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대전송촌동주여사네집 원문보기 글쓴이: 땅오아부지
‘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입니다’ 기사에 언뜻 언급했는데 우리 할부지(고 김영욱, 사회운동가 )라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그분은 나와는 반대로 의지가 굳세고 머리가 비상한데다 무엇보다 철학이 있는 사람이었어. 정말 멋진 사람이었지. 나는 머리만 좋고 인격이 덜된 사람을 굉장히 싫어하는데 할부지는 다행히 양쪽을 다 갖춘 사람이었어.
그 사람의 삶을 보려면 장례식을 보라 그러잖아. 내가 가 본 숱한 장례식 중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재 때 외에 가장 많은 사람이 온 걸 본 것,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이 우는 걸 본 장례식이 우리 할부지 장례식이야.
난 정말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그렇게나 끊임없이 찾아와서, 또 그토록 서럽게 우는 걸 처음 봤어. 그때 우리 할부지가 꽤 괜찮은 삶을 사셨구나란 걸 느꼈지.
내가 그분의 머리나 정신 중에 어떤 한 부분이라도 제대로 물려받았다면 좋았을 텐데 참 아쉽다. 여튼 그분은 내게 있어 인자한 할부지인 동시에 좋은 선생님이었어. 박정희 정권의 핍박을 받기 전에는 대학에서 동양사를 강의하셨는데, 내, 이 멍청한 머리 중 터럭만큼이라도 올바른 역사의식이 있다면 모두 그분의 직간접적인 영향 때문일 꺼야.
아, 잡설이 길어졌네. 미안. 내가 할부지 이야기만 나오면 조금 감상적이 돼서. 하지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데 필요 없는 부분은 아니니 너무 화는 내지 말아주길.
2.
중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해. 당시에 ‘법은 무죄인가’라는 책을 읽고 소파에 앉아 쉬고 있는 할부지한테 쪼르르 달려갔어. 그리고 질문을 던졌다.
‘할부지, 법이 뭔데예(‘뭐예요’의 부산 사투리)?’
할부지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셨지.
‘권력자들의 통치수단이지’
난 신기하게도 그 순간을 정말로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어. 할부지의 묘한 미소와 거실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그리고 그 속의 작은 먼지까지.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내 머릿속에는 그 순간을 영하 100도로 얼린 것처럼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왜냐하면, 우리 할부지는 적어도 나에게는 항상 따뜻한 사람이었거든. 따스하고 인자한 이미지의 할부지가 그런 대답을 했다는 게 당신의 나에겐 큰 충격이어서 그렇게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거지. 난 그로부터 8년 후에 할부지를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되고 나서야 그 의미를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됐어.
3.
2010년 4월 20일, 오후 11시 05분. PD수첩 ‘검사와 스폰서’가 방영됐어. 할부지를 그렇게 괴롭혔던 ‘검사’. 내 주제에 그런 사람을 데리고 오지도 못하겠지만, 우리 아부지가 세상이 두 쪽 나도 단 한 직업만큼은 며느리 삼지 않겠다고 한 바로 그 ‘검사’. 뭐, 여러 가지 사연이 있지만 여튼 우리 집안이랑 검사는 좀 악연인가 봐. 열심히 일하시는 검사님들께는 좀 미안하네. 진짜.
게다가 하필이면 그 방송의 무대가 내 고향 부산이라니. 그리고 난 지금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이 글을 쓰고 있지. 잡으러 오면 5분 안에 꼼짝 마라야. 흐.
잡담을 좀 할게. 요즘은 내가 기분도 별로고 고민할 게 많아서 도저히 기사형식으로 글을 못써서(딴지에 형식이 어디 있겠냐만은) 이렇게 편하게 안 쓰면 글이 안 나오니까 중간 중간 잡담을 섞어도 조금 용서해줘.
사실 어제 오후쯤에 너부리 편집장님한테서 연락이 왔다. 여기에 대해서 돌고래 방식대로, 그러니까 ‘대통령과의 대화 관전기’ 때처럼 장면마다 포인트를 짚어가며 글을 썼으면 좋겠다고. 오늘 딴 곳에서 미팅을 마치고 지금 새벽이 돼서야 이 기사를 쓰기 시작하는데 솔직히 퀄리티에는 그렇게 자신이 없어.
내가 요즘 컨디션이 너무 안 좋은 데다 지금 너무 피곤하거든. 우스운 변명이긴 하지만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편집장님한테 너무 미안해서. 지금 내가 쓰기로 했던 기사를 너무 많이 안 쓰고 미루고 있거든. 어떤 건 정리만 해서 올리기만 해도 되는데 벌써 시기가 지난 거고.
아, 자신이 없으니 쓸데없는 변명만 많아진다. 요즘은 뭘 해도 자신이 없어. 건방지기 짝이 없는 나에게 이럴 때가 찾아오다니. 여튼 재미는 없겠지만, 본질을 쉽게 설명하는 딴지 정신만은 잊지 않도록 글을 써 볼게. 변명이 길어서 미안.
자, 진짜 시작하자.
4.
오늘 기사의 요점은 딱 하나야. ‘떡검은 어떻게 떡검이 되었는가.’ 현상만 보지 말고 본질을 한번 짚어 들어가서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보자 이거지. 이건 노무현의 사법개혁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문제기 때문에 꼭 한번 짚고 넘어가야 돼.
PD수첩의 결정적 장면 중의 하나는 바로 위 장면이야. 바로 글자 바꾸기. 여기서부터 뒤로 거슬러 올라가면 법조계의 모든 악행과 슬픔, 비리를 찾을 수 있지.
사람들이 검사들 보고 니네가 뭐 박봉이냐고 비아냥거리는 데 사실 검사들 박봉 맞아. 하는 일의 강도나 업무량에 비하면 더욱 그렇고 일반 공무원에 비해 그렇게 월급이 높은 것도 아냐. 초임이 본봉 기준으로 180에 실수령은 200이 조금 넘는 정도니까. 물론 연차가 올라가면 본봉이 올라가긴 하지만 결코 메이저 언론사나 대기업들에 비할 바는 못되지.
그런데 이상하지? 가끔씩 청문회 보면 그런 사람들이 강남의 몇십억짜리 아파트에 살고 고급 차를 몰고 다니잖아. 검사 월급 가지고는 절대 그렇게 못살거든. 그런데 어떤 검사들은 그렇게 산단 말이지. 직감적으로 뇌물을 받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그토록 받을 수 있냐, 왜 그렇게 찔러 주느냐는 모르는 경우가 많아. 그것도 핵심은 저 글자 바꾸기야.
5.
이걸 알려면 ‘기소독점권’과 ‘조서재판’을 이해할 필요가 있어. 자 차근차근 가보자. 한 번씩 뉴스 같은 거나 신문에 보면 ‘기소독점권’이란 말 자주 듣지? 이게 문제라는 말도 많이 듣고. ‘기소독점권’이 뭐냐면 쉽게 말해서 형사소송법에서 대한민국에선 검사만이 ‘씨바, 저거 범죄다. 족치자’라는 게 가능하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저게 범죄인지 아닌지 재판을 청구할 수 있는 건 적어도 대한민국에선 대통령 할애비도 안 되고 총수형도 안 되고 이순신 장군이 살아 돌아와도 안 되고 오.직. 검사만이 가능하다 이거지. 그야말로 엄청난 권력이지. 범죄인지 아닌지 판단해서 재판장 앞에 우리를 데려갈 수 있는 대한민국 유일의 직업이니까.
[무서우려면 이렇게 무섭던가…] |
그래서 검찰의 기소독점권 같은 무지막지한 권력을 해체하자고 무슨 사건만 터지면 여론이 들끓는 거고. 검사가 나쁜 짓 해도 지들이 기소하고 지들이 수사감독을 하는데 그게 제대로 되겠냐 이거지.
기소권과 수사권을 검사가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건 엄청난 권력이야. 문명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의 나라에선 한국뿐일 걸. 응? 수사는 경찰이 하는데 무슨 소리냐고? 수사를 하긴 하는데 그게 다 검사가 지휘하는 거지.
그러니까 경찰은 검사가 수사를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못하는 거야. 이거 분명히 나쁜 놈 맞는데, 잡아 족쳐야 되는데… 라고 경찰이 생각해 봤자 검사가 끝내라면 끝내야 하는 거지. 엄청난 권력이지?
[군대로 따지면 거의 이 정도…] |
이게 일제잔재가 없어지지 않았던 5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죽 이어 온 거지. 원칙상으로 권력을 분리해서 검찰은 기소권, 경찰은 수사권 이렇게 가는 게 맞아. 그런데 당시에는 경찰들이 무식해서 자칫하면 이 무식한 애들이 아무나 막 잡아 족친다는 입법자들의 주장 하에 아직은 시기상조다 그렇게 배포가 맞은 거지. 그래서 똑똑하다고 생각되는 검사들에게 권력을 몰아 준거고.
뭐, 결과는 이승만 정권을 보면 알 수 있지. 여튼 당시의 주장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볼 수 없어. 법을 잘 모르는 경찰들이 무턱대고 아무나 조지다간 큰일 나니까. 그런데 이제는 경찰이 그렇게 못 배우지 않았다 이거야. 오히려 간부들은 엘리트 집단이지. 법에도 해박하고. 오히려 지금은 아무리 하위직이라도 웬만큼 법을 몰라서는 경찰이 될 수 없잖아.
당연히 권력은 모이면 모일수록 많은 문제가 발생되기에 이제는 이런 권력을 나눌 때가 됐는데, 한번 잡은 권력을 그렇게 쉽게 내 놓으려고 하겠어? 권력이 집중되니 당연히 뇌물을 바쳐야 될 곳도 집중될 수밖에.
그러니 검사만 평소에 잘 구슬려 놓으면 죄도 죄가 아닌 게 되지. 왜? 재판장이 판단하기 전에 검사가 데려가지도 않을 거니까.
6.
자, 그런데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야. 여기서 글자 바꾸기 신공의 엄청난 화력이 드러나지. 다시 한번 기억해 보자. 홍 사장이 말했지. 공소장 바꾸는 거 쉽지 않다고.
[공소장 바꾸는 건 이렇게 쉬운 게 아니야.] |
공소장이란 건 검사가 공소를 제기하고자 할 때 작성하는 문서야. 그러니까 ‘요놈 요고 이런 죄 지었으니까 재판장님이 이거 보고 판단 좀 해주셈’ 하는 거지.
아까 말했지. 우리나라에서 기소(기소는 사실 구 형사소송법에서 사용되는 말인데 현재는 다 ‘공소의 제기’라는 말로 통일됐어. 근데 실무상에서는 관용어로 이렇게 씀!)할 수 있는 거 누구뿐이라고? 그래, 검사뿐이지.
그럼 공소장을 적을 수 있는 것도 당근 검사뿐이지. 따라서 공소장 안의 글자를 바꿀 수 있는 것도…? 그래, 검사뿐이야.
홍 사장식으로 쉽게 말해 볼게. 게수다(편집자 주 - 딴지 필명)랑 아홉친구(편집자 주 - 딴지 필명)가 싸웠어. 게수다는 나발을 불던 맥주병으로 아홉친구를 깠다.(아홉친구형 미안) 이러면 이건 분명 흉기로 사람을 폭행한 거거든. 형법상 흉기는 제조 목적을 불문하고 그 물건의 객관적 성질 및 사용방법에 따라서 사람의 생명, 신체에 해를 줄 수 있는 물건이므로 이걸로 사람을 때렸으니 특수폭행죄 성립!
자, 그런데 너부리(편집자 주 - 딴지 필명)가 검사야. 너부리는 자기 책 프로필에 적어놨듯 공부를 계속 했더라면 룸살롱 접대, 뇌물 수수를 밥 먹듯이 했을 사람이지. (너부리형 미안)그런데 게수다는 홍 사장처럼 평소에 너부리랑 안면이 있는데다 결정적으로 돈이 무지 많어. 이때 두 손가락을 슬며시 올리는 거지.
‘한 글자당 1천씩. 두 글자만 바꿔줘. 특수폭행에서 일반폭행으로 |
뭐 사건의 성질마다 액수를 다르게 부르겠지만,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몇억을 불러서라도 글씨를 바꾸려 하겠지. 일반폭행의 경우는 3년 이하의 징역, 특수폭행은 7년 6개월 이하의 징역이니까 글자 하나로 사람이 감방에서 섞는 년 수가 팍팍 차이가 나니까. 돈만 주면 7년 살걸 3년 산다는데 안 그러겠어?
이게 우리나라의 일부 검사들이 그 박봉으로도 강남의 고급 아파트를 사고 고급 차를 살 수 있었던 제1 원인이지. 뭐 물론 일부이긴 하겠지만 (난 그렇게 믿어)그렇게 죽어라 공부해서 글자 바꾸기 놀이나 하고 있으니 한심하다 그지? 뭐 노동대비 수익 비율이 대한민국 최고의 작업이기도 한 동시에 말이야.
7.
자, 그럼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러니까 왜 서민이 억울해지는지 짤막하게 그 과정만 짚고 넘어가자. 일단 아래 글을 봐봐.
‘당시만 해도 판사들은 거의 매일 변호사들에게 밥이나 술을 얻어먹고 다녔다. 나도 거기에 휩쓸려 다니느라 공부도 제대로 안 한 것 같다.
선배 판사들 중에는 변호사 한두 사람을 가리켜 왕소금이네 짠돌이네 하면서 욕을 하곤 했다. 술을 잘 안 산다는 것이다. 나도 덩달아 그들을 밉게 생각했다. 그 짠돌이 변호사들을 물 먹일 방법은 없을까 하는 나쁜 심보를 가지기도 했었다.’
이거 누가 썼게. 노짱이 썼어. 그것도 자기 책에다가. 이런 거 보면 이 사람 참 바보 맞는 거 같애. 자기가 알아서 만날 나쁜 점 말하고 굳이 고백하지 않아도 될 걸 반성해서 적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고. 참나, 정치인이 뭐 이러냐.
여튼 봐봐. 조금 이상하지? 노짱은 판사였는데 왜 변호사한테 밥과 술을 얻어먹는 거지? 저 글을 보면 이게 어쩌다가 있는 일이 아니라 마치 변호사들이 꼭 해야 하는 일처럼 적어 놨잖아.
자 짚어보자. 저 앞의 예에서 아홉친구를 깐 게수다는 평소 검사인 너부리와 안면이 있기에 뇌물을 주고 공소장의 글자를 바꿔서 죄를 덜었어. 그런데 이런 일은 아주 특이한 경우고 보통 서민이라면 주위에 검사는커녕 법조계 관련 직원과도 친분이 있을까 말까야. 그렇게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법조계이기 때문에 브로커들이 엄청난 돈벌이를 할 수 있는 거고.
자, 그럼 일반인들이 재판을 받을 때 처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겠어? 바로 변호사지. 변호사가 자신에게 불리한 재판에서 이기려면? 검사와 판사에게 아주 많은 떡을 사줘야겠지.
[검사님, 3.68톤짜리 떡 배달왔어요!] |
검사에게는 공소장의 ‘글자’를 최대한 유리하게 바꾸게, 판사에게는 최대한 낮은 형을 때려줄 수 있도록 말이야. 그럼 결국 그 돈의 부담은?
바로 억울한 서민에게 가는 거지. 우리나라 재판은 알다시피 제대로 진행하려면 최.소. 수백이 깨져. 이런 현실을 보면 지강헌이 외친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쳤던 시절에서 그렇게 크게 나아지지 못한 거지.
어디까지나 노짱이 판사를 하던 시절의 폐해를 풀어쓴 거지, 딱히 지금 그렇다 라고 말하진 않았으니까 검사형아들 나 기소하지 말고. 설마 지금도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 4월 20일 방송 나가고 3일 지났으니까 뭐 ‘지금’은 안 일어나겠지.
8.
자, 그럼 여기서 또 이상한 점. 분명 판사, 검사, 변호사 모두 청운의 꿈을 품고 정의를 위해 일하려고 열심히 공부했을 텐데 왜 이렇게 서로 봐주고 뇌물을 먹는 일이 탄생할까?
이걸 이해하려면 노무현의 사법개혁을 이해해야 돼. 이야기가 길어지는데 자세한 건 금년 안에 출간될 느티나무아래 출판사의 ‘내가 사랑한 노무현, 내가 희망한 진보’라는 책을 참고하길…. 여기 사법파트를 내가 썼… 쿨럭 쿨럭. 편집장님 은근슬쩍 책 광고해서 죄송하다는… 쿨럭 쿨럭. 내가 나중에 삼겹살 산다는…쿨럭쿨럭.
자, 다시 돌아와서. 펜더형은 국방 이야기를 풀어쓰면서 노무현이 주머니칼을 준비했다고 했잖아. 사법에서 노무현은 이도류를 선보였어. 양손에 칼을 든거지. 아쉽게도 한칼은 상대에게 먹혔는데 한칼은 자기에게 돌아왔어.
몇몇 법학교수나 전문가들은 노무현의 사법개혁을 반쪽 개혁이네 실패한 개혁이네 라고 하는데 글쎄. 적어도 사법개혁에서만큼은 노무현을 그렇게 쉽게 폄하해선 안 되는 거 아닐까? 사법에 그토록 목숨 건 대통령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까. 김영삼도 김대중도 못한 걸 그는 해냈으니까.
이건 내가 오버해서 노무현을 치켜세우는 게 아니라 사실 이견이 없는 거야. 법에 대해서 좀 안다 싶은 친구들, 또는 법에 관한 수업을 듣고 있다면 교수님께 물어 봐봐. 지금까지 대통령 중에 사법개혁에 가장 큰 성과를 올린 대통령이 누구냐고. 아무리 노무현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이견이 없어. 진실이니까.
국가권력을 보면 실제로는 삼권분립이 제대로 이루어져서 서로가 서로를 견제해야 옳지만 다들 알다시피 서로가 서로를 봐주고 조금 꼭지가 돌았을 때 한 번씩 슬쩍 담궜다가(?) 다시 뒤에서 술 한잔하는 게 이쪽 이치지. 판사, 검사, 변호사도 크게 다르지 않아.
이걸 깨려고 준비한 게 노무현 사법개혁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로스쿨이야. 평소 법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은 몇몇 신문들만 보고 이제 노무현이 부자들만 권력을 잡게 하는구나, 돈 있는 녀석들만 출세하게 하는구나 하고 욕을 했지만……. 글쎄.
로스쿨은 김영삼, 김대중 정부 때도 끊임없이 시도하려 했다가 법조계의 반발로 실패한 정책이야. 왜? 다 잘라내고 아주 간단히 말해볼게. 공급이 적고 수요가 많으면 물건값이 올라가잖아. 그런데 공급이 많아지면 물건값이 내려가. 로스쿨로 법조계에 유입되는 인구가 많아지면 법조인들이 지금까지 번만큼 못 벌겠지.
그러면? 지금보다 배는 열심히 뛰어야 할 거야. 이전처럼 가만히 있다고 해서 사건이 척척 들어오는 게 아니니까. 잘하는 애들한테 몰리니까 말이지. 게다가 당연히 법 서비스를 이용하는 서민으로선 좀 더 좋은 서비스를 받게 되겠지. 독점되었던 시장이 풀리는 거니까.
이것저것 생각 안 하고 정말 단순하게 딱 쳤을 때 이렇게 돼. 뭐 설명하자면 많어. 대한민국에서 제일 똑똑하다는 애들을 모아 놓고 그중에 10%만 빼고 모조리 폐인으로 만들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인력 낭비를 해결할 수 있다든지….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로스쿨이 바로 한통속 꿍꿍이 주의를 깨버릴 수 있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거지.
자, 아까 말했듯이 삼권분립은 원래 자기들끼리 견제하라고 그렇게 떨어 뜨려 논건데 실제론 한통속이지? 서로 이득 앞에는 손을 잡잖아. 마찬가지로 판사, 검사, 변호사의 관계도 비슷해.
사법고시를 보면 특정대학들의 합격률이 월등히 높아. 얘들이 다시 사법연수원에서 2년을 한솥밥 먹으면서 공부한다고 쳐. 판사, 변호사, 검사로 갈라진다고 해도 서로가 서로에게 냉혹하게 굴 수 있을까?
[이분 빼고…] |
솔직히 나라도 매일 2년 동안 얼굴 맞대고 공부했다가 재판장에서 만나면 마음이 조금 기울 것 같애. 아무리 냉정하게 마음을 먹어도 인지상정이라고. 물론 나같이 어설픈 놈도 있겠지만 냉철하게 법을 처리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믿어.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같은 대학에 사법연수원 2년, 게다가 한 직장 동료 또는 선후배로 얽히고설키면… 정말 한 다리 건너면 다 한 식구야. 그들도 인간인데 수많은 유혹과 인간관계에 항상 냉철할 수 있을까? 난 100% 그렇지는 않다고 봐.
로스쿨은 이걸 깰 수 있는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거지. 그리고 우리나라에 가뭄에 콩 나듯 나는 법 전문가를 탄생시킬 수 있는 거고. 물론 로스쿨이란 시스템이 만능은 아냐. 정말, 정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문제가 있고 아직 고쳐야 할 점이 너무너무 많은 제도야.
하지만, 그 모든 단점을 놔두고라도 김영삼 때부터 꾸준히 이 제도를 도입하려 했던 이유는? 그리고 별로 인기에 도움이 되지도 않을 것 같은 로스쿨을 노무현이 만신창이가 돼가면서 결국 통과시킨 이유는?
이 제도가 단 한걸음이나마 대한민국을 좀 더 제대로 된 민주주의로 다가가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지. 사법부가 진짜 민주주의에 다가간 딱 그 보폭만큼, 우리가 진짜 민주주의를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도 딱 그만큼 늘어나.
9.
자, 앞에서 넘어갔던 조서재판에 대해서 짚어 볼까? 5번에서 말했지. 글자 바꾸기 신공을 이해하려면 ‘기소독점권’과 ‘조서재판’을 이해해야 한다고.
노무현이 이끈 사법개혁의 양대 산맥은 로스쿨과 공판중심주의야. 로스쿨은 앞에서 말했지? 그럼 두 번째, 이 공판중심주의가 뭐냐. 공판중심주의는 조서재판과 반대되는 말이야. 쉽게 말해서 모든 증거자료를 재판에 집중시키는 거지. 법관이 증거를 조사한 결과로 얻은 자료를 기초로 판단해서 품게 되는 확신, 그 확신으로만 하는 재판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거야.
되게 당연한 말이지? 더 쉽게 말하면 우리가 영화를 봤을 때 자주 나오는 장면 있잖아. 왜, 재판장에서 검사랑 변호사가 막 다투고, 결정적인 증거 제출하고, 날카로운 논리와 이성이 흘러 넘치는 그 모습, 바로 그 모습이 공판중심주의로 하는 재판인 거야.
그런데 노무현 정부 이후에도 이게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지만(대표적인 예로 노무현 자신이 그렇게 떠났으니 공정한 공판중심주의가 실현이 안 된 증거지.)그나마 조금 나아졌어.
실제 재판장 가보면 영화 같을 줄 알지만 천만에. 재판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재판을 보면 심한 경우, 그냥 조서 좀 읽고 몇 마디 하고 땅땅땅 치고 끝. 되게 황당해하지. 이게 조서재판이야. 조서를 위주로 하는 재판.
조서재판의 원류는 일제강점기에서 찾아볼 수 있어. 조선말을 잘 모르던 일본 애들이 조선인들이 변론하고 싸워봤자 그걸 알아먹을 턱이 없지. 안다고 해도 그런 말들을 다 듣고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그래서 그냥 문서만 달랑 보고 재판을 하는 거야. 검사가 ‘이놈 이렇습니다. 요렇게 지가 잘못했다고 불었습니다. 족쳐야 합니다’ 하면 그걸로 땅땅땅이지. 왜냐하면, 그 조서가 실제 효력을 발휘하니까.
일제강점기의 악습이 왜 지금까지 이어지냐고? 허, 몰라서 물어. 이승만이 친일파 애들을 안 날렸잖아. 법조계도 똑같애. 그 밑에 있는 애들 고스란히 올려서 썼으니까. 자기들 기득권 지키려고 최대한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머리를 굴렸지. 그러니 일본애들이 한 거, 고대로 따라 해서 힘을 가진 쪽이 유리한 시스템을 바꾸지 않은 거고.
(그나마 초대 대법원장인 김병로 같은 훌륭한 분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까지는 버틸 수 있었지. 이분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자. 정말 멋진 분이셔.)
자, 다시 재판장으로 돌아오자. 변호사는 선처를 바랍니다 외에 별 할 말이 없어지니까 진.짜.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거지. 앞서 말했듯 의뢰인에게 받은 돈으로 검사와 판사에게 돈을 찔러 주는 것 말고는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거야. 왜냐하면, 이미 죄는 검사의 공소장에 다 적혀 있고 그건 그대로 효력을 발휘하니까. 그래서 재판이 재미없어지는 거고.
우리 아부지, 할부지 세대 보면 고문하는 애들이 지장 찍으라 그러고 억지로 죄를 불어라 그러면서 때리고 그랬잖아. 그게 다 이런 조서재판의 폐해야. 원래는 고문해서 받은 그런 증거들은 채택이 안 되는 게 당연하지만…. 뭐 현실과 이상이 같나. 여튼 그런 식으로 온갖 모욕을 당하고 검사 쪽에서 원하는 말만 받아내면 그건 그대로 효력이 생기는 거지. 재판까지 가는 거고.
실제로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새파란 검사들이 아버지뻘 되는 사람들한테 반말 찍찍 날리면서 전화부로 머리를 툭툭 건드리는 모욕을 준다고 생각해봐. 물론 그런 일은 절대 없겠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을 해보자 이거지. 그 모욕감에 자존심이 센 사람들은 자살을 하거나 그냥 웬만한 건 대충 인정하고 빨리 그곳을 탈출하고 싶지 않을까.
그런 걸 뒤집으려고 한 게 바로 노무현의 공판중심주의야. 최대한 인간답게, 문서 안의 활자가 아닌 진짜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재판을 해보자, 최대한 억울한 사람이 없게 만들어 보자고 한 거지.
공판중심주의에는 진보 보수에 거의 이견이 없어. 정말 실현되어야 하는 거니까. 다만, 공정하게 모든 증거를 제대로 훑어 봐야 하고 모든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업무량이 엄청나게 늘어나지. 이런 점에서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한다는 법조인들도 일부 있고.
하지만, 열명의 범죄자를 놓쳐도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을 막아야 하는 게 법이기 때문에 공판중심주의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거지. 대표적으로 공판중심주의가 꼭 이루어져야만 하는 이유는 최근의 한 사건만 봐도 알아.
바로 한명숙 전 총리의 재판. 이 재판은 엄정하게 공판중심주의가 이루어졌다고 평가됐지. 한마디로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졌다는 뜻이야. 옛날처럼 검사 공소장만 보고 재판장이 땅땅땅을 때려버리는 시대에 가까웠다면 지금쯤 한 전 총리는 형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러지 않도록, 공정한 재판의 씨앗을 뿌린 게 바로 그가 모신 대통령이야. 그런 점에서 보면 한명숙 전 총리는 다른 사람에 비해 참 여러모로 고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하는 바가 클듯해. 가족 외에는 누구보다 깊이 그를 이해하는 한 사람이 바로 그녀일지도 모르지.
아! 아무리 시스템이 바껴도 그걸 실천하는 사람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시스템은 금방 누더기가 된다는 사실. 우리 지금 너무나 잘 알고 있지? 그렇기에 제.대.로.된.사.람.인 김형두 부장판사님도 꼭 기억해 두자. 철저한 공판중심주의자로 (45ㆍ연수원 19기)한명숙 전 총리에게 용.기.있.게. 무죄를 선고한 사람이니까.
10.
이 정도면 법에 무관심했던 사람이라도 검사가 어떻게 떡검이 됐는지, 우리나라 법조계가 왜 이렇게 엉망인지, 그리고 노무현이 왜 그토록 사법개혁에 목을 맸는지 얼추 감이 잡힐 꺼야.
국방과 마찬가지로 법 또한 일반 국민들이 자주 접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닥치기 전에는 뭐가 어떻고 또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몰라. 살면서 법원 들락거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그렇기에 일반 국민들에겐 노무현이 목숨을 걸고 하는 검찰과의 싸움이 관심을 끌긴 했지만 그렇게 장기적인 인기도나 지지율로 연결되지 못한 거지. 왜냐? 당장 피부에 와 닿는 게 아니거든.
정말 중요한 건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건데……. 이 점이 참 아쉬워. 대한민국에 꼭 필요한 변화를 위해, 어쩌면 조선일보 때보다 더 무서운 상대와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한 용기 있는 사람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언젠가 정당한 평가를 내려줄 날이 올 거라고 믿어.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혹시나 법원에 갈 일이 생기면 노무현이 마련해 놓은 이 반석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느낄 수 있을 거야.
참고로 난 사법개혁에 한해서 만큼은 노무현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어. 정말 대통령 개인에게는 아무 득도 없는 싸움이었는데 굳이 피를 흘린 거거든. 공판중심주의, 로스쿨, 국민참여재판. 여기서 어떤 권력욕이나 개인의 욕심을 읽을 수 있어? 자기 대에서 온전한 평가를 받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 거야. 그러니까 멋진 사람인 거지.
난 그래서 이 사람 참 좋더라. 오늘은 여기까지.
첫댓글 존경하는 김춘기지기님의
게시물 고맙습니다.
이 세월에
진정한.
포청천이 있으면 하는
마음.
가득 드는 것을
감추지 못 하겠습니다.
김진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