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진광 이레네오 신부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루카 8,1-3
김천에는 직지사가 유명합니다. 4월 어느 화창한 날. 벚꽃이 한창 필 무렵이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직지사에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지사 벚꽃이 예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직지사 입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걸어가니까 왼편에 군밤 리어카가 서 있었습니다.
그냥 그 앞을 무심코 지나가고 있는데 그 군밤 사장님이 아무 말씀 없이 지나가고 있는
저의 손에 뭔가를 쥐어주었습니다. 이게 뭘까 하고 손을 펴보니 군밤 하나였습니다.
‘야! 이거 의외의 수확인데’ 하며 몇 걸음 걸어가서 입안에 톡 털어 넣었습니다.
어! 근데 밤이 맛이 있네요.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맛.
갑자기 한참 가고 있던 길을 되돌아서 그 군밤 리어카로 가서 밤을 한봉지 사고 말았습니다.
예전에는 군밤이 양에 비해 가격이 비싸다고 생각해서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이미 먹어 보고, 맛있다고 느껴지니 밤을 살 때 결코 비싸다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그래! 장사는 이렇게 해야되!’라고 생각하며 군밤을 하나씩 까먹었습니다.
그런데 언뜻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 군밤 한 알!’ ‘가던 길을 돌아서게 했던 그 군밤 한 알’
사제는 그 군밤 한 알을 쥐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제가 줄 수 있는 군밤 한 알이란 다름 아닌 하느님 말씀을 살아가는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백마디 말보다 하느님 말씀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는 사람.
이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사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저기를 다니시며 하느님 복음의 깊은 맛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미 그 맛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하느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느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가 예수님의 기적으로 낫게 된 여인들은 예수님의 복음선포를
열정적으로 돕습니다. 기적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임하심을 맛본 그녀들은
이제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군밤 하나를 쥐어주는 사람처럼 하느님 말씀의 기쁨을 사람들에게 맛보여주는 사람이
지금 우리 세상에는 많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 한명 한명이 세상 사람들에게 군밤하나를 쥐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대구대교구 예진광 이레네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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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루카 8,1-3
오늘 복음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여인들’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라삐를 따라다닐 수 있는, 그래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 제자가 될 수 있는
자리에 ‘여인들’의 몫은 없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남녀 차별은 사회 문제였고,
오늘날 성차별에 대한 의식의 정도는 그 사회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은 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자주 표현합니다.
그러한 관심은 실은 기존 사회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었고 그 결과는 예수님을 십자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한국 교회의 순교자들도 루카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순교자들을 존경하며 따르고자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약자들이 많고, 자신이 왜 약자인지조차 모르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왜 점점 더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있는지, 또 갈수록 양질의
일자리보다 비정규직이 많아지고 있는지 ……. 제 자식이 비정규직이면 정규직이 되는 것에
그리 애가 타고 부유한 이들의 부정과 편법 상속에 분노하면서도, 대개는 이러한 사회 현상의
근본 원인과 개선을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버리는 문화’로 표현되는 사회 경제 논리만으로는 세상을 치유할 수
없기에, “성경의 가르침대로, 모든 사람은 회개와 참회를 통하여 더 정의롭고 연대하는 세상의
증인이자 예언자가” 되어야 하며, “복음은 이상향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희망”이라고
말씀하십니다(『돈과 권력』 추천사 참조).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우리는 사회의식을 제거하는 경우가 많지요. 세상일과 신앙의 가치를
분리한 채, 마치 복음 읽기와 묵상을 먼 나라 이웃 나라 기행문쯤으로 여기는 태도는
신앙인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루카 복음에서 여인과 함께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사회의 문제아셨습니다.
차별받고 학대받는 사회 구성원들과 함께하며 욕먹을 각오로 세상을 살아 내는 것,
그것이 복음 묵상의 열매입니다.
제발 부탁하건대, 누군가 피 흘려 이룬 신앙을 제 한 몸 평온하려는 도구로 타락시키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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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근 실비아 수녀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루카 8,1-3
예수님을 따르던 여러 부류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복음 환호송에서 철부지라는
낱말이 눈에 띄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 1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하늘 나라의 신비를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십니다.
오늘 복음에 언급된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이른바 철부지였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특출한 인물들이 아니었으나 하느님의 은총이 그들 안에 베풀어져 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여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악령과
병에 시달리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부족함이 많았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에
귀를 기울였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과 함께하였습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도
예수님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위치에 서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이 그에게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합니다. 더구나 그 평가 기준이라는 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의 기준과 가치의
기준을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준을 예수님께 적용하게 되고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게 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1코린 15,12) 하고 먼저 단정 짓는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철부지의 위치에 서서,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을
예수님께 맡기고 제자가 되어 그분의 뒤를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