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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밝홈실 참의공파 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설죽선생
眞我를 찾아서
진아(眞我)속의 삶과 죽음
인간은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합니다. 인간만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으로 인간은 모든 생명체의 주인으로 군림하는 최고의 영장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식물은 물론 단세포 미생물까지도 이타적 생각으로 소통한다고 밝혀지고 있습니다. 미생물도 이타적 생각으로 자신을 희생한다는데 유독 인간만은 이기적인 생각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자신까지도 몰락시키는 함정에 쉽게 빠져듭니다.
생각은 유익한 생각과 무익한 생각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생각은 모두 진아(眞我)를 위해서 해를 끼침은 마찬가지죠. 생각은 현재가 아닙니다. 생각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과거가 되어버리죠. 그러므로 생각은 과거나 미래의 것입니다. 생각에 너무 깊이 빠지면 현재는 없어지고 맙니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으니 지나간 일에 대한 생각은 성찰에 의한 반성을 빼고는 모두 무망한 일이며, 미래는 현재의 행동에 의한 결과이니 미래의 생각은 계획에 의한 로드맵 작성을 위한 일을 빼고는 깊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심한 생각에 빠짐으로서 불면에 이르게 되고 심지어 심화(心火)에 심신을 상하는 경우까지도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그 생각을 [진아]의 생각으로 끊어낼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생각이 무엇이고 [진아]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생각은 과연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진정한 [나]는 볼 수 있는 몸뚱이인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그 무엇인가.
우리의 생각은 학습된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눈으로 보는 시각, 귀로 듣는 청각, 코로 맡는 후각, 입으로 맛보는 미각, 몸으로 느끼는 촉각으로부터 학습된 것이죠. 이 오감으로 학습되지 않은 어린 아기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인다고 흉기를 들이대도 두려움을 모릅니다. 기쁨, 화남, 슬픔, 즐거움의 희로애락이 모두 학습된 생각입니다. 그러니 학습된 그것은 모두 본래의 [진아]의 것이 아닌 타인으로부터 온 것이니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볼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니며 따라서 나의 몸뚱이는 [진아]가 아닙니다. 잘생기고 못나고 한 것은 모두 다른 비교대상이 있기에 내 몸은 한시적으로 [진아]를 담고 있는 그릇에 불과합니다. 보고 평가하는 학습되지 않은 본래의 [진아]가 있는 것이죠. 나비라는 이름을 모르는 아기는 그 곤충을 세밀하게 관찰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비라는 이름을 안 뒤부터는 관찰하지 않고도 나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가 있게 되죠. 다른 모든 감각으로 학습된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세상 만물과 만사가 학습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본래 내 것이 아닌 다른 데서 내게 다가온 존재입니다. 그러니 학습된 모든 것은 내 것일 수가 없습니다. 내 물건, 내 몸, 내 생각 모두가 내 것이 아닌 것이죠. 명칭이 붙어 비교되고, 볼 수 있어 생각 할 수 있는 것 유무형의 내 것이라고 그동안 당연히 생각해 왔던 모두가 본래 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眞我는 불교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어 아래와 같이 인용하여 소개할 뿐, 저는 祖上敎徒입니다.
1. 나(我)
철학과 종교에서 '나[我]'는 대체로 자아(自我) 또는 영원한 자아의 뜻으로 해석된다.
◇ 철학에서 나[我]는 자아(自我)를 가리킨다.
◇ 불교에서는 무아(無我)를 근본진리로 보는데, 따라서 나[我]는 근본번뇌 가운데 하나인 아견(我見) 또는 아소견(我所見)을 뜻한다. 즉 '나라는 그릇된 견해' 또는 '내 것이라는 그릇된 견해'를 뜻한다.
◇ 힌두교에서는 범아일여(梵我一如)를 근본진리로 보는데, 이러한 의미에서는 나[我]는 진아(眞我) 즉 아트만을 뜻한다. 반면, 진정한 자아를 알게 되는 상태에서만 알 수 있는 현상의 존재를 나[我]라고 칭할 때 이때의 나[我]는 가아(假我) 즉 마야[幻影]을 뜻한다.
① 진아(眞我) : 외도(外道)와 범부(凡夫)의 허망한 망아(妄我)에 대해, 열반의 아덕(我德), 곧 부처를 말함.
② 가아(假我) : 거짓으로 부르는 아(我). 일반적으로 ‘나’라고 하는 것은 오온(五蘊)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진아(眞我)라고 할 실체가 없다는 것.
③ 대아(大我) : 대아(大我), 즉 뛰어난 모습[勝相]이란 아견(我見)과 무아견(無我見)에 치우치는 것을 떠난 것. 허망한 아(我)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무아견(無我見)조차 불살라 버리는 것이 대아(大我) 또는 진아(眞我).
④ 무아관(無我觀) : 불교의 핵심 교리. 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고정 불변의 자성(自性)이 없다는 뜻. 우리가 말하는 ‘나’라는 것은 오온(五蘊)의 집합, 즉 색・수・상・행・식의 결합체에 지나지 않으며, 이들에는 그 어느 것도 영원한 자기 고유의 자성, 곧 실체가 없다는 것.
연기의 입장에서 볼 때, 어느 것도 자성을 지닌 것은 없다. 따라서 무자성이기 때문에 무아이며, 무아이기 때문에 공이며, 또 공이기 때문에 중도이다. 또 온갖 형상은 연기(緣起)의 소산이기 때문에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이다. 장자(莊子)에도, ‘진아(眞我)란 곧 무아(無我)이고, 가장 위대한 자란 곧 존재하지 않는 자이니라’라는 말이 나온다.
⑤ 아(我) : 주재(主宰), 자아(自我), 신체(身體)의 뜻. 자기 자체(自體), 곧 자기 주관의 중심.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이것을 나누어 실아(實我), 가아(假我), 진아( 眞我)의 3종으로 나눔.
◇ 실아(實我) : 실아(實我)는 인도 재래의 외도(外道)가 주장하는 것으로, 범부(凡夫)의 망정(妄情)에 스스로 존재한 아(我)의 사상을 말함. 이 아(我)는 무상(無常)이 아니고 상주(常住) 독존(獨存)하는 것으로 본다.
◇ 가아(假我) : 가아(假我)는 실재로 나라고 할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온(五蘊)이 화합하여 인과(因果)가 상속하는 몸이기 때문에,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나라고 이름 한 것으로 본다.
◇ 진아(眞我) : 진아(眞我)는 대승(大乘)에서만 말하는 것으로, 열반의 사덕(四德)인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아덕(我德)을 말함.
⑥ 업아(業我) : 업으로 가득 찬 아(我). 진아(眞我)의 반대 개념
2. 에고(ego)
에고(ego)는 유체이탈(幽體離脫)을 일삼는 귀신성(鬼神性)이다. 나는 누구인가? 자문자답하면 좌뇌본위 생각위주의 생각의 모드(mode)이며 가아(假我)인 에고(ego)를 나로 착각하기 마련이다.
에고(ego)는 텅 비고 고요한 무한허공 가운데 어둡지도 않고 밝지도 않은 명암일색(明暗一色)의 빛으로 가득 찬, 진아(眞我)이며 정신의 광명인 본질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가아(假我)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안으로 에고(ego)인 가아(假我)를 자기로 간주하고, 밖으로 외부의 사물을 보는 자가 주관이 되면 보이는 자는 객관이 되어, 나와 남. 주(主)와 객(客)이라는, 안과 밖이라는 분열이 생기게 되면서 나 자신마저도 몸과 마음이 분열되어 몸에서 혼(魂)이 빠져나가는 유체이탈(幽體離脫, Out-of-Body Experience)로서 흔히 유체이탈화법(幽體離脫話法)이라는 에고의 교활성으로 나타난다.
자기와 관련된 비리를 이야기 할 때 책임은 지지 않고 자기는 빠진 가운데 남의 말하듯이 하는 화법인 바. 에고는 자기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무의식적인 선입관 고정관념이 꽉 들어차 있으므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기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고집불통이 작용하므로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라고 되묻기 예사이니 무명(無明)인 것이다.
그렇다면 남의 유체이탈화법을 지적하는 당사자는 이 문제로부터 진정 자유로울까?
지금은 남의 흉볼 때가 아닌 것이다. 에고는 본래 남의 흉만 볼 줄 알고 자기 흉은 볼 줄 모르는 것이니 자기야말로 착하고 바른 사람이며 허물이 일체 없다는 터무니없는 꿈에서 깨어나도록 해야 할 일이 시급하다고 할 것이다.
에고는 몸을 떠나 몸이 없는 귀신성(鬼神性)이므로 쾌락을 찾아 서성대면서 몰입으로 블랙홀 속으로 숨어들어, 외롭고 심심함으로부터, 근심 걱정 불안 공포로부터, 몸이 쑤시고 아픔으로부터, 도피행각을 벌이는 죄수와 같으니 자수하여 광명을 찾아야 한다.
자수하는 방법은 정신의 빛으로 나라고 하는 에고(ego)를 돌이켜 비추는 돌아봄의 생활을 하면, 그림자는 빛으로 말미암아 즉각 사라지고 하늘에 광명이 충만하게 되니, 천성, 본성, 진아, 정신이 두뇌 안에 들어 정신을 차려, 심장을 거쳐 하단전에 안착하면, 하단전에 힘을 툭 부려 호흡을 쉬게 함으로서, 휴식과 안락의 문을 열어놓으면,
두뇌에서는 생각을 내지 않아서 번뇌망상이 없어지고,
입은 침묵을 지켜 언쟁하는 일이 없어지고,
몸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아 언제 어디서나 편안)하게
휴식을 즐기는 삶을 살아 갈 수 있다.
3. 일상은 에고(ego)와의 전쟁
사람들이 언제나 협상 후 집으로 돌아가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세상은 지독한 에고 싸움판이거나 에고에 의한 대리전쟁 시스템이다. 강국은 약소국을 통해 대리전쟁을 하고, 우리는 에고를 통해 대리 싸움을 한다. 우리의 일상은 에고와의 부딪힘. 자기만 잘 났다고 지껄이는 안하무인 에고, 자기 습관과 결벽증으로 상대를 피곤하게 하는 자기중심 에고, 자기주장만 옳다는 독선 에고는 남에게 통증과 고통을 준다.
대리전쟁은 피해야 하듯, 자기를 모르고 저지르는(머슴이 완장을 차고 주인을 유린하는) 에고전쟁과 에고의 날뜀을 피해야 한다. 에고의 준동을 멈추게 하려면 에고의 상위 존재인 진짜 자기를 찾아야 한다. <진짜 자기를 진아(眞我)라고 하자> 진아는 인의예지의 세계, 영성과 양심의 공간, 흔들리지 않는 자아의 세계다.
에고의 산물인 불만과 불평은 진아가 개입하면 감사와 감동으로 바뀌어 기쁨을 찾는다. 흔들리지 않는 진아를 찾아서 즐겁게 살고, 괴로움도 상처도 모르는 진아로 품격을 높이자. 진짜 자기를 모르면 평생 껍데기로 산다. 진짜 자기는 자아와 신성이 합일된 영적 공간이기에 불리함도 두려움도 모른다.
에고는 타자와 싸우면서 고통을 만나고, 진아는 접신의 통로인 양심과 인성의 핵심인 인의예지가 함께 머물기에 영성을 만난다. 진짜 자기는 바다 위의 한 점 수증기가 자라나 태풍을 만드는 것처럼 작은 힘을 모아서 큰 힘을 경영하고, 진짜 자기는 전자파처럼 퍼져나가 실시간에 타자와 소통하고 교감한다.
진아는 상대를 측은하게 생각하기에 불필요하게 다투지 않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어 흔들리지 않고, 겸손으로 예를 취하기에 사랑을 받는다. 진아는 신성의 세포가 심어져 있어 신의 소리를 듣고, 욕심이 없는 진아는 거미줄에 잡히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다. 생사를 초월하고 영성에 감응하는 진아를 찾고, 진아가 성인의 경지까지 갈 수 있도록 믿음이라는 먹이를 주자.
4. 진아(眞我)는 체득해서 깨닫는 것
진아(眞我)는 체득해서 스스로 깨닫는 것을 말한다.
자, 어두운 방이 있고, 그 방에 처음으로 들어가 방을 더듬거리며 가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방에 들어가 ‘그 방이 어떻게 생겼을까?’하고 온갖 생각을 짓고 또 어떤 것을 만져보고 ‘이것이다. 저것이다.’ 온갖 생각을 짓게 된다. 바로 이것이 문자로 보고 생각하되, 아직 깨닫지 못 한 자의 행위와 같다. 이것이 바로 거짓된 망아(忘我)라는 것이다. 이 상태를 우리는 흔히 “장님 코끼리 만지기, 군맹무상(群盲撫象) 혹은 군맹평상(群盲評象)”이라 말한다.
그러다가 바로 불을 확 켜보면, 바로 방전체가 바로 눈앞에 나타나 단번에 방의 사정을 다 알게 된다. 이때 확연히 방 전체를 알아차리며, 말로 표현할 것 없이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이런 저런 생각 없이 있는 그대로 ‘아하’하고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코끼리를 만졌던 장님들이 심봉사처럼 갑자기 눈을 떠 볼 수 있게 된다면, 그동안의 자기 생각이나 주장이 얼마나 무망했던 것인가를 확연히 깨닫게 될 것이다.
깜깜한 방에서 온갖 생각을 해도 알 수 없었던 것이 불을 켜니 한 순간에 ‘알아차림’하여 체득하는 것이 바로 거짓된 망아(忘我)를 벗어나는 길인 것이다. 무명의 어리석음을 벗고, 아만심을 진정으로 조복 받으면, 바른 정견(正見)이 나타나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는 안목(지혜)가 생긴다. 그리고 백두산 정상에 오르는 길이 오직 내가 가는 한 길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연히 깨우칠 수 있는 것이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 군맹무상(群盲撫象)=군맹평상(群盲評象)
장님 여럿이 코끼리를 만진다는 뜻으로, 모든 사물을 자기의 좁은 소견과 주관으로 그릇되게 판단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출전은 불교 경전인 《열반경(涅槃經)》이다.
<장님이 만지는 코끼리 이야기, 그리고 소통>
◇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진다.
◇ 코끼리는 매우 커서 한 명의 장님이 코끼리의 존재 전부를 확인할 수 없다.
◇ 누군가는 '코'를, 누군가는 '다리'를, 누군가는 '상아'를 만진다.
◇ 때문에 저마다 코끼리를 만졌지만,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한다.
◇ 하지만 그 각자의 장님들에게 그것은 진리이다.
◆ 장님들끼리 코끼리에 대한 진실에 가까워 질 수 있는 길은 대화이다.
◆ 여기에서 장님들에게 요구되는 태도는 자신이 장님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 자신이 경험한 코끼리만이 진리라고 강요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태도이다.
◆ 내가 경험한 코끼리와 다른 이가 경험한 코끼리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 여기서 하나의 문제점이 발생한다.
① 만약 어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지도 않고 지어내서 말을 한다면?
② 혹은 만졌더라도 자신이 느낀 것과 다르게 말을 한다면?
○ 이 문제점은 소통을 가리고, 진리에 대한 접근을 막는 결과를 가져온다.
● 하지만 이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 역시 대화[수행]일 수밖에 없다.
① 하나의 해결책은 그 거짓된 장님과 같은 것을 경험한 이의 증언이다.
② 또 하나의 해결책은 그 거짓된 장님 증언 내부에 모순점을 밝혀내는 것이다.
● 결국 코끼리라는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타인을 인정하는 열린 자세,
② 자신에게 거짓을 보태지 않는 진실 된 자세,
③ 이러한 자세를 바탕으로 한 끊임없는 대화, 소통이다.
● 세상을 사는 우리는 어떠한가?
태어나 살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에서 형성된 좁은 자기의 관념 속에 갇혀 있는 줄도 모르고,
아집(我執)속에 파묻혀 사는 건 아닌지 돌아보는 게 필요하다.
불교는 결국 마음 닦아 수행하여 해탈성불 하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우리가 윤회하는 이유가 바로 마음에서 욕망이 일어나기 때문이고,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마음에서 집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마음에서 이런 번뇌 망상이 일어나느냐. 그것을 무명 때문이다. 모든 것에는 자아가 없다(제법무아)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무명이고, 번뇌 망상에 집착하는 것이 무명이고, 화를 내고 남을 무시하는 것이 무명인 것이다.
무명의 반대말은 밝음이며 깨달음이니, 바로 부처님의 지혜이며 부처님의 마음인 것이다. 바로 이 부처님의 마음, 청정한 마음이 본마음 이라고 하는 것이며 참 나[眞我]라고 하는 것이다. 중생의 마음과 부처님의 마음.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서 마음 한번 깨우치면 바로 부처가 되는 것이다.
마음이 영원히 사라져서 진아가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상태가 바로 깨달음이다. 법을 보는 자 나(我)를 볼 것이요, 나(我)를 보는 자 곧 법을 볼 것이다. 여기서의 아(我)는 진리를 말한다. 형상이전(참나)의 것이 도(道)요, 형상이후(有我)의 것은 기(器)라는 것이다.
5. 불교의 [깨침]과 기독교의 [回心]
불교 철학자 마사오 아베(Masao Abe)는 불교와 기독교 이 두 종교를 비교하여, ‘불교의 깨침과 기독교의 회심(回心)은 양자가 인간의 죽음을 구원의 본질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아베가 생각했던 바울 사상에서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일리가 있다. 사도 바울은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활하게 될 희망을 안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는다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런 사상의 인간학적 적용은 물론 기독교 신학에서 아주 드물게 인식되었다. 바울은 새로운 아담이야말로 인간의 참된 자아를, 즉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야할 인간의 운명을 계시한다는 사실을 이해시키고 있지 않은가? 경험적 자아와, 또는 경험적 자기의 상태는 무엇인가? 로마서 7장 22절이 가리키고 있듯이 하나님의 법을 반기고 있는 ‘속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 로마서 7장 22절 칼빈 주석
7장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한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2-23
여기서 우리는 경건한 사람들 안에서 일어나는 분열의 특성을 보게 된다. 그 분열 때문에, 어거스틴이 어딘가에서 ‘그리스도인의 전투(the Christian struggle)라고 부른 영육간의 전투가 발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인간에게 의의 규범을 따르기를 요구하고, 사탄의 포악한 법인 불법은 그에게서 사악함을 유발시킨다. 영은 인간을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도록 이끌고, 육신은 반대 방향으로 그를 잡아끈다.
이렇듯 인간은 상반되는 욕망으로 말미암아 괴롭힘을 당하기 때문에, 이중적인 존재가 된다. 그러나 분명 인간의 영이 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특별히 영을 기준 삼아 자신을 판단하고 평가한다. 바울은 자기 육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인간이 여전히 악한 욕망에 미혹을 당하고 자극을 받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안에 있는 악한 욕망이 그것과 전적으로 반대되는 영적 욕구를 억압하고 있다.
우리는 ‘속사람’이라는 말과 ‘지체’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주목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표현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오류에 빠졌다. ‘속사람’이라는 말은 단순히 영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생하게 하신 영혼의 신령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지체’는 영혼의 남아 있는 다른 부분을 의미한다.
영혼은 인간의 우월한 부분이고 몸은 인간의 열등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영은 육신보다 우위에 있다. 영은 인간 안에서 영혼의 위치를 차지하지만, 부패하고 오염된 영혼인 육신은 몸의 위치를 차지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영은 ‘속사람’이라고 부르고 육신은 ‘지체’라고 부르는 것이다.
위에서 보듯, 루터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바울에 따르면 거듭나는 사건에서 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주체 자체가 변화된다고 말이다. 바로 여기에 루터의 유명한 명제의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우리는 엑스트라 노스(extra nos, 우리 밖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다고 말이다.
이는 곧 우리가 우리의 옛 ‘자아’ 밖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뜻이다. 신앙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옛 자아를 뛰어넘게 한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신뢰함으로써 우리 실존의 토대가 바로 우리 자신을 위임하는 바로 그분에게 놓여 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그분에게 맡긴다. 완전히 문자적인 의미에서 그렇다.
그렇지만 선택 가능성의 등급은 행위하고 선택하는 주체의 한계를 통해서 한정되어 있다. 완전히 새로운 인격이 된다는 것은 자기의 능력에 속한 게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발생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참된 자유를 발견하며, 앞서 우리 자신이었던 사태를 뛰어넘어 우리의 참된 자아존재를 발견한다.
그렇지만 구원하는 사랑으로 인해서, 그리고 죄인을 향하는 그리스도의 약속으로 인해서 우리의 고유한 자아는, 즉 지난 날 우리 자신이었으며 우리의 노력으로 도달 가능한 인격의 참된 정체성은 그 어떤 외적인 한계로부터만 자유로운 게 아니라 우리의 옛 자아의 한계로부터도 자유롭다.
인간의 자아에 대한 인간학적 분석에서 기독교와 불교는 특별한 방식으로 인간학에 집중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이렇듯 우주론적 세계관이 아니라 인간학에 집중하는 이유는 이 두 종교가 비록 상이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인간에게 이 세계에 종속되는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그대 내면에는 진짜 그대가 자리 잡고 있지 않다.
그대 내면에는 순전히 가짜 그대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가짜 그대는 끊임없이 집착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가짜 그대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거짓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잊기 위해
그대의 시선을 다른 데로 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대 내면에 진짜 그대가 들어 설 때 모든 것은 달라진다.
그대는 자신이 존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거지에서 황제로 변하는 것이다.
이제 그 무엇에도 집착하거나 구걸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대는 진실로 자신의 존재를 나누어 줄 수 있다.
그대는 사랑으로 흘러넘치게 될 것이다.
至福의 황홀감이 그대에게 차고 넘쳐서,
그대의 사랑은 대지를 적시고, 허공을 메우며 별들을 어루만질 것이다.
전 우주가 그대의 사랑으로 목욕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헌신이다.
-탄트라 비전-
6. 진아 속에서의 삶과 행복
우리는 모두 행복을 추구한다.
우리는 내 주변의 환경이 내가 원하는 대로 변해주기만 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은 그렇게 변할 수가 없는 것이고 또 도대체가 원하는 만족할 만큼 변해지지도 않는 것이 주변 환경이다. 만약에 설사 그렇게 주위 환경이 원하는 만큼 변해졌다 손치더라도 그 것은 그 때뿐 결코 영원한 만족과 행복을 가져오지 않는다.
당분간의 만족과 행복을 느낄 수는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변화를 요구하는 욕망이 일게 되고 우리는 새로운 만족과 행복을 또 다시 추구하게 된다. 우리가 설혹 천국에 태어나 모두 만족하고 행복한 상태에 있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왕후장상과 재벌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 일부분을 읽을 수 있다.
보통 사람인 우리가 생각할 때 아무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 그들도 모두 만족하고 행복하지만은 않음을 본다. 오히려 그만큼 갖지 못한 보통 사람들 보다 더 만족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인간의 욕망은 그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주변 환경이 우리가 원하는 만큼 변하더라도 결코 우리는 오랫동안 행복할 수가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해지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어떻게 해야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마음의 고요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 마음이 고요해지면 그 순간 우리는 행복해진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우리 주변도 고요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 주변이 고요해지면 아무런 욕망이나 사심이 일어나지 않고 모두 없어진다.
비로소 우리는 마음과 정신의 안정을 얻게 되는데 그 상태에서 우리는 행복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마음과 정신과 주변의 고요한 그 상태가 바로 진아(眞我)인 것이다. 진아를 찾는 길, 진아의 상태에 들어가는 길만이 행복을 찾는 길이다.
유학의 사단(四端)이 있는데, 맹자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에는 선천적으로 仁, 義, 禮, 智, 四德의 싹이 되는 네 가지 [마음]이 있다고 보았다. 네 가지 마음[四端]이 없이는 인간이 아니라고 맹자는 파악하고 있다. 맹자의 인간관은 모든 인간은 본래부터 자연적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을 사단(四端)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사단은 자연적 본성을 갈고 닦는 네 가지 실마리 또는 싹, 선천적으로 내재한 마음[眞我]이다.
측은지심(惻隱之心)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 겸손하게 사양하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 시비를 가리는 마음
불교의 오온(五蘊)도 있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를 색·수·상·행·식(色受相行識)의 다섯 가지로 분류하였는데, 이를 ‘오온(五蘊)’이라고 한다. 불교 사상에서는 현실적인 인간을 육체가 있어(色), 눈·귀·코·입·몸 등의 감각 기관으로 느끼는(受)존재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표상하고(相), 의지하며(行), 인식하는(識)등 다섯 가지의 요소로 이루어진 존재로 본다. 이것은 인간이 육체적인 존재인 동시에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물질적인 육체는 언제나 생로병사의 무상(無常)함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불교 사상에서는 인간이 본래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불성이란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우리의 마음이 겉으로 보기에는 불완전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깊은 곳에는 불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불성은 심오하고 참된 법으로, 더 생기지도 않고 더 없어지지도 않는 본래의 [마음], [眞我]인 것이다.
육체의 주인은 마음이다.
육체를 통해 마음은 정서와 감정, 욕망과 사고를 표현한다.
사랑과 미움, 쾌락과 고통은 마음에 의해 생겨나며
다시 마음에 물들게 된다.
우리는 깊은 잠에 빠졌을 때나 기절했을 때는
희로애락을 인식하지 못한다.
희로애락이 진아(眞我)에 속한 기능이라면
깊은 잠과 기절한 상태에서도 존재하고 진아처럼 작용을 계속했을 것이다.
수련으로 마음이 맑고 밝아지면 초의식(超意識)으로 변화된다.
순수한 초의식의 상태에서 마음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의 세계는 사라진다.
-바바 하리 다스-
[침묵의 성자]로 온 세계에 알려진 인도의 영적 스승 [바바 하리 다스]는 히말라야의 산중 마을에서 태어나 열두살에 집을 떠나 밀림 속의 고행자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그 이후 지금까지 [침묵의 수행자]인 그는 말을 하는 대신 허리춤에 매단 작은 칠판에 글을 써서 사람들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 칠판은 차츰 전 세계에 알려져 [바바 하리 다스의 칠판]으로 유명해졌다.
8. 진아 속에서의 죽음
우리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두 죽음을 향한 여정에 오르며, 결국 언젠가는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Heidegger)는 일찍이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Sein zum Tode)”라고 말했다. 또 철학자 김열규는 “죽음은 삶과 함께 자란다”고 말했고, 종교학자 정진홍은 “죽음은 삶이 도달한 마지막 삶의 형태“라고 했다. 삶과 죽음이 동전의 앞과 뒷면처럼 결국 하나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생각하기를 꺼려한다. 죽음학 연구의 선구자인 퀴블러 로스(Kübler-Ross)는 죽음을 앞둔 환자 5백여 명을 인터뷰한 다음, 사람들이 죽음에 접했을 때 ‘부정’과 ‘고립’→ ‘분노’→ ‘타협’→ ‘우울’→ ‘수용’ 등 5단계의 심리적 변화를 겪게 된다고 밝혔다. 죽음이 닥친 것에 대해 처음에는 부정하고 분노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엔 자신의 운명과 타협하고 우울해 하다가 결국 죽음을 수용하는 과정을 밟는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삶이 죽음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어떨까? 죽음불안 심리를 극복하려면 죽음과 삶이 하나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떤 것이 아름다운 노년이고, 또 어떻게 죽는 것이 아름다운 죽음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이런 내적 성찰을 통해 우리는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더욱 진지한 자세를 가지게 될 것이고,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의 현실에 대해서도 더욱 충실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요즘 우리 시대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웰다잉(well-dying, 잘 죽기)의 개념이다.
맺는 말
행복은 에고와 진아가 하나가 된 상태입니다.
바둑은 두 집을 지어놓아야 살고, 우리는 몸을 대표하는 에고와 정신을 대표하는 진아가 조화를 이룰 때 살게 됩니다. 성자도 몸이 있는 한 에고가 있었을 것입니다. 수련과 절제로 에고의 영역을 줄였을 뿐이죠. 에고는 몸을 경영하고 진아는 큰마음을 경영합니다. 궁궐에는 수문장과 왕이 있고, 행복의 집에는 집요한 에고와 진아가 함께 동거한답니다. 수문장은 궁궐을 지키고 왕은 나라를 경영하듯, 에고는 생존영역을 지키고 진아는 평온을 경영하지요.
자신과 상대의 지독한 에고를 녹이는 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가족 구성원, 뜻을 함께 하는 사람, 밥벌이를 함께하는 동지들은 서로의 에고를 사랑으로 녹여야 합니다. 사랑과 대화로 녹이지 못할 에고는 없지만, 지독한 에고라면 관계를 끊는 것이 에고로 인한 불행을 막는 길입니다. 에고로 억척스러운 생존의 뿌리를 지키고, 진짜 자기인 진아로 자신과 세상을 경영하도록 합시다.
진아(眞我)를 실천하는 수행
자기 자신을 진아, 즉 신에게 완전히 던져 버리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수행자다.
자기 자신을 신에게 던진다는 말은 진아에 대한 생각 외에는 어떤 다른 생각도 일어나지 못하도록
진아 안에 몰입한다는 뜻이다.
짐이 되는 것은 모두 신에게 맡겨라. 그가 모든 것을 책임질 것이다.
지고한 신의 힘이 모든 것을 관장하고 있는데, 왜 우리들은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끊임없이 망설이고 있는가?
기차를 타면 기차가 모든 짐을 운반해 준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계속 짐을 머리에 이고서 불편을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왜 짐을 기차에 내려놓고 편히 쉬지 못하는가?
생각이 일어날 때 아무런 찌꺼기도 없이, 그 생각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무집착이다.
진주를 캐는 사람이 허리에 돌을 달고 바다 밑바닥에 내려가서 진주를 캐오듯이,
우리는 무집착을 달고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가 진아라는 진주를 캐내야 한다.
신과 스승은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 줄 뿐이지, 벗어난 상태를 주지는 않는다.
사실. 신과 스승은 다르지 않다.
일단 호랑이의 입 속으로 들어온 먹이는 다시 빠져 나갈 수 없듯이,
일단 스승의 자애로운 은총 속으로 들어온 제자는 스승에 의해 구원 받게 되어 있다.
물론 신이나 스승이 제시한 길을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따라와야 한다.
자신의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자신을 알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깨어 있는 상태는 길고 꿈꾸는 상태는 짧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그 상태에서는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듯이,
꿈꾸는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꿈꾸는 상태에서 마음은 다른 체(body)를 가진다.
또 어느 상태에서나 생각과 이름과 형상들이 동시에 나타난다.
-라마나 마하리쉬-
(Ramana Maharish): 인도의 힌두 철학자로 '큰스승'(大師), '바가반', '아루나찰라의 현인'이라고 불리며,
사람들에게 침묵으로 영향을 주었으며, 진리를 찾는 방법으로 '비차라:진아‘ 탐구를 권하였다.
諸行無常是生滅法(제행무상시생멸법) 生滅滅已寂滅爲樂(생멸멸이적멸위락)
모든 현상은 한시도 고정됨이 없이 변한다는 것이 곧 생하고 멸하는 생멸의 법이니
이 생멸에 집착함을 놓으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무상(無常)이라는 말은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은 없다’ 즉 모든 것은 변한다는 뜻으로 허무함으로 해석하면 커다란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生老病死(생로병사) :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고
成住壞空(성주괴공) : 이루어져, 머믈다, 허물어져, 없어지고
春夏秋冬(춘하추동) :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바뀌는 등
모든 것은 변화하며 한순간의 일념(一念)에 우리는 있는 것이니, 변화하는 것의 하나를 붙들고 집착하며 고집하지 말고, 변화의 근본인 인과응보의 진리를 깨달아야합니다. 심(心) 즉 진아(眞我). 변화의 중심에 또렷이 있으면서 변치 않는 근본이 되는 것. 진정 나(我)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① 금반지를 녹여 금비녀를 만들었다.
② 금비녀를 녹여 금팔찌를 만들었다.
③ 금팔찌를 녹여 금귀거리를 만들었다.
① 에서는 금반지가 죽고 금비녀가 태어났다.
② 에서는 금비녀가 죽고 금팔찌가 태어났다.
③ 에서는 금팔찌가 죽고 금귀거리가 태어났다.
외형 현상에서 생사는 분명히 있었으나 근본의 金은 그대로 금으로 있지 않은가? 현상은 변화하여 무상한 것이니 여기에 집착하지 말고 마음[眞我]를 발견해야 합니다. 삼라만상 세상사에 무조건적인 것은 불합리한 것이며, 다만 필요에 의한 구속이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하여 무상(無常)한 도리를 깨달아 인연의 도를 알면 眞我를 발견하는 것이며 걸림이 없는 자유인이 되는 것이죠. 깨달음[覺]의 시를 읽어봅시다.
1
衆鳥同枝宿 중조동지숙 새들이 무리를 지어 한 가지에서 자다가
天明各自飛 천명각자비 날이 밝으니 각자 스스로 나는구나.
人生亦如此 인생역여차 인생 또한 이와 같은 것이거늘
何必漏霑巾 하필루점건 어찌하여 눈물은 흘러 수건을 적시는가.
2
百金買駿馬 백금매준마 백금으로 준마를 사고
千金買美人 천금매미인 천금을 들여 미인을 구하고
萬金買高爵 만금매고작 만금을 들여 높은 작위를 얻지만
何處買靑春 하처매청춘 어느 곳에 가 청춘을 살 수 있겠는가?
3
白髮三千丈 백발삼천장 백발이 삼천장하니
緣愁似箇長 연수사개장 수염의 길이만큼이나 근심이 연연하구나.
誰知明鏡裡 수지명경리 거울속의 얼굴이 누군지 알고 보니
何處得秋霜 하처득추상 어디로부터 내린 가을 서리인가
4
去年去與靑春去 거년거여청춘거 해가 감에 더불어 청춘도 가고
來年來將白髮來 래년래장백발장 해가 옴에 따라서 백발이 오는구나.
人去黃泉名在家 인거황천명재가 사람은 황천에 가고 이름만 남았네.
雁飛天末跡蓄沙 안비천말적축사 기러기 하늘에 날아가니 모래밭에 자취만 남았구나.
5
浮生正似隙中駒 부생정사극중구 망아지무리의 틈과 같은 곳에서 부침하던 인생인데
得喪悲傷何足數 득상비상하족수 죽음을 당하여 슬피 우는 이는 어찌 그리 많은가.
君看貴賤與賢愚 군간귀천여현우 잘 보게. 귀했거나 천했거나 현명했거나 어리석었거나
畢竟同成一丘土 필경동성일구토 필경엔 다 같이 봉분 하나 이룬 것을.
6
泰和山前多少塚 태화산전다소총 태화산 앞에 많고, 작은 무덤은
洛陽城裡古今人 낙양성리고금인 낙양성 마을에 살던 사람들이라.
可憐不學長生術 가련불학장생술 장생술을 배우지 못한 것이 가련할진대
杳杳空成松下塵 묘묘공성송하진 아득하구나, 소나무아래 티끌로 남았으니.
7
一切生皆死 일체생개사 모든 생명 있는 것은 다 죽게 되며
壽命必終歸 수명필종귀 수명은 반드시 끝이 있어 돌아간다.
隨業受緣報 수업수연보 지은 업을 따라 인연의보를 받는데
善惡各獲果 선악각획과 선악의 각기 다른 결과를 받는다.
修福上昇天 수복상승천 복덕을 닦았으면 천상에 오르고
造惡入地獄 조악입지옥 악업을 지었으면 지옥에 들어간다.
본래의 기운으로 돌아가고, 없어질 육신의 안위와 쾌락에 치우쳐서 애착하지 말고, 정말 옳은 인생만을 생각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