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죽선녀竹竹仙女를 만나다
박정애
*MEMO : 기억력이 엄청나게 떨어졌고 앞으로도 더 떨어졌으면 떨어졌지 좋아질 까닭이 없다는 걸 실감하는 요즈막이다. 기억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일단 기록하고 보는 게 장땡이다 싶다. 그래서 내가 최근에 겪은 일을 이렇게 구구절절 적어보는 것이다. 한때는 문학소녀였지만, 오래 손 놓고 있던 글쓰기를 막상 시작하고 보니 마음이 금세 뜨뜻해지고 그 뜨뜻한 게 어지러이 출렁거리는 게 꼭 대여섯 달 된 아기가 뱃속에서 자위를 뜨는 것 같다.
(지수야, 내 딸아. 네가 크고 내가 늙으면, 네가 그 낭랑한 목소리로, 우리 엄마가 쓴 글이네? 하면서 이 잡문을 뒤적거리는 날도 있겠지. 2003년 여름, 네가 여섯 살 때의 일이란다.
7월 16일
작은애 둘을 어린이집 버스에 태워 보낸 다음 층계를 느직느직 올라오다가 전화벨 소리를 듣고 후다닥 뛰어 들어온 게 아홉 시십 분쯤이었나. 시곗바늘은 어느새 열 시 반을 넘어서 있다.
"그 나이 엄마들은 아들이 애인 아이가. 모르긴 몰라도 아들을 그냥 남자 자식이라꼬 생각는 엄마들이 드물을 끼다. 연희 니가 이해하고 치아라 마."
"그래도 정도가 있제. 정도 이상이만 미친년 아이가?"
"야야, 뱃속에 얼라가 듣겠다. 암만 그래도 그렇제 즈그 엄마한테 미친년이 머꼬. 으잉?"
듣기 좋은 노래도 장 들으면 싫다는데 한 시간 넘어 악에 받친 푸념을 받자해 주는 일은 여간 고역이 아니다. 그것도 나의 소중한 황금시간에.
남편과 시동생과 큰애를 깨우고 먹이고 입혀 차질 없이 내보내고 오 분 정도 숨 돌리다 곧바로 연년생 남매를 깨우고 씻기고 먹이고 입혀 아파트 현관에서 어린이집 선생에게 인계하는 전쟁 같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으례 라디오 음악 채널을 틀고 커피 한 잔을 타서 소파 깊숙이 몸을 묻는다. 텔레비전을 보가나 책을 읽거나 공상에잠기거나 뭘 하든지 간에 마냥 뭉그적거린다. 오후 한 시 좀 넘어 큰애가 초인종을 누를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집안일을 하지 않고 나만의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 막내를 어린이 집에 보낼 수 있게 된 다음부터 내가 세운 절대 원칙이다. 큰애와 한 시간 차로 작은애들이 돌아올 때까지도 나는 큰애에게 컴퓨터게임을 하라고 해놓고는 일없이 빈둥대는 편이다. 작은애들이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전쟁은 다시 시작되어 세 아이들이 죄 잠드는 열한 시까지 계속된다. 나는 엉덩이 한번 차분히 붙이고 앉아 있을 짬이 없이 내내 동동거리며 아이들과 씨름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숙제 봐주고 학원 보내고 장을 보고 음식을 마련하고 은행을 다녀오고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상을 차리고 설겆이하고 쓰레기를 묶어내야 한다. 여섯 살, 일곱 살 연년생 오뉘와 아홉 살 아들이 설치는 스물네 평 아파트에선 집안일을 해도 동동거리고 집안일을 안 해도 동동거리게 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아예 아침 설겆이며 나 혼자 먹는 점심마저 몽땅 작은 애들이 돌아온 다음에 하는 걸로 미뤄 버릇했다. 책을 읽다가도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대개는 한 시간을 못 넘기고 스르르 잠들곤한다. 셋을 다 끼고서 온종일을 복닥거릴 시절도 있었으나 그때는 내가 지금보다 젊었다. 삼십대도 반 토막을 까먹고 보니 이제는 이렇게 한숨 자고 나야지 체력이 닿는다. 그래서 이 황금 같은 시간에 오는 전화는 성가실 수밖에 없는데, 칠칠치 못한 남편이 무얼 찾아봐 달라는 긴급 전화가 종종 오기 때문에 전화기 코드를 아예 빼놓지는 못한다.
수화기 저편에서 연희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나는 또 무슨 일이 터졌구나 싶었다. 연희는 누가 보더라도 예쁘고 머리 좋은 아이지만 우리 집안에선 문제아로 통한다. 그렇다고 가출을 하거나 마약을 하거나 할 만큼 간이 크진 않고 그저 사소한 일에 울근불근 소가지를 잘 부릴 뿐이건마는 우리 집안같이 유별난 데서는 딸아이가 그 정도 유별나게 구는 것만으로도 문제아 낙인을 찍어버린다. 연희는 나보다 한 살 아래면서도 생일이 빨라 같은 초등학교를 같은 한견으로 다니다 보니 자연 친해진 사촌이다. 중학교부터는 학교가 갈리기도 했고 워낙 성격이 달라 소원하게 지냈었는데,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며 한집에서 자취를 하고 결혼해서도 서울서 가까이 살다 보니 친척 중에선 제일 무람없는 사이다.
서울 토박이인 남편이나 시집 식구들과 얘기할 때는 나도 어색하나마 서울말을 쓰게 되는데, 연희랑은 얘기를 하면 할수록 새록새록 사투리를 더 쓰게 되고 나중에는 사투리로 말해야만 의사소통이 되는 건 또 웬 조홧속일까.
"언니야. 태교에 안 좋다 카는 거는 알겠는데 엄마라 카는 여자가 미버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기라. 언니한테라도 얘기를 안하만 내가 지례 죽지 싶어 이카는 기다."
"아이고 마, 지엽다(지겹다). 좀 숩기, 펜하기, 내한테 존 쪽으로 생각해 뿌리마 안 되겠나? 에라, 그깟니리 하드, 문디이 돈 천 원도 안 되는 거 그거, 느거덜이나 실컷 처무라 캄시나."
나 같으면 그렇게 생각하고 치웠을 것이다.
아들 선호라면 이 나라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동네가 경상도다. 나나 연희나 그 척박한 동네에서 태어나 뼈가 여물었으니 딸이라는 이유로 당한 섭섭한 일, 억울한 일이라면 아침에 눈 뜨고 부터 저녁에 눈 감을 때까지 날이면 날마다 지겹고 지겹도록 겪고 살아왔다. 비석치기에서 내가 대고 이기는 바람에 남동생 눈물을 뽑았다고, 잠이 덜 깨 비칠비칠 걷다가 널브러져 있던 남동생 홧바지 좀 밟았다고, 무심코 자리를 잡다 보니 네모난 밥상의 가운데에 내가 앉아서 남동생이 모서리로 밀렸다고, 학교 갔다 와서 숙제하는 데 정신이 팔려 남동생 밥 굶겼다고, 밥을 챙겨주느라고 챙겼는데 덜 씻긴 상추에서 모래가 서걱거렸다고, 엄마한테 빗자루로 두드려 맞고 운 일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나중에는 아예 내가 먼저 남동생을 떠받들어 모셔줘 버렸다. 그런 일로 일일이 속상해하다가는 내 속이 성할 수가 없겠다는 셈평이었다. 그 동네 살 때는 어른들이란 원체 그런 족속이려니 치부하고 말았고, 기를 쓰고 서울 직장을 잡고 나서는 아예 친정 식구와 상종하는 시간을 줄여버렸다. 그러나 얼굴 보는 시간만 줄었달 뿐 결혼하기 직전까지도 나는 내 월급을 가족의 이름으로 꼬박꼬박 차압당하며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직장 동료였던 남편과 결혼하고 나서야 비로소 월급이라는 걸 통째, 내 임의로, 써볼 수 있었다. 친구들은 결혼 하고 나서 죽겠다고 난리를 치는데, 난 시동생까지 끼고 살면서도 차라리 맘이 편했다. 친구들은 친정 가고 싶어 안달에 친정 식구보고 싶어 안달인데, 나는 웬만하면 안 가고 안 보는 게 편했다. 그끄저께 양희 견혼식에도 갈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연희 편에 부조금만 부치고는 애들 핑계 대고 안 갔다. 딸 둘 낳고 아드르 낳으려고 태아 성 감별과 낙태를 거듭하고 있는 올케의 시든 얼굴도, 내가 나흔 아들 둘과 올케가 하나도 못 낳은 아들을 비교하며 탄식하는 엄마의 넑두리도 가만히 듣고 앉았기 힘든 노릇이었다.
나는 좋은 게 좋다는 쪽이고, 싸우고 미워하는 게 힘들어서라도 양보하고 잊어버리는 쪽이다. 그럼에도 내 속에는 늘 '울고 있는 딸'이 있다. 아들 둘을 낳고도 행여 딸을 얻을까 싶어 남편조차 시큰둥해하는 셋째를 낳았는데 정말로 딸이이서 뛸 듯이 기뻤고 내 평생의 친구를 마련한것 같아 자다 생각해도 가슴이 뿌듯해진다는 것 말고는 내가 내속의 '울고 있는 딸' 을 위해 딱히 해 준 바는 없다. 무얼 해주고 자시고 간에 나는 세 아이 기르는 일에 진이 빠져 있고, 연희는 작은 일에도 팔팔 뛰고 속 끓이고 하느라 여전히 '울고 있는 딸' 이다. 작은엄마는 그 옛날에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 전까지도 교단에 섰다는 양반이 어떻게 된 게 국민학교도 다니다 만 우리 엄마보다도 더 아들 딸 층하가 심하고 때로는 심한 정도가 아니라 본정신으로 저럴 수가 있을까 싶게 딸들을 미워한다. 하지만 솔직히 연희도 본정신은 아니지 싶다. 아무리 그동안 쌓인 앙금이 밀양 얼음골을 만들었기로 그깟 얼음과자 하나 가지고 미친년 어쩌고저쩌고 게거품을 물 까닭은 없지 않은가.
"언냐 니는 지꿈 내 말을 어덜로 듣는 기고. 정말로 내가 하더 그기 묵구지버 이카는 줄 아나? 그 여자 눈은 우예 된 눈까리가 애시당초 나를 몬 본다 이 말인 기라. 내가 그으게 있다 카는 거를 몬 본다. 카이. 즈그 아들만 븨는 운인 기라 그 눈이. 한여름 뙤약빝에 자식 둘이 서 있는데 우예 하드를 달랑 한 개만 사 들고 올 수가 있노. 그기 생각 있는 여자라? 그런 거를 엄마라 칼 수 있나? 새엄마도 안 그칸다. 새엄마 아이라 이우제(이웃) 아지매도 그카는 경우는 음따. 세상에 그 뙤약빝에 딸하고 아들하고 같이 서 있는데, 우예 하드를 한 개만 사올 수가 있단 말이고.언니는 형수하고 지수하고 쪼로미 서 있는데, 형수 꺼만 사오겠나."
니 돈으로 한 개 사 묵어뿌리만 되지 고마.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나는 삼켰다. 내가 자꾸만 헷갈리고 있는데, 문제는 하드가 아닌 것이다.
"그럴 꺼로 말라꼬 갔디노. 웬만하믄 가지 말지를."
"동생 결혼식인데 우예 안 가노. 내 동생인데."
선희 언니가 죽고 나서 연희가 양희를 각별히 챙겼다는 거야 나도 안다. 한 치 건너 두 치라고 나는 안 가도 연희로선 알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여러모로 연희보다 야무진 양희는 약대를 졸업하고 병원에서 몇 년 근무하다 나는 잘 모르지만 다들 장래가 촉망된다고 하는 생명공학도와 결혼했다. 곧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갈 거라고 했다.
"양희는 똑 부러지는 가시나 아이가. 잘 살 기다. 나도 아아 서이를 업고 메고 이고라도 가봐야 맞는 긴데 미안타."
나는 일부러 양희 이야기로 말을 돌렸다.
"안 그캐도 양희가 묻더라. 정희 언냐는 아아 서이 키우니라꼬 몬 오제 캄시나."
어지간히 지치기도 했는지 연희의 목소리도 그새 많이 수그러들어 있었다.
"그으래. 양희 서울 올라오만 우리 다 같이 함 보자. 내가 양희 결혼 축하턱 한분 쏴야 안 되겠나. 꼭 보자이."
나는 전화를 끊기 위한 작전을 폈고, 연희도 순순히 발을 뺐따.
"응. 그라자. 카마 그때 보자이."
"오오이야. 그래. 드가자."
7월 20일
나의 황금시간은 이번에는 연희 남편 때문에 깨졌다. 우리 아파트 아래 대로변 퉁데이 커피숍이라면서 덮어놓고 나와달라는 것이다. 내가 아는 제부는 참을성 있고 속정 깊고 가정적인 남자였다. 연희가 서른을 넘기고부터는 "암만 맛난 나물도 단오를 님기뿌리만 쉬는 벱이고, 암만 인물 존 처자도 서런을 님기뿌리만 돌아보는 남애9남자)가 없니라" 하며 혀를 차던 우리 엄마 같은 이도 막상 연희 신랑을 선보고 나서는, "서른둘이나 문 늙은 처자도 저래 존 신랑을 구하는데 김실이 니는 머리 급해 가주고 그래 일찍 시집을 갔디노"라고 말이 바뀌었다. 작은집 딸들은 작은엄마 이목구비를 닮아서 다들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인물인데, 연희는 성질이 울퉁불퉁하고 변덕이 심해서 남자를 진득하게 사귀지 못했었다. 일곱 시에 만나서 저녁을 같이 먹기로 약속했다 치면 아홉 시 넘어야 겨우 집을 나서거나 아예 나가지 않기 일쑤인 연희였다. 예쁘기만 하면 모든 걸 용서할 수 있다는 남자가 천지에 깔려 있다는 세상이라지만 그것도 한두 달 사귀고 치울 때 얘기지 석 달 넘어갈 때까지 그런 뱐덕을 참아줄 수 있는 남자는 많지 않았다. 요행히 석 달을 넘긴 남자도 제 부모 생신을 함께 챙기기로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는 구들장을 지고 누워 청맹과니 모양으로 멀뚱거리는 연희를 맞닥뜨리고는 주먹손으로 방바닥을 치고 발길을 돌렸었다. 제부는 일편단심, 그런 연희를 참아주고 기다리고 이해했다. 마음만 그리 바다처럼 너른 게 아니고 생김생김이나 키대나 어디를 봐도 시원스러운 호남아에다 공기업 연구소에 다닌고 있으니 먹고살 걱정도 없었다. 양희와 내가 '데끼리'라고 건배할 만했다. 부모의 인물을 보건데 예쁠 확률이 구십구 퍼센트인 아이도 여덟 달 있으면 떡하니 태어날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제부는 커피를 홀짝거리다 말고 나를 발견하고 일어서서 허리를 굽혔다. 나도 따라 허리를 굽히곤 테이블로 다가갔다. 오랜만에 달착지근한 커피가 당겨 주인인지 점원인지에게 카푸치노 한 잔, 초콜릿 가루 듬뿍 쳐서 달라고 시켰다.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부는 앉은자리에서 또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정말이지 요즘 젊은이 같지 않고 저기 지리산 청학동에서 방금 하산했나 싶은 진국이다.
"무얼로. 거꾸로 제가 용무가 있어서 부르면 제부는 안 나올실거에요? 아마 버선발로 뛰쳐나오실걸요?"
"그럼요.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하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은 조금 더 무거워졌다. 분명 제부 혼자 참아주고 기다리고 이해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무슨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었따.
"근데 무슨 일로...... 제가 연희하고 이 서울바닥에서는 제일 친하니까 무슨 얘기라도 털어놓으세요. 힘닿는 데까진 도와드릴게요."
"저,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자기한테서 냄새가 난답니다. 지독한 냄새가 나니까 곁에 오지 말랍니다. 미치겠습니다."
잔뜩 긴장했는데 별거 아니다 싶어 나는 주막 강아지처럼 내뛰었다.
"그게 그러니까 임신을 하면 말예요. 이상하게 아래쪽에 분비물이 많아져요. 연희가 좀 예민해서 그렇지 그건 정상적인 냄새구요. 제부가 싫은 내색을 요만큼도 하지 않으면 아무 문제 없을 텐데......."
내가 얘기하는 동안 제부의 얼굴은 점점 더 암담해졌다. 나는 초점이 안 맞는 얘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말을 맺지 못햇다.
"냄새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제부는 그 한마디를 하고는 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제 제부의 말에 수굿이 귀기울이기로 했다.
"연희한테선 아무 냄새도 나지 않습니다. 제 말씀은 냄새가 나긴 하지만. 그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진 냄새라는 겁니다. 설사 사람이 낼 수 없을 것 같은 지독한 냄새가 정말로 난다고 하면 무슨 병이 있다는 얘기고 적절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얘기 아닙니까? 문제는 그게 아니라 연희가 꼭 저한테 냄새가 나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저를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코를 막고 눈을 돌리면서 자기한테서 냄새가 나니까 저리 가라고 말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좀 열심히 씻었어요. 평소보다. 두 배, 세 배로 많이 씻었지요. 그래도 막무가내로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 나도 암담했다. 나하고 자취할 때는 전혀 그런 티를 보이지 않았었는데, 별안간 왜 그런 이상한 증세가 생긴 것인지. 마음에 부담은 엄청 되는데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신혼살림에 유학 준비에 바쁠 줄은 알지만 양희한테 전화를 넣었다.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양희는 대뜸.
"병이 도졌구나. 도졌어. 연희 언냐가 고등학생 때도 맥지로 그 병이 들맀었다 아이가. 그거 때문에 학교에도 왕따당하고 성적이 떨어져가 원하던 대학교도 못 가고 그캤잖아. 대학 들어가갖고는 멀쩡해져 가주고, 입시 스트레스 때문이었나 싶었제. 이번에는 임신 출산 스트레스 때문이겠지 뭐. 얼라 쑹덩 놓고 나만 또 말짱해질 끼다. 그래도 아직 여덟 달이나 남았는데, 형부하고 뱃속 우리 조카가 힘들어서 우짜노? 그까짓 대학교야 낮춰서 들어가면 그만이었지만 이번엔 애꿎은 사람이 둘씩이나 고롭끼 생깄으이." 하는 것이었따.
"그라이 우야마 좋겠노 말이다."
"안 되겠다. 언니야. 걱정하지 마라. 내가 연희 언냐 델꼬 병원함 가보께."
"추석 쉬고 바로 나갈 끼라매 준비해야 될 거 많다 아이가? 괘안켔나?"
"안 괘안으마 언냐가 아아 서이 데불고 연희 언냐꺼짐 데불고 병원 댕기올 수 있겠나? 우리 언니얀데 내가 해야제. 아는 의사도 있고, 안 되마 신랑 먼저 보내고 나는 좀 더 있다가 가지 뭐."
"그래 고맙다. 양희야."
"고맙기는. 내가 고맙지. 내 없어도 울 언니 좀 잘 봐도고."
"알었다. 그라마 병원 갔다 와가 연락하거레이."
7월 28일
양희에게 내 마음의 짐을 부린 후. 내 생활은 전과 다름없이 그렇게 덱데굴덱게굴 굴러갔다. 양희한테서 전화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이레 정도 지나서였다.
"언냐는 알고 있었디나?"
"뭐를?"
"연희 언냐가 월경곤란증이 데기 셌다 카던데?"
"그거는 그랬다. 그기 머 큰 문제가? 난도 그랬는데 뭐. 얼라 놓고 나이 마이 없어지던데?"
"그기 벨거 아인 거 같애도 우울증하고 붙어뿌리만 심각하거덩. 우예 잘몬 맘을 묵으마 죽을 수도 있는 병인 기라. 그기 우예 변형되가 지꿈은 임신우울증에 남성혐오증이라 하더라. 난중에 산후후울증으로 전이될 끼라 카고. 우리 언냐겉이 예민한 사람은 큰일 낼 수도 있단다."
나는 이십 년도 더 전 저 밀양 골짝에서 일어난 자살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양희는 일곱 살이었나, 여하튼 학교를 다니지 않았었다. 연희는 3학년 쯤 됐지 싶고 선희 언니는 5학년이었나 6학년이었나 하여튼 초등학교를 마치지 않은 나이였고. 학교를 다녀온 선희 언니가 작은엄마한테 머리채를 휘둘리며 심하게 꾸지람을 들은 뒤 연희랑 같이 쓰는 방에서 목을 맸던 것이다. 저녁 먹으라고 부르러 간 연희가 제일 먼저 그 참경을 발견했다. 작은엄마는 계집애가 조심성 없이 홑이불에 월결 자국을 묻혀놓고 피 묻은 팬티를 책상 밑에 쑤셔 박아놓고는 말도 없이 학교를 갔기에 못된 행실을 고쳐주려 한 것뿐이라고 했다. 집안 어른들은 아이들 입단속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이 듣거나 말거나 자기네들끼리는 뒷공론을 수군거렸다. 다 팔자 소관이라고 하는 축이 있었고, 어미한테 야단 좀 맞았다고 목숨 끊는 그런 년은 일찌감치 죽어 없어지는 게 집안을 위하는 길이라는 축이있었다. 작은엄마가 틀렸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하도 이상해서, 우리 엄마한테는 범 아가리라도 나한테는 외려 엄마보다 살갑게 구는 할머니한테 정말로 선희 언니가 그렇게 죽어도 싼 잘못을 저질렀는지 물어보았다.
할머니는 담뱃대에 담뱃잎을 채워 놓고는 눈을 감고 두어 모금 빨았다.
"가시나가 틀리뭇다. 가시나가 그래 칠칠치를 몬해 가주고 여자 한 평생을 우예 살 끼라. 마 잘 죽었다. 세상에 서답이 머라꼬. 헌미영 바지주구리 뜯어가 그거로 맨들어여 사타리 끼아놓으만 해나(행여) 핏자죽이 묻어 나오까 봐 일천간장, 조심조심 그 우에 더 조심을 하겠나. 핏더비기 된 서답으로 밤새 요가아(요강) 오줌에다 여가주고 핏물을 빼지를. 그거로 건지가 사람 엄는 새북에 그라아(냇가)서르 몰리몰리 빤다. 다 빨었다꼬 아무 데나 널 수 있나. 어데 한쪽 구직(구석)에 널어놓고 몰리 말맀지. 옛날 살었는기 그기 살었는 기가. 요새는 돈만 있으만사 요만한 거. 찼다가 채이만 내삐리뿌만 되는 거, 그런 기 있으이 얼매나 희한한 세상이고. 가시나가 그것도 하나 남우 눈에 안 대장키두룩 몬하고 책상 밑에 쑤지놓고. 가시나가 틀리뭇다."
할머니는 놋재떨이에 담뱃대를 딱, 딱, 두드리고는 팽하고 돌아 앉았다. 그러더니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그아가 기질이 너무 곱어가주고...... 딴 죄가 있겠나. 여자 모으로 태 있는 죄지를.
내가 그러고 옛날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양희도 선희 언니 생각을 했는지. 전화기 저쪽에서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8월 7일
올 여름에는 유난히 자살 소식이 많이 들렸다. 신문 방송에서도 지겹게 떠들어댔다. 누구는 자살 붐의 시대라고도 했다. 자살이라니, 나로선 듣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고 생각하기도 싫은 주제다. 괴로운 것은 잊어버리고 치우는 내 성격상 웬만하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거나 억지로라도 뇌리에서 지웠다.
그런데 부평에서 세 아이와 함께 아파트 십사층에서 떨어져 죽은 엄마는 도시 잊히지를 않았다. 나 자신이 그녀와 비슷한 연배의 세 아이 엄마이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세 아이에게 얼음과자 한 개씩을 물려 시장에 갔다 오던 길, 우리 아파트 십이층 복도에서 문득 아래를 내려보다가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한 바가지 쏟기까지 했다. 애가 셋이면 선녀도 도망을 못 간다는데. 어째 셋을 데리고 훠얼훨 날아가 버릴 생각을 다 했을까. 누구는 그렇게 생때같은 아이 셋을 데리고 목숨을 버리는 시절에, 나는 평소와 똑같이 두 번의 전쟁을 치르고 한 번의 황금시간을 누렸다. 심지어는 죽은 그녀의 친정이 있는 곳이라는, 유서에서 그곳에 묻어달라고 했다던 서해 안면도로 피서까지 다녀왔다. 회사에서 숙박료를 보조해 주는 콘도가 있고 올 봄에 일찌감치 예약을 해둔 곳이었다는 이유로 남편이 거기 아니면 안 된다고 빡빡 우기기에 원체 싸우는 거 싫어하는 성질이라 남편한테 져주었던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아이들은 자라고 나는 늙어가고 있겠지만, 나의 일상은 어제와 똑같이 오늘도 두 번의 전쟁과 한 번의 황금시간으로 이루어졌고 오늘과 똑같이 내일도 그렇게 진행될 거였다. 달라진 게 있다면 내가 걸핏하면 울음보를 터뜨렸다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거, 생명은 소중하다는 거, 죽으려면 저나 죽지 애들이 불쌍하다는 거, 모르는 사람 어디 있나. 물론 나라면 그렇게 죽지는 않을 거다. 아이들을 어디 친척집에라도, 안 되면 아동일시보호소에라도 맡기고 돈을 벌겠지. 일에 지쳐 죽을 수는 있어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어쩌란 말이냐. 세상에는 나만큼도 강하지 않고 나만큼도 낙천적이지 않은 인간들이 더러 있는 것이다. 그깟 야단 좀 맞았다고 죽은 선희 언니나...... 우리 연희. 연희 뱃속에 있는 애호박 크기도 안 될 아기.
아기는, 무언가를 먹고 싶어 환장하게끔 만드는 것으로 어미에게 제 존재를 알린다. 연희 뱃속의 조그만 아기도 작업을 시작한 모양, 어젠 연희가 전화를 걸어 고욤이 먹고 싶어 똑 죽겠다고 징징거렸다. 볕 좋은 가을날 단지에 담아두었다, 문풍지 울어쌓는 한겨울, 지글지글 끓는 구들장에 궁둥이를 지지며 않아 조청처럼 엿처럼 숟가락으로 뚝, 뚝, 떼어 먹는, 살얼음이 서걱거려 입 안에서 살살 굴리고 녹여야 하는, 끈끈하고 달디단 고욤 맛을 떠올리고 내 입에도 침이 괴었다. 착한 제부가 찾다 찾다 못 찾고 어디서 홍시를 구해다 준 모양인데, 아무리 고욤 맛 알아 감 먹는단 속담이 있기로서니 기껏 냉동 홍시가 우리 기억 속의 고욤 맛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엄마와 그나마 짝짜꿍이 맞았을 때가, 한창 입덧하고 아이 낳고 젖몸살하던 시절이었따. 우리 엄마도 이렇게 힘들었겠지. 이 토악질, 이 아픔, 이 울부짖음은 얼마나 정직하고 얼마나 공평한 것이냐. 적어도 이때만큼은 남동생과 나를 차별하지 못했겠지. 그런 생각에 나도 마음이 풀렸지만, 엄마도 그 시절만큼은 내 어리광을 받아주고 내 편이 되어주었다. 우스운 얘기지만, 내가 진짜로 엄마 딸이 맞구나 하는 안도감마저 들었었다. 그런데 연희는 친정엄마한테 그런 어리광 한번 못 부려보고 고작 한 살 더 많은 사촌언니한테나 영양가 없는 전화질을 해대는 것이다.
연희의 처지가 새삼 짠해 새콤달콤한 쟁반국수라도 해주고 올요량으로, 오늘 아침 ㅓㄴ쟁을 지러내자마자 곧바로 장을 봐서 연희네에 들렀다. 연희는 정말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눈은 움푹 꺼져 있었고 입술에는 거스러미가 허옇게 일어났다. 게다가 무슨 맘으로 그랬는지 숱이 많고 진하면서도 가지런하여 손질할 필요가 없이 예쁘던 눈썹을 말갛게 밀어버리고는 그리지도 않았다. 눈썹 있던 자리는 말간데 눈두덩에 붉은 상처가 있어 뭐냐고 하니 눈썹 밀던 면도칼에 베였단다. 임신한 애가 어떻게 더 배틀어졌다고 하니, 그러게, 오 킬로나 빠졌네, 하고 남의 일같이 말한다. 그 천연덕스런 품이 어째 울고불고하는 것보다 더 불안스럽고 스산하다. 양희한테만 맡겨두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양희가 아무리 친동기간이고 야무지기가 차돌멩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동생이고 신혼이고 맘은 벌써 태평양 저쪽에 있는 아이다. 양의에게 데려가는 일은 향희가 맡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또 있을 테다. 연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나이들고 경험 많은 여자의 보호와 위로일지 모른다.
겨우 서너 젓가락이나 께지럭거렸나. 그러고도 연희는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었다고 치사다.
"아직도 고욤이 묵고 싶나?"
"응, 고욤...... 계양."
옛날 우리 동네에선 고욤을 게양이라고 했다.
"그래. 께양. 고욤도 없는데 께양이 있겠나."
그렇게 말하고 보니 불현듯 어떤 실마리가 잡히는 것 같았다. 연희가 먹고 싶어하는 건 고욤이 아니라 께양인 것이다. 지금 당장 그 옛날 것과 똑같은 고욤 단지를 구해 준대도 서너 숟갈 떠먹고는 그만일 것이다. 차갑고 단 먹을거리라면 혀끝에서 살살 녹는 아이스케이크가 얼마나 많은가. 께양 단지하나 앞에 놓고 딸네들이 맘대로 찧고 까불며 놀았던 그 시간의 참따란 충일을, 연희는 제 끝없는 혓헛함과 바꾸고 싶은 것이다. 다시금 입속 가득 침이 괴었다. 고욤의 감미가, 딸네들의 수다와 웃음소리가, 그 덥고 어둑어둑하던 구들방이, 박곡 아지매가 달이던 약 냄새가, 꼬치에 꿴 듯 줄줄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8월 8일
밀양 친정에 전화를 걸어 사돈의 팔촌까지 안부 인사를 나열하고는 말끝에 생각난 양 뒷집 살던 박곡 아지매를 수소문했다.
"삼척 딸네집에 가 산다 카더마는. 수림이, 수림이 맞제 그 아아 이름이? 그 아가 백지 세멘 공장 댕기는 신랑을 따러가주고 그 공비덜 나온다 카는 험한 데서르 산다 카더라. 내가 그래 박곡띠기 그 할마시도 참말 서방 덕 음는 년이 자식 덕도 음따 카디이 다 늙어꺼짐도 고생바가이다 캤니라. 세상에 밀양긑이 너리고 존 데럴 나뚜고, 삼척이 어데라꼬, 그 공비덜 사람한테 독침 놓는다 카는 모질고 험한 데럴 말라꼬 따러갔이꼬, 알기사 곽실이가 잘 알겠다. 곽실이 그 아가 박곡떡 딸하고 난중꺼짐도 죽고 몬 살았으이. 카고 보이 삼척 산다 카는 말도 곽실이 오매한테 들었는갑다."
"곽실이가 누고?"
"덕희 아인나. 저으게 누고, 새집 아재 집에, 느거 육촌 언니 말이다. 덕희 모리나?"
"안다."
결국 덕희 언니에게 생전 안 하던 연락을 하여 삼척 수림 언니네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박곡 아지매는 아직도 정정하다 하고, 수림 언니는 시멘트 회사에 다니는 남편을 따라 그곳에 살게 된 것이 아니고 그곳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 시멘트 회사 다니는 남자를 만나서 결혼한 것이란다.
고욤 단지 때문에 새로이 떠올려 그렇지 사실 나는 박곡 아지매를 남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 대학교 1학년 여성학 수업시간에 자기 주변의 여성 인물 중에서 인상적인 사람의 약전을 써서 제출하라는 숙제에 그 아지매 이야기를 써 내기도 했고, 아이들 잔병치레 할 때마다 나 어릴 적 아프면 뒷집 먼저 찾았던 생각에 그런 분의 존재를 못내 아쉬워하기도 했다.
박곡 아지매는 우리 집 바로 뒤, 대숲머리 초가삼간에 살았다. 원래 그 집은 애낳이를 못해 소박맞고 쫓겨온 고모할머니를 위해 증조할아버지가 지어준 것이었는데, 그 할머니가 세상 뜨고는 내내 비워두었던 것을 박곡 아지매가 사서 들어온 것이었다. 박곡아지매는 희고 기름한 얼굴에 바짝 마른 몸매를 하고 있어 쌀쌀맞단 인상이지 푸근한 쪼근 아니었다. 그러나 마당귀 고욤나무에 촘촘하게 열린 고욤을 아무리 극성스레 따 먹어도 큰소리 한번 지르는 법이 없어 아이들은 금세 아지매를 좋아했다. 영주에서 간호부를 하다가 대구 한약방 집에 시집을 갔고 이혼하고는 조산원을 운영했다고 하는데, 우리 동네선 아이 받는 일도 더러 했지만 병 고치는 일을 주로 했다. 박곡 아지매는 여러 종류의 약초로 가공해 쓸 줄 알았다. '쯩'을 중시하는 요즘 같았으면 벌써 무면허 희료행위로 고발당했을 수도 있겠으나 그때만 해도 병원이나 약국에 간다는 것은 고개 넘어 하루 두 번 오는 버스를 타고 갔다가 그 버스를 타고 고개 넘어 돌아와야 하는, 하루 낮을 오롯이 잡아먹는 일이었다. 돈은 또 좀 많이 드는가. 형편이 그랬으니 그 동네의 유일한 전문직 여성 박곡 아지매의 무면허 의료업은 근 십 년 불황을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지매가 무슨 특별한 존경이나 대우를 받았거나 한 것은 전혀 아니다. 양반 떨거지도 못 되면서 타성 바지라면 무조건 낮추보고 따돌리는 나쁜 관습이 있는 그 집성촌에서 어이딸로 이루어진 집이니 소외당하고 무시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곡 아지매가 물외 꼭지 같은 딸 하나 겨우 낳아놓은 주제에 남편이 여자 좀 보았다고 이혼을 실행한 독살스런 여자란 뒷공론도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여자만 둘 있는 집에서 밥상을 정갈하게 차려 잘 먹는 것도, 먹은 다음에는 반드시 소금으로 이를 닦는 습관도 남의 입방아에 올랐다. 그 동네 풍습으론 며느리를 보지 않은 여자가 밥상을 받는다는 것은 분수를 모르는 짓이었다. 모름지기 밥은 부뚜막 둘레에서 솥바닥에 눌은밥이나 삶아 먹고 국은 훗국이라도 한 숟갈 얻어걸리면 황송한 줄 알고 먹어야 하는 것이었다. 자기 집에서 세 끼니 먹고 나면 남의 잔치판에 가서도 군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잠자기 전 이를 닦고 나서 남의 집 왕진을 가게 되면 그 집에서 아무리 맛난 음식을 내놓아도 입을 다시는 법이 없는 아지매의 깔끔한 먹성도 동네 여자들 눈에는 뜨악한 것이었다. 평소에 먹는 게 부실하니 잔치판이건 굿판이건 초상판이건 음식이 넘쳐나는 곳에서는 자연 식탐을 내게 되어 배를 두르리며 아귀아귀 먹어대는 그들이었다. 그리고 촌부가 한가롭게 이를 닦다니! 옷 갈아입을 시간도 머리 빗을 시간도 없이 안팎으로 돌아치며 밭일, 부엌일, 양잠, 허드렛일을 도맡고 일이 없다 싶으면 장독대라도 걸레질하고 이불호청이라도 뜯어 빨아야지 누구네 집 며느리 무던하단 말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위로는 어른을 섬기고 아래로는 자식들을 잘 보살피는 본데 있는 아낙으로서 배울 바가 없다 하여 일갓집 안어른들은 며느리들과 박곡 아지매가 잇새도 어우르지 못하게 단속하려 들었다. 그러나 그 어른들 역시 마을은 외지지, 돈은 없지, 있다 해도 병원은 멀지, 아픈 사람 생기면 꾸역꾸역 박곡 아지매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내 여성학 과제물에 썼던 얘기인데,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근동서는 꽤 잘산다는 집 외며느리가 너무너무 지독한 두드러기에다 얼굴과 어깨가 시도 때도 없이 씰룩거리는 병에 걸려 읍내 한약국 약을 몇 재나 써도 낫지 않고 대구 파티마병원에 가도 별 무소요, 똑 죽게 생겼기에 박곡 아지매를 불렀다. 아지매는 표독스럽기로 소문났던 그 집 시모더러 '며느리에게 일곱 번 절하고 앞으로 부엌이나 신방에는 절대 얼씬거리지 않고 뒷방으로 물러나겠다고 맹세하라'는 처방을 주어 새댁의 병을 고쳐주었다. 박곡 아지매는 그렇게 병을 약으로만 고치는 게 아니라 마음을 꿰뚫어 보고 마음의 작용으로 고칠 줄 아는 분이었다. 사실은 그 기억이 하도 인상 깊어 내가 낯설고 물선 바닷가 삼척 땅으로 갈 엄두를 냈던 것이다.
8월 14일
큰애 여름방학이 끝나기 한 주 전, 오롱이조롱이 세 아이와 임신한 연희까지를 데리고 기어이 삼척 산다는 박곡 아지매를 찾아 떠났다. 집 안에 잡아둔다고 해서 하나 나아질 게 없다는 걸 아는지 제부도 연희의 장거리 여행을 반대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은 데다 무려 다섯 목숨을 책임지고 있단 생각에 얼마나 긴장했던지, 삼척에 도착하고 보니 골치가 지끈거리고 목덜미, 어깨, 등짝이 일렬로 딱딱하게 굳어서는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항구에서 바닷바람을 쐬고 회덮밥으로 거의 저녁에 가까운 점심을 먹고 냉커피로 입가심을 한 다음에야 겨우 한숨을 내쉬며 기지개를 켤 수 있었다. 연희는 차에선 죽은 듯 늘어져 있었고, 식당에선 밥알만 세다 수저를 놓았다.
수림 언니 핸드폰으로 전화를 넣었다. 전화선을 통해 들려오는 수림 언니 목소리는 세월이 무안하도록 예전과 똑같았다.
"덕희한테 연락은 받었다. 와? 머슨 일고?"
"으응. 언니야. 요새 내가 늙을라 카는지 옛날 생각이 자꾸 나갖고 . 언니도 보고 싶고 박곡 아지매도 보고 싶고, 아덜 방학 끝나기 전에 동해 바다 구경도 하고 싶고 여차저차해가 기양 함 출동 해 봤다."
"그래? 그라마는 내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라 카지는 몬하겠고 지꿈 가볼래? 이따가 저녁은 우리 집에서 같이 묵두룩 하고. 원당동 00아파튼데, 태백 방향으로 쭉 따러가다 보마 오른손 편에 뷔일 끼다. 기분 내키만 택시 불러갖고 산으로 바다로 유람도 잘 댕기는데 오늘은 안 나간다 카더라. 암만 노인정을 가라 캐도 니오 아다시피 우리 할마시 성질이 딴 할마시덜하고 쬐매 다리잖아. 그 나이 묵어도 노상 혼차 댕긴다 카마 말 다 했지 뭐."
"참, 언니 집에 께양 많이 얻어뭇는데."
"께양 겉은 소리 하고 자빠졌다. 문디 가시나. 나(나이)도 을매 안 처뭇는 기 진짜 늙을라 카는갑네. 옛날 고리짝 이바구는 와 자꾸 해쌓노. 그 께양나무 둥치를 짤러내고 감나무 접붙인 제가 하마 언제고? 그 나무에 열맀는 홍시꺼정 잘 얻어 처뭇으미드르."
아 그랬었나. 그래서 내 기억 속의 고욤나무가 친정 동네의 시공간과 어우러지지 못하고 그렇게 늘 외따로웠나. 감나무가 된 고욤나무. 그럼 내 기억 속의 고욤나무는 사라진 것인가. 감나무로 살아지고 있는 것인가.
틈틈이 그런저런 상념에 빠지고 틈틈이 아이들을 챙기고 다툼을 중재하고 연희를 돌아보고 하는 사이 도로 오른편으로 수림 언니가 말한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지하 주차장을 지나쳐 단지를 한 바퀴 돌 작정으로 커브를 트는데, 정말로 등나무 밑 벤치에 그린 듯이 앉아 있는 박곡 아지매가 보였다. 반갑고 급한 맘에 아무데가 대강 차를 세웠다. 우리 차를 주시하고 있었던 듯 박곡 아지매도 천천히 일어서더니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정희가 우얀 일고. 선희는 암만 캐도 오겠니라 싶었더만서도."
"에?"
나는 내 뒤에 숨어 낯가리는 어린애처럼 쭈뼛거리는 연희를 돌아보았다.
"칠, 팔 년 전에 한참 꿈에 뵈이고는 안 븨의디이 요즈납새버텀 또 자꾸 선희가 븨는 기 야기 머슨 일이 있제 싶우더라."
그 말을 듣자마자 연희는 울기 시작했다. 아무리 속을 끓이고 성을 내도 차라리 피를 토했으면 토했지 울먹거리는 일이 좀체 없던 애가. 아지매가 연희 손을 잡고 등을 토닥였다.
"우지 마라. 우지 마라. 우리 선희, 이뿐 애기. 내하고 같이 우우 가자. 우우 가자. 우리 애기, 답답코 송신체(속 시끄럽지)? 우우 가자."
아지매가 단지를 빠져나가는 택시를 향해 손짓하는 걸, 얼른 내 차로 이끌었다.
"죽서루 가자. 죽죽선녀한테 가지."
'죽서루' 라면 오는 길에 댓 번이나 만난 이정표였다. 그곳에 '죽죽선녀'라는 이름의 무당이라도 사나 보다 생각했다.
죽서루는 금방 찾아졌다. 도시의 허리를 싸맨 초록 요대 같은 강 오십천, 그 낭떠러지 위에 죽서루는 서 있었다. 차에서 내려 아이들 손을 잡고 안내판을 읽으니 송강의 <관동별곡>에서 관동팔경 제일루로 꼽았던 지명이란다. 그러고 있자니 진주관 죽서루 오십천 나린 물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구절이 떠오른다. 동쪽에 죽장사竹藏寺가 있어서, 혹은 명기 죽죽선녀의 집이 있어서 죽서루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데, 죽죽선녀라니, 나는 여전히 그이름이 기생의 것일 리 없다고, 틀림없이 무당일 거라고 생각했다.
오십천의 물은 짙푸르렀고, 절벽은 수직으로 깎아질렀다., 누를 떠받친 바위 위에 서서 오십천을 내려다보니 오금이 절로 저렸다. '위험하니 접근하지 마시오'라는 팻말과 함께 울타리가 둘러 있으나, 맘만 먹으면 돌배기 아이도 타고 넘어갈 높이다. 그나마 그울타리조차 없었을 때는 구태여 맘을 먹지 않더라도 까딱 정신을 놓치면, 아, 떨어지고 말았겠다. 아이들이 들까불다 어떻게 될까 조마조마하여 나는 한 손에 하나씩 작은애들 손을 꽉 붙들었다. 큰애도 천둥벌거숭이인 건 매한가지인데 내 손은 달랑 두 개뿐. 연신 입으로 큰애를 조심시키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나는 또 뜬금없이 울컥했다. 애가 셋이면 선녀도 도망을 못 간다는데. 오늘날엔 십사층에서 떨어져 내리지만, 저 옛날에는 여기서들 떨어졌으리라. 붉거나 푸른, 혹은 하얀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절망이 얼마나 크면 저 까마득한 허공에 발을 내밀 수 있을까.
박곡 아지매와 연희는 가운데 구멍이 크게 뚫린 검은 바위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나는 애들을 안전한 아래쪽 마당으로 염소 몰듯 몰아놓고 그 바위 쪽으로 올라갔다. 안내판을 보니 그 커다란 구멍을 통해 용이 동해로 빠져나갔기 때문에 그 바위를 용문바위라 한단다. 바위 상단에는 선사시대의 유물인 열 개의 성혈이 있는데, 원래는 풍요와 다산을 의미하는 암각화였던 것이 조선시대 이후에는 득남의 기원처로 변모하였다고 한다. 칠월 칠석날 열개의 구멍에 좁쌀을 넣고 빌다 그 좁쌀을 치마폭에 싸안고 가면 아들을 낳는다나. 우리 엄마, 이거 봤으면 칠석날 올케 데리고 오셨겠네. 지겨워. 용문을 지나 안반 같은 바윗등에 올라서니 정말로 자그마한 구멍이 열 개, 무슨 별자리 모양처럼 신비롭게 오목새김되어 있다.
박곡 아지매는 눈을 감고 합장한 채 동서남북으로 절을 하고 있었고, 연희는 그걸 따라 하고 있었다.
"이 우바니, 저 우바니, 부디부디 모다 극락왕생하이소."
내가 그들 옆에 쪼그리고 앉자, 아지매가 눈을 뜨고 그 작은 구멍들을 가리켰다.
"선희야, 이 구무를 보거라. 딱 열 개다. 열은 숫자 중에서 제일 완전한 숫자다. 이 안에서 세상 만물이 다 나오제. 선희 니가 이 구무에서 피가 날 때 목을 맸다 아인가베. 체매에 피가 항그더라. 다 느거 아부지 업보다. 느거 오매(어미) 암것도 모리는 스무 살 짜리, 촌 학교에 부임해 온 제 한 달도 안 됐는 어린 처자를 힘으로 붙들어가 지 욕심을 채았으이. 느거 오매는 그래 싫은 남애(남자)한테 시집을 가여 날날숨 에비고(마르고) 날날숨 남애한테 당하는 지 몸띵이가 미버 똑 죽겠는 기라. 선희 니만 안 생깄어도 혼인은 안 했을 낀데 니 따문에 배가 불러오이 할 수 헐 수 읎어가 맺은 혼인이라 놓으이 더 니를 미버캤다. 니가 여자로 태인 것도 느거 오매는 참을 수가 없었던 기라. 지하고 똑같이 더러븐 팔자만 우야노 싶어가주고. 원래는 느거 아부지를 미버캐야 되는데 느거 아부지는 하늘이고 대주고 염라대왕인데 감히 우얄 수가 있이야지. 그라이 니를 미버 미버칸 기다. 니가 진짜로 미벘던 기 아이고 느거 아부지가 미번데 그거는 밉다카는 표시를 못 내겠거덩. 시오마이가 미버만 개 배때기라도 차야 되는 기 사람 마음이라. 안 그라고는 전딜 수가 없는데 우야노. 맥지 느거 오매가 밉다 밉다 캐쌓으이 선희 니는 그거로 딴 데 몬 풀고 니 몸띵이한테 풀었는 기라. 차라리 느거 오매한테 대들꾸로 그런 용맥도 없어가주고 그저 착해 빠지가주고 애먼 니 몸띵이를 미버캐싸이 그 몸띵이는 가만 있겠나. 에라 칵 죽어뿌자 카제. 선희야, 여기 이 열 구무에 다 입을 맞추거라. 니가 니를 미버카는 동안에는 영영 존 데를 몬가니라."
연희는 아지매가 시키는 대로 어정어정 바위 위를 옮겨 다니며 열 개의 구멍에, 그 구멍에 괸, 갈물을 풀어놓은 듯한 거무죽죽한 물에 입을 맞추었다. 연희가 한 구멍, 한 구멍, 옮겨 앉아 옆드릴 때마다, 나는 속으로 그래, 연희야, 그렇게 해, 무엇에 대한 긍정인지도 모를 긍정을 외쳐댔다.
어느새 햇살이 부쩍 엷어져 있었다. 저 아래 마당에서 놀던 아이들이 병아리 새끼들처럼 쪼로니 나를 찾아 올라왔다. 아이들이나 병아리들이나 어린것들은 해 질 녘을 두려워하는 법이다. 하기는 어른이라고 별다르랴. 딴에는 분위기 파악을 한 모양, 아이들은 들까불지 않고 가만가만 내 품으로 기어 들어왔다. 위로 두 사내놈은 멀뚱멀뚱 내 얼굴 한 번 하늘 한 번을 쳐다보다가 젖을 만지다가 하는데, 우리 지수는 박곡 아지매와 연희 이모를 오도카니 지켜보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는 울고 있는 딸의 젖은 볼에 내 볼을 비볐다.
<<문학수첩>>. 2003년 겨울호
첫댓글 제가 경상도 사람이라서 더 와닿은지 모르겠습니다. 가슴 뭉클하게 와 닿아서 입력했어요. 아마 여자분들은 많은 공감이 가실 듯... 이번은 사투리가 많아서 혹시 오타가 있어도 별 표가 안날거 같아 올리는 마음이 즐겁습니다. ㅎㅎㅎ 얼마 남지 않은 여름 잘 보내세요..
정애누나 역쉬 말빨이 쎄
사투리에 푹 빠져 지루하지 않았네요 마치 사투리 빼고 박완서 작품을 읽는것 같앴어요 홍시가 어찌 한겨울 단지속에 묻어둔 고욤맛을 따라 가겠어요? ^^* 나 어릴적 모두 경험한 일들이라 더욱 공감가고 가슴뭉클 합니다 재미있어요
어릴적 우리동네에도 박곡 아지매같은 사람 있었어요 엄마도 아들 낳으려고 그런곳 열심히 찾아다니던 기억,(결국엔 유복자로 아들을 낳았지요) 초경이 너무 무서워 학교도 안가고 내린천에 밤늦도록 들어앉아 울던기억, 아버지 밥상에 한번 같이앉아보는게 소원이었던 기억, 입덧이 유별나 남편 황당하게 했던 기억등등 ... 생생합니다
강원도 사람도 와 닿는 글인걸요, 단숨에 읽었습니다, 감사.
저도 끝에가선 눈물이 글썽글썽합니다. 잘 읽었심데이
눈물 뚝뚝...고맙게 읽었고요
잘 읽었습니다.....감사 합니다.
'무엇에 대한 긍정인지도 모를 긍정을 외쳐댔다.'... 고맙습니다 물빛하늘 님.
서두의 형식이 새롭습니다.메모로 시작하는 것이....몇번을 열었다가 너무 더워서 아침에는 저녁으로 미루고 저녁에는 아침으로 미루다가 드디어 읽었습니다. 물빛하늘님 싸인해주세요.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고맙습니다. 잘 읽었어요. 물빛하늘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