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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꿈속의 귀마동
찰상이 난 얼굴에 약을 발라주면서 조선인 조수는 "걱정 마십시오. 저 정도였으니 다행이지 뭡니까." 하고 길상에게 말을 걸어왔다. 약이 스며들어 상처가 쓰라렸다. 조수는 소독된 가제로 상처를 덮고 반창고를 잘라서 붙이며 다시 말했다. "혼수하는 것은 머릴 좀 다친 탓이고 다리뼈는 부러졌지만 병신이 되진 않을 겝니다. 뼈가 붙을 때까지 시일이 다소 걸리겠지만요. 누이동생이세요?" 아까 의사가 한 말을 되풀이하는데, 누이동생이세요? 어감이 축축하고 은근하다. "아니오." "그럼?" 길상은 못 들은 척 반창고로 눌러놓은 가제를 만져본다. 용모가 헌칠한 편인 조수 눈에 실망 비슷한 것이 지나간다. "얼굴에 손대지 마십시오." 갑자기 태도가 무뚝뚝해졌다. 서희가 입원실로 옮겨진 뒤 길상은 용정에 기별을 부탁하기 위해 복지 곡물상을 찾아갔다. "아니 얼굴은 왜 그리 되었소?" 하며 은씨는 의아해하다가 길상이 대강 형편을 설명하자, "저런! 아니 무슨 놈의 변이오?" 눈이 휘동그래진다. 길상은 내일 아침 용정으로 사람을 보내달라 부탁하고 몇 자 적은 쪽지를 내민다. "무슨 놈의, 어이구 생판 날벼락을 맞았구먼. 이애 복애야!" 평소 나직한 음성을 높이니깐, 우스꽝스런 기성으로 들린다. 딸아이가 놀라서 쫓아나온다. "여기 미음 한 그릇 내오너라. 마침 속이 안 좋아서 미음을 쑤려 했더니, 어서 한 그릇 내와, 북새통에 언제 속을 차렸을라구." 따근따근한 미음 한 그릇은 고맙다. 미음이 목구멍 속으로 흘러 들어가자 비로소 길상은 추위와 허기를 느낀다. 은씨는 옆에서 연신 지껄이고 있었다. 아직 혼수 상태에 있다 그 말이냐, 병원에서 내는 음식을 먹겠느냐, 집에서 미음을 쑤어 갈 테니 걱정 말라, 이럴 때 도와야잖겠느냐, 등등 하찮은 선심을 튀겨서 부풀려서. 미음 한 그릇을 비운 길상은 일어섰다. 한보따리 안겨준 은씨의 속 빈 선심을 이리저리 흩날려버리듯이 길상은 어두워진 거리를 거닐어 병원으로 돌아온다. 바람은 살갗을 찢을 듯 차다. 건물에서 새어나온 등불빛이 얼어붙은 거리에 희미하게 깔려 있고 먼곳 병영 쪽에서 섬찟한 종 소리가 울려오곤 한다. 입원실로 들어온 길상은 벽면 쪽에 붙여놓은 의자에 몸을 던지듯 앉는다. 피곤이 몰려오고, 미음 한 그릇 덕분에 시장기는 가셨으나 기력은 없다. 긴장이 풀린 탓이겠는데 앉은 채 한잠 자보려고 눈을 감았으나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 '뼈 부러진 데는 똥물이 제일이라든가?' 뼈 부러진 데 똥물을 먹인다는 것은 농촌에서 흔히 듣는 얘기다. "뼈 부러진 데는 똥물이 제일인 기라. 그기이 넘어만 가믄 되넘어오지 않는 기이 희한하거든." 산에서 헤어진 박총각, 그 당시 삼십을 넘었던 사내 음성이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모닥불을 피워놓은 어느 골짜기의 밤이었던 것 같고, 비탈에서 굴러 팔을 삔 열일곱 살짜리 오동이라는 아일 보고 한 말이었다. "남 모함한 놈한테 퍼먹이는 거이 똥물이라 카더마는 상놈들 빼 부러진 데는 그거이, 선약이니, 흥! 약까지 더럽고 천하고나." 휘파람 불 듯 어둠속에 침이 날아갔었다. "내 소싯적 일이지마는, 세도깨나 쓰는 어떤 양반놈 문전에서 담배를 피웠거든. 그랬더니 흥, 방자한 놈이다 그거지. 그놈의 집구석 하인놈들이 우르르 몰려나와서 나를 패는 기라. 나도 힘깨나 쓰는 놈이고 보니 그냥이야 맞겄나? 몇 놈 작살을 내놨더니 일이 크게 벌어질밖에, 하하하하. 그때 내 꼴이란 모리꾼에 쫓기는 짐승 한 마리라. 중과부적, 별 수 없는 노릇이제. 만신창이가 되고 허리 빼를 뿌라서 달포를 기동을 못했는데 똥물을 묵고 게우 일어났거든. 제에기랄, 무슨 놈의 귀코 귀한 목심이라고, 지금 생각하니 가소롭다야. 이리 굴리도 천하고 저리 굴리도 천한 목심, 하하하하. 똥물 묵고 부지했다 그거거든." 박총각은 장사였었다. 한때는 임꺽정같이 되는 게 소원이었다고 했고 동학 잔당의 한 사람으로 의병에 합류했던 것이다. 식량이 큰 그는 노상 배고파했으며 세상을 원망하고 심사가 좋지 않을 때 누가 조금이라도 거스르기만 하면 나무를 뿌리째 뽑아서 휘두르며 광태를 부리곤 했었다. 잠이 오지 않는다. 맥락도 없는 지난일이 불쑥 솟았다간 가라앉고, 지난 일이 뒤죽박죽이 되어 잠 안 오는 안막을 어지럽힌다. 몇 시쯤 됐을까. 자정이 넘은 것 같은데 서희는 눈을 떴다. "정신이 드십니까?" "여기가 어디야?" 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묻는다. "병원입니다." "병원?" "용정서 오실 때 병원 가신다 하지 않았습니까? 말씀대로 된 거지 뭡니까?" 반가워서 가슴이 뭉클한데 길상은 화난 소리로 오금을 박는다. "앞으론 그러지 마십시오" "길상이 네가 왜 걱정이지? 누구 훈계하는 게야?" 왜 병원에 간다고 거짓말을 했는가? 그 원인과 결과가 한꺼번에 상기되어 그러는 걸까. 서희 얼굴에 독기가 피어난다. "귀찮아서 그렇지요." 이번에는 들떠서 길상이 말한다. "그럼 가버리면 될 거 아냐?" "귀찮아도 별도리가 있습니까? 가버릴 수 없지요." "누구 놀리는 게야?" 서희는 휙 돌아누우려다 꼼짝 않는 한쪽 다리, 군데군데 입은 타박상의 맹렬한 통증 때문에 신음한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 "갑갑해도 참으셔야 합니다. 뼈가 붙을 때까진, 뼈는 부러졌지만 잘못될 염려는 없답니다." "듣기 싫어! 더 이상 지껄이면 여기서 뛰어내릴 테야. 병신이 되면 어떻다는 게지?" "....." "상관 말어!" 서희는 설움이 목구멍까지 꾸역꾸역 차오르는 눈치다. 길상의 마음을 모를 리 없다. 기뻐서 안도에서 그러는 것을. "이까짓 다리 하나 부러지면 어때? 눈이나 깜짝할 줄 알어?" 악몽이다. 그것은 순전히 악몽이다. 서희의 음성을 듣고 있는 길상은 눈이 희끗희끗 쌓인 언덕 아래서 망가진 인형처럼 기절한 서희를 안고 미친 듯이 입김을 불어넣던 그때 얼굴, 입술의 감촉을 기억할 수가 없다. 실낱 같은 숨결을 뽑아내는 서희를, 솜두루마기를 벗어 싸안고 언덕 위로 올라온 일, 그곳서 십 리를 걸어 마을에 당도한 일, 마차를 빌려 회령까지 달려온 일, 그 밖의 일을 기억할 수가 없다. 마차 바퀴가 눈앞에서 아물아물 선회하고 있을 뿐, 눈발위의 선혈이 망막 속에 조금 남아 있을 뿐 다른 죽음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해낼 수가 없다. 서희의 노여움은 어쩌면 입술 위에 닿은 길상의 입김, 그 기억이 부끄러운 때문인지도 모른다. "복지 곡물상에 가서 부탁을 해놨습니다. 용정에 사람을 보내달라구요. 월선아지매가 오시는 게 좋을 듯 싶어서," 서희는 가슴 위에 두 손을 깍지끼면서 대꾸가 없고 길상은 의자에 등을 바싹 붙이며 침묵과 밤과, 병실의 공간과의 대결을 준비한다. 이상한 마을이었다. 마을이라기보다 이상한 곳이라 해야 옳았다. 몇백 년을 묵었는지 연륜을 알 수 없는 늙은 수양 한 그루가 넓은 둘레에 그늘을 드리우고 서 있었다. 수양 그늘에 의지하듯 초막하나가 있었고 그 옆에는 초막보다 반듯한 마구간 건물이 있었다. 허허한 벌판에 나무라곤, 그리고 집이라곤 그것뿐이었다. 수양버들과 초막과 마구간. 한낮의 햇빛이 금싸라기같이 튀고 있었다. 말을 빌릴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길상은 나무 그늘을 향해 걸어갔다. 흰 수염이 앞가슴을 덮은 노인이 탁자 앞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청나라 늙은이 모습이다. "좀 쉬어가겠습니다." 길상은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고 말했다. "그러시오." '?' 조선말이었던 것이다. 길상은 나둥그러진, 상자같이 생긴 걸상에 앉았다. "차 한잔 드시려오?" 노인이 물었다. "네, 주십시오. 목이 타는 것 같습니다." "그럴 테지." 주전자를 기울이며 노인은 차 한잔을 따라준다. 차는 뜨겁지도 차지도 않았고 갈증이 났던 참이어서 길상은 단숨에 마셨다. 차맛은 좋았고 매우 향기로웠다. "잘 마셨습니다." 찻잔을 탁자 위에 놓으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노인은, "젊은이." 하고 불렀다. "네." "혼자 왔다?" 노인은 뇌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길상은 노인의 모습이 우관스님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 동리의 이름을 뭐라 하는지요." "뭐 동리랄 것도 없겠소만, 이름이 있긴 있지. 귀마동이라 하오." "귀마동이라구요?" "돌아올 귀, 말 마, 귀마동이오." "이상한 이름이군요. 귀마동." 길상은 초막보다 큰 마구간 쪽으로 눈을 보낸다. '귀마동, 귀마동. 말을 비릴 수 있겠구나.' "어르신." "말해보시오." "눈에 보이는 것은 허허벌판인데 이 근처에는 도통 인가가 없느 모양이지요?" "그렇소." "어르신께선, 다른 식구가," "....." "혼자 사시는 지요." "그렇소." "아무도 없이, 정녕 혼자 사시는 건가요?" "말 두 필 이왼 강아지새끼 한 마리 없고, 그뿐이겠소? 이 귀마동에는 들짐승 날짐승도 없다오." "그럴 리가," 노인은 방그레 웃는다. 길상은 우관스님을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사방을 둘러보시오. 지나가는 철새들도 쉬어갈 나무라고는 이 버들 한 그루요. 풀 한 포기가 없는 불모지에 들짐승인들 어찌 목숨을 부지하겠소? 해가 지면 달이 뜨고오, 그렇지, 달이 지면 해가 또다시 솟아오르고 세월이 가는 것도 아니요 아니 가는 것도 아닌, 들리는 거라곤 바람 소리뿐. 움직이는 거라곤 구름 조각뿐이라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곳에서 혼자 사시게 되셨습니까?" 노인은 먼 지평선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출가한 몸으로서 정행을 아니 하고 십계를 지키지 아니 한 업보 탓인 듯하오. 이곳은 정처 아닌 허공산야, 고독지옥이오." "....." "젊은이." "네." "젊은이는 어째 혼자왔소?" "아까도 어르신께서 혼자 왔느냐고 물으시었지요?" "물었소이다." "혼자 온게 뭐 잘못된 일인지요. 무슨 까닭이라도," "까닭이 있지. 내 이곳에서 칠백 년을 살고 있소이다만 혼자 찾아온 나그네는 젊은이가 처음이니 하는 말이오." "칠백 년을 이곳서 사시었다구요!" 길상은 소리를 질렀다. "그렇소. 말이 돌아오지 않아야만 이곳을 떠날 수 있을 텐데 말이오." "칠백 년을, 그럴 수가!" "놀라기는,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부러졌다는 얘기를 못 들었구려." "그, 그렇다면 어르신께서 신선이다 그 말씀이오?" "하하핫. 하하 신선이긴, 이곳은 신선 사는 곳이 아니라 고독지옥이래두. 나는 그저 마구간의 말이나 지켜주는 마부에 지나지 않소." "그래요? 혼자 찾아온 나그네로선 제가 처음이라. 어째 그랬을까요?" "그걸 몰라서 나도 물어본 게요. 반드시 두 사람이 찾아왔었지. 사내와 여인이 함께." "사내와 여인이? 이곳에 오는데 그럴 만한 약속이라도 있다 그 말씀이오?" "약속이라... 약속이라... 아니지. 그건 발원 때문이지." "무슨 발원입니까." "이 벌판을 지나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자꾸 내려가면 강이 하나 있소. 그 강을 건너가려고, 그 강은 혼자 외롭게 건너는 황천길의 삼도천하고는 달라서 남녀 한 쌍이 건너는 강이오. 건너기만 하면 사내와 여인에게 이별이 없어진다는 게요." "그래서 모두들 그 강을 건너갔나요?" 노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한참을 있다가 노인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도, 단 한쌍도 건넌 일이 없었지." 단 한 쌍도 건넌 일이 없었다는 노인의 말을 듣고서 도리어 길상은 서희를 데려올 것을 그랬다 싶어 후회를 했다. '서희는 도망칠 생각까지 했다고 말하지 않았나. 서희는 분명히 내게 그런 말을 했다.' "어째서 강을 못 건넜을까요." "젊은이는 이 동리 이름을 물었었소." "네, 물었습니다." "귀마동, 말은 돌아온다는 뜻이오. 돌아온다는 것은 강을 못 건넜다는 게 아니겠소? 이곳을 찾아드는 사내와 여인은 아름답고 씩씩하고 그리고 젊지. 아암, 젊고 말고. 샛별 같은 눈들을 하고 있지. 여인은 장다리순같이 연한 발목이요, 사내는 참나무같이 단단한 몸집... 흐흠." "..." "사내와 여인이 이곳을 찾아오면 나는 말 두 필을 마구간에서 내어주는 게요. 그네들이 말에 오르고 나란히 떠날 때 이르는 것은 말고삐를 놓으면 죽는다는 말인데 그 말을 세 번 되풀이하지. 말고삐를 놓으면 죽는다구. 해가 떨어질 무렵, 그들은 건너갈 강을 향해 떠나는 게요. 나란히 떠나는 말 두 팔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명경 같은 둥근 달이 떠오르지. 벌판 저 너머 말 두 필이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저녁 이슬을 맞으며 나는 바라보는 게요. 제발 이번에는 돌아오지 말아라 빌면서 말이오. 그러나 그들은 어김없이 돌아왔었소. 말 한 필은 서쪽에서 돌아오고 다른 한 핀은 동쪽에서 돌아오는 게요. 실은 그들이 돌아오는 게 아니라 말이 돌아오는 거지만. 한데 사내와 여인은 옛날의 그들이 아니오. 아니거든. 머리칼은 햇볕에 타서 삼을 모양으로 누렇게 뜨고 얼굴에는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 같은 굵은 주름, 거미줄 같은 잔주름, 이빨은 빠져서 양볼이 꺼지고 파파할멈 할아범의 모습들이오. 허나 그보다 슬픈 것은 사내와 여인이 서로를 알지 못하며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는 일이었소. 그네들은 타인이며 먹구름이 몰려오는 하늘을 올려다 보는게요. 제가끔 자기 갈 길을 탄식하는 게지." 노인의 목소리는 저승길을 방황하는 망령의 목소리와 흡사했다. "그들은 어째서 백발이 되도록 강을 건너지 못하고 돌아왔을까요. 왜 서로 헤어져서 동쪽과 서쪽에서 돌아왔을까요." "끝도 없는 벌판을 가다보면 지치고 정신이 멀어지고 그리고 심한 졸음이 오는 게요. 사람을 태운 채 말이 혼자 저절로 가는 게지. 그네들은 말고삐를 잡은 채, 나란히 가던 말과 동과 서로 갈라지면서 차츰차츰 멀어지면서 그리고 되돌아오는 것을 모르거든." "차 한잔 더 주십시오." 노인은 찻잔에 차를 부어준다. 역시 차맛은 좋았고 향그러웠다. "한데 꼭 한 쌍 이곳서 떠나 돌아오지 않은 사내와 여인이 있긴 있었지." "강을 건넜다 그 말씀입니까?"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다시 고개를 저으며 구름을 쳐다 보는 것이었다. "어느 날 해거름에 말 한 필이 돌아왔었지. 그건 빈 말이었소. 여인이 죽은 게요. 말고삐를 놓아 말에서 떨어져 죽은 게요." "사내는요!" "가다가 역시나 그들은 서로 모르게 길이 갈라졌을 게구 그러다가 뒤늦게 깨달았을 게고 찾아 헤맸었겠지. 그러다가 필시 여인은 말에서 떨어져 죽었을 게요." "사내는 그럼 돌아왔습니까!" "아니, 아직도... 벌판을 방황하고 있겠지. 벌판을. 말이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말이오." "어르신!" "....." "그럼 그 돌아온 말 제가 탑시다!" "어쩌실려구." "혼자 강을 건너보겠소!" "허허허." "혼잔 못 가는 곳이란 말씀이오? 그럼 좋소이다. 내 그 방황하는 사내를 찾든지 아니면 죽은 여인을 찾아오겠소." "여인은 흔적도 없어졌을 게고 짝을 잃은 말도 이미 죽었소." "저기 마구간이 있는데도요?" "본시 네 필이었는데 두 필이 남아 있을 뿐이오. 한데 자네, 죽은 그 여인이 누군지 아나?" 별안간 노인의 어투가 싹 달라졌다. 다음 순간 크게 소리내어 웃던 노인은 길상이 귀에 입술을 바싹 갖다 붙였다. "그 여인은 바로 서희의 모친 별당아씨였느니라." 소곤거렸다. "뭐라구요!" "여인을 찾아헤매는 사내는 구천이, 알겠느냐? 구천이놈이야. 으하핫... 하하핫," 입을 크게 벌리고 벽력 같은 소리를 내며 웃는다. "으하핫핫핫..." "스님! 우관스님!" "으하핫핫... 하핫핫... 이놈 길상아." "네, 스님, 스님! 길상이올시다!" "이놈 길상아! 너 여기 뭐하러 왔느냐! 돌아가지 못할까! 이 천하에 못난놈 같으니라구." 찢어질 듯 입을 크게 벌리고 호통을 치는데 입안이 새빨갛다. 혓바닥은 불길같이 널름거린다. 혓바닥은 불길이 된다. 활활 붙는 불길이다. "스님!" 외치다가 길상은 제 목소리에 소스라쳐 눈을 떴다. 꿈이었다. 병실 의자에 앉아서 잠이 들었던 것이다. 길상은 몸을 부르르 떤다. '낮에 마차를 빌리느라 애를 썼기 때문에 그런 꿈을 꾸었을까?" 너무 생생하여 꿈을 꾸었다는 생각이 들질 않는다. 귀마동이란 이상한 마을에 방금 다녀온 것만 같다. 무슨 착각일까. 낮에 겪은 현실은 꿈 같고 방금 꾼 꿈이 현실만 같으니, 길상은 오싹오싹 스며드는 한기를 느끼며 몸을 움츠린다. 난로에는 불이 빨갛게 타고 있었다. '겨울 밤에 한여름 낮의 꿈을 꾸다니,' 그새 서희는 잠이 깊이 든 것 같다. 반듯이 누운 몸의 부피는 침대 수평과 거의 엇비슷, 사람이 누워 있는 것 같지가 않다. 다만 다리 부분 쪽이 솟아올라서 새까만 창유리에 곡선을 그어놓고 있다. 아무 소리도 기척도 없는 밤, 어떤 일과도 상관하지 않는 정적이 메스꺼움을 느끼게 할 만큼 냉랭하게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서희는 죽지 부러진 새가 되어 누워 있다. 죽지 부러진 하얀 새 한 마리. 하얀 새는 죽어 있는 게 아닐까? 꿈속에서 들었던 얘기처럼, 그 별당아씨의 소식처럼 하얀 저 새는 죽어 있는 게 아닐까? 돌연 엄습해온 공포가 길상의 덜미를 친다. 손끝에 닿으면 싸늘한 시체일 것 같다. 가까이 다가서서 서희 쪽으로 몸을 기울인 길상은 숨소리를 듣는다. 미동이 없는데 그러나 고른 숨소리가 들린다. 다물린 엷은 입술에서 체취가 풍겨나온다. 차가운 얼굴이다. 눈시울이 숨결에 나부끼는가, 희미하게 흔들리는 것 같다. 입술이 서희 얼굴 가까이... 볼에 닿는다. 마약같이 괴로운 환희가 심장을 친다. 급기야는 격류가 된다! 물보라가 된다! 격류를 휘어잡으며 길상은 물러선다. 상쾌한 땀에 전신을 적시고 물러서는 순간 모든 속박에서 풀려난 것을 길상은 느낀다. 끈질기고 집요했던 속박, 격류는 파도가 된다. 파도가 밀려온다. 포효하면서 달려오는 것이다. 산더미 같은 거대한 파도가 그에게 무너져온다. 사나이의 무한한 자신, 거칠고 힘찬 야성이 드디어 춤을 추는 것이다. 길상이 의자로 돌아와 앉았을 때 복도에서 슬리퍼를 끌며 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끊어진 다음 찻잔에 물을 따르는 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들려온다. 새벽이 다가오는 것이다. 매식을 하면서 이틀 밤을 보낸 길상은 다시 밤을 맞이하기 위해 저녁을 먹으려고 입원실을 나서는데 "좀 어떠시오?" 조수가 물었다. "기분은 좋은 것 같아요." "다행입니다." 길상을 따라 나란히 걸으면서 조수는 담배를 꺼내어 권한다. "고맙소." 불을 붙여문다. "입원하신 분, 누이동생이 아니라 하셨는데 그럼 어떤 사이신가요." 그간 무뚝뚝하게 대하던 조수는 아무래도 궁금증을 풀지 않곤 베길 수 없었던지 체면 불구하고 묻는다. "내 처 될 사람이오." "아아 그러시오." 길게 빼는 어투에는 좋잖은 심사를 무마하려는 노력이 있다. 길상은 곁눈질을 하며 싱긋이 웃는다. '이 친구 다시 무뚝뚝해지겠구먼.' "그러고보니 형시도 대단한 인물입니다." "그래요?" "그 얼굴에 흠집이나 남지 말아야겠는데, 그렇지요?" 흠집이 남아라 하는 말과 다름이 없는, 선망에 일그러진 조수의 표정이다. 계집애처럼 샐쭉한 태도로 조수는 약제실로 들어가고 길상은 병원을 나온다. 몇 발짝을 가지 않았는데 "아이구 길상아!" 여자 목소리에 얼굴을 든다. "아, 아지매." 월선이는 바삐 다가오고 기별하러 갔었던 복지 곡물상의 일꾼은 길상한테 인사를 하고 나서 가버린다. "애기씨가 우, 우떻게 되셨노?" 추위에 입술이 새파랗다. 월선은 수박색 솜두루마기를입고 흰 명주수건을 여러 겹 돌려서 얼굴을 싸맸으며 목이 긴 털장갑을 끼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지금 주무시는 거를 보고 나왔는데 아지매는 곧장 오시는 길이지요?" "운냐." "그럼 저녁을 먹고 들어갑시다." "저녁이고 머고 무슨 경황에, 정말로 애기씨는, 별일 없겠제?"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나 지금 저녁 먹으러 가는 길이니까요. 자아," 길상은 월선이 등을 밀다시피, 그들은 밥집으로 들어간다. 저녁 두 상을 시켜놓고 기다리고 앉았는 동안 길상의 태연한 태도에 안심이 되었던지 월선은, "혼자서 니가 욕봤구나." 하고 말했다. "운수가 좋았지요. 다리뼈가 좀 잘못돼서 그것 때문에 여러 날 병원에서 묵어야 할까 봐요. 나는 용정에 가야 하니까 아지매를 오시라 했지요. 장사를 못해서 미안하지만요." "별소리를 다 한다. 장사고 머고, 마차가 없어졌다 카길래 처음에는 놀랬다. 참말로 잘못되는 거는 아니겠제?" "뼈만 굳어지면, 그럴 염려는 없을 거라 의사가 장담합디다." "그만 되기 천행이다." 월선은 얼굴을 싸맨 수건을 푼다. 방안 훈기에 새파랬던 얼굴이 벌개지고 있다. 길상은 새삼스럽게 월선이 많이 여윈 것을 깨닫는다. '늙었구나.' 옥이네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마음바닥에 날카로운 손톱자국을 남겨 놓고, 어금니를 지그시 깨문다. "용정에는 별일 없겠지요?" "무슨 일이 있겄노." 밥상이 들어왔다. "아침도 제대로 못 들었을 건데 다 자셔야 할 겝니다. 애기씬 밤에 통 주무시질 못해요. 대신 낮에 눈을 붙이는데 한밤중이 되면 허기가 돌지요." 월선은 길상의 얼굴을 쳐다본다. 눈이 움푹 들어간 얼굴에 반창고는 없었지만. "상채기가 났구나." 밥을 먹는 동안 월선은 뭔지 모르게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고 망설이는 기색을 보인다. "길상아." "야." "나 이상한 사람을 만났다. 여기 옴시로." "누군데요?" "와 그 윤선생이라고 홍이 핵교 선생질하던 사람, 니도 알제?" "알지요." "우리집에 국밥도 잡수로 오시고 해서, 홍이 핵교 선생이고 해서 인사를 했더마는 와 그리 놀래는지 모르겄더라. 머하러 회령 왔느냐 하길래 애기씨 다친 얘기를 했지. 그랬더니 어찌나 꼬치꼬치 묻던지," "그 사람이면 뭐 이상할 것도 없지요." 월선의 말을 잘라버린다. 강가에서 두들겨팬 일이 생각나기는 했지만 길상은 대수롭게 여기질 않았다. "그기이 아니고... 그러세, 나도 지금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건데 세상에는 흔히 닮은 사람이 있기는 있더라마는." "누굴 만났기에요." "저어 김평산이 그, 그 사람." 말을 해놓고 월선은 겁먹은 눈으로 길상을 쳐다본다. "죽은 지가 십년이 넘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 얘기가 왜 나오지요?" 의아해하며 월선을 바라본다. "그, 그걸 모르나. 그래도... 살았이믄 오십이 다 돼갈 건데." 얘기를 한다기보다 월선은 생각을 하며 말을 흘리는 것 같다. "아무래도 서른 살은 가깝게 보이든데, 그러니까 내가 하동에서 주막을 할 적에는 그 사람 나이가... 서른 네댓인가, 처음에는 윤선생보고 인사를 하느라고 몰랐는데 옆에 있는 거를." "그럼 두 사람이 함께 있었다 그 말입니까." "음. 함께 노상에서 얘길 하고 있더마. 잘 아는 사인가부던데..." "잘 아는 사이라구요?" 비로소 길상의 얼굴이 긴장한다. 월선은 여전히 생각을 하며, 생각을 흘리듯 얘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무심결에 눈이 마주치는데 하마 내 입에서 말이 나올 뻔 했다. 머리끝이 좁으당하고 눈두덩이 부숭부숭하고 뻐드렁니 그게 앞으로 나오고 좁은 이마에 줄 간 것까지... 김평산이 그 사람을 비로 면대하는 것 같아서, 돼지상, 음 그런 얼굴이 어디 흔해야 말이지. 섬찟한 생각이 들면서도 자꾸 쳐다봐지는데 그쪽서도 마음이 씌어 그럴까? 나를 아는 것 같은, 아는," 길상은 밥알을 씹으며 생각에 잠기다가 말을 편다." "김평산이 그 사람한테 아들 형제가 있는 걸 아지매도 아시지요." "그러모, 알지. 둘째아아는 심덕이 고바서 내가 데리고 있을라 카기도 했는데." "큰아들을 본 일이 있습니까?" "그 아아사 못 봤구마." '거북이라고 형편 없는 망나니였지요. 나보다 한 살 위였든지 그러니까 삼십 가까이는 됐을 겝니다. 한복이는 어머니를 닮았고 거복이 그놈은 지 애비 용모 그대로 닮았지요." "그렇다믄? 그 사람 큰아들일 기라 그 말이가?" "제가 보지 못했으니 뭐라 할 순 없지요. 세상에는 닮은 사람도 많고... 하지만 윤가 그놈하고 아는 사이라니 좀 이상한 생각이 들긴 듭니다마는," 윤선생이 아니고 윤가 그 놈이라는 말에 월선이 놀란다. "윤가 그놈은 행실이 좋지 못해서 학교에서 쫓겨났지요." "쫓겨났다고?" "야, 몰랐습니까?" "그러사 머..." 월선은 또 뭔지 우물쭈물한다. "그러니 아지매도 홍이 선생이거니 생각지 말고 가까이하지 않는게 좋을 겁니다." 밀정의 앞잡이라는 말은 차마 못하고, 그러다보니 말의 내용이 묘하게 되어버렸다. 길상은 좀 당황한다. "행실이 좋지 못한 것도 그렇지만 수상쩍은 데가 많아서요.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거든요." 부언한다. "수상쩍은 데가 많다믄... 그, 그러고본께, 아닌게 아니라 이상타 싶기는 시피더라마는." 역시 월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는 얼굴이다. "뭐를 어쨌기에요." "이런 말을 해서 좋을지 모르겠다마는 저어 송애 그 아아한테 편지질을 자꾸 하는 모양이더마, 나도 맘속으로는 선생질하는 사람이 남으 체니아아한테 그라믄 안 되는데 하고," "언제부터 그랬습니까." 어세가 강해진다. "며칠 전만 해도," "아니 그럼 며칠 전까지 용정에 있었다 그 말입니까?" "그, 그런갑더라. 하숙집에 국밥 날라달라고도 하고, 송애가 더러," 길상은 단순한 일이 아닌 것을 확실하게 느낀다. 윤이병이 용정을 떠나지 않았고 더군다나 송애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서희가 부상당한 일을 꼬치꼬치 묻더라는 조금전의 월선의 말도 상기된다. '그럼 그 돼지상의 사내는? 설마 거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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