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욕적 친미 노예근성이 부끄럽다!
굴욕적 친미 노예근성이 부끄럽다
1. 잔인한 4월, 그리고 16일 미국 버지나아공과대학에서 미영주권을 가지고 있는 이 대학의 영문과 학생인 한국교포가 총기를 난사하여 많은 인명을 빼앗아갔다.(이것을 ‘분노에 찬 조승희의 총격사건’으로 명명하기로 한다) 이번의 조승희의 분노에 찬 총격사건에 대하여 일부 미국의 음모설, 조작설의 주장도 제기되고 있지만, 일단 한국인 혈통 조승희 학생의 단독행위로 보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국내에서 일어난 사건을 가지고 ‘국적’을 따져서, 한국교포가 저질은 일이기 때문에 남한사람 모두가 마땅히 미국에 사죄해야 한다는 논리는 어처구니없다. 4월 하반기 내내 참여정부와 정치, 사회, 종교, 문화계 지도자들와 일부 시민들이 비열하게 ‘집단적 죄의식’을 갖고 앞 다투어 상전미국에게 사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노예가 조금만 잘못해도 자기 상전(上典)한테 욕을 먹을까봐 자진해서 머리를 조아리는 비굴한 노예근성과 같다. 이번 기회에 ‘분노에 찬 조승희의 총격사건’의 본질을 살펴보자.
2. 미국의 수사기관에서 발포한 ‘분노에 찬 조승희 총격사건’을 인정한 바탕 위에 이번 참사의 본질을 살펴볼 때, 이 사건은 남한사회가 갖는 천박한 자본주의 및 학벌주의 사회구조의 모순과 미국의 부패한 자본주의 및 비인권적 사회구조의 모순이 상호 결합하여 낳은 결과로 규정지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무엇이고 미국 사회구조의 모순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번 비극의 중심에 서있는 조승희와 그 부모의 행동에서 찾을 수 있다. 언론에서 보도된 내용대로라면, 조승희 부모가 미국으로 건너 간 이유는 분명히 남한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사회구조의 모순 때문이다.
2-1. 해방이후 친일ㆍ친미적 부패독재정권의 장기집권으로 남한의 사회구조모순이 심화되어 왔음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잘못된 사회구조는 위대한 4.19시민혁명이 탱크를 앞세우고 권총을 든 군사쿠데타(1961)에 의하여 허사로 돌아가면서 시작되었다. 총기를 난사하며 남한사회의 권력을 움켜잡은 장본인은 반역사적 인물 박정희이다. 박정희를 비롯한 총으로 권력을 잡은 독재적 군인관료들은 위로부터 유가자본주의를 수용하였다. 유가자본주의는 서구자본주의와는 달리 국가의 1) 금융 특혜에 의한 정경유착, 2) 가족주의에 의한 영구취업의 기업윤리를 만들어 냈다. 기업하는 사람들은 금융특혜를 얻어내기 위해 유가사회의 전통적 방법, 즉 ‘연고주의’(혈연, 지연, 학연)를 동원한다. 연고주의는 비생산적 로비활동(선거자금)을 가져와 사회적 낭비와 부패라는 순환고리와 함께 특수한 기업구조를 만들어 냈다. 바로 ‘재벌’체제이다.
재벌은 국가의 금융특혜를 얻기 위해 이 ‘연고주의’를 동원수단으로 이용하여 정치와 밀착한다. 이 결과로 남한사회는 수출위주형ㆍ금융특혜형ㆍ정경유착형 경제구조가 성립되었다. 이러한 잘못된 경제구조는 다시 우리 사회를 자본집중, 빈부심화, 저성장율, 실업률 중가, 귀족노동계급의 형성 등 비정상적인 사회구조와 비윤리적, 비도덕적, 비인간적 범죄구조를 꽈리처럼 형성해 가고 있다. 이것을 천박한 자본주의라 한다. 더구나 유가자본주의로 빗어진 수출위주형 경제구조 탓으로 남한 경제는 대외의존도가 너무 커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분별없이 수용된 ‘신자유주의 세계화 경제질서’ 속에서 큰 위험성을 노출시키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와 한국경제의 성장잠재력이 떨어지고 장기적 경제불황에 허덕이는 것은 바로 유가자본주의로 시작된 천박한 자본주의가 가져다 준 폐해다.
이러한 자본주의사회의 하부구조는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이라는 또 다른 모순된 상부구조를 필연적으로 만들어낸다. 창의력과 인간의 품성을 측정하는 게 아닌 단순한 암기력과 기억력만으로 지식의 전부를 측정하는 시험제도가 그것이다. 이 결과 남한 사회는 온통 과도한 입시열풍, 고시열풍에 휘말려 있다.
이렇게 낡고 썩은 비생산적 시험을 통과한 이들이 남한의 정치, 관료, 학자 등 국가권력구조에 들어가 권력과 자본을 장악하고 기득권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학벌(가족주의)과 지연에 의한 권력의 힘과 자본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는 사회적 기반을 계속 생산하여 기득권사회를 영속적으로 유지시켜 나간다. 이 탓에 남한사회는 자본주의적 능력주의와 물신주의적 경쟁주의가 최고가치가 되는 사회가 되었다. 천박한 자본주의의 전형이다. 그래서 남한사회는 훌륭한 인격과 고매한 정서를 가진 바람직한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남한사회는 인간성을 상실한 불확실성의 극단적 이기주의사회가 되었다.
이러한 남한사회의 구조적 모순의 질곡 속에서 권력과 돈과 학벌과 상당한 거리를 가진 사회적 약자들은 피곤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자는 부자대로 기득권을 얻거나 유지하고자, 가난뱅이들은 출세의 기회를 얻기 위해 해외유학과 도피성 이민이 줄을 잇는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유학지와 이민지는 자본주의의 상전국인 미국이다.
2-2. 그러면 미국사회를 분석해보자.
미국사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은 조승희의 절규다. "너희들은 오늘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수없이 많았지만 너희가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고 나에게 단 하나의 선택만을 남겨 놓았다"(인종차별), “벤츠, 금목걸이로도 충분치 않아, 이 속물들아! 너희들의 방탕함도 너의 쾌락적 욕구를 채워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아. 너희들은 모든 것을 가졌어. 너희들은 오늘을 피하기 위해 수많은 기회와 방법이 있었는데 너희들은 내 피를 흘리길 결정했어.”(부패타락한 자본주의) 우리는 단지 조승회가 살인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조승희의 이 말을 흘려들을 뿐만 아니라 이를 가지고 조승희를 사회비관자, 과대망상에 걸린 정신병자로 몰아가고 있다. 그러나 미국사회의 부조리를 조망하는 소설, 조셉 헬러의 《캐치-22》, 켄 키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저지 코진스키의 《그곳에 있음》 등을 읽어보면 조승희 말에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미국사회를 관찰해보자. 미국의 역사를 굳이 자세히 알 필요는 없지만 이해를 위하여 간단히 적어보자.
미국은 1607년 영국의 백인 앵글로 색슨족에 의한 영속적 식민지로부터 출발한다. 이 때문에 미국은 역사적으로 중세시기(봉건제도의 기반)를 경험하지 못한 역사적 한계를 갖는다. 스스로 근대사회를 만들어보지 못한 식민지 미국인들은 진전한 자유주의정신을 모르기 때문에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원주민 인디언을 무자비하게 살육하면서 그들의 생존권을 강탈해 간다(1763, 프렌치 인디언 살육사건 등) 이렇듯 미국의 초기역사는 인간 살육의 역사로 시작된다. 그 후 식민지 미국은 영국본국과 경제적 마찰을 빗자 독립전쟁을 치르고 독립국가가 된다.(1776) 독립전쟁 후 미국남부의 백인 농업자본가들은 값싼 노동력 확보를 위해 아프리카 서부 해안지방에서 평화롭게 거주하는 흑인들을 성난 늑대처럼 사냥하여 그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노동력을 강제로 착취한다.
19세기에 들어오면 미국 북부지역에 산업자본가들이 터를 잡는다. 공장노동자가 필요했던 이들 산업자본가들은 흑인노동력을 공장노동력으로 빼돌리고자 ‘노예해방’이라는 명분을 빌려 농업자본가와 노예쟁탈전쟁을 일으킨다. 남북전쟁이다.(1863) 남북전쟁으로 승리를 거둔 산업자본가들은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키면서 해외진출을 위한 제국주의로 전환한다. 이후 미제국주의는 인간의 아름다운 삶의 가치를 저버린 채, 더러운 약육강식의 동물적 본능을 가지고 세계를 지배해 나간다.
이 결과 국내적으로 경제적 양극화 현상은 지식의 양극화, 건강의 양극화, 문화(주거, 교육 등)의 양극화, 여가생활의 양극화 등 삶의 불균형이 극대화를 이루면서 부패타락한 자본주의사회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패권주의 국가로 둔갑한다. 테러를 응징한다는 명분을 붙여 더 강력한 테러를 자행하고, 민주와 평화라는 명분을 빌려 타국을 침략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그 나라의 산업자원을 제멋대로 강탈하고, 정치, 경제, 군사, 문화적으로 종속국화 한다.
이 결과, 미국은 폭력적 패권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래서 인간내면의 아름다운 정서보다는 자본축적의 외형적 물신(物神)에 관심을 더 갖게 되었다. 이 탓에 미국사회는 비교육적인 사회현상과 문화들이 판을 치게 되었다. 그래서 광고모델, 영화배우, 광란적 스포츠맨 등 자본축적의 노리개가 대중문화를 주도한다.
더구나 인간성을 상실한 미국의 부패타락한 자본주의는 자본의 축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살인무기도 정당한 이유가 된다. 한 예를 들어보자, 미국에는 개인의 총기소유 합법화를 주장하는 미국의 민간단체로서 전미총기협회(NRA: National Rifle Association, 1871년 설립)가 있다. 전미총기협회는 총기관련 프로그램은 운영하면서 겉으로 스포츠로서 사격을 강조하지만 속으로는 정부의 총기판매규제를 막기 위해 엄청난 로비자금을 투입하여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때문에 미국은 살인무기인 총기소지가 자유롭다.
자유로운 총기소유는 서서히 인간생명의 존중에서 벗어나 증오범죄에 악용되고 있다. 매년 발생하는 수천 건의 증오범죄는 인종, 성별, 종교, 민족성 등과 겹치면서 복잡한 양상을 띠어가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1999년 4월 미국 덴버에 위치한 콜럼바인 고등학교의 총기난사사건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영화인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과 같은 총기학살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를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3. 이렇듯 조승희 총격사건은, 남한의 천박한 자본주의와 학벌 중심 사회구조의 모순에서 벗어나고자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이민의 아들이, 미국의 부패타락한 자본주의 사회구조와 인종차별에 직면하여 정신적 갈등에 봉착하면서 일으킨 분노의 살인사건으로 규정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사회 및 남한 공동체구성원들은 사건의 본질은 궤뚫어 보지 못하고 조승희가 남한에서 살다갔다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 당장의 미국상전에 대한 눈치 보기에만 급급하여 한국의 대통령 및 정치인, 그리고 이른바 조중동으로 표현되는 치졸한 수구언론, 얄팍한 기회주의적 종교지도자들이 모두 나서서 미국에게 사과하는 꼴사나운 추태를 보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애도와 충격 표시, 주미대사의 한인교회 촛불예배에 참석하여 32일간 금식기도를 하자고 눈물로 호소하는 추태, 모처럼만에 친미발언거리를 만난 수구언론의 지나친 친미아부 기사, 뉴라이트의 정부차원 조의사절단 파견주장, 종파를 초월한 종교계의 미대사관 앞에서 촛불추모행사, 어떤 언론인의 “미선ㆍ효순이 촛불시위에서 반미구호”가 부끄럽게 느껴진다는 미친 발언.(중앙일보, 4. 24), 어떤 푼수 없는 성직자 시인의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라고 미국에 사죄하는 즉흥시 발표, 서울 모 대학총장의 버지니아 참사 현장 위로방문[중앙선데이] 등 미국상전에 대한 더러운 노예근성들을 보였다.
또 서울 모 대학 교수는 “2007년 조승희의 대량살상 사건이 2002년 주한미군의 작전사고로 희생된 여학생의 죽음이 불러온 거센 반미운동의 기폭제를 잠재우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그리고 서강대 모 교수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내용의 추모사를 썼다. 또 《월간조선》전 대표 조씨는 조승희 사건이 발생하자 “한국이 배은망덕한 나라라는 욕을 먹게 생겼다"며 노무현 대통령의 부시 대통령에 대한 사과, 희생자 위로 국내 촛불집회 등을 주장”하는 비굴함을 보였다. 그리고 4월 21일 선진화국민회의와 재향군인회 등 보수진영의 248개 시민ㆍ사회단체 회원과 시민 등 1000여명이 서울광장에서 ‘버지니아 공대 참사 희생자 추모 촛불집회’를 열었다.
더욱 분개하고 싶은 것은 참여정부가 이번의 친미노예적 국민정서를 재빨리 이용하여 상전미국에 대한 미안함을 애써 보이기 위해 그렇게 힘겨루기를 해왔던 ‘미국산 쇠고기’수입을 슬며시 허용하였다. 한심한 소치이다. 그러자 상전미국은 언론과 인터넷을 통하여 “한국인의 죄가 아니다, 우리가 잘못 판단하지 않도록 더 이상 사과하지 말라” “한국 제발 사과 그만해 달라”, 또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 대사는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한 연설에서 "조승희의 범행은 개인이 저지른 문제인 만큼 한국이 책임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 "한국이 집단 죄의식 문화에서 벗어냐야 한다"(노컷뉴스, 4,25)고 관용을 베풀어주었다. 참으로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다.
상전미국에 굴욕적 노예기질을 발휘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영동 노근리, 마산의 곡안리, 황해도 신천, 강원도 양양지역 등지에서 미군이 총기를 난사하여 죽인 300만 우리 양민학살에 대하여 이를 규탄하고 그 책임을 물은 적이 있는가. 그리고 우리 양민들의 주검에 대한 진혼비 건립이나 추모행사 내지 추모를 위한 ‘평화공원’을 설립하자고 주장한 적이 있나. 낡아빠진 이념에 사로잡혀 언제 한번 미국보다 제 동족을 사랑해 본적이 있나. 그리고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100만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인종차별이 얼마나 심하게 자행되고 있는지 생각해본 적은 있나. 기득권 유지에 사로 잡혀 자기네 자식보다 사회적 약자의 삶에 대하여 한번쯤 뒤돌아본 적은 있는가. 이번 조승희의 분노에 찬 총격사건을 통하여 남한사회 친미적 기득권층과 보수세력들의 비굴한 노예근성을 보고 가슴에 아픔이 절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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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보윤식 (2007. 4. 25 초고, 5. 4 정리)
* 필자는 문학박사로서 인하대학교 인문과학 연구소에 소속되어 있다. 인하대, 충남대에 출강(동양사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