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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가출소년
월요일이 돌아왔다.
휴일 내내 두 녀석이 세트로 찾아와 괴롭힌 것 말고는 기억이 별로 없다.
아. 토요일날 삼겹살을 사와서 구워준 것도 있구나.
어쨌든 어김없이 편의점 아르바이트 타임.
이제 제법, 아니, 심각할 정도로 익숙해져서
앞치마를 두르고 간만에 머리를 묶은 채로
스포츠신문을 보고있었다.
20분도 되지 않은 시간. 문을 열고 들어온건
다름아닌 김온달이었다.
또 학교 수업을 듣다말고 나왔나보다 싶어서
무어라 한 마디 해주려는 순간, 입을 열기도 전에 김온달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줌마!!!큰일났어!!"
"...?"
"은광이가 오늘 학교 안나왔어! 전화도 안받아!"
"반은광이?"
"응!나한테 말없이 결석한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집에는 가봤어?"
"아니. 아마 집에는 없을거야.
아후. 어딜간거야."
인상을 찡그리며 자기 뒤통수로 손을 뻗어 머리를 마구 헝끄러뜨린다.
나름대로 심각함을 표현하는 것 같은데, 뭐랄까...
....귀엽기만 하다. 전혀 심각해보이지 않는다.
나도 참. 저 녀석이 귀엽다는 말을 하다니.
"걱정마. 어린 애도 아니고 다 큰 앤데."
"아 비겁하잖아!!!!"
"뭐?"
"치사하게 혼자서만 학교를 제끼다니!!!!!이건 배신이야!!"
"....."
그러니까 지금 넌,
걱정이 아니라...
"....부럽니?"
"당연하지!"
...그래. 너답다.
"...어쨌든 아줌마, 만약에 은광이 찾아오면 연락 해줘야 돼!
아참, 내 번호 모르지?"
"..전화기도 없는데.."
"아,그럼 반은광 오면 나한테 연락해달라고 꼭 좀 전해줘!꼭!"
그러고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빠르게 편의점을 박차고 달려 나간다.
..쟤 저러다가 또 학교에서 벌받겠네.
그나저나 반은광 이녀석은
월요일부터 왠 무단결석이래?
..어제까지만 해도 쌩쌩하더니만.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나?
★
간만에 찾아온 점장과 대화(별 영양가없는)를 나누다가 30분정도 늦게 퇴근하는 길.
확실히 요즘 몸이 많이 안 좋아 진 걸 느낀다. 잘 먹지도 않고 일만 하니까.
저려오는 무릎을 두어대 탕탕 두드리며 걷는데, 집앞에 흐릿한 인영이 보인다.
...잠깐...저거...
얼른 달려서 집 앞으로 다가갔다.
...역시나.
"여기서 뭐해,반은광?"
..피터팬.
숙였던 고개를 들어서는 물끄러미 날 쳐다본다.
뭐야..낯간지럽게.
"여기서 뭐하냐니까?"
"....아줌마..."
"....?"
"..........나 좀 재워줘."
...뭐?
이 녀석이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직접 들어놓고도 믿을 수가 없어서 흐릿한 가로등 불빛으로 겨우 보이는
반은광의 얼굴을 쳐다봤다.
"뭐라고..했어?"
"...재워달라고.딱 하루만."
"...너.."
"이상한 상상하지마. ...그냥 잘 데가 필요해서."
"자려면 집에서 자지, 왜 여기서 자?"
"......"
내 말에, 녀석이 아무말 없이 자신의 오른손으로 시선을 옮긴다.
반은광의 시선이 향한 곳을 쳐다보면....
..............트렁크가방?
"너....혹시..."
"......."
"...........가출..했어?"
내 말에 작게 [아 쪽팔려]를 중얼거리며 고개를 옆쪽으로 비스듬히 돌린다.
멍하게 녀석을 쳐다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곤 말했다.
"...일단 들어와."
★
집으로 들어온 후.
10분째 침묵이 흐르고 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어쩔지 망설이는 나와
방 귀퉁이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반은광.
괜히 일어서서 서성이다가 가만히 벽에 기대어 앉으며 물었다.
"..물어봐도 돼?"
"..뭘?"
"왜 가출했는지."
"......"
내 질문에 녀석이 고개를 다시 숙이며 피식, 하고 기운없이 웃는다.
"난처하면 말 안해도 돼, 난 그냥.."
"아줌마."
사태를 수습하려 다급하게 말을 꺼내는 내게
가라앉은 반은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끄럽게 변명을 내뱉던 입을 꽉 다물곤 반은광을 쳐다봤다.
"...아줌마 말대로 난 아무것도 몰라.
죽고싶을 때 아무도 있어주지 않는 게 어떤건지도 모르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랑 사는게 어떤건지도 몰라. 그런데.."
"....."
"....한 가지, 딱 한 가지 분명히 자신할 수 있는게 있거든.
3년 전 그날부터 쭉 느껴온 감정."
"...."
"........누굴 정말 간절히 죽이고 싶다는 거.
그게 어떤건지 나 정말 누구보다 잘 알고 있거든."
녀석의 말에 아무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딱 세 사람이 있어. 미치도록 죽이고 싶은 사람."
"...."
"......아버지...새엄마....그리고..."
"....."
".........나."
★
녀석의 말을 끝으로 한참 대화가 없었다.
옷을 갈아입겠다는 내 말에 녀석은 아무말없이 밖으로 나가주었고
편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후 녀석에게 들어오라 말한 후에야 깨달은 사실 한 가지.
"............이불이 하나밖에 없네."
내 말에 녀석의 시선도 이불과 베게가 쌓인 쪽으로 닿는 게 느껴졌다.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니가 이불에서 자. 난 그냥 옷 덮고 자면 되니까."
"아냐 됐어. 아줌마가 자."
"니가 손님이잖아."
"아줌만....여자잖아."
자신이 뱉어놓고도 부끄러웠나보다.
시선을 비스듬히 또 괜히 옆쪽으로 돌리는 녀석을 보고 잠깐 웃고는 말했다.
"감기나 걸리지 말고 그냥 이불에서 자. 너 그런말 못들어봤어?
여자는 약하지만 아줌마는 강하다.
난 튼튼하니까 괜찮아."
"튼튼하긴. 이게 튼튼해?"
....!!!!...
갑자기 내 손목을 잡아 눈높이로 들어올리는 녀석.
깜짝 놀라서 반은광의 얼굴을 쳐다보자,
곧 화들짝 놀라며 내 손을 내려놓고는 시선을 돌리며 말한다.
"....손목이 나뭇가지 같구만."
"....뼈만 그래. 내장은 튼튼해."
"아 안 어울리게 착한척 하지 말고 그냥 주무세요."
"그래도.."
"나도 남자잖아."
"...."
".....어린애가 아니라 남자니까 괜찮아.
그러니까, ....그냥 이불 덮고 자."
제12화. 이상증세
...
김온달도 그렇고 반은광도 그렇고
왜 자꾸 남자타령이야.
어쨌든, 완강한 반은광 덕분에 나는 이불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뿐.
늘 혼자 자던 방에 누군가 침투했다고 생각하니 불을 껐음에도 불구하고
잠이 쉽사리 오지 않았다.
..그것도 그 누군가가 남자라니.
잠을 청하며 몸을 뒤척이기만 어언 한 시간.
이런 나와는 달리 잠이 잘 오는 듯 아무런 소리가 없는 반은광 쪽을 슬쩍 쳐다보고는
다시 베게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 쟤도 신경 안쓰는데 뭐 어때.
일단 자고 보자.
★
...
........
한참 뒤척이다 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어나는 시각은 7시.
몸을 일으켜서 씻으러 나가다가, 발에 밟히는 무언가에 놀라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뭐야...."
...아.맞다.반은광이 있었지.
내가 다리를 밟아서 깬 듯 인상을 찡그리며 잠긴 목소리로 짜증을 내는 반은광.
나도 모르게 입을 열어 물었다.
"..미안. 괜찮아?"
"...아...너.뭐야.."
"뭐?"
"......아...맞다.."
저 녀석도 잠에 취해서 자기가 우리집에서 잠들었다는걸 잊었나보다.
어제 내가 덮으라고 꺼내준 패딩자켓과 코트 등을 몸에 덮고있다가
부스스한 머리로 상체를 일으키는 녀석이 웃기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해서 말을 건넸다.
"안 추웠어?"
"그냥 좀."
"그래. 안 추운 것 같더라. 밤에 보니까 정신없이 자던데?"
"뭐?"
"밤에 말이야. 너 숨소리도 안내고 자더라."
"...나 그때 안 잤어. 너 잠 못 잘까봐 그런거지."
"....응?"
곧 일어나서는 세수를 하려는지 문을 여는 반은광.
덕분에 열린 문틈사이로 찬 바람이 얼굴에 확 닿는게 느껴졌고
내가 되물었던 사실도 잊은 채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는 찰나
반은광의 목소리가 잠깐 들리고는 이내 문이 닫겼다.
"..여자랑 같이 있는데 그렇게 빨리 잠드는 남자가 어딨냐."
★
"..오늘은 학교 갈꺼지?"
"아니. 당분간은 안 가."
"왜?"
"....그냥."
"..아참. 어제 깜빡해서 말 못했는데, 김온달이 너한테 꼭 연락해달래. 꼭."
"응 알았다."
"나 아르바이트 가야되는데..넌 어쩔래?"
"편의점 두시에 나가잖아."
"오후 알바 말고. 오전 알바."
"같이 가지 뭐."
"뭐?"
"같이 간다고. 아줌마 알바하는 데."
...이 녀석이 지금 장난하나.
"일하러가는데 따라간다고?"
"어.어디 알바 하는데?"
"도너츠가게."
"잘 됐네.홍보도 될거고."
"....?"
"나같은 꽃미남이 테이블에 앉아있으면, 여자들이 가만히 있겠냐?
줄지어서 들어오지."
"푸하."
으.왕자병.
★
"어!은설이 왔네?
....뒤에는 누구야?"
"아. 그냥..아는 동생."
다영이에게 대충 둘러대고는, 테이블에 앉으라고 눈짓을 했다.
오픈 준비를 하던 다영이가 슬쩍 뒤를 돌며 내게 소곤거렸다.
"야. 진짜 잘생겼다. 몇 살이야?"
"..열아홉."
"어머!한 살 차이 밖에 안나네?
와-좋겠다 도은설.능력있는데?"
너도 능력있구나, 다영아.
귓속말 너처럼 잘하는 애도 드물거야.
내가 서있는 카운터 쪽에는 별 관심도 없는지
메뉴판을 훑어보는 반은광을 슬쩍 쳐다보고는 다영이에게 속삭였다.
"어린애야 어린애."
★
가만히 앉아있는 게 심심했는지 도너츠 다섯개를 사서는
십분에 한입씩 베어먹는 반은광.
저렇게 따분하게 앉아있을 바엔 나가서 놀겠다.
자기 전화 한통이면 언제라도 뛰어올 김온달이 있는데.
아. 맞다. 김온달.
손님이 없는 틈을 타서, 반은광에게 말을 걸었다.
"김온달한테는 전화했어?"
"어. 문자했는데 학교 끝나고 편의점에서 보쟤.
나때문에 학주한테 걸려서 오리걸음 중이라는데?"
그러면서 킬킬킬 웃는다.
...나참..
오리걸음을 하면서 문자를 하는 김온달이나,
친구가 자기때문에 오리걸음을 한다는데 즐거워하는 저녀석이나..
..역시 사이코집단이다.
★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지루해서 잠이 든 반은광을 메뉴판으로 세차게 내려쳐 깨운 후
왜 때리냐고 떽떽거리는 반은광을 뒤로한 채 편의점으로 향했다.
"아오, 존나!!!힘자랑 하냐?!!!"
"..."
"....에이씨.짜증나."
"김온달 오리걸음은 끝났대?"
"당연하지. 시간이 몇신데."
"...."
".....그런데 아줌마."
"응?"
녀석이 말을 건네면서 뒤따라오던 걸음을 멈춰버리는 바람에
나도 걸음을 멈추곤 뒤를 바라봤다.
내가 돌아보자,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는 반은광.
"내 앞에서 김온달 이름 자꾸 꺼내지마."
"...자꾸는 무슨. 딱 세번 꺼냈어."
"내 이름보다 걔 이름 더 많이 말했잖아."
..그랬나?
"..그건 내가 니 이름 안 부르고 말하니까 그렇지."
"어쨌든. 그 새끼 이름 자꾸 꺼내지마."
"왜?"
"....몰라.씨바.이상해."
"...."
"후..미쳤지 반은광.진짜 미쳤나보다."
..원래부터 썩 정상은 아니었잖아.
오래전 일 같지만, 니가 피터팬 복장으로 편의점을 찾아온 날을
난 아직 기억해.
초록색 쫄쫄이.
"....휴.가자."
그러고는 혼자 또 생각에 잠겨 미소를 짓고있는 날 자기가 먼저 앞질러 가버린다.
...뭐야 저 녀석.
제13화. sleepin' beauty
편의점.
정확히 1시간 27분째다.
늘 그랬듯 전타임 알바가 남겨두고 간 스포츠신문을 읽는 나와
내 주위를 한참 서성이다가 지친 듯 이제 주저앉아버린 반은광.
어색하기 그지없는 나와 반은광이
무료한 시간을 떼우고 있는게, 1시간 27분째라 이거다.
아. 이제 28분이네.
휴대폰을 열었다 닫았다 심심해하는 반은광이 어쩐지 조금 가여워서
말을 건네주려는 찰나, 문을 열림과 함께 익숙한 걸음걸이가 느껴졌다.
"야임마!!빤은광!"
지나치게 힘을 준 바람에 피터팬 이름의 맨 첫글자가 된소리가 되어버렸다.
마음에 안든다는 듯 인상을 찡그린 반은광이, 여전히 주저앉은채로
흥분에 차 씩씩대는 김온달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뭐, 낌온달."
"이 더럽게 유치한새끼!"
"훗"
김온달의 엄청난 욕설에도(김온달에게 유치하단말을 듣는다는건 정말 모욕적인 일이었다)
정말 칭찬으로 아는 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더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말을 뱉는 반은광.
"왜 씩씩거려. 스페인 소처럼."
...이해를 돕자면, 스페인의 소.
즉 투우를 말하는 듯 하다. 투우사가 든 빨간 천을 바라보며 씩씩거리는 그 소.
"너 임마!!!!어제 하루 종일 연락도 없고!!!학교도 빠지고!!!!!
내가 너 얼마나 걱정한 줄 아냐?!!!!"
"모르는데?"
"아.그래?"
....아 단순하다 정말.
둘의 대화를 듣다가 혀끝을 차며 다시 스포츠 신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넌 임마. 죽어야 싸다 진짜.
어떻게 고3이 학교를 안 나올수가 있냐?"
"뭐 어때. 수능도 끝났는데.
아예 학교 안 나오는 애들도 많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아 맞다. 니네 수능 끝났지?
무슨 학교 갈거야?"
내 물음에 반은광과 김온달은,
서로를 바라보며 씨익 웃는다.
"우린 대학 안 가."
"정말? 그럼 뭐하게?"
"은광이는 모델 제의 들어와서 졸업하는대로 바로 모델 준비하고
나는..."
"넌?"
"가수."
몸을 베베 꼬으며 말끝을 흐리는 김온달 대신에
반은광이 말한다.
...가수?
"너 가수지망생이야?"
"응..그게...아휴..부끄러워."
"새끼 부끄러운척하긴.
김온달 고등학교 올라온 이후로 내내 가수제의 들어왔었어.
그래서 이번에 유명기획사에 졸업하는 대로 들어가."
"와, 진짜? 김온달 노래 잘해?"
"보컬이야. 우리 밴드."
....우리 밴드라니...
설마...
"..너희 밴드해?"
"응."
"몰랐어? 아줌마한테 이야기 안 했었나?"
김온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게 묻는다.
"응.전혀."
"아.정말?우리 밴드해!
그래서 그때 은광이 피터팬 복장 입고 돌아다녔었잖아!"
"아..그럼 그게.."
"응!밴드때문에."
"..반은광 역할은 뭔데?"
"드럼!"
"드럼?근데 왜 드럼이 그런 의상을 입어?
보통 보컬이 입지 않나?"
"음, 몸매가 좋으니까.
뭐, 물론 내 몸매도 끝내주지만."
"....풉.."
"어!아줌마 비웃었어?진짜야!나 몸매 좋다고!보여줄까?!"
흥분해서는 교복 와이셔츠 단추를 끄르는 김온달을
정말 간신히 말렸다.
"알았어!너 몸매 좋아!!이제 그만 하라니까!!"
★
반은광에게 가출 사연을 들은 김온달은 심각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젠 어디서 잤어?"
김온달의 물음에 반은광은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핀다.
그리곤 시선을 손끝에 두고 조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연다.
"....아줌마 집."
"..뭐?"
"........아줌마 집에서 잤다고."
김온달의 살짝 아래로 선하게 쳐진 눈이 커진다.
입을 벌린채 아무런 소리도 내뱉지 못하고 나와 반은광을 번갈아보던 김온달이
애써 숨을 삼키며 말했다.
"....그러니까.....
너랑....아줌마랑....
.....아줌마 집에서 잤다고?"
"....어.."
"........"
김온달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가는게 느껴진다.
...아. 그런게 아닌데.
아무일 없었다고 말해주려는 찰나였다.
순식간에 무시무시해진 표정의 김온달이 말했다.
"...왜..아줌마 집에서 잤는데?"
김온달의 가라앉은 말투에, 손끝에서 시선을 올려
김온달의 눈을 마주하며 말하는 반은광.
"별 뜻 없었어. 그냥 갈 데가 거기밖에 생각이 안나서."
"..나도 있고 휘광이랑 연성이도, 이천이도 있었잖아."
"니네한테 폐끼치기 싫었다.
딱 하룻밤이었어. 아무 일도 없었고 같은 이불 덮었던것도 아니야."
"......반은광..."
여전히 뻘쭘한 날 앞에 세운채로,
그들의 살벌한 대화는 이어졌다.
김온달이 느릿하게 반은광의 이름을 부르고는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걱정해야 하는 그런거...아니지?"
".....어."
".......그럼 됐다.히히!
아!답답해!나 바람 좀 쐬고 올게!"
다시 웃음을 되찾고는 경쾌한 걸음으로 편의점 밖으로
통통 튀어나가는 김온달.
그리고, 유리문 밖으로 보이는 김온달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던 반은광이
알 수 없는 말 하나를 내뱉고 따라 나가버린다.
"....아직은..아닐거야."
★
".....그래서, 또 재워달라고?"
"어. 오늘이 정말 마지막이야.
김온달 부모님이 내일 여행가신대.
내일부턴 갈 데 있어."
집 앞에 도착하니 다시 반은광이 와있었다.
여전히 예의 그 트렁크 가방을 끌고.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너 이거때문에 또 김온달이랑 싸우는거 아니야?"
"아냐. 김온달한테 말하고 허락받고 왔어."
걔가 허락해주다니, 의왼데.
(걱정된다며 베게라도 들고 부산스레 쫓아올 아이임)
....뭐..어제도 잘 잤는데, 오늘도 멀쩡하겠지.
"..그래. 들어와. 대신, 딱 오늘까지야."
★
...
......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 은설이는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금새 거리낌 없이 잠이 듭니다.
그리고, 오늘도 어제처럼 은설이 행여나 깰까봐
조금도 뒤척이지 못하고 있던 은광이는
작게 한숨을 쉽니다.
'오늘도 새벽 3시가 되어서야 잠이 들겠구나'
하구요.
그러다가 결국, 몸을 일으켜서는
완벽하게 잠에 빠진 은설이에게로 살금살금 기어갑니다.
그리고는, 창틈새로 스며든 달빛에 흐리게 비추는 은설이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야할지 말아야할지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내 살며시 뻗어 은설이의 뺨을 어루만져요.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립니다.
"....예쁘다.도은설.
자는거 존나 예쁘네."
"....."
"....후...내가 뭐하는 짓이냐."
"...."
"...미쳤지. 친구가 좋아하는 여잔데
나 왜 자꾸 니가 좋냐. 미쳤나보다 진짜."
평소의 무미건조한 음성과는 달리
유난히 쳐져있는, 그늘진 목소리.
그러고도 한참, 무언가 애틋한 눈빛으로 은설이를 바라보던 은광이는
곧 피식, 실소를 내뱉고는 손을 거둡니다.
그리고 망설이다가, 낮게 속삭여요.
"잘 자라. 도은설."
아줌마말고, 여자 도은설.
제14화. 연상연하
잠에서 깨자 보이는건
웬일인지 일찍 일어나 있는 반은광의 뒷모습.
등을 돌리고 앉아선 뭘 하는건지 꼼지락거리는 반은광의 등을 건드리며
물었다.
"뭐해?"
"...!!!!!!...아..깜짝이야."
"뭘 그렇게 놀ㄹ...
..담배?"
반은광 손에 들려있는 건 다름아닌 담배곽과 라이터.
"..피려고?"
"아니."
그러고는 다시, 입고왔던 교복의 마이 주머니 안에 라이터와 담배를 찔러넣는다.
..뭐야, 피지도 않을걸 뭐하러.
인상을 살짝 찡그린 채 쳐다보자,
처음보는 웃음을 띈 채로 말한다.
"필까말까 했는데, 안 피기로 했어."
"...."
"담배연기 좋아하는 여자는 없지?"
얼떨결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자,
다시 한번 피식 웃으며 벌떡 일어나선 방밖으로 나가며 말하는 반은광.
"그래서 이제 끊으려고."
...뭐야. 저 녀석.
그렇게 방밖으로 한걸음 나가다가, 갑자기 확 뒤를 돌아서는
약간 빨개진 얼굴로 말한다.
"아니!그러니까!절대로 여자들 신경쓰여서 그러는건 아니고!!"
"...?"
내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면,
당황한 기색을 서둘러 감추고는 다시 평소의 무뚝뚝한 모습으로
건조하게 말을 내뱉는다.
"남들이 싫어하는거 하면 폼 안나잖아?"
그러고는 다시 뒤로 돌아선 물을 틀고 세수를 한다.
역시 유치해빠진 녀석.
그래야지 피터팬이지.
★
"..오늘은 학교 가려고?"
"어. 무슨일인지 김온달이 자꾸 보채서.
아.귀찮아."
인상을 찡그리며 뒤통수를 흐트리다가,
아르바이트를 가려고 나서는 날 흘끗 쳐다본다.
"..왜?"
"알바가냐?"
"응."
"..같이 나가자."
★
언제나 그랬듯 인상을 찡그리며 김온달이 어쩌니 저쩌니 투덜대던 반은광이
학교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탄 후,
홀로 도너츠가게로 향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시작한지 한 30분 되었을까?
손님의 주문에 아이스티를 타던 다영이가 뒤로 돌아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그 열아홉살 킹카 안 데려왔어?"
"열아홉살 킹카? ....아, 응."
"흐응."
"....?"
"흐으음."
뭐야.
눈을 가늘게 뜨곤 날 쳐다보는 다영이에게 물었다.
"..왜 그래?"
"예나 지금이나, 남자한테 관심 없는건 여전하구나."
"..뭐?"
"그 정도 남자면, 다른 애들 같으면 잡으려고 난릴꺼야."
"...그래도 어린앤데."
"어린애는 무슨! 야. 한살차이가 무슨 어린애냐?
12살 연상연하 커플도 아무렇지 않게 연애하는 시절에.
애쉬튼 커쳐랑 데미 무어는 열여섯살 차인데도 잘만 살잖아!"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살짝 웃어보자, 다영이가 더 가까이 다가와서 말했다.
"조심해. 지금은 괜찮은 것 같지? 어느샌가 남자로 보일 날이 올거야."
★
편의점으로 옮긴 후에도, 한참 다영이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김온달이랑 반은광은, 어린애로밖에 안보이는데..
...하긴...나도 참 많이 변했다.처음 집에서 나올때는
아무도 믿지 말자고, 아무랑도 가까이 지내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했었는데, 이젠 사랑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충고까지 들을 지경이라니.
오늘따라 그저 시선만 내리꽂고있는 스포츠신문의 글자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것만 같아서
머리를 좌우로 휘젓고 있을 그 시점...
"...너희들..."
"따라와봐!잠깐이면 돼!"
갑자기 편의점에 들이닥친 반은광과 김온달.
화들짝 놀란 내가 둘을 번갈아 쳐다보면,
내 손을 질질 끌고 따라와보라며 문쪽으로 다가가는 김온달.
"뭐하는거야!내가 지금 가면 카운터는?"
"얘!"
"응?"
김온달이 가리킨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면,
어떤 여자애 한 명이, 입구쪽에 기대어 서있는 반은광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수줍게 서있다.
...뭐야..쟤가 뭐..?
"얘가 대신 봐준다 그랬어! 그치? 승미야?"
"승미가 아니라 승흰데요.."
"응 그래. 승미야. 이거 받고, 잠깐만 편의점 좀 봐줘.
심심하다고 껌 까먹고 그러면 안돼!"
"승흰데..."
끝까지 자신의 이름이 승희임을 주장하는 여자아이를 가볍게 무시한 채
내 몸에 두르고있는 앞치마를 벗겨선 여자아이에게 넘겨주는 김온달.
그러고는 내 손을 덥썩 잡곤 말한다.
"가자!"
"어..어딜?"
자신의 이름을 낮게 읇조리며 카운터로 향하는 승희와
출구쪽으로 자꾸 내 손을 잡아끄는 김온달.
그리고 이미 편의점 밖으로 나가버리 반은광.
당황한 내가 어쩔줄 모른 채로, 날 끌어당기는 김온달에게서 힘겹게 중심을 잡고 묻자,
김온달에게서 나온 대답은 참으로 허무맹랑하고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네버랜드로!"
제15화. 네버랜드
"다 왔다!"
김온달이 끌고 온 건 고등학교.
더 정확히는, 이현고등학교. 즉,
김온달과 반은광이 다니는 학교.
느긋하게 뒤에서 따라오는 듯 한 속도로 걷던 반은광도 도착해서
김온달의 옆에 섰다.
"...여긴 왜 온거야?"
"아직 다 온 거 아니야! 조금 더 남았어!"
"그러니까, 대체 어딜 가는거냐고."
"네버랜드."
아까부터 왜 자꾸 네버랜드 타령이야.
네버랜드는 거기잖아. 피터팬의 고향.
순간 지금 이렇게 시간을 지체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볼일이 끝날 때 까지 순순히 김온달이 아니고,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한다.
즉, 여기에 지금 이렇게 서서 실랑이를 벌이는건..
"시간낭비다. 네버랜드든 어디든, 일단 빨리 가자."
★
교내에 들어오고 나서는, 어디선가 준비한 천으로 내 눈을 가려버리는
김온달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나는 김온달과 반은광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계단을 오르는 내내, 실수든 고의든 이 녀석들이 손을 놓아서
날 떨어뜨리는 건 아닌가 하는 말도 안되는 상상이 피어올라서
나도 모르게 피식거리곤 했다.
"이제 정말 다 왔다."
걸음을 멈춰선 김온달이 속삭이든 낮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나무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와 함께
김온달이 내 눈에서 천을 풀어냈다.
그리고, 감은 눈을 뜨자 보이는건....
"....!!!!..."
.....밴드부실이였다.
작은 무대까지 있는.
그리고, 무대의 바로 앞에 친절하게 나를 앉힌 김온달이
반은광을 데리고 다른 부원들이 악기를 들고 서있는 무대 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김온달이 마이크를 잡고,
반은광은 드럼스틱을 잡고.
....그렇게 시작되었다. 네버랜드로의 여행은.
"Welcome to NEVERLAND."
김온달의 꿈을 꾸는듯한 느낌의 인삿말과 함께.
★
세 곡이 끝난 후에도 난 한참 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뭐랄까. 꽉 찬 느낌의 반주. 그리고 김온달의 노래는 최상이었다.
그제서야 김온달이 3년 내내 가수제의가 들어왔다는 것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알 수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몸소 느꼈다. 뼈저리게.
"아줌마! 나 멋지지!"
김온달이 뽐내듯 내 앞에 섰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노래 정말 잘 한다."
"그치!"
"누나가 그 누나에요? 편의점 공주님?"
...응? 편의점 공주님?
베이스기타를 연주하던 아이가 성큼 내려와서 말을 하자
점점 김온달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게 무슨소리야? 편의점 공주님이라ㄴ.."
"아!아무것도!아무것도 아니야 아줌마!!
그치, 휘광아?응?아무것도 아니지?"
"뭐야. 뭘 감추고 그러냐 김온달 답지 않게.
그러니까요, 저 녀석이요.."
"아씨 말하지마 천휘광!!!부끄럽단 말이야!"
"...말하지말까요?"
김온달의 완강한 반대에, 천휘광이라고 하는 키가 유난히 큰 베이스기타가
한쪽 눈썹을 약간 찌그러트리며 내게 물었다.
"아냐. 괜찮아. 이야기해봐!"
"....에이씨....미워.."
김온달이 빨개진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부실을 뛰쳐나간 후,
녀석이 나간 부실문을 쳐다보며 슬쩍 웃더니 입을 여는 천휘광이라는 아이.
"내가 다니는 이현고에서 정확히 열시방향에 있는 편의점.
그곳에 내 공주가 있어."
"....?"
"그냥, 김온달이 매일 하던 이야기에요."
..
김온달 특유의 표정까지 떠올라서, 마치 직접 듣는 것만 같이 생생한 느낌이었다.
작게 피식 웃다가 무심결에 시선을 다른 곳으로 틀면,
그리고 무대 위에는 노래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드럼으로 장난을 치던 반은광이
날 쳐다보고 있다.
넋을 잃고 멍하게 쳐다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바로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기는 반은광.
....쟨 또 자꾸 왜저래. 싱겁게.
"..어쨌든 연주 잘 들었어. 고마워. 근데 나는 알바때문에 바빠서 이만 가봐야할.."
"에이!무슨말씀이세요 누님!여기까지 오셨는데 우리 소개는 듣고 가셔야죠!"
...누님이라니.
키가 190은 되어보이는 훤칠하고 붙임성 좋은 휘광이라는 아이덕분에
얼떨결에 나는 나머지 멤버들 소개를 듣게 됐다.
"저기, 지금 쇼파에서 졸고있는 애 보이죠? 머리 약간 갈색삘나고 키 작은 애.
쟤가 리드기타 이연성이에요.
그리고 얘. 눈 째진 얘가 세컨기타 겸 키보드 정이천.
연성이랑 이천이 둘 다 우리보다 한살 어려요.
고2요."
"야임마 눈 째진 애라니!!!이준기 눈이라고!"
"....무시하시구요. 그리고 제가!
네버랜드의 핵심멤버 얼굴마담 몸매짱 인기짱!
....베이스기타 천휘광입니다!
저 잘생겼죠!"
"잘생기긴."
...말해두건데, 절대로 내가 뱉은 말이 아니다.
어느새 성큼 다가와있는 반은광이 한 말이지.
반은광의 비웃음섞인 말투에 천휘광이 또 한쪽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뭐야 임마. 이 형님의 외모를 질투하는거냐?"
"웃기고있네. 니가 무슨 얼굴마담이냐. 당연히 나지."
"어이고. 미친놈."
"병신아 내가 훨씬 잘생겼지!!"
"아, 진짜. 그럼 우리 공정하게 누님한테 물어보자. 됐지?
누님. 전 누님을 믿어요. 누가 더 잘생겼죠?"
아..뭐야 이건 또.
갑자기 내 쪽으로 얼굴을 심히 들이대는 천휘광.
당황한 내가 한걸음 물러서자, 날 보던 반은광이 천휘광의 뒤통수를 후린다.
"악!뭐야 이 미친놈아 왜때려!!"
"사람 당황하게 만들지마 새끼야.
...아르바이트 하러가 그냥. 이런놈 신경쓰지 말고."
"...아...그게..."
"임마 누님이 나랑 더 있고 싶으시대잖아!
그쵸 누님?"
....그건 절대로 아닌데..
당황한 내가 어쩔바를 모르고 뻘쭘하게 서있자
날 흘끗 쳐다보더니 반은광이 말했다.
"그냥 가. 바쁘다며."
"으.응..그래..
나 가볼게요. 오늘 연주 정말 잘 들었어요."
"아..안돼....누님!!!!"
천휘광의 우렁찬 목소리를 끝으로 재빨리 부실에서 나와버렸다.
..휴. 정말 시끄럽다.
지구상에 김온달과 천휘광, 딱 두 명만 남는다고 해도
청각적으로는 전혀 허전하지 않을거야.
..아.맞다.김온달.
아까 뛰쳐나간 후에 어떻게 된거지?
학교를 막 벗어날 무렵, 운동장 중간에 쪼그려앉아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저 뒷모습. 분명히 김온달이다.
뭐야. 아까 여기까지 뛰쳐나온거야?
모른척 그냥 지나쳐서 가버릴까 하다가,
다가가서 김온달의 어깨를 건드리며 말했다.
"여기서 뭐해? 안 들어가?"
"아.깜짝이야.아줌마,지금 가게?"
"응. 무슨 그런 일 가지고 여기까지 나와있어?"
평소엔 그런 말보다 더 심한 말과 행동들로 들이대면서.
내 말에 김온달이 그제서야 몸을 일으켜 일어나더니
고개를 푹 숙인채로 땅을 쳐다보며 말했다.
"...부끄럽잖아.."
"너 그런것가지고 부끄럼타고 그런애 아니잖아."
"아냐. 얼마나 떨린데."
"하하.니가?"
"정말이야!아줌마한테 인사만 해도 막 떨려 나."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고는 내게 말하는 김온달.
갑작스런 김온달의 행동에 휘청하고 내가 균형을 잃자
재빨리 잡아준다.
...그것도 손을.
뻘쭘한 내가 빼지도 못하고 멍하게 잡힌 손을 바라보고만 있는데
잡힌 손 위로 김온달의, 노래부를 때 같은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정말 많이 좋아해. 아줌마."
"...."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손만 잡아도, 같은 공간에서 숨쉰다는것만으로도 설렐만큼
정말 많이 좋아해."
제16화. 그남자의 마음
김온달의 진지한 고백 후, 아르바이트를 하는 편의점으로 돌아가는 길.
가는 내내 머리가 멍하다. 그렇게 진지하게 말할줄 몰랐다.
인정하긴 싫지만, 조금 설레였던 게 사실이다.
"후.."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무료하고 심심했는지 내가 펴보던 스포츠신문을 읽다가
내 등장에 놀라선 카운터 밖으로 빠져나오는 승흰지 승민지가 보인다.
"언니!"
"응?"
"언니 이름이 뭐에요?"
"어?"
"혹시, 도..도..어쨌든 도씨 아니에요?"
"....맞는데.도은설."
"아맞다!도은설!"
이 아이 분명히 오늘 처음보는데,
마치 처음부터 내 이름을 알고있었다는 듯 말한다.
그리고는 내가 인상을 약간 찡그리고 빤히 쳐다보자
시선을 여전히 내게 향한채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승민지 승흰지 하는 여자애.
"아...언니였구나.."
"..뭐가?"
"..아,그게요.사실 다른게 아니고 제 친구가 오늘 반은광선ㅂ.."
여자아이가 무언가 말을 하려는 찰나, 무심결에 쳐다본 편의점 밖의 횡단보도를
점장이 건너오는게 보였다.
...!!!!...
이런.
카운터에 낯선 사람이 편의점 앞치마를 둘러매고 있는걸 알면 화를 낼게 뻔했기때문에
황급히 나는 승민지 승흰지 하는 그 여자아이에게서 앞치마를 벗기려 낑낑댔고
놀란 아이는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말을 멈추고는 앞치마를 벗어선
내게 넘겨주었다.
"후, 고마웠어. 승미라 그랬나?"
"아뇨..승흰데요..."
"아, 그래. 미안해. 김온달 말때문에 헷갈려서.
지금은 가보는게 좋겠다. 점장이 오고있거든. 이제 곧 들어올 기세야."
"네. 안녕히계세요."
막 나가려던 승희가 다시 걸음을 멈추곤 뒤를 돌아선 날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아 참, 언니!"
"응?"
"언니, 정말 부러워요."
..뭐야,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아니에요. 그냥 부럽다구요. 안녕히계세요!"
끝까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는 점장의 등장과 함께 사라져버리는 승희.
일단 점장에게 인사를 하곤, 편의점 유리문 너머로 사라지는 승희를 잠깐 바라보았다.
..뭐야.저 아이.
★
....
...........
편의점에서 나온 승희는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립니다.
그러니까, 승희는 가장 친한 친구가 학교에서 제일 인기 있는 두 명 중 한명인
은광이에게 고백을 하는 장소에 따라갔었죠.
얼떨결에 뒤뜰로 불려나온 은광이가 인상을 찡그리며 뭐냐는 식으로
승희의 친구를 바라봤습니다.
"저, 선배. ...좋아해요!"
어차피 은광은 3일에 한번씩은 꼭 고백을 받는다고 봐야하니까,
은광에게는 승희의 친구의 고백이 아무것도 아니었겠죠.
그냥 소문대로 관심없다 하고 돌아설 줄 알았는데,
은광이 장난끼어린 표정으로 승희의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너 스포츠 신문 좋아해?"
"예?....아..아뇨..별로.."
"...그럼 너,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해?"
"..아니요.."
"그럼 너, 혹시 도너츠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해?"
"아니요..아르바이트 안하는데요.."
"..너 스무살되면 대학갈거지?"
"..아,네.그야.."
일단 묻는 질문에 대답을 한 승희의 친구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은광을 올려다봤습니다.
잘 웃지 않기로 유명한 은광이 피식 웃었어요.
놀란 승희의 친구가 입을 벌리고 은광을 쳐다보자
은광이 말했죠.
"...그래. 그래서 넌 안 돼."
"...."
"...도은설이 아니니까,"
"...."
"...내 여자가 될 수 없어."
"....."
"...이제 됐지? 아. 맞다.
..오늘 내가 한 말은, 함부로 퍼뜨리고 다니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비밀으로 해야 하는 친구가 있거든."
그리고는 씁쓸하게 웃고는 교실로 향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생생해서,
이미 멀어져버린 편의점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다시 한번 돌려봅니다.
...그래..반은광선배가 좋아할만하더라.
..뭐랄까..단순히 예쁘고 아름답다는 느낌보다..
...강인하다고나 할까?
"에휴!나같아도 세영이보다는 그 언니 택하겠다!"
★
...
........
오늘도 집앞에 반은광이 서있는건 아닌가, 내심 걱정을 하며 집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내가 우려하던 일은 없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들어갔다.
싸늘하게 식은 방 한켠에 쌓여진 라면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저거 다 먹으면 살 뒤룩뒤룩 찌겠다.
"...아....그나저나 점점 날씨 추워지는데
여기서 어떻게 버티냐.."
★
다음날, 편의점.
어김없이 스포츠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반은광이 들어섰다.
"어. 혼자왔네?"
"김온달 화장실청소중."
...어떻게 된게 걔는 매일 벌만 받니.
무엇보다 반은광이 안 받는게 신기하다.
"..어젠 어디서 잤어?"
"천휘광집. 시끄러워 뒈지는줄 알았다.
걔네 동생도 천휘광만큼 시끄러워"
아직도 그때의 악몽이 생각난다는듯, 잔뜩 굳은 표정으로
귀를 매만지는 반은광.
..알만하다 알만해.
"..어쨌든, 그럼 난 간다."
"어? 벌써 가게?"
"왜, 아쉽냐?"
그러면서 피식 웃는다.
..아쉽기는. 그냥 예의상 한 말이지.
대답대신 빙그레 웃어보이자, 반은광이 말한다.
"아쉬워도 참아라. 오늘은 할 일이 있어서 온거니까."
"무슨 할 일?"
"됐다. 벌써 끝냈다.
그럼 잘 있어. 아. 껌 한 통 사간다."
그러고는 300원을 카운터 위로 던지며 풍선껌 하나를 들고는
편의점 밖으로 휙 나가버린다.
...뭐야. 할일이라니. 이야기밖에 안해놓곤.
....그나저나 풍선껌.......악취향이다.
★
다시 스포츠신문으로 시선을 내리꽂고 있는데,
문이 열림과 함께 흥겨운 캐롤소리가 들린다.
"We wish your merry christmas♪"
..노래할때의 김온달 목소리다.
숙이고있던 고개를 휙 들자, 환하게 웃으며 걸어들어오는 김온달이 보인다.
"안녕 아줌마!"
"..왠 캐롤이야? 크리스마스 아직 한참 남았는데."
"한참은 무슨!!!11일남았다 11일."
...11일이면 많이 남은거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스포츠 신문으로 시선을 내리꽂는데
김온달이 카운터의 바깥쪽 벽면(즉 도은설이 볼 수 없는 면)의 아랫쪽으로 시선을 굴린다.
그러다가 무언가 발견한 듯..
"..어?이게뭐지?"
하고는 떼어내 눈높이로 들어올린다.
포스트잇이네. 누가 붙여놨지?
한참 내용을 들여다보던 김온달이, 무언가 굳은 표정으로 포스트잇을 대충
카운터 위에 던져놓고는 편의점을 박차고는 밖으로 달려가버린다.
"..뭐야..뭐길래?"
녀석이 카운터 위에 던져둔 포스트잇을 조심스레 올려들었다.
컴퓨터용 싸인펜 정도의 굵기로 삐뚤삐뚤하게 적혀있는 글귀 하나.
- 좋아해ㄷㅇㅅ -
......ㄷㅇㅅ......
.......ㄷㅇㅅ...
"......도은설...."
...좋아해....도은설..?..
제17화. 두번째 고백
의문의 포스트잇을 카운터 서랍 깊숙한 곳에 붙여놓고는
터덜터덜 편의점을 나섰다.
내가 편의점에 들어왔을때는 분명히 그런 메모가 없었으니까
내가 오고 난 후와 김온달이 오기 전에 온 누군가가 붙여놨다는건데..
누가 왔었더라. 그러니까...
앞치마를 매자 마자 들어왔던 초등학생 남녀 두 명. 그들은 사이좋게 초콜렛을 사갔다.
둘은 어린 연인사이인 듯 보였기 때문에 그런 짓은 할 리 없었을거고..
그리고 생수를 사러왔던 20대 중반의 여성. ...은 설마 아니겠지.
또 담배 한 갑을 사갔던 30대 정도의 남자.
..는 통화중이었기때문에 그런 메모를 붙일 겨를이 없었을거야.
그리고....
..........
"....반은광...."
집 앞에 서있는 반은광.
..그래. 너도 왔었구나.
..아니지..그것보다..
"..왠일이야 또? 오늘은 못 재워준다!"
"자러 온거 아니야."
".....너 얼굴이 왜이래? 맞았어?"
"...어."
"....어쩌다가?"
혹시 또 아버지한테 맞은 건 아닐까 싶어서
조심스레 물어봤지만, 반은광은 그런 거 아니라는 듯 무덤덤하게 말했다.
"..맞을 짓 해서 맞았어."
"...아."
다행이네.조금.
"..그나저나 어쩐 일이야? 자러 온것도 아니면."
"아줌마."
"응?"
"...나..벌받겠지?"
..뭐야.뜬금없이.벌이라니.
인상을 찡그리며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봤지만
반은광은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나..분명히 벌받을거야. 그치?"
"..무슨말이야."
"....무슨말이냐고? 보여줘?"
"너 대ㅊ......!!!!!!!!!!........"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갑자기 날 끌어안는 반은광때문에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어쩔줄 몰라 빠져나오려는 찰나
반은광의 나즈막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좋아해.....도은설....."
...........좋아해ㄷㅇㅅ....
.....너였구나.
"......온달이새끼한텐 존나 미안한데....
...........그래도 좋아.....씨발.....
나.....이러면 벌받는거 아는데............"
"......"
".....나 그냥, 그 벌 받을라고.."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나는 녀석의 품에서 벗어났다.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날 쳐다보는 반은광.
충격에 멍해진 머리때문에
어떻게 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반은광...."
"욕심이 자꾸 나서 못 멈추겠어."
".....반은광...제발.."
"처음엔 친구가 좋아하는 여자니까 참으려했는데.."
"........반은광....."
".............이젠 싸워서라도 내가 갖고싶어.
....그만큼 좋아졌어."
단호한 녀석의 눈빛이
장난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아서,
절대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아서
나는 한참을 아무 행동을 할 수도 없었다.
★
반은광이 기다리겠다는 말을 던지고 돌아간 후에도
한참 그 자리에 멍하게 서있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어.그냥.....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 한 거..그거뿐인데..."
...내가 다 망가뜨려가는 것만 같아.
..........역시 밀어내야 했을까.
싸워서라도 갖고싶을정도로 내가 좋다는 반은광의 목소리가
진심으로 날 좋아한다던 김온달의 목소리와 겹쳐져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난....
★
..결국 잠을 설쳤다.
거울을 통해 눈 밑이 쾡한 걸 몸소 느끼고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충 세수를 하고는 온몸의 기운이 소진된 걸 느끼며 간신히 옷을 갈아입고
알바를 하러 집을 나섰다.
걸어가려다가 도저히 못갈 것 같아서 결국 버스정류장으로 향했고,
기운없이 자리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
........
이상하네.
왜 자꾸 눈앞이 어지럽지.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며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하지만 결과는 매한가지, 계속 눈앞이 흐릿해진다.
참아야하는데....참아야하는데........
그리고 그 순간..........
- 아줌마!!!! -
유난히 멀게만 느껴지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기운없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듯한 찰나를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제18화. 페어플레이
....
.........
"....마....줌마....
.................아줌마.....정신이 들어?"
....김온달...?..
"아줌마..아줌마..괜찮아?"
"................."
뭐야..어떻게 된거야.
찡그린 눈 사이로 흰 천장이 보인다.
서서히 잃었던 감각들이 돌아오는 듯한 느낌.
.....이거...가습기 냄새.....
"....병원..?"
"응!아줌마 정류장에서 쓰러져서 나 깜짝 놀랐어!!"
...
아..맞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중이었지.
..그런 다음부터는 기억이 없다.
김온달의 말을 빌리면, 아마 쓰러졌었나보다.
"버스에서 내다보니까 아줌마가 보이는거야!
그래서 나도 모르게 학교도 아닌데 내려버렸지 뭐야.
그리고 막 아줌마라고 부르는데 아줌마가 쓰러졌어."
"........"
김온달에게서 시선을 떼어 손목으로 옮겨갔다.
....링겔..
"과로에 영양실조로 인한 빈혈이래. 아줌마 너무 무리했어.
저녁도 잘 안 챙겨먹었지?"
"......"
"밥도 잘 안 챙겨먹고 맨날 아르바이트만 하니까 그렇잖아!
정말.아줌마 때문에 아줌마 몸만 고생해."
내 이마에 손을 갖다대며 투덜대는 투로 이야기 하던 김온달이
날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얼마나 놀란줄 알아?"
김온달의 말에 살짝 웃어보자 얼굴이 붉어져서는
시선을 홱 옆으로 틀어버린다.
..귀여운 녀석.
아니다. 잠깐. 그러고보니 이 병실 1인실이잖아?
하룻밤 자면 입원비가 들텐데.
"..저기 김온달. 나 언제 퇴원하면 된대?"
"응? ...아 맞다. 링겔만 다 맞으면 퇴원 가능하대."
"...법적보호자 아니어도 입퇴원 수속 가능한가?"
"상관 없는것 같던데?"
그러고는 무심하게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순간, 만약에 김온달이 아니었으면 내가 그 길거리에 쓰러진후
어떻게 되었을까 하니 끔찍해진다.
난 휴대폰도 없고, 연결된 사람도 없으니까
구급차에 실려와서도 쓸쓸했겠지.
캔커피를 뽑아올거라며 통통거리는 특유의 발걸음으로
병실을 나가려는 김온달의 뒷통수에 대고 말했다.
"고마워."
".....?...뭐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김온달.
.....괜시리 쑥쓰러워져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여기 있어줘서 말이야. ..고맙다구."
"아...."
"....."
"......풉."
"...왜 웃어?"
"......아줌마 귀엽다. 최고!"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는 김온달을 향해 피식 웃어보이자
다시 캔커피를 향해 병실을 나서는 김온달.
.........
귀여운줄만 알았더니, 든든하기까지 하네.
저녀석이랑 있으면 늘
왼쪽 가슴 언저리가 따뜻해져온다.
★
"...근데 아줌마."
"응?"
링겔을 다 맞고,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
내 옷이 얇아보인다며 기어코 교복 마이를 벗어 내게 덮어주던 김온달이 말한다.
"...혹시...은광이가..."
"....?....."
"..........아냐.아무것도."
뭐야. 싱겁게씨리.
..아맞다. 내 정신좀 봐.
"....아르바이트!!"
"응?"
"아르바이트!!어떡해!
시계 있어? 지금 몇 시야?"
"어..아.....4시 28분."
"....아...미쳤어 도은설..
.....후....맞다.너 학교는?"
"아줌마 여기 데려다준다고 못갔지!"
"....김온달 핑계대는 것 봐.
너 학교가기 싫어서 일부러 여기 따라온거 아니야?"
"아냐!"
"에이!그런것 같은데!"
"아니라ㄱ......"
내게 대꾸를 하던 김온달이 갑자기 정면을 보고는 걸음을 멈춘다.
김온달을 쳐다보며 웃던 나는 뒤늦게 [왜그래?]라는 작은 말과 함께
정면을 쳐다보고.
그리고, 내 시선이 닿은 곳에 서있는 건....
"......반은광?"
"김온달. 너 왜 학교 안나왔냐?"
날 흘끗 쳐다보더니 김온달에게 시선을 옮겨 묻는다.
잠깐 심각했던 김온달의 표정에 곧 웃음이 번진다.
"응!나 착한일 하느라고 못갔다.
형 보고싶었냐?"
"장난치지 말고 임마.
..너 내가 어제 했던 말 때문에 안나온거 아니지?"
"...그런거 아니야."
"...후..."
복잡하다는 듯 자기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흐뜨러뜨리던 반은광이
뒤통수에서 손을 떼고는, 어색하게 느껴지는 심각한 표정으로 서있는 김온달에게
단호한 말투로 말한다.
".......어제 했던 말. 취소할까 했는데. 역시 못하겠다."
"...."
".......이러면 안되는거 아는데...."
"....."
".....니네 둘 같이 있는 거 보니까 속이 뒤집어지려그런다."
그러고는 내 손목을 휙 잡아 자기 쪽으로 약간 끌어당긴다.
놀란 내가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반은광을 올려다보자,
여전히 김온달에게 시선을 둔 채로 말하는 반은광.
"미안하다. 김온달."
"...."
"..도은설, 포기 못하겠다."
......
...........
김온달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진다.
"....반은광."
"..근데 난 너도 잃기 싫거든.
..태어나 사귄 제일 좋은 친구니까. 그러니까,"
"....."
"페어플레이하자."
반은광을 한참 쳐다보던 김온달은
곧 표정을 풀고 씨익 웃더니만 반은광의 어깨를 살짝 치며 말한다.
"역시 반은광."
"....."
".....이 이기적인 자식."
"나 이런놈인거 모르고 친구했냐?"
"알지. 잘 알았지. 그래서..."
"...."
"......화를 못내겠다. 임마.
...페어플레이 좋지. 잘 부탁한다."
"..."
"......나보다 농구 못하는 놈."
"임마!!!축구는 내가 더 잘하잖아!!!"
김온달이 툭 던진 말에 발끈 해선 소리를 지르는 반은광.
갑자기 급반전된 상황이 웃겨서 피식 웃자,
김온달과 반은광이 동시에 소리를 지른다.
"웃지마!!!"
"아줌마 나한테 넘어와야 된다!!!저런 놈 말고!!!!"
"내가 뭘!!!너보다 낫다고!!!!!"
다시 티격태격대는 두 놈들을 향해 작게 중얼거리고는
여전히 싸우는 녀석들을 뒤로 하고는 먼저 집으로 걸어갔다.
"...둘다 똑같구만.어린녀석들."
"내가 너보다 낫지!!!!"
"내가 너보다 잘생겼잖아!!!!"
"개뿔!!!!!.......어!!아줌마 같이가!!!!!"
글쎄.
지금으로선,
연애든 뭐든 다 필요없고,
딱 이렇게만 살았으면 좋겠다.
....
..........
앞질러가는 은설을 뒤따라가면서
두 남자가 피식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김온달.몰랐는데 너 주먹 많이 맵더라.형 조금 아팠다"
"...이제 알았냐?그러니까 임마.맞기싫음 잘해라"
온달이의 장난섞인 말투에 은광이도 씨익 웃어버려요.
"야. 근데 오늘 왜 아줌마 편의점 안 나간거냐?"
은광이가 갑자기 고개를 틀고 질문을 던지면,
온달이는 또 특유의 짖궂은 미소를 띄운채로 대답합니다.
"그런일이 있었어.비밀이야."
"야!김온달!장난치냐?"
"몰라 안듣겨!!아줌마 같이가!!!!"
"김온달!!!!!!!!!!!!!"
시끄러운 세 사람의 발걸음 뒤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집니다.
제19화. 감정심화
"뭐?!!기절?!!?!"
장소를 옮겨 우리집.
김온달을 조르고 협박하고 구타해서 결국은 사연을 듣고야 만 반은광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 얼굴을 살폈다.
놈답지 않은 요란한 반응에 놀란 내가 움찔했고,
그런 날 아는지 모르는지 성큼 내 눈앞까지 다가온 반은광이 말했다.
"괜찮냐?"
뭐야. 이 다정한 말내용과는 다르게 시건방진 말투는.
벙쪄서 멍하게 반은광을 바라다보면
김온달이 중간에 끼어들어 반은광과 나를 낑낑거리며 떼놓곤 말한다.
"야!이렇게 갑자기 아줌마한테 들이대지마. 반칙이야."
"참나. 야. 이렇게 안하면 무슨 수로 꼬시냐?"
"왜 못 해? 난 눈빛으로도 유혹할 수 있어."
그리고는 내게 사정없이 윙크를 보낸다.
결국 내가 참던 웃음을 터뜨리면, 인상을 팍 찡그리는 반은광과
흐뭇하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반은광에게 말하는 김온달.
"거봐. 난 눈빛만으로도 아줌마를 웃게한다니까."
"..............씨발...맘에 안들어 진짜."
"내가 할 소리야. 니네 둘 다 갑자기 왜이렇게 들이대?"
내 말에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입을 여는 김온달.
"...아줌마. 우리 이러는거 부담..돼?"
"솔직히 조금 그래. 난 아직 어느쪽도 그렇게 보고 있지 않아."
내 말에 급속도로 시무룩해진 김온달과,
뾰루퉁해서는 손가락으로 방바닥을 문지르는 반은광.
막 귀엽다고 느끼려던 찰나, 반은광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안하면."
"...."
"남자로 봐주지도 않을거잖아."
"........."
"니 눈빛 어떤줄 알아?"
"...."
".....매일 어린애 보듯해. 딱 그런눈이라고."
"......"
"김온달은 참을지 몰라도, 난 못참아."
"...."
".....난 도은설한테 남자이고 싶으니까."
★
..그러니까, 반은광의 메가톤급 선언 이후
200배 이상으로 어색해진 분위기속에 반은광은 천휘광의 집으로 간다며 나갔다.
그리고 김온달과 덩그러니 남아있는 중.
"....저기, 아줌마."
"..응?"
"...우리 행동 너무 신경쓰고 그러지 마.
아줌마가 변하지 않는 이상,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거야."
"......"
"그리고, 오늘처럼 몸 안좋고 그러면 무리해서 아르바이트 나가려고 하지도 말고.
오전에 도너츠가게 알바는 학교때문에 조금 곤란하지만,
편의점은 언제든지 내가 대타 뛸게."
녀석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살짝 웃어보이면, 녀석도 덩달아 씨익 웃어보인다.
웃을때 살짝 휘어지는 눈꼬리가 예뻐서 나도 모르게 한참 쳐다보고 있자,
부끄럽다는 듯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하는 김온달.
"뭐야. 아줌마. 그렇게 찐득하게 쳐다보다니.."
"뭐?야.내가 언제 찐득하게.."
"쉿."
......깜짝이야!
이 녀석, 반은광한테는 갑자기 들이대지 말자더니.
아까의 반은광보다 더 가까운 거리로 얼굴을 들이댄다.
...그것도 녀석의 검지손가락은....
"....아.이건 좀 야했다..아줌마 입술 느껴져."
서둘러 내 입에서 손을 거두는 김온달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래. 녀석의 손가락은 내 입술에 있었다.
나는 주로 당황하면 몸이 굳는 스타일인가보다.
이성대로라면 이미 녀석은 멀리 나가떨어져있어야 하는데
몸이 꼼짝을 하지 않는걸 보니.
여전히 멍하게 김온달을 쳐다보면, 김온달은 혼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선
호들갑을 떨더니 벌떡 일어난다.
".....아...부끄러.
아줌마.나도 이만 갈게."
"응? 왜?"
"...그냥. 여기 더 있으면.."
"....?..."
".........아후.아니야!
아줌마 푹 쉬고 내일 봐!안녕!"
그리고는 쫓기기라도 하는 것 처럼 부리나케 방에서 달려나간다.
...뭐야..갑자기.
녀석이 열고 나간 문을 잠깐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고는
방밖으로 씻으러 나갔다.
★
...
........
"후우.."
은설이 집의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온 온달이가
이내 숨을 고르고는 벽에 기대어 서요.
뛰어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얼굴이 새빨개진채로 낮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리는 온달이.
"....큰일날 뻔 했다."
하마터면 아줌마한테 입이라도 맞출 뻔 했잖아.
아직 진정이 되지 않은 심장 언저리에 손을 얹고는 심호흡을 하다가
이내 머릿속에 스친 생각에 왼쪽 가슴에 얹어져있던 손을 빠르게 떨어뜨려요.
"아니지.반은광 같았으면, 그런 기회가 오면 분명히 멈추지 않고 했을거야.
.........아!!나도 그냥 해버릴걸!!!!"
후회된다는 듯 손으로 뒤통수를 마구 흐뜨리더니,
이내 체념하곤 터덜터덜 집으로 향합니다.
★
다음날.
어제 하루 쉬었더니 몸이 가볍다. 영양실조라는 김온달의 말이 생각나
오늘은 밥을 챙겨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아직 알바비를 못 받아서 수중에 있는 돈을 아껴야 하기 때문에
그냥 문을 일찍 연 중국집에 들어가 짜장면을 한 그릇 먹고는 도넛츠가게로 향했다.
연락 없이 하루 빠진 게 미안해서, 들어가자마자 사과를 하려고 고개를 숙이는데
다영이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도은설!너 쓰러져서 병원갔었다며?"
"...?...어떻게 알았어?"
"방금 저번에 왔던 그 남자애 있잖아 열아홉살 짜리.
걔가 와서 말해주고 갔어."
....반은광...
점장님도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며 안쓰럽다는 듯 내 어깨를 토닥이셨고
연신 죄송하다는 내 말에도 괜찮다며 웃어주셨다.
"말을 하지 그랬어!밥정도는 내가 챙겨줄 수 있는데.
요즘 세상에 영양실조라니, 말이 돼? 특히 너같은 공주님이.
요즘은 많이 먹어서 병이 생기는 세상인데.
오늘부턴 알바 마치고 무조건 나랑 같이 밥먹어.
알바고 뭐고, 일단 밥 먹고 해결하자고."
"난 진짜 괜찮ㅇ.."
"아냐. 앞으로는 무조건 같이 먹어야 돼.
그래야 하는 이유도 생겼고."
그 말을 하면서 앞치마 주머니를 만지작 거리는 다영이의 행동이 무언가 미심쩍었지만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런 호의 받고싶은 생각 별로 없어. 솔직한 말로 부담돼."
"나한테 부담 가질 필요 없다니까 글쎄.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내 걱정 하지 말고 니 몸이나 잘 챙기세요."
씨익 웃고는 내 등을 두 번 두드리는 다영이.
....저렇게 완강하게 나오는데. 할 수 없지.
제20화. 서서히, 아주 조금씩
결국 점심을 본의아니게 얻어먹고, 간만에 배부름을 느끼며 편의점으로 향했다.
이젠 이 시곗바늘 돌 듯 일정한 일상도 적응이 되었다.
어김없이 편의점 카운터 위에 스포츠신문을 놔두고 가는 내 전타임 알바생에게
형식적인 짧은 인사와 함께 앞치마를 받아들었다.
카운터에 선 지 1시간 40여분 만에 당당하게 편의점에 들어선 김온달과 반은광.
변함없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티격대며 들어온다.
"우리집 와서 자라니까?!"
"천휘광 집이 나아."
"왜!!"
"김온달은 내 라이벌이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있어!!"
...내용인즉슨,
자기 집에 와서 자라는 김온달과
천휘광네 집에서 신세를 지겠다는 반은광.
어이가 없다는 듯 김온달이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고
반은광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한참 서로 신경전을 펼치다가, 이내 김온달이 포기했는지 날 향해 고개를 틀곤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줌마!우리 공연해!"
"공연?...언제?"
"크리스마스 이브날!이제 얼마 안남았어!오늘이 토요일..16일이니까...
8일 남았다 8일! 일주일하고 하루 후면 돼!"
씨익 웃으며 즐거운 듯 말하는 김온달.
반은광 역시 조금 설레이는 듯 살짝 웃으며 손으로 드럼치는 시늉을 한다.
"...그렇게 좋아?"
"응!당연하지!!
어쩌면 마지막 공연일지도 모르는데."
그러면서 또 침울해진다. 으아..갑작스런 분위기 전환, 감당이 안 돼.
뒤늦게 분위기를 수습해보려고, 억지로 말을 열었다.
"..왜 마지막 공연이야?"
"...졸업하면, 이젠 다시는 못하는 거잖아.
전부 자기 갈 길에 바쁘니까.
....어쨌든!!!!우리 마지막이 될 지 모르는 공연에,
아줌마가 꼭 와야해!!여기, 티켓!"
"....티켓도 있어?"
"당연하지!우린 비싼 밴드라구!"
장난스럽게 웃으며, 표 하나를 건넨다.
....'이브의 반란'이라..
"멋지지? 이브의 반란!
우리 밴드 말고도 이 근방에서 제일 유명한 밴드 두 군데 더 나와!"
"....근데, 오후 3시면 좀 힘들 것 같은데...."
"왜?"
반은광과 김온달이 동시에 물어온다.
대화엔 관심도 없는 듯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던 반은광이 갑자기 얼굴을 들이대니까
상당히 당황스럽다.
".....아르바이트도 있고.."
"아르바이트는 하루 쉬면 되잖아!"
"..안 될 것 같아. 안 그래도 나 어제 쉬는바람에 전타임 알바 하는 분이
내 시간까지 매꿨단 말이야. 어떻게 또 쉬어?"
".....그래도...아줌마가 꼭 와줬으면 좋겠어."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는 김온달 때문에,
어쩔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긴 했는데..
..에이.뭐 될대로 되겠지.
★
편의점에서 집으로 향하는 길.
날이 점점 추워지는 걸 보니 정말 이제 확실히 겨울에 접어들었다는 느낌이 든다.
올해 겨울은 그래도 좀 따뜻한 편이라던데..
역시 싸늘하게 식어있을 방바닥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이제 막 오르막길로 접어들었을 무렵,
집 앞에 누군가가 서있는 게 어렴풋히 보였다.
....두 명이고...남자로 추정되는걸로 봐선..
"..김온달...반은광?"
"어!아줌마!!"
날 발견하자마자 내리막을 통통 뛰어 내려오는 김온달.
김온달의 뒤에서 반은광이 뭐라고 막 소리를 지르는데, 알아들을수가 없다.
순식간에 내 앞에 도착한 김온달이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것보다, 뒤에서 지금 반은광이 너한테 뭐라고 그러는데?"
"아~내가 장본거 자기한테 다 떠맡기고 여기 내려와서 그래!
힘들지?난 콜라 사올게!먼저 올라가있어!"
"...잠깐만. 장이라고?"
"응!홈플러스!"
★
..
.....
세상에....
"....이..이게 다 뭐야..."
"영양실조라며."
"....그래도 이 많은걸..."
"됐어. 그냥 먹어."
콜라를 사오겠다며 나간 김온달 덕분에 집에 남은 건 나와 반은광 뿐.
홈플러스라는 얘기에 설마 설마 했지만...이렇게 많이...
그것도 육류 위주로....
"....그냥 먹어가 아니라, 보다시피 냉장고도 없는데 이걸 다 어떻게 해?"
"...냉장고가 있어야 하나?"
....모두들 알다시피 이 녀석은 기본상식이 조금 결핍한 녀석이다.
"당연하지. 이걸 다 한번에 먹을수도 없고, 그냥 놔두면 썩잖아."
"...그럼 냉장고도 가져올까?"
"뭐? 어디서?"
"천휘광집에서."
"됐어."
농담이었으면 한번 웃어줬겠지만 이 녀석은 진담인 듯 했으므로
나는 차마 웃지도 못하고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온갖 고기와 생선을 보며 한참 나름대로 고민을 하던 반은광은
곧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눈을 유난히 빛내며 말했다.
"그럼, 이거 천휘광집.....아니다, 천휘광은 자기가 꺼내먹으니까 안되고
김온달집 냉장고에 넣어놨다가 날마다 조금씩 가져오면 되겠네."
"....니넨 대체 돈이 어디서 나길래 이런걸 사와?"
그러자 녀석은 품에서 의기양양하게 신용카드 한장을 꺼낸다.
..예상은 했지만, 이 녀석도 부잣집 아드님이셨구만.
그래도 카드 값 전부 자기 아빠가 대야하는 걸텐데,
아빠는 싫어하면서 왜..
조금 찡그려진 내 얼굴을 본 반은광이 서둘러 말했다.
"아냐. 나. 그 사람 돈이라고 막 쓰는거아냐.
딱 정해진 만큼만 써. ....어차피 이건 내 생활비 수준이니까."
"..그렇게 무리해서 챙겨줄 필요 없는데.."
"무리 아니야."
"...."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거니까, 아줌만 부담갖지 마."
녀석의 단호한 말투에 조금 어색해진 내가 시선을 시린 방바닥에 닿아있는 손끝으로 옮겼고
반은광은 내 숙여진 뒤통수 위로 손을 뻗어 머리를 흐뜨리며 말했다.
"...아줌만 그냥, 건강하고 행복하기만 하면 돼."
"...."
"그나저나 좀 먹어라. 마른것봐. 어떻게 하면 영양실조까지 걸려?"
....
머리카락을 흐뜨리는 녀석의 손끝을 느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김온달은 절대 내게 이런 행동은 하지 않을 거란 거.
..뭐랄까.
...날 여자로 생각하는 쪽은....
....반은광에 더 가까운 것 같단 생각.
그래서 그런가.
느껴지는 녀석의 손끝이
묘하게 설레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