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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교회 >
어느 곳에나 무관심이 팽배해 있다. 아무도 설교 내용이 참인지 거짓인지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어떤 주제든지 설교면 그만이다. 단,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 "Preface," The Sword and the Trowel(1888 complete volume), iii. >
펄전은 100여 년 전에 이 글을 썼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20세기 말의 복음주의 상태를 묘사하는 듯하다.
지난 여름 나는 런던에 있는 그의 무덤-도로와 큰 빌딩 사이의 공동 묘지에 뒤섞여 있는 돌 납골당-을 찾았다. 누군가에게 안내를 부탁하지 않았으면, 나는 그의 무덤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스펄전과 그의 아내의 이름이 돌 위에 새겨져 있었으나,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아마 일반 관광객들은 이 돌 납골당을 그냥 지나쳐 버리거나(주변에는 더 크고 인상적인 묘소들이 많이 있었다), 혹 우연히 볼지라도 그곳이 당시 영국 수상보다 더 유명했고 더 영향력이 컸던 인물의 묘소라는 사실은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
'복음'이라는 말이 오늘날은 심하게 잘못 쓰이고 있다. 다른 책에서 나는 복음에 관한 오늘날의 몇몇 오류를 자세히 설명했다.
< The Gospel According to Jesus, second ed. (Grand Rapids, Mich. : Zondervan, 1994) ; Faith Works : The Gospel According to the Apostles(Dallas, Tex. : Word, 1993). > 여기서는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인간 중심적 용어로 복음을 다시 정의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의에 집중하는 대신 인간의 필요에 관하여 말한다. 그러나 복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의에 관한 메시지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의라는 낱말과 그 파생어는 로마서에 적어도 35번 나온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메시지의 출발점이며 주제이다. 죄 짓는 인간들이 거부하는 하나님의 의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성취하셨다. 이 의는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는 죄인에게 전가되었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실제적인 방법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에서 전개하는 복음의 요점이다.
'하나님의 의'에는 두 가지 함축 의미가 있다. 첫번째 뜻으로, 하나님의 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증오를 말한다. 1500년대 초,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블랙 수도원(Black Cloister)에서 이 구절을 읽고 앉아 있었다. 훗날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은 내 마음에 천둥 번개와 같았다. 나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계시되었다는 말을 읽었을 때 온 마음으로 바울을 미워했다." < Table Talk, Theodore G. Tappert, ed. in Helmut T. Lehmann, gen. ed., Luther's Works, 55 vols. (Philadelphia : Fortress, 1967), 54 : 308-9. > 루터는 하나님의 의가 영생을 가로막는 난공불락의 방해물이라고 보았다. 루터는 자신의 죄악됨을 뼈저리게 깨달았고 그 죄악된 상태 때문에 의로우신 하나님의 받아 주심을 얻을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루터는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절망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17절에는 의(義)의 두번째 함축 의미가 있다.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말한다. 이 의는 믿는 죄인의 것으로 전가된다(롬 4:24). 마침내 루터가 의라는 낱말이 담고 있는 이 뜻을 이해했을 때, 그는 복음의 참된 의미를 알았다. 그리고 그 발견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초래했다.
이 교리는 칭의로 알려져 있다. 이는, 하나님이 신자의 원장의 자산 부분에 그리스도의 모든 완전한 의를 공짜로 넣어 주시고 부채 부분에 있는 모든 죄를 없애 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믿는 자를 보실 때, 그 사람이 마치 그리스도처럼 온전히 의로운 것처럼 보신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신다"(롬 4:5).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으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손상하지 않으시고 죄인을 의롭다 하신다.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6).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다. 이것이 바로 그 메시지가 복된 소식인 이유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진노를 계시한다
그러나 복음이 모두 복된 소식은 아니다. 사실상 그리스도로부터 돌이키는 자들에게는 전혀 복된 소식이 아니다. 바울의 복음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임을 주목하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그런 후에 바울은 모든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체계적으로 입증하는 데 꼬박 2장 이상을 할애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현대의 복음 제시에서 거의 완전히 빠져 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거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시류에 맞지 않는다. 오늘날 전형적인 복음 제시는 바울의 출발점과 정반대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좇아 나타나나니" 하고 썼다. 그러나 현대 복음 전도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셔서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하는 말로 시작된다.
이용자에게 친절한 운동의 문헌을 읽어 보라. 그러면 적극적인 어조로 모든 메시지를 담는 데 열중하는 것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이 운동을 주도하는 한 목사는 이렇게 쓴다.
교인이 아닌 (베이비) 붐 세대들이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흠 있다고 하고 심지어 죄를 지었다고 인정할지라도, 공적인 자리에 앉아 자신들을 벌레 같은 인간과 불운한 사람과 타락한 피조물과 전적으로 타락한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라고 표현하는 말은 듣지 않을 것이다.......
베이붐 세대들의 목사로서 나는 그들이 소극적인 메시지라도 적극적인 용어로 제시된 것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한다. 이는 사물들을 걸러내는 격자이다. 그래서 우리가 적극적인 말을 할 수 없다면, 심지어 부정적인 시사 문제를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을 적극적인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면, 베이비 붐 세대들은 아마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 드릴 때 쓰는 어조에 매우 조심해야 한다......나는 일부러 내가 내 연령 집단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항상 적극적인 어조를 띠고 있는지 확인하는 습관을 들였다.
< Murren, 215-17. >
최근의 교회 성장 서적에 나오는 이런 논평은 거의 언제나,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타협이 아니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확신시키는 말을 담는다. 그리고 이것은 예외가 없다. 위에서 인용된 저자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나는 우리가 모두 타락한 죄인이므로 필사적으로 구원받아야 한다고 하는 성경의 전제를 포기하고 있지 않다. 분명 우리는 타락했다. 하지만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으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보내실 정도로 우리를 고귀하게 보셨다는 것을 역시 보여 준다." < Ibid. >
그는 이어서 이 세대에 효과적으로 사역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항상 말을 '낙관적'으로 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다시 말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베이비 붐 세대에 속하는 꽤 많은 사람들에게 사역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며, 또 베이비 붐 세대가 습관적으로 소극적인 진리에 고개를 돌린다고 하는 그 저자의 근거 없는 일반론과 의견을 달리한다. 분명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소극적인 것을 회개할 동기로 받아들여야 하고 사실 그렇게 할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모두 타락한 죄인이므로 필사적으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말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가......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라고 하는 말과 같지 않다. 물론 두 문장 모두 옳다. 하지만 복음은 두 측면이 다 있어야 완전하다. 오늘날 설교자들은 바울의 이런 출발점 즉, 인간의 필요에 대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종종 빠뜨린다.
앞의 어느 장에서 지적했듯이,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진리와 적극적인 것만 전하는 복음 제시를 종합할 길은 없다. 믿지 않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진리를 '낙관적' 어조로 선포할 길은 없다. 그 결과 이들 교회가 전파하는 복음은 종종 하나님의 진노라는 현실이 제거되곤 한다. 그리고 가장 고의적으로 비난을 해대는 곳은 바울이 복음을 제시하기 시작하는 대목이다.
영원히 낙관적이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로마서 1장과 누가복음 16장과 히브리서의 모든 경고 구절과 구약 핵심 진리 가운데 상당 부분과 예수님의 말씀 절반을 포함하여 성경의 결정적인 부분을 무시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가혹하고 언제나 소극적이고 압제적이고 우울한 설교를 선호한다는 인상을 갖지 말라. 물론 나는 그런 설교를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 번 지적했듯이, 소극적인 것과 적극적인 것을 성경적으로 균형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역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최근에 유행하는 전략은 복음이 전적으로 적극적인 것이 되도록 구성하려고 한다. 이것은 성경적 메시지가 될 수 없다. 이것은 분명히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이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라는 위협을 첫째 요점으로 살폈다.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라는 두려운 현실과 인간의 타락이라는 절망적인 가증스러운 상태를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에 흔들림이 없었다. 이런 주제를 끌어들이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이런 주제를 끌어들였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데 결정적인 핵심이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은 하나님의 완전함 속에 균형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께 의로운 분노가 없다면,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떠나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해진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시 45:7). 더욱이 하나님은 타락한 죄인을 사랑하시는 것만큼 완전하고 철저하게 죄를 미워하신다. 후자가 없이는 전자가 완전히 공허하다.
종종 진노와 자비라는 쌍둥이 강조점은 병행한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이 구절은 좀더 친숙한 말인 요한복음 3:16과 같은 장에 나온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엄한지 깨닫지 않고서는 요한복음 3:16에 나오는 '멸망치 않고'라는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성경의 부차적인 주제가 아니다. 신약과 구약은 도처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강조한다. 시편 7:11, 12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다'는 구절은 구약에 거듭 나온다(예. 삿 2:14, 20; 3:8; 10:7; 삼하 6:7; 24:1; 왕하 13:3; 시 106:40). 신약도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경고로 가득 차 있다(예. 롬 2:5; 3:5; 9:22; 엡 5:6; 골 3:6; 계 14:10). 히브리서 기자는 간단히 이렇게 말한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 12:29; 참고. 신 4:24; 9:3).
이런 진리들이 우리로 안락하다거나 자신만만하게 느끼도록 한다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진리들은 호된 두려움과 무서움을 우리에게 가득 차게 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복음이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무서움을 불러일으킬 때에만 올바로 평가될 수 있다. 왜냐하면 복음은 참으로 복된 소식이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잠 14:26).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14: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15: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19:23).
시대가 다르면 메시지가 달라야 한다?
오늘날 전해야 하는 복음은 바울이 일생을 바쳐 전한 바로 그 메시지이다. 바울은 교회에 복음을 가지고 장난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복음을 바꾸지 말라고 엄숙히 경고했다(갈 1:6-9). 교회사는 자기 시대에 맞게 메시지를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진리를 오염시키고 자신을 파멸시키고 만 사람들의 예로 점철되어 있다. 교회를 '이용자에게 친절한' 교회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 대부분에게는 이런 식으로 복음을 왜곡할 의도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을 즐겁게 하고 매력적인 메시지에 대한 자신들의 욕망이 참된 복음과 전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의 운동이 힘을 모을수록, 그들이 백 년 전 모더니스트들이 걸었던 그 길로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은 점점 더 분명해진다.
교회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있다면, 시대가 다르고 사회가 다르다고 해서 다른 메시지를 전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순전한 복음 말고 다른 것을 전파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한다.
찰스 스펄전은 자기 시대의 모더니스트들이 "금세기(아마 이번 달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를 위하여 만든 믿음" < "Attempts at the Impossible," The Sword and the Trowel(Decem-ber 1888), 619. > 을 고안하려 하였다고 말했다. 스펄전은 이렇게 썼다.
진보적 복음이라는 개념이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던 것 같다. 우리에게는 이 개념이 터무니없는 말과 참람한 말을 아무렇게나 섞어 놓은 것이다. 복음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영원한 구원에 효과를 드러내는 지금 복음을 바꾸려 하는 것은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같다. 그리고 복음은 모든 지혜를 갖고 계시며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계시이므로, 그 복음을 개선하려고 하는 것은 뻔뻔스러운 짓처럼 보인다. 이처럼 주제넘는 일을 스스로 맡은 신사들을 마음에 떠올릴 때, 조소가 터지려 한다. 햇빛을 낫게 만들겠다고 하는 두더지의 제안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세기마다 어떤 복음이 필요하다고 참으로 믿는가? 그렇지 않으면 50년마다 어떤 종교가 필요하다고 믿는가? < "Progressive Theology," The Sword and the Trowel(April 1888), 157-58. >
스펄전은, 변하는 세상에 '적합한' 인물로 환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 이상 신실할 수 없고 신실하려고 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깨달았다. 그는 헨리 발리(Henry Varley)가 Word and Work라는 정기 간행물의 편집장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에 찬성의 뜻을 보이면서 그 편지의 일부를 인용했다. 발리는 이렇게 썼다. "변하지 않는 계시는 '변화가 그 유행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시대에 비하여 그다지 빠르지 않다. 그러므로 '건전한 말씀을 굳게 붙드는 일' 그리고 '성도들에게 단번에 전해 주신 신앙을'......진지하게 주장하는 일이 더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 "Notes," The Sword and the Trowel(August 1888), 445에서 인용함. 여러 해 전, 도살꾼이었다가 평신도 복음 전도자가 된 발리는 무디(D. L. Moody)가 영국을 처음 방문할 때 무디를 도울 책임을 진 중요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발리와 스펄전은 매우 다른 전통에서 나왔는데, 발리는 플리머스 형제단이었다. 여러 해 지나서, 스펄전은 플리머스 형제단의 배타주의적 경향을 거리낌없이 비판했다. 그러나 발리가 편집장에게 보내는 이 길고 유창한 편지에서 스펄전을 변호한 것은 내리막길 논쟁의 중대한 시점 가운데 하나였다. >
변화가 19세기의 유행이라면, 오늘날은 얼마나 더하겠는가? 이전의 어떤 그리스도인 세대보다 우리는 마음을 써서 우리에게 맡기신 보화를 지켜야 한다(딤후 1:14). 그 보화를 흔들리는 세상의 일시적인 변덕과 환상과 바꾸지 말자.
복음은 설득력 있고 진지하고 분명하게 전파해야 한다. 분명 독특한 지적 재능과 창의적 재능을 가진 설교자와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자신의 의사 전달 기술을 신중한 복음 제시에 응용해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다. 새롭고 풍성하고 설득력 있고 재미있기를 원하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다. 참으로 복음에 관하여 열정이 일어나고 복음에 헌신된 설교자라면 자연스럽게 그런 특징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항상 메시지에 초점을 둘 것이지 스타일에 초점을 두지 말라. 우리는 복음을 세상에 전할 우리의 유일한 메시지로 삼아야 한다. 결국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복음이지, 인간의 창의적인 태도나 '이용자에게 친절한 태도'나 교묘한 기법이나 현대의 방법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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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오바고의 바울
<레오바고의 바울 >
지나간 시절 (내리막길에 서 있는 설교자들은) 존경할 만하고 현명하고 온건하고 학구적인 사람이라는 느낌을 남에게 주는 데 목표를 두었고, 따라서 그들은 출발할 때 갖고 있던 청교도의 가르침을 버리고 자신들의 가르침을 약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국교를 반대하는 강력한 원인이었던 신령한 생활은 퇴락하여 거의 죽음의 문턱에까지 다다랐다......애석하다! 많은 사람이 퇴락하고 있는 그 세대를 마취시켰던 독잔을 향하여 되돌아가고 있다.
찰스 스펄전
< "Another Word Concerning the Down-Grade," The Sword and the Trowel(August 1887), 398. >
화적 적합성'(cultural relevance)이 강력한 설교의 비밀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아덴에서 펼친 바울의 사역을, 바울이 자신의 메시지와 방법론을 자신이 사역하는 문화에 맞게 고친 제일 좋은 예로 종종 지적한다. 그들은, 아레오바고에서 전한 바울의 설교가 시장 지향적 사역에 대한 파라다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첫눈에 봐서는, 그들에게 정당한 논거가 하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아덴의 지적인 엘리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 말로 그 시인과 철학자의 말을 즉석에서 인용하며 그들의 대화 방법(공개적 논쟁)을 말씀 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이것은 '상황화'와 시장 지향적 방법론의 적합한 모범이 아닌가? 그래서 사도행전 17:16-33은 현대 교회 마케팅 운동을 알리는 데 중요한 본문이 된다.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사도행전 17장의 전반부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어떻게 해서 달아나게 되었는지 서술한다. 베뢰아에 사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을 바닷가로 몰래 빠져 나가게 하여 멀리 아덴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15절).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남아 있었는데, 바울은 아덴에서 합류하자고 그들에게 전갈했다.
그래서 바울은 아덴에 홀로 있으면서 디모데와 실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이는 바울에게 최악의 형편이었을 것이다. 바울은 다른 때에도 고독감을 느꼈었다(참고. 딤후 4:9-22).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한 사역은 핍박과 배척의 역사로 점철된 길다란 연대기였다. 이제 바울은, 폭넓고 고상한 문화를 갖고 있지만 지극히 이교적인 도시에서 홀로 지냈다.
성경은 이 시점에서 바울의 감정이 어떠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바울이 영적으로 낙담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라. 바울의 서신은 그가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렇게 썼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8, 9). 같은 서신에서 또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12:10). 바울은 연약한 터수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아덴에 풀어 펼치는 도구가 될 참이었다.
한 도성과 맞선 한 사람
바울이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 훈련을 받고 자란 사실을 기억하라.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행 22:3).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5-6). 바울은 로마 시민으로 군사 문제와 정치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이 자라고 훈련 받았던 다소는 매우 세계적인 곳이어서, 바울은 풍부한 교육을 받아 로마 제국에서 거의 모든 문화에 적응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다. 수세기 동안 지성계와 예술계의 중심이었던 아덴에서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바울은 헬라 문화와 예절과 종교와 예술과 철학을 샅샅이 알고 있었다. 그는 박식하고 여행을 많이 한 학자였다. 하나님의 계획으로 바울은 전생애에 걸쳐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 잘 대처하도록 준비되었다.
기원 4, 5세기 전에 많은 사람은 아덴을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로 보았다. 아덴 문화의 여러 측면은 비할 데가 없었다. 아덴의 예술과 문학과 건축과 철학은 정상에 이르렀다. 헬라 제국의 황금 시대에 아덴이 보여 주었던 그런 분야에서 그처럼 찬란한 영광을 성취한 도시는 역사에 없었다. 아덴은 아가야 지방에 있었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고린도가 아가야 지방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로마가 정치 중심지였듯이 아덴은 여전히 문화와 지성 세계의 중심지였다. 아덴은 때때로 세계의 대학으로 언급되곤 했다. 세상의 모든 위대한 지성인이 그곳에 모였다.
아덴은 헬라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고향이다. 아덴에 있는 모든 공공 건물은 신들의 신전이었다. 예를 들어 공공 기록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는 신들의 어머니에게 헌당되었다. 시의회 건물의 중앙 장식물은 아폴로의 우상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는 속담으로 이런 것이 있었다. "아덴에서 사람보다 신을 찾는 것이 더 쉽다." 아덴은 뼛속까지 이교적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에 대하여 신을 모셨지만, 참되신 한 분 하나님은 알지 못했다.
아덴이 바울에게 얼마나 감명을 주었는지 주목하는 일은 재미있다. 문화적 교육적 배경으로 보아 아마 바울은 아덴을 보고 싶어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도시는 바울과 같은 학자의 관심을 끌 만큼 고대 성전과 찬란한 예술 작품과 장대한 건물과 숭고한 조각과 사람을 매혹시키는 웅변가와 재간 있는 철학자와 장대한 광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바울 시대에는 건축물의 대리석과 황금이 여전히 번쩍이고 있었다.
아덴에 대한 바울의 반응은 실제로 어떠했는가?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행 17:16). 바울은 입이 쩍 벌어지게 하는 모든 장소에 놀라기는커녕, 그곳을 우상으로 가득 찬 도시로밖에 보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매우 괴로웠다.
19세기의 한 성경 사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바울의 발치에는 테세이온(Theseion, 시장 근처에 있는 볼 만한 대리석 신전)이 있고 오른편에는 찬란한 신전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아크로폴리스가 있었다. 그런 주위 환경은 오늘날 교육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강한 흥미를 돋굴 것이다. 성 바울이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그의 시선은 타락한 도시를 여전히 장식하고 있는 정밀하고 사랑스러운 예술 작품에 쏠렸을 것이 틀림없다. 이와 같이 바울 앞에 예술 작품들이 펼쳐졌다. (19세기 인문주의자들은 힘들이면서 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조각들을 모으고 있다.) 셈족인 성 바울은 이 모든 것에서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했다. 그에게는 그것이 예술과 인간의 고안으로 새겨진 금이나 은이나 돌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눈길을 무시하던 한 시대의 작품이었다.
< F. C. Conybeare, "Areopagus," A Dictionary of the Bible, James Hasting, ed.(New York : Scribner's, 1898), 1 : 144. >
바울 시대에 살고 있던 한 저술가는 아덴을 방문하고 그 도시의 영광에 관하여 책 여섯 권을 썼다. 만일 바울이 여행담을 쓰고 있었다면, 간단히 '이 도시는 우상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끝이다. 분명 바울은 머리가 둔하거나 무감각하지 않았다. 바울은 아덴 문화를 감상할 만한 지식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이 사람은 그런 도시에 이상적으로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좀더 큰 소명이 있었고 관광 여행이나 호기심이나 학문 조사보다 심각한 일이 있었다. 바울은 그 도시의 번쩍거리는 외관이나 잘 차려 입고 잘 배운 아덴의 지성인 정도만 보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 없이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사람들을 보았다.
아덴은 바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마음에 분하여'라는 구절은 강한 흥분을 나타내는 헬라어 파로크수노(paroxun ,'성난')를 사용한다. paroxysm이라는 영어는 이 어근에서 나온 것이다. 바울은 우상 숭배가 널리 퍼져 있는 것을 보고 슬프고 괴롭고 분개하고 화가 치밀었다. 바울은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만 정당하게 속한 영광을 돌 우상에게 돌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저자에 선 바울
바울은 그 동안 사역한 모든 도시에서 실제로 행했던 대로 행했다. 바울은 회당과 저자로 가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17절은 이렇게 말한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바울의 접근법은 직설적이고 대면적인 복음 전도였다. 바울은 지역 사회 설문 조사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는 특별한 조사를 행하지 않았다. 복음화 위원회를 결성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회당과 저자로 가서 누구에게든 전파했다.
'경건한 사람들'(God-fearing Gentiles,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은 회당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여호와에 대해 알고 그 분을 경외할 정도로 그 분을 믿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렇게 바울은 유대인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과 지독한 이교도에게 사역하고 있었다. 마케팅 초점이나 목표 집단은 없었다. 바울은 소아시아에서 두루 행했던 것처럼 어디서고 진리를 선포했다.
아덴에서는 저자를 아고라(Agora)라고 했다. 이는 아덴 사람들의 모든 활동의 중심지였다. 고대 도시의 남쪽 끝에 있는 이 저자는 아레오바고라고 하는 언덕 아래 있었다. 남동쪽에는 큰 아크로폴리스, 즉 아덴의 고지가 어렴풋이 보인다. 이곳에는 바울이 보았던 그 때 이미 500년이나 된 장대한 대리석 건물인 큼직한 파르테논을 포함하여 입이 벌어질 만한 신전들이 있었다.
아고라는 모든 공공 건물의 중앙에 있는 큰 마당이었다. 거기 큰 콜로네이드 아래 사람들이 작은 상점과 노점을 세우곤 했다. 행상인들은 자신의 상품을 소매로 팔곤 했다. 농부들은 작물과 가축을 팔려고 가져 왔다. 손일 하는 사람들은 고용해 달라고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거기는 언제나 분주한 곳이었다. 아마 오늘날 거기에 해당하는 것을 들라면 도시 광장이나 도시 쇼핑 센터의 중심지쯤 될 것이다. 저자의 중앙에는 철학자들이 모여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려고 논쟁을 벌이곤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이은 소요학파의 선생, 의술 전문가, 마술사, 도부꾼, 거리의 온갖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이 있었고, 거기서 달콤한 말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
바울은 이곳을 말씀을 전파할 이상적인 장소로 보았다. 성경은 바울이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쟁론했다고 말한다. 바울은 어떤 형식을 빌려 말했을까? 18절은 바울이 복음을 전파했다고 말한다. 바울은 '예수와 부활'에 관하여 전파하고 있었다. 즉 전형적으로 바울다운 사역을 벌이고 있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아덴 같은 도시에 영향을 주기를 바랄 수 있는가? 인간의 관점에서 바울은 말 그대로 수세기에 걸친 전통적인 이교와-그리고 그 당시의 지적인 이교와-홀로 맞서고 있었다. 바울은 저자에 서서 예수와 부활에 관하여 전파함으로 무엇을 성취하기를 바랄 수 있었겠는가? 마케팅 전문가는 이런 질문을 던졌을 법하지만, 바울은 그러지 않았다. 바울은 홀로 한 도시와 맞서고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주요 도시에서 하나님의 능력, 즉 복음을 알릴 소리로 보았다. 바울은 아고라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함으로써 아덴에 하나님의 능력을 열어 보이고 있다고 믿었다. 그 능력의 발휘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었다.
사도 대 철학자
바울은 곧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17:18).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재치 있고 적절하게 말하는 것에 인상을 받기는커녕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18절) 하고 말했다. '말장이'라는 말은 헬라어 스페르모로고스(spermologos)인데, 말 그대로 '씨앗 쪼는 자'이다. 이 말은 밭 고랑에서 씨를 쪼아 먹는 새를 가리켰다. 그러니 이 말은 바울과 그의 메시지에 대한 조롱이었다. 분명 아덴 지성인들은 바울의 박식함이나 영리함에 꿈쩍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바울은 관심을 끌었고 두 집단의 철학자들의 호기심을 부추겼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4세기 전 에피쿠로스(Epicurus)가 세웠다. 이 철학자들은, 모든 것이 우연히 일어난다고 믿었다. 그들의 체계에는 주권적인 신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든 것의 결과가 확실하지 않다고 믿었다. 그들은 또한 죽음이 인간 실존의 끝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쾌락이 인생에서 자연적 목적이며 최고 선(最高善)이라고 가르쳤다(물론 이 철학자들은 참된 쾌락이 올바른 생활에서만 발견된다고 강조했고 그래서 매우 도덕적이었다). 텔레비전에서 널리 방영된 적이 있는 한 맥주 선전은 타락한 에피쿠로스주의를 반영했다. "한번 둘러보기만 하라. 그래서 충족시킬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거머쥐라." 현대 실존주의는 방탕한 에피쿠로스주의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바울을 주목한 또 한 집단은 스토아 학파였다. 그들의 철학은 많은 점에서 에피쿠로스 학파와 정반대였다. 그들은 범신론적 운명론자였다. 그들은 모든 것이 신이며 신이 원하므로 모든 것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달리, 스토아 학파는 매우 박애주의적이었다. 그들은 극단적인 범신론을 내세웠으므로, 모든 사람을 신으로 대접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철학은 매우 이타적이고 자비롭고 관대했다. 물론 우리는 무덤덤하게 고난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을 일러금욕주의자(stoic)라는 말을 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스토아 학파의 운명론이, 일어나는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는 생각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 이교 철학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씨앗 쪼는 자라고 하면서 그를 노골적으로 조롱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메시지에 빨려들었다.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18절). 이 사람들이 '신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한 것은 분명 흥미롭다. 하지만 그들은 '부활'(아나스타시스)이라는 말을 오해했던 것 같다. 그들은 버릇처럼 모든 것을 신으로 의인화하곤 했으므로, 바울이 아나스타시아라는 여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예를 들어 경건, 자비, 겸손의 신이 있었다. 그러니 부활의 여신으로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아마 그들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을 잘못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전제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울의 말을 더 듣고자 했다.
설교자와 학자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17:19-20). 그들이 죄를 깨닫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바울은 신기한 것을 말하는 괴짜 철학자였다. 이는 그들에게 기분 전환에 불과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17:21). 바울에 관한 무엇이 그들의 호기심을 사로잡았고,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로 붙들어 갔다.
아레오바고는 아덴 철학자들의 법정이었다. 헬라어 아레오파구스(areopagus)는 '아레스의 언덕'을 뜻한다. 아레스에 해당하는 로마 이름은 마르스인데, 그러므로 이 법정이 열리는 장소의 라틴어식 이름은 마르스 언덕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섰다'(21절)고 말할 때, 일차적으로는 철학자들의 법정을 가리켰지 언덕을 가리키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임은 언덕이나 그 근처에서 있었다. 아레오바고 법정은 아덴의 최고 재판관이었던 적어도 30명의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항소 법원처럼 형사 사건과 민사 사건을 심판했다. 그러나 그보다 그들은 아덴 철학의 수호자였다. 그들은 새로운 가르침이 신성 모독으로 위법한 것인지 결정하려고 그 의견을 들었다. 분명 이 철학자들은 심판관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듣고서 그가 선포하고 있는 '이방 신들'이 이미 만신전에 있는 모든 신들에 낄 수 있는지 결정해 주기를 바랐다.
얼마나 멋진 기회인가! 실제로 이 사람들은 그 도시의 최고 법정 앞에 바울을 끌고 갔고 그에게 무엇을 전파하고 있었는지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바울이 바라던 상황이었고, 바울은 이 기회를 매우 잘 이용했다.
물론 이것이 바울이 아덴에서 한 유일한 설교도 아니고 처음 설교도 아니었다. 본문은 바울이 얼마 동안 회당과 저자에서 설교하고 있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성경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설교도 없다. 그러나 아레오바고에서 전한 이 메시지는 바울이 전파한 방식을 살펴볼 수 있게 하는 흥미로운 통찰력을 담고 있다. 몇 가지 주목할 만한 특색이 이 메시지를 복음 전파의 독특한 모델로 만든다.
바울은 정중했지만 정면으로 말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22절). 흠정역은 마지막 구절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지나치게 미신적이도다"라고 번역한다. 이 번역에 관하여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다.
바울은 흠정역처럼 '너무 미신적이도다' 하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시작부터 필요 없이 그들을 화나게 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바울은 '너희가 무식하게 섬기는 것을'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매우 사려가 깊어서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생각이 깊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의 바르게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그들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 "By All Means Save Some," The Metropolitan Tabernacle Pulpit, Vol. 20(London : Passmore and Alabaster, 1874), 248. >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한 가지 합당한 뜻에서 바울은 자신이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에 맞게 방법을 고쳤다.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이 되었고 아덴에서는 헬라인이 되었다. 바울은 이 철학자들의 지위를 크게 존중하면서 그들에게 말했다. 바울은 이 철학자들이 다스리는 도시의 시민이 된 것처럼 공손하게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23절). 바울이 그들을 대하는 솜씨를 주목하라.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치는 제단을 주목하고서, 그들의 종교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 신에 대해서도 확실한 지식을 그들에게 줄 수 없다는 강력한 요점을 드러내는 데 그 제단을 써 먹었다. 바울은 그런 단이 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한다는 뜻임을 넌지시 드러내 보였다. 분명 바울은 단에 새긴 비명을 그들이 영적 무지를 스스로 증거하는 표로 보았다.
바울은 능란하고 예의 바르고 우호적인 말로 메시지를 구성했다("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하지만 그는 요점을 곧장 지적했다("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담대한 마음으로 바울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 관한 진리를 자신이 알려 줄 것이라고 곧바로 확언했다. 교묘하게 티를 내거나 조심스러운 수사법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곧장 할 말을 들고 나왔다. 그처럼 독단적인 접근법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흔치 않은 일이었다. 사실 아덴의 가장 뛰어난 지성을 대표하고 있던 이 사람들에게는 그런 접근법이 상당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태도를 늦추거나 확신을 잃거나 복음의 권위를 약하게 하려 하지 않았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담대하게 말했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 드리는 이 단은 무엇이었는가? 실제로 아덴에는 이런 단이 많았다. 바울 시대보다 600년 전에 아덴은 무서운 전염병으로 혼이 났었다. 수백 명이 병들어 죽었고, 도시는 절망적이었다. 크레테 출신의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라는 유명한 시인은 전염병을 일으킨 신들이 누구든지 아무튼 그 신과 평화롭게 지내려고 구상했다. 이 시인은 아레오바고에 가서 한 무리의 양떼를 풀어 놓았다. 이 도시에 양들을 놓아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하려는 계획이었다. 양들이 누울 때, 가장 가까운 신전의 신에게 이 양을 바칠 작정이었다. 생각인즉슨 화가 난 신들이 그 양을 자신에게 끌고 가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양들을 풀어 놓았을 때, 많은 양이 신전이 없는 곳에 누웠다. 에피메니데스는 아무튼 양을 희생 제사로 드리려고 양들이 누워 있는 곳마다 신전을 세우기로 하였는데, 이는 잘 모르는 신들을 무시하지 않으려는 처사였다. 이들이 이름 없는 신들이므로,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단과 신전을 세워 바쳤다. 바울이 겨냥한 것은 이 단 가운데 하나가 분명했다.
바울은 담대하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알지 못하는 신을 안다. 그 분이 누구신지 내가 알게 하겠다." 그런 후에 바울은 큰 권위를 갖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주 분명하고 철저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바울은 복음을 손상하지 않고 그들에게 말했다
바울은 먼저 창조를 들어 메시지를 곧바로 전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 17:24-25). 이 말에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가 풍성하게 담겨 있다. 이 진리는 헬라의 종교적 신념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의 민감한 감정을 피해 가거나 그들이 듣기 싫어할 만한 진리를 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모든 신들은 인간이 만든 신전에 거하고, 그들은 사람과 같은 실체이므로 자신이 서술하고 있던 초월적인 최고 존재와 전혀 달랐다. 이 사람들은 교육을 잘 받았고 틀림없이 히브리의 하나님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배타성에 관하여 알았다("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 5). 그들은 그 하나님의 첫계명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 신 5:7)임을 알았다. 확실히 바울이 말을 하자마자, 이 사람들은 바울이 히브리 사람들이 경배하는 그 하나님을 선포하고 있음을 알았고 그와 관련된 문제들을 깨달았을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했다. 이 하나님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셨다"(행 17:24). 그 분은 모든 생명의 유지자이시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25절). 그 분은 주권자이시다. "천지의 주재시니"(24절).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26절). 그리고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27절).
게다가 바울은 그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이 사람들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기"(27절)를 원하신다고 했다. 바울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도덕적 의무라고 이 철학자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만일 그 하나님이 참으로 주권적이며 전능한 창조주시며 우리로 자신을 찾기를 바라신다면, 그 분을 찾지 않는 것은 죄이다. 이 철학자들은 이 진리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바울이 한 분 참되신 하나님을 찾고 경배하라는 분명한 명령을 자신들에게 들이대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하나님은 다른 모든 존재를 다스리는 가장 높은 분이며 당신들의 배타적인 충성과 경배를 받으실 만한 분이라고 말했다. 당신들은 하나님을 발견할 때까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좋다. 이런 말은 그들의 혼합주의와 다신론에 정면으로 충격을 주었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들은 바울의 하나님을 자신들의 여러 신들에 영입시키려 했을 것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종교를 버리고 만물의 영원한 창조주, 곧 다른 모든 신들을 초라하고 쓸데없게 만드셨던 하나님을 섬기라고 촉구하고 있었다.
바울이 참되신 하나님을 변호하는 특이한 방법을 주목하라. 바울은 헬라의 시(詩)를 인용한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28절). 이 절의 처음 구절과 마지막 구절은 헬라 시인에게서 따온 인용문이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 단을 세워 드린 바로 그 시인 에피메니데스는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고 말한 것은 아마 시인 아라두스(Aradus)일 것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에피메니데스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다"고 말했을 때, 그는 제우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왜 바울은 이 우상에게 드리는 찬가를 인용하여 하나님께 사용했을까? 바울은 믿음을 변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요점은 이렇게 바꾸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참되신 하나님에 관하여 아무런 지식이 없는 너희 시인들도 주권적이고 생명을 주시고 전능한 창조주가 있어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을 증거했다. 제우스는 그런 서술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고 너희가 아직 알지 못하는 그 하나님은 바로 그 전능하신 분이다." 바울이 고대 시인의 말을 이용한 것은 로마서 1:19, 20의 진리를 강조했을 뿐이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이성적인 사람은 창조의 결과에 대한 영원한 원인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많은 속성은 너무 분명하여, 이교 시인조차도 그 속성을 이해한다. 물론 그들은 그 속성을 엉뚱한 신에게 귀속시킨다.
이것은 설득력 있는 요점이었다. 바울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참되신 하나님이 창조주, 유지자, 우주의 주권자임을 선포하고 그런 후에 그런 주권적인 창조주가 반드시 계셔야 한다는 증거로서 그들의 시인들이 한 말을 인용하면서 상황을 아주 잘 이용했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다. "단에 쓰여 있던 비명을 인용하고 또 그들의 한 시인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매우 절묘했다. 바울이 유대인에게 말하고 있었다면, 헬라 시인의 말을 인용하거나 이교 제단을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은 청중에 대한 강렬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을 확보하기 위해서 자신의 특수성을 동화시키는 법을 배웠다." < Ibid. >
그러나 바울은 단순히 그들의 관심을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바울은 자신의 지성으로 그들에게 인상을 주거나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바울은 세상의 존경을 얻거나 철학자로 환영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바울의 유일한 목적은 이 사람들을 회개시켜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것이었으며,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에 곧장 돌입했다.
바울은 담대하고 직설적이었다
바울의 그 다음 말은 아덴의 이교를 치명적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17:29).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의 시인들이 지적하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다면,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어떤 상(像)보다 크신 분임이 틀림없다. 이는 매우 중요한 점이었다. 이는 바울이 철학의 큰 해머를 들고 철학자들의 모든 우상을 쳐부수는 것과 같다. 그 시인조차 인정하듯이 하나님이 참으로 주권자이며 무한한 존재라면, 우리는 우상이나 성전이나 다른 어떤 새긴 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바울은 문제의 핵심에 곧장 돌입한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17:30, 31). 늘 그랬듯이 바울이 회개를 전했던 사실을 주목하라. 바울은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에게 놀랍고 쾌락으로 가득 찬 생활을 약속해 줌으로써 그들을 수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울은 복음을 스토아 철학과 가능한 한 비슷하게 보이게 하려 함으로써 스토아 철학자들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바울은 헬라 철학의 황금 시대를 '알지 못하던 시대'라고 언급하면서 두 집단에게 회개하라고 했다.
'알지 못함'(ignorance)이라는 말은 23절에 나오는 헬라어 '알지 못하는'(unknown)이라는 말과 동일한 어근에서 나온다. 그리고 '허물치 않다'는 말은 '간섭하지 않다'는 뜻을 가진 말에서 나온다. 이 말은 하나님이 죄악된 우상 숭배에 무관심하셨다거나 대수롭지 않게 보셨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심판으로 개입하셔서 아덴을 이 땅에서 쓸어 없애려 하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하지만 바울이 그들에게 말했듯이, 하나님은 장차 의로 (아덴을 포함하여) 세상을 심판할 날을 정하셨다. 그 심판을 행하실 자는, 하나님이 정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킴으로써 증거하신 한 사람일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 사람이 누구신지 안다. 그분은 하나님이 모든 심판을 맡긴 예수 그리스도시다(요 5:22).
그러나 이 시점에서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가로막았고,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지 못했다.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17:32, 33).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부활을 전혀 믿지 않았고, 스토아 철학자들은 영적 부활은 믿었지만 육체의 부활은 믿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회개하라는 바울의 요청에 찔림을 받고서 무리를 지어 그를 조롱했을 것이다. 사실 바울이 부활을 언급하자마자, 회의주의자들은 비꼬기 시작했다. 분명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다 듣지 않고서도 그의 말을 거부할 정도였다. 어떤 사람들은 후에 더 들으려고 했다. 그래서 바울은 그만 그들을 떠났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의심하고 훗날로 미루지 않았다.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34절). 진리가 넉넉히 그들의 마음을 꿰뚫고 들어가서 이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알고자 바울을 따랐다. 분명 바울은 듣기를 원하는 자들을 위하여 설교를 계속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 회개하게 되었다. 회심자 가운데 한 사람은 아레오바고 법정의 의원인 디오누시오였다. 또 한 사람은 다마리라 하는 여인이었다. 이 여인에게는 직함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일반 여인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회의 양 극단(철학자와 가정 주부, 남자와 여자, 지성인과 일반 사람)의 사람에게 이 설교가 영향을 미쳤다. 몇 안 되는 이 회심자는 바울과 합류했고 아덴에서 최초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세속 사회의 그리스도인
바울이 아덴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아덴에서 회심한 사람이 몇 안 된다는 사실은 안디옥이나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이 목격한 부흥에 비해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이 도시의 상류 사회에 믿기지 않게 영향을 끼쳤다. 바울은 이 도시의 최고 법원에 참되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알렸다. 이 사건으로 아덴에 교회가 섰고, 근처 고린도에서 바울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또한 바울은 전도할 기회를 더 많이 열었다("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아레오바고 법정의 반응은 다른 곳에서 바울의 설교를 듣고 보였던 것과 달리 대단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고 말씀이 헛되이 돌아오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다. 이 도시의 세 가지 반응, 즉 경멸과 호기심과 회심은 복음을 신실하게 전파할 때마다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에 간 것은 아레오바고 사건이 일어난 직후였다. 여러 해 후에 바울은 이렇게 썼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 2). 어떤 해석가는 여기서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사용한 접근법을 포기했다고 믿는다. 이런 견해는 의심할 나위 없이 고린도전서 2장을 너무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것이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바울은 아덴의 사역을 실패로 보았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 나는 아레오바고에서 전한 바울의 설교가 잘못 전해진 것이라는 견해를 거부한다. 성경을 통해 배운 바에 의하면, 이 설교는 다른 모든 곳에서 바울이 사역을 접근하는 방식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그런데도 바울의 나머지 목회 서신은 물론이고 고린도전서에서도 이 점은 아주 분명하다. 즉, 바울은 자신이 능력 있는 사역을 펼칠 수 있는 비밀이 헬라 시인의 말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믿지 않았다. 바울이 디모데나 디도에게 머리를 싸매어 세속 문화를 공부하고 고전을 인용하는 법을 배우고 철학을 연구하여 지성계의 엘리트들과 논쟁할 수 있을 정도가 되라고 권하는 곳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바울은 그저 그들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 일에 신실하려면 세상의 적대적인 태도에 맞설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사도행전 17장은, 바울이 말할 때 자신이 스타일을 상황에 맞게 고치긴 하지만 메시지를 결코 상황에 적합하게 고치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울이 자기 시대의 정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몇 년 전 프란시스 쉐퍼는 이렇게 썼다. "우리 시대에 우리 주변에 있는 세계 정신에 적응하는 것은 말 그대로 가장 저속한 형태의 세속주의이다." < The Great Evangelical Disaster(Westchester, Ill. : Crossway, 1984), 142. 쉐퍼는 이렇게 덧붙인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우리는, 대체적으로 복음주의 체계가 우리 시대에 표현되는 세계 정신의 형태들에 순응해 오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나는 눈물을 뿌리며 이 말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튼 소망하고 기도하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애석한 일이지만 우리는 이와 같이 상황 순응의 사안에 관하여 기본적으로 의견을 달리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인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복음주의 체제는 심각하게 세속화했다"(Ibid).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일을 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 했다. 바울은 청중의 취향과 기대를 결코 따르지 않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이 선포하는 하나님을 청중의 취향과 기대에 결코 맞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하는 데 만족했다. 그러니 우리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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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자녀 여러분이 그 어떤 것을 갖지 못했다 해도 여러분은 하나님을 모시고 있고, 이 하나님 안에서 자랑할 수 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모시고 있으니 만물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물이 없어졌다 해도 하나님은 자신 뜻으로 간단히 만물을 회복하실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된다. 하나님이 명령하시니 만물이 굳게 선다. 야곱의 하나님을 의지할 분으로 모시고 여호와를 자신의 소망으로 삼은 사람은 복되다. 주 여호와 안에서 우리는 의와 힘을 갖는다. 영원히 주 여호와를 의지하자. 시대가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라. 시대가 우리 하나님께 영향을 줄 수 없다.
찰스 스펄전
< "A Sermon for the Time Present," The Metropolitan Tabernacle Pulpit, Vol. 33(London : Passmore and Alabaster, 1887), 605-6. 이 설교는 1887년 10월 30일에 전한 것임. >
가 오랫동안 보아 온 가장 우스운 생각 가운데 하나는 아이들을 위한 '움직이는 예수' 인형이다. 이 플라스틱 인형은 옷을 입고 샌달을 신은 모습을 한다. 이 인형은 미시간에 터를 둔 한 회사가 만든 '움직이는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 일련의 인형에는 세례 요한, 베드로, 다윗, 골리앗, 다니엘과 사자 등이 포함되어 있다. 소녀들을 위해서는 마리아, 룻, 에스더와 같은 인형이 있다. 혹은 여유가 있는 부모들은 간단하게 이 회사가 만든 성경 인물의 복장을 사서 아이들의 바비 인형을 '믿음의 여인'으로 바꾸어 줄 수 있다.
그에 뒤질세라, 플로리다의 한 인형 만드는 사람은 세탁기로 완전히 세탁할 수 있는 29.95달러짜리 봉제 인형 '예수님'을 내놓았다. 주로 '아이들이 예수님을 발견하도록 도울' 목적으로 옷이 헐렁하게 만든 장난감은 다음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나이 들고 약한 사람들, 건강 회복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는 사람들, 정서적으로 속박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사람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 이런 예수 봉제 인형은 실제 예수님이 줄 수 없는 어떤 '위로'를 줄 수 있는가? 인형 만드는 사람에 따르면, 실제 예수님은 만질 수 없다. "공기를 껴안기란 어렵다"라는 것이다.
이런 방침을 이루려고 더 많은 봉제 인형을 만들 계획이다. 이 인형을 일러 제작자들은 '첫열매'라고 한다. 그 다음으로 만들 봉제 인형은 마리아와 하나님일 것이다. 어떤 모습의 봉제 인형을 만들 것이냐는 물음에 인형 만드는 사람은 모형을 제시했다. 2피트 키에 흰 머리카락과 흰 수염을 하고 무지개 색이 칠해진 긴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다. 물론 세탁기로 완전 세탁이 가능하다.
예수 인형과 움직이는 예수 인형에 관하여 처음 읽었을 때,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주님을 그리는 방식을 적절하게 나타내는 은유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성경의 전적으로 주권적인 여호와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쥐었다 놓았다 할 수 있는 분으로 생각한다. 사실 일반 사람은 실제로 성경에 계시된 전능한 하나님보다 인정 많고 완전히 수동적이고 흰 머리를 한 봉제 인형 이미지를 더 좋아할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시라는 진리만큼 자연인에게 무시당하는 교리는 없다.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이 모든 것에 질서를 주시고 모든 것을 주장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말을 몹시 싫어한다. 하나님께 대해 적의로 불타오르는 육적인 지성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따라서 모든 것이 일어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혐오한다. 대개 육체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생각을 증오한다. 하나님이 구원받을 자를 선택하신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선택이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정해졌다면, 신자들은 어느 모로 보나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칭송을 받을 자격이 없다.
그러나 결국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믿음까지도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 주시는 은혜로운 선물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 6:65).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그러므로 누구라도 구원받은 자는 자랑할 것이 없다(참고. 엡 2:8, 9).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욘 2:9).
성경은 도처에서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교리를 명시적으로 가르친다. 예를 들어 신약 서신만 보더라도 우리는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택하신 자'(딛 1:1)임을 배운다. 우리는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었다"(엡 1:11).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 5). 우리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8-30).
베드로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었다"(벧전 1:1, 2)고 썼을 때, 하나님이 믿을 자를 미리 아시므로 미리 내다보신 그들의 믿음 때문에 그들을 택하셨다는 뜻으로 '미리 아심'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베드로는, 하나님은 시간이 시작하기 전에 그들을 알고 사랑하고 구원하기로 결정하셨음을 뜻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선한 일을 하게 될 것이건 나쁜 일을 하게 될 것이건 상관없이 그들을 택하셨다. 우리는 다시 이 요점을 살필 것이지만, 당장은 이 구절들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그 기쁘신 뜻대로'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즉 하나님 자신의 내적인 이유 때문에 이루어졌음을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확실히 하나님은 죄인들 속에 칭송할 만한 것이 있기 때문에 혹은 그들이 하나님을 택할 것을 하나님이 미리 보셨으므로 그들을 택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저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을 기쁘게 하였으므로 그들을 택하셨다. 하나님은 이렇게 선포하신다.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 하나님은 다른 자들의 결정에 종속되지 않으신다. 어떤 사람은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버리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자신의 뜻의 비밀한 경륜에 감추어져 있다.
더욱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작정하시고 존재하도록 부르셨기 때문에 존재한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 "여호와께서 무릇 기뻐하시는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시 135:6).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신다"(엡 1:11).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6).
죄는 어떤가? 하나님은 죄를 지으신 자가 아니지만, 확실히 죄를 허용하셨다. 죄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필수적이다. 하나님이 죄를 허용하시는 데는 한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님은 악으로 비난을 받으시거나 죄가 있다고 해서 오염되실 수 없다(삼상 2: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그러나 죄가 우주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이 방심하거나 우두커니 서서 죄를 막지 못하시게 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죄를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알지 못한다. 달리 목적이 없다면, 하나님은 악을 영원히 멸하기 위하여 죄를 허용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때때로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사용하시곤 한다(창 45:7, 8; 50:20; 롬 8:28).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전적으로 주권적이며 완전히 거룩하시며 절대적으로 의로우심을 안다.
분명 이 진리는 인간의 지성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명확하게 말한다. 하나님은 구원받을 자를 선택하시는 일까지 모든 것을 주장하신다.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11절)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시고 쌍둥이 형제 에서를 버리심을 보여 줌으로써 이 교리를 회피할 수 없는 말로 언급한다. 몇 절 뒤에서 바울은 이런 말을 덧붙인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15, 16절).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에 반대하는 이런 주장을 예상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19절).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책임감을 없애버리지 않는가? 그러나 바울은 철학자의 대답이나 심오한 형이상학적 주장을 제시하지 아니하고, 회의주의자를 간단히 책망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20, 21절).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감이 둘 다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둘이 어떻게 서로 상응하는지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진리의 이 두 측면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사람들은 복음을 어떻게 대하는가, 자신이 갖고 있는 빛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롬 2:19, 20). 그래서 그들이 그 빛을 거부하면 처벌을 받는 것은 정당하다. 그리고 그 빛을 거부하는 자는 매우 자발적으로 거부한다. 예수님은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40) 하고 한탄하셨다. 예수님은 불신자에게 "너희가 만일 내가 그(하나님)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8:24)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6장에서 우리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결합시키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37절).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40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44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47절).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65절). 이 두 실재가 어떻게 동시에 참될 수 있는지 인간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이해하신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실 뿐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기로 결정하신다고 하여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결코 인간의 판단에 공정해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을 재서는 안 된다. 타락하고 죄악된 피조물인 우리가 타락하지 않고 무한히 영원히 거룩하신 하나님보다 더 높은 의의 기준을 갖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가? 대체 무슨 교만인가? 시편 50:21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같지 않으시며 누구도 하나님을 인간의 기준에 갖다 댈 수 없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 9).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그 어떤 일이 공정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릴 때, 경계선을 벗어난다. 로마서 11:33, 34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하나님의 주권 대 실용주의
하나님의 주권이 이 책의 주제와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모든 점에서 관련이 있다. 현대의 많은 교회가 실용주의적 방법론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선택하신 자들을 구원하는 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전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음이 강퍅한 불신자에게 이르기 위해 선포된 복음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마케팅 문제로 복음 전도에 접근한다. 그들의 방법론은 그런 생각에 따라 형성된다.
30여 년 전에, 패커(J. I. Packer)는 이렇게 썼다.
복음을 전파할 때 결과를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대권임을 잊는다면, 그 결과를 확보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만 믿음을 주실 수 있음을 잊는다면, 회심자를 만드는 일이 결국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달려 있고 결정적인 요소는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철저하게 따라가면 우리는 길을 잃어 멀리 벗어나게 될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자. 우리가 그리스도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회심자를 만드는 일을, 즉 신실하게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한 결과 성공을 거두는 일을 우리의 일로 생각하면, 복음 전도에 대한 우리의 접근법은 실용적이고 타산적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남을 대하는 일과 공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일에 대한 우리의 기본 준비는 이중적이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우리는 복음의 의미와 적용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으로 어쩔 수 없이 반응하게 만드는 기법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기법을 시도하고 개발하는 것을 우리의 일로 삼는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벌이는 복음 전도나 다른 사람이 벌이는 복음 전도 모두를 전파한 메시지뿐만 아니라 보이는 결과를 기준으로 평가한다. 우리의 노력이 열매를 맺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기법을 여전히 개선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 틀림없다. 우리의 노력이 열매를 맺고 있으면, 우리가 사용해 온 기법이 옳은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복음 전도를 우리 자신과 우리가 다가가려는 사람들이 벌이는 의지의 전쟁과 관련된 활동으로 볼 것이 틀림없다. 이 전쟁에서의 승리는 우리가 계산한 결과를 끊임없이 노리고 추구하는 데 달려 있다.
< Evangelism and the Sovereignty of God(Downers Grove, Ill. : InterVarsity, 1961), 27-28. >
패커가 경고하고 있는 것은 이용자에게 친절한 교회와 그 교회의 시장 지향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철학을 낳았던 바로 그 사고 방식이다.
실제로 사역에 대한 실용주의적 접근법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미국 교회사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주된 공헌자는 해리 에머슨 포스디크나 노먼 빈센트 펄이나 로버트 슐러나 그 밖의 현대 실용주의 옹호자가 아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19세기 초의 복음 전도자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의 영향을 따랐다.
찰스 피니는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정통적 견해를 '자의적인 주권 행사' < Charles G. Finney, Systematic Theology(Whittier, Calif. : Colporter Kemp, 1944 reprint), 489. > 라고 물리침으로 발을 잘못 디뎠다. 그는 회심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교리를 거부했다. 대신에 찰스 피니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결단이며 구원은 죄인이 스스로 하나님을 향하여 감으로써 얻어진다고 가르쳤다.
피니는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신학적인 근본 오류를 범했지만, 그 오류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른 오류가 그의 가르침에 나타나게 되었다. 찰스 피니는, 사람들이 본성에 의한 죄인이 아니라 선택에 의한 죄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그는 복음 전도의 목적을 사람들로 하여금 다르게 선택하도록 혹은 오늘날 '그리스도를 위하여 선택을 내리도록' 확신을 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 죄인의 선택이 회심에서 결정적 문제가 되었다. 흑암에서 광명으로 옮겨가는 수단은 피니가 말하는 인간의 단순한 의지 작용이다. 설교자의 과제는 쓸모 있다고 입증된 수단은 무엇이든 사용하여 믿음의 결단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피니는 종종 무덤덤하게 교회 오는 사람들에게 오직 충격을 주고 호기심을 돋구기 위하여 계획한 기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사역에 '새 척도'(비전통적 방법론)를 끌어들였다. 피니는 청중으로부터 바라던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이든지 실제로 시행하려고 했다.
사역에 대한 찰스 피니의 접근법은 현대 실용주의를 미리 보여 주었고 그 기초를 놓았다. 그의 가르침과 방법은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미국 복음 전도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우리는 그를 실용주의적 복음 전도의 아버지라고 분명하게 부를 수 있다. 현대의 시장 지향적 사역은 피니가 시작한 운동의 절정에 불과하다(부록 2를 보라).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피니를 따르지 하나님의 주권이 진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피니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의 실용주의는 그들 신학의 부정, 즉 일종의 영적 정신 분열증이 된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한다
스펄전은 피니의 전성기 이 후 삼사 년 동안 내리막길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피니의 영향력은 런던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미쳤다.
< 피니는 1849-1851년에 런던에서 광범위한 전도 캠페인을 개최했고 1859-1860년에 영국 제도 도처에서 사역했다. 그는 영국 복음주의의 어떤 진영에 영구한 흔적을 남겼다. 그의 조직 신학은 1851년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여러 판을 거듭하여 1878년까지, 즉 내리막길 논쟁이 터지기 약 10년 전에도 영국에서 인쇄되고 있었다. > 개혁주의 신학은 심각하게 쇠퇴하고 있었다. 실용주의적 방법론은 기세를 올렸다. 스펄전은 특히 하나님의 주권 교리에 관하여 외로이 외치는 적이 많았다. 스펄전과 동시대 인물인 데일(R. W. Dale)은 1881년에 이렇게 썼다. "스펄전 씨는 현대 복음주의 비국교도 지도자들 가운데서 옛 칼빈주의의 신조를 외롭게 지켰다." < Cited in Iain Murray, The Forgotten Spurgeon(Edinburgh : Banner of Truth, 1966), p. 176. > 실제로 영국의 다른 모든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념을 포기했다.
스펄전은 그와 같은 신념을 비참하게 잃어버렸기 때문에 교회가 내리막길로 접어들 수 있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스펄전은 애버딘 자유 교회 칼리지(Free Church College)의 학장 데이비드 브라운(David Brown) 박사가 기독교 시대(The Christian Age)의 편집장에게 쓴 출판된 한 편지와 전적으로 의견을 같이 했다:"우리의 모든 교회는 자연인이 받아들일 수 없는 복음의 모든 대목을 경시하는 위험한 경향으로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놀랄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들의 목적이 자연인의 마음을 끌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곳은 어디든지, 강단의 신령한 정신이 사라지며 성령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 Cited by Spurgeon in "The Case Proved," The Sword and the Trowel(October 1887), p. 512. >
스펄전은 하나님의 주권을 '하나님의 진리를 푸는 실마리' < C. H. Spurgeon's Autobiography, 4 vols. (London : Passmore and Alabaster, 1897), 1 : 167. > 로 보았다. 스펄전은 이 교리를 복음의 핵심으로 보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오늘날 칼빈주의라고 일컫는 것을 전파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전파하는 그런 일은 없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우리가 공로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은 입었다는 것을 전하지 않으면 또 우리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실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을 전파하지 않는다면 복음을 전파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 Ibid., 1 : 172. >
스펄전은 요나 2:9,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를 인용하고 난 다음 이렇게 주석했다.
이것이 바로 칼빈주의의 대요(大要)이다. 이는 칼빈주의의 개략이며 요지이다. 당신이 말하는 칼빈주의자가 누구냐고 누가 내게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칼빈주의자는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나이다 하고 말하는 사람이다." 나는 성경에서 이와 다른 교리를 발견할 수 없다. 이는 성경의 본질이다. "오직 그 분만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구원이시다." 이 진리와 모순되는 것을 내게 말해 보라. 그러면 그것은 이단이 될 것이다. 내게 이단을 말해 보라. 그러면 나는 이렇게 그 이단의 본질을 발견할 것이다. 즉 그 이단은 이 위대하고 근본적이고 반석 같은 진리 곧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구원이시다'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로마교 이단은 무엇인가? 우리의 칭의를 거들기 위하여 육신의 공로를 끌어들이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공로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아르미니우스주의 이단은 무엇인가? 구속주의 행위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모든 이단은 이 시금석에 갖다 놓으면 여기서 본색이 드러날 것이다.
< Ibid. >
성경과 하나님의 주권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의 행위인가? 그렇지 않으면 주님은 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이루셨고 이제 죄인의 결정을 기다리시는가?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친다. 만일 구원이 죄인의 주도권에 의존한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롬 3:11).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 하나님은 영생을 주기로 정하신 자들에게 믿음을 불러 일으키신다(행 13:48). 하나님이 이렇게 믿음을 일으키신 후에, 이사야 55:6,7에서처럼 사람이 하나님을 찾기 시작한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이 말씀에 이어 11절의 고전적인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확언이 따라온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그리고 그런 역설이 혼동스럽다 해도, 8, 9절이 그것을 설명해 준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은 모두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신다(행 17:30). 그러나 궁극적으로 회개를 허락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이 틀림없다(행 5:31; 11:18; 딤후 2:25). 그리고 하나님이 믿음의 반응을 요구하신다면, 하나님이 택하신 자의 마음에 그런 반응을 은혜롭게 불러일으키시고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으심에 틀림없다(행 18:27). 인간의 마음은 심히 부패했으므로, 우리 혼자서라면 아무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자신을 믿을 수 있다면, 확실히 자랑할 수 있는 것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8-10).
이 진리는 따로 떨어져 있는 성경 구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스펄전이 말했던 것처럼 거룩한 말씀 도처에서 확언하는 '성경의 본질'이다. 하지만 나는 특별히 구원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에 관하여 분명히 말하는 한 짧은 구절, 즉 베드로전서 1:1-5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하나님이 택하심
물론 이것은 베드로가 쓴 편지의 인사말일 뿐이다. 베드로는 이와 같이 처음부터 상당히 심오한 신학을 제시한다. 많은 설교자는-심지어 이 교리를 확언하는 사람들조차도-공적 가르침에서 선택을 도무지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주제가 오해받고 남용되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처음 서신을 이 교리에 대한 분명한 확언으로 시작한다. 베드로는 첫 문장을 마치기 전에 심각한 문제로 들어간다.
베드로가 소아시아에 두루 흩어져서 온갖 핍박당하는 장성한 신자나 장성하지 못한 신자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음을 기억하라. 그들이 핍박받는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이나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에 의문이 생겼을 때, 베드로는 그들이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는 사실을 열심히 상기시켰다. '택한'이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는 에클렉토스(eklektos)인데 이 말은 칼레오(kaleo), 즉 '부르다'와 전치사 에크(ek), 즉 '~밖으로'에서 나온 것이다. 말 그대로 이 말은 '불러내신 자'이다. 이 말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인과 동의어로 종종 사용된다(예. 골 3:12; 딤후 2:10; 딛 1:1).
'불러내신 자'라는 표현은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 때문에 구속받았지 우리 자신의 선택 때문에 구속받은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행한 무슨 일 때문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당신을 택하셨기 때문이다. 스펄전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그리스도께로 올 때, 오직 내 힘으로 그러는 줄로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주님을 열심으로 찾았지만 주님이 나를 찾고 계심은 몰랐다......(그러자) 이런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어떻게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나는 주님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당신은 주님을 찾게 되었는가? 깜짝할 순간에 진리가 내 마음을 번쩍 스치고 지나갔다. 내 마음에 나로 하나님을 찾도록 하신 무슨 영향력이 이미 있지 않다면, 틀림없이 나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나는 하나님이 그 모든 영향력을 주셨고 하나님이 나의 믿음을 만드신 분임을 알았다. 그래서 모든 은혜의 교리가 내게 열렸다......나는 언제나 이런 고백을 하고 싶다. "나의 변화는 전적으로 주님께서 일으키신 것이다." < Ibid., 1 : 168-69. >
베드로전서 2:9에서 베드로는 이런 말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라는 주제를 다시 언급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온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시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한 백성을 불러내시고 있다(참고. 행 15:14). 요한복음 17:9에서 예수님은 택하신 자를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고 계신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시간이 없는 영원한 과거에 성부께서는 그의 이름을 위하여 한 백성을 택하셨다. 에베소서 1:4, 5은 이렇게 말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구원받은 우리는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에 있었다.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는 선택되었다. 우리는 언제나 선택되었다. 그것은 헤아릴 수 없지만 온 몸을 떨리게 하는 생각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그래서 우리 이름은 "죽음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었다"(계 13:8). 바울 사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딛 1:1)로서 복음을 전파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는 복음을 전파할 때, 하나님은 자신이 전한 진리를 통하여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실 것을 알았다(참고. 행 18:9-11). 바울이 할 일은 하나님의 성령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불러일으키실 때 구원 얻는 진리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그 진리를 전하는 것이었다.
만일 이 진리를 가지고 싸우고 있다면, 당신은 외톨이가 아니다. 이 진리는 받아들이기 어렵고 이해할 수 없고 우리 인간의 감수성에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타락한 인간의 지성은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요구할 권리가 있는 양, 하나님이 어떤 사람만 택하시고 모든 사람을 택하지 않으시는 것을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공평하지 못하다! 하고 외치는 것이 그들의 전형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그것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공평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공평'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영원히 정죄받음을 뜻할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자신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많은 사람을 은혜롭게 구원하신다. 만일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그의 진노를 보이시기로 결정하신다 해도, 그것이 결코 하나님의 의를 더럽히지 않는다(롬 9:21-23).
그런데도 사람들이 화를 냄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에 반응하는 것은 유별난 일이 아니다. 누가복음 4장은 예수님이 선택 교리를 다루시니까 무리가 화를 내는 한 사건을 서술한다. 예수님은 공사역을 시작하신 직후에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처음에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겼다"(4:22). 그들은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큰 기적에 대하여 듣고 나사렛에서도 그런 기적을 보기를 바랐다. 그들은 자기 동네 사람이 그런 표적과 이적을 드러낼 능력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분명히 약간 긴가민가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내다보시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23-27절).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언제 어떻게 어디서 드러내실지에 관하여 주권적이시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기적 쇼를 벌이지 않으려 하셨다.
무리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얼마 전에 상당히 이해하는 듯이 보였던 그 사람들은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했다"(눅 4:28, 29). 그들은 진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를 미워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했다.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30절). 그들이 보기를 바랐던 기적은 일어났으나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즉 예수님은 간단히 그들 가운데로 걸어서 초자연적으로 군중들을 벗어나셨다.
주권적 선택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임을 입증하는 진리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이 지어 내려 하거나 할 수 있는 진리가 아니다. 누구라도 주권적 선택이 진리라고 믿는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아주 분명하게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제한된 능력으로 그것을 파악할 수 없다. 우리는 단순히 그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를 선택하신 주권적이고 전지하고 완전히 의로우신 주님으로서 하나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 속에 이루어 놓으시는 일에 대한 공적을 우리에게 돌릴 것이다.
나그네로 거함
베드로가 자신의 청중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베드로전서 1:1의 '흩어진 나그네'라는 구절을 주목하라. 베드로는 소아시아에 흩어져서 심한 핍박을 잇따라 당하고 있는 유대인 신자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땅의 나라에서 그들이 나그네 신세로 있는 것 이상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인 이 사람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히 11:13), 즉 이 땅에서 나그네임을 그들로 상기시켰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늘 나라에 속해 있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요일 2:15). 우리는 이 세상과 벗이 되어서는 안 된다(약 4:4).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신이다(고후 5:20). 우리는 좀더 높은 기준에 따라 사는 나그네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참고. 요 17:11, 14, 16).
베드로는 이 흩어져 핍박당하는 신자들이 세상은 자신들을 버렸어도 하나님은 자신들을 택하셨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랐다. 베드로는 이 세상에서는 외국인과 추방자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택함 받은 시민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그들에게 격려가 되고 힘이 될 것임을 알았다.
영원부터 미리 아심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벧전 1:2)라는 구절을 살펴보자. 이는 로마서 8:29에서 바울이 사용한 말과 비슷하다. "미리 아신 자들로......미리 정하셨으니." 하나님은 그의 미리 아심을 따라 우리를 선택하셨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는 하나님이 영원 속에 물러나 앉아서 시간을 가로질러 우리가 할 일을 내다보시고 믿으려고 하는 자를 선택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사람이 주권적이게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선택에 종속될 것이다. 결국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요점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지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리 아심'이라는 말은 헬라어 프로그노시스(progn sis)에서 온 것이다. 베드로는 같은 장 뒤에서 같은 말을 다른 형태로 쓴다. 20절은 그리스도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라고 말한다. 이 절에서 '미리 알리신'이라는 말이 간단히 하나님의 전지한 예지를 언급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 알려고 미래를 보지 않으셨다. 이 문맥에서 이 말은, 성부 하나님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를 친밀하고 개인적으로 아셨다는 뜻이 분명하다.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미리 아심'이라는 말을 썼다. 사도행전 2:23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을 미리 아시고 그것을 가장 잘 이용하려고 하셨음을 넌지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 일은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뜻'이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작정하셨기 때문에 시간에 앞서 그 일을 아셨다. 하나님은 그 일을 계획하셨다. 하나님은 그 일을 미리 정하셨다. 십자가에 달리심은 하나님이 구속을 위하여 세우신 영원한 계획의 초점이었다. 여기서 '미리 아심'은 의도적으로 미리 정하심이라는 개념을 분명히 담고 있다.
(그런데 이에 상응하는 다음의 진리를 주목하라.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하고 소리쳤던 이 사람들이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속하기 때문에 자신의 두려운 책임에서 면제되지 않았다. 너희가 그 일을 했다고 베드로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들이 죄를 지었다.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완전히 일치하긴 했지만 그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이 있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책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미리 정하시고 미리 아셨다지만 그리스도를 실제로 죽인 자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셨으며 그들을 정죄의 죄책에서 건져 살려두지 않으셨다.) 그러면 우리는 미리 아심이라는 용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 말이 인격적이며 친밀한 지식을 뜻할 수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이 말은 뜻을 갖고 내린 결정을 의미할 수 있다. 두 개념을 결합하여 보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유의 예지는 베드로의 유대인 독자들이 잘 알고 있는 개념이었다. 구약은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여 택하신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말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렘 1:5). 아모스 3:2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하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 33:17) 하고 말씀하셨다. 이 모든 구절은 친밀한 관계를 말한다. 히브리어 야다(yada, '알다')는 이런 함의를 매우 강하게 담고 있으므로, 이 말은 성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완곡어법으로 종종 사용되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영어로는 '알다'로 번역되어 있음-역자주) 하와가 잉태하여"(창 4:1).
신약성경도 우리 주님이 택하신 자들과 맺으시는 친밀한 개인적 관계를 서술하기 위하여 알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요 10:27). 그런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았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심판하실 것이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성경이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창세 전에 친밀하게 아셨음을 뜻한다. 하나님은 영원한 계획으로 어떤 사람들을 사랑하기로 미리 정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그들과 사랑의 관계를 세우셨고,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영원히 미리 아셨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계획을 일러 '영원한 언약'(13:20)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하나님이 이 모든 구원 계획을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라고 디도에게 말했다(1:2). 이 표현은 시간 전이라는 뜻이다.
거룩하게 되도록 정하심
선택은 구원과 같지 않다. 신자는 영원한 과거에 택함을 입었다. 그러나 시간 속의 특정한 시점에 그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이 확실히 구원받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신 방도, 즉 하나님의 말씀과 죄의 자각과 회개와 믿음과 성화와 무관하게 그들을 구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은 구원받기 위하여 반드시 믿어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역사의 한 요소가 된다.
베드로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택하심을 입은 자들'(벧전 1:2)이라는 구절로 이 진리를 강조한다. 여기서 베드로는 거룩하게 하심을 전문적 교리적 의미로 사용하지 아니하고 구원의 모든 경험적 측면 즉 회개와 믿음과 중생과 순종과 성화와 성령이 택하신 자들 속에 만들어 놓으시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용어로 사용한다.
이것이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임을 주목하라. 우리를 죄로부터 떼어놓고 우리를 구별하여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성령님의 사역이다. 성령님은 우리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르도록 하고 계신다. 데살로니가후서 2:13에서 바울 사도는 비슷한 말을 사용한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다른 말로 하면 삼위일체의 세 분께서 모두 이 과정에 관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셨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값 주고 사셨다. 성령님은 우리의 구원을 효과 있게 하신다.
거룩하게 하심은 완전을 뜻하지 않는다. 이 말은 구별을 뜻한다. 이는 죄로부터 분리되고 따로 떼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거룩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죄로부터 분리됨은 이제 우리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것은 우리 삶에서 완성될 것이다.
거룩하게 하심은 한 사건이면서 일평생 계속되는 과정이다. 우리는 항상 죄로부터 분리되어 실제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르고 있다. 우리는 죽음이나 재림으로 그리스도와 얼굴을 대면하기 전에는 궁극적인 성화나 완전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 3:2). 그리고 아무도 그런 과정에서 떨어지지 않는다(참고. 요 6:39, 40; 롬 8:30-39).
베드로의 말에서 넌지시 보여 주듯이, 거룩하게 하심은 선택과 너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둘은 뗄래야 뗄 수 없다. 그래서 베드로는 참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자는 성화 과정을 피할 수 없다고 확언한다. 우리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신"(롬 8:29) 자들이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 있도록 정해 놓고 그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기 시작하지 않으신다고 말하면 모순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지만 자신의 생활에 아무런 변화를 보지 못했다고 믿는다. 그런 사람은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벧후 1:10) 해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 구원의 모든 측면을 포괄한다. 하나님은 우리 믿음을 만드신 분이시며 그 믿음을 완성하는 분이시다(히 12:2). 우리를 구원하는 일은 미리 아심과 선택과 중생(약 1:18)과 회개(행 11:18)와 믿음(요 6:44; 롬 12:3)과 의롭다 하심(롬 3:24)과 거룩하게 하심(히 2:11), 즉 우리의 예정에서 우리의 최종적 영화까지 모든 것을 포함하여 모두 하나님의 일이다. 택함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이 그저 하늘 나라를 위하여 택하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모든 국면을 위하여 택하신 사람이다. 우리는 감히 거룩하게 하심을 선택 사항으로 보지 않는다. "이것(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순종하도록 정해짐
베드로는 이 생각을 한걸음 더 발전시킨다. 그는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순종하기 (위하여)' 택함을 입었다고 말한다. 다시 우리는 에베소서 2:10로 돌아가 보자. 이 구절은 이렇게 되어 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래서 우리의 선행도 주권자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요 15:16).
선행은 확실히 우리로 선택받게 하는 원인이 아니다. 선행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근거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든 우리 구원의 기초가 아니다. 그러나 선행은 우리 구원의 필연적인 증거이다. 우리가 참으로 '그의 만드신 바'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고 주권적으로 선행을 준비하셔서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셨다면, 하나님의 택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 수는 없다. 그럴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도록 우리를 택하신 분의 주권과 전능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의 피 뿌림을 얻음
베드로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었다)"(2절). 이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구약에서는 희생 제사의 피를 종종 무생물 대상에 뿌렸다. 유월절에는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뿌렸다. 어떤 속죄제와 관련해서는 피를 제단과 성막 근처에 뿌렸다. 히브리서 9:22은 이렇게 말한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그러나 구약에서 사람에게 피를 뿌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 사실상 피는 레위기 율법에서 두 경우에만 사람에게 직접 뿌렸다. 한 경우는 문둥병자를 상징적으로 정결하게 하는 때이다(레 14:7, 14). 또 한 경우는 레위인이 제사장으로 구별될 때이다(출 29:20, 21; 레 8:24, 30).
하지만 베드로전서 2장은 문둥병자를 정결하게 하거나 제사장을 구별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면 성경에서 사람에게 피를 뿌리는 유일한 경우를 살펴보자. 이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피를 뿌리는 일회적 사건이었다(출 24:8).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뿌린 피는 '언약의 피'라고 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후에, 백성은 서너 번 그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약속으로 응답했다. 그것은 언약이었다. 뿌린 피는 그들의 순종을 상징했다. 그것은 그들이 순종하겠다는 외적 표시였다. 모세는 제단을 쌓고 두 수소를 희생 제사로 드렸다. 이 희생 제물의 피 절반은 제단에 뿌려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복 주심을 상징했다. 모세는 나머지를 백성에게 뿌리며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 하고 말하고서 순종하겠다는 백성들의 약속을 상징으로 드러냈다. 이 피는 언약에 날인하는 데 필요했다.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히 9:18, 19).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1:1, 2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신자에게 상징적으로 뿌려진다는 사실이었다.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이라는 구절은, 구원받은 선민이 이미 그들에게 구원과 복을 주셨던 주님께 순종을 약속했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을 때 이 언약으로 이끄셨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이 얼마나 포괄적으로 우리의 구원을 덮는지 아는가? 하나님은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 하나님은 무궁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렘 31:3).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도록 정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로 순종하도록 정해 놓으셨다. 하나님은 우리와 더불어 자신의 언약을 세우셨다.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만드신 바이다(엡 2:10).
8하나님의 주권 교리를 적용함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악용되고 오해되고 잘못 적용되는 경우가 잦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교리가 너무 깊다거나 혼동스럽다거나 이해하기 어렵다거나 기분을 상하게 한다고 생각해 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교리에서 달아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교리를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 우리는 이 교리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교리 안에서 즐거워해야 한다. 이 교리는 인간의 교만을 부수고 하나님을 높이고 신자의 믿음을 강하게 한다. 하나님이 모든 창조물을 주권적으로 주장하심을 아는 것보다 더 힘 솟게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우주는 우연에 종속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할 가능성은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것은 성경 전체에 가장 잘 알려져 있고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약속이다. 이 약속은 하나님의 주권 교리에 달려 있다.
더욱이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복음 전도를 하라고 동기를 불러넣어 줌에 틀림없다. 우리는 복음을 증거하거나 전파할 때,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로 적극적으로 반응하게 하실 것을 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우리로 신실하도록 격려한다. 선택은 나태한 행동에 대한 구실이 아니다. 게으름 피면서 신비스런 방법으로 선민을 구원하는 일을 하나님께 내맡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복음 전도를 떠나서는 구원받지 못한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막 16:15; 눅 24:47). 그리고 우리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는 확신을 가지고 그 일을 할 수 있다.
이 책의 핵심 주제인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우리가 어떻게 말씀을 전파해야 하는지 결정하게 할 것이다.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의 주권에 비추어 사역 방법을 살핀다면 우리의 사역 방법은 혁신될 것이다. 패커는 복음 전도와 하나님의 주권(Evange-lism and the Sovereignty of God)이라는 멋진 책에서, 깊은 통찰과 지혜를 담아 이 문제를 논의한다. 패커는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By What Means and Methods Should Evangelism Be Practised)라는 소중한 대목을 써 놓았다. 여기서 그는 이렇게 쓴다.
복음 전도의 방법은 오직 하나이다. 즉, 복음 메시지를 충실히 강해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이리하여-이것이 우리가 찾고 있는 핵심 원리이다-사람들이 제안하는 복음 전도 행위의 그 어떤 전략이나 기법이나 스타일을 테스트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 그것(전략이나 기법이나 스타일 등)은 실제로 말씀에 이바지하겠는가? 그것은 복음을 참되고 충만하게 설명하고 깊이 있고 정확하게 적용하는 수단이 되도록 되어 있는가? 그렇게 되어 있는 한, 그것은 합법적이고 정당하다. 그것이 메시지의 실재를 어둡게 하고 흐리게 하며 그 실재를 어설프게 적용하려는 경향이 있는 한, 경건하지 못하고 그릇되다.
< Packer, Evangelism and the Sovereignty of God, 86. >
패커는 새로운 형태의 모든 사역에 관하여 우리가 물어야 할 많은 질문을 제안한다.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이 방법이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이라는 깊은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도록 되어 있는가?"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이 방법은 사람의 영리함이나 수완으로 이루어졌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가? 그리하여 사람을 높이는 경향이 있는가?"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이 방법은 인간의 지성에 말씀의 사역을 진작시키는가 방해하는가? 이 방법이 메시지의 의미를 명료하게 하는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고 모호하게 하는가?"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이 방법은 복음의 가르침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사람에게 주기에 적합한가?"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이 방법은 복음의 적용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기에 적합한가?......예를 들어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반응할 즉각적인 의무가 있음을 알지 못한 채로 내버려 두게 하는가?"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이 방법은 적당히 진지하게 복음의 진리를 전달하도록 계획되어 있는가? 이것은 사람들이 삶과 죽음의 문제를 맞닥뜨리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데 적합한가?......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지는 것이 두려운 일임을 깨닫도록 도우려 하는가? 혹은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이 방법은 너무 가볍고 태평하고 마음 편하고 즐거운 것이라서 청중들로 하여금 복음이 중대한 것이라는 것을 느끼기 힘들게 하지 않는가......?" < Ibid., 87-90. >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믿음은 실용주의와 세속적 태도의 내리막길에서 교회를 건질 것이다. 이 믿음은 우리를 다시 성경적 설교로 데려갈 것이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기만 하면, 메시지를 없애고 조정하고 메시지의 내용을 약하게 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인위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좀더 많은 사람이 구원받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복음 전도를 마케팅 문제로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자신에게 부르실 때 사용하시는 유일한 방도인 하나님의 계시의 선포로 볼 것이다. 그들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에 더욱 의지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를 내리막 비탈길로 더 빨리 더 멀리 내몰고 있는 세속적인 방법을 내버릴 것이다.
하나님이 영감하신 말씀에 귀기울이라.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 1:23-25).
9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
<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 >
누구도 갑자기 별난 생각이 나서 우리가 매우 급하게 글을 썼다고 상상하지 말라. 우리는 오랫동안 기다렸고 아마 너무 오래 기다려서 더디게 말한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도 우리가 몇몇 별개의 사실을 기초로 삼고서 말을 만든다고 추측하지 말라......우리에게는 진리의 대의와 하나님의 영광을 전반적으로 발전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동기가 없다.
찰스 스펄전
< "Our Reply to Sundry Critics and Enquirers," The Sword and the Trowel(September 1887), 463. >
사 년 전 큰 교회의 특징에 관하여 글을 쓰는 저널리스트는 나와 만나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Grace Community Church)에 관하여 이야기하게 되었다. 이야기를 마치려 할 즈음 그는 이렇게 물었다. "항상 큰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욕망에 이끌려 다녔습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지만, 곧바로 이렇게 대답했다. "교회를 세울 욕망은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그는 우습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더니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분이 그 분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나는 그 분과 경쟁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내가 이상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교회에 대한 나의 관점은 바로 이것이다. 종종 목회자 모임이나 리더십 세미나에서 큰 교회로 성장시키는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나는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에 신실하기를 바란다면 큰 교회를 보장해 줄 기술이나 체제가 없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영적 성장은 물리적 성장과 비슷하다. 영양을 섭취하고 격려를 받아야 한다. 우리는 틀림없이 건강하게 성장하게 하는 일들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참된 성장을 기계적으로 꾀할 수 없다. 매우 작은 관목을 거대한 미국 삼나무처럼 자라게 할 수는 없다. 유전 기술이 발견되어 그런 일을 할 수 있게 되면, 그 결과 기형 나무가 생길 것이다. 영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시 127:1).
나는 우리 교회의 수적 영적 성장은 주권자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마케팅 기법이나 현대적 방법은 없다. 우리는 그런 전술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공식과 프로그램과 고안으로 이루어진 성장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적극적인 성경적 사역에 초점을 두고 주님의 교회에 수를 더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는 것으로 만족한다(행 2:47).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이 우리가 하도록 계획하신 것을 충실히 하는 것이다.
<면상단 >
다시 우리는 전능하고 주권적인 하나님의 원리로 돌아간다. 우리는 교회를 세우는 일이 하나님의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막 16:15) 것이다. 일단 우리 자신을 교회의 설계자와 건축자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정당한 역할을 빼앗고 성공과 수(數)와 규모와 다른 인위적 기준으로 우리의 목표를 다시 정한다. 단순히 그런 철학을 기초로 삼고서 세워진 교회는 잠시 번영하는 듯하나 결국 영적 실패를 당한다.
이 진리를 지지하는 성경의 중요한 본문은 마태복음 16:18-20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구절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수세기 동안 벌여 온 논쟁의 씨앗이다. 이 구절은 해석가에게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그 핵심에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교회에 관한 단순하고 심오하고 풍부하고 영광스러운 진리가 담겨 있다. 그리고 이 구절은 우리 연구에 어울리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교회의 기초-'이 반석 위에'
이 구절의 문맥을 분명하게 짚어 보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하고 위대한 고백을 한 직후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셨다. 주님은 베드로의 고백에 이런 말로 응답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절).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베드로를 진리와 믿음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신다.
예수님의 그 다음 말은 가톨릭 신자와 프로테스탄트 신자 사이에 매우 큰 논쟁을 불러일으킨 문제를 제기한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이 말씀을 기초로 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회가 베드로 위에 세워졌으므로 베드로를 제1 교황으로 삼고 교황 승계 제도를 수립하고 교황 지위를 이 땅에서 발휘되는 하나님의 권위의 핵심이며 정수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반면에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이 반석 위에'라는 구절을 '말놀이'로 본다. 베드로('작은 돌'이라는 뜻)라는 이름이 '이 반석'('큰 돌'이라는 뜻)과 대조를 이룬다. 그들은 '반석'이 베드로의 고백을 가리키지 베드로를 가리키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들은 그 말의 뜻을 이와 같이 바꿔 쓴다. "너는 작은 돌이지만 나는 네가 고백한 진리의 견고한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심을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며(엡 5:23; 골 1:18) 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 대신 교회를 거느릴 이 땅의 대리인을 말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 견해는 이 본문의 뜻을 충실히 반영하는 해석이며 가톨릭의 해석보다 성경의 진리에 더 일치한다. 예수님은 확실히 베드로를 교황으로 만들고(혹은 교황 승계 방침을 세우고) 계신 것이 아니다. 결국 몇 절 뒤에 주님이 베드로를 책망하시며 그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내용이 나온다(23절).
하지만 이 구절에 대한 좀더 자연스러운 해석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열두 제자의 지도자와 대표자로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은 교회를 일러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엡 2:20)고 말한다. 그래서 베드로와 모든 사도는 성경적인 의미로 교회의 기초를 형성했다. 그리스도께서 세우고 계시는 교회는 사도적 교리와 사역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졌다. 누가는 초대 교회가 "사도의 가르침을 (전념하여) 받았고"(행 2:42) 그 기초 위에 교회를 세우시는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7절)고 기록한다. 사도행전의 나머지 부분에서도 줄곧 사도의 가르침과 사역이 계속 모든 지역 교회의 기초이다(예. 4:31, 32; 8:12, 35-40; 10:34-48; 12:24, 25; 13:44-49).
교회는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집의 돌이다. 베드로와 사도는 기초석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모퉁잇돌은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교회의 확실성-"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구절의 핵심이다. 이 구절에 나오는 다른 모든 것은 이 말씀을 확대하는 것이며, 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주제와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 말씀은 제자들을 격려하려는 약속이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 저 멀리 북쪽 레바논 산 근처에 있는 이스라엘의 꼭대기 가이사랴 빌립보의 먼지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그들은 실지 추방당하는 중이었다. 예수님은 유대(남쪽 지역)에서나 갈릴리(북쪽 지역)에서 이스라엘에게 버림받으셨다. 유대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겨냥하고 그를 죽이려고 결심했다. 백성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통치에서 구출해 줄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메시아를 바라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미 그런 소망을 저버리셨다. 한 때 예수님을 따랐던 무리는 예수님이 자신들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교훈을 가르치시자마자 등을 돌렸다(요 6:66). 그리고 메시아 전문가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을 가장 악의적으로 대하고 예수님을 미워했다.
제자들이 낙담한다 해도 누가 그들을 비난할 수 있는가? 제자들이 이해했던 하나님 나라는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을 듯이 보였다. 예수님이 이 땅의 보좌에 앉으시고 그의 통치가 이스라엘에 집중되고 예수님의 나라가 온 땅을 휩쓸 것으로 보았던 그들의 영광스러운 메시아적 기대는 실현되지 않을 듯이 보였다. 반대로 그들은 가진 것이라곤 보잘것없고 버림당하고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어 보이는 하찮은 소수였다. 그들은 휴식과 개인적인 시간과 안정을 찾기 위하여 이방인들이 대체로 많은 동네에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물러났다. 제자들은 여전히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의심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확실히 모든 것이 자기들의 계획과 반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이것으로 불행이 끝이 아니라는 듯,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셨다"(마 16:21). 베드로는 이런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절) 하고 말했다.
그들의 확신이 흔들렸다. 그들의 소망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불길한 조짐이 그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매우 혼동스럽고 걱정스러웠던 게 틀림없다. 이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확신을 불어넣어 주셨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 예수님은 원래의 계획에 아무 변동이 없음을 그들이 알기를 원하셨다. 잃어버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계획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이런 말씀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다. 참된 교회가 아무리 우겨쌈을 당하거나 핍박당하거나 순교당하거나 버림받거나 비방당하거나 궁핍하거나 무시당하는 듯 보여도, 주님은 택하신 자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가장 연약한 듯이 보일 때 다시 살펴보라. 예수님은 여전히 그 분의 교회를 세우고 계신다. 원래의 계획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오늘날 시대는 예수님의 주권적 목적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 우리 세계의 괴로운 형편이 예수님의 구상을 변경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보이는 교회가 아무리 부패하고 세속화했거나 그렇게 된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적 가르침과 사역이라는 원래의 확실한 기초 위에 여전히 그 분의 교회를 세우고 계신다.
예수님은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심으로, 교회의 궁극적인 성공에 대한 가장 확실한 보장을 해주셨다. 만일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맡겨 놓았다면, 교회 건설은 오래 전에 박살났을 것이다. 교회사에는 인간의 실패와 세속적 부패와 신실하지 못한 태도와 교리적 일탈과 타협과 연약함의 증거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주님은 여전히 교회를 세우신다. 교회가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교회의 핵심에는 그리스도께서 몸소 세우시는-하나님이 택하신 자들로 구성된-몸이 있고 그 몸은 강건하고 신실하게 자란다. 제아무리 냉혹한 때라도, 언제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롬 11:5)가 있다.
바울은 생애와 사역을 마칠 즈음 이렇게 썼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딤후 1:15).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딤후 4:16). 요한 사도는 생애를 마치려 할 때 추방당해 밧모 섬에 있었다. 그때 주님이 그에게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쓰는 일을 맡기셨다(계 2-3장). 일곱 교회 가운데 다섯 교회가 그 존립을 위태롭게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분의 교회를 계속 세우시며, 믿는 남은 자의 순결을 몸소 지키신다. 에베소서 5:25-27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세우고 계시는 교회는 결국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스러운 교회를 당신 앞에 세우실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광을 영원히 드러낼 수 있도록 사용하시는 수단으로 계획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지혜를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세속적 태도, 육적인 태도, 어리석음, 무감각, 배도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교회를 멈추게 할 수 없다. 그것들이 어떤 회중은 멈추게 할 수 있지만, 교회는 여전히 전진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확실히 그 분의 교회를 세우실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교회의 친교-"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
예수님의 말씀은 거룩한 친교에 관하여 언급한다. 예수님에게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비인격적인 사업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소중한 소유이다. 사도행전 20:28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에 대해 말한다.
성경은 교회를 그의 몸(골 1:24)이라고까지 말한다. 우리는 거룩한 연합으로 그리스도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다소 사람 사울이 교회를 핍박하고 있던 때를 기억하는가? 그리스도께서는 다메섹 도상에서 그를 붙들고 이렇게 물으셨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 교회를 공격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공격한다.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7).
이 진리와 비슷한 것이 구약에 있다. 스가랴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슥 2:8).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자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을 찌르고 있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맺으시는 관계와 똑같다. 누가 그리스도의 택하신 자를 해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크게 화를 내신다(참고. 마 18:6, 10).
아무도 교회를 정복할 수 없음-"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교회는 난공불락이다.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18절). 사람들은 이 구절이 내비치는 심상을 종종 오해한다. 예수님은 교회가 음부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문'(영어 성경에는 gate로 되어 있고 한글 개역 성경에는 권세로 되어 있음-역자주)이라는 말은 공격적인 밀쳐냄을 뜻하지 않는다. 문은 무기가 아니다. 그것은 차단벽이다. 예수님은 음부를 감옥처럼 묘사하면서, 음부의 문이 교회를 속에 두거나 가두지 못할 것이라고 넌지시 말씀하신다.
'음부'는 죽은 자의 거처이다. 이 말은 히브리어 스올(Sheol, 참고. 시 6:5)에 해당하는 헬라어이다. 흠정역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한다. '음부의 문이 교회를 누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번역은 잘못이다. 예수님은 영원한 지옥의 고통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무덤이 택하신 자들을 붙잡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죽음의 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 둘 수 없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도 잡아 매어둘 수 없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실제로 '음부의 문이 교회를 누르지 못할 것이다'는 말은 부활의 약속이다. 죽음과 부활에 관한 말이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일반적인 주제가 되고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방심할 수 없는 시절을 맞닥뜨리고 있고 결국 (요한을 제외한) 그 모두가 예수님을 위하여 순교자로서 이 땅의 생명을 바칠 것을 아셨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참이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그러나 먼저 예수님은 택하신 자들을 무덤이 결코 붙들어 둘 수 없음을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 주제는 전체 신약 도처에 나온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해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롬 6:9). 죽음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을 다스리는 상전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19). 요한의 묵시적 이상에서 예수님은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7, 18). 예수님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신다"(히 2:14, 15). 예수님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으므로, 이제 무덤이 예수님의 택하신 자들을 가둬 놓을 수 없다.
이 제자들은 언젠간 격렬한 전쟁에 둘러싸였을 것이며, 성령님이 그들의 마음에 이 약속을 상기시켜 주셨을 것이다. 이 약속이 그들에게 큰 위로와 새 힘을 주었을 것이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패배하지 않았다. 그들은 핍박을 받을 것이지만-심지어 믿음 때문에 죽을 것이지만-궁극적으로 그들은 승리자가 될 것이라는 보장을 받았다. 음부의 문이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
교회의 권위-"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그런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이 문장의 해석도 프로테스탄트 신자와 가톨릭 신자 사이에 오랫동안 의견이 갈린 문제였다. 가톨릭 신학은, 그리스도께서 이 약속을 통해 사죄 의식을 제정하고 계셨다고 가르친다.
분명히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엄청나게 많은 하늘의 권세를 베드로에게 허락하고 계신 듯 보인다. 그러나 이리하여 베드로가 교황이 되었다고 인정하기 전에, 요한복음 20:23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모든 사도들에게 같은 권세를 주신 사실을 주목하라. 예수님은 그들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또 마태복음 16장에서 우리 주님은 베드로를 모든 사도의 대표자로 여기시고 말씀하고 계신 듯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태복음 18:15-20에서 교회 권징에 관한 교훈을 주시는 문맥에서 '매고 푸는' 것에 관하여 비슷한 말씀을 하신 것을 주목하라. 우리는 이 구절을 제2장에서 간략하게 살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죄를 범하는 신자를 개인적으로 대면하고 나서 그가 회개하기를 거절하면 한두 증인을 증참하여 두번째 경고를 하고 그런 후에도 회개하지 않으면 전체 회중이 공개적으로 책망하고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17절)로 취급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절).
이 구절에서는 서너 가지 진리를 주목해야 한다.
첫째로, 이 구절은 베드로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이는 제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모든 신자에게 주시는 교훈이다.
둘째로 '매고 푸는 것'은 우리가 악한 영들을 대하는 방법과 무관하다. 19절("너희 중에 두 사람이......합심하여......이루게 하시리라")은 어떻게 기도의 응답을 받느냐에 관한 교훈이 아니다. 예수님은 구속받은 자들의 모임에서 죄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관하여 교훈하셨다. '매이는 것'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죄이다. '풀리는' 것은 그 사람이 회개할 때 그 사람의 죄책이다. 신자라면 회개하라는 부름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기초로 삼아 이 조건들을 확언할 수 있다. '너희 중 두 사람이 합심하는' 사안은 양무리 가운데 죄를 범하고 있는 회원을 다루는 방법이다.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모이는 두세 사람'(20절)같이 작더라도 모든 모임이 죄를 처리하는 권세를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세번째 진리는 그 권세의 원천이 그리스도이지 이 세상의 대리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20절).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자신의 원리에 따라 행하는 신자의 교제를 통하여 친히 통치하신다.
그리고 넷째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권세를 함축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성좌 선언(ex cathedra)의 칙령을 대대로 전해 줄 수 있는 통치자에게 권세를 주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을 매고 푸는 권세를 어떤 사람에게 주시지 않았다. 확실히 예수님은 베드로를 교회의 머리로 만드시지 않았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권세는 모든 신자에게 속한다. 그리고 이 권세는 우리가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하늘의 말씀을 갖고 있고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 1:3)는 사실에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 즉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 백성의 생활에서 권위 있게 만들라고 명령하셨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그들에게 주셨다.
하나님 나라의 열쇠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교회에 맡기신 거룩한 것이다. 이 열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고 못 들어가게 하는 관리를 상징한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상에 두셨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가리켜 주는 횃불로 설 수 있도록 복음을 전파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다. 우리가 타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손상하거나 복음을 속이면, 우리는 그 횃불이 아니며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사용해야 하는 유일한 권세를 상실한다.
하지만 교회가 하나님과 그 말씀에 신실할 때, 우리는 실제로 여기 이 땅에서 하늘의 결정을 시행한다. 우리는 권세를 갖고서 믿지 않는 세상에 말할 수 있다. 하늘이 우리와 의견이 일치할 때, 문제는 가장 높은 권세에 따라 해결된다. 그러나 우리가 타협하여 말씀을 손상하면, 우리의 권세가 나오는 원천을 잃는다. 그래서 교회가 엄숙하게 하나님을 대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고 세상에서 구별되는 일은 그토록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하고 기도하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을 의미한다.
효과적인 교회의 표지
교회가 초자연적인 것임은 틀림없다. 마케팅 노하우나 인간의 영리함이나 교회 성장 기술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회의 수를 더하시고, 교회로 참되게 성장하게 하고 건강과 생명력을 교회에 복으로 주신다.
수적인 성장만이 건전한 교회를 보장하지 않는다. 확실히 성장은 생명을 나타내는 표지 가운데 하나이지만, 우리가 보았듯이 크기는 하나님의 복이나 교회의 영적 건강을 입증하는 증거가 아니다.
건전한 교회의 표지는 무엇인가? 우리가 주께서 자신의 교회를 자신의 방법으로 세우시도록 하면서 추구하는 교회의 합당한 목표는 무엇인가? 글을 마감하면서 건전한 교회의 몇 가지 표지를 간단하게 제시하겠다. 나는 다른 곳에서 이 목록을 길게 말했지만 < The Master's Plan for the Church(Chicago : Moody, 1991)을 보라. > , 아마 이 짧은 요약은 마케팅 원리를 제쳐놓고 분투하는 교회가 목표를 지향하도록 도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확신컨대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교회의 청사진을 제공하는 성경의 기본 원리이다.
경건한 지도자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초대 교회의 핵심 지도자가 될 열한 사람에게 주로 집중되었다. 리더십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조건은, 비난을 받지 않는 하나님 말씀에 유능한 선생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 나타나는 중요한 결핍은 이 리더십의 영역에 있다고 감히 말하고자 한다. 너무 많은 교회가 지도자에 대한 영적 요구 조건을 무시하며, 대신에 타고난 강력한 지도자나 동기 부여자처럼 보이고 비즈니스에 성공하거나 돈이 많거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택한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경건한 선생이어야 한다. 그는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9).
디모데전서 3:1-7과 디도서 1:5-9은 교회를 지도해야 하는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바울의 인물평을 담고 있다. 두 구절을 한데 놓고 보면, 목회자와 장로가 갖추어야 하는 영적 자질에 대한 포괄적인 목록이 나온다. 목회자와 장로는 책망할 것이 없고 자기 아내에게만 마음을 쏟고 절제하고 사려 깊고 관용하고 아담하고 공정하고 독실하고 나그네를 대접하고 선을 좋아하고 가르치기를 잘하고 자기 중심적이거나 제멋대로 하지 않고 급히 분내거나 툭하면 싸우지 않고 다투지 않고 돈을 사랑치 않고 자기 집을 잘 다스리고 불신자에게 평판이 좋은 사람, 즉 성숙한 신자지 최근에 믿은 회심자가 아니다. 이와 같은 경건한 모범 기준의 견지에서 목회자와 장로는 성경을 가르치고 그들로 그리스도를 닮도록 인도한다.
이런 것이 지극히 높은 기준으로 보이는가? 하지만 이것들은 성경이 세워 놓은 자격이다. 이 지침을 무시하는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을 반대하고 하나님의 복을 잃는다. 찰스 스펄전이 말하곤 했지만, 리더십의 문제에 관하여 타협하는 것은 "교회가 범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자살 행위이다." < "This Must Be a Soldier's Battle," The Sword and the Trowel(De-cember 1889), 634. >
확실히 우리 세대의 미국 복음주의가 당한 비극적인 재난 가운데 하나는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자격을 잃은 후에도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 안일함이다. 기독교 지도자가 형편 없는 도덕적 실수로 교회를 추하게 만들었으나 나쁜 평판이 거의 사라지려 할 때 다시 지도자가 되는 일은 별스런 일이 전혀 아니다. 이는 성경적 기준에 대한 치명적인 타협이다. 이는 현대 실용주의가 낳은 가장 해로운 결과 중 하나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실수하고 참으로 회개한 지도자에게라도 회복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분명히 다시 교제가 회복되어야 하지만, 장로나 목회자의 역할을 다시 맡아서는 안 된다. 교회는 지도자의 죄를 수용하기 위해 성경의 기준을 버릴 수 없다. 지도자에게 요구하는 성경의 조건은 의도적으로 높은 기준으로 정해졌다. 왜냐하면 지도자는 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를 추하게 만드는 자들은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이 책망받을 일이 있는 한 지도자 자격이 없다. 성적인 추문이나 순결을 잃는 일과 관련된 경우는 영구적인 자격 상실을 뜻할 수 있다(잠 6:32, 33). 바울 사도는 이런 가능성을 인정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교회의 지도자가 개인적인 거룩함의 문제에서 실수하면, 그 교회는 신앙 고백이 아무리 정통적이라도 불명예스럽다. 교회 지도자에 대한 성경의 필수 조건을 무시하는 자들은 쓸모 없는 재료로 집을 짓거나 참된 기초에 집을 세우지 않고 있는 것이다(참고. 고전 3:10, 11). 우리가 진리와 의를 아무리 강력하게 외친다 해도 지도자의 삶이 뒷받침해 주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그들의 가르침을 위선적이라고 거부하거나 참된 경건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라고 간단히 결론을 내릴 것이다.
성경적인 목표
분명히 교회가 목표를 설정하는 일은 전혀 잘못이 아니다. 사실상 교회라면 활동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방향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 대하여 갖는 목표는 성경적이어야 한다. 그릇된 목표는 그릇된 방향을 세우고, 그렇게 되면 방향이 없는 것 못지 않게 나쁘다. 아마 훨씬 나쁠 것이다. 성경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거기에는 예배와 교제와 영적 성장과 복음 전도가 들어 있다. 아마 이것들이 일차적인 목표일 것이다. 가정을 튼튼히 하는 일과 성경적인 상담과 어린이 교육 등과 같은 구체적인 목표들은 일차적인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가 하는 점에 비추어서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 구체적인 목표는 일차적인 목표에 늘 종속되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교회는 주목할 만한 음악 사역을 펼치거나 기독교 국민학교를 운영할 수 있다. 만일 교회가 출석수를 자랑하거나 돈을 벌려고 그런 일을 한다면, 그것들은 가치 있는 목표가 아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 사역을 교회 가정을 영적으로 튼튼하게 하거나 복음을 좀더 널리 전파하는 수단으로 본다면, 그것은 합당한 목표다. 일차적인 목표를 장려하는가 하는 점에서 모든 교회 사역을 평가할 수 있다면, 그런 관점은 교회가 가야 할 길을 늘 가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제자도
교회는 전문 사역자가 구경꾼에 불과한 평신도에게 격려를 받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사역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 직원뿐만 아니라 교회 교인은 으레 사역을 하고 있어야 한다. 에베소서 4:11, 12이 말하고자 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는 성도들을 준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 하려고 주신 사람들이다.
이 모든 것은 제자도에서 나온다. 제자도는 성경적 진리를 가르치고 성경을 생활에 적용하고 그런 후에 성경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배우는 데 초점을 둔 깊은 영적 교우 관계를 발전시키는 사역이다. 이 제자도는 그저 학문적인 교훈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경건한 모범에 의하여 강화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제자도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사람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는 일이 포함된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제자들에게 행하신 사역은 성경적 모델이다. 교회는 목사로부터 새로 믿은 회심자에 이르기까지 어떤 수준에서도 그런 제자도를 격려하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나가서 전함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자기의 지역 사회로부터 출발하여 땅 끝까지 전하는 복음 전도를 힘주어 강조할 것이다. 초대 교회는 세상을 어지럽게 했다(행 17:6).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들에게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행 5:28) 하고 말했다. 짧은 기간 그들의 메시지는 온 지역 사회에 퍼졌다.
범퍼에 물고기 스티커를 붙인 차를 몰고 교회로 가면 증인으로서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너무 많다. 효과 있는 교회는 어떤 수준에서든 규칙적으로 개인이 사람을 만나 복음을 전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어떤 교파에서는 우리 교회를 복음 전도와 무관한 교회라고 딱지를 붙였다. 하지만 우리는 주일 밤이면 거의 빠지지 않고 새 회심자를 위하여 세례 예배를 갖는다. 사람들은 세례를 받을 때 온 회중 앞에서 증거한다. 이 사람들 대부분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구원 얻는 지식을 얻게 되는지 아는가? 그들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개인적으로 만남으로써 그 지식을 얻게 된다. 우리 교회 사람들은 이웃, 동료 직원, 소년 야구단의 믿지 않는 부모들, 학교 친구,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 의사, 변호사, 그리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증거한다. 그리고 수년 동안 주님은 복 주셔서 우리 교회가 후원해 온 그 어떤 예배나 프로그램이나 행사보다 일대일 복음 전도 활동을 통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셨다.
교회가 개인적으로 사람을 만나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을 강조하지 않으면 정체하고 쇠퇴하다가 결국은 실패하고 만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데 사용하시는 방도는 그리스도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신실한 증거이다.
서로에 대한 관심
그리스도께서 세우고 계시는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서로의 생활에 영향을 준다. 교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구경하러 가는 극장이 아니다. 와서 앉았다가 그냥 나가버림으로 아무런 교제가 없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서로 모르고 지내고 참견하지 않는 관계를 부추겨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 25) 하는 권고를 받았다.
'서로'라는 말은 교회에 대한 신약의 교훈에 거듭 나오는 표현이다. 여기서 이런 명령 가운데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 12:10).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롬 12:16).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롬 14:13).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롬 15:5).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서로 권하라"(롬 15:14).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 5:13).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엡 4: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골 3:9).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골 3:13).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살전 5:11).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 5:16).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벧전 1:22).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벧전 4:9).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벧전 5:5).
이 목록 하나만 해도 지금까지 마케팅 기술과 이용자에게 친절한 태도에 관하여 쓴 모든 책보다 훨씬 값지다. 이 목록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우고 계시는 교회의 자질이다. 설립자 그리스도처럼 위에서 예를 든 '서로'를 위한 덕목을 실천하는 교회는 관심을 쏟고 상대방의 필요에 민감하고 사랑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여기에다 영적 은사를 적절하게 발휘하면(롬 12:3-8; 고전 12:4-11; 벧전 4:10-11),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공동체가 될 것이다. 이 공동체는 세상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가정에 대한 헌신
현대 사회는 가정에 대하여 전에 없는 공격을 퍼부었다. 오늘날 뉴스에 등장하는 동성연애와 낙태와 여성해방론과 이혼과 청소년 폭력단 등과 같이 대부분의 중대한 논쟁 문제는 가정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가정을 가장 충실하게 대하지 않는다. 한 단위로 활동하는 가정이 거의 없다. 이와 같은 가정의 파편화는 모든 사회의 도덕성과 안정성을 속속들이 해쳤다.
교회는 이런 참화를 당하거나 수용할 수 없다. 교회는 교인 가정들의 잘못을 들이대어 바로잡고 그런 후에 그 가정들을 훈련해야 한다. 힘 있는 가정은 교회의 등뼈이다. 그리고 힘 있는 가정은 힘 있는 개인을 기른다. 우리가 가정을 우선으로 여기지 않으면 큰 대가를 치를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고 인도하라(엡 5:25) 하고 아내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5:22) 하고 아이들에게 부모에게 순종하라(6:1) 하고 부모에게 아이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 안에서 저들을 양육하라(6:4)고 가르침으로써 견고한 부부 생활과 건전한 가정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뜻이다.
성경의 가르침과 설교
강단에 힘이 없는데도 오랫동안 건전하게 버틸 수 있는 교회는 없다. 그리고 성경이 설교의 기초가 아니면, 참으로 강력한 강단은 없다. 물론 이 책이 내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이 점을 분명히 강조해야 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설교에서 다른 방편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하는 순간, 끊임없는 변화를 잇따라 겪게 될 것이다. 나이든 사람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경험이 있어서 새로운 일이 닥치고 사람들이 그 일에 몹시 흥분하고 있을 때 아마 40년 전에 있었을 그와 같은 흥분을 기억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 유행과 이목을 끄는 활동이 생겼다가 사라지고 하는 일을 보아 왔다. 그런 일에는 으레 큰 흥분과 열정이 따르고 교회를 가득 채울 유일한 것이라는 둥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둥 선전이 거창하다. 사람들은 유행하는 것마다 그런 말을 해 왔다. 그러나 몇 년 지나면 사람들은 그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이목을 끄는 다른 일이나 새로운 생각이 나타난다. 어떤 사람이 꼭 필요한 것을 생각해 내거나 현대인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를 갖고 있다고 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향하여 질주한다. 그러나 곧 그 일은 시들해져서 사라지고 다른 것이 대신 들어선다.
이는 확실히 교회가 세상처럼 이러한 유행의 끊임없는 변화를 보이는, 매우 슬프고 애석한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 빠진 교회에는 지금까지 교회의 영광이었던 안정감과 견고함과 계속되는 메시지가 빠져 있다.
< Preaching and Preachers(Grand Rapids, Mich. : Zondervan, 1971), 35. >
성경적 설교는 느끼는 필요를 충족시키는 일이나 심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나 청중을 즐겁게 하는 일이나 사람들로 스스로에 대하여 만족하게 하는 일이나 오락 지향적 시대에 강단을 강제로 빼앗는 다른 허망한 일시적인 유행으로 기울 수 없다. 성경적 설교는 하나님의 진리를 들어 올리고 그 진리에 마음을 기울이라고 요구해야 한다. 그런 지침에는 혁신과 창의성을 발휘할 여지가 많다. 그러나 아무튼 메시지를 바꾸거나 줄이면 교회의 책임을 팔아 치우게 된다. 성경에 근거하여 강력하게 전한 진리는 교회의 필수조건이다. 다른 어떤 설교도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교회에 합당치 않다.
기꺼이 변화하려는 마음
건전한 교회는 기꺼이 변화하려고 해야 한다.
잠깐! 당신은 교회에 전통주의를 호소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어떤 사람이 말한다. 그렇지 않다. 인간의 전통에는 거룩한 것이 없다. 나는 뻣뻣한 형식주의나 진부한 관습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정체 현상이 교회에 치명적일 수 있다고 경고하는 사람과 동감이다. 교회가 참신하고 창조적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 됨과 설교의 우선됨과 성경적 진리의 근본 요소를 버려야 한다고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교회의 마지막 일곱 낱말이 "우리는 전에 그 일을 그렇게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융통성 없는 태도는 건전한 교회의 독이다. 우리는 기꺼이 장성하고 적응하고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고 하되, 성경적 진리를 희생하여 하거나 복음 메시지에 해를 끼치면서 해서는 안 된다.
예배
나는 마지막으로 말하려고 예배를 아껴 두었는데, 예배가 가장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예배가 다른 모든 것을 종합하기 때문이다. 삼사 년 전, 가장 궁극적인 것(The Ultimate Priority)이라는 제목으로 예배에 관한 책을 썼다.
< (Chicago : Moody, 1983). >
나는 예배가 교회와 각 그리스도인의 가장 우선적인 일이라고 믿는다. 참된 예배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교회의 다른 모든 특징을 포함하며 성취한다. 예배의 초점을 하나님께 두는 교회는 다른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제자리에 서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사역에 대한 시장 지향적이고 이용자에게 친절하고 실용주의적인 접근법의 문제가 있다. 즉 이 접근법은 인간 중심적이지 하나님 중심적이지 않다. 이 접근법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에 관심을 두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 접근법은 교회가 하나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있다고 본다. 이 접근법은 건축 거장의 계획을 성취하기는커녕 잘못된 청사진에 따라 작용한다.
이용자에게 친절하고 오락 지향적이고 장사에 골몰하고 실용적인 교회는 아마 잠시 번영할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모든 운동은 시류에 따른 유행에 기초를 두었으므로 오래갈 수 없다. 변덕스런 바람이 결국 방향을 틀 때,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 교회들은 인기를 잃고 사그라들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교회들은 시대의 정신과 더불어 변하기로 결정하고 성경적 기독교의 모습을 몽땅 내버리기 십상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교회들은 좀더 확실한 토대 위에 다시 서야 할 필요성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이 교회들이 세번째 행동을 택하며, 세속적 태도와 타협이 교제에 스며들어 더 이상 변화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지체하지 말기를 기도한다.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썼다. "반죽에 누룩을 집어 넣는 것은 쉽지만 누룩을 빼는 것은 어렵다......교회에서 영적으로 살아 있는 자들은 이런 일을 보고 주께서 원수를 꺾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 "Notes," The Sword and the Trowel(October 1888). Reprinted in The "Down Grade" Controversy(Pasadena, Tex. : Pilgrim, n.d.), 67. >
10
맺음말
<음말 >
'내리막'에서 기차는 매우 빨리 달린다. 기차역을 또 하나 지나쳤다. 다음은 무슨 역일까? 그 다음은 무슨 역일까? 찰스 스펄전
< "Notes," The Sword and the Trowel(May 1889). Reprinted in The "Down Grade" Controversy(Pasadena, Tex. : Pilgrim, n.d.), 76. >
음주의의 미래는 어떤가? 오스 기네스(Os Guinness)는 교회 성장 운동에 관한 통찰력 있는 기사를 잇따라 쓰면서, 전통적인 복음주의는 세속적 영향력에 저항했을 뿐만 아니라 세상 정신에 대한 '인식적 저항'(cognitive defiance)을 강조했다고 지적한다. 역사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의 소명이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이해해 왔다. 하지만 "현대의 정신이 한창인 지금, 세상은 매우 강력하고 널리 크져 있고 호소력을 갖게 되었으며 인식적 저항이라는 전통적인 입장은 희귀해져서 거의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 "Recycling the Compromise of Liberalism," Tabletalk(May 1992), 51. > 이 길을 따라 어디선가 복음주의자들은 세상과 벗이 되려고 했다.
기네스는, 우리가 세상에 있지만 세상의 것이 되지 않도록 부르심을 받았지만(요 17:14-18)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공식을 뒤집어서 실제로 세상 속에 있지 아니하면서 세상의 것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세상의 가치관을 자신의 사고 방식에 집어 넣으려고 케이블 텔레비전과 비디오와 라디오와 다른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허용하면서 반면에 세상에서 가장 처절하게 복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지 않음으로써 그 공식을 뒤집어서 실천했다.
"이제 복음주의자들은 오늘날 가장 종교적인 현대화 기수로서-그리고 타협자로서-자유주의를 능가하고 있다"고 기네스는 쓴다.
< Ibid. >
그는 현대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매우 널리 퍼져 있는 시장 지향적 철학이 '고전적인 자유주의의 오류를 되풀이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 Ibid., 51. >
우리가 지적했듯이, 백 년 전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이 시나브로 모더니즘에 사로잡혔던 이유는 자유주의자들이 복음주의 체계 안에서 등장하여 복음주의의 말을 사용하고 앞뒤 돌아보지 않고 평화와 관용을 호소하여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모더니즘도 똑같은 길을 따르고 있다. 그 전술은 다시 한번 복음주의자들을 놀라게 만들기 쉬울 것이다.
대부분의 시장 지향적 거대 교회는, 타협하여 교리를 손상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방법론에서 비정통적이었던 것 못지않게 교리에서 정통적이라고 내세우기 때문에 복음주의자들의 관심을 끈다. 대중은 그런 약속으로 다시 충분한 확신을 얻고 간단히 자신들의 비판적 기능을 버림으로써 무너지기 더 쉽다. 불행히도 현대 복음주의들은 참된 분별력이 부족하다.
사실, 이 교회들이 어떤 교리적 입장을 취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간단히 말해 교리는 그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친구 하나는 이용자에게 친절한 교회가 교리를 자신들의 사역에 어떻게 통합하는지 알고자 했다. 그는 이 운동에 속하는 가장 크고 잘 알려진 교회 중 하나를 택하여 그 교회가 녹음 테이프 사역으로 만든 카세트 서너 개를 주문했다. 그는 성경적 교리에 초점을 두고 있는 테이프를 부탁하여 테이프 서너 개와 목록을 받았다. 목록을 훑어 보고는, 이 교회가 전하는 설교 테이프 30개 가운데 하나 이상의 비율로 오늘날의 시사 주제와 심리학 문제(우울증, 이상 식욕 항진증, 자신에 대한 이미지)와 개인 관계와 동기 부여 주제와 그 밖의 유행하는 문제를 종종 다루는 것으로 드러났다. 교리를 다루는 메시지는-심지어 성경 본문을 기초로 한 설교는-드물었다. '헌신의 대가'라는 제목의 테이프는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을 다루지 않고 다른 사람과 끈끈한 개인 관계를 세우는 데 필요한 개인적인 희생을 다루었다. 내 친구는 이 목사의 설교를 몇 시간 들은 후에, 어떤 기본적인 교리 문제와 관련하여 그 사람의 입장이 어떤지 말하기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대부분의 메시지는 즉시 판촉 회의나 학교 모임이나 비즈니스를 위한 식사 시간 등 어떤 상황에서든 적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설교들은 예를 들 목적으로만 성경을 사용하고 종종 그럴 목적으로 약간의 성경 내용을 담고서, 교리 문제나 성경 문제를 간단히 회피했다.
백 년 전 모더니스트처럼 이용자에게 친절한 운동에 속한 교회들은, 교리는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평화는 건전한 가르침보다 더 중요하다고 결정하였다. 그들은 현대인에게 호소력을 갖기 원하여, 메시지를 우호적이고 유쾌하고 상황에 적합한 대화로 만들려 한다. 불행하게도 이 교회는 가장 '현실에 적합한' 시사 주제를 받아들여 이야기할 능력이 부족하다. 현대 세대가 좋아하는 교리들-급진주의, 낙태, 여성 해방론, 동성 연애, 정치적으로 요구하는 다른 도덕적 문제들-은 이용자에게 친절한 교회에 가장 분명한 문제들을 제시한다. 그들의 모호한 신학과 구도자에게 민감한 철학 때문에 그들은 그런 문제에 관하여 굳건한 성경적 입장을 취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대의 정신에 도전하자마자 마케팅 호소력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계속 침묵하거나 항복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되었건 그들은 진리에 관하여 타협한다.
낙태에 반대하여 굳건한 태도를 취할 마음도 없는 그 교회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교리의 침해 문제를 어떻게 다루게 되겠는가? 동성 연애나 여성 해방론과 같이 명백한 오류를 정죄할 만큼 분별력이 없는 교회가 온전한 교리에 대한 미묘한 공격을 어떻게 다루게 될 것인가?
복음주의의 모습이 급속히 변하고 있다. 1990년 2월 19일자 크리스차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지에는 로버트 브라우(Robert Brow)가 쓴 '복음주의의 대변동'(Evangelical Megashift)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는데, 이 기사는 복음주의 신학자 가운데서 일어나는 급진적인 사고 방식의 추세를 알린다. 이 기사가 이름 붙인 '새 모델' 복음주의라는 운동은 '옛 모델' 자유주의와 다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다. 이 새 모델 신학은 핵심 용어를 다시 정의함으로써 좀더 우호적이고 온건한 기독교를 만들려 한다.
예를 들어 새 모델 복음주의는 지옥을 다시 정의한다. 이 새 견해는 "천국에 있으려 하는 사람은 지옥에 갈 수 없다" < "Evangelical Megashift," 13. >
고 주장한다. 그래서 지옥을 더 이상 영원한 형벌을 받는 곳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에 지옥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벗어난 은신처로, 거기 가기를 결심한 사람만 간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처럼 새 모델 신학에서......진노 특히 하나님의 진노는 옛 모델이 이해하던 것과 다르다. 진노는 분노에 찬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부모처럼 파괴적이거나 잘못된 행동을 야단치려고 주시는 나쁜 결과라는 뜻을 담고 있다. 구약에서 사용하는 진노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법정 용어가 아니라고 한다. 그 말은 사람을 영원한 지옥에 보내는 것을 결코 뜻하지 않는다. 사실상 이 말은 '나쁜 결과'라고 간단히 번역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전염병이나 가뭄이나 기근이나 야생 동물과 침공하는 군대의 파괴와 같은 나쁜 결과이다.
< Ibid. >
이것으로도 전부가 아니다. "죄 또한 뜻이 바뀐다......옛 모델 신학에서는 사람이 한 가지 죄를 지어도 정죄받아 능히 지옥으로 가게 된다. 반면에 새 모델 복음주의자들은 죄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부성적 관심을 언제나 언급한다. 사랑하는 부모는 아이가 변화하도록 돕기 위하여 죄나 나쁜 행동을 처벌하거나 바로잡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렇게 할 목적으로 아이를 집에서 내쫓는 법은 없다." < Ibid. >
즉,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지옥으로 보낼 근거로 죄를 들이대지 않으실 것이다.
새 모델 신학에서 하나님의 일차적인 속성은 자비이다. 이 속성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와 진노와 주권을 뒤엎고 대신한다. 새 모델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변호인'이라는 의미에서만 재판장이시다. 이 하나님의 유일한 관심은 '백성의 자유와 평화' < Ibid. >
이다. 더욱이 새 모델이 말하는 교회는 세상과 대결하려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고 예수님처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즐기는 법을 배우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의 능력을 제공하려고" 부르심을 받았다.
< Ibid., 14 >
만일 이용자에게 친절한 신학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 신학은 성경적이지 않고 사실 전혀 새롭지 않다. 이것은 재생된 자유주의일 따름이다. 위에서 말한 것들은 자유주의자들이 여러 해 동안 주장해 온 동일한 주장이며 동일한 가르침이다. 현재에 와서는 '복음주의'로 표시되는 것만 다를 뿐이다. 이름에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하라. 스펄전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복음주의자이다. 우리는 전적으로 복음주의자이다' 하고 외치지만 복음주의가 뜻하는 바를 말하지 않는 것은 위선에 불과하다." < "Notes," The Sword and the Trowel(October 1888). Reprinted in The "Down Grade" Controversy, 66. > "당신은 일부를 믿거나 전부를 믿거나 아무것도 믿지 않고서도 '복음주의' 군대에 등록할 수 있다. 사실 그들이 이렇게 말한다. 비국교도 가운데 이런 자유주의를 폭로하고 거절할 수 있는 정직하고 솔직한 복음주의자가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 파수꾼은 다 잠들었는가? 모든 교회가 무감각한가?" < "Notes," The Sword and the Trowel(January 1889), 40. >
새 모델 신학에 따르면, "십자가는 법적 변제가 아니라 성자로서 그의 영원한 본성이 시공간의 몸으로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표현이었다." < "Evangelical Megashift," 14. >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대속적 속죄가 아니라 그의 도덕적 모범이었다고 하는 자유주의의 핵심 교의를 새로운 방식으로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복음주의 신학의 중심 진리를 공격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어볼 필요 없이, 스스로 복음주의자라고 생각하고자 하는 어떤 사람들이 이미 경고 표시를 지나쳐서 이제 조심하지도 않고 비탈길로 내닫고 있음을 입증한다.
이용자에게 친절한 교회들은 새 모델 신학과 같은 조류에 대항할 방법이 없다. 그들은 시장 지향적 철학을 따르므로, 이 가르침에 반대하여 견고한 교리적 입장을 취하기가 쉽지 않다. 리더십에 대한 그들의 견해 때문에 그들은 진리를 가르칠 수 있는 성경적 자격을 갖춘 목회자보다는 진리를 팔 수 있는 마케팅 관리자를 고용하게 된다. 사역에 대한 그들의 접근법은 너무 무(無)교리적이어서 자기 교인들에게 미묘한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가르칠 능력이 없다. 그들은 논쟁을 싫어하므로, 복음주의로 가장하는 그릇된 가르침에 대항할 수 없는 처지에 빠진다. 사실상 새 모델 신학은 이용자에게 친절한 철학에 이상적으로 어울리게 보인다. 왜 이용자에게 친절한 교회가 그런 교리를 대적하려 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계속 복음을 증거하려면, 그런 가르침에 대적해야 한다. 실용주의는 성경적 기독교가 맞닥뜨리는 위험에 해답이 되지 못한다. 실용주의는 육적 지혜라서 영적으로 파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된다(육적 지혜와 영적 지혜를 대조한 18세기의 생각을 알려면 부록 3을 보라. 이 대조는 20세기 실용주의에 특히 잘 적용된다).
마케팅 기술은 인기와 세속적 인정에 대한 약속만 제공한다. 확실히 그 기술은 내리막길의 위험과 맞설 보호막을 전혀 제공하지 못한다.
유일한 소망은 성경과 건전한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 복음주의는 다시금 성경적이려고 마음을 먹고 세상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우리가 믿는 바를 기꺼이 변호하려 하고 그릇된 가르침을 대항하고자 용기를 내어야 한다. 우리가 뭉쳐서 우리의 믿음을 위협하는 최근의 위험을 각성하지 않으면, 원수들은 내부에서 우리를 공격할 것이며 우리는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될 것이며 백 년 전에 교회를 황폐하게 만들었던 동일한 재난이 우리 세대를 또한 칠 것이다.
하지만 비겁하게 평화를 사랑하는 태도를 내던지고 우리 주님과 그 분의 진리를 위하여 외칠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겁쟁이 같은 정신이 많은 사람 위에 머물고 그들의 혀는 마비되었다. 오 참된 믿음과 거룩한 열정이 폭발하였으면! 찰스 스펄전
< "Notes," The Sword and the Trowel(May 1889). Reprinted in The "Down Grade" Controversy, 76. >
<8 >
부록 1
스펄전과 내리막길 논쟁
<록 1. 스펄전과 내리막길 논쟁 >
(청교도 시대 마지막에) 이런저런 방법으로 처음에는 사역자들이 그 다음에는 교회들이 '내리막길'에 접어들었고, 어떤 경우에는 그 걸음이 급하여 대개 매우 참혹했다. 사역자들이 옛 청교도의 경건한 생활과 옛 칼빈주의 교리에서 벗어나는 만큼, 일반적으로 그들의 설교는 진지함이 떨어지고 단순해지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문제는 더 사변적이고 덜 영적이며 계시의 위대한 핵심 진리보다 신약의 도덕적 가르침이 더 많았다. 자연 신학은 복음의 위대한 진리가 마땅히 차지했던 자리를 대신하는 적이 많고, 설교에는 그리스도가 덜 등장하게 되었다. 첫째는 설교자와 그 다음으로는 일반 사람들의 성품과 생활에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게 되었을 뿐이다.
The Sword And The Trowel
< Robert Shindler, "The Down Grade," The Sword and the Trowel(March 1887), 122. >
87년 3월 찰스 스펄전은 자신의 월간지 The Sword and the Trowel에 '내리막길'이라는 제목의 두 기사 가운데 첫번째 기사를 실었다. 이 두 기사는 익명으로 실렸지만, 글쓴이는 스펄전의 친한 친구이며 동료 침례교 목사인 로버트 쉰들러(Robert Shindler)였다. 쉰들러는 스펄전의 말을 가지고 기사를 썼고, 그래서 스펄전은 첫번째 기사에 다음과 같은 개인적인 선전의 말을 각주에 썼다. "이 기사를 읽으려면 진지한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는 목이 부러질 것 같은 속도로 언덕을 내리닫고 있습니다." < Ibid., 122n. >
쉰들러는 청교도 시대부터 자신의 시대까지 복음주의의 상태를 추적하면서, 참된 복음주의적 믿음의 부흥이 있으면 한두 세대 안에 건전한 교리로부터 벗어나 결국 대대적인 배도에 이르게 되는 일이 뒤따랐다고 지적했다. 쉰들러는 이처럼 진리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비탈길로 비유했고, 그래서 이런 일을 '내리막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내리막길 Ⅰ
첫 기사에서 쉰들러는 1662년 청교도주의가 쇠퇴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영국의 중요한 프로테스탄트 교파들의 역사를 이야기했다. 그는, 청교도 시대 이후 첫 세대에 사실상 영국의 모든 비국교도(비영국 국교회 프로테스탄트) 교파가 정통 신앙에서 벗어나 (원죄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소시누스주의(socinianism)라는 옛 자유주의 신학으로 향했던 사실을 지적했다. 쉰들러는 청교도 이후의 수백 개 교회가 어떻게 해서 합리주의적 회의주의, 유니테리언주의, 그리고 다른 자유주의적 신념을 선호하여 건전한 교리를 내버렸는지 이야기했다. 종종 아래로 치닫는 걸음은 천천히 시작되므로 거의 알아차릴 수 없다. 쉰들러는, 교파들이 (인간의 의지를 결정적 요소로 만드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선호하여 (구원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주의를 버릴 때 종종 '내리막길로 접어든다'고 말했다. 다른 집단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를 받아들였다. 또 어떤 집단은 간단히 학문과 세속 지혜에 매혹당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진리에 대한 열정을 잃었다.
"장로교인들이 맨 먼저 그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고 쉰들러는 썼다. 그들은 세속적 지혜의 길을 택했다. "그들은 고전 학문과 다른 학문 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그러므로) 장로교 사역자들이 학문적 재능에 관심을 점점 더 쏟고 영적 자격에는 점점 덜 쏟으며, 복음 전도의 열정과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눌 수 있는 능력보다 학문과 웅변술에 더 높은 가치를 두는 것은 그릇된 방향으로 가는 첩경이었다." < Ibid., 123. >
더 나아가 쉰들러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경향에 빠지는 사람에게 흔히 있는 일이지만, '내리막길'에 접어든 어떤 사람들은 의도했던 것보다 더 멀리 내려갔고, 그래서 그 길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계속 나아가는 것이 더 쉽고 제동 장치가 없을 경우 멈추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칼빈주의로부터 고개를 돌린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속죄의 죽음과 의롭다 하시는 의를 믿는 믿음을 부인하고 인간 부패의 교리와 사람이 새 피조물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갱생시키셔야 할 필요성과 성령의 은혜로운 사역의 필요성을 비난하면서 고유한 신성을 부인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꿈에 생각했건 생각하지 않았건 이 결과는 현실이 되었다.
< Ibid., 124. >
쉰들러는 믿음을 버린 어떤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정통 신자처럼 행세하면서 의심의 씨를 뿌리기를 좋아하며 일부러 자신의 회의주의와 이단을 숨겼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정죄를 더 악화시키고 자신의 위선과 속임으로 자신을 따르는 많은 사람을 끝없이 파멸되게 만들었다(참고. 마 23:15). 그리스도의 사신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하는 반포자라고 고백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주장을 무시하고 그의 권리를 부인하고 그의 인품을 깎아 내리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찬란한 옷을 찢고 그 면류관을 흙에 던져 짓밟는 것이었다." < Ibid., 125. >
그런데도 참되게 믿음을 지키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하여 싸우기를 꺼려했다. 복음주의 설교는 종종 냉담하고 생기가 없었고, 건전한 가르침을 붙잡는 사람조차도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나눌 때 어디서 끊고 맺어야 하는지 주의하지 않았다. "정서적으로 참으로 정통 신앙을 가졌다고 하는 자들도 이단 사역자를 조력자나 임시 설교자로 자신의 강단에 끌어들이는 것처럼 태도가 분명치 않고 신실하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았다. 이런 식으로 아리우스 이단과 소시누스 이단이 엑서터(Exeter)의 장로교 교회에 들어왔다." < Ibid. >
그래서 겨우 몇 십 년 안에, 영국의 정신을 그토록 사로잡았던 청교도의 열정이 메마르고 냉담하고 배도적인 가르침에 무너졌다. 교회들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교회 일원이 되는 특권을 허용할 정도로 태만해졌다. 쉰들러의 말에 따르면 "새롭게 하시는 은혜의 사역과는 낯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내세우고 교회의 일원으로 심지어는 교회의 지도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사람들은 "평화의 유일한 방법이 무시되고 부인되었을 때 '평화로다' '평화로다' 하고 소리칠 수 있고 소리치려 하고 실제로 소리쳤던 사람들을 자기들 마음에 맞는 목회자로 선택했다." < Ibid., 126. >
쉰들러는 '내리막길'에 관한 첫 기사를 이런 말로 마감했다. "이 사실들은, 어떤 경우에 나타나는 것처럼 사람들이 새것을 위하여 옛것을 기꺼이 끊어버리려 하는 일이 너무도 분명하게 나타나는 오늘날 한 교훈을 제공한다. 그러나 신학에서는 참된 것이 새것이 아니며 새것이 참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흔히 볼 수 있다." < Ibid. >
내리막길 Ⅱ
The Sword and the Trowel지 4월호에는 '내리막길'이라는 제목의 두번째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서 로버트 쉰들러는 청교도주의가 쇠퇴하는 역사를 계속 개괄했다. 그는 교회 지도자들이 비탈길을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정통 신앙을 가르치는 자들도 열심히 싸우고 있지 않고(삿 3장) 믿음을 변호하는 데 약하다고 쉰들러는 말했다. 한 가지 예로 쉰들러는 오늘날 '주의 말씀 받은 그날'(O Happy Day), '은혜, 참 기쁜 소릴세'(Grace, 'Tis a Charming Sound)를 쓴 필립 도드리지(Philip Doddridge, 1702-1751)를 언급했다. 쉰들러에 따르면 도드리지는 "호감을 줄 정도로 건전했지만, 언제나 사려 깊은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지나치게 사려가 깊어서 그다지 담대하고 결연하지 못했을 것이다." < "The Down Grade"(second article), The Sword and the Trowel(April 1887), 166. >
도드리지는 1700년대 중반 대부분의 비국교도 사역자들이 훈련을 받으러 갔던 학교의 교장이었다. 쉰들러는 도드리지에 대해 이렇게 판단했다. "(도드리지의) 호감을 주는 성향 때문에 그는 좀더 단호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라면 하지 않았을 일을 하고 말았다. 때때로 도드리지는 설교자를 바꿀 때도 정통 신앙을 가졌는지 의심을 받는 사람과 우의를 다지며 사귀었다. 이런 일은 많은 젊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래서 이 사람들이 판단을 내릴 때 일반적으로 감정이 여러 갈래로 갈리는 것을 막아 주는 역할을 했다." < Ibid., 167. >
다른 말로 하면, 쉰들러는 도드리지가 비정통적 선생들을 관용한 것은 그의 신학생들이 이 비정통적 선생들이 심각한 오류에 빠지는 죄를 졌다는 두려운 현실을 잘 못보게 하고 그 선생들의 이단으로 말미암은 치명적인 결과에 영향을 받게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쉰들러는 곧바로, 누구도 도드리지에 대해서 '이단인 듯이 의혹의 눈초리라도 넌지시 던질' 수 없다고 덧붙였다.
도드리지가 보여 준 관용의 태도 때문에 마침내 이 학교는 소시누스주의에 굴복했고 이리하여 도드리지가 죽은 다음 세대에 분열되었다.
< Ibid. >
쉰들러는 호세아 4:9("백성이나 제사장이나")의 말을 바꾸어 이렇게 썼다. "그런 사역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선이 없고 그들의 의견을 찬성하는 청중에게 걸 수 있는 희망이 없다." < Ibid., 168. >
쉰들러는 그와 같은 관용은 경계하는 마음을 늦추기가 쉽다는 것을 보이면서 그런 관용에 경고했다.
너무 많은 경우에 회의주의적 대담 무쌍함은 복음 전도의 열정을 대신한 듯이 보이며, 사람들은 복음 진리의 유익한 떡보다 신학적 사변의 껍데기를 좋아한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의 길을 얼마나 꾸준하고 충실하게 걸을 수 있는가 하는 데 열심을 쏟지 아니하고 얼마나 진리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가 하는 데 열심을 쏟는 것 같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는 사자나 호랑이 같아서, 그들은 그 진리를 '멀리'한다. 우리는 이렇게 충고하고 싶다. 절벽에 너무 다가가지 말라. 자칫 미끄러지거나 떨어질 수 있다. 항상 땅이 굳은 곳에 있어라. 깨지기 쉬운 얼음에 올라가려 하지 말라.
< Ibid. >
쉰들러는 '다윈주의라는 올챙이가 슈루즈베리, 하이 스트리트에 있는 오래된 예배당 (한 교인석)에서......부화했다'는 사실을 주목하면서 어떻게 해서 관용적 태도가 재난에 이르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예를 들었다. 슈루즈베리의 이 예배당은 찰스 다윈이 소시누스주의에 매료당했던 한 목사에 의하여 회의주의에 처음으로 끌여 들어갔던 곳이다. 또한 성경 전체에 대해 주석을 쓴 매튜 헨리(Matthew Henry)가 한때 목회했던 이 예배당은 오랫동안 '완전히 발전한 소시누스주의'를 가르쳐 오고 있었다.
< Ibid. >
쉰들러의 지적에 따르면, 침례교도들은 자기네 교회들이 내리막길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켄트 주에 있는 소시누스주의를 받아들였던 서너 교회를 거명했다. 도버(Dover)와 딜(Deal)과 윙햄(Wingham)과 얄딩(Yalding)에 있는 교회들이다.
그러나 쉰들러는, 이 규칙에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예외가 있다고 덧붙였다. 기꺼이 믿음을 위하여 싸우고 은혜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교리들을 지지하려는 이 교회들은 내리막길에 서 있는 교회들의 운명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쉰들러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내리막길을 (대조적으로) 두드러지게 뚜렷이 보여 주는 오르막길의 유일한 몇 가지 실례였다.
어떻게 성경을 믿는 그렇게 많은 교회들이 길을 잃었는가? 그리고 왜 이런 일은 인간 역사에 거듭 나타나는가? 쉰들러는 이런 질문을 제기했다.
잘못된 길이 있는 곳에는 언제든지 잘못 디딘 첫걸음이 있다. 우리가 잘못된 발걸음을 추적할 수 있다면, 잘못된 발걸음과 그 결과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왕의 진리의 대로'에서 갈림길은 어딘가? 잘못 디딘 첫걸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교리를 의심하는 것 혹은 저 지적인 정서를 긴가민가하는 것 혹은 정통 신앙의 다른 신조에 대하여 회의적인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의심과 회의주의는 앞서 간 어떤 일의 결과이다.
< Ibid., 170. >
그러면 그 '일'은 무엇이었는가? 내리막길에 접어들기 시작한 모든 사람의 공통 분모는 무엇이었는가?
잘못 디딘 첫걸음은 성스러운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믿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는 동안은 말씀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정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법에 따라 말씀에 따라"가 모든 가르침에 대한 그의 간절한 소원이다. 그는 그 거룩한 책이 모든 것에 관해 옳게 말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그래서 모든 그릇된 길을 미워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의심하게 하거나 그 영감과 권위에 대하여 저급한 생각을 품게 하라.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안내 지도와 기댈 언덕이 없다.
우리가 간략하게 써 왔던 시대들의 역사와 시대들의 운동을 조심스럽게 훑어 보면 이런 사실이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이 성경을 믿음과 실천에 대한 권위 있고 오류 없는 규칙으로 주셨다는 진리를 사역자들과 기독교 교회가 굳게 잡았던 곳에서는 사람들이 결코 올바른 길에서 그다지 심각하게 벗어나서 방황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대로 이성을 계시보다 높이고 계시의 대표적인 내용으로 만들었을 때, 온갖 오류와 재난이 생겨났다.
< Ibid. >
쉰들러는, 성경의 권위에 여전히 헌신하는 많은 사람들은 '많거나 적거나 칼빈주의 교리'를 택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칼빈주의 교리와 성경에 대한 고상한 견해의 상관성을 지적했다.
< Ibid. >
The Sword and the Trowel 지 같은 호의 '촌평란'에서 스펄전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우리는 체계로서 칼빈주의보다 핵심적인 복음 진리에 더 많은 관심을 쏟는다. 그러나 우리는 칼빈주의가 사람들로 생명의 진리를 붙잡을 수 있도록 돕는 보존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 Ibid., 195. >
스펄전과 쉰들러에게 있어서 이 말은, 성경에 대한 고상한 견해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상한 견해와 나란히 간다는 뜻을 분명히 담고 있다. 더욱이 쉰들러가 지적했듯이, 건전한 교리를 굳게 붙잡는 이 교회들은 건전하고 번성했고, 소시누스주의를 받아들였던 교회들은 필연적으로 사그라들고 소멸되기 시작했다. 쉰들러는, 소시누스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지만 그런데도 자유주의 신학을 가지고 장난치는 목사들에게 경고의 말을 쓴 좁 오르턴(Job Orton) 목사의 말을 인용했다.
(오르턴)은 이렇게 말했다. "그 후로 나는 사역자들이 따뜻하고 애정을 가지고 교인들에게 복음 전도의 동기를 불어넣지 않고서 명랑하고 멋진 일들로 교인들을 즐겁게 하고 일반적인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데 급급하고 대개는 도덕적 의무를 내세울 때, 복음의 독특한 것들을 무시하고 우리의 구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거듭나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의무를 행할 때 항상 하나님의 성령께 의지하여 도움과 힘을 얻어 거룩하게 되어야 할 필요성을 결코 혹은 거의 드러내지 않는 동안, 그들의 회중은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어떤 교회들은 이제 50년 전 수백 명씩 모이던 때보다 출석수가 적은 우리 이웃의 몇몇 교회들마냥 점점 줄어들고 있다......회중들 위에 섬뜩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들은 '이 세상의 길'로 달리며 온갖 유행하는 어리석은 짓을 따른다. 그리고 가정과 개인의 경건함이 그들 가운데 대체로 사라진 듯하다. 생명과 열정의 모습은 거의 없다." < Ibid., 171-72. >
쉰들러는 비꼬듯이 이렇게 덧붙였다. "오르턴은 '내리막길'의 어리석은 짓을 보고서 증언하고 다른 사람을 막으려는 데 열을 내었던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 Ibid., 172. >
그런 후에 쉰들러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며 충분하다고 호소하며 그 기사를 끝맺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사람들과 사람들의 견해를 제쳐놓고 영원히 굳게 선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하나님의 사자의 일을 하고 사람들에게 주의 메시지를 말하는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의 말을 가진 자, 그로 하여금 나의 말을 신실히 전하게 하라. 알곡에 비하면 가라지는 무엇인가 하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주님은 우리가 '우리의 노력이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것을 아는 만큼 주의 일에 굳건하고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풍성하도록' 도우신다.
< Ibid. >
이런 말로 두 기사는 끝맺었다.
쉰들러는 The Sword and the Trowel 지 6월호에 세번째 기사를 추가로 썼다. 6월호에 실린 세번째 기사는 뉴욕 앤도버(Andover)의 앤도버 신학교 교수와 관련된 미국 이단 재판에 대한 분석을 담았다. 앤도버 신학교는 일찍이 하버드 대학의 소시누스주의에 반대하여 약 100년 전에 설립되었다. 쉰들러는 앤도버의 설립자들이 "코튼 매더(Cotton Mather)식의 건전한 칼빈주의자였고, 그 대학은 그런 믿음으로 사람들을 훈련할 특별한 목적 때문에 세워졌다" < Robert Shindler, "Andover Theology," The Sword and the Trowel, Vol. 23(June 1887), 274. > 고 썼다. 쉰들러는 "이제 교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다섯 신사"들이 "설립자의 믿음에서 심각하게 떠났다"는 이유로 비난했다. 그들은 속임수로 그렇게 한다고 쉰들러는 말했다. 그들은 이 학교의 교리 성명서에 서명하고서는 이제 누군가가 '진보적 정통 신앙'이라고 이름 붙인 자신들의 가르침으로 그 교리를 손상시켰다. 쉰들러는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평가했다. "실로 그 진행(progression)이 어찌나 빠른지 '정통 신앙'이 보이지 않는다." < Ibid. >
쉰들러는 이어서 이 사람들이 가르치는 이단을 기록했다. 이 이단은 19세기 말에는 미묘하게 보였지만 사실상 믿음에서 심각하게 변절한 것이었다.
쉰들러는 앤도버의 재난을 내리막길의 위험에 대한 실물 교육으로 보았고, 주저하지 않고 미국 침례교도를 실례로 사용하여 영국 침례교 연맹이 그런 길을 향하여 내려가고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석 달 후 찰스 스펄전은 '내리막길'에 관하여 글을 썼다. 논쟁은 달아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내리막길 Ⅲ
The Sword and the Trowel 지 8월호는 스펄전이 쓴 '내리막길에 관한 또 하나의 말'(Another Word Concerning the Down-Grade)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의 어조는 쉰들러보다 더 절박했다. 좀더 일찍이 실린 기사들은 두 가지 반응을 분명히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즉 쉰들러의 분석이 너무 비관적이라고 믿는 사람들로부터는 불쾌감을, 영국 복음주의에 나타나는 동향에 관하여 함께 괴로워했던 사람들에게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쉰들러의 경고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전에 건전하던 교회에 배도와 타협이 있다는 증거를 더 많이 제공하는 반응을 보였다. 스펄전은 이 반응을 읽고 화가 치밀었다. 어떤 사람은, "비가 오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해서 두 사역자는 자기를 조롱했다"고 소식을 알렸다. 한 여인은 "위로를 주었던 이사야의 고귀한 언약을 자기 교회 사역자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고 스펄전에게 말했다.
< "Another Word Concerning the Down-Grade," The Sword and the Trowel(August 1887), 399. > The Sword and the Trowel 지의 편집부는 그런 이야기로 가득했다.
첫 문단부터 스펄전의 어조는 쉰들러의 앞선 기사들보다 훨씬 전투적이고 강했다. 처음 두 기사가 실리고 여러 주가 지나서, 스펄전은 The Sword and the Trowel 지가 '내리막길'의 비중을 낮게 평가했다고 느끼게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엄숙한 확신은, 많은 교회의 사정이 보는 것과 달리 훨씬 심각하고 급속히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비국교도 브로드 스쿨(Broad School of Dissent)의 생각을 대변하는 신문들을 읽고 이렇게 스스로 질문해 보라. 그들이 얼마나 더 멀리 나갈 수 있을까? 어떤 교리가 계속 버림을 당하고 있는가? 다른 어떤 진리가 경멸의 대상이 될까? 새 종교가 시작되었지만, 분필이 치즈가 아니듯이 이 새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그리고 이 종교는 도덕적 정직성이 없으므로 약간 손질하여 스스로를 옛 믿음으로 가장하여 소개하고, 그런 구실로 복음 전파를 위하여 세워졌던 강단을 빼앗는다.
< Ibid., 397. >
이 '새롭고 개선된' 기독교는 복음 전파의 자리에 오락을 들여놓고 있다. 스펄전은 많은 사람이 영화관의 가치관과 기법이 주님의 성전에 침투하도록 허용하면서 교회를 '극장'으로 만들고 있다고 경고했다.
스펄전은, 많은 교회가 더 이상 기도 모임을 갖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영적 열기가 줄어들고 회중은 드문드문해지고 복음을 위한 열정은 빨리 사라지고 있다. "애석하다. 많은 사람이 쇠퇴하는 (청교도 후기) 세대를 마취시킨 독잔으로 향하고 있다......'현대 사상'이라는 형식으로 된 '다른 복음'이라는 목숨을 노리는 코브라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사역자가 너무 많다." < Ibid., 398. >
그런 쇠퇴는 주로 누구 탓이었는가? 스펄전은 그것을 설교자 탓이라고 믿었다. "통탄할 노릇이다. 어떤 사역자들은 이교도를 만들고 있다. 스스로 공언한 무신론자는 의심을 흩뿌리고 믿음을 공격하는 저 설교자보다 십분지 일도 위험하지 않다......독일은 설교자들 때문에 믿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영국은 독일의 전철을 밟고 있다." < Ibid., 399. >
스펄전은 모더니스트들을 경멸하는 말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았다. "우리의 교회를 파멸하는 이 파괴자들은 해를 입고도 만족하는 원숭이처럼 자신의 일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조상이 한탄했던 일을 그들은 즐거워한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사역에서 가난하고 일편단심인 사람들을 따돌리는 일을 칭찬할 일로 받아들이고 신령한 마음을 품은 자들의 슬픔을 자신들의 능력을 입증하는 증거로 본다." < Ibid., 399-400. >
이와 같은 노골적인 태도에 넌덜머리가 난 사람들에게 스펄전은 이렇게 썼다. "약간 분명하게 말해도 바로 지금 유익을 끼칠 것이다. 이 신사들은 혼자 있기를 원한다. 그들은 잡음을 일으키기를 원치 않는다. 물론 도덕은 망 보는 개를 싫어하고 흑암을 좋아한다. 누군가 소란을 일으키고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에게서 사람의 소망을 없애는 방법에 관심을 촉구해야 할 때이다." < Ibid., 400. >
이 기사 끝에서 스펄전은 다음과 같이 공격했다. 이것은 이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것으로 그후에 이루어진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이제는 전에 성도들에게 전해졌던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 다른 복음으로 돌아선 사람들과 얼마나 친하게 지내야 하는지가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할 말을 주장하고, 분열은 괴로운 해악으로 피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떠나고 있는 자들과 연합하는 것이 얼마나 정당한 일인가? 균형 있게 의무를 행하기 위해서는 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이다. 당분간 신자가 주를 배반한 사람들을 지지하고 원조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라건대 모든 경건한 사람이 더욱 많이 하게 되기를 바라는 일, 곧 진리를 위하여 교파적 제한의 경계를 모두 뛰어넘는 일과, 교파의 번영과 통일을 위하여 진리를 유지하도록 우리를 부추기려 하는 정책은 전혀 다른 것이다. 대수롭잖게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영리한 사람들과 선량한 형제들이 범한 오류라면 못 본 체한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탁월한 점을 너무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마다 스스로를 판단하게 하라. 그러나 우리로서는 새로 몇 개의 빗장을 우리 문에 질러 놓았다. 그리고 우리는 사슬을 늦추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왜냐하면 종과 우정을 맺어달라고 간청하는 구실로 주인의 것을 훔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 Ibid. >
스펄전은 이제, 참된 신자는 새 신학을 선포하는 사람들과 맺고 있는 조직적인 끈을 끊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넌지시 말한다. 그의 평가에 따르면 말씀의 진리는 타협에 의하여 너무 심각하게 손상되었으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고린도후서 6:17의 명령을 살펴야 한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이는 새 교파를 만들라는 요청이 아니다. 분명히 스펄전은 이 땅의 조직을 믿지 않았다.
우리는, 고백과 믿는 것이 따로 놀 만큼 비천한 사람들을 안에 들이지 않을 수 있는 사회를 언제나 만드는 것이 가망 없는 일이 아닐까 두려워한다. 그러나 조상들의 기독교를 붙잡는 모든 사람들이 격의 없이 결연을 맺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할 능력이 거의 없겠지만, 적어도 침묵의 공모에 연루될 일에 항거하고, 할 수 있는 한 그런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만일 잠시 복음주의자들이 질 수밖에 없다면, 싸우다가 죽게 하라. 그리고 '현대 사상'의 지어낸 이야기가 꺼지지 않는 불에 타 없어질 때 그들의 복음이 부활할 것이라는 온전한 확신을 갖고서 그리하라.
< Ibid. >
이 기사는 복음주의 세계를 흔들어 놓았다. 수십 년 동안 거의 모든 복음주의자들에게 존경을 받아 왔던 스펄전은 갑자기 자기 진영에서 비판가들에 의하여 포위되었다. 그가 제안하고 있던 것은 복음주의 사상의 합의 내용과 정반대였다. 모든 동향은 통일과 조화와 융화와 형제 관계를 지향했다. 갑자기 참된 신자는 분리자가 되라고 촉구하는 외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 목소리는 가장 영향력 있는 목소리였다. 교회는 그런 충고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심지어 이 설교자의 왕자에게서도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내리막길 Ⅳ
스펄전은 부드러운 표현을 사용하고 그다지 불평을 심하게 하지 않은 몇몇 형제들로부터 변호의 말을 들었지만, The Sword and the Trowel 지 9월호에서 더욱 강렬하게 공격했다. 스펄전은, 앞의 기사들에 대한 독자의 반응이 자신의 입장을 옹호한다고 믿었다. 편지들이 쏟아져 들어와 그의 가장 심한 주장을 더 힘있게 만들었다. 사실 스펄전은 이제 자신의 경고가 너무 약하고 때 늦은 것이 아니었는지 의심하였다.
우리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우리는 시온에서 심해지는 시대 악에 관하여 경고의 목소리를 냈고, 그것이 그다지 빠른 조치가 아니었다는 증거를 넘치도록 받았다. 사방에서 온 편지는, 오늘날 교회의 형편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하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과장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고 훨씬 두려운 광경을 보여 주는 데 틀림없이 옳았던 것 같다.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참으로 슬퍼하게 된다. 우리가 잘못된 말을 잘 알고 있었다면, 진정으로 회개하는 고백으로 생각을 바꾸었을 것이며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고는 기뻐했을 것이다. 비난하는 것은 우리에게 기쁜 일이 아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과 적대적인 듯이 보이는 것은 우리 마음에 전혀 즐거운 일이 아니다.
< "Our Reply to Sundry Critics and Enquirers," The Sword and the Trowel(September 1887), 461. >
비판가들은 스펄전의 비난에 대답하기는커녕 그 비난이 모호하다고 선언했다(물론 쉰들러와 스펄전은 전혀 모호하지 않았다). 스펄전은 이제 재발하는 신장병과 싸우고 있었고 강단에 서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내리막길 기사들이 처절하게 병든 어떤 사람의 폭언이라는 느낌을 은근히 주었다. 분명 스펄전은 그런 주장 때문에 개인적으로 슬펐다.
우리의 적수들은 우리의 병든 상태를 조소하듯 암시하는 일을 시작했다. 우리가 써 온 모든 엄숙한 일들은 우리의 고통에 대한 암시이며, 우리는 휴식을 오래 취하라는 충고를 받는다. 그들은 동정하는 체하지만 실제로는 무례하게 진리의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지적함으로써 진리를 손상하려 했다. 이 하찮은 일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할 말이 많다. 첫째로 우리의 기사는 우리가 힘이 펄펄 넘치는 건강할 때 쓴 것이며, 병이 날 조짐이 보이기 전에 인쇄되었다. 둘째로 우리가 그리스도인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다면,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이 달리더라도 인간성을 들먹거려 공격하는 일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 Ibid., 462. >
스펄전의 적수들은 인격을 들어 스펄전을 공격했다. 물론 스펄전과 쉰들러는 인격을 비난의 주제로 삼지 않으려고 지극히 조심했다. 더욱이 스펄전의 적수들은 스펄전이 비난하는 핵심을 완전히 무시했다. "우리의 주장이 그르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스펄전은 썼다.
< Ibid., 461. >
스펄전의 비난을 조금이라도 부인한 사람은 없었다. 사실 아무도 그 일을 할 수 없었다. 그 비난을 받아들이려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사실 영국의 복음주의는 내리막길에 서 있었다.
스펄전은 자신이 전한 설교의 특징인 생동감 넘치는 심상을 사용하면서 이렇게 썼다. "집은 도둑 맞고 그 벽은 패어져 내려앉았지만 침대에 있는 선한 사람들은 따스함을 너무 좋아하고 머리가 깨어질까봐 너무 두려워 아래층으로 내려가 밤도둑과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들은 어떤 시끄러운 동료가 소란을 피우고 '도둑이야' 하고 소리치지 않을까 짜증낸다." < Ibid., 465. >
스펄전은 자기 생각에 복음을 반대하고 있는 사람들과 교제를 끊는 일에 관하여 좀더 진지하게 생각하고 좀더 분명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수십 년 동안 스펄전은 침례교 연맹에서 가장 돋보이고 영향력 있는 회원이었다. 하지만 이제 스펄전은 양심의 문제로 연맹을 탈퇴하는 일을 심각하게 숙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날이 지나갈수록 갈라서는 문제가 좀더 분명해지고 있다. 성경을 믿는 사람과 성경을 저당 잡아 진보하려고 준비하는 사람 사이에는 틈이 벌어져 있다. 영감과 사변은 오랫동안 화평을 이루며 거할 수 없다. 거기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영감을 붙잡으면서 그것을 거부하는 일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속죄를 믿으면서 그것을 부인하는 일을 할 수 없다. 우리는 타락 교리를 지지하면서 영적 생활이 인간 본성에서 진화한다고 말하는 일을 할 수 없다. 우리는 회개하지 않는 자의 형벌을 인정하면서 '좀더 과장된 소망'에 빠질 수 없다. 이 길 아니면 저 길로 가야 한다. 결정은 시간의 요청이다.
우리가 우리의 길을 선택했을 때는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과 교제를 유지할 수 없다.
< Ibid. >
스펄전은 침례교 연맹의 복음주의적 지도자들이 개혁을 바라는 자신의 관점과 선택을 보기를 분명히 바랐다. 침례교 연맹은 어떤 교리 성명서를 고수하는 일을 결코 요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 연맹의 회원들이 모두 복음주의자라는 사실은 크든 적든 전제되어 왔다. 그러므로 회원이 되는 데 필요한 유일한 교리는 세례의 양태와 관계 있었다. 스펄전은, 그것은 진리를 침해하는 것을 막는 충분치 못한 방비책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회원들은 교리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는 새로운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침례교 연맹에 호소했다.
스펄전을 놓칠 수 있고 그러지 않으려니 연맹이 분열될 것이 확실한 상황에 맞닥뜨린 교파의 지도자들은 타협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펄전은 타협하기를 거절했다.
좁은 길을 계속 갈 사람은 그 길을 계속 가게 하라. 그리고 자신의 선택을 위하여 고난을 받게 하라. 그러나 동시에 넓은 길을 따르기를 바라는 것은 부조리한 일이다.
여태까지 우리는 왔으니 잠시 쉬자. 한 마음이 된 우리는 이스라엘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기 위하여 주님을 모시자. 굳건한 믿음으로 우리의 태도를 취하자. 화를 내거나 의혹이나 분열의 정신이 아니라 경계하고 결연한 태도로 그리하자. 아무 느낌을 받지 못하면서 교제를 나누는 체하지 말고 우리 가슴에 불타고 있는 확신을 숨기지 말자. 시대가 위험스러우므로 모든 신자가 해야 할 그런 책무는 마땅히 져야 할 짐이다. 그 짐을 지지 않으려면 배신자가 된다. 각 사람의 평화의 길이 어떠해야 할는지는 주님이 그에게 분명히 알게 하실 것이다.
< Ibid. >
스펄전은 이렇게 기사를 마쳤다. 그는 도전했다. 그의 지성과 마음은 정해졌다.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내리막길 V
The Sword and the Trowel 지 10월호는 내리막길에 관한 스펄전의 세번째 기사를 실었다. '입증된 사례'(The Case Proved)라는 제목에 대개가 앞서 실린 기사에 대한 반응으로 스펄전이 받은 편지와 비평에서 뽑아 낸 인용문으로 구성된 기사였다. 이 인용문은 두 범주로 나누어졌다. 첫번째 범주는 논쟁을 폭풍우의 전조로 보고 폭풍우를 잠잠하게 하기를 바랐던 독자들의 글이었다. 스펄전은 그들을 "싸우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어 싸울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평화, 평화'를 계속 우리의 모토로 삼아야 한다고 선언하기를" 원했던 '존경 받는 친구들'이라고 특징지었다.
< The Sword and the Trowel(October 1887), 509. >
스펄전은 그런 사람들은 "지나치게 우호적이어서 모든 것을 색유리 안경을 통해서 본다"고 비난했다.
< Ibid., 510. >
두번째 범주는 어두운 상황에 대한 스펄전의 평가를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인 반응들을 담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칭 복음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있는 타협과 그릇된 가르침의 구체적인 예들을 서술했다.
다시 스펄전은 이렇게 질문했다. "정통 신앙을 고수하는 형제들이 그런 의견을 주장하고 가르치는 자들과 더불어 계속 연합함으로써 그런 가르침을 기꺼이 보장해 주려 하는가?" < Ibid., 513. >
스펄전은 침례교 연합이 셰필드(Sheffield)에서 갖는 연례 가을 모임에서 이런 사안들을 채택할 것으로 믿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나타냈다.
우리는 우리보다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을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사람에게 어떤 행동을 취할지를 결정하도록 맡긴다. 우리에게는 한 가지 일이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가 고귀하게 붙잡는 것과 정반대의 근본 요점에 서서 가르치는 자들을 포함하는 그 어떤 연맹에 참석할 수 없을 것이다......우리에게는 타협이 가능한 일이 많아 보이지만, 교제를 나누는 체하여 배신의 행위가 되고 마는 일이 있다. 깊은 유감을 품고 우리가 깊이 사랑하고 마음으로 존경하는 사람들과 모이는 일을 자제한다. 왜냐하면 그들과 모이게 되면 우리가 주님 안에서 아무런 교제를 가질 수 없는 자들과 연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Ibid., 515. >
그러나 셰필드에서는 이 사안이 결코 제기되지 못했다.
연맹 탈퇴
1887년 10월 28일 스펄전은 침례교 연맹의 사무총장인 사무엘 해리스 부스(Samuel Harris Booth)에게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친구에게
침례교 연맹 사무총장인 당신에게 내가 연맹을 탈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나는 더할 수 없는 아쉬움을 품고 탈퇴합니다. 하지만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탈퇴하는 이유는 The Sword and the Trowel지 11월호에 적어 놓았지만 여기서 다시 되풀이하는 것을 널리 양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누구를 보내어 재고해 달라는 부탁을 하지 말아 주었으면 합니다. 이미 너무 오랫동안 생각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시간이 지날 때마다 너무 지체했다는 확신이 마음을 짓누릅니다.
또한 개인적인 불쾌감이나 악의가 내게는 전혀 없음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바라던 것 이상으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런 (연맹 탈퇴의)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오직 가장 높은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저는 더 나은 것을 바랐기 때문에 오랫동안 지체했던 것입니다. 경구(敬具).
C. H. 스펄전
< Cited in G. Holden Pike, The Life and Work of Charles Haddon Spurgeon, 6 vols.(London : Cassell and Company, n.d.), 6 : 287. >
스펄전이 부스에게 편지를 썼을 때 이미 The Sword and the Trow-el 지 11월호에 글을 썼던 것이 분명하다. 스펄전은 "내리막길 논쟁에 관한 단상(斷想)"이라는 말로 기사를 시작했고, 이어 이런 말을 덧붙인다. "이제 우리 독자 가운데 많은 사람이 내리막길 논쟁에 넌덜머리가 날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우리보다 십분의 일만큼도 그 논쟁에 싫증이 나거나 괴로움을 당했다 할 수 없을 것이다." < The Sword and the Trowel(November 1887), 557. > 이 논쟁으로 스펄전은 연맹을 탈퇴해야 하는지 숙고하면서 생각도 감정도 진이 빠졌다. 그러나 스펄전은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느꼈다. 그로서는 복음의 적수들과 관계를 끊는 일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드러난 치명적인 오류와 교류하는 것은 죄에 참여하는 것이다." < Ibid., 559. >
스펄전의 웅변력이 지닌 힘을 보면, 스펄전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분명히 우리는 이런 일들을 기독교 연합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이 일들은 악에 끼어드는 공모와 같아 보이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우리는 그 일들이 일호의 다른 측면을 지니지 않음을 두려워한다. 우리의 가장 깊은 마음에 이 사실은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슬픈 현실이다." < Ibid., 558. >
스펄전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의 권위와 충족성을 의심하는 자들을 수용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이런 사람들이 그런 일을 믿는다면 그들로 그런 일을 가르치고 자신들을 위하여 교회와 연맹과 협회를 세우게 하라. 왜 그들이 우리 가운데로 와야 하는가?" < Ibid., 559-60. >
스펄전은 자신이 취한 행동 말고 달리 선택할 일이 없다고 느꼈다. "지난 달 동안 많은 사람이 걱정스럽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우리에게 물었다. 이 사람들에게 우리는 각자 스스로 주님의 인도를 찾아야 한다는 말밖에 달리 해줄 말이 없다. 우리는 지난 달 신문에 우리의 행동 방향을 알렸다. 우리는 즉시 그리고 명백히 침례교 연맹을 물러난다." < Ibid., 560. >
이 발표는 많은 독자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 틀림없다. 스펄전이 자신의 협박대로 밀고 나갈 것이라고 믿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평화와 통일을 기독교의 덕목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여겼다. 당대 영국 복음주의자 가운데 가장 돋보이고 인기 있는 찰스 스펄전이 분리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스펄전이 추구했던 길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스펄전과 침례교 연맹
그러나 스펄전은 변덕스럽게 혹은 성급하게 탈퇴하지 않았다. 11월 23일 스펄전은 남부 프랑스에서 동료 목사 맥케이(Mackey) 씨에게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편지를 썼다. "직원에게 전한 저의 개인적 항의와 전체 교회에 거듭 지적한 저의 호소가 쓸데없었기 때문에, 연맹을 떠나는 것이 제게는 당위였습니다. 저의 입장은 진지하게 탈퇴하는 것 말고 달리 취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 Letters of Charles Haddon Spurgeon(Edinburgh : Banner of Truth, 1992), 183. >
맥케이에게 쓴 개인적인 이 편지를 침례교 연맹의 100인 협의회가 함께 읽었다. 이 사람들 가운데 80명이 12월 13일에 스펄전의 비난을 논의하기 위하여 모였다. 모인 사람 가운데 대부분은 스펄전의 비난과 이어진 스펄전의 연맹 탈퇴에 격분했다. 그들은 정확하지 못한 정보를 갖고서 비난했다고 스펄전을 비난했다. 그리고 연맹의 직원들은 스펄전이 '개인적 항의'를 하러 왔다거나 연맹의 교리 상태에 관한 어떤 관심을 표명했던 적이 없다고 딱 잘라 부인했다.
특별히 사무총장 부스는 더 잘 알고 있었다. 부스와 스펄전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연맹의 한탄스러운 상태에 관하여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사실상 부스는 스펄전으로 하여금 연맹에 마구 퍼지고 있던 모더니즘에 반대하여 목소리를 내라고 부추겼다. 분명 부스는 자기 생각에 정통 신앙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사람들의 이름과 광범위한 타협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스펄전에게 알려주기까지 했다.
< Lewis Drummond, Spurgeon : Prince of Preachers(Grand Rapids, Mich. : Baker, 1992), 671. > 그러나 부스는 자신들의 서신 교환에 관하여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스펄전에게 다짐을 받았다. 스펄전이 자신의 편지를 곧 폭로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부스는 이렇게 썼다. "당신에게 쓰는 저의 편지는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 비밀리에 쓰는 것입니다. 명예상의 이유로 당신은 그 편지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 Ibid., 697. >
협의회 의사록을 보면, 부스는 스펄전과 자신이 나눈 대화의 성격에 관하여 협의회 회원들이 잘못 생각하게 했다. 부스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스펄전 씨와 나눈 모든 대화는 이 협의회에 제출하기 위하여 형제들에 대한 고소장을 작성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펄전 씨가 대화로 나눈 일들을 여기 제출하여 고발문으로 작성할 의도가 있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 Ibid. >
이것만 놓고 엄격하게 말하면 이것은 참말이었지만, 사건의 전모와 거리가 멀었다. 뭐니뭐니 해도 부스는 염려하며 스펄전을 찾아간 맨 처음 사람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대화는 듣고 흘려 버릴 이야기와 거리가 멀었다. 다른 누구보다도 부스는 이 위대한 설교자가 연맹의 동향에 관하여 갖고 있었던 깊은 우려를 잘 알고 있었고, (스펄전이 믿기로는)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스를 포함하여 침례교 연맹 협의회가 스펄전이 진리를 잘못 전한다고 고소했을 때도, 스펄전은 자신들의 서신 교환을 비밀로 붙이기를 바라는 부스의 소원을 존중했다. "스펄전은 부스가 보낸 서신을 제출하여 연맹 직원들과 자신이 사전에 얼마나 상의했는지 간단하게 입증할 수 있었다." < Iain Murray, The Forgotten Spurgeon(Edinburgh : Banner of Truth, 1966), 145. > 그러나 부스가 고소자가 된 마당에도 스펄전은 욕설과 그릇된 고소를 감내했다.
"부스 씨가 내가 결코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말하니 놀랍구려. 하나님이 그 점에 관하여 다 알고 계시며 내 입장이 정당화 되는 것을 보실 것이오" 하고 스펄전은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 Susannah Spurgeon and J. W. Harrald, eds., C. H. Spurgeon's Autobiography, 4 vols. (London : Passmore and Alabaster, 1897), 4 : 257. >
그러나 한 전기 작가가 지적했듯이 "스펄전은 결코 정당화되지 못했다. 많은 소식을 접하고 여전히 받는 인상은, 그가 입증될 수 없는 비난을 했고 증거를 제출하라고 적절한 요청이 있었을 때 포기하고 내뺐다는 것이다. 진실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스펄전은 부스 씨의 편지를 제출했을 것이다. 내 생각으론 그가 그렇게 했음에 틀림없다." < J. C. Carlisle, C. H. Spurgeon-An Interpretive Biography(London : Religious Tract Society, 1933), 247. >
침례교 연맹 협의회는 스펄전이 먼저 불만 있는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찾아가지 않음으로써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교훈을 어겼다고 비난했다. 스펄전은 아내에게 보내는 다른 편지에서 그 비난에 이렇게 대답했다. "마태복음 18:15에 따라 내가 이 형제들을 개인적으로 찾았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겠소? 나는 사무총장과 의장을 여러 번 만났소. 그런 후에 나의 불평에 관하여 글을 써 냈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을 때 연맹을 떠났을 뿐이오." < Autobiography, 4 : 256. >
스펄전은 침례교 연맹 의장인 제임스 컬로스(James Culross) 박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이전에 의장과 사무총장을 만남으로써 개인적 항의에 관한 우리 주님의 생각을 따랐으며, 여러 번 항의문을 썼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저는 탈퇴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확실히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내가 오류를 고집하고 선전하는 사람들을 상대하려고 돌아다녀야 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게는 그 사람들에 대하여 관할권이 없으며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갔다면 틀림없이 기분 상하게 하는 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렇습니다. 나의 문제는 연맹과 관계 있으며, 사실 연맹과만 관계 있습니다. 나는 줄곧 연맹과 상대해 왔습니다.
< Ibid., 4 : 263. >
협의회는 마태복음 18장 문제를 제기하고 스펄전이 연맹 지도자 앞에서 자신의 관심을 제대로 제기하지 않았다고 비난함으로써 진짜 문제를 명백하게 회피하고 있었다. 그들은 스펄전을 만날 네 사람의 대표자를 파견하자고 제안하고 스펄전에게 프랑스에 체류하고 있지만 영국에 와 달라고 편지를 썼다. 스펄전은 영국에 돌아갈 때 그 사람들을 만나겠다고 말하고 사양했다.
스펄전은 협의회의 반응을, 자신을 문제로 삼고 연맹 내의 교리적 동향을 논쟁에서 제외시키려는 명백한 시도로 보았다. 더욱이 스펄전은 자신의 공격이 개인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했다. 그리고 이제 협의회는, 스펄전이 구체적인 이름과 세부 사항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비난이 자신들에게 너무 모호한 일이라 언급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스펄전의 공격을 개인적인 것이라 하여 스펄전에 불리하게끔 써 먹고 있었다. 스펄전은 그다지 자신을 변호하는 느낌을 주지 않는 말로 연맹의 핵심 기관 편집장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침례교도(The Baptist) 지의 편집장 귀하
근계(謹啓)-그래야 할 대단한 중요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문제로 당신의 사설을 채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맥케이 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이렇게 썼습니다. "직원에게 전한 저의 개인적 항의와 전체 교회에 거듭 지적한 저의 호소가 쓸데없었기 때문에, 연맹을 떠나는 것이 제게는 당위였습니다. 저의 입장은 진지하게 탈퇴하는 것 말고 달리 취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거짓이 아니며 부정확한 말도 아니었습니다. 레스터(Leicester)에서 고통스런 일이 일어난 후에(1883년 한 유니테리언주의 사역자가 그곳에서 침례교 연맹의 모임에서 설교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나는 사무총장과 의장 차운(Chown) 씨와 협의회 다른 회원들에게 진지하게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차운 씨는 고아원에서 친절하게 다가와서 그 일을 단독적인 사건으로 보아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오해했기를 바랐습니다. 나는 이 문제를 더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나는 비난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 이후로 나는 사무총장(부스)에게 이 문제에 대하여 거듭 말했습니다. 그러니 그도 이 점을 기꺼이 인정할 것입니다. 내 생각으론 매년 사무총장이나 베인즈(Baynes) 씨가 침례교 연맹을 위하여 설교해 달라거나 연맹 모임과 관련된 선교 예배에서 설교해 달라고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이 선량한 간사들은 그와 같은 모임을 준비하는 동안 나를 찾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에게 말한 것을 양측에 이야기한 것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물론 이 모임에 공식적으로 참여하기를 거절한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임에 공식적으로 참여하게 되면 타협하였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이것은 단순한 말보다 더 크게 발언하는 행위입니다. 윌리엄스(Williams) 씨와 맥클래런(Maclaren) 씨와 상당히 많은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서신 교환이 그 분들로서는 매우 탁월한 일이었습니다.
내 친구 윌리엄스 씨는 나의 편지가 '개인 편지'로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내가 맥케이 씨에게 말한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부스 씨는 나의 의사 전달이 자신에게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일로 보지 않았고, 나도 부스 씨에게 그렇게 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부스 씨에게 불만을 표시했고, 반면에 나는 침례교 연맹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에 끼어듦으로써 그 문제와 나의 판단에 대해 타협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중도(中道)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협의회 회원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런저런 때에 내가 말한 것을 듣고 나의 견해와 감정을 아는지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으려 합니다만 맥케이 씨에게 한 말은 그 정당한 사유를 충분히 대겠습니다.
이 문장의 첫째 절만 택하고 나머지("전체 교회에 거듭 지적한 저의 호소")는 빼버림으로써 그 절이 내가 의도했던 것보다 두드러지게 된 것을 주목하십시오. '내리막길'에 관한 나의 편지는 침례교 교파만 다루지 않습니다. 사실 나는 침례교가 다른 교파보다 훨씬 덜 오염되었다고 줄곧 인정해 왔습니다. 그러나 침례교 사람들은 지금까지, 다시 출판된 기사들이 전체 사역자에게 제출되고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다고 염려했습니다. '침례 교파의 기관'은 이 문제를 '큰 구스베리'(big gooseberry)로 비유하고 셰필드로 가는 길에 어떤 사역자들은 이 사건을 '떠들썩한 농담'으로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모임을 여러 번 가졌지만 한 공식 모임 앞에서 저를 공격한 일 말고 공적으로 언급된 경우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모임에서 저는 답변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개인이 언급한 친절하지 못한 표현에 관해서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로 보면, 누구도 나의 호소가 주목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형제들 가운데 누가 나의 호소를 진지한 것으로 판단했다면, 그 사람은 그 호소를 협의회에 말하여 개인적인 말이 공적인 말이 될 수 있는지 물어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점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위에서 언급한 방식대로 진리를 말하지 않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실은 "스펄전 씨가 한 말이 참된가?" 하는 질문을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스펄전이 그렇게 썼기 때문에 연맹 직원들이 협의회 앞에 이 문제를 제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끼게 된 것인가?" 하고 물었던 것 같습니다. 누구라도 쉽사리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는 전혀 다른 주제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의도했던 것과 내가 의도했던 것이 다르다는 주장으로 질문자와 대답자와 다른 사람이 무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즉시로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형제들의 회의로서는 슬픈 출발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고의로 진실되지 못했다고 비난하지 아니하고, 진리가 아닌 것을 말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아마 나의 정신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말했겠죠.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우둔한 사람과 회담하려고 대표단을 파견하는 것은 시간 낭비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추론하지 않을 것입니다. 확신컨대 나는 인간성을 들먹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동기를 탓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와 회담하기를 요청한 존경하는 형제들에게 무례하게 보이지 않으면서 이와 같이 많은 말을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경구.
12월 19일, 멘턴(Menton).
C. H. 스펄전
< Cited in Pike, 6 : 292-93. >
이 잡지는 스펄전의 편지를 전혀 싣지 않았다.
침례교 연맹의 징계
스펄전이 프랑스에서 연맹의 파견자들과 만나지 않으려 한 것은 그들이 자신을 까다롭고 완고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려고 할 뿐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스펄전은 수잔나에게 이렇게 썼다. "이런 식으로 나를 보려고 네 명의 신학자가 오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구려. 나는 매우 당혹스러웠고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몰랐소.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모르오. 1시까지 잠을 자지 못했소......네 명의 신학 박사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오. 하지만 그들편에서는 매우 현명한 움직임이라 생각하고 있소. 차제에 그들이 포기하게 된다면, 다행한 일일 것이오. 그러나 나에게 화해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비난을 퍼부을 의도가 있다면, 문제는 다르오." < Autobiography, 4 : 257. >
1888년 1월 13일에 스펄전은 런던에 돌아와 태버너클 교회에서 연맹의 파견자들과 만났다. 여기에는 사무총장 부스, 은퇴하는 의장 제임스 컬로스, 차기 의장 존 클리퍼드(John Clifford)가 왔다. 임명된 위원단의 네번째 위원인 알렉산더 맥클래런은-이 사람이 스펄전에게 동정적이었을 것이다-병이 나서 참석하지 못했다.
< "Brief Notes," The Baptist(February 1888), 84. > 이 사람들은 스펄전에게 탈퇴를 다시 고려해 달라고 요청했다. 스펄전은, 연맹이 복음주의적인 신앙 진술을 채택할 것을 제의했다. 파견단은 거부했다. 어느 측도 이 모임으로 무엇을 이루었다는 느낌이 없었다.
5일 후에 전체 침례교 연맹 협의회가 다시 모였다. 이번에 그들은 투표하여 스펄전의 탈퇴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런 후에 그들은 스펄전의 행동을 비난하는 결의를 통과시킴으로써 그를 징계하기로 결정했다.
놀랍게도 한편으로 기울어진 대다수는 그들의 가장 유명한 회원에 대한 징계에 찬성했다. 약 100명 가운데 5명만이 스펄전을 지지했다. 협의회는 이런 결정을 통과시켰다.
협의회는 스펄전 씨가 탈퇴하기 전에 그리고 그 이후에 당 연맹에 대하여 퍼부은 비난이 매우 심각한 것임을 인정한다. 협의회는 이 비난을 말할 때의 공적 일반적 방법이 전체 교회를 비난하고 스펄전 씨만큼 진리를 소중하게 사랑하는 형제들로 의혹을 받게 한다고 본다. 그리고 스펄전 씨가 비난을 퍼붓기로 의도한 사람들의 이름과 그 비난을 지지하는 증거를 제출하지 않기 때문에, 협의회의 판단으로는 이 비난은 하지 말았어야 한다.
< Ibid., 85. >
그때 한 저술가 리처드 글로버(Richard Glover)는 복음주의 비국교도(Evangelical Nonconformist) 지에서 이 사안을 정확하게 평가했다.
그들이 채택했던 방책은 연맹의 평화를 혼란스럽게 하는 책임을 스펄전에게 뒤집어 씌우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스펄전의 비난이 너무 모호하여 진지하게 조사할 가치가 없고 스펄전이 죄 있는 사역자의 이름을 들어서 자신의 비난이 정당함을 입증하지 못했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 방책이 정치적으로 아무리 유용하다 해도, 문제를 부정직하게 소홀히 대하는 일로밖에 볼 수 없다.
< Cited in Drummond, 700-1. >
우리가 보았듯이, 사실 스펄전은 그 이름을 거명할 수 있었다. 스펄전은 부스의 편지를 제출하여 자신의 혐의를 벗고 부스로 이단자들에 맞서서 역시 증인의 역할을 맡지 않으면 안 되게 할 수도 있었다. 더욱이 스펄전은 동료 침례교도 가운데 몇 사람의 출판된 책을 간단히 인용할 수 있었다. "스펄전은 증거를 많이 갖고 있었다. Christian World 지와 Independent 지와 Freeman 지와 British Weekly 지와 Baptist 지에 실린 유명한 사람들의 말이 있었다. 1887년과 1888년 동안 이 잡지에 실린 목록들을 언급할 수도 있었고 그렇게 되면 스펄전의 일반적인 비난이 진실되다는 것이 풍부하게 입증될 것이다." < Carlisle, 248. >
왜 스펄전은 복음주의를 저버린 자들의 이름을 간단히 언급하지 않았는가? 한 가지 예를 들면, 스펄전은 개인에 관하여 논쟁을 벌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그 논쟁이 개인적인 싸움으로 퇴락할까 두려웠다. "우리가 인격을 걸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는다면, 이들 존경받는 몇몇 저술가들의 다른 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들의 말이 이 저술가들이 지금 썼던 것과 모순되지 않으면, 그들의 모든 생각이 좀더 잘 알려지는 데 보충 내용이 될 것이다." < "The Case Proved," 27. >
"이 싸움은 너무 개인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내가 개입하지 않으려 한 어떤 사건들은 내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 문제를 계속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은 즐거움이 아니었다." < "The Baptist Union Censure," The Sword and the Trowel (Febru-ary 1888), 83. >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름을 떠들어대는 것이 사안의 본질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스펄전이 느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침례교 연맹의 방책이었다. 스펄전이 지적했듯이, 침례교 연맹은 교리 성명서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고, 그러므로 그릇된 가르침을 전한 사람을 징계할 권위가 없었다. "이런 헌법에서는 세례를 맹세코 부인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이단이 될 수 없다." < Ibid., 81. >
그래서 스펄전이 이름을 들었다 해도, 연맹이 기꺼이 복음주의적 신앙 성명문을 채택하여 모든 회원이 그 성명문을 지킬 것을 요구하지 않으면 이단에 대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여태까지 연맹은 바로 이 일을 하지 않으려 했다.
스펄전은 내리막길 논쟁이 연맹의 일반 회원들을 동요하여 협의회가 그런 정책을 세우도록 요구하게 되기를 진실로 바랐다.
마지막 타협
스펄전 시대의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널리 퍼져 있는 여론은 '신조가 아니라 그리스도'였다. 신조와 교리 성명서는 아무튼 수준 낮은 기독교에 속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합법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성경 위에 어떤 신조를 높이는 일을 막아야 한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신조는 우상, 즉 참된 예배를 실제로 방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스펄전은, 신조가 참되다면, 즉 성경과 조화를 이루고 성경에 따른다면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 지적했다.
'신조가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다'고 말하는 것은, 신조가 옳지 않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를 아무리 명확하게 말한다 해도 진리는 신자를 그의 주님과 갈라지게 하지 않는다. 나에 관한 한, 나는 내가 믿는 것을 가장 분명한 말로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붙잡는 진리를 나는 가슴에 껴안는다. 왜냐하면 나는 그 진리가 오류 없는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어떻게 진리가 나와 그 진리를 계시하신 하나님을 나눌 수 있는가? 내가 하나님은 물론이고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내가 알기로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것에 나의 지성을 복종시키는 것은, 내가 나의 주님과 교제하는 한 가지 방도이다.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건 하나님이 그것을 말씀하시기 때문에 받아들인다. 그 점에서 나의 가장 깊은 영혼의 겸손한 예배를 드린다.
나는 신조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동조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스스로 잘못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신조를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신조를 갖고 있다는 말을 거부하지만 틀림없이 갖고 있다. 그의 불신은 어떤 의미에서 신조이다.
신조에 대한 반대는 권징을 슬그머니 반대하고 자유주의를 바라는 매우 구미에 맞는 방법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노아의 방주처럼 정결한 것이나 불결한 것이나, 기는 것이나 나는 새나 모두에게 은신처를 제공할 연맹이다.
< Ibid., 82. >
19세기 말 영국의 신학적 분위기에서는 누구나 스펄전이 할 말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펄전의 비난이 있은 후에야, 연맹 협의회는 4월 23일 총회 모임에서 신조의 사안을 다루어야 할 것임을 알았다.
스펄전은 연맹 총회에 대하여 희망을 걸지 않았다. The Sword and the Trowel 지 4월호 '촌평'란에 스펄전은 이렇게 썼다.
이때 하나님의 사람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침례교 연맹은 4월 23일에 전체 총회로 모이며, 그러면 "이 연맹은 복음주의적 기초를 가져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중대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우리는 이 질문이 기분 좋게 논의될 것이며 그 결정은 올바른 것이 될 것으로 믿는다. 확실히 다른 기독교 교회가 자신의 신앙을 맹세하듯이, 침례교 연맹도 그렇게 해야 한다. 연맹의 신념이 무엇이든지, 연맹이 신념을 가지게 하라.
< Ibid., 197-98. >
스펄전은 무엇보다 명료함을 호소했다. 그는 침례교도 지 편집자에게 이런 말을 담은 편지를 써 보냈다. "협의회가 무엇을 하든, 무엇보다도 그것이 서로 모순되는 두 의미를 합법적으로 가질 수 있는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분명하고 솔직하게 말합시다.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정직하게 그 차이를 시인합시다." < "Notes", The Sword and the Trowel(March 1888), 148. >
아이언 머리(Iain Murray)의 말을 보면, "이것이 협의회가 따르지 않았던 바로 그 정책이었을 것이다." < The Forgotten Spurgeon, 147. >
협의회는 4월 연맹 총회가 열리기 전에 모여서, 간단한 성명서를 준비했는데, 다소 모호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복음주의적 교리 성명서였다. 하지만 이 성명서를 총회 모임에서 읽었을 때, 연맹이 회원에게 교리 성명서를 강요할 아무런 권위가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더욱 나쁜 것은 부활과 최후 심판에 관한 구절에 대해서 '연맹에 속한 형제들은......보편적인 해석을 지지하지 않았다' 하는 각주가 붙은 점이다.
< Cited in Drummond, 704. >
그런데도 총회에 참석한-스펄전의 동생 제임스를 포함하여-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낭독된 이 성명서가 받아들일 만한 타협으로 믿었다. 확실히 연맹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신 신학'의 지지자인 찰스 윌리엄스(Charles Williams, 유명한 소설가 찰스 윌리엄스와 다른 사람임)는, 총회가 타협한 그 성명서를 채택할 것을 동의했다. 윌리엄스는 자유주의 사상을 열정적으로 변호할 기회를 잡았다. 제임스 스펄전은 "윌리엄스 씨의 결심은 지지했지만 그의 연설은 지지하지 않았다." < "A Welcome Conclusion," The Baptist(May 1888), 230. > 침례교도 지는 이렇게 보고했다. "스펄전 씨의 연설은 진지하고 용기 있고 씩씩하여 청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그후에 있었던 투표에 실질적으로 만장 일치의 찬성을 얻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 Ibid., 231. >
이 결정은 2,000 대 7로 통과되었다.
헨리 오클리(Henry Oakley)라고 하는 한 사람이 그날 거기에 있었다. 수년이 지나 그 사람은 청중석에 일어난 큰 소란을 상기했다.
그 동의안이 제출되고 지지를 받아 통과되었을 때 나는 시티 템플(City Temple)에 있었죠. 아마 시티 템플은 사람이 들어 찰 대로 가득 찼을 겁니다. 일찌감치 그곳에 갔지만 뒤쪽 회랑 복도에 '입석'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설을 들었죠.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 연설은 찰스 윌리엄스 씨의 연설뿐입니다. 그 사람은 테니슨(Tennyson)의 말을 인용하여 자유주의 신학과 의심의 정당성을 옹호했습니다. 투표의 순간이 왔습니다. 회의실에 있는 사람만 총회의 회원으로 투표할 자격이 있었습니다. 징계 동의안이 제출되었을 때, 숲의 나무처럼 손들이 빼꼼히 위로 올라왔습니다. 의장 클리퍼드(Clifford) 박사가 '반대하는 사람은 손 드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올라온 손을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만, 역사 기록을 보니 일곱 명이 손을 들었더군요. 찬반 수를 알리지도 않았는데, 많은 총회 회원은 별안간 소란스럽게 환호하기 시작하더니 그러길 계속 했습니다. 나이든 몇몇 사람들이 억제되었던 적대감을 표출할 구실을 발견했습니다. 많은 젊은 사람들이 자기들 말로 '반계몽주의의 구속'(obscurantist trammels)에 대하여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그전에는 보지 못한 장면이었죠. 그것을 보았을 때 눈물이 나려 했습니다. 저는 '스펄전의(대학) 사람' 곁에 서 있었는데, 제가 잘 알고 있던 분이었습니다. 스펄전 씨는 아주 낮은 곳에서 이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위대하고 관대한 스승에 대한 이런 징계를 접하고 즐거워하며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정말 이상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총회 회원들이 자기들의 신앙을 지도한 가장 위대한 고상하고 탁월한 지도자에 대한 징계를 접하고 그토록 미친 듯이 즐거워하다니 말입니다.
< Cited in Murray, 149-50. >
하지만 그날 참석한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오클리만큼 분명하게 보지 못했던 것이 거의 틀림없다. 그들은 그 투표를 스펄전에 대한 또 하나의 징계로 이해할 수 없었다. 확실히 제임스 스펄전은 그 동의안을 지지했을 때 자기 형에게 모욕을 주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날 그곳에 참석한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처럼 제임스는 화해하려는 열망이 너무 커서 그 교리 성명서가-아무튼 어떤 성명서든지-자기들 편의 승리를 뜻하는 것으로 잘못 믿었다.
찰스 스펄전은 달리 생각했다. 그는 한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내 동생은 승리를 얻은 줄로 생각합니다만, 나는 우리가 가망 없게 팔렸다고 믿습니다. 마음이 무너지는 듯합니다. 동생은 내가 해야 했던 것과 정반대의 일을 했던 것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동생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동생은 자신이 최선을 다해 내린 판단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하여 내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 Ibid., 148. >
사건의 여파
홀던 파이크(G. Holden Pike)는 이렇게 썼다. "그 일의 결과가 입증했듯이, (총회 투표로) 얻은 평화는 많은 사람이 예상하던 지속적인 평화는 아니었다. 연맹과의 불화는......결코 회복될 수 없었다." < Pike, 302. >
찰스 스펄전이 줄곧 경고했듯이, 복음의 원수와 타협해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다. 결국 침례교 연맹의 쇠퇴는 심해졌다. '신 신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연맹 총회 후에 대담해졌다. 이제 그들은 연맹의 권력을 쥐었다.
스펄전은 이렇게 썼다.
각주와 동의자의 해석과 옛 협의회의 재선거와 아울러 그 결정은 모든 사람이 가장 기분이 좋았을 때 이루어질 가장 심한 일을 잘 대변한다. 그것이 만족스러운가? 다른 어떤 사람과 같은 의미로 그 결정을 이해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이 일에 덕스러운 것이 있다면 양측을 약간 즐겁게 하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양측을 약간 즐겁게 하는 이것은 그 일의 해악이며 그 일에 대한 정죄가 아닌가? < "Notes," The Sword and the Trowel(June 1888). Reprinted in The "Down Grade" Controversy(Pasadena, Tex. : Pilgrim, n.d.), 56. >
스펄전은 총회 모임에서 투표했던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알아챘다. 그것은 최후의 수정 내용이 교리 성명서를 갖고 있다는 사실 전체를 완전히 부정했다는 사실이다.
언급한 요점들은 확실히 아주 기본적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이 "하나님이여 이 일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도우소서. 그들은 어디 있어야 하겠나이까?" 하고 외쳤던 사실에 놀라지 않았다. 사실 작성된 진술에는 별로 반대가 없었고, 이 진술들을 회원 자격에 필수적인 것으로 만든 것에 반대가 있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았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님이 단순히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을 우리의 교제에서 내쫓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속죄를 믿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이 대속을 거부한다 해도, 그도 우리의 회원에서 제거되어서는 안 됩니다." < "Attempts at the Impossible," The Sword and the Trowel (Decem-ber 1888), 618. >
스펄전은 분열을 싫어했다. 그는 나누어지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양심상 복음의 원수와 손잡을 수 없었다. 결국 스펄전은 연맹을 탈퇴하는 것이 실제로 참된 통일을 촉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대개 거짓된 자들과 결별하는 것보다 참된 자들과 연합을 촉진시키는 것은 없었다." < "Notes," The Sword and the Trowel(May 1888). Reprinted in The "Down Grade" Controversy, 55. >
스펄전은 분열이 자신을 위한 성경적인 필연성이라고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러던 말던 나는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라는 본문에 힘입어 연맹과 협의회를 단번에 떠났다......나의 확신 때문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악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니고서 악을 상대하려는 시도는 완전히 쓸데없는 일이라는 체험 때문에 나는 이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Notes," The Sword and the Trowel(June 1888), 56. >
스펄전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연맹에서 끄집어 내려고 하지 않았지만, 왜 성경에 신실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명백하게 내리막길로 그토록 질주하고 있는 조직에 계속 속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많은 선한 형제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복음을 침해하고 있는 자들과 교제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행위가 주께서 나타나실 날에 인정하실 사랑스러운 처사인 것처럼 말한다.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부인하고 복음의 근본문제들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향한 참된 신자의 반드시 완수해야 할 의무는 그들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다. 만일 개혁을 이루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말에 동감이다. 그러나 그 노력이 쓸데없으리라는 것을 아는데 해봐야 무슨 소용 있는가? 교제의 기초가 오류를 허용하고 사실상 오류를 불러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고 그런 기초를 바꾸지 않으려는 명백한 결심이 있는 곳에서는 내부에 근본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복음주의적 당파 내에서 벌이는 활동은 그 악을 당분간 누르고 숨길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그 타협으로 죄가 저질러지고, 영구적으로 선한 결과가 따를 수 없다. 문제를 바로 해결하려는 소망에서 모든 신념을 받아들이는 공동체에 남아 있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온 가족을 회개시키려는 소망에서 우르나 하란에 머무는 것과 같다.
아주 탁월한 사람이라도 오류와 손잡으면 오류를 성공적으로 항거할 수 있게 하는 힘을 빼앗길 것이다......지금 우리의 슬픈 항거는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의 문제 혹은 이 오류나 저 오류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의 문제이다.
< "Notes," The Sword and the Trowel(October 1888). Reprinted in The "Down Grade" Controversy, 66. >
내리막길 논쟁은 1892년 1월 31일 스펄전이 죽는 순간까지 계속 그의 슬픔이었다. 친한 친구들과 심지어 자신의 목회자 대학(Pastors' College)을 졸업한 몇몇 학생까지도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나 끝까지 스펄전은 자신이 취한 태도를 후회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스펄전과 그의 초기 전기 작가들로서는 내리막길 논쟁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확실히 어려웠다. 스펄전의 마지막 시대에 이 논쟁은 어찌나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지 이를 지켜 보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펄전이 취했던 입장이 실제로 얼마나 중요한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스펄전은 국제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모더니즘에 전쟁을 선포하는 최초의 복음주의자였다. 침례교 연맹은 결코 이전과 같지 않았다. 그러나 교파간의 모임인 복음주의 연합(Evangelical Alliance)은 스펄전과 입장을 같이 하며 힘을 얻었다. 스펄전의 행위는 세계 도처의 복음주의자들이 모더니즘의 위험과 내리막길에 주의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원래 The Sword and the Trowel 지에 '내리막길' 기사를 쓴 로버트 쉰들러는 스펄전의 전기를 썼고, 그의 전기는 위대한 이 설교자가 죽은 해에 출간되었다. 스펄전이 초청을 받아 복음주의 연합에 연설하던 마지막 소란스러운 시절의 한 장면을 회상하며, 쉰들러는 이렇게 썼다.
스펄전 씨가 연설을 하려고 일어섰을 때 청중들의 환대는 그 열기와 열의가 어찌나 뜨거운지 거의 압도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의 영혼을 휘젓는 강력한 감정과 앞선 연설가들의 말을 들을 때 그의 뺨을 타고 흐르던 그 눈물을 지켜볼 수 있을 만큼 강단 가까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의 침례교 형제들이 불과 몇 사람 참여했지만, 틀림없이 그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 그의 영혼에 위로를 주었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동감의 표현은 부족함이 없었다. 그 이후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많은 것이 드러났다. 그리고 앞으로 여러 달 여러 해에 걸쳐, 스펄전이 하나님과 복음에 신실하므로 억누르지 못한 항거가 얼마나 필요한 일이었는지 점점 분명하게 될 것이다.
주께서 은혜를 베푸사 주님의 교회에서 모든 거짓 가르침과 거짓 교사와 이스라엘 진영의 모든 배신자를 깨끗이 몰아내어 주소서. 그리고 성령께서 높은 데서부터 모든 육체에 부어지셔서, 세상의 모든 끝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 소유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 From the Usher's Desk to the Tabernacle Pulpit : The Life and Labors of Charles Haddon Spurgeon(New York : A. C. Armstrong and Son, 1892), 274. >
부록 2
찰스 피니와 미국 복음주의적 실용주의
<록 2. 찰스 피니와 미국 복음주의적 실용주의 >
스 피니는 1792년 코네티컷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대부분을 뉴욕 오나이다(Oneida) 카운티에서 살았다. 그의 부모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그래서 피니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혀 모르고 자라났다. 피니는 (자신이 '황무지'라고 불렀던) 뉴욕 오나이다에서 설교나 복음 증거를 접한 기억이 전혀 없다. 물론 역사 기록을 보면 그 지역 사회에 강력한 복음주의 교회가 적어도 하나는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 B. B. Warfield, Perfectionism, 2 vols. (New York : Oxford, 1932), 2 : 10. >
훗날 피니는 어릴 때 기억나는 종교는 "내 관심을 끌도록 되어 있는 그런 것이 전혀 아니었다" < Charles G. Finney : An Autobiography(Old Tappan, N. J. : Revell, n.d.), 78. > 고 말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기억하는 유일한 설교자를 이렇게 술회했다.
교인석에 앉아 있으면서, 그가 성경 중간에 원고를 두고 설교를 읽으면서 인용할 성경 구절이 있는 곳에 손가락을 끼워 넣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니 양손으로 성경을 쥐어야 했고 그래서 손가락으로 표현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설교를 해나갈 때 손가락을 끼워 넣은 성경 구절을 읽곤 했고 그래서 한 손가락씩 풀려 나와 양손의 손가락이 벗어날 때까지 했다. 손가락이 다 풀려날 즈음 설교는 끝부분에 이르렀다. 그의 봉독은 매우 냉정하고 단조로웠다. 그리고 사람들이 매우 마음을 기울이고 존경하는 심정으로 그가 성경 읽는 것을 귀기울여 들었지만, 내게는 설교 같지 않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 Ibid., 6. >
피니는 그 설교자의 설교 내용이 "교리에 대한 무미건조한 논의"였다고 특징지었고, 덧붙여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상 이는 내가 지금까지 그 어떤 곳에서나 듣던 설교와 같았다. 그러나 그런 설교가 종교에 관하여 전혀 알지 못하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한 젊은이를 교훈하거나 그의 흥미를 끄는 것이었는지 아닌지는 누구라도 판단할 수 있다." < Ibid., 6-7. >
피니는 뉴욕 애덤스에서 법률을 공부하여 견습생이 되기로 결정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피니는 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 지역의 장로교 목사인 조지 게일(George W. Gale)이라고 하는 피니의 2년 선배 되는 젊은 사람은 이 법학도에게 관심을 가졌다. 게일은 피니를 교회 찬양대 지휘자로 임명하고 영적인 문제에 관하여 대화하기 위하여 피니가 다니는 법률 사무실을 찾았다.
그 후 피니는 기본 법률 교과서에 담긴 성경 인용구에 주의했고, 그래서 성경을 한 권 얻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피니의 말에 따르면, 또다시 설교가 걸림돌이 되었다. "(게일은) 으레 자신의 청중이 신학자라고 여기고 그래서 복음의 모든 위대하고 기본적인 교리를 다 알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설교를 통해 교훈을 얻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Ibid., 7. >
피니는 법률 사무실에서 이야기하는 동안 교리 문제를 젊은 목사에게 들이댔다. "목사님이 말하는 회개는 무슨 뜻이었습니까? 단순히 죄에 대한 슬픈 감정입니까? 요컨대 마음의 수동적 상태입니까? 아니면 의지적인 요소를 담고 있습니까? 회개가 마음의 변화라면 어떤 측면에서 말하는 마음의 변화입니까?" < Ibid., 8. >
등등. 피니의 질문이 지닌 성격을 보면, 게일의 설교가 훗날 피니가 그렸던 것처럼 전적으로 지루한 것이었을 리 없다는 느낌이 든다. 증거를 보면, 게일 목사의 사역이 피니에게 얻으려 했던 결과를 갖고 있었다.
피니의 믿기지 않는 회개
사실 피니는 애덤스에 있었을 때, 극적으로 회개했다. 아이러니컬하지만, 피니의 회개가 믿기지 않고 깊은 감명을 주고 혁명적이었지만, 피니는 결코 회개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 일에 대한 피니의 이야기에는, 피니가 자신의 의지가 자신의 구원을 가져온 결정적인 요소였다고 믿었던 것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1821년 가을 어느 안식일 저녁, 나는 즉시로 내 영혼의 구원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나는 하나님과 화평하려고 결심했다." < Ibid., 12. >
강한 확신을 가지고 피니는 숲으로 들어가 거기서 "기꺼이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려 하며 혹은 공격을 받을 때 죽으려 한다" < Ibid., 16. >
는 약속을 했다.
피니는 그 숲에서 회개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회개와 다를 바 없이 보였다. 피니는 자신을 주께 드렸다는 것 말고 무엇이 일어났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의 마음은 "놀랍게도 평온하고 평화로웠다." 그가 느꼈던 죄에 대한 압도하는 자각은 완전히 사라졌다. 피니는 심지어 자신이 "성령을 근심하게 하여 성령께서 완전히 떠나시게" < Ibid., 17. >
하지 않았는지 의심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법률 사무소에서 피니는 '성령의 강력한 세례'라고 서술한 체험을 했다. "......성령께서 나를, 내 몸과 영혼을 관통하시는 듯이 내게 임하셨다. 나는 전기처럼 나를 완전히 훑고 지나가는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 Ibid., 20. >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날 밤 피니의 마음 상태는 너무 혼란스러워서, 수년 후에 그는 이렇게 썼다. "그 세례를 받았지만......나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었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들었다." < Ibid., 22. >
하지만 피니의 의심은 그 다음 날 아침 갑작스럽고 신비스럽게 사그라졌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시간에 피니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설교하기를 바라신다고 결정하고, 즉시로 설교를 시작해야 했다. "이런 성령의 세례들을 받고 난 다음 나는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다. 아니, 다른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을 발견했다. 더 이상 법률 견습생을 할 마음이 없었다......나의 온 마음은 예수님과 그의 구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세상이 하찮아 보였다." < Ibid., 25-26. >
설교하라고 부르심을 받았다?
피니가 회개한 직후 설교 사역을 추구하려고 한 것은 지극히 불행한 일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초창기에 굳건한 기독교적 영향을 받지 못한 피니는 성경과 신학을 거의 몰랐다. 하지만 피니는 재기 넘치는 지성을 갖고 있었고 언제나 신학 논쟁에서 심지어 게일 목사와 같이 훈련받은 사람들과 나누는 논쟁에서도 자신의 입장을 고수할 수 있었다. 그는 법률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체질적으로 논리적 사고를 했지만, 그것 때문에 그릇된 전제들을 짊어지게 되었다. 공의와 죄책과 의(義)와 범죄와 사죄와 책임과 주권과 다른 많은 용어에 대한 피니의 개념은 성경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그의 법률 연구에서 나왔다.
피니가 설교하는 곳마다, 사람들은 열정적으로 반응을 보였다. 피니의 각성 이후 부흥의 즉각적인 증거가 뒤따르는 듯했다. 명성이 퍼져 감에 따라 영향력도 퍼졌다. 피니는 담대하게 전통적인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고 설득력 있게 나름대로 기발한 교리들을 주장했다. 피니는 청중을 모을 수 있는 곳은 어디서든지 설교를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성 교회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했다. "여기 이 젊은이는, 사역자가 된 지 2년 그리스도인이 된 지 4년에 세련된 전통을 이어받은 것도 없고 프론티어(frontier) 선교사로 설교한 것밖에는 설교 경험이 없는데 갑자기 교회를 공격했다. 그는 터무니없이 주장을 펼치고 그의 태도는 전제적이고 가혹했으며 부드러운 호소로 사람들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녹아 내리게 하기보다 사람의 감정을 괴롭게 하는 일에 의존했다." < Warfield, 2 : 21. >
피니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을 때 많은 교회가 참된 정통 신앙에서 차가운 극단적 칼빈주의(Hyper-Calvinism)로 옮겨 갔던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극단적 칼빈주의는 복음 초대가 선민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 신념이다.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은 복음을 무차별적으로 전해야 한다거나 하나님이 구원을 모든 사람에게 거저 주신다고 믿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그들은 복음 전도의 개념을 반대한다. 피니 시대의 많은 교회들은 극단적 칼빈주의의 경향 때문에 방해를 받았다. 피니의 목사인 조지 게일도 극단적 칼빈주의의 성향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피니는 게일의 설교를 이렇게 술회했다. "내가 들었던 그의 어느 설교에서도 그는 누구를 회심시킬 것을 기대하거나 그것을 목적으로 삼는 적이 없는 것 같았다." < Autobiography, 59. >
피니는,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자기 목사의 신념이 복음 전도와 양립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피니는 이렇게 썼다. "사실 이 교의들은 그에게 완벽한 죄수복이었다. 만일 그가 회개를 설교하면, 자리에 앉기 전에 자기 교인들에게 그들이 회개할 수 없다는 인상을 확실히 남겨야 한다. 그가 교인들에게 그 사실에 대하여 자신이 분명히 알려야 하는 점을 믿으라고 말하면, 성령께서 그 교인들을 변화시키기 전에 그들은 믿음을 가질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정통 신앙은 그와 그의 청중에게 완벽한 올무였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 Ibid., 59-60. >
정통 신앙에 대한 피니의 혐오
피니는 칼빈주의적 정통 신앙과 극단적 칼빈주의를 구별하지 못했다.
< 피니는 이렇게 썼다. "나는 어디서든지, 극단적 칼빈주의의 특징들이 교회와 세상에 큰 걸림돌이었던 것을 보아 왔다. 본래 죄악된 본성,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복종할 수 없는 전적인 무능력, 아담의 죄와 죄악된 본성으로 인해 영원한 사망에 처하게 하는 정죄, 그리고 그 독특한 학파의 그와 유사한 내용들과 그로 인하여 생기는 교의들은 신자의 걸림돌이며 죄인의 멸망 원인이다"(Ibid., 368-69). 그러나 피니가 열거하는 교리들은 극단적 칼빈주의에 독특한 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단순히 칼빈주의적 정통 신앙이며, 대개는 명백한 성경적 가르침이다. 피니는 그 모든 것을 내던졌다. 그래서 성경 신학의 핵심을 부인했다.
피니가 고안한 독특한 신학은 문제로 가득 찼는데, 특별히 성화(聖化) 분야에 많았다. 피니는 완벽주의의 한 근본적인 형태를 발전시켰는데, 이 완벽주의는 이제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서 다른 많은 광신적인 생각을 낳았다. 워필드는 피니의 신학에 대한 철저하고 탁월한 분석을 두 권의 책으로 썼다. Perfectionism, 2 : 1-215.
피니가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 고려하지 못한 것은, 18세기 미국에서 있었던-대각성 운동을 포함하여-대부분의 강력한 부흥 운동이 칼빈주의적 가르침에서 모두 생겼다는 점이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조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그리고 초창기 침례교도들은 모두 강력한 칼빈주의자였지만, 적극적인 복음 전도에 열정적으로 헌신한 사람들이었다. 불행하게도 피니는 그 유산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신학을 만드는 데 너무 지나치게 열정을 쏟았다. 피니의 체계를 이루는 실용주의적 접근법은 오늘날 피니의 혁신적 교리를 한탄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남아 있다. > 따라서 그는 정통 신앙의 가르침을 불신했고 칼빈주의를 완전히 거부했다. 그는 교리를 피상적으로만 공부하고 자신의 논리 감각을 충족시키는 독특한 신학 체계를 창안했다. 피니는 19세기 미국 법률 기준을 모든 성경 교리에 적용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내 성경 말고 (속죄) 주제에 대하여 아무것도 읽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주제에 대하여 발견한 것을, 내가 법률 책에서 동일한 혹은 비슷한 구절이라고 이해하곤 했던 것으로 해석했다." < Autobiography, 42. >
피니는,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확대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하나님이 아담의 불순종 때문에 인류를 죄인으로 삼는 것은 의로운 일일 수 없다고 추론했다. 그의 의견으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면 본질상 죄인이 되었다고 사람을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다. "성경은 죄를 율법의 위반으로 정의한다. 우리가 이 (죄악된) 본성을 이어받았을 때 무슨 율법을 어겼는가? 우리에게 지금 갖고 있는 본성과 다른 본성을 가지라고 요구하는 율법은 어떤 것인가? 이성은, 우리가 아담에게서 죄악된 본성을 이어받았다고 하여 영원히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마땅히 받을 자라고 확언하는가?" < Ibid., 339. >
그래서 피니는 인간 이성을 옹호하여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롬 5:16-19)을 내버렸다.
더욱이 피니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하거나 그리스도의 의를 신자에게 전가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했다. 피니는, 로마서 3, 4, 5장이 명백하게 가르치는 이 교리들이 '신학적 허구' < Ibid., 56-58. >
라고 결론을 내렸다. 본질적으로 피니는 복음주의 신학의 핵심을 부인했다.
불행하게도 피니가 설교하면서 초창기에 성공을 거둠으로써 그의 신학에 나타나는 심각한 흠이 흐려졌다. 피니는, 자신이 자기 교회에 설교할 자격을 얻기 위해 시험을 받고 있었을 때 장로단은 "나의 견해와 자신들의 견해에 마땅히 충돌하게 할 그런 질문을 피했다" < Ibid., 51. >
는 사실을 인정했다. 장로들은 부흥사로서 피니의 커져 가는 인기에 위협을 받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시험관 가운데 한 사람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받아들이느냐고 피니에게 물었다. 훗날 피니는,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을 결코 읽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피니는 그들의 교리적 기준을 진리로 인정한다는 식으로 장로단에 답변했다. "나는 내가 이해하는 한 그것을 교리의 요체로 받아들인다고 답했다." < Ibid., 51. >
후에 피니는 그 고백서를 읽었을 때, 자신이 믿고 있던 많은 내용과 모순되는 것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 신앙 고백의 명백한 가르침을 알자마자......나는 주저하지 않고 적합한 때가 되면 언제나 그 가르침을 반대한다는 뜻을 선언했다"고 그는 썼다.
< Ibid., 59. >
피니는 극단적 칼빈주의의 경향을 거부하면서 거세게 그 반대 극단에 매달렸다. "종교에서 자연의 일반적인 능력을 넘어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Revivals of Religion(Old Tappan, N.J. : Revell, n.d.), 4. > 라고 피니는 썼다. "부흥은 기적이 아니며 그 어떤 의미로도 기적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구성된 수단의 적용에 의하여 생기는 다른 어떤 결과와 마찬가지로 이 수단을 올바로 사용한 순전히 철학적 결과이다......곡물이 그 적합한 수단을 사용할 때 수확되는 것같이 자연스럽게 부흥은 수단을 사용한 결과이다." < Ibid., 5. >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피니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제안하는 첫번째로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자였다. "종교의 부흥을 촉진하기 위해 일정 기준의 성공을 설정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그 기준을 도입한 후에 복된 일이 분명히 나타날 때, 이 기준이 지혜로운 것이라는 증거는 명백하다. 그런 기준이 선을 끼치지 않고 해를 끼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속되다. 하나님은 그 점에 관하여 아신다. 하나님의 목적은 선을 최대한도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 Ibid., 211(고딕체는 원저자의 것임). >
피니가 미국 복음주의 운동에 미친 영향은 깊고 컸다. 피니는 복음 전도 집회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표시로 회심자에게 '앞으로 나오라'고 요구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부흥'이라는 말을 복음 전도 캠페인에 최초로 적용한 사람이다. 구원을 찾는 구도자들을 위한 뒷모임(after-meeting)을 널리 퍼뜨린 것도 역시 피니였다. 피니는 젊은 설교자들에게 전통적인 설교자들과 달리 즉석으로 예화를 들면서 대화를 더 많이 하고 교리 이야기를 덜 하라고 부추기면서, 미국 설교 양식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오늘날 복음주의의 표준이 되어가는 추세인 이 모든 개념은 피니가 끌어들인 '새로운 방식'에 속했다.
피니의 모든 혁신책이 그릇되었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피니는 설교자들에게 메시지를 직접적이고 분명하고 설득력 있고 정면으로 들이대라고 촉구했다. 그는 설교자들이 죄인에 대하여 삼인칭으로 말하지 말고 그들의 양심을 좀더 직접적으로 겨냥하기 위하여 '당신'이라는 말로 그들을 부르라고 충고했다. 그는 그 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회개 개념과 반대로 즉각적인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 시대에는 종종 하나님이 회개와 믿음을 주시도록 기다리라고 죄인에게 충고했다. 피니는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을 되풀이하면서, 죄인들에게 회개하고 믿으라고 했지 수동적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회개시키실 것이라고 바라지 말라고 했다.
피니의 사역은 뉴욕 주 서부에 집중되었다. 피니의 생애 동안에도 이 지역은 '타버린 구역' < 기묘하게도 피니는 이 표현을 새로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피니의 회고록에서, 피니는 이 지역을 '타버린 구역'이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그곳에서 자신의 부흥 운동이 저항을 받았기 때문이다. Autobiography, 78.
부흥 운동의 지역과 역사에 대한 흥미진진한 한 세속적 분석이 다음 책에 쓰여 있다. Whitney R. Cross, The Burned-Over District : The Social and Intellec-tual History of Enthusiastic Religion in Western New York, 1800-1850(New York : Harper Torchbooks, 1950). > 으로 알려져 있었다. 왜냐하면 종교적 열정이 거듭 쓸고 지나갔으므로 복음에 관한 참된 관심이 완전히 제거되어 버린 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젊은 시절 언제나 피니는 적어도 다시 한번 그 지역의 종교적 불꽃에 부채질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서, 예상했던 '부흥'의 흥분과 열정은 굳어 버린 불신과 널리 퍼진 불가지론으로 바뀌었다. 그 '타버린 구역'은 다시금 그슬리어 이전보다 더 심해졌다. 사실상 피니의 시대 이후로 미국의 그곳은 결코 부흥을 경험하지 못했다.
부흥 운동 때 피니와 함께 일했던 일꾼 가운데 한 사람은 1834년에 피니에게 이렇게 썼다.
당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내가 부흥 운동 사역자로 일했던 곳을 살펴봅시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도덕적 상태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떠난 후 석달 안에 그들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나는 이 지역들 가운데 많은 곳을 방문하고 또 방문했는데, 그 교회들이 우리가 그들 가운데 있다가 처음 떠난 직후에 슬프고 딱딱하고 육적이고 다투기를 좋아하는 상태에 빠진 것을 보고 속으로 괴로웠습니다.
< Cited in Warfield, 2 : 26. >
워필드(B. B. Warfield)는 이렇게 썼다.
에이서 머핸(Asa Mahan, 피니의 일평생 친구며 동료 일꾼)의 증거만큼 강력한 증거는 없다......이 사람은-간단하게 말해서-이 부흥 운동에 관련된 모든 사람이 그후 서글픈 타락을 겪었음을 우리에게 말한다. 즉, 그 사람들은 다시 불을 피울 수 없는 쓸모없는 석탄처럼 내버려졌다. 목사들은 모든 영적 능력을 빼앗겼고, 복음 전도자들 가운데-머핸은 "그 모든 복음 전도자들 가운데, 그리고 나는 그들을 거의 모두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피니와 아버지 내쉬(Nash)를 빼고 몇 년 후에 종교적 열정을 잃어버리고 복음 전도자의 직임과 목사의 직임에 관하여 똑같이 자격을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을 단 한 사람도 기억할 수 없다.
그래서 위대한 '서양 부흥 운동'은 결국 재난에 이르고 말았다......거듭 피니가 교회들 가운데 한 군데를 다시 방문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이 교회들은 그 일을 괴로운 일로 여기고 막기 위하여 피니에게 대표자들을 보냈고 혹은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 Ibid., 2 : 26-27. >
워필드는 이렇게 지적한다. "한 세대가 지난 후에도, 이처럼 불에 덴 자녀들은 불을 좋아하지 않았다." < Ibid., 2 : 28. >
실망스러운 결말
피니는 자신의 방법이 실패했을 때 낙담하게 되었다. 그는 뉴욕 시 브로드웨이 태버너클 회중 교회(Broadway Tabernacle Congre-gational Church)의 목사직을 받아들이고, 후에는 오하이오 주 오버린(Oberlin) 대학의 학장이 되었다. 이제 피니는 자신의 완벽주의적 교리 발전과 대학 활동에 전념했다.
후에 피니는 자신의 복음 전도 활동을 평가하면서 이렇게 썼다. "종종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하여 크게 자각하게 하고 일시적인 회개와 믿음의 확신에 이르게 하는 데 수단이 되었다......(그러나) 그들로 그리스도 안에 거할 정도로 그리스도를 아주 잘 알게 될 정도로 격려하는 일이 없으므로, 그들은 곧 이전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곤 했다." < Cited in Warfield, 24. >
피니는 자신의 복음 전도 방법론이 실패한 것을 깨달았지만, 언제나 실용주의자로서 자신의 완벽주의적 가르침이 성공적 사역의 참된 열쇠라고 결론을 내렸다. 되돌아보면, 피니는 두려움에 근거하여 강력한 완벽주의적 메시지를 전파했다면 성공했을 것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가 좀더 오래 살았다면, 완벽주의가 천박한 복음 전도보다 더 심한 영적 재난의 씨를 뿌렸음을 발견했을 것이다.
피니의 한 동시대인은 이렇게 말했다.
10년 동안 수백 명 아마 수천 명이 매년 사방에서 회개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이제 (피니의) 진짜 회심자는 상대적으로 몇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피니 자신도,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종교에 욕된 인물이다"라고 선언했다. 이런 부족 때문에 그 결과, 크고 두렵고 셀 수 없는 실제적 악의 결과가 여러 곳에서 교회에 달려들고 있다.
< Ibid., 23. >
그래서 불행하게도 피니의 가장 오래가고 광범위한 영향은 구원받은 수많은 영혼이나 복음을 들은 죄인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그 결과들은 거의 전적으로 피상적이며 종종 피니가 마을을 떠나자마자 사라지는 일이 잦았다. 피니의 진짜 유산은 그가 미국 복음주의 신학과 복음 전도 방법론에 미친 비참한 영향이다. 우리 세대의 교회는 여전히 피니가 뿌린 누룩으로 부풀고 있고, 현대 복음주의적 실용주의가 그 증거이다.
부록 3
육적 지혜와 영적 지혜
<록 3. 육적 지혜와 영적 지혜 >
이 부록은 토마스 보스턴(Thomas Boston)이 쓴 '사람 낚는 기술에 관한 독백'(A Soliloquy on the Art of Man-Fishing)에서 뽑아내 현대 영어로 바꾼 것이다. 보스턴은 1700년대 초 스코틀랜드 에트리크(Ettrick)의 복음주의 목사였다. 청교도 전통에 속한 그는 책을 많이 쓴 저자로서, Human Nature in Its Fourfold State, The Crook in the Lot, or The Sovereignty and Wisdom of God Displayed in the Afflic-tions of Men 등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고 이 책 중 둘은 최근에도 출간되고 있다. 보스턴의 작품이 오래가는 것은 그가 다루었던 진리의 본성이 무시간적임을 증거하기 때문인데, 그 점은 이 발췌문에 특히 분명히 나타나 있다. 실용주의라는 말이 그로부터 200년 후에 만들어졌지만, 이 글에서 보스턴은 사역에 대한 실용주의적 접근법에 대하여 강력하게 공격한다.
리 주님의 명령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는 우리 자신의 지혜를 부인할 것을 함축한다. 인간의 지혜는 우리의 안내자가 될 수 없다(마 16:24).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바울은 말의 지혜로 전파하기를 거부했다(고전 1:17). 또한 바울은 육적 지혜의 법칙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 내 영혼아 너의 지혜를 부인하라.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하라. 너 자신의 말이 아닌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려고 하자. 네가 너 자신의 지혜와 자연 이성에 따라 전파하지 않도록 기도하며 이 방향으로 가고자 할 때, 너는 하나님의 큰 복을 받는다.
자연 이성의 길을 택하거나 육적 지혜의 법칙을 따르지 말라. 이 지혜의 말은 언제나 이럴 것이다. "자신을 아껴라.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네 명예와 명성을 지켜라. 당신이 거침 없이 말하면 그들이 당신을 문제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당신의 설교를 반동적이라고 부를 것이다. 모든 교회는 당신을 자신들 모두에게 지옥에 대하여 설교할 괴물로 두려워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결코 한 곳에 머물지 못할 것이다.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그렇고 그런 사람은 결코 당신과 같지 않을 것이다. 결국 직설적인 설교는 사람을 얻는 방법이 아니다. 그 설교는 처음부터 사람들의 힘을 빼놓는다. 대신에 당신은 적어도 처음에는 다소 부드럽게 조금씩 그들을 발전시켜라. 왜냐하면 이 세대는 당신이 전파하는 그런 가르침을 감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로부터 오는 지혜의 법칙을 듣고 따르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고전 3:19). 사람들이 크게 존중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우리가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고 말한다(마 16:24; 눅 14:26). 우리는 명예나 명성이나 갈채나 그 밖에 그와 같은 이 땅의 유혹을 추구할 수 없다. 하늘의 지혜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할지라도 우리는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사 58:1)고 외쳐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이렇게 말한다.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27, 28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겔 2:7). 하나님의 지혜는 육적 지혜의 법칙과 아주 다른 법칙을 당신에게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육적 지혜가 말하는 것과 위로부터 오는 지혜가 말하는 것을 살펴보라.
육적 지혜 영적 지혜
<신의 몸은 약하다. 그러니 몸을 지치게 말라. 당신의 몸은 수고와 노동과 스트레스를 참아낼 수 없다. 그러니 너 자신을 아껴라. >
<신의 몸은 당신의 영혼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몸을 아끼지 말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 : 20).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 : 27). 그러나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 40 : 29).
당신은 이것을 체험했다. >
<창하고 능수 능란한 연설을 위하여 부지런히 노력하라. 훌륭한 문체는 배운 사람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갖는다. 그런 문체가 없으면 배운 사람들은당신의 설교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설교할 때 다소 부드럽고 고요하게 하려고 시도하라. 그 나라나 당신이 전하는 사람의 특정한 죄를 공격하지 말라.
만일 당신이 섬세하지 않으면, 청중들은 당신에 대하여 염증을 내며 당신을 괴롭게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한 이런 세대에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겠는가! >
<리스도께서는 "복음을 전케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도록"(고전 1 : 17) 하려고 당신을 보내셨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고전 2 : 1) 설교하지 말라. 당신의 메시지와 설교는 "지혜의 권하는 말"(4절)이 되어서는 안 된다.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사 58 : 1).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잠 27 : 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 : 15).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잠 28 : 23). 나는 이런 것을 경험했다.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 하 >
<체적인 일을 거침 없이 말하고 처리하는 것은 위험하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위험할 수 있다.
당신은 바보로 괴물로 인식될 것이며, 침략자로 불리며 그래서 당신의 명성과 위신을 잃을 것이다. 당신은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하고 싫어할 것이다 그런 일을 당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
<고"(겔 3 : 8). 경험도 이것을 확증해 준다.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잠 10 : 9). "성실히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나 사곡히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잠 28 : 18).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 3 : 18). "우리는 세계......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고전 4 : 9, 10).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요 15 : 20).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하는 말에 누가 관심을 갖겠는가? 결국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요 10 : 20) 하고 말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
당신이 매력적으로 말하고 비위를 맞추고 어르지 않으면 특히 지체 높은 사람들은 기분 상해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지혜 있고 힘 있고 지체 높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면, 어떻게 당신은 자부심을 가지겠는가?
우리의 교인들은 국가 교회의 압제적인 교직제로부터 막 벗어났다. 그들은 어떤 죄가 드러 >
<라"(마 16 : 24).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 : 18)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아첨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자가 속히 나를 취하시리로다"(욥 32 : 21, 22).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요 7 : 48).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이런 자가 부르심을 받았다(고전 1 : 26). "열왕 앞에 주의 증거를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겠사오며"(시 119 : 46).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약 2 : 9).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겔 2 : 7). "너는 >
<거나 특히 지난날의 상처가 곪아 터지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교리를 참아낼 수 없다. 좀더 달가운 교리가 그들에게는 더 나을 것이다. 부정적인 것을 막으라. 그런 교리는 그들에게 해를 끼칠 것이다. 유익을 전혀 주지 못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런 일을 실제로 전파하면, 사려 있게 매우 조심해서 말해야 한다. 양심상 말해야 한다면, 사람의 기분을 너무 상하게 하지 않도록 은밀히 하라. 이는 특별히 믿음이 어린 사람들에게 중요하다. 시간을 내어 그들에게 어려운 진리를 가르치고 될 수 있는 대로 그것을 쉽게 만들라. 당신은 어린 신자가 등을 돌려 돌아가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
<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겔 3 : 17, 18).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왕상 22 : 14).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사 58 : 1).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렘 48 : 10).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고후 4 : 2). 베드로는 기독교 시대의 첫 설교에서 불신자에게 전파하면서, 유대인 구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행 2 : 23). "때가 아직 낮이매......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 : 4).
특별히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상냥하게 대하라. 적어도 기틀을 잡고 흡족한 봉급을 확보할 때까지 그렇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일거리를 찾아 다닐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들은 그렇지 않은 목회자를 두려워하며 멀리하고 청빙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러므로 직설적인 설교는 당신의 생계에 해를 끼칠 수 있다. 좀더 섬세한 접근법이 좀더 폭넓은 사역을 할 수 있게 여유를 또한 줄 것이다.
"사람의 낯을 보아주는 것이 좋지 못하고 한 조각 떡을 인하여 범법하는 것도 그러하니라"(잠 28 : 21).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행 21 : 14, 15). 하나님은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다"(행 17 : 26).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사 46 : 10).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오직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시 68 : 6).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잠 28 : 20).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 : 25)
그래서 우리는, 육적 지혜가 확신 있게 그리고 상당히 그럴 듯한 이유로 말하지만, 위로부터 오는 지혜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본다(참고. 약 3:15-18). 이 육적 지혜는 따르는 자에게 큰 이점을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언제나 이행되지는 않는다. 육적 지혜는 도전하는 자들에게는 큰 재앙이 임한다고 위협하지만, 그 위협은 언제나 일어나지는 않는다. 육적 지혜는 두더지가 쌓아 올린 흙 무더기를 산으로 만들고 산을 두더지가 쌓아 올린 흙 무더기로 만든다. 그러므로 세상의 지혜를 거부하라. 왜냐하면 그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다.
육적 방책은 몸을 죽일 수 있을 뿐인 자들을 우리로 두려워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시대에도 그런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지혜는 우리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경외심을 내버리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성경을 기억하여 스스로 힘을 내는 데 사용하라.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결코 영혼을 위태롭게 함으로써 일시적인 유익을 구하지 말라.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시 37:34). 왜냐하면 육적 지혜가 다른 길을 말하고 하나님의 길이 그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할지라도 하나님의 길이 가장 안전한 길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하는 말씀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27절).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2:5).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18-21).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사 41: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