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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올람토라 온라인 성도방에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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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를 회복하여 예슈아를 닮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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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흠없는 피로 속죄함을 얻었다.
우리가 조상으로 부터 받은 것은 헛된 행실이다. 그런 헛된 행실에서 대속해주신 피는 흠없고 점없는 예슈아의 보배로운 피다. '대속하다'의 의미는 우리를 속량하시고 깨끗하게 씻어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만드셨다는 뜻이 들어있다. 즉 예슈아는 우리의 중보자이시고 대제사장이시다. (벧전1:18,19)
이렇게 죄에 팔려 종이 되어 아버지와 원수되었던 우리를 자신의 피로 씻어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죄를 짓되 담대하게 하고 그럼에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즉 죄를 이기고 또 이겨 거룩한 행실로 옷 입고 아버지 앞에 영광스럽게 세워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거룩한 나라에 거룩하게 된 자들만이 들어간다. 육체의 소욕(우상숭배하고 음행, 남색...)을 따르는 불의한 자들은 하나도 참여하지 못한다.(골1:21,22 고전6:9,10)
2 말씀으로 거듭나다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무엇으로 될까? 즉 다시 태어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은 예슈아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요3:4,5). 베드로는 거듭나는 것이 말씀으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말씀은 세세토록 있여야 한다. 말씀이 이 땅에 속한 문자이기만 하다면 즉 살아있지 않다면 어찌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 있겠는가? 그것도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겠는가? 속죄를 받은 우리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은 영원히 살아있는 말씀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말씀이 생명이고 예슈아께서 전파하시고 부활하게 하신 복음이다. 즉 예슈아의 피로 속죄를 얻고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이다.(벧전1:23)
이 부분을 요한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증언한다. 물은 말씀이고 성령은 예슈아의 죽으심으로 온 세상에 부어진 하나님의 영이다. 말씀과 거룩한 영이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고 영생하게 하는 것이다.(요3:5)
3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우리는 성령을 따르면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짐을 믿는다. 그러므로 율법이 아니라 성령을 따르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율법과 성령은 추구하는 것이 다른가? 만약 다르다면 성령을 따를 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추구하는 바가 같기 때문에 성령을 따를 때 율법이 추구하는 바가 동일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의 법(율법)에 굴복할 수 없고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들임을 알 수 있다.(롬8:4-8)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그리고 진리는 율법이다. 여호와께서 직접 써주신 율법은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변하지 않기 때문에 우린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시119:142)
4 사람의 종으로 삼으려는 거짓 형제들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은 거듭나게 하는 것이 말씀과 성령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더이상 말씀에서 벗어난 전통은 그들을 지배할 수 없다. 그 사실을 아는 자유케된 성도들을 다시 전통주의자들의 종으로 삼으려고 할례파들이 가만히 공동체에 들어왔다. 전통에 종이 되는 것은 결국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가르침과 사람의 명령을 따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므로 우상숭배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단 한순간도 그들에게 복종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를 통해 공동체가 오직 복음의 진리안에 있게 하려고 했다. 예슈아께서 율법의 일점 일획도 폐하지 말라고 하신 것처럼 작은 틈도 내어주지 않으려는 바울의 결단이다 바람직한 공동체의 아비와 같은 자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폐하지 않아야 틈이 생기지 않고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갈2:4,5).
5 할례자들을 만나는데 무할례자 디도를 데리고 간 바울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에 유력한 자들 즉 사도들을 만나려고 올라갔다. 물론 개인적으로(사사로이) 만나 이방에 전하고 있는 복음을 똑같이 제시했다. 왜냐하면 헛되지 않게 하려고 즉 오해의 소지가 없게 하려고 그렇게 개인적으로 만난 것이다. 사도들을 만날 때 일부러 할례를 받지 않은 헬라인 디도를 데리고 올라갔다. 여기서 개역개정은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다'라고 번역함으로써 할례를 받지 않도록 강제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 뜻은 '할례받기를 강제하지 않았다'라는 의미로 자율성을 말하고 있다. 즉 아직 할례는 받지 않았지만 문제될 것이 없기에 할례자들인 사도들에게 데리고 간 것이다(갈2:1-3). 그러나 당시 분위기는 할례자들이 무할례자와 함께 먹고 교재하는 것을 법조문(규례,전통)으로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 볼 수 있다 바울은 이 행동으로 이미 한새사람을 세우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벧전2:15).
6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 중요하다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 즉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슈아를 믿음으로써 된다고 말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행위로써는 의로와질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율법이 필요할까? 의로움을 위해 율법의 행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며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여호와께서 '모든 명령을 삼가 지키면(순종하면) 그것이 우리의 의로움이 된다'(신6:25)는 말씀을 바울이 전면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함으로써 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율법의 행위로 의로와 질 수 없다는 말은 무슨 말이며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은 무엇인가?(갈2:16)
7 믿음이 곧 순종이다
여호와께서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당신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다. 이유는 이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순종하지 않음과 믿지 않음이 같음을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히3:18,19) 사실 믿음은 순종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한다. 반대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는 말씀도 신뢰하지 않고 신뢰하지 않으니 지키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행위라는 순종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행위인지를 말하는 것이다(히3:18,19). 즉 믿음을 폐하는 행위를 거절하는 것이다. 믿음은 행함이다.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약2:22). 그렇다면 믿음을 폐하는 행위는 무엇일까? 만약 행위가 하나님의 계명(율법)을 지키지 않게 한다면 불의한 행위이고 그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 그 당시 할례파는 할례를 받은 육체를 자랑하고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행위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 심지어 그 행위가 율법에 속한다 하더라도 일부 율법의 행위로 전체 율법을 지키지 않게 만든다면 그것은 그릇된 행위이다(갈6:13).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할례는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신 표증이지 순종하지 않아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하는 표증이 아니다.
8 율법의 행위는 율법과 같은 뜻이 아니다
히브리어로 ‘율법의 행위’는 ( בקיום מצוות התורה 베키윰 미쯔보트 하토라) '토라(율법)의 명령 안에서 생활하다'로 직역할 수 있다. 율법을 사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율법의 행위는 모든 율법을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할례는 율법의 행위이다. 그러나 할례가 모든 율법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샤밧도 십일조도 율법의 행위이다. 그러나 모든 율법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부 명령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갈2:16 신8:1). 사단도 예슈아를 말씀으로 시험했다. 그 말씀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단의 말이 맞지도 않다. 왜냐하면 다른 말씀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일부가 아니라 모든 말씀으로 전쟁해야 한다. 모든 말씀만이 우리를 모든 시험에게 이기게 한다(마4:4-7).
9 지푸라기 서신 야고보서 (어떤 행함인지 분별이 필요하다)
마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경멸했다. 심지어 정경에서 빼려고까지 했다. 왜 그렇게 까지 야고보서를 반대한 것일까? 이유는 루터의 교회 개혁이 ‘이신칭의’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이신칭의란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하여지는 것 즉, 죄인이 하나님을 믿으면 의롭다고 인정받고 구원받는 교리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신칭의와 반대되는 듯한 말을 한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2:24)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갈2:16) 라고 말했다. 이처럼 야고보와 바울은 서로 반대로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또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고 말했다(롬4:1~3, 갈3:6~9). 그러나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1~22) 라고 말했다. 과연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복음을 말하는 것일까? 많은 교회가 이둘이 다른 말을 하고 있다고 여기고 교리를 세웠다. 많은 교회에 토라가 없다. 증거는 개신교 종교 개혁자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경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슈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것도 버리지 말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 믿음은 율법의 중요한 부분(본질)이다. 율법은 행위와 믿음을 모두 포함한다(마23:23). 다시 말해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인 율법에 정통한 바울은 믿음을 이야기 했지만 그 믿음은 율법에 대한 순종을 포함했다. 바울은 율법을 거룩하다 말했다. 율법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할례파:육체를 자랑하고 계명을 지키지 않았다)를 거절한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는 말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다만 야고보는 믿음을 오해하여 행함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믿음의 온전한 뜻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의 진정한 뜻은 믿음을 포함한 순종이고 본질이 믿음이다. 신뢰하는 자가 순종하는 것은 당연하다. 바울은 계명을 폐하는 전통을 배설물로 여기고 거절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행한다. 그 행위가 율법이라도 나머지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되게 한다면 잘못된 전통(교리)이다. 율법이 아닌 전통은 말할 것도 없다.
10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어떠함이 중요하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예슈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갈2:16)는 것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우선 기존 성경 번역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의 대상으로 집중했다면, 히브리 성경이나 유대인 영어 성경(Complete Jewish Bible) 은 그분이 가지고 있던 믿음의 어떠함에 집중하고 있다. 어떠한 믿음이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우리가 만약 대상에게 집중한다면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한다. 왜냐하면, 복음은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말하고 있는데, 대상에 집중해 버리면 과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슈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불순종에서 벗어나 순종하게 하시려고 친히 순종의 삶을 보이셨다 우리가 예슈아께 집중하면 '우리가 불순종해도 예슈아를 믿으면 구원받는다'와 같은 이상한 교리가 생길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대상에게 집중해서 생긴 오해이다. 그러나 예슈아의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면 '믿음을 가진 자는 예슈아처럼 순종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믿음의 어떠함에 집중하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다.
베드로는 아버지께서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행위대로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문제는 거룩한 행위을 하는가 불의한 행위를 하는가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경고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예슈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불의한 행위를 버리고 거룩한 행위를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예슈아의 이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예슈아의 거룩한 행위, 거룩한 삶,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다. 그것이 예슈아를 아는 것이고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벧전1:15-17)
11 바울이 헐었던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예슈아를 믿는다고 하면서 죄를 짓는다면 그분께서 우리가 죄를 짓도록 인도하신 것은 분명 아니다. 결국 나의 욕심이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다. 우린 육신에 거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잘못 들을 수 있다. 그렇다고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고 샤밧을 지키지 말라고 하지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결코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신 것을 어기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아직 죄인이어서 죄를 그치지 못할 뿐이고 전통에서 빠져 나오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바울은 진정한 회개와 거듭남을 통해 자신의 그토록 지켜왔던 전통을 배설물처럼 버렸다. 만약 계명을 폐하는 전통을 다시 세운다면 바울 자신이 스스로를 범법자로 만드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기 위함이다" 이 고백은 무슨 의미일까?(갈2:17-19)
12 율법 때문에 율법을 위하여 죽다
개역 성경은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로 번역했다. 이 번역은 이해하기가 좀 어렵다. 누가 죽었다는 말일까? 율법이 죽은 것일까? 내가 죽은 것일까? 이 말씀을 ‘율법이 죽었다’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면 우린 죽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반면 히브리 성경은 ‘때문에, 위하여’로 번역했다.(헬라어 ‘가르’는 ‘위하여’라는 뜻이다.) 즉, ‘내가 율법 때문에 율법을 위하여 죽었다.’로 번역했다. 이 번역은 이해하기가 더 쉽다.
율법을 위하여 내가 죽은 것이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가 죽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예슈아께서 죽으신 것은 율법을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옛사람을 죽이고 율법이 요구하는 생명 값을 지불하기 위함이셨다. 다시 말해 율법이 요구하시는 대로 지불하신 것이지 율법을 없애고자 함이 아니다. 자신의 옛사람인 죄성이 죽어야만 마침내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다(갈2:19).
바울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죄의 종이 었던 옛 사람이 죽고 순종의 종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순종을 하든 불순종을 하든 우린 율법을 세울 수 밖에 없다 불순종을 하면 율법에 언약된 저주를 세울 것이고 순종을 하면 율법에 언약된 복을 세울 것이다. 율법도 양면이 있다. 다만 죄의 종이 되든 순종의 종이 되든 선택은 우리에게 있다. 나의 죄성을 죽인다면 율법의 저주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다. 그래서 더이상 죄의 종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율법의 축복으로 순종의 종으로 의의 종으로 다시 살아가는 것이 예슈아의 뜻이고 예슈아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다(롬6:11,15).
13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다
결국 순종의 종이 되야 의로움에 이르고 생명을 얻는다. 그것이 복음이다(롬6:15). 그래서 사단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순종하게 하려고 지금도 우리를 미혹하고 있다. 예슈아께서는 우리의 롤모델이시다. 그러므로 예슈아께서 순종을 몸소 보이셔야했다. 인간으로 오신 예슈아께서는 고난을 몸소 겪으시며 순종을 배우셨고 그래서 온전하게 되셨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실 수 있었다. 예슈아께서는 육체로는 제사장 지파가 아니지만 우리의 영을 위해서는 대제사장이시다. 우리의 육체가 죽고 영이 새로와질때 예슈아께서는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영원한 재물로써 우리를 완전하게 하실 것이다(히5:8-10)
14 의로움이 율법에서 오는가?
그러면 의로움이 율법에서 오는가? 순종을 통해 완전하게 되셨다고 했는데 의로움은 율법에서 오는 것일까?(히5:8,9) 만약 율법을 지켜서 의로와질 수 있다면 즉 온전해질 수 있다면 예슈아께서 죽으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이다. 율법이 거룩한 행위이기 때문에 율법을 준행하는 자는 의로와질 수 있다(신6:25).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로움의 단계인 온전함에 이르지는 못한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마5:20) 즉 의로움은 비교가 가능하다. 지금 바울이 말하는 의로움은 온전함을 말하는 것이다(갈2:21). 율법은 우리를 온전한 의로움으로 이끌지 못한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의 육체를 정결하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하지만 우리의 양심까지 씻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육체의 예법이고 마음의 할례에 이르기까지 준행하며 훈련하는 하늘의 법도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영혼을 씻어 온전함에 도달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럴 수 있다면 더이상 회개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슈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씻어 거듭나게 하신다. 그러나 양심을 씻는 예슈아의 피로 씻어진 우리도 아직 죄를 짓고 회개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육체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육체를 벗어 더이상 육체를 정결케 할 필요가 없을 때 우리는 예슈아의 피로 온전하게 씻어져 영원히 죄를 짓지 않는 영원한 존재가 될 것이다. 결론은 율법으로 우리를 온전히 씻지 못하기에 우리의 영혼을(양심) 씻는 예슈아의 피는 영원한 나라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의 양심을 씻는 일은 거듭남과 함께 시작되고 영원한 나라에서 완성된다(히9:9-14)
#히브리적관점 #레올람토라 #갈라디아서 #미라클조 #율법
첫댓글 로마 가톨릭이 하나님의 율법을 헐고 볍황권의 법을 세웠으며 대부분의 개신교가 그 뒤를 따르는 가운데 몇몇 교단이 하나님의 법이 무너진데를 수보하는 움직임을 보이니 참 다행스런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회복의 과정을 보는게 기쁨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고
그 가운데 많은 성도님들이 회복에 동참하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함께 개인의 회복과 가정과 교회와 나라의 회복을 경험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의 댓글 정말 감사드립니다
할렐루야 🇮🇱 🕎
해묵은 주제입니다.
이 의문의 핵심은 성령을 따르는가 인데
아쉽게도 상당수의 퍼센트 내에 목사들이 성령을 받지 않았거나, 성령의 법에 지배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해서 이쪽은 성령의 법을 논해도 그 세계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론적 성령론만 말합니다.
그러므로 경직된 종교의 틀 안에 갇혀있길 좋아하고 남에게도 그것을 강요하는 사람들과는 영원한 평행선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네 ~ 물론 귀가 있고 마음이 부드러운 사람들만 듣고 회개하고 거룩함으로 나아가겠죠
그게 단 한명이어도 좋겠죠~^^
다만 전하라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 저를 살리는 것이기에 저를 위해서도 합니다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면 좋겠죠 그러나 나 한사람 바꾸는 것이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인거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열심히 해보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
아멘!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