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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10일 저녁에 김구는 이범석 등 광복군 간부들과 함께 섬서성 성주 축소주(祝紹周)의 집을 방문했다.
무더운 여름밤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객실에 앉아서 후식으로 수박을 먹으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에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축소주는 "중경에서 무슨 소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하며 전화를 받으러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에 축소주는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나오면서 말했다.
"왜적이 항복한답니다."
축소주는 마치 실신한 사람처럼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김구는 축소주의 말을 듣는 순간 "아! 왜적이 항복을!"하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것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백범일지」는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조직적, 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무전기를 휴대시켜 산동반도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여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하게 하고, 전신으로 통지하여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하여 사용할 것을 미국 육군부와 긴밀히 협의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계획을 한번 실시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
시안(西安) 한국광복군 2지대에서 국내진입작전을 합의한 미국 OSS부대 책임자 도노반(William J. Donovan) 과 백범 김구.
시안 광복군 제2지대 본부에서 김구 주석은 "OSS 총책임자 도너번과 오늘부터 아메리카 합중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적 일본을 항거하는 비밀공작이 시작된다"고 선언하였다. 서안훈련소와 부양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을 조직적·계획적으로 각종 비밀무기와 전기(電器)를 휴대시켜 산동반도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여 국내 요소에서 각종 공작을
개시하여 인심을 선동하게 하고, 전신으로 통지하여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하여 사용할 것 을 미국 육군성과 긴밀히 합작하였다.
-<백범일지>중에서 -
<독수리작전>은 4월 하순에 이르러 궤도에 올랐다.
OSS는 4월26일 아침에 군수물자를 실은 트럭 두 대를 <독수리작전>에 할당하여 서안으로 보냈다.
이어 4월29일에는 이범석과 <독수리작전> 요원으로 선발된 25명의 탈출 학병청년들이 특별기편으로 서안으로 갔다.
이들은 5월1일부터 일주일 동안 예비훈련을 받고 각자의 자질과 적성에 따라 임무와 훈련 내용이 결정되었다.
처음 「독수리작전」에 참여한 미군요원은 사전트를 비롯하여 모두 5명이었다. 사전트는 5월9일에 서안으로 가서 5월11일에
정식으로 독수리작전 야전사령관에 취임했다. 훈련에 필요한 모든 장비도 사전트와 함께 훈련본부에 도착했다.
OSS는 훈련을 담당할 인원을 10명으로 정했으나 요원 부족으로 5명이 먼저 부임하여 훈련을 실시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 뒤로 점점 요원들이 보충되어 OSS대원 40여 명이 제2지대에 상주하면서 협동작업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유일한 한국인 출신 현역 미군장교 정운수 소위를 비롯하여 10여 명의 동포들이 군속으로 참여했다.
그들은 주로 통역을 담당했다. 주미외교위원부에서 일하던 정운수는 이승만의 권고로 미군에 입대했다.
미군복과 미군용 보급품을 지급받은 대원들은 3개월 예정의 훈련에 들어갔다.
드러먼드(William Drummond) 대위를 책임자로 하고, 윔스(Clarence N. Weems) 대위가 훈련반 지도관이 되어
대원들을 훈련시켰다. 훈련의 주요 내용은 국내침투에 대비하는 각종 특수훈련과 첩보, 파괴 훈련이었다.
정보학, 독도법, 첩보수집, 무전기 조작법, 송수신법, 암호해독법, 무기조작법, 폭약사용법 등과 게릴라전에 필요한
폭파, 파괴, 납치, 민중선동, 암살에 관한 특수훈련과 공중낙하훈련을 받았다.
김구는 8월 13일에 이범석을 ‘광복군 국내정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국내 동포들에게 배포할 포고문을 작성해 주었다.
이청천도 별도의 포고문을 만들었다. 국내정진군의 선발대는 이범석을 비롯하여 이해평(李海平), 장준하(張俊河),
김준엽(金俊燁), 노능서(魯能瑞), 이계현(李啓玄), 장덕기(張德棋) 일곱 명으로 결정되었다.
국내정진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열정의 사나이 이범석은 흥분했다.
그날로 그는 제2지대의 구대장들과 선발대 인원을 소집하고, 국내정진군의 임무를 다음과 같이 거창하게 설명했다.
“오늘 내일 사이에 여기 모인 동지들과 함께 나는 국내로 들어갈 계획이오. 오늘 아침에 임시정부는 나에게 국내정진군
사령관의 직책을 맡겨 주었소. 국내에 누구보다도 빨리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생겼는데, 다름 아니라 중국전구 미군사령부가
곧 사절단을 서울로 들여보낼 것이니 우리도 그편에 편승하라는 전달이 있었소. 우리의 임무는 대단히 무겁소.
국내에 진입하는 대로 일군에 징집된 우리 병사들을 인수해야 하고, 일군의 무기접수를 지휘해야 하며, 국민자위군을 조직하고
또 불순 정치세력이 작용할 수 없는 분위기를 조성할뿐더러, 국내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협조를 하면서 하루 속히
우리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환국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야 하오.”
김구는 이청전 이범석과 상의하여 OSS(미전략첩보국) 훈련을 받은 광복군으로 국내정진군을 편성하여
국내로 진입시키기로 하고, 이범석을 대장으로 한 광복군 선발대를 OSS요원들과 함께 C-47수송기편으로 국내로 들여보냈다.
광복후 사흘 뒤인 1945년 8월18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정진대원 이범석과 김준엽, 노능서, 장준하가 C-47수송기를 타고
중국 시안 비행장을 떠나 여의도 활주로에 착륙했다. 이날 경성비행장(현 여의도 공원) 활주로 끝에 멈춘 비행기에서 광복군 정진대와 미군이 내리자 착검을 한 일본군들이 포위망을 형성해 이들을 포위했다.
8월15일 광복 후 한국인의 봉기를 우려해 일본이 도리어 치안권을 강화한 탓이다. 정진대원들이 김구 주석으로부터 받은 명령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이름으로 조국에 들어가 장렬히 전투를 벌이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고
고국 땅을 밟았다. 하지만 일본군과 긴 실랑이 끝에 이틑날 새벽 5시 무렵, 평양에서 실어온 가솔린을 채운 비행기는 여의도 비행장을 떠나 기수를 돌려 중국 산둥성으로 향했다.
학도병으로 끌려갔던 장준하는 일본군을 탈출해서 중칭 임시정부로 가서 한국광복군에 들어간다.
그는 OSS특공대에 편입되어 특수훈련을 받고 마침내 국내진공작전에 참가한다. 그가 여의도에 도착한 당시 상황을
그의 책 '돌벼개'에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8월 16일 새벽에 시안 비행장에 닿은 우리는 구내식당 한 모퉁이에 모여앉아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하루 낮, 하루 밤 그리고도 하루 낮의 기다림이었다. 우리는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명령을 기다리며
고향을 생각하고 있었다.
8월 17일 저녁, 식당 안으로 미군 1명이 뛰어들어왔다.
그는 우리 인원을 두 사람 줄이고, 무기와 탄약을 제외한 모든 휴대품을 버리라고 했다.
위험한 일이 생길지 모르니 가능한한 비행기를 가볍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범석 대장과 김신일 동지, 노능서 동지 그리고 나 이렇게 네명이 가기로 했다.
미군 OSS도 네 사람을 줄여서 재 조정된 일행은 22명이었다.
8월 18일 새벽 3시 30분 경, 우리는 또다시 시안 비행장을 이륙했다.
‘이번에는 정말 조국 땅을 밟아 볼 수 있을까?’
나는 비행기가 산동반도를 지나 황해 위를 날 때까지 내내 의심하고 있었다.
조국의 산하가 내려다 보이자 내 앞에 앉은 이 장군은 몇 번이나 눈가에 손수건을 갖다 댔다.
조국을 떠난지 30년 만에 돌아온 것이니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으랴.
며칠 전, 뚜취 본대를 떠나던 날, 저녁에 나는 장군의 책상 위에 놓인 손수건에 이런 글귀가 쓰여진 것을 보았다.
‘아직 구차히 목숨을 유지한 것은 나라에 보답하기 위함이다.’
고도를 낮춘 비행기는 한강 하류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황해를 건느면서 매 5분마다 한국 내 일본군 사령부에
‘미국 군사 사절단 진입중’이라고 계속 무전을 보냈는데 답이 안 와서 우리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한강 줄기를 따라 영등포 위에 이르러서야 일본군에서 답이 왔다.
“여의도로 내려라.”
수송기 창으로 한강 줄기가 눈에 들어 왔다. 8월의 맑은 하늘 아래에 있는 조국의 나무, 길, 산, 들 . . . .
어느덧 수송기가 여의도 활주로를 향해 고도를 낮추었다. 일장기를 붙인 수많은 일본군 비행기가 창 밖으로 지나갔다.
중형 전차와 전투기들도 보였다. 주먹을 꼭 쥔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수송기가 활주로에 닿으면서 덜컹 흔들렸다. 납덩이 속을 밀치고 나가듯 비행기가 육중하게 나아가다 격납고 앞에 있는 광장에서
멎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 오고 숨이 탁 막혔다.드디어 비행기의 출입문이 열렸다.
우리는 일본군과 싸울 뜻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기관단총을 모두 어깨에 메었다..
그러고도 만일을 위해서 각자 흩어져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내 차례가 오자 나도 몸을 날렸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방독면을 쓰고 총검을 든 일본군들이 돌격태세를 갖추고 우리를 완전 포위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 50여 미터 떨어져 있는 격납고 앞에는 1개 중대쯤 되는 일본군 병사들이 일본도를 뽑아 든
한 장교 뒤에 모여 있었다. 살펴보니 그 앞에는 고급장교인듯한 자들이 한 줄로 서 있고 장성도 몇 명 서 있었다.
더구나 격납고 뒤에까지 무장한 군인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중형 전차와 기관포도 우리 쪽을 향하고 있었다.
동지들은 눈빛을 무섭게 빛내면서 사방을 경계했다. 그러나 아직 기관단총을 거머쥐지는 않았다.
우리들은 땀에 젖은 채 8월의 뜨거운 열기가 이글대고 있는 비행장 아스팔트 위에 서 있었다.
그동안 그들은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한 10여 분이나 지났을까 마침내 우리들은 일본군 고급장교들이 늘어선 쪽으로 한 걸음씩 발길을 옮겼다.
“각자 흩어져서 걸어라. 조심해라.” 누군가가 나직히 말했다.
우리들이 다가서자 일본군 병사들이 의외로 포위망을 풀고 길을 열어 주었다.
일본군 육군 준장과 장교단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일본군 사령관 쇼스키 중장이었다.
잠시후 펄스 대령과 쇼스키 중장이 마주 보고 섰다.
거구의 펄즈 대령과 왜소한 일본군 장군이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보였다.
“무슨 일로 왔소”
쇼스키 중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몸집에 비해 퍽 야무져 보였다.
우리측 대표는 말없이 영등포 상공에서 뿌리다 남긴 전단지를 내밀었다.
우리 연합사절단의 임무가 일본어와 우리말로 적혀 있는 전단이었다.
쇼스키 장군이 그 글을 읽고나서 말했다.
“당신들이 들어온 이유를 알겠으나, 아직 도꾜로부터 아무런 지시를 받지 못했소.
그러니 더 이상 머물지 말고 즉시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소.”
그러면서 이렇게까지 위협했다.
“우리 병사들이 꽤 흥분해 있으니 만약 돌아가지 않으면 당신들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소.”
그러자 우리 대표가 쇼스키 중장에게 말했다.
“일본 천황이 이미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한 사실을 모르시오?
이제부터는 도꾜의 지시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오.”
그러나 그들은 쉽사리 앙보하지 않았고 양측은 옥신각신하며 몇 번이나 더 말을 주고 받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쇼스키는 한 부하에게 일을 처리하라고 이르고 물러가 버렸다.
그 부하는 여의도 경비사령관인 일본군 대좌였다.
그 후에도 대좌와 우리측 대표사이에 같은 주장이 몇 차례 오가는 동안에
3시간 40여 분의 시간이 긴장 속에서 지나갔다.
그때 일본군 대좌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리고는 곧 펄즈 대령에게 다가와 도저히 흥분된 자기 병사들을 누를 길이 없으니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결국 펄스는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일본군 대좌는 포위병의 지휘자를 불러 귓속말을 했다. 그리고는 일본말로 크게 소리쳤다.
“이봐, 너희들은 이쪽을 보고 경계하지 말고 밖을 향해 서서 경계하란 말야.”
지휘자는 전원 “뒤로 돌앗!’을 시키고 나서 철모를 벗고 총검을 빼라고 했다.
우리도 안도의 숨을 내쉬며 총을 내렸다.
이렇게 위기가 누그러진 것이 다행스러웠다.
일본인 대좌와 펄스 대령은 우리가 돌아갈 문제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중국 서안까지 갈 가솔린을 보급해 달라고 하며 시간을 끌기로 했다.
그들은 여의도엔 C-47에 맞는 가솔린이 없으니 다음날 평양에서 날라다 주겠다고 했다.
잠시 후, 일본군은 모조리 물러가고 그 대신 일본 헌병들이 우리를 경호했다.
우리 한 사람에 일본 헌병 두 놈씩이 따라붙었다. 그들은 친절하게도 목욕물까지 준비해 주었다.
그러나 이 판국에 총을 놓고 목욕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세수만 하고 눈을 돌렸다. 저 멀리 노량진 철교 똑을 보니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아아, 동포로구나,’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느새 해도 기울고 강바람도 불어오기 시작했다..
해가 떨어지자 흰옷 입은 동포들의 더 많이 눈에 띄었다.
아무라도 소리쳐 불러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헌병 놈들이 붙어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고국 땅에서 그리움조차 마음껏 터트리지 못하는구나.’
저녁 구름이 생선비늘처럼 흩어져 있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강변의 포풀러가 춤을 추며 우릴 환영하는 것 같았다.
우리의 숙소는 일본군 장교 집합소였다.
그곳엔 저녁식사와 함께 간단한 술자리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맥주 안주로 튀김과 계란부침 등이 놓여 있었다.
일본군 대좌와 그 부하가 이범석 장군에게 맥주를 권해 왔다.
“열심히 준비했는데 이것밖에 없습니다.”
이 장군은 일본군 대좌가 권하는 맥주 한 잔을 받아 마시면서 말했다.
“그래, 있는 것 다 차린 것이 이것이니 . . . .
물자가 그렇게 부족한데 뭣 때문에 당신네 나라는 일본 국민의 희생을 계속 요구하는거요?”
“우리 군의 형편이 그렇습니다. 자 어서 술이나 드시죠.”
“그럽시다.” 장군은 그렇게 대답하고 남은 술잔을 마저 비었다.
이 날 나는 내 생애 처음으로 술잔을 입에 댓다. 청교도적인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나는 어려서부터
술, 담배를 입에 대서는 절대 안된다고 배워 왔었다. 그래서 나와 친한 사람들은 나에게
아예 술, 담배를 권하려 들지 않았다.
그런데 김신일 동지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신철 동지, 내가 특별히 한 잔만 권하겠네. 자, 일본군 대좌가 따라 주는 맥주 한 잔만 들어보구려.
중국 대륙 6천 리를 횡단하며 이를 갈았던 그 원한을 생각해서 . . . 얼마쯤은 풀어질 거요.
정말 그 고생을 생각하며 딱 한 잔만 마시구려.”
나는 눈을 감고 일본군 대좌가 따라 주는 맥주 한 잔을 마셨다. 그 맥주는 쓰디쓴 승리의 잔이었다.
그 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패전의 분풀이를 하려는 몇몇 일본군 장교가 졸병들을 거느리고 술자리를 급습했던 것이다.
우리는 기관단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재빨리 문과 창문 쪽으로 붙었다.
난처해진 건 술을 권하던 일본군 장교들이었다. 밖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우리를 해치려는 군인들과 이를 제지하려는 헌병대가서로 실랑이를 벌이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많은 헌병대가 동원되어서야 그들은 진압되었다. 그 일로 인해 결국 술자리는 깨지고 말았다.
밤이 깊어갔지만 잠이 오지 않아 숙소로 제공된 다다미방에서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었다.
바로 영내만 나서면 그리운 동포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다욱 안타까웠다.
8월 19일. 날이 새고 아침이 밝아 왔다.
나는 조국의 아침 해를 향해 마음껏 기지개를 켰다.
눈부신 햇살을 기대했으나 너무 이른 아침이어서 하늘만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우리 일행은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펄스 대령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우리는 수통에 가득 물을 채우고 흙도 한 줌씩 종이봉투에 담았다.
되돌아가서 그 물과 흙을 동지들에게 전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도 고국의 물을 마시고 또 마셨다.
마포 강변에서 아침 연기가 안개를 밀어내고 자욱하게 깔렸다.
남산과 삼각산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아아, 저것이 . . .”
강 건너 어느 민가로 숨어 들어갈 수만 있다면 맺힌 한과 멍울진 분을 한번 풀어볼 수 있으련만.
그날 오후 3시 반쯤, 우리는 평양에서 가져왔다는 휘발유를 비행기에 넣었다.
그리고 5시에 우리는 모두 착잡한 심정으로 비행기에 올라탔다.
수송기는 이륙하자마자 고도를 높였다. 일본군 전투기가 뒤따라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