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탄생
강 정
뭔가 속삭이려고 하니 입에서 빨간 꽃이 튀어나왔다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하려 한 것일까 나는 더 이상 나와 같은 종種의
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 머리를 꼬리로 바꾸고, 네 발로 기어다니거나 배를 땅에 문지르며 땅속의 소릴 들으려 했다 꽃이 나
를 먹기를 바랐을 뿐, 누구에게 바칠 요량도, 그 꽃으로 마음속 색깔들을 가리거나 위장할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
은 노래를 불러 입이 지워지게끔 했다
통통 튀는 바위 틈,
새는 날개를 씹어먹고 곰처럼 뛰는구나
왜 돌의 맛은 달콤하고
흙의 입술은 뱀의 등피를 닮았지?
홍수가 난 물가에선 호랑이가 무늬를 지워 백색의 천사처럼 웃네
왜 사람은 두 다리로 선 채
자기가 누구인지 모를까
왜 자기 머리가 진드기처럼 자신의 피를 빨아먹는 줄 모를까
휭휭 도는 바람의 나팔은 쇠를 먹고 자란 아이
그 아이가 이미 다 자라
일곱 빛깔 꼬리로 춤추며 사람의 머리통을 낚는다
누가 죽었대
누굴 죽였대
왜 죽음이 피아노 건반 사이 가느다란 틈새 같은 것인 줄 모를까
둥둥둥 울리면
피아노도 사람도 아닌,
피아노의 뼈대가 지구보다 단단한 우주의 심줄인데,
시간이 거기서 천년만년 돌아 오늘이 바로 우주의 제삿날이고,
어제가 바로 우주의 탄생일이었는데,
흙의 입술을 훔친 곰이 백색 호랑이와 물속에서 뒹구는군
기다란 물줄기가
기다란 그대로 뱀이 되어 날아올라
그걸 봤어?
아니, 보이기 전에 이미 우리 몸에 둘러쳐진 지하의 혁대 같은 거라는 거 몰랐어?
노래가 다 끝난 다음, 집안의 가구를 다 부수어 만든 관 속에 눕기로 했었다 나무가 퉁겨내거나 빨아들이는 소리만
웅장하게 죽음의 성곽을 둘러싸도록, 살던 집이 커다란 돌이 되어 지하 오만 미터에서 파견 나온 바다의 종種들이 만
물의 울음소릴 다 담은 둥그런 종鐘을 만들게 하도록, 나는 내 몸이 피와 살 아닌 식물의 수액과 동물의 어금니로 만
들어졌다는 사실을 어느 종유굴 속에서 고백했었다
종이여, 울려라
돌이여, 노래하라
운석이여, 불타라
바다여, 느긋하게 광분하라
후렴구가 끝나자, 눈이 내렸다 피칠갑되어 아가리 찢긴 신의 입술인 듯, 시커먼 겨울 하늘 한가운데가 찌익 갈라졌
다 분명 내가 날고 있었고, 입엔 바닷물 깊숙한 곳에 헹궈 구슬이 된 지구를 물고 있었다 모든 이에게 나눠줄 폭탄이니,
잘 껴안으면 빛이 만발할 것이고, 그 안에 자기가 묻어 있음을 눈치 못 채는 자는 음속音速으로 분해되어 한낱 더러운
소문으로 귀가 베일 것이니, 물러서 잘 보아라
눈뜬 채 드러누워 네 경추 아래 꼬리 자라는 소릴 잘 들어라
파도가 친다
불의 분노가 물의 낭심에 닿은 것이다
살던 집이 불탄다
물의 환희가 무너진 억장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내 입이 보이는가 아니면 소리가 들리는가
바다가 보이는가 아니면 태양이 울부짖는가
땅끝엔 처음 태어나던 때의 구멍만 있을 뿐, 이 사랑은 천년이 훌쩍 넘어 금빛 초롱 소리로 모든 생물의 뿌리 끝까지
밝힌다
옥상의 페인트 빛깔이 어둠에 섞일 때
- 계간 《문학동네》 2023년 가을호
강정
부산 출생. 1992년 《현대시세계》로 등단.
시집 『처형극장』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키스』 『활』 『귀신』 『백치의 산수』
『그리고 나는 눈먼 자가 되었다』 『커다란 하양으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