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동(2023.12.17./ 대림절 제3주일)
기쁨, 기도, 감사
데살로니가전서 5:16-24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일이다. 성탄과 다가오는 새해를 기쁨과 감사로 맞이하기를 바란다.
연말에 드는 생각이다. 우리 지방에서 비교적 역사가 오랜 교회들이 사진첩을 발간하였다. 생각하면 그리 오래된 역사도 아니다. 고작 40년, 45년 된 교회인데 굳이 역사책이 아닌 사진첩을 발간했는지 의문이 있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기록된 역사와 남은 자료가 없기때문에 궁여지책이란다. 내년이면 80년 된 교회도 역사책을 꾸민다고 하는데 오죽 할까 싶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기록이 없으면 그동안 살아온 과정을 볼 수 없으니 인생의 결산이 옹색해진다. 결과만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평가가 박할 수밖에 없다.
연말연시는 일종의 종말론적 감정이 드는 시기이다. 금쪽같은 시간이 감쪽같이 흐른데 대해 뭔가 보상이 필요하다. 뭔가 손에 쥐는 결과물이 없으면 서운하기도 하다. 그래서 저마다 10대 뉴스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내게 주신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열매를 갈무리해 보자. 1년 신앙살림을 결산하는 것이다.
연말, 한해의 시간을 마무리하며 서로 격려하며, 서로 위로하며, 서로 감사하기 바란다.
1)
본문은 신약성경에 보존된 가장 오래된 문서이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이 쓴 편지들 중에서 최초라는 명예를 지닌다. 주후 50년경에 쓰였다.
최초의 편지는 우울한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종말론적 메시지이다. 첫 믿음의 선배들이 차츰 세상을 떠나고, 큰 박해가 예고되었다. 바울은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향해 권면한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가?
올 한 해도 말씀을 전하는 당사자로서 많은 부담을 안고 살았다. 종종 거칠게 글로 옮기면서 때론 안일했던 소명의 엄중함을 느낀다. 설교자를 향한 조언도 있다.
르우엘 하우는 “절박감을 느끼면서 듣는 사람이 절박감을 느끼는 설교자를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샤론 레이더 감독은 자기가 공부한 설교학 교수 말이라며 “같은 설교를 자주 듣는 것이 좋다”고도 하였다.
마틴 루터는 말한다.
“예배에서는 오직 사랑하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의 거룩한 말씀으로 말씀하시고 우리가 다시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과 말하는 사건만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제목이기도 하다. ‘기쁨, 기도, 감사.’
바울은 그런 기대와 실망 사이, 과거와 미래의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편지를 썼다. 특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격려하였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16-18).
바울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에 깨어서 근신하는 생활을 하라고 권고한다. 특히 교회 안에서의 공동체의 삶에 대한 조언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사랑하심을 받는 사람들답게 살아가라는 메시지이다.
좋은 신앙인의 덕목은 기쁨과 기도와 감사이다. 좋은 일이 생기면 기뻐하고, 하루에 세 번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고, 감사할 만한 조건이 생길 때마다 감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게다가 ‘기쁨, 기도, 감사’ 모두 항상, 쉬지 말고, 모든 일에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2)
첫째, 바울은 기쁨을 권면한다.
“항상 기뻐하라”(16).
기쁨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세속적인 것처럼 보이는 기쁨조차 하나님의 뜻이라니 놀랍다.
사람에게 건강의 최고 비결은 자기 삶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일이다. 기쁨을 낱말 풀이하면 ‘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기쁨은 일종의 창조행위이다.
처음 창조 때에 창세기 기록자는 마치 후렴구처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4)고 하였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단순한 물질세계가 아닌 기쁨 그 자체였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기쁨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기쁨은 성령의 은사요, 또 성령의 열매이다. 좋은 결과 때문에 기뻐하는 것은 누구나 똑같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결과에 좌우되는 기쁨이 아니다. 내 안에 기쁨의 샘이 있어서 항상 그런 기쁨이 가득한 삶을 말한다. 그 샘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적 기쁨이다.
내 안에 있는 소중한 선물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다. 만약 그것을 귀중히 여기지 않는 삶의 태도가 있다면 곧 빼앗겨 버릴 것이다. 예수님은 믿음을 지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을 품은 사람에 대해 약속하신다.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22).
둘째, 바울은 기도를 권면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17).
기도 또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사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다만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방식을 고치면 가능하다.
사람은 연약하기 때문에 쉽게 낙심하고, 불안하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소통하는 기도만이 자신을 추스릴 수 있는 힘이 된다.
예수님의 방식은 늘 하나님과 통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러면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고 하셨다.
사람들끼리 이야기할 때 말이 차지하는 비중은 30퍼센트에 불과하다고 한다. 나머지는 표정, 몸짓, 눈빛 따위 즉 온몸으로 주고받는 것이다. 그러니 말로 하는 기도는 30퍼센트에 불과하다.
기도를 할 때, 악착같이 말로만 하려고 들지 마라. 늘 귀 기울이는 태도, 이해하려는 마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생활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귀가 아닌 마음을 울리고, 언제나 내 영혼의 문을 두드리신다. 오히려 기도는 하나님이 나누시려는 기쁨을 우리가 받아들이도록 마음을 여는 것이다. 마음이 열리면 굳이 말이 필요가 없다.
셋째, 바울은 감사를 권면한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18).
감사하면 감사한 일만 생기고, 불평하면 불평할 일만 생긴다. 사람 사는 원리더라. 어떻게 감사가 가능한가? 바로 감사는 하나님을 향하는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감사는 내 삶에서 그리스도를 품는 일이다. 억지로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주님을 내 식탁에 초대하고 기꺼이 섬기며, 공대하는 일이다. 사랑의 마음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감사는 우리를 온전하고 거룩하게 만든다. 감사는 하나님을 향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는 일이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판단이나 경험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다.
사람의 체면이나 인사치레로 하는 감사는 순간일 뿐이다. 그 기쁨은 자기만족에 머문다.
참 기쁨, 참 기도, 참 감사란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선물이다. 늘 일상에서 바라고 경험할 수 있는 작은 것에도 경외심을 가질 일이다. 우리의 생각과 생활 속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영역을 두는 일이다. 이것을 경건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이 모든 일이 가능한 까닭은 성령의 도우심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영적 선물을 귀하게 여기라고 당부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정금같이 여겨야 한다. 선한 일을 취하고, 악은 버려야 한다.
토마스 카힐은 ‘중세 시대의 신비들’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교는 늘 그늘 속에 갇혀있던 여자들에게 피난처였고, 전에는 한 번도 사회적 존엄성이나 정치적 중요성을 인정받은 적이 없었던 노예들에게도 그랬다. 귀족들조차 예수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들은 진리의 길에서 신실하고 용기 있는 진리의 구도자였다.”
이러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구체적인 자기 삶 속에서 실행에 옮기는 것이 그리스도인다운 실천이다.
바울의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23).
바울의 권면은 경건한 생활의 실제적인 적용을 뜻한다. 기쁨과 기도와 감사, 이 거룩한 생활은 내 의지와 훈련으로 가능하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 그러니 ‘온 영과 혼과 몸’,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3)
연말이면 내가 한 말이 평가를 받는다. 특히 말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평가가 무거울 것이다. 그것이 정당하다. 무거운 책임과 권한을 가진 사람일수록 더 매운 비판을 많이 듣는 것이 상식이다.
색동교회는 비교적 공평한 살림을 한다. 특히 모든 교인들이 신앙공동체의 주인이며, 주도적이려고 한다. 누구나 교회에서 역할을 맡는다. 모든 사람이 부장이든, 속장이든, 선교회 회장이든, 한 가지 이상 사역하기나 주일예배에서 대표기도 하기는 좋은 예이다.
잘하는 사람, 열심있는 사람에게만 맡기지 않는다. 은총의 선물도 골고루 나누어야 한다. 색동교회는 처음부터 이런 원칙을 지켜왔다. 물론 교인 숫자가 적으니 두세 가지씩 역할을 맡는 것은 자연스럽다.
담임 목사로서 내 소망은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쉽지 않다. 그렇다고 내 스스로 원칙을 비켜가고 싶지 않다.
고마운 것은 연말이면 잠이 안 온다는 권사님이 있다고 들었다. 참 행복하다. 어제 속장 선임으로 전화를 걸다가 “목사님도 힘내세요”라고 나를 위로하더라. 목사와 같은 심정을 공유하니 참 고마운 일이다.
사실 내게 여러분의 기도가 더 필요하다. 나는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모임, 바이블25, 세계의 십자가 전이라는 큰 살림을 책임지고 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먹고 사는 일도 아니다. 평생 붙들고 사는 내 소명이다.
나는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저마다 고유한 교회의 성격을 느낀다. 그 결과 우리 색동교회가 얼마나 따듯하고, 넉넉한 교회인 줄 늘 느끼며 고마워한다.
겨울이면 뇌졸중 환자가 급증한다. 아마 계절 탓이기도 하고, 무거운 걱정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뇌졸중은 뇌에 혈액이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다. 아주 가볍게 지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어제 잠이 모자랐다, 가벼운 현기증일 뿐이다’라고 가볍게 핑계를 대기도 한다. 그렇게 쉽게 지나칠 수 있으니 주변에 뇌졸증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소문내야 한다.
뇌졸중을 확인하는 방법은 세 가지이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이다.
“웃어 보세요(smile), 말해 보세요(talk), 두 팔을 들어보세요(raise).”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못하면 즉시 119에 연락하고, 구급요원에게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 여전히 의심스러우면 혀를 내밀어 보라고 하여 확인할 수 있다. 혀가 꼬부라졌든가, 이쪽 또는 저쪽으로 굽었다든가 하면 분명한 뇌졸중 징조이다. 서둘러라. 뇌졸중 환자는 3시간 이내에 치료하면 상태를 완전히 역전시킬 수 있다고 한다.
뇌졸중은 사람의 육체에 닥치는 심각한 종말론적 증세이다. 아마 사도 바울은 신경과 의사의 심정으로 말하지 않았을까?
“항상 기뻐하라(Smile), 쉬지 말고 기도하라(Talk), 범사에 감사하라(Raise)”(16-18).
바울의 말씀은 정확하게 뇌졸중 진단법이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말한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24).
우리의 소망은 여기에 있다. 나를 택하여 부르신 신실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게 하신다는 약속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소명(召命)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부르신 이가, 택하신 이가, 또한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을 지녀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16-18a).
기쁨, 기도, 감사, 이 세 가지는 나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 세 가지는 나를 부르신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인도하셔서 항상 기뻐함으로,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 범사에 감사함으로 내 인생을 만족케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