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현 세례자 요한 신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경축 이동
지혜서 3,1-9 로마서 8,31ㄴ-39 루카 9,23-26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자랑스럽고 훌륭한 신앙 선조를 둔 행복한 민족입니다. 선조의 신앙은
피의 증거로 꽃을 피웠고, 우리는 선조의 모범을 통하여 오늘의 삶 안에서 신앙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선조가 있다 해도 그 후손이 선조가 증거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오히려 선조에게 누를 끼치게 되며, 세상으로부터의 비난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 들었고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누구보다 예수님을 닮아 가신 분들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순교자의 성지를 찾아 신앙의 모범을 본받고자 합니다.
대전교구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탄생지인 솔뫼를 비롯하여 27곳의 성지와 순례지가
성역화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풍요로운 순교자의 교구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다른 성지에서 하느님을 증거하기 위해 피와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들을 묵상하다 보면
오늘의 복음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나이도 성별도 능력도 서로 다른 하느님 백성이 각 자의 삶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예수님을 따랐기에 누구보다 예수님을 닮아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맡기신 십자가를 지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으셨고, 인류는 구원의 은총을 충만히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이 전해지는 사랑의 징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와 순교자가 짊어진 십자가도 사랑의 십자가였고,
우리가 짊어질 십자가도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이기적인 입신양명을 위한 고단한 삶의 짐이 아닌
이웃을 위한 사랑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교성인들을 기억하며 순교성지와 순례지를 경건하게 방문하고
선조의 삶을 본받아 각 자의 삶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의 자리가 새로운 성지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대전교구 백광현 세례자 요한 신부
2024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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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연 요셉 신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경축 이동
지혜서 3,1-9 로마서 8,31ㄴ-39 루카 9,23-26
피, 땀, 눈물로 봉헌된 한국천주교회
이벽 성지에는 이벽께서 감금되어 순교하신 집을 재현해 놓았습니다. 출입문은 큰 자물쇠로
잠겨 있는데, 자물쇠를 여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배교입니다.
신앙을 버리면 즉시 문이 열리고 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죽음입니다. 신앙을 고수하면
그 안에서 죽고, 그제야 문이 열립니다.
‘나’ 라면 집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100년 동안 4번의 박해를 일으켜 천주교회를 말살하려 하였고, 1만 명이 넘는
이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순교자들은 육신의 살고 죽는 문제보다 하느님을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살아도 하느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하느님을 위해
죽고자 하였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 그대로 살았습니다.
“죽음도 삶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는 그의 백서(1801)에서 致命之血, 爲斯敎之種(치명지혈, 위사교지종)
이라고 말합니다. ‘순교의 피는 이 교회의 씨앗이다.’ 라는 뜻입니다.
신앙 선조들의 유혈 무혈의 순교로 한국교회는 탄생하였고, 성장하였습니다.
“교회라는 나무는 수고의 땀, 기도의 눈물 그리고 순교의 피라는 세 가지 수액을 먹고 자란다.”
고 하신 교부 떼르툴리아누스의 말씀처럼, 한국천주교회는 순교자들이 흘린 피, 땀, 눈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제 오늘의 교회는 삶으로 증거하는 피와 땀과 눈물을 필요로 합니다.
변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갈고닦는 험난한 여정을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23). 순교자들은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순교자들이 귀하게 여긴 것은 신앙과 하느님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이 바친 피, 땀, 눈물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럼, 오늘을 사는 나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무엇을 버렸습니까? 나는 하느님께 무엇을 바칠 수 있습니까?
순교자들의 삶을 조명하는 가운데 나의 피와 땀과 눈물로 내가 변화하고,
교회가 성장하기를 기도해 봅니다.
춘천교구 고봉연 요셉 신부
2024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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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 스테파노 신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경축 이동
지혜서 3,1-9 로마서 8,31ㄴ-39 루카 9,23-26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매일 김범우 순교자 묘역을 드나들면서, 새삼스레 순교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고, 심지어는 목숨조차 바쳤을까 생각해 봅니다.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타니아의 “라자로에게 가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토마스 사도가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고 비장하게 대답합니다.
과거 서구에서는 순교에 대한 열망으로, “우리도 죽으러 갑시다.” 하면서 앞 다투어 선교지로
갔다고 합니다. 순교 자체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죽음을 미화해서는 안 됩니다.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이유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부정하고 탄압하는 자들 때문이지
죽음이 좋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순교)을 하는 이유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온 마음으로, 온 영혼으로, 온 정신으로,
온 힘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전히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하려면 자기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순교의 정신일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반드시 순교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과 진리를 미워하는 자들의 폭력 앞에서 우리 신앙을 감추거나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자유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에
돈독하지 않은 교우님들이 많습니다. 하느님 때문에 목숨을 바친 신앙의 선조님들이
그러한 우리 모습을 보신다면, 얼마나 안타까워하실까요? 죄송스런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으며 그리스도교 신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바라는 것이
있어서입니까? 하느님이 목적입니까, 세상의 재물이 목적입니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의심쟁이로만 알려진 토마스 사도의 비장한 결기가
느껴지는 말씀입니다. 우리 비록 비루한 신앙인이지만, 예수님과 예수님을 말씀을 떳떳하게
여겨 부끄럽지 않은 신앙인이 되도록 합시다. 하느님 때문에 당하는 모욕과 멸시, 고통과 희생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대가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숙명 아닐까요?
부산교구 박혁 스테파노 신부
2024년 9월 22일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