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원 베드로 신부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잠언 3,27-34 루카 8,16-18
요한 복음사가는 ‘로고스 찬가’(1,1-18)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1,9)으로
고백합니다. 진정 예수님께서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에게 하느님 나라를 보여 주신
참빛이셨습니다.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 내면의 어둠이 드러났을 때, 그분을 회피하거나
해치려는 이들도 있었지만, 더 많은 이가 그분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고
구원의 빛 안에서 새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인 ‘등불의 비유’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루카 8,4-8 참조)에 이어
들려주십니다. 마음속에 심긴 하느님 말씀을 싹틔워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좋은 땅으로
살아가라는 당부와 더불어, 그러한 삶을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둔 등불마냥 감추지 말고
가족과 이웃들에게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착한 표양과 모범까지도 감추는 것이 겸손은 아닙니다. 선(善)은 있는 그대로 드러날 때
하느님께 영광이 되고 선을 행하기를 잊어버린 누군가에게 깊은 깨달음과 변화의
계기가 됩니다. 제1독서의 말씀처럼,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선행을 베풀기를 지체하거나
거절하지 않고, 이웃에게 해가 되는 그 어떤 악행도 늘 경계하는 삶을 이어 가야겠습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주위에 빛이 되어 주는 삶을 더 실천하면 할수록 더 깊은 확신과 기쁨을 얻어,
언제나 주님의 빛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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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잠언 3,27-34 루카 8,16-18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꽃동네 수녀회에서 주관하는 피정에 다녀왔습니다. 동창모임을 다녀온 날이었습니다.
여행의 피로가 있었지만 고백성사를 도와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웠습니다.
피정에 참석한 분들은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깊은 성찰이 있었고, 하느님 앞에 참회의 눈물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저 그분들의 이야기만 들어드렸습니다. 샘이 깊은 물은 쉽게 마르지 않듯이,
고백성사의 은총도 더 깊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성사를 보고 돌아가는 뒷모습이 모두 아름다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저는 피정에 참석한 분들을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밀림이 울창한 것은 비가 자주 내리기 때문입니다.
사막이 메마른 것은 비가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울창한 밀림은 충분한 물을 담고 있고,
그늘이 있기에 햇빛에도 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메마른 사막은 물이 고일 수 없고,
그늘이 없기에 뜨거운 햇빛에 이슬마저 말라버립니다.
피정에 참석한 분들은 다음 피정에도 참석하기 마련입니다. 피정을 통해서 영적인 갈증을
채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약속이 있었어도 피정이 있으면 약속을 포기하고라도
피정에 참석합니다.
그러나 피정에 관심이 없는 분들은 피정이 있어도 참석하지 않기 마련입니다.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피곤하고, 다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물이 없는 사막에
비가 내리지 않듯이 영적인 갈망이 없는 사람은 더욱더 메말라 가기 마련입니다.
20년 넘게 매일 새벽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동참모임에서도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 되기도 했지만 새벽에 일어나는 기쁨을 알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새벽은 고요하기 마련입니다. 새벽에는 연락이 오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온전히 저만의 시간과 자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 새벽에 기도하고, 묵상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언제나 기쁨입니다.
목사님들이 새벽 예배를 하는 것을 보면서 힘들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스님들의 새벽 예불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는 힘들 수 있겠지만 새벽 예배와 새벽 예불은
지혜의 길이요, 깨달음의 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신문에 늘 후원금을 보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나누십니다. 그분들은 나눔의 기쁨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 몸이 있는 곳에 내 마음도 있다고 합니다. 내 몸이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낸다면,
내 몸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면 우리는 늘 하느님의 은총 속에 있을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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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잠언 3,27-34 루카 8,16-18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은 말씀을 들은 자에 대한 지시사항이라
할 수 있습니다.곧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사항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 8,16)
여기에서 ‘등불’은 하느님 말씀을 비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말씀’이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그릇’은 영혼의 능력을, ‘침상’은 몸을, ‘등경’은 거룩한 교회를 표현한다고
해설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은 세상 만민을 비추고,
진리의 빛으로 집 안에 있는 이들을 밝히며, 모든 사람의 마음을 거룩한 지식으로 채우게 된다.”
그러니 '침상'인 우리의 몸으로 말씀을 가려서는 안 될 일입니다.
또한 '그릇'인 우리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덮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사실 '말씀'은 숨겨 덮어지지도 감추어 가려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마태 5,14)처럼 감추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집안을 가장 잘 비출 수 있는 곳에 거룩한 교회인 '등경'을 올려놓고, 말씀인 '등불'을 켜서
밝혀두어야 할 일입니다.'말씀'은 빛이 되어 온 집 안과 집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비추어
밝혀줄 것입니다.
그 빛은 우리의 뼈와 살을 가르고, 우리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숨겨진 것들을 드러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루카 8,17)
그렇습니다.
이토록 ‘말씀’은 빛이 되어 세상과 우리를 비출 것입니다.
그리고 빛과 진리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말씀의 등불'은 거룩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진정 말씀의 비추임을 받은 영혼은 더욱 더 많은 열매를 맺고 더 밝게
빛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8)
사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지닌 우리를 “세상의 빛”(마태 5,14)이라고 하시며
말씀하십니다.‘너희의 빛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추고 세상의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오늘의 샘 기도>
주님!
말씀을 제 안에 가두어 두거나 제 발 아래에 두지 않게 하소서.
제 한량한 능력으로 당신 말씀의 권능을 덮지 않게 하소서.
아무 것도 당신 말씀보다 낫게 여기지 않게 하시고,
말씀의 빛으로 살고 빛에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소서.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