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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학당 동관
옛 배재학당에서 근대 교육이 싹텄다.
아담하지만 멋지고 당당한 건물에는 체험 교실과 상설 전시실,
기획 전시실, 세미나실이 있다.
정동은 대한민국 전야(前夜)의 풍경과 기억을 더듬어볼 수 있는 역사의 아이콘이다.
1883년 개항한 제물포(濟物浦)와 외국인 선교사 묘역이 있는 한강변 양화진(楊花津)을
우리 몸의 인후부(咽喉部)라고 한다면 정동은 심장부다.
100여 년 전, 개화기 때의 국제도시 정동에 발 디디면 무수한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아주 특별한 장소들과 역사 속 인물들의 행적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내가 나임을 아는 것, 참 쉬운 것 같지만 어렵다.
그것을 알면 곧 기적이 일어난다.
삶을 기적으로 바꾼 역사적 위인들은 하나같이 악조건 속에서
‘내가 나’임을 증명하고 연출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기적이 일어난 현장을 찾아다니며
감동하고 역사 속 위인들을 닮고자 열망한다.
덕수궁(德壽宮) 돌담을 오른편에 두고 걷다가
정동제일교회 앞에서 서소문 쪽으로 방향을 튼다.
야트막한 언덕배기 배재공원이 아담하다.
공원을 지나면 고풍스러운 적벽돌 건물이 500년 넘은 향나무를 품고 서 있다.
주변에 훨씬 더 크고 높은 건물들이 많은데도 작지만 당당한 풍모가 눈길을 끈다.
배재학당 동관(東館)이다.
1984년 배재중·고교가 강동으로 옮겨간 뒤 지금은 역사박물관으로 쓰인다.
왼편 거대한 회화나무 가지는 자유분방하다.
가지 끝에 걸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유로운 지성을 상징하는
학자수(學者樹)의 자태를 음미한다. 터줏대감처럼 터를 지키고 서 있는
아름드리 향나무와 회화나무는 이곳이
본디 독서가들이 대를 물려온 거주지였음을 말해준다.
형조참의를 지낸 안기영(安驥泳, 1819~1881), 영조(英祖, 1694~1776) 때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손자 채동술(蔡東述, 1841~1881) 집터다.
500년이 넘은 이곳 향나무는
시인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이 애지중지했다고 전해진다.
몇 개의 계단을 오르고 오른쪽으로 돌아 박물관 정면과 마주 선다.
좌우 세 개씩의 화강석 배흘림기둥이 받치고 선 출입구를 중심으로 완전한 대칭 구조다.
배재학당 설립자 헨리 다지 아펜젤러
ⓒ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만나는 교훈이다.
마태복음의 한 구절인데
이 문구는 다른 방문객에게는 다소 겉도는 느낌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갓 쓰고 하인까지 대동하고서 학교에 다녔던
개화기 양반 자제들과 신분제 사회의 실상을 생각하면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렇다. 배재학당의 설립자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는
이 땅에 최초로 서양식 근대 교육을 연 선교사다.
그는 교육의 출발점을 스스로 행하는 데서 찾았다.
남(하인)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제 할 일을 다하는 것이 배움의 출발이라고 보았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신인 그는 동료가 포기한 ‘모기와 말라리아의 나라’ 한국에 온다.
그것도 학교를 마치고 결혼한 직후였다.
부부는 일본과 부산을 거쳐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첫발을 디뎠다.
연희전문학교 설립자가 되는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함께였다.
당시 조선에 와 있던 미국 공사 후크는
‘지금 서울은 외국 여자가 살 만한 환경이 못 된다’며
아펜젤러 부부를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6월 20일 다시 제물포에 상륙한 부부는
7월 19일 서울에 입성해 정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감리교 목사였던 그는 전도보다 교육사업에 더 주력하였다.
1885년 8월 3일, 집에서 영어 학교를 열고 이겸라(李謙羅), 고영필(高永弼)
이렇게 두 학생을 받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날이 배재학당의 실질적인 개교기념일인 셈인데,
배재중·고교는 이듬해
고종(高宗, 1852~1919)이 ‘배재학당(培材學堂)’ 현판을 내려준 날짜인 6월 8일을
개교기념일로 삼고 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1875~1965),
한글학자 주시경(周時經, 1876~1914),
시인 김소월, 소설가 나도향(羅稻香, 1902~1926) 등
셀 수 없는 역사적 위인들이 이 배재학당에서 배웠다.
음악, 체육 분야에서도 선구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전인교육과 동아리 중심의 일인일기(一人一技)를 지향하는 배재학당은
‘배재인만의 유전자’로 통한다.
그들의 자부심은 입시 교육 위주의 학교들과는 확연히 다른 데서 출발하였다.
120여 년 전에 이미 영어로 진행된 수업은
생리학, 화학, 음악, 미술, 체육, 연극 등에 걸쳐 다채로웠다.
특히 야구와 럭비를 비롯한 구기 종목에서 배재는 한국 체육의 선구적인 역할을 해왔다.
학생들도 국제적이었다. 조선인과 미국인, 일본인이 함께 배웠던 것이다.
붓과 한지 대신 신기한 연필과 공책을 받아든 학생들은
걸상에 앉아 석판에 분필로 필기하는 서양인 교사와 만났다.
음악 시간에는 피아노가 등장했다. 1
897년부터는 교복을 입고 모자를 썼다. 모두가 처음 접하는 개벽의 순간들이었다.
“그들이 가진 물건 중에 처음 보는 이상스러운 것들이 있었어요.
연필을 처음 구경했다.
글씨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벼루에다 먹을 갈아가지고 먹필로 쓰는 것이지,
그 나무 꼬챙이 같은 것으로 쓴다고 하는 것은 이상스러운 것이었지요.”
배재학당 초창기 학생 신흥우(申興雨, 1883~1959)의 증언이다.
서양 선교사들이 가지고 다니며 쓰는 ‘이상스러운 것’이 바로 연필이었다.
부시맨이 처음 접한 콜라병만큼이나 신기했을 게다.
신흥우는 12세에 이승만, 주시경과 함께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운 민족운동가다.
학생회였던 협성회(協成會)에서는 1896년부터 과외활동으로
매주 토요일 주제 토론회를 열었다.
미국에서 돌아와 배재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던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이 조직했다.
국문과 한문의 섞어 씀에 대해, 아내와 딸이 교육받는 것에 대해,
나라에 철도를 놓는 것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했다.
심지어는 우리나라에서 시급하게 상하원을 설립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토론했다.
군주제 국가에서 공화제를 공론화한 것이다.
이것은 근대 여명기 이 땅에서 시행된 토론 중심 민주교육의 한 경험이었다.
이 협성회 활동은 나중에 자연스럽게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
민중계몽운동으로 발전한다.
2천만 동포 가운데 1,999만 9,999명이 다 죽어 없어진 후에라도
나 하나만은 머리를 높이 들고 앞으로 나아갈 것을
제가끔 마음속 깊이 맹세하고 다시 맹세하고 천만 번 맹세합시다.
그리하여 이 나라를 외국의 침략이 없는 자주독립국가로 굳건한 반석 위에 세웁시다!
청년 이승만은 개화사상에 심취한 진보주의자였다.
그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의 열렬한 행동대원이었다.
청년 이승만은 「협성회보(協成會報)」의 주필이 되어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는 한편,
수천 명이 모인 만민공동회에서의 명연설로 일찌감치 세상의 주목을 받는다.
정국을 이끌던 수구파들로부터는 요시찰인물로 지목된다.
1898년 수구파들은 청년 이승만이 국체를 공화제로 바꾸려 한다며 감옥에 가둔다.
이승만이 정부 전복, 곧 절대왕정을 폐지하고 의회 민주주의를 꾀했다고 본 것이다.
이승만은 감옥으로 면회 온 주시경과 배재학당 동문들이 건네준 권총으로
간수를 위협하고 탈옥한다.
다시 붙잡힌 그는 탈옥수라는 죄목까지 덧붙여져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이승만은 혹독한 고문과 콜레라를 견디며 옥중 도서실을 연다.
그가 7년간 감옥 생활 하면서 집필한 저서가 『독립정신』이다.
청년 이승만의 열정과 희생정신, 투철한 국가관이 녹아들어 있다.
1904년 석방된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일본의 한국 침략 저지를 호소한다.
그러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학업에 매진한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그는 점차 카리스마를 드러내게 된다.
우리 사회에는 지금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공과를 따져
재평가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서양식 근대 교육이 행해졌던 1층 체험 교실로 들어선다.
책걸상이 빼곡히 놓였다. 걸상에 앉아서 칠판 앞 스크린에 흐르는 영상 자료를 본다.
전인교육을 실시했던 아펜젤러의 교육철학이 선명하게 파고든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교실마다 스팀 난방이 작동했다고 한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내부
당시에 사용되던 현판과 유길준이 친필 서명한 『서유견문』과 교과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교실을 나와 상설 전시실로 간다.
고종이 내려준 ‘배재학당’ 현판과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 서명한
『서유견문』 학생들이 배웠던 교과서들이 전시돼 있다.
교과서는 배재학당 인쇄소에서 근로 학생들의 작업으로 발간됐다.
수업료를 낼 수 없는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학교 안에 일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한글과 한문, 영어 이렇게 세 언어를 뜻하는 삼문(三文) 출판사는
교과서 외에도 「독립신문(獨立新聞)」과 「협성회보」도 인쇄했다. 「
협성회보」는 훗날 국내 최초 일간지 「매일신문(每日新聞)」으로 발전한다.
‘명예의 전당’에서는 배재를 거쳐간 각 분야의 인물들과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1925) 초판본을 볼 수 있다. 근대 출판물로서는 처음으로 문화재로 등록된 세상에
단 네 권(한성 총판본 3점과 중앙 총판본 1점)밖에 남아 있지 않은 희귀본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 … ]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전 국민이 애송하는 이 유명한 구절은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1865~1939)의 시 「하늘의 옷감」 가운데
‘그대 발밑에 내 꿈을 깔아드리오니/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라는 구절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당시의 교지 『배재』에는 학생들이 번역한 외국 문학 작품들이 실려 있다.
그 시절 배재학당에서는 세계문학을 발 빠르게 수용하고 있었다.
김소월 연구의 권위자 하버드대학교 데이비드 매캔(David R. McCann, 1946~ ) 교수는
두 차례나 박물관에 찾아와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감격에 젖었다고 한다.
문화는 발신자와 수신자 상호간의 교섭에서 자연스럽게 모방하고
재창조되는 것임을 느끼게 한다.
2층 전시실에는 피아니스트 한동일(韓東一, 1941~ ), 백건우(白建宇, 1946~ )가 쳤다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다.
1864년 독일 블뤼트너 사가 제작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피아노다.
아펜젤러의 일기와 그의 가족들이 남긴 소품들도 정갈하게 전시돼 있다.
아펜젤러는 1902년 전도 여행을 하다가 목포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하면서 순직했다.
시신은 수습하지 못했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이 땅에 바친 위대한 영혼의 소망은 2세에게로 이어졌다. 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배재학당을 이끈 헨리 다지 아펜젤러(Henry Dedge Appenzeller, 1889~1953)가
잠들어 있다.
배재학당 졸업앨범
수학여행 가서 첨성대에 다닥다닥 엉겨붙은 사진
ⓒ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헨리 다지 아펜젤러가 직접 가져온 피아노
독일 블뤼트너 사가 1911년에 제작한 것.
한국에서 현존하는 연주용 피아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졸업 앨범으로 배재학당 120년 이야기를 전하는 방에서는
저마다 추억의 독립 영화 한 편을 찍게 된다.
학교생활을 통해 본 이 땅 100년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개성적인 모습과 꿈을 담은 졸업 앨범에서 식민지 학생들의 우울함 같은 건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서 첨성대에 올라가 벌 떼처럼 엉겨붙은 사진,
안경 낀 학생들만 모여서 찍은 ‘안경당(眼鏡黨) 만세’ 사진,
교복 차림으로 서울의 명소를 찾아다니며 연출한 사진 등은 엉뚱하고 기발하다.
1914년 졸업 앨범에서 순한글 가로쓰기가 첫선을 보인다.
지금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편집 체제다.
배재학당이 얼마나 수평적 교육을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체제는 몇 년 못 가서 한문으로 바뀌고 만다. 일제의 한글 탄압 때문이다.
졸업 앨범 배경에서도 근대 경성의 풍경을 덤으로 감상할 수 있다.
시절은 암울했지만 학생들의 표정은 밝았다.
식민지를 넘어 희망의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젊은 꿈들이 있어서일 게다.
어느 때고 힘겹지 않은 때가 있으랴.
어렵게 학창 시절을 보낸 나이 든 관람객들은 빛바랜 흑백사진 앞에서 서성이며
세월의 더께에 가려 있던 자아를 찾아내고,
견학 온 학생들은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선배들의 학창 시절을 대리 체험한다.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 선교사의 한글 번역으로
배재학당에서 출판한 『천로역정(天路歷程)』 목판본과 목판들을 보세요.
한국 고유의 전통문화를 지켜가면서 크리스토교 사상과 서구 문화를 심어가려는
속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민화를 삽화로 썼고 등장인물들은 소망이, 충직이, 알뜰이, 독실이, 사랑이 등
정겨운 한국 이름들이지요.
아쉽게도 삽화가 담긴 목판들은 사라지고 없다.
그 가치를 알아본 이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겠지요.
언젠가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직접 건물을 보수하고 전시를 기획한 배재대 건축학부 교수,
김종헌 박물관장은 정동 일대에서 덕수궁을 제외하고 1910년대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라고 소개한다.
현대식 빌딩에 둘러싸여 있는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세월의 흐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배재학당은 구한말 전제군주 체제 아래서 민주교육의 장을 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민족교육을, 그 이후에는 전인교육을 펼쳐왔다.
19세기 말 정동은 외교, 정치, 종교, 교육, 문화의 중심이었다.
배재학당은 한국 근대의 심장부였다.
이 박물관 안에는 우리가 일찍이 누렸으나
안타깝게도 지켜내지 못한 전인교육의 한 전형이 담겨 있다.
아펜젤러는 거룩한 교육자의 상징이다.
그는 이 언덕배기에서 어쩌면 평범한 선교사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던
자신의 삶을 기적으로 만들었다.
어수선했던 구한말, 그는 이 땅에서 희망을 보았고 자신의 목숨을 씨앗으로 심었다.
이 박물관에서 그의 교육철학적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다면 기적은
우리 앞에서 늘 현재 진행형이다. 정작 학교법인 배재학당마저도 자신들이 이미 오래전에 밟아온 전인교육의 길 대신 성적 위주의 경쟁 교육에 내몰렸다.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의 분위기, 특히 학부모들의 요구를 언제까지고 몰라라 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 시대는 지덕체에 걸쳐 교양과 품격을 두루 갖춘 인재를 배양하는
교육기관 하나 가질 수 없는 그런 시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