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시절의 장학량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역사는 때때로 한 사람에 의해 큰 흐름이 바뀔 때가 있다. 중국의 근대사는 여러 인물들로 인해 그 흐름이 크게 바뀌었지만, 그 중에서도 장개석과 모택동의 명운을 크게 바꾼 사건을 들라면 아마도 1936년 12월 12일 벌어진 ‘서안사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공산군 토벌을 격려차 온 장개석을 장학량이 섬서성에서 체포하여 감금한 사건으로 중국 전체를 들었다 논 일이었다. 이는 당시 장학량이 남경정부의 부사령관이며, 장개석의 부하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하극상’이란 초유의 사태다. 게다가 당시 장개석이 국민당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사정을 고려했을 때, 그야말로 ‘목숨을 건 도박’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이야기는 장학량의 아버지 장작림이 폭사를 당한 1928년 6월 4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학량은 당시 장작림의 군권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동북삼성을 안정화시켜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침략할 구실 자체를 만들지 않았다.
장작림이 죽자, 장개석은 그의 아들 장학량이 동북삼성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반기를 들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수하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장개석은 장학량에게 공산군을 공격할 것을 명령한다.
당시 장학량은 장개석의 명령을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3년 후 관동군이 9. 18일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2년 열하성과 내몽고를 점령하고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자 갈등은 극에 달한다.
장학량은 황고둔 열차사고로 아버지 장작림이 숨을 거뒀음에도, 사사로운 복수보다는 동북삼성의 안정과 중국 전체의 이익을 위해 참았다. 그러나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을 세우면서 중국 침략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는데도 장개석이 공산군을 몰살하고 ‘통일’을 완수할 생각만 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의 세력권에 격려차 온 장개석을 감금하는 초유의 사건을 일으킨다.
장학량은 장개석을 감금하고, 그에게 내전을 그만두고 공산군과 힘을 합쳐 일본에게 대항할 것을 강요한다. 장개석은 고민 끝에 제안을 수락하고, 장학량은 그를 풀어준다. 장개석은 ‘서안사변’으로 마음을 바꿔 공산군과 힘을 합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제 2차 국공합작이다.
장학량은 서안사변의 댓가로 55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연금생활을 하게 된다. 생각해보면 당시 중국은 장개석에 의해 어느 정도 통일된 상황이긴 했지만, 군벌세력이 완전히 정리된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만약 장학량이 장개석을 감금한 상태에서 다른 마음을 먹었다면, 얼마든지 남경정부의 총통이 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장학량은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결단날 지 알면서도 장개석에게 국공합작을 강요하고, 요구조건이 관철되자 거리낌 없이 풀어주었다. 역사에서 알려진대로 장개석과 모택동의 제 2차 국공합작은 1946년까지 이어진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고 중국에서 물러나자, 국공내전에 돌입하고, 결국 중국은 모택동에 의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게 된다.
장개석은 당시 남은 국민당군을 이끌고 대만으로 남하했는데, 이때 장학량은 1946년 이미 대만에서 연금상태로 지냈으며, 1990년이 되어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2001년 사망한 장학량에 대한 평가는 중화민국(대만)과 중화인민공화국(중국)에선 어떨까? 재밌게도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물론 대만에선 한때 하극상 등을 들어 낮게 평가했지만, 어떠한 이해타산 없이 구국의 결단을 내린 그에 대해 나름 평가를 재고했다. 장작림은 쉽게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인물이지만, 분명 러시아와 일본이 호시탐탐 노리는 동북삼성의 주인으로서, 중국인과 국토를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장학량은 그런 아버지 밑에서 다양한 공부와 경험을 쌓고, 명운을 건 전투에서 앞장을 서면서 누구보다 시대의 흐름과 요청을 온 몸으로 겪은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약속된 미래와 보장된 지위를 버리고 결단을 내린 대목은 분명 크게 평가해야할 부분이 아닐까 싶다. 아울러 대만과 중국에서 모두 그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인 부분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