내가 아니라 빛이요 사랑이신 주님이십니다.
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눈에서 보지 못하게 하는 들보를 빼내 주소서!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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