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이 당신 곁을 떠난 이유
버트런드 러셀<행복의 정복>
근본적인 행복은 무엇보다 인간과 사물에 대한 따뜻한 관심에서 비롯된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관심은 사랑의 일종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소유하기를 원하며 언제나 명확한 반응이 되돌아 오기를 바라는 사랑과는 전혀 다르다. 행복을 가져오는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기를 좋아하고 개인들의 특성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랑이며 만나는 사람들을 지배하려 하거나 열광적인 찬사를 받아 내려고 하는 대신 그들의 관심과 기쁨의 폭을 넓혀 주려고 하는 사랑이다.
지나치게 많은 자극은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즐거움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근본적인 만족감을 표면적인 쾌감으로, 지혜를 얄팍한 재치로, 아름다움을 생경한 놀라움으로 바꾸어 버린다. 자극이 너무 많으면 병적인 갈망을 자아내고 심신을 황폐하게 한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권태를 견딜 수 있는 힘은 행복한 삶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다.
쾌락중에는 이처럼 대지와 접촉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도박 같은 것이 그 예이다. 자극이 강한 쾌락은 그 쾌락이 끝나는 순간 답답함과 두려움, 뭔지 모를 허기를 느끼게 하고 결국 불안에 빠져 지내게 된다. 권태를 두려워해서 강한 자극만을 찾은 결과 끝내는 더욱 나쁜 권태의 중독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통해 행복한 인생이란 대부분 조용한 인생이라고 말한다. 진정한 기쁨은 조용한 분위기속에 깃들기 때문이다. 잠시 힘든 일들을 잊고 야외로 놀이를 찾아 나선 사람들이지만 그 행렬은 기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뒤바뀌고 만다. 자칫 한눈을 팔았다가는 사고 나기 십상이기에 운전자들은 주변 경관을 바라보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앞차의 꽁무니만 응시한다. 저녁모임에 나간 이들도 이 밤 행복해지기로 마음먹고 나온 사람들이지만, 얼마 후 서둘러 술에 취하려 애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결국 감당하지 못할 만큼 취한채 낳아주고 길러 준 어머니의 희생에 비하면 자신은 얼마나 변변치 못한 존재인지 모른다며 신세 한탄에 젖곤 한다.
현대인들은 돈이 있으면 생계를 걱정하지 않으면서 여가를 즐기겠다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돈이 있으면 그걸 통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돈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면서 이제까지 엇비슷하게 살던 사람들을 따돌린 채 호사스럽게 살기를 원한다. 이 같은 문제의 원인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행복의 주요 원천이라고 지나치게 강조되어 왔기 때문이다. 성공은 행복의 한가지 작은 요소에 불과함을 직시하라고 저자는 말한다. 겨우 하나의 작은 가치를 위해 나머지 요소를 모두 희생한다면 지나치게 비싼 대가를 치르는 셈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다 같이 바라는 행복은 온갖 생각을 내려놓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시간을 갖는 데서 움이 튼다. 우리가 이 순간을 사람답게 살 수 있다면 그 안에 행복은 깃들어 있다. 무엇에 쫓기듯 살아서는 안된다. 영혼이 미처 따라올 수 없도록 급하게 살아서는 안된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그가 서 있는 자리마다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리라.’ 자신의 존재를 억지로 꾸미지 말라는 뜻이다. 있는그대로가 좋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불행해 질 수밖에 없다.
나무늘보에게서 배워야 할 몇 가지 것들
쓰지 신이치<슬로 라이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눈 이야기가 잡담으로 분류되고 수험공부나 취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공부는 잡학으로 분류된다. 마찬가지로 놀이, 취미, 간호, 기도, 산책, 명상, 휴식, 이런 것들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생산적인 시간 속에 포함되지 못하는 잡일에 불과하다. 어디 그 뿐인가, 연애, 아이 돌보기 같은 과거 중대사라 여겼던 일들조차도 금전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면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는 잡일로 치부된다. 생물학적인 성장과 노화는 경제를 최우선시하는 사회에서는 당연히 비경제적이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 책은 인생이란 애당초 이런 잡일들의 집적이 아닌지 되묻는다. 할 수만 있다면 하지 않고 지나가고 싶다고 여기는 일들이 실은 삶의 보람이며 우리에게 깊은 만족감을 주는 의미 있는 시간임을 보여 준다. 친구를 사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며, 작은 꽃을 들여다보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도 걸리지 않고 조금도 성가시지 않는 일들에서는 그 어떤 즐거움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쓰지 신이치는 중요한 것은 시간과 속도가 아님을, 2년 전에 세상을 떠난 모호크족 장로의 무덤을 찾아간 일화를 통해 전한다. 저자가 너무 늦게 묘지를 찾은 것에 대해 고인의 아들에게 사과하자, 아들은 톨킨의 <반지의 제왕>속에 나오는 한 토막의 얘기를 들려준다.
“아니 아니, 우리 마법사들에겐 지각이란 있을 수 없지. 언제든 우리가 도착한 때가 우리가 도착해야 할 시간인 거야.” 그러면서 그 아들은 덧붙인다.
“우리 인디언들은 언제나 백인들로부터 ‘늦었다’는 말을 들어 왔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도착해야 할 때 도착했을 뿐인데 말이죠.” 저자가 원주민인 블랙푸트족을 방문했을 때 그들의 선물가게 안에서 기묘한 모양의 시계를 발견한다. 큰바늘과 작은바늘은 정확히 움직이고 있지만, 숫자가 여기저기 제멋대로 적힌 시계였다. 왼쪽에 3이 있는 가 하면 아래쪽에 12가 붙어 있는 이 시계를 그들은 ‘인디언 타임’이라고 불렀다. 인디언 타임이라는 말에서 저자는 바보 취급을 당해 온 그들이 역으로 자신을 바보 취급해 온 서구 문명을 향해 보내는 비웃음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지적한다. 자신들에게 가해 온 모욕적인 언사인 굼뜨다. 느리다. 등의 이야기를 표면적으론 받아들였지만 속으로는 주류사회의 기계적이면서도 융통성 없는 시간 감각에 야유를 보내는 듯하다는 것이다.
저자가 슬로 라이프의 첫걸음으로 제안하는 것은 산책을 되찾는 일이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곧게 뻗은 길을 버리고 샛길로 들어가 한눈을 팔거나 멀리 돌아가면서 이것저것 살펴보는 것을 자신에게 허용하라고 말한다. 노는 즐거움, 자신이 어딘가 목적지로 가는 길 위에 있다는 생각에서 해방되어 지금을 사는 자유, 그저 거기에 존재함으로써 얻는 기쁨을 인정하자는 이야기이다. 2003년 9월 광주 맑고향기롭게 초정 특별강연에서 법정 스님은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속도전의 허구를 이렇게 지적했다.
“일찍이 근대과학의 좌우명은 속도였다. 빠르게, 더 빠르게, 그래서 영국과 프랑스가 합작해 콩코드라는 초음속 여객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 종말은 어떠했는가? 결국 소리보다 더 빠르다던 그 비행기는 공중폭발하고 만다. 이는 빠름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다. 세상을 살아 나가는 데는 어느 정도의 속도가 필요하지만, 지나친 속도는 오히려 해롭다. 무엇을 위해 빠르게, 더 빠르게 해야만 하는가? 남보다 앞서기 위해서? 앞선다고 더 행복한가? 경쟁심리에는 매우 비인간적이고 냉혹한 이기심이 작용한다. 기업들은 ‘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전혀 옳지 않은 소리이다. 이류, 삼류도 필요하며 또 얼마든지 살아남는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결국 자기 자신이다. 빠르게 더 멀리 뛰어 보았자 결국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다. 사람이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의 씨앗이 땅에 묻혀서 꽃 피고 열매 맺기까지는 사계절의 순환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기다림과 그리움이 동반된다.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은 당장 움켜쥐기보다는 쓰다듬기를 좋아한다. 목표를 향해 곧장 달려가기보다는 여유를 가지고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다. 직선이 아닌 곡선의 묘미를 안다. 여기에 삶의 비밀이 담겨 있다.”
기억하라, 이 세상에 있는 신성한 것들을
류시화<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얼굴 흰 형제들은 내 부족 사람들보다 훨씬 영리하기 때문에 많은 일들을 잘 해낸다. 하지만 그들이 사랑하는 법까지 잘 알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사랑하는 법을 배웠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의것만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바깥에 있는 것,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들을 사랑하는 법은 배우지 못한 것 같다. 그것은 전혀 사랑이 아니다. 인간이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서로 도우며 살라고 가르치기보다는 수백만명을 죽인 전쟁을 정당화하고 무기 개발에 힘을 쏟는 문화, 형제자매인 자연에 싸움을 걸고 착취하는 당신들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우리는 개인 소유물을 축적하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긴다. 자연 속의 모든 것을 남들과 기꺼이 나누고 꼭 필요한 것만 취한다. -단 조지 추장
우리가 알고 있는 인디언의 이미지는 폭력적이다. ‘토마호크’라 불리는 손도끼를 들고 역마차를 습격하는 인디언은 백인들이 만든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인디언들은 자연을 소유할 수 없는, 모두가 공유하는 조화로운 장소로 여겼다. 그들은 문명의 거대한 폭력앞에서도 어머니 대지를 먼저 생각했고, 사물의 본성을 깨닫고 그것들에서 음식과 옷, 약과 도구를 얻어 낸 현자들이었다.
그대의 가슴속에 죽음이 들어올 수 없는 삶을 살라. 다른 사람의 종교에 대해 논쟁하지 말고, 그들의 시각을 존중하라. 그리고 그들 역시 그대의 시각을 존중하게 하라. 그대의 삶을 사랑하고 그 삶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고, 그대의 삶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만들라. 오래 살되,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에 목적을 두라. 이 세상을 떠나는 위대한 이별의 순간을 위해 고귀한 죽음의 노래를 준비하라. 낯선 사람일지라도 외딴곳에서 누군가와 마주치면 한두 마디 인사를 나누라.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누구에게도 비굴하게 굴지 마라.
자리에서 일러나면 아침 햇빛에 감사하라. 당신이 가진 생명과 힘에 대해, 당신이 먹는 음식, 삶의 즐거움들에 감사하라. 만일 당신이 감사해야 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 잘못이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사람처럼 되지 마라. 슬피 울면서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도록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이 되지 마라. 그 대신 그대의 죽음의 노래를 부르라.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인디언 전사처럼 죽음을 맞이하라. -테쿰세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는 인디언들의 삶과 문화 그리고 그들의 슬픈 역사를 담은 인디언 추장들의 연설 모음집이다. 총 41편에 이르는 각각의 연설문 끝에는 저자의 해설과 인디언 어록들, 그리고 100여점의 귀한 인디언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15년이라는 오랜 집필 기간과 수백권의 자료 수집을 통해 완성된 책으로, 부록에는 인디언 달력과 인디언들의 독특한 이름을 실었다. 인디언들에 따르면, 존중한다는 것은 이곳에서 살아가는 대지와 물과 식물과 동물들이 우리 자신과 똑같이 여기에 머무를 권리를 갖고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우리는 진화의 맨 꼭대기에서 살아가는 가장 우월하고 전능한 존재가 아니라 사실은 나무와 바위, 코요테, 독수리, 물고기, 두꺼비들과 함께 각자의 목적을 완성하면서 삶이라는 성스런 고리를 구성하고 있는 일원일 뿐이다. 그들 모두가 그 성스런 고리 안에서 주어진 일을 해내고 있으며, 인간 역시 다르지 않다.
아프지만 한데 어울려서
윤구병<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윤구병은 삶터와 일터와 배움터를 구분하는 울타리를 거두어 낼 때, 비로소 인간다운 균형을 찾게 된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참교육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 온 그는, 공동체에서 이러한 교육철학이 구현되기를 바랐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독특한 진화의 길을 걸어왔다. 동물들의 경우 생존에 필요한 지식이 태어날 때부터 유전자 속에 새겨져 있지만, 인간은 생존을 위한 지식을 학습을 통해 배워 나간다. 본능적으로 아는 지식만으로는 인간의 손길로 빚어낸 복잡한 사회를 인식하고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두 발로 걸어다니고 손과 머리를 쓴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물음은 손과 머리를 어떻게 쓰느냐 하는 문제로 단순화할 수 있다고 윤구병은 말한다. 원시적인 자연속에서라면 인간은 손만 쓰거나 머리만 쓰면서 살아남기 어렵다. 그러나 오늘날의 제도 교육은 인간의 활동을 ‘머리로 하는 일’과 ‘손으로 하는 일’로 구분하고 ‘손으로만 일하는 사람’, ‘머리로만 일하는 사람’을 양산해 냈다. 윤구병은 한 쪽 능력만 일하는 우리 시대의 아이들을 반쪽이라고 말했다. 어느새 머리만 쓰는 반쪽이들이 손만 쓰는 반쪽이들을 짓밟고 제 마음대로 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현대의 학교는 아이들의 몸과 마음과 머리를 제대로 자라게 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오직 두뇌, 그것도 왼쪽 두뇌에 낡은 정보를 억지로 주입하여 왼쪽 뇌가 이상비대증에 시달리도록 골몰할 뿐이다. 사람은 저마다 동시에 경제의 주체이고, 정치의 주체이고, 문화예술의 주체이며 노동의 주체이다. 그런데 현재 제도화한 학교교육은 모든 인간이 저마다 자기 안에 구현해야 할 이러한 주체적 능력을 소외시켜, 이 세계를 경제인 따로 있고, 정치인 따로 있고, 문화예술인 따로 있는 기괴한 세상으로 바꾸는 온상이 되고 있다. 한 개인에게서 정신노동과 결합하지 않은 육체노동은 맹목이고, 육체노동과 결합하지 않은 정신노동은 공허하다. 사회와 격리되어 육체와 정신을 가두는 감옥으로 변질되고 있는 학교의 울타리는 무너져야 한다. 사람의 머리와 손은 다 같이 소중하다. 윤구병은 말한다. “누구나 머리와 손을 제대로 쓸 수 있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고, 사람답게 사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손을 맞잡고 머리를 맞대야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오고, 그런 세상에 살 때만 사람도 생명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남을 길이 열린다.” 윤구병은 나누고 베푸는 것만이 깨어진 삶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다. “여러 생명체가 더불어, 함께 살아야 나도 우리도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한 ‘더불어 삶’이요, 유기적 생명관이다. 그는 이 철학을 굵어진 손마디와 시커멓게 탄 얼굴로 직접보여 주었다. 윤구병은 앙리 베르그송의 말마따나 “사는게 먼저고, 철학 하는 일은 그다음.”이라고 말한다. 그는 삶에서 철학을 하는 사람이고 그에게 있어 철학은 곧 실천이었다.
한쪽의 여유는 다른 한쪽의 궁핍을 채울 수 없는가
장 지글러<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브라질 세아라 주의 크라테우스라는 곳을 방문했을 때의 일인데, 그곳에서 아빠는 가톨릭교회의 묘지옆에 작은 봉분들로 뒤덮힌 넓은 지대를 본 적이 있어. 아빠에게 숙식을 제공한 농가의 한 친구는 그곳을 가리키며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라고 말했지. 태어난 지 며칠 혹은 몇 주 되지 않아 배고픔과 쇠약, 설사, 탈수 등으로 숨진 이름 없는 아기들의 무덤이라는 거야. 법적으로는 출생신고를 하는 것이 의무지만 그 아기들의 부모는 너무 가난해서 그럴 형편이 못 돼. 출생신고를 하려면 1-2레알을 내야 하거든, 그래서 아기가 죽으면 부모나 다른 가족이 죽은 아기의 유해를 ‘이름도 없는 작은 이들의 묘’에 묻는다는 거야.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FAO의 집계에 따르면, 2005년을 기준으로 열 살 미만의 어린아이가 5초에 한명씩 굶어 죽어 가고 있으며, 비타민A의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한 사람은 3분에 한명꼴이고, 세계 인구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 5천만 명이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인류가 비축한 식량으로는 60억 세계 인구의 두 배를 거뜬히 먹여 살리고도 남는다. 이러한 모순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통계대로라면, 기아의 원인은 식량의 절대적 부족이 아니라 기아를 조장하는 다른 무언가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빠! 우리나라에는 먹을 것이 넘쳐 나서 사람들이 비만을 걱정하고 한쪽에서는 음식쓰레기도 마구 버리고 있잖아요? 그런데 아프리카나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에서는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니 정말 기막힌 일 아니에요?”
어느 날 아이는 아빠에게 질문을 던진다. 한쪽의 여유는 왜 다른 한 쪽의 궁핍을 채울 수 없는가. 이 질문을 받은 아버지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지글러, 그는 빈곤을 조장하는 사회구조를 비판하는 기아 문제 연구자이며 현장에서 아동 구호와 식량 지원을 펼치는 국제연합식량특별조사관이다.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이 문제와 마주하여 아이가 던진 질문은, 비단 한 어린이의 호기심 어린 질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이 현실을 향해 던져야 하는 질문이며 또한 부조리에 맞서 느껴야 할 공분이다. 세계의 저편에서 기아를 조장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장 지글러는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복잡하게 얽힌 기아의 구조의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 나간다.
“기아라고 해도 원인에 따라 여러 형태가 있는 건가요?”
그래,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는 ‘경제적 기아’와 ‘구조적 기아’로 구분하고 있어, 대략 설명하자면 경제적 기아는 돌발적이고 급격한 일과성의 경제적 위기로 발생하는 기아를 말한단다. 국제적인 도움의 손길이 재빨리 미치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되지. ‘구조적 기아’는 ‘장기간에 걸쳐 식량 공급이 지체되는 경우’를 말하지. 그 나라의 경제 발전이 더딘 데 따른 생산력 저조, 급수설비나 도로 같은 인프라의 미정비, 혹은 주민 다수의 극도의 빈곤 등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단다. 그러니까 ‘구조적 기아’는 간단히 말해서 외부적인 재해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구조로 인해 빚어지는 필연적인 결과란다.
장 지글러는 기아를 ‘경제적 기아’와 ‘구조적 기아’의 두가지 측면에서 바라본다. 아이는 아빠에게 “경제적 기아를 해결하는 것은 간단한 일 아닐까요? 그 사람들에게 되도록 신속하게 충분한 식량을 배급하면 되잖아요!”라며 천진난만하게 묻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빠는, 아이의 희망찬 물음에 긍정적인 대답을 되돌려 줄 수가 없다. 경제적 기아든 구조적 기아든 그것을 해결하는 길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장 지글러가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자 하는 사실도 바로 이러한 모순과 닿아 있다. 기아가 발생하는 원인에서부터 기아를 해결하기 위한 구호활동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그 모든 과정을 결정하는 것은 그 어떤 개인도 아닌, 인간의 어긋난 욕망과 그 욕망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체제였던 것이다.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에는 과거 이탈리아 식민정부가 건설해 놓은 모가디슈 항이 있다. 인도양에 면한 항구 중에서 가장 현대적인 모가디슈 항은 좋은 설비를 갖추고 있어서 하루에 수만 톤의 물량을 처리 할 수 있다. 모가디슈 항은 기아가 심각한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이 모가디슈 항은 폐쇄 상태에 있다. 동부의 군벌들이 전투를 벌이는 바람에 국제 원조를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실정 때문디다. 약탈에 대한 공포로 어떤 외국 선박도 그곳에 정박하려 하지 않으며, 선원들은 목숨을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 소말리아는 납치나 인신매매가 빈번하게 행해지는 나라이다. “자기 민족을 망치는
범죄자는 바로 그 군벌 우두머리들이로군요?“ 그렇단다.” 끊임없는 내전과 부정부패, 권력투쟁으로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은 이미 구호 활동조차 받아들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권력을 지닌 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동족의 굶주림을 무참히 묵살한다. 굶주린 자들의 몫으로 돌아가야 할 구호 물품들로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것은 다반사며, 심지어는 군대를 조직하고 유지하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그 군대가 동족들에게 또다시 총을 겨누리라는 것은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은 사실이 되고 말았다.
그의 비판은 맬서스의 인구론으로 대변되는 자연도태설의 신화를 선진국들이 확신하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맬서스의 이론은 식량 과잉 상태의 현대사회를 놓고 본다면 틀린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기아를 초래했다는 윤리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선진국들은 이미 유효기간이 지난 이론을 들어대며 정당성을 찾으려 한다고 장 지글러는 말한다. 그의 눈에는 스스로 현실을 왜곡하여 심리적 도피처를 찾는 데 급급해하는 거대 자본과 선진국들의 탐욕스런 모습만 보일 뿐이다.
“그러니깐 세계시장에는 곡식이 모자라는 모양이군요. 그래서 세계식량WFP은 식량을 마음대로 확보하지 못하는 건가요?” 그것은 반쪽짜리 진실이야. 또 다른 문제는 세계시장에 비축된 식량의 가격이 종종 인위적으로 부풀려진다는 데 있어. 세계시장에서 거래되는 거의 모든 농산품 가격이 투기의 영향를 받는다는 것은 알고 있니? 미국 시카고의 미시간 호숫가에는 위압적인 건물이 솟아 있어. 바로 시카고 곡물거래소야. 세계의 주요 농산물이 거래되는 곳이지. 이곳은 몇몇 금융 자본가들이 좌지우지하고 있어. 사실 거래는 몇 안되는 거물급 곡물상의 손에서 결정돼. 그들의 상업함대가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전 세계 곡물의 매매가를 결정하고 있단다. 토마스 상카라는 그들 곡물 메이저를 ‘화이트 칼라 강도들’이라고 부르기도 했지.
시카고 곡물거래소는 전 세계 곡물 거래를 좌지우지하는 곳으로, 장 지글러는 그것을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의 첨병으로 생각한다. ‘금융’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손은 몇몇 기업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만 바쁘게 움직이고 있으며 그 돈놀이의 결과로 빚어지는 갖가지 상황은 고스란히 굶주린 사람들이 떠맡게 된다. 다름 아닌 그들의 생명을 지불하면서 말이다. 사실 시카고 곡물거래소는 세계의 식량난을 초래하는 요인 중에서 그 일부분만을 담당한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비인도적 사상들, 즉 멜서스적 선입견과 신자유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믿음을 극복하기 위한 장 지글러의 꿈이다.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에서 법정 스님은 ‘적은 것으로써 넉넉할 줄 알며, 적게 앓고 적게 걱정하라.’는 ‘소욕지족 소병소뇌少欲知足少病少惱’란 법문을 통해 맑은 가난의 의미를 되새긴다.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만족할 줄 아는 것, 곧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고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게 맑은 가난이라 거듭 강조하면서 스님은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갖고자 할 때, 갖지 못한 사람들의 처지를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나 홀로 사는 세상이 아닌 까닭이다.
“나만 다 차지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서로 얽혀 있고 서로 의지해 있다. 아무리 자기 것이라 하더라도 그 근원을 추적해 보면 다른 누군가가 가져야 할 것을 도중에 가로챈 것이나 다름없다. 날마다 지구촌에서 하루에 3만 5천명의 어린이들이 굶어 죽어 가고 있다. 또 전 세계 전역에서 10억명의 사람들이 하루 1달러, 우리 돈 천원으로 하루를 살아간다. 이것이 이 지구별의 현실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무엇을 갖고자 할 때 갖지 못한 사람들의 처지를 배려해야 한다.”
(법정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