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1주간 화요일 강론>(2023. 12. 5. 화)(루카 10,21-24)
복음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21-24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이 기도는 소외계층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소외되지 않고 그 나라의 구원을
받게 된 것에 대한 감사기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기득권층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게 된 것을 감사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을 향해서는 회개하라고 타이르는 말씀이 됩니다.>
이 기도는 ‘마리아의 노래’와 비슷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이 찬미가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관한 소식이
‘비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고,
즉 ‘복음’이 되고, ‘교만한 자들’과 ‘통치자들’과
‘부자들’에게는 ‘회개하라는 경고’가 된다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기득권층 사람들도 스스로 회개하여,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지면 구원받을 수 있지만,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기득권을 지키려고만 하면,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질 것이고, 쫓겨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코린 1,27-31).”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한 일인데,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서,
간절하게 원하고, 겸손하게 청해서 받는 사람은 구원받지만,
지식이나 재물이나 권력이 많다고 잘난 체 하는 사람은
바로 그 교만 때문에 구원받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동정녀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신 일이나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으로 오신 일은(성탄은), 세속의 지식이나
지혜로는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과학을 초월하는 일,
즉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오직 ‘믿음으로만’ 깨달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이 곧 ‘영적 지혜’입니다.
반대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지 않거나
믿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로마 1,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6-7).”
라는 말씀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구원’에 도달하는 유일한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성탄절은 바로 그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신 분”이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3-24)”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직접 받게 된
신앙인들이 누리는 ‘영적 축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실 신앙생활 자체가 행복한 생활이고, 기쁜 생활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 즉 구약시대 성인들과 의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기만 했고, 메시아를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불행하게 되었다는 것은(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고, 우리 교회는 그 사람들도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받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 있는 ‘저승에 가시어’ 라는 말이 그것을 나타냅니다.
저승, 즉 ‘고성소’는,
구약시대 성인들과 의인들이 예수님을 기다리던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기 전에 그곳에 가셨고,
그 사람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출처] 대림 제1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