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원 베드로 신부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코헬렛 3,1-11 루카 9,18-22
어제 복음에서 헤로데의 의문으로 제기된 예수님의 신원 문제는 오늘 복음으로 이어집니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신 예수님께 제자들이 드린 답변은, 안타깝게도 헤로데가
전해 들은 소문(루카 9,7-9 참조)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아니라,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
(세례자 요한, 엘리야) 또는 ‘되살아난 옛 예언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 임금으로 삼으려고나 하였을 뿐
(요한 6,15 참조), ‘수난을 겪는 메시아’ 곧 백성에게 배척을 받고 돌아가심으로써
그들 모두를 구원하실 구세주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백성의 이러한 몰이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시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살리는 그 길을 방해 없이 끝까지 가시고자
베드로에게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코헬렛의 저자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라고 고백합니다.
마치 오늘 복음의 군중처럼 가끔은 우리도 하느님의 계획을 헤아리지 못하고,
당장의 변화만 바라다 지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도 군중의 몰이해와 외면을 이겨 내는 세월 끝에 성부께서 계획하신 구원을
이루셨고, 성 비오 사제도 오십년이 넘게 오상(五傷)의 고통을 참아 내며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온 힘을 쏟았다면, 우리라고 어찌 그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을 건너뛸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든 일에서 우리를 위한 최선의 때와 방식을 마련해 두셨음을 확신하며
언제나 희망 안에서 이 구원의 길을 힘차게 걸어갑시다.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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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코헬렛 3,1-11 루카 9,18-22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복음서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짧게 보도하지만, 루카 복음에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라는 말이 덧붙여지는 것은, 루카 복음의 지속적인 서술 의도에서 비롯됩니다.
루카 복음 1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루카 복음의 의도는 되도록 많은 사람이
하느님께 돌아와 서로 친교를 이루는 데 있습니다. 루카 복음의 공간적 흐름이
하느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집중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다만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는 길에 십자가는 빠질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 교차하고 있다는 사실이 복음서 안에서 늘 논쟁의 대상이 되고는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른바 승리의 그리스도이셔야 하는데, 누군가에게는 걸림돌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어리석음일 수밖에 없는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겠다고 작정하고 나선 길이 성직자의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수많은 혜택과 위로를 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성직자들이 누리는
모든 혜택과 위로는 그들의 인간적 능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할지라도, 성직자들은 꽤나 풍성한 대접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받고 또 받는 데 익숙해지면, 주고 나누고 함께하는 데 인색해질 수 있다는 것은 제 경험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환경에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어서 아무리 영성 훈련을 한들 제 삶이 풍요로우면
이웃의 배고픔을 어찌 알겠습니까. 제 삶에 부족함이 없으면 하루 끼니가 아쉬운 이들의
형편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과 함께하는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가 되어야 하는 것은 그 자리에 배부른 이만 모일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은 가진 이든 그렇지 못한 이든 모두가
배불리 먹고 마실 수 있는 잔치의 자리입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께서는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자리를 마련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십니다.
특정 계층만을 위한 그리스도께서는 계시지 않습니다.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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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코헬렛 3,1-11 루카 9,18-22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전에 ‘사랑은 뭐길래!’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극중에서 엄격한 남편에게 순응하면서 지내는
아내가 혼자서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 바람이 부는
날엔 바람으로 비 오면 비에 젖어 사는 거지.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 한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무슨 재미 그런 게 덤이잖소.”
제목은 산스크리트어 ’타타타‘입니다.
우리말로는 ‘그래 그런 거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한문으로는 진여(眞如)라고 합니다.
엄격한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자녀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자상한 아내는 남편을 잘 알았습니다. 자녀들의 꿈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아들이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딸이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응원해 주었습니다. 드라마 제목처럼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모든 것이 ‘때’가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라고 합니다. 열흘 넘게 피는 꽃이 없고, 권력이 10년 이상 가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도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겸손’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한 자매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와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세례명을 바꾸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사연은 자신이 주보성인으로
모시는 성인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게 살았고,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삶이 힘들고, 어려운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즐겁고, 재미있게
살았던 성인으로, 예술 분야에서 성공한 성인으로 세례명을 바꾸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함께 기도하고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 뒤로 그 자매님이 저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저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이 제게 말하는 겁니다. ‘저요, 세례명 바꾸지 않을래요.’ 그러면서
그동안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좋은 일도 많았었고, 주보성인의 삶을 따르기 보다는
세상의 명예와 자리를 너무 따라갔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앞으로 주보성인처럼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살겠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주변을 보니 다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었다고 말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십자가가
자신의 것보다 더 가볍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매님처럼 때로 우리의 십자가를 던져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굴레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럴 때 구상 시인의 ‘꽃자리’라는 시를 떠올립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 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우리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 너의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지금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구원의 강을 건너게 해주는 고마운 다리가 될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