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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간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사도적 권위를 어떻게 적절하게 행사하는가?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이 그들이 전한 복음에 무관심과 적대감을 드러낼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마태복음 28:18-20을 유일한 전도에 관한 지상명령으로 여기는 오늘날 교인들에게 본문은 매우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예수는 9장에서 열두 제자를 파송했고, 본문에서는 일흔 명의 제자를 파송한다. (70인 역에는 72명). 창세기 10장에서 모든 인류가 70 족속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묘사하는 것에 근거하여 70이라는 숫자는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누가의 구원론의 특징이 드러난다. 즉 구원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다.
사도들은 예수에 앞서 그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마을로 보냄을 받았다. 예수가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어서” 더 많은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요청하는 대목(2-3절)에서 우리는 긴급성을 느낀다. 사명은 포괄적이다: 설교, 가르침, 병 고침을 다 포함한다. 사도들은 이런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예수와 동일한 능력을 부여받는다.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이 70인은 즉각적으로 사탄의 반발에 부딪히겠지만, 사탄은 굴복하게 될 것이다.(17-20).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소식을 평화롭게 전해야 한다. 그들은 늑대 가운데 양 같이 행동해야 한다.
본문에서 사도적 귄위는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평화를 가져오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능력으로 표현된다.(9:2-3) 그것은 자발적으로 가난을 택하고, 신변보호를 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최소한의 여행 차비로, 타인의 환대에만 의존하여 여행하는 삶의 형태로 드러난다. 다른 사람의 배척에 대해서 비폭력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한 가지 목적 때문에 행해진다: 그들이 예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게 하는 것이다. 사도들이 자신들의 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자신들의 역할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사도적 사명은 이 세상의 권력과 특권의 시스템을 전복시킨다.
사도들이 주는 평화는 단순한 겉치레 인사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평화이고, 구원의 내용은 샬롬이다. 역설적으로 평화는 분란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평화는 악마적 세력의 반항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길을 걸어야 할 때도 있다.(19) 그러나 사도들은 그런 세력을 이길 능력을 부여받았다.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자들은 종말론적인 심판을 받을 것이지만, 그것은 사도들의 소관이 아니고 하나님 소관이다.(12-15)
2절의 “추수할 것”에 관해 다양한 해석이 있었다. 이사야 27:12에 근거하여 그것이 모든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고, 혹은 구원받을 모든 자를 가리킨다는 의견도 있다. 오늘날 추수라는 표현은 “우리”와 “그들”을 구별한다는 점에서 비인간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또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너무 수동적으로 묘사한다는 문제도 있다. 추수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가? 이 부분은 다종교적 상황에서의 종교 간 대화와 연관하여서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누군가를 추수한다는 표현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 이런 비판적 시각에도 일리가 있지만, 예수의 명령이 이 세상의 권력과 특권과 부를 포기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추수의 은유가 착취나 우월감을 조장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추수는 완전히 익어서 하나님의 왕국으로 모여짐을 의미한다.
탁발 수도회 전통은 본문을 비롯한 몇몇 구절에 근거하여 발전되었다. 일하는 자는 숙식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그 이상은 기대하면 안 된다. 사도들은 지갑을 갖고 다니면 안 되었다. 즉, 돈을 보관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런 사도적 사명은 오늘과 같은 소비지상주의 문화에서 매우 전복적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교회가 자발적 가난의 모습을 보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예수는 제자들에게 무엇이든 차려 주는 음식을 먹으라고 말한다.(8) 사도행전 10장에서는 이 구절이 베드로의 경험과 관련하여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복음을 위해서는 음식에 관한 종교적 규례도 잠시 잊어야 한다. 사도적 소명을 위하여서는 복음을 받을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자신의 관습과 문화적 규준을 무시해야 할 때도 있다. 삶의 모든 측면이 선교의 중심 과제를 위해 모두 조정되어야 한다. 이것 때문에 평화의 복음이 분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것이다.
선교에서 환대는 매우 중요하다. 70인이 모든 형태의 착취, 자기중심주의, 개인적 이익을 포기하고 평화의 사역에 참여할 때 그들은 환대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사람들로 예수를 만날 준비를 시키는 것이다. 이 일은 친절한 태도와 사려 깊은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사도들은 다른 사람의 가정에 초대받을 수 있을 만큼 인간관계를 잘해야 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할 기회가 온다. 이들은 항상 상처받을 위험에 처해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음의 수용이나 환대를 강요할 수 없다. 사도들은 먹을 것, 잘 곳, 환영하는 사람이 없어도 복음을 위해 기꺼이 나선다.
사도들이 사람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선의 환대는 열린 마음으로 복음을 듣고 반응하는 것이다. 사도들이 진정으로 예수를 대신하여 복음을 전한다면 그들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받을 것이다. 예수가 말했듯이 추수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부족한 것은, 본문이 묘사하는 것과 같은 사도적 사명감을 갖추고 보냄을 기다리는 일꾼들이다.
주석적 관점
- 비록 세 공관복음서가 예수가 그의 말씀과 행동의 사역을 확대하기 위하여 열 두 제자를 짝지어 보냈다고 말하지만(마10:1-42;막6:6-11;눅9:1-5), 오직 누가만이 일흔(두)사람에 대해 추가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누가가 말한 첫 번째 선교는 예수의 갈릴리선교인데 이는 명백히 유대인들을 향한 선교이다. 그런데 일흔 두 사람에 의한 선교는 예수가 사마리아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9:51-56) 기간 중에 일어난 것이다. 누가는 마태와 동일한 자료로 유대인 선교를 말했는데 이를 확대된 선교로 연결하기 위하여 초점을 바꾼다. 전통적으로 제자들의 숫자는 짝수로 하는 것이지만(70 혹은 72), 이는 주로 구약을 참조하는 것을 반영하여 아무도 그 숫자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주석가들은 이 수자를 이스라엘의 70인 장로(출24:!;민11:16)를 은유하거나, 창세기 10:2-31에 나오는 노아의 자손들의 숫자를 은유하는 것으로 본다. 불확실성하긴 하지만, 일흔 둘의 선교는 선교의 확장된 범위를 가리키는데, 제자들이 많아져 “땅끝까지”(행1:8) 하나님나라의 메시지를 전할 것이라는 것을 예시하고 있다. 마태에서는 사마리아로 지나가지 않았다고 말한 반면에(마10:5), 누가는 사마리아로 지나가는 도중에 예수가 친히 가려했던 “모든 고을과 모든 곳으로”(10:1) 그들을 보내신다. 누가는 이 선교를 과거의 사건으로 묘사하지만, 아마도 많은 부분에서 누가의 공동체가 그가 살던 시대에 계속적인 선교를 인식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야기의 형태를 구성하는 종말론적 프레임은 확장된 선교의 긴급성을 가리킨다. 마태의 “제한적인 위임”과 (마9:37-38) 같은 자료인 누가의 추수의 비유는 종말의 친숙한 이미지인데(마13:39;요4:35), 이는 “구름 위에 앉은 분이 낫을 땅에 휘둘러서, 땅에 있는 곡식을 거두어 들일 때”(계14:6), 충실한 하나님의 일꾼을 모으기 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탄의 이미지를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10:18)으로 묘사하는 것은 악의 궁극적 패배를 가리키는 종말론적 주제이다(계12:9;20:2,7-10).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모티브(10:20)는 계시록에서 충실하게 견디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정당성이 입증된다는(3:5;13:8) 주제와 상응한다.
- 종말론적 프레임은 확장된 선교의 긴급성과 제자들의 위치를 우주적 드라마에 위치시킨다. 앞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사람을 낚는 것으로(눅5:10) 말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 충성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누는 말하자면 종말론적 추수에 참가하는 더 넓은 서클을 선언한다. 일흔 둘의 사명은 열두제자와 같이,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4:18) 예수의 사역을 확장하는 것이고, 치유와 귀신 쫗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는 제자들이 병자들을 고치며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10:9,11)는 것을 계속해서 선포하도록 위임하고 있다.
- 추수할 것이 많은 것은 그것이 썩기 전에 추수할 수 있는 많은 일꾼이 필요함을 요청하고 있다. 제자들은 추수할 일꾼을 위해 기도하고 선교적 노력에 동참하는 것으로 응답할 수 있다. 제자들은 예수의 사명에 함께할 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 박탈과 위험도 함께 겪는다. 제자들은 그의 머리 둘 곳이 없는 어려움(9:58)과 다른 사람의 호의에 의지해 살아야 한다(9:51-56). 이리 가운데 있는 양의 이미지(10:3)는 사명을 감당하는데 따른 박해를 예고한다(요10:12과 비교). 메시야 왕국에서는 이리와 양이 함께 풀을 뜯지만(사11:6;65:25), 지금은 양이 이리를 겁낼 수밖에 없다. 전대도 자루도 신도 가지고 가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10:4)는 것은 사태의 긴급함을 의미하는데,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방랑의 생활을 할 때 길에서 사교적인 인사를 할 시간은 없다는 것이다. 여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들이 없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호의에 의지하라는 것을 말한다.
- 제자들이 집에 들어가는 것(5-7)과 고을에 들어가는 것(8-12)에 대한 병행적 가르침은 때의 긴급성을 가리킴과 동시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응대를 받는다는 복합적 반응을 말한다. 어느 집에서 대접을 받을 때, 주는 것을 먹고 한 집에서 머물러야 한다(7). 마찬가지로, 어느 고을에서든지 차려주는 음식에 만족해야 한다(8). 이러한 두 가지 음식에 대한 가르침은 여러 족속들에 대한 확장된 선교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음식에 대한 율법에 우선한다는 것을 말한다.
- 제자들의 선교에 대한 복합적 반응은 추수에 수반되는 궁극적 분리를 예고한다. 집에서 그들은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과도 만나고, 그렇지 않은 사람과도 만난다. 마찬가지로, 고을에서도 그들을 영접하는 사람과 영접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 묘사는 누가 시대에 교회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복합적 반응은 또한 추수에 동반되는 전환, 즉 그들의 선교의 복합적 결과가 궁극적 결과들을 가진다는 것과 상응한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소식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소돔과 고모라보다 너 나쁜 운명을 맞을 것이고(12), 다른 한편으로 제자들의 선교는 승리의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그들이 돌아와 귀신이 복종한다고 보고하자, 예수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17)고 선언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왕국의 궁극적 승리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교사명의 위험과 박탈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하늘에 기록될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추수 때에 함께하는 무리들에 속하기 때문이다.
목회적 관점
기독교 메시지의 본질은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을 훨씬 넘어서 확장된다.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에 의해서나 혹은 그것이 들리는 현장에 제한되지 않는다.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힘은 폭넓게 다양한 언어와 셀 수없이 많이 장소에서 매우 다양한 유형의 교사들(혹은 설교자들)에 의해 표현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들 각자 모두에게 제공되는 희망이 있다.
예수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방향을 정한 후에(눅 9:51), 그가 그의 메시지를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었다. 예수는 그의 가르침의 범위를 확장하고 그가 도착하는 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특별한 메신저를 보냈다(9:52). 70명을 임명해서 한 쌍씩 보내서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할 준비를 하게 했다(10:1). 그는 그들을 “친히 가려고 하시는 모든 고을과 모든 곳으로” 보내며 말하기를,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2절)”고 한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그들이 받은 환대에 기뻐하면서 말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17절).”
오늘 우리는 그의 이름의 권세가 여전히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수단인 것을 기뻐한다. 70명의 메신저들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지만, 하나님은 계속해서 새로운 복음전도자, 선생들, 그리고 설교자들을 부르셔서 복음의 메시지가 더 널리 전해지게 하신다. 지금도 메신저가 어떤 사람인지는 핵심적인 요소가 아니다. 심지어 평범한 기독교인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도록 권능을 받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믿고 따르도록 격려할 수 있다. 교회는 메신저가 아니라 메시지가 핵심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수가 살던 세상보다 더 크고, 우리는 예수가 지상에서 다니던 시대로부터 2천년이나 떨어져 있고,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우리의 기술은 광범위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듣고, 마음을 바꾸고, 말씀에 복종하도록 격려하는 권능은 여전히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분의 이름에 있다.
예수가 그의 70명의 메신저에게 지시한 것은 대단히 구체적이어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어렵다는 것을 의심할 바 없이 알려주었다. 예수는 그가 그들을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3절)”고 하면서, 그들이 입고 있는 것만 가지고 가고,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한다. 이 방문의 주목적에 대해서는 혼란스러울 것이 없다. 그들은 한 집에 머물면서 제공되는 것을 먹었다. 환대는 받아들여야 했고, 축복으로 갚아야 했다. 그들이 할 일은 평화를 빌어주고 병자들을 고쳐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었지 그것을 전해주는 메신저가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종들이 도시와 마을의 사람들에게 전한 메시지는 필수적이고 긴급한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중요하다고 선포했다. 하나님 나라는 삶을 변화시키는 권능과 함께 예수의 현존 안에서 곧 실현될 것이다. 예수는 시골을 다니기도 하고 그의 이름으로 말할 사람을 임명하기도 한다. 그들은 메시지의 긴급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지금은 미룰 때가 아니라 결정할 때였다. 예수가 예루살렘에 더 가까워지면서 십자가에 대한 전망(9:22을 보라)이 더욱 커졌다.
많은 신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긴급성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희미해진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매우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우리 자신의 상황과 환경 속에서 살면서, 상황이 지시하는 대로 변화하지만, 우리가 보고, 만지고 느끼는 한계 안에서 살아간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우리의 관점을 바꾸라고 요구한다. 오늘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살든 아니면 내세에서 그와 함께 살든, 우리는 인간의 노력으로 세워진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렌즈를 통해 인생의 도전들을 보기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만 시간은 우리를 둔하게 만든다. 한 해 한 해 지나가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약속에서 멀어지고, 그 나라를 기대하는 감각이 희미해진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뉴스를 전하도록 임명받은 메신저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으로 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부활에 대한 약속이 성취되리라는 기대를 계속 나누면서, 부활의 현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살면서, 이 두 관점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다.
메신저로서 우리는 강력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가라고 임명하셨다. 우리는 예수의 발자취 안에서 우리가 살아갈 길을 찾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활력과 기대에 찬 복음을 나누라는 특별한 명령을 받았다. 신앙은 더 이상 우리에게 부담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아주 분명하게 우리 메시지의 초점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매일을 그의 이름 안에서 살아가라는 부르심에 있다. 우리의 권위는 우리의 지위나 재산이나 능력에 있지 않다. 맨 처음 메신저들처럼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따르고 복종하는 사람들을 격려해야 한다. 그 권능은 70명에 의해 이미 검증되었다. 그들은 “기쁨에 차서, 돌아와 보고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17절).’” 오늘날의 메신저로서 이 기쁨은 또한 우리의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복음을 나누라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임명했다. 우리는 우리가 성취한 능력 때문에 기뻐하지 않고, 그 이름이 가장 강력한 분에 의하여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20절)”을 알고 기뻐한다.
설교적 관점
-이 본문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신앙공동체의 삶과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우리 주님의 선교가 점점 확대되는 것을 보게된다. 지금은 이 본문이 선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처럼 성령강림절의 중반에 해당되고 교회성장을 강조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초록색). 본문에서 바로 몇 가지 흥미로운 질문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 70명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 이들 중 몇 명은 지난 주에 다루었던 잠재적 추종자 (would-be followers)라고 말해도 괜찮은 것인가? 누가는 예수의 선교에 있어 그 수를 늘림으로써 12제자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려는 것은 아닌가? (누가의 기록에서 12제자만 예수의 유일한 추종자라고 한 적이 없다. 이전에 누가는 예수를 지지했던 많은 여성들의 역할을 중요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질문들 중 어디서 시작하든(학자들 간에도 합의된 것은 없다) 누가복음을 통해서 예수의 선교가 확대, 발전된 것에 주목하는 일이 중요하다. 앞에 있던 이야기 대부분에 있어서 예수는 주역이었다. 그는 곳곳을 다니며 설교했고 가르쳤고 기적을 행했다. 보다 최근에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중 몇 명에게 같은 권위를 부여했는데 먼저 12제자에게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을 그의 앞에 보냈다. 여기서 예수는 70명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들고 그가 보내려는 곳에 12제자에게 부여했던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가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의 선교를 위탁받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확대되는 것은 누가의 두 번째 책 사도행전과 선교의 책임이 예수로부터 오순절과 그 이후에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 옮겨지는 것을 예상하게 한다. 예수는 그 때나 지금이나 제자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제자들이 부여받은 선교를 성취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한다.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네가지 주목할 점이 있는데 그 중 어느 것이라도 설교를 위한 좋은 주제가 될 수 있다. 첫째, 예수는 추수가 풍요롭다고 약속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부족하다고 여길수도 있는 곳에서 풍성함을 본다. 명백하게도 이것은 그가 낙관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추수하는 주인(the Lord fo the harvest”(2절)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예수는 70인에게 추수를 준비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책임이다, 오히려 예수는 제자들에게 (1)추수한 것을 모아들이고 (2) 다른 일꾼들이 이 중요한 일에 참여하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오늘날]사역의 상황이 70인에게 주어진 때와 달라져왔지만 예수께서 그의 추종자들에게 하는 위임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하나님은 우리 공동체의 성장에 책임이 있고 우리는 이 성장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계획하고 조직하고 일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또 하나님께서 준비해 둔 수확을 거두는 일에 다른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초대하는 일이 우리의 일이다.
-둘째로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른 이 선교에는 피할 수 없는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70인이 적대적인 세상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예수는 싸움을 할 무장을 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양들처럼 가게 될 것이다. 그들을 받아들이는 가정에는 축복을 해야하고 만일 거부당하더라도 저주하지 않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이전에 야곱과 요한이 예수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불을 요청했던 일을 상기해보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평화는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바라는 집에 자연스럽게 임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집에서는 되돌아올 것임을 선언한다.
예수는 일꾼들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선언하고 또 그들에게 환대를 베푸는 집에 머물 것을 가르친다. 그들은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다녀서는 안된다. 또 후원자들을 조직하몀서 마을 이곳 저곳을 돌아다녀서도 안된다. 어느 한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제공하는 것을 기쁘게 받고 그들의 도움에 의존하라고 가르친다. 오늘날 우리 청중들은 도움을 받기보다는 주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한 의존성을 이해하기가 쉽지않을 것이다.
-셋째로 70인들의 성공은 그들이 이해한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면이 있다. 이들이 성취한 것은 예수의 초기사역과 비슷한 반면에 예수는 그 일들이 사탄이 떨어지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전조라고 선언한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의 선교에 믿음으로 참여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자비를 행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고 악의 세력이 흔들리며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약속이 완성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넷째 아마 가장 중요한 것으로 예수는 70인의 승리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고 선언한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19-20절)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 땅에서의 그리고 영적인 성공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이고 그를 통하여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이 관계는 은혜를 통하여 그들의 것이 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수혜자이고 또 전달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여행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확산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이룬 가시적 선교의 성과에 무관하게 자신들이 본 것을 증언하도록 부름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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