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06
2월19일[연중 제7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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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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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XptgGjAv0hw (추성훈 바오로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8697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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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는 큰 사랑!>
우리 삶의 지침이자 길잡이이신 예수님께서는 요구도 참 많으십니다. 때로 ‘바보가 되라는 건가? 이거 너무하신 것 아냐?’ 하는 의구심마저 품게 합니다.
우리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만족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의 생활 준거는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그저 법대로입니다. 특히 동태복수법이 강조됩니다. 누군가가 내게 잘못해서 내게 피해를 끼쳤다면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고 꼭 그 만큼을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혈육들, 가족, 친척, 친구들, 다시 말해서 이웃들은 당연히 사랑을 실천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원수들, 이방인들, 큰 피해와 상처를 준 사람들, 우호적이지 않은 다른 민족들은 늘 경계의 대상입니다. 그들은 사랑의 실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 안 그래도 노는 물이 다른 종족, 더럽혀진 사람들로 여겼는데, 그들이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자 제자들도 즉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스승님 저들을 그냥 둬서 되겠습니까?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버릴까요?
제자들은 아직도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전통적인 가르침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사랑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구약시대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가족이나 동족들에게는 뜨거운 사랑을 베풀지만 나를 냉대하고 피가 다른 이민족들은 사람 취급도 안했습니다. 그저 그들은 물리치고 이겨내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도래로 인해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래 인간이 지니고 있었던 사랑의 개념을 더 크게 확장시킵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웃들에게만 한정시켰던 사랑의 실천을 나와 무관한 사람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넘어 나를 박해하고 나를 위협하는 원수들에게까지 확장시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오 복음 5장 44절)
내 사랑이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생각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사랑이 보다 큰 사랑, 보다 이타적인 사랑, 보다 신적인 사랑으로 넓혀나갈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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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OY9xxtGLe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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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용서하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런 말을 들으면 원수가 있는 사람들은 “당신도 똑같이 당해보면 그런 말은 할 수 없을 거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으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려면 하느님과 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기 일가족을 살해한 유영철을 용서한 고정원 씨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또 개신교에서는 대표적인 사례가 손양원 목사입니다. 손양원 목사는 자기 두 아들을 총살한 안재선의 사면을 위해 애썼고 그가 사면되자 그를 양아들로 삼아 같이 살면서 신학교에 보냈습니다.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원수와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는 마음은 어땠을까요? 이러한 용서와 사랑이 어떻게 하면 가능했을까요? 그분이 두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밤새 울며 기도한 다음 나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안재선은 죽으면 지옥 갈 텐데,
저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
결국 ‘믿음’입니다. 우선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나에게 저지른 일이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수준이 높아져야 합니다. 아기가 누군가에게 자기 장난감을 빼앗기면 그 누군가를 원수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도 자기 장난감을 빼앗아 간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건 우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이렇듯 성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장은 이전의 자기 죽음을 의미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을 가지고 자기를 쫓아오는 길거리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알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죽었소!”
그렇습니다. 용서하려면 이전의 나는 죽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아기 때 빼앗긴 장난감이 나에게 더는 의미가 없는 이유는 그것이 의미 있었던 이전의 자신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로마 6,4) 우리는 세례 때 이미 이전의 자신은 죽어서 묻혔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내 안에서 사실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용서하려면 자기 정체성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 12,19)
복수하는 심판관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라는 것도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전의 내가 죽었다는 믿음은 용서는 할 수 있지만, 사랑까지는 할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로마 12,20)라고 말합니다.
손양원 목사가 자기 아들들을 죽인 원수와 함께 식사했고 그것은 마치 자갈을 먹는 맛이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인간이라는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인간으로 받은 상처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미 쓸모 없어진 인간의 육체에 상처를 낸 인간들을 용서하실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부모가 자녀를 바라보듯 하느님으로서 인간을 바라보기에 불쌍히 여기시고 원수까지도 사랑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창조자이고 창조자는 부서진 물건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이 되었다는 믿음이 아니면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영화 ‘공공의 적’에서 보험금을 노리고 자신을 찌른 아들의 부러진 손톱을 어머니가 죽어가면서도 삼킨 장면이 나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다른 게 아닙니다. 어머니니까. 우리가 하느님이라 믿지 않으면 원수까지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그 사람을 낳은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믿음만이 상처를 잊게 하고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하고 심지어 그런 사람을 사랑하게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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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넷플렉스에서 ‘몸짱 100’이라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몸매와 건강을 자랑하는 100명을 초대해서 게임을 하는 프로입니다. 체조선수, 권투선수, 레슬링선수, 특수부대 군인, 보디빌더, 치어리더, 소방관, 야구선수와 같이 각 분야에서 최고의 몸과 건강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초대되었습니다. 처음 시작한 게임은 ‘매달리기’였습니다. 강한 사람들끼리 모여서인지 다들 매달리기에 자신 있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강한 사람들 사이에도 더 강한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가장 강한 사람은 20분가량 매달려 있었습니다. 저는 1분을 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희 때는 대학시험의 한 과목으로 ‘체력장’이 있었습니다. 턱거리, 윗몸일으키기, 오래달리기와 같은 종목이 있었습니다. 저도 열심히 연습했던 기억이 납니다. 배당 점수가 20점이었기 때문입니다. 몸짱은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크게 아프지 않고 맡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적당한 운동과 규칙적인 식사 그리고 긍정적인 생각이 건강한 몸을 위해서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눈이 먼 사람은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는 자리에서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아픈 사람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물 위를 걸으셨고,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짱’은 아니셨던 것 같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3번이나 넘어지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다른 2명은 아직 살아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미 숨을 거두셨습니다. 성인과 성녀들 중에도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아픈 몸까지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봉헌하였습니다. 평생 수녀원 밖으로 나간 적이 없지만 선교사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오상의 비오 성인은 예수님의 다섯 상처를 지니고 살았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여러분도 거룩해 져야 한다.”입니다. “하느님께서 완벽하시니 여러분도 완벽해져야 한다.”입니다. 거룩함과 완벽함의 기준은 ‘몸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몸짱은 아니셨고, 성인과 성녀들도 몸짱으로 성인이 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룩함과 완벽함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은 4가지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고 기꺼이 도와주는 측은지심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는 수오지심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공로를 앞세우기보다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양지심의 마음입니다. 옳고 그름을 식별하는 시비지심의 마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완벽함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원하는 것을 채울 수 있는 권력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을 구할 수 있는 재물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존경하는 명예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얻기 위해서 지금도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저는 박노해 시인의 “이스탄불의 어린 사제”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어린이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룩한 마음, 완벽한 마음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은 슬픔 속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을 보았습니다.
“폭설이 쏟아져 내리는 이스탄불 밤거리에서/ 커다란 구두 통을 멘 아이를 만났다./ 야곱은 집도 나라도 말글도 빼앗긴 채/ 하카리에서 강제 이주당한 쿠르드 소년이었다./ 오늘은 눈 때문에 일도 공치고 밥도 굶었다며/ 진눈깨비 쏟아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작은 어깨를 으쓱한다./ 나는 선 채로 젖은 구두를 닦은 뒤/ 뭐가 젤 먹고 싶냐고 물었다./ 야곱은 전구 알같이 커진 눈으로/ 한참을 쳐다보더니 빅맥, 빅맥이요!/ 눈부신 맥도날드 유리창을 가리킨다./ 학교도 못 가고 날마다 이 거리를 헤매면서/ 유리창 밖에서 얼마나 빅맥이 먹고 싶었을까!/ 나는 처음으로 맥도날드 자동문 안으로 들어섰다./ 야곱은 커다란 햄버거를 굶주린 사자새끼처럼/ 덥석 물어 삼키다 말고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담배를 물었다./ 세 입쯤 먹었을까/ 야곱은 남은 햄버거를 슬쩍 감추더니/ 다 먹었다며 그만 나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창 밖에는 흰 눈을 머리에 쓴/ 대여섯 살 소녀와 아이들이 유리에 바짝 붙어/ 뚫어져라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야곱은 앞으로 만날 때마다/ 아홉 번 공짜로 구두를 닦아주겠다며/ 까만 새끼손가락을 걸며 환하게 웃더니/ 아이들을 데리고 길 건너 골목길로 뛰어 들어갔다./ 아, 나는 그만 보고 말았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몰래 남긴 햄버거를/ 손으로 떼어 어린 동생들에게/ 한입 한입 넣어주는 야곱의 모습을/ 이스탄불의 풍요와 여행자들의 낭만이 흐르는/ 눈 내리는 까페 거리의 어둑한 뒷골목에서/ 나라 뺏긴 쿠르드의 눈물과 가난과 의지와 희망을 영성체처럼/ 한입 한입 떼어 지성스레 넣어주는/ 쿠르드의 어린 사제 야곱의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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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도 모든 율법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드높은 정의 즉 사랑의 법으로 모이고 있다. 즉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의 모범을 따라 편협한 마음이나 감정에 사로잡힘이 없이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생활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이 가장 확실히 드러나는 신약성경의 핵심 부분을 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은총으로 받아들일 때만이 우리가 실현할 수 있는 어려운 복음이기도 하다. 이 계명은 끊임없는 기도와 함께 그 가르침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레위기에서는 “나, 주 너의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2절) 라는 권고의 말씀이 이웃사랑에 앞서 강조하고 있다. 이 말씀은 성성에 있어서 비교의 기준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성성이라는 것은 끝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성성은 인간을 내면으로부터 변화시켜 나가고자 하는 내적인 윤리적 요소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말씀에서 이 이웃은 신앙의 혹은 종족의 의미이기는 하지만 앞으로 그리스도께서 무한히 확대하실(마태 22,37-40 참조) 최고 영성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성성의 모델이시며 사랑의 모델이시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모두 사랑하시고 또 용서해주시는 분이시니, 그 자녀들 역시 서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복음: 마태 5,38-48: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38-42절)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입은 손해나 상해에 대한 보상은 실제로 해를 입은 정도를 넘어서지 않아야 한다는 동태복수법(탈출 21,24-25; 레위 24,17-20; 신명 19,21 참조)을 폐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비폭력적인 법을 끌어들이신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39절) 하신다. 폭력을 제압하는 것은 폭력을 행사하는 자에게 그가 요구하는 것 이상을 양보하는 것이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39-40절) 이 말은 너무 지나친 말이 아닐까?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자기 목숨을 다해서라도 기꺼이 들어주려는 사랑을 의미한다. 거기서는 폭력의 의미가 상실된다. 즉 사랑으로 정의의 차원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모두 더욱더 사랑한다면 인간적인 정의의 법정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43-48절) 여기서 원수라는 개념은 우리와 친밀한 관계가 아닌 사람들로부터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 또한 신앙상의 이유로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44절)이다. 신앙인들은 그들에 대해 자비와 이해심을 가져야 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미워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해친다.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4-45절)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랑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제시하신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45절) 아버지께서는 모든 이를 똑같이 사랑하신다. 우리가 하느님을 닮는다면 그분의 자녀이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산다면 우리는 그분을 닮아 그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사랑은 원수에 대한 사랑에서 최고로 표현된다. 이 사랑을 통해 신앙인다운 특징이 드러난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을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46절) 그리스도인들은 이 원수에 대한 사랑으로 고유한 특징을 드러내며, 다른 모든 사람과 구분될 것이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이 틀림없다.
코린토 교회는 서로 사랑하지 않고 서로서로 적대시하며 싸움에 휩싸여있었다. 그리하여 공동체는 그리스도께 의존하지 않고 바오로나 베드로 같은 인간들에게 더 의존하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함으로써 분열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의지할 때 하느님의 성전은 서 있지 못하고 만다. 반대로, 모든 것은 사랑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그리스도께 맡길 때 구원될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을 풍요롭게 하는 선물이 될 것이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1코린 3,21.23)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하느님의 계명 율법이 더 적극적인 삶으로 은총의 복음이 되도록 주님의 가르침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며 구원의 복음이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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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원수를 사랑하여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38-42)
이 말씀은 “사적으로 앙갚음하지 마라.”라는 가르침이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켜라.”라는 가르침입니다.(로마 12,17-21)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의 일이고, 선을 선으로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인간 세상의 일이고,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라는 교회 격언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바로 그 일을 본받으라는 가르침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는 구약시대 율법은 원래는 과잉 처벌을 방지하기 위한 율법이었습니다. 처벌은 죄에 상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율법으로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사실은 구석기시대의 관습 같은 것이었습니다. 진보된 사회에서 사법제도를 제대로 운용하기 전의 낡은 사고방식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법제도를 부정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악인의 악행을 처벌하는 일은, 개인이 마음대로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공적인 사법제도에 맡겨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정의의 실현’은 외면하고 ‘사랑의 실천’만 강조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약탈당하는 일이 없는 세상, 또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이 악법을 만들어서 횡포를 부리는 일이 없는 세상, 우리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정의가 없는 사랑은 악을 조장하고 방관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악이 됩니다. <반대로 사랑이 없는 정의는 무자비한 폭력이 됩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는 “악인에게 악으로 맞서지 마라.”입니다. 우리는 악에 맞서야 하고, 악을 물리쳐서 없애야 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선이어야 합니다. 실제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하느님께서 나를 대하시는 사랑”으로 바꿔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지은 죄’에 대해서 곧바로 처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으로 나를 대하십니다. ‘나의 죄’를 묵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내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심판과 처벌이 내릴 것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3-45)
구약시대 때의 ‘원수’는, 우상을 숭배하면서 유대교를 박해하는 이방 민족들이었습니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율법은 구약성경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를 미워하라는 가르침은 많이 있습니다.
구약시대 때에 우상 숭배를 미워하라고 가르친 것은 하느님만 섬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는, 우상 숭배자들과 박해자들뿐만 아니라 사적인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원수를 좋아하여라.”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앞에 있는 “악을 선으로 갚아라.”라는 가르침과 같은 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든 누구에게나 미운 건 미운 거고, 싫은 건 싫은 겁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감정’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신앙인의 실천’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은, 박해자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원수 같은 자들에게 천벌을 내려 달라고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악인에게도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불의한 이에게도 비를 내려 주시는 것은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인간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곧바로 천벌을 내리신다면, 아마도 살아남을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갑작스럽게 어떤 사고를 당하거나 불행한 일을 겪을 때, 천벌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가끔, 사도행전에 나오는 헤로데처럼 천벌을 받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사도 12,23)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6-48)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랑에는 차별도, 차이도 없어야 하고, 울타리도 없어야 합니다.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는 일 자체를 하면 안 됩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이웃이고, 형제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이웃이고, 형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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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 이것은 영성체 전에 우리가 반복하는 기도문입니다. 이는 우리의 몸과 우리의 인생을 형제들이 먹고 마실 양식으로 내주지 못함을 고백하면서, 주님의 영과 정신으로 이것을 실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입니다.
많은 경우 세상에서 관계는 이른바 ‘상호성’에 의존합니다. 흔히 말하는 ‘교환 정의’를 바탕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상대방이 웃으면 나도 웃고 상대방이 화를 내면 나도 화를 냅니다. 우리의 정의가 교환과 저울에 근거한다고 믿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하느님께서는 정의로우신 분이시라고 판단합니다. 선인에게 상을 주시고 악인에게 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가진 정의에 대한 생각으로 하느님의 정의를 판단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정의는 세상의 통념과 다른 새로운 정의입니다. 이 새로운 정의는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정의입니다. 그것은 상대의 반응에 매이지 않고,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헌신에 근거한 정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에 속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사랑을 닮은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꽃이 향기를 내는 것은 그것이 꽃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꽃은 밟아도 향기를 뿜어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합니다.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사는 사람은 세상의 정의를 따라 사는 사람과 다릅니다. 우리의 부모를 생각해 봅시다. 내가 그분들을 괴롭혔을 때 그분들은 어떻게 하셨나요? 우리는 왜 부모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릴까요? 교환 정의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가 우리에게 준 조건 없는 사랑 때문입니까? 우리는 오늘도 주님을 따라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새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희망을 걸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해 주시기를, 그래서 우리가 그분의 사랑으로 세상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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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허석훈 루카 신부님]
<'좋아요'라는 족쇄를 벗고서....>
나라가 부유해지면서 인간의 기본적인 옥구는 빠르게
채워지기 시작했고. 이제 모두가 생리적 육구와 안전 육구를 당연하게 여기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래도 인간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어 여전히 '인정 욕구'에 시달립니다. 스마트폰의 보편화와 더불어 인터넷이 만드는 가상의 공간에서 '좋아요'를 받아내기 위해 애쓰는 청춘들의 수가 늘어가는 것을 보면, 이러한 세태를 좀 더 가깝게 인식하게 됩니다.
무엇에 목마른 사람들인가? 마음 깊은 곳에서 스미는
육망은 사랑받고 싶은 욕망일 테지만. 그런 깊은 사랑은 할 자신도 없고. 받을 자신도 없어 그저 남들이 나를 보고 부러워하기를 탐하며. 인터넷 세상의 '놓아요'를 갈구하는 모습이 가끔은 안쓰럽기도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러질 시류에 포장된 자기 모습으로 '좋아요'를 위해 온 마음 다해 노력하지만, 남는 것은 '허전함'임을 경험하기에 인터넷 세상은 날로 그렇게 커가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남들이 걸친 옷을 사고. 남들이 먹은 곳을 찾아가 순례
하고, 남들이 놀러 간 장소를 되밟아야. 뒤처진 느낌 없이 살 수 있는 욕망의 굴레를 짊어진 현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오늘 손해 보는 기쁨'을. 아니 하느님께 '좋아요'를 받을 비법을 가르치십니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라고,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결옷까지 내주라고,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이천 걸음을 가 주라고. 달라면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고 가르치시다. 이제 아예 '원수마저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일까요?
남들과 같아지려 하지 말고. '너' 자신으로 살아보는 기
뽐을 누리라고 가르치십니다. 누군가를 홈내 낼 양이면 하느님을 닮아 보라고 가르치십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놀이 말고, 진짜 자신을 버려 현신하는 사랑을 해보라 가르치십니다. 내 욕망을 책우려 허덕이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을 닮아가며. 허울로 덧씌워진 '나를 잊고 진짜 나'를 만나보라 가르치십니다. 다시금 목마른 욕망이 아니라 그
욕망의 굴레를 벗어 '헌신적 사랑으로 마음을 온전히 채우는 완전함을 가르치십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어찌 보면. 하느님의 사랑은 참 답답
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 무던한 사랑 덕에 지금의 우리도 여전히 웃으며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함니다. 마치 우리는 늘 완전하고 율바른 삶을 사는 양, 자신 있게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미워하는 것은, 고작해야 남의 욕망을 살아내는 어리석음임을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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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용욱 미카엘 신부님]
<원수를 사랑하여라>
예수님 말씀 중에 해보지도 않고 지레 포기할 만큼 어려운 요구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지요.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도 갈등과 다툼을 가라앉히기 힘든데,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은 지나친 요구요 성취할 수 없는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가만히 따져 보면 대단히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먼저 첫 번째 독서를 볼까요. 레위기의 말씀은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전하고 그 명령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어떻게 처신하라는 지침을 줍니다. 거룩한 사람은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되는데, 그러기 위해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짊어지지” 않고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어딜 가나 문제가 생기면 남의 잘못을 지적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갈등과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입을 다물고 사태가 악화될 때까지 가만있다가, 뒤늦게 “내 그럴 줄 알았다!”는 사람도 있지요. 입바른 소리는 하는데 정작 자기도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까지 더 하면 문제를 해결하기는 더욱 어려워 보입니다.
죄로 물든 세상에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고, 여기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서 5,12)
죄와 분노와 죽음은 결코 한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서로 형제자매로 맺어진 모든 사람은 죄의 현실 안에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문제가 있다면 함께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만 비로소 해결의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혼자 속으로 앙심만 키울 일이 아닙니다. 자기는 안 변하면서 다른 사람은 변하라고 강요해도 곤란합니다. 죄와 죽음의 현실을 공동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구체적으로 ‘동족의 잘못을 꾸짖으면서까지 죄스러운 상황을 해결하려고 대화하며 애쓰는 사람’은 앙갚음과 앙심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화답송이 노래하듯 거룩하신 하느님을 닮기 위해서는,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고, 아버지가 자식을 가여워하듯 당신을 경외하는 이를 가여워 하시는’(화답송, 시편 103 참조) 하느님처럼 죄의 상황을 해결하려는 굳은 의지와, 죄지은 사람마저 가엽게 여길 수 있는 마음의 훈련이 필요한 것이지요.
이어서 복음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을 전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계명은 하느님 백성의 장구한 역사 안에서 일련의 발전 끝에 나온 것이죠.
먼저 민수기 35장에서는 가족 복수법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어로 고엘이라 불리는 피의 보복자가 여기에 등장하는데, 한 가정의 일원이 부당하게 살해되었을 때, 그의 친족 안에서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이 나서서 살인자뿐만 아니라 그의 전 가족을 전멸시키는 복수를 했습니다. 거친 환경 속에서 그렇게 엄한 법이 없다면 안전을 지킬 수 없다는 우려가 컸지요.
다음으로 딸리오 법이 있습니다. 동태복수법이라 하는 이 법에 따르면 복수를 할 때는 받았던 죄의 크기를 넘어서지 말아야 합니다. “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아야 한다.”(신명기 19,21) 이 법은 지금 보기에 잔인해 보이지만, 복수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았던 당시의 다른 법보다는 개선된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더 흐르고, 인간 사회가 점점 더 문명화되어 가면서 하느님의 법은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법으로 대치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법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하도록 명합니다. 야만 시대를 벗어나 더 높은 차원의 법을 실천할 만큼 인간 사회가 성숙했으니, 이제 좀 더 어려운 과제를 주시는 것 같지요. 받은 게 많을수록 더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하니까요.
그러면 예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법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마음속 분노와 미움을 어떻게 해결하고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될까요? 근본적인 해답을 한 마디로 내어놓을 수는 없겠지만, 오늘 복음에서 실마리는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고 예수께서 알려주셨지요.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상대가 나의 관심과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따지지 말고, 어느 경우에도 내가 할 도리는 다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다.
사람은 마음이 가야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행동을 하다보면 마음이 바뀌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밉든 곱든 내가 하느님 백성으로서 할 도리를 다 하다보면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고 변화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든 핑계를 대고 해줄 일도 안 해주려 하거나, 뒤에서 오만 험담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얼굴을 굳히고 안 보는 시간이 갈수록 미움의 싹이 자라고 또 자라서 종국에는 도저히 감당 못 할 큰 나무가 되어버리지요.
그렇게 되기 전에, 속으로 천불이 나더라도 할 것은 해 주도록 합시다. 당장 용서와 화해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요한1서 2,5 참조 ; 복음 환호송)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성전을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코린토1서 3,17 ; 제2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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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상원 베네딕토 신부님]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당신을 모독하고 조롱하며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상 기도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십자가 위에서 몸소 실행하셨습니다.
사흘 뒤면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언제부터인가 해마다 사순절이 되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를 오르는 예수님의 눈빛을
상상해 보곤 했습니다. 육체적·인간적 고통으로 예수님의 얼굴은 분명 당신도 모르게 수없이 일그러지곤 했을 것입니다. 자연스레 일어나는 고통의 표정을 감출 수는 없었겠지만, 그 눈동자에는 한치의 원망이나 억울함도 없었을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아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몸은 고통으로 몸서리를 쳐도 마음은 평화로 가득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나와 반대편에 선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어떻게 흉내라도 내보겠는데,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조금만 불편해도 거북함을 감추지 못하거나 피해 다니고, 나와 성향이나 의견이 달라서 조금만 어긋나거나 부딪혀도 분노하고 뒷담화하기를 밥 먹듯이 하는 우리입니다. 참으로 불가능한 일이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주님의 말씀을 피해 갈 수도 없고 피해 가서도 안 될 일이니 나름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잡아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의 이분법적 명령은 아닐 것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셨던 그리스도 당신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닮은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고 애쓰라는 말씀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보다 ‘완전한 사람’이 되어가도록 기도하며 은총을 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이라도 ‘완전한 사람’에 다가서며 주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 당장 원수를 사랑하는 경지에 이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원수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하며 또 그렇게 익어가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는 만큼 그만큼 그 사람의 내면도 평화로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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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이상우 토마스 신부님]
<원수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랑의 실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복음을 묵상하면 항상 ‘아! 이렇게 사랑하면서 살아야지.’하면서도 솔직히 실천하기가 너무나 힘든 말씀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보복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하시면서, 구체적으로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라.”(마태오 5,39 참조)라고 좋아하는 사람들만 아니라 박해하는 사람들까지 또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뺨을 맞으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때리면 나도 똑같이 때리고, 미워하면 똑같이 미워하고, 무시하면 헐뜯고, 내가 손해를 보면 그만큼 되돌려 주고 싶은 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마음이겠죠. 이렇게 보면 ‘사람의 힘으로 원수 사랑하기가 가능한 일일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족함을 지니고 죄지을 수 있는 인간이며, 실제로 죄를 짓고 있고 잘못할 수 있는 인간이라서 누구든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모든 이의 마음에 맞게 모든 이를 이해하고 받아주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자기 마음에 안 맞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큰 손해를 끼치는 원수도 있을 수 있고 우리를 몹시 미워하는 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받아준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원수에 대한 사랑을 말하기 훨씬 이전에 원수가 아닌 사람들, 곧 나에게 가까운 이들인 가족, 친척이나 가까운 이웃 사람들을 우리는 정말 사랑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 친구, 이웃 등을 사랑하지 못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크고 거창한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사람은 ‘완전해져 가는 존재’입니다. 예수님도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오 5,48 참조)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작은 것, 곧 내 주변 사람부터 사랑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천히 사랑하며 살아갈 때 결국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아주 작은 사랑의 실천도 나 자신을 내어주기에는 우리에게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내 개인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할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한 주간을 살아가면서 그분을 닮아 우리 각자가 언제나 사랑하며 살아 마침내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함께 주님께 은총과 도움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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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의 완성>
마태오 5,38-48 (폭력을 포기하여라, 원수를 사랑하여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랑의 완성>
하기 쉬운 사랑
그 너머
하기 어려운 사랑까지
나를 위한 사랑
그 너머
너를 위한 사랑까지
하고 싶은 사랑
그 너머
하기 싫은 사랑까지
벗 사랑
그 너머
원수 사랑까지
할 수 있는 사랑
그 너머
할 수 없는 사랑까지
사람의 사랑
그 너머
하느님의 사랑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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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용서하시는 하느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 사랑의 절정은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이고, 아드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시간 그 큰 사랑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하며 우리도 주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상대의 실수를 이해하고 도와줄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용서와 이해가 있습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저 불쌍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배은망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그 죄가 무엇이든지 용서를 간청할 때마다 하느님은 기꺼이 용서해 주십니다. 하느님은 결코 지칠 줄 모르고 용서해 주십니다. 용서를 청할 마음이 내키지 않아 우리가 망설이는 것이지 그분은 언제나 기다려 주십니다.
오늘도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은 용서해 주시고 더 많은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은 인간적인 잘못을 보지 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3,16-17)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루카23,34) 하시며 먼저 당신을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실 때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23,46) 하셨습니다.
첫 순교자 스테파노는 사람들이 자기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 돌을 던질 때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60) 하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스테파노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죽기까지 용서하는 사랑을 살았습니다.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스테파노도 반대자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이 용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얻어야 할 구원은 바로 하느님의 용서입니다. 하느님의 용서가 없으면 우리가 무슨 선행, 무슨 공로로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참으로 용서는 사랑의 고귀한 표현입니다. 용서는 우리 사회가 인간다운 사회가 되기 위하여 꼭 필요합니다. 각박한 사회, 미움과 분열의 골이 깊어가는 이 시대에 용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지역, 계층간, 부모와 자식간, 부부간, 형제간 등 상처 난 곳곳에 이해와 양보의 덕이 필요합니다.
그 뿌리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용서는 예수님의 마음이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듯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도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재빨리 판단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험담하기에 앞서 내 자신이 용서받아야 할 잘못이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쉽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에 앞서 내 자신을 먼저 용서하고 또한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주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닮아야 합니다.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랑한 그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랑도 그러해야 합니다. 참사랑은 항구합니다.
“국물이 뜨거울 땐 국물 속의 기름이 잘 나타나지 않듯이 사랑이 뜨거울 땐 상대편의 단점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국물이 식을 땐 국물 속의 기름이 떠오르듯이 사랑이 식을 땐 상대편의 단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어떤 이에게 부족함이 보이거들랑 ‘지금은 사랑할 때’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5,46) 우리를 비방하고 아픔을 주는 사람까지도 포용하고 웃으며 인사할 수 있기를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하였던 이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 첫째편지 3장9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만큼 우리도 그 사랑으로 이웃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하느님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보이지 않던 이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김인호)
하느님의 사랑은 이웃사랑을 통해 드러나게 되는 법입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노) 혹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더 많이 사랑해 주지 못했음을 용서 청하고 자비를 간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그 큰 사랑을 받으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왜 그리 좁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변화되기를 희망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방법은 사랑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끝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이 가득하신 하느님, 불완전한 저희는 살면서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릅니다. 제가 저지른 실수를 다른 사람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만큼 저 역시 다른 사람의 실수 앞에서 너그러울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오직 사랑만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고”(예수의 데레사 성녀),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십자가의 성요한)이니 더 많이 사랑하게 하소서. 다른 사람을 험담하고 깎아내리는 데 쉽게 휩쓸리지 않는 용기를 주시고 사랑이 미움을 이겼다는 확신으로 기뻐하게 하소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별 중에 가장 힘든 이별은? 생이별
사랑 중에 가장 힘든 사랑은? 원수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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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고등학생 때 미술 선생님께서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을 보여주셨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빛의 파면을 자유롭게 담아낸 입체파 화가의 놀라운 작품이라고 선생님께서는 설명하셨고, 이 작품의 가치는 어마어마하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한 친구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장난삼아 우스꽝스럽게 그려놓아도 ‘피카소’라는 이름 덕분에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도 말했다. “내가 발로 그려도 저 정도는 그리겠다.” 미술에 대한 조예가 없으니 이렇게 생각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훌륭한 화가의 그림은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에게 비현실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지요. 이런 우리가 피카소를 만나서 “왜 이 따위로 그렸습니까?”, “나는 도대체 당신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라고 따질 수 있을까요?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잘 모르면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면서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완벽하게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족한 우리가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일을 보기에 때로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고통과 시련을 왜 만들어서 사람을 힘들게 하시는지, 왜 내가 청하는 기도는 다 외면받고 있는 것인지, 전지전능하시면 나 하나 부자 만들고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하는 것은 일도 아닐 텐데…. 그래서 계속해서 불평불만입니다. “왜 이따위로 세상을 끌고 가십니까? 나는 당신의 그 모습이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이런 불평불만이 과연 맞을까요? 완벽하지도 않고 전지전능하지도 않기에 우리는 함부로 주님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일을 해주고 계신다는 굳은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깊은 묵상과 기도로 또 그밖에 다양한 방식으로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한 사람은 불평불만보다는 감사의 기도를 더 많이 바칩니다. 주님을 아는 자기 수준이 높아져서 주님을 이해해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오른뺨을 치면 다른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고,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면 이천 걸음을 가 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더 힘든 일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이 우리 수준을 높이는 것이 됩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주님도 모욕당하시고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완전한 사랑의 하느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아직 수준이 낮아서 그렇습니다. 지금 나의 수준은 어떤가요? 완전한 하느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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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7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박해하고 미워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적대감으로 인한 원수 관계를 만드는 미움과 분노는 어디에서 오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을 자리잡게 해야 하는지 묵상하고자 합니다.
성서에서는 적대감을 지닌 원수의 관계를 가족 관계 안에서까지도 심한 증오로써 서로 대립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카인과 아벨(창세 4,1-16), 사라와 하갈(창세 16,1-7), 야곱과 에사오(창세 27-29장), 요셉과 그의 형제들(창세 37,4), 한나와 프린나(1사무 1,6)의 관계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다윗과 사울 간의 투쟁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개인적인 적대감의 모습을 가장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에 대한 적대감을 일으켜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을 만든 것은 주님께서 보내신 악령에 인한 것이라고 성서는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1사무 18,10;19,9-17) 바로 주님께서 보내신 악령은 사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질투와 교만을 불러 일으키게 하여 다윗을 죽이려는 증오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뱀이 하와안에 자리잡은 질투와 교만의 마음을 불러 일으켜 하느님과 같이 되고 싶은 빗나간 욕망을 드러내는 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창세 3,1-7).
성서는 바로 미움과 분노 그리고 빗나간 욕망의 근본 뿌리는 질투와 교만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투와 교만의 포장을 벗겨 더 깊은 근원으로 들어가면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 안에 심어준 그분을 닮은 순수 감성, 순수 의지, 순수 사랑 등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악령을 보내어 질투와 교만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것은 그 유혹에 굴복하여 미움과 분노 그리고 그릇된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제 1독서 레위기에 나오는 것처럼 하느님이 거룩하시기에 그분의 모상을 닮은 인간도 거룩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거룩함으로 초대하는 희망과 자유의 메시지입니다.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말로 이를 더 구체화 시킵니다.
이는 마치 연꽃이 진흙 속에 자라나도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오히려 그 맑고 깨끗함을 보존하듯이 우리 마음에 교만과 질투가 우리 마음을 사로잡을지라도 우리 마음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의 영은 연꽃과 같아 거기에 물들지 않고 거룩하고 순수하게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진흙으로 인하여 연꽃의 깨끗함과 맑음이 더 드러나게 해 주듯이 교만과 질투로 자리잡은 악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영은 그 거룩함과 순수함으로 더 밝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하느님의 영이 계시고 우리가 거룩한 성전임을 확실히 깨닫고 믿고 있으면 우리를 유혹하는 어떤 악도 오히려 더 거룩함을 드러나게 해주는 복된 악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 마음의 자리잡은 악을 어떻게 사라지게 하고 거룩한 영을 드러내게 하는지를 다음과 같은 영적인 처방전을 우리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지혜가 있는 곳에 두려움도 무지도 없습니다. 인내와 겸손이 있는 곳에 분노도 흥분도 없습니다.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도 욕심도 없습니다. 고요와 묵상이 있는 곳에 근심도 분심도 없습니다. 자기 집을 지키기 위하여 주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는 곳에 원수가 침입할 틈이 없습니다. 자비심과 깊은 사려가 있는 곳에 경박도 고집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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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기도의 집
http://www.kofmpeace.org/
에페소 기도의 집은 순례와 피정을 통한 에페소 성모님 성지 보존과 중동평화와 생태환경 보존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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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소망이자 우리의 평생과제>
-성인聖人이 되는 것-
“사랑밖엔 길이 없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1-2)
밤12시 30분쯤 일어나 보니 방금 보낸 감동적인 메시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카톡에 적힌 시간을 보니 제가 일어나는 시간에 이 형제는 하루의 일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면서 보낸 메시지입니다.
-“하루의 병원 진료 끝내고, 오후 교구 신부님이 집에서 돌보고 계신 파킨스에 알츠하이머 앓고 있는 어머님 잇몸 체크(핸드 스케일링) 해 드리고 왔어요. 원룸 오피스텔 환자용 침대에 누워 계세요. 벌써 몇 년 되셨는데 2년전부터 급격히 악화되셔서 힘든 간병을 하고 계시죠. 어머님에 대한 사랑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 극진하신 신부님입니다.
내일 주일은 여주 라파엘의 집에 진료가요. 주말과 주일에도 하느님께서 주신 저의 달란트를 누군가를 위해 나눌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네요. 이제 신부님은 기상할 시간에 저는 오늘을 마감하며,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서야할 내일 진료를 위해 잠들려 합니다.”-
세상 한복판에서 수행자요 구도자처럼 성인다운 삶을 살아가는 어느 치과의사의 일화입니다. 이분이 보낸 어제 메시지도 잊지 못합니다.
-“저도 개원하고 27~8년 동안 넘도록 제대로 휴가를 간 적이 없네요. 오래 전 여름 휴가 시즌에 진료차 오셨던 젊은 수사님 두 분이 ‘원장님은 휴가 안가세요?’라고 묻기에 제가 ‘천국에서 세상으로 휴가를 왔는데 무슨 휴가를 또 갑니까?’라고 했더니 무척 놀라는 표정을 짓더군요. 사실 그때는 약간 놀리느라 그랬는데...”-
천국에서 세상으로 휴가 나온 삶이라 하니 진리같은 유머가 참 기발하고 놀랍습니다. 문득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읽을 때마다 늘 새롭고 좋아 다시 인용하여 나눕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성인들처럼 아름다운 세상 살라고 천국에서 세상 휴가 나온, 소풍 나온 우리들입니다. 과연 세상 휴가 끝내는 날,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겠는지요. 각자 성인이 되라고 불림 받은 우리들이요 세상에 파견된 우리들입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주님을 닮은 각자 고유의 참나의 성인입니다.
그러니 이런 성인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 각자의 거룩한 의무요 책임이요 권리입니다. 참행복도 참기쁨도 참자유도 참평화도 성인이 될 때 있습니다. 그래서 믿은 이들 삶의 여정은 날로 하느님을 닮아 성인이 되어 가는 하닮의 여정, 또는 날로 예수님을 닮아 성인이 되어 가는 예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 성인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이유에 의미요 보람입니다.
우리 인간에 대한 주님의 신뢰와 기대는 얼마나 간절하고 원대한지요! 우리만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사람, 모세를 통해, 또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속내를 드러내신 하느님이십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의 간절한 소망이자 우리의 평생과제는 거룩한 사람, 완전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요 한마디로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19,2)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5,4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6,36).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소망이요 우리에게 주어진 참으로 중요하고 본질적인 평생과제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 자비로운 사람이 즉 성인이 되는 것은 막연하거나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아주 구체적이요 현실적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시며,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하며, 동포에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지 말라 하시며 결정적 결론 같은 말씀을 주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나는 주님이다” 도장을 찍듯한 말씀이 이웃 사랑이 주님의 명령임을 확실히 드러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거룩한 사람, 완전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 성인입니다.
은총과 더불어 평생 분투의 노력과 훈련을 다해야 하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새삼스레 깨닫는 사실은 사랑 역시 항구하고 한결같은 훈련이란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속내도 똑같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로 포문을 열 듯 구체적 사랑 실천을 명령하시는 주님이십니다.
1.“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져 돌려 대어라.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천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버리는 사랑이요 악을 완전히 무장해제 시켜버리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비겁한 무저항의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으로 무장한 적극적 사랑의 저항입니다. 참으로 내적으로 강한 용기 있는 사랑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영웅적 사랑의 실천 역시 의식적 훈련입니다.
2.“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이런 공평무사하신, 대자대비하신 주님을 닮아 완전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 성인이, 참 아름다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좋아하라’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좋아하기는 힘들어도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싫어도 하느님을 닮은 마음은 연민의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사랑을 닮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내 눈에 원수와 박해자이지 그만의 고통도 있을 것이며 하느님만이 아시는 그만의 까닭이 있을 것이기에 깊은 연민의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십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폭포수 같이 쏟아지는 말씀이 우리의 말문을 완전 닫아 버립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들도 한다.”
바로 이것이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우리들의 의로움입니다. 동문이나 동호회 사랑같은 유유상종의 끼리끼리 사랑을 완전히 넘어서라는 주님의 참 강력한 말씀입니다. 이래야 편애와 차별이 없는 완전한 사랑, 완전한 의로움, 보편적 사랑, 깨어 있는 사랑, 용기있는 사랑, 부단한 자기초월의 사랑입니다. 이 또한 의식적 훈련의 사랑이겠습니다.
이런 사랑 실천의 자리는 바로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입니다. 놀랍게도 이런 공동체는 하느님의 성전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우리에게는 깊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성전 공동체에 속한 사람 하나하나의 형제자매들이니 이들을 소중히 여겨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들중 하나라도 파괴하거나 다치게 하는 자는 본의 아니게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거나 다치게 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그리스도 중심,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임을 환기시킵니다.
“아무도 인간을 두고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오로도 아폴로도 케파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 공동체에 속한 우리들이요 공동체의 중심인 그리스도께, 하느님께 날로 깊이 뿌리 내려가는 우리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샘인 주님으로부터 샘솟는 사랑이 밑빠진 독에 물붓듯 끊임없는 아가페 사랑의 실천을 가능하게 합니다. 참으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거룩한 성전 공동체로 날로 성장 성숙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 날로 당신 사랑을 닮아 거룩한 사람, 완전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 즉 아름다운 성인이 되게 하십니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시편103,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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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예수가 좋다!>
오늘 복음(마태5,38-48)은 '폭력을 포기하여라.'는 말씀과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말씀입니다.
믿는 이들의 여정은 완덕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닮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영적행위(미사, 기도, 말씀필사 등등)는 지금 여기에서 생각과 말과 행위로 예수님이 되려는 행위들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과 온전한 일치, 완전한 합일에 이른 상태가 바로 완덕이며, 그런 사람이 완전한 사람'입니다.
'예수가 좋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좋아서 성당엘 다닙니다. 사람이 좋아서 다니는 것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성당엘 다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좋아서,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닙니다.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성당엘 다닌다면, 그 공동체는 신앙공동체가 아니라, 친목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을 좋아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래서 예수님 안에 머물게 되면, 참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마음이 평화롭고 따뜻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사랑.기쁨.평화.인내.호의.선의.성실.온유.절제) 안에 머물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고 '하느님 체험'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체험을 하는 이들이 들어가는 곳이 바로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인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좋아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너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우쭐대는 교만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 안에 머뭅니다.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좋아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역설적인 사랑을 합니다. 곧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날마다 오늘이 천국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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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1F3I9AVEpV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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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 39)
뜻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길이
있기 마련입니다.
올바른 실천은
악인에게
맞서지 않고
우리가 묵묵히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사랑은
주는 기쁨이
더 큰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랑이라는
놀라움이
빚어만드는
관계입니다.
악인도 원수도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출발점은
언제나
하느님께
기도하는 기도에
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참된
자화상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될 때
하느님의 사랑에
놀라게 됩니다.
사랑은 먼저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우리를 이끕니다.
하느님을 통하여
세상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기적인 자아를
버리기에
온전하고
완전한 것입니다.
조건을 두지 않는
사랑은 조건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습니다.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사랑의 순리입니다.
공동체는
하느님을
첫자리에 두며
기억하고
기도드리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기쁨이
없는 곳에 기쁨을
주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온전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변덕스러운
인간의 사랑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온전하고
완전하신
하느님 사랑에
의탁하는 사랑의
주일입니다.
사랑은
사랑할 때
하느님 나라가
되는 사랑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사랑의 순간
완전한 순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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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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