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몽집 / 김희준 어머니 엎드려보세요 세상은 내가 껴안을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황금나무가 꿀을 품고 천장까지 자랄 것입니다 가지를 타는 흰 뱀은 환생을 꾀하고 거북이는 백사장 가득 알을 낳겠지요 중력에 눌린 명치가 무겁습니다 엎드린 잠은 딸꾹질과 통증을 유발합니다 그보다 더한 숨이 가쁜 금붕어가 유리어항에 있습니다 색색의 꼬리가 물결무늬로 퍼지고 물결무늬는 단어를 완성시킵니다 돌아서는 몸짓이 쉼표를 만드는군요 벌어진 곡선에서 잉어가 튀어 나옵니다 금이 간 것은 어항입니까 침실입니까 엄청난 속력으로 죽음에 다가가본 적 있으신가요 젊은 피를 수혈 받는 실험 쥐가 그러하고 황금나무 꿀을 받아먹는 입술이 그러하고 끝없는 흰 뱀의 허물이 그러합니다 허울 없는 오십 번의 생일에서 어머니가 껴안은 것은 무엇입니까 지천명에 다다를 동안 품은 혁명 하나 없다고 우울하십니까 그럴 땐 손을 벌려 바닥에 엎드리세요 손아귀에 힘을 주고 백사장을 안아보세요 수천의 새끼가 알에서 부화하는 중일 겁니다 온몸에 털이 가득 나 있던 어머니의 첫울음이 그 몸짓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 유고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2020.09)
* 김희준 시인 1994년 경남 통영 출생. 국립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재학 중(현대문학전공) 사망 2017년 <시인동네> 등단. 유고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유고 산문집 『행성표류기』 2020.7.24. 27세의 나이로 요절. ************************************************************************************************* * 지천명은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라 했습니다. 하늘의 뜻을 알아야 하는 하필 이 나이에 갱년기나 우울증이 오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아이를 낳아 키우는 사이 내 이름이 사라지고 생활이 사라졌습니다. 맞춤형 엄마로 아내로 자식으로 살아야 하는 어머니의 삶을 통째 보듬는 「태몽집」은 품이 깊어 어디까지 걸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네요. 오랜 시간 접었던 자아를 다시 펼치기에 진정한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바라 살았는지, 질문이 무성합니다. 대답을 구할 수 없는 질문은 말줄임표가 대신합니다. 나를 잉태했을 때 꾸었던 어머니의 꿈은 어쩌면 어머니가 걷고자 하는 삶의 지표는 아니었을까요. 시인의 눈길에 연민이 가득합니다. 뜨겁고 애틋한 마음을 어머니에게로 열어둔 시인은 엄청난 속력으로 죽음에 다가가는 어머니와 마주합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껴안은 젊은 어머니의 혁명을 읽습니다. 안타까움과 공포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오히려 유연해지는 시인은 바닥에 엎드려 백사장을 안습니다. 순간 수천의 새끼가 알에서 부화하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첫울음을 떠올립니다. 손바닥에 하늘의 뜻이 비치십니까. 어린 시인이여, 당신의 무한한 애정에 눌린 통증이 무겁습니다. - 강재남 (시인) ************************************************************************************************ ** 혜성처럼 문단에 나왔던 김희준 시인은 2020년 불의의 사고로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강재남 시인은 바로 그 김희준 시인의 엄마입니다. 생때같은 딸을 먼저 앞세운 엄마가 딸이 생전에 엄마에게 들려준 시를 읽고 있습니다. 죽은 딸의 시를 읽고 있는 엄마의 말을 지금 당신이 읽고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에게 도착하지 못한 말』은 별이 된 딸에게 보내는, 저 먼 우주로 보내는, 노래이고 자장가이고 메시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박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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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태롭고 불안한 문장들의 호명
비를 좋아하고, 바람을 좋아하고, 기린을 좋아하고, "빨간 우체통과 광대, 코끼리, 표범, 사슴, 그리고 다시 사람과 시를 좋아했던 김희준 시인. "백양나무와 자작나무, 사슴벌레와 들풀거미, 기하학적인 문장과 그로테스크한 꽃무늬 벽지를 보며 꽃무늬 벽지를 보며 밤새는 시간을 좋아"하던 시인."(2014. 이조년문학제 전국한글시백일장 대상 수상 소감) 그는 자신이 시를 쓰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을 추상적으로 혹은 구체적으로 표현해내기 위한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저는 눈물이 많아서 정말 어이없는 이유로도 잘 훌쩍거려요. 그런데 이따금 저도 왜 이렇게 우는지 모를 때가 많아서 이유를 찾으려고 해요. 슬픔이나 외로움, 섭섭함이라고 단정짓기에는 너무 광범위한 감정이라서요. 그보다 더 세밀하고 다양한 울음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 이해 받기 어려운 감정의 영역을 모두에게 설득해주기 위해서 시가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웹진 『시인광장』 2020. 4월호).
1994년생. 아직 만으로 스물다섯 살. 등단하기 전까지 전국 백일장을 다니면서 장원을 거의 다 쓸었고 문학 부문에서의 상을 합하면 100여 개가 될 정도로 미래가 촉망됐던 청년. 통영시에서 '통영의 딸'이란 이름으로 장학금을 주며 키우던 문학도였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보호자이고 친구이고 연인이었던 딸.
어머니 엎드려보세요 세상은 내가 껴안을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황금나무가 꿀을 품고 천장까지 자랄 것입니다 가지를 타는 흰 뱀은 환생을 꾀하고 거북이는 백사장 가득 알을 낳겠지요 (……) 허울없는 50번의 생일에서 어머니가 껴안은 것은 무엇입니까 지천명에 다다를 동안 품은 혁명 하나 없다고 우울하십니까 그럴 땐 손을 벌려 바닥에 엎드리세요 손아귀에 힘을 주고 백사장을 안아보세요 수천의 새끼가 알에서 부화하는 중일 겁니다
지천명에 달한 어머니의 허무를 달래주기 위해 쓴 시. 그 나이에 "다다를 동안 품은 혁명 하나 없다고 우울"해 하지 말고 어머니가 낳은 "수천의 새끼가 알에서 부화하는" 걸 보라고 위로한다.
그가 남긴 시작노트를 읽어본다. "먼저 가버린 이름을 생각한다. 입김은 고체가 되어 동그라미로 떨어진다. 첫눈을 사람으로 태어나게 한다면 그건 너일 거라고, (······) 젖은 이름을 가졌구나, 얼마 불리지 못한 어린 이름을 적는다. 지나가다 널 닮은 사란을 봤어. (······) 네가 없는 세상에서 네 이름을 모래사장에 써두는 일에 금방 하루를 써버리고. 불러줄 이름이 지워지고 있어. 그럼에도 첫눈이 따뜻하면 좋겠어. 바다에 겨울과 봄이 동시에 쏟아지고 있었다." (시인뉴스 포엠, '생경한 얼굴 김희준—시인' 2018.12.21.) 마치 오늘의 이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듯하다.
나는 이 발문을 김희준 시인이 적은 것이라 여긴다. 예전에 창졸간에 이곳을 떠난 우리 아버지의 말을 어머니가 무당이 쥐여준 대나무 가지 흔들며 전해주었듯이, 나는 김희준 시인이 불러준 것을 받아 적었을 따름이다. 그가 남긴 두 권 분량의 글은 천계의 언어로 되어 있어서 지상에 발붙이고 사는 내가 도저히 읽을 수 없다. 나중에 김희준 시인과 우주의 주파수를 공유하는 이가 나타나 이 미묘하고 섬세한 시의 속잎을 제대로 피워주길 기대한다.
김희준 시인은 "소행성09A87E"로 돌아간 게 틀림없다. 아니다, 그는 아직 이 별에 머물고 있다. 이 시집이 나오는 9월 10일. 자신의 스물여섯번 째 생일이자 사십구재가 드는 그날, 시집을 안고 자기 별에 돌아갈 것으로 믿는다. 그러니 우리는 지구별의 언어와 감정으로 김희준 시인을 소환해선 안 된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면서 그를 떠올려야 한다. 자신의 엄마에게 남긴 마지막 메모처럼, "엄마 나는 좋아, 다 좋아" 하며 짓던 환한 웃음.
마지막으로 한 인터넷 잡지에서 김희준 시인이 한 말을 여기 덧붙인다. "모든 시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제가 아주 사랑한다고요. 늘 고민하던 말이었는데 마땅한 기회가 없어서 꺼내지 못했거든요. 선생님, 시가 너무 좋아요. 매일 절절 생각해요. 정말 아끼고 사랑해요."(웹진 『시인광장』, 앞의 글)
- 장옥관 (시인) / 시집 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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