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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25 사변 발발
내가 용산중학교 2학년 때였다.
내가 공부하는 교실은 2층이었는데, 공부하다가 10분 동안 쉬는 시간이 되면, 습관적으로 옥상에 올라가 먼 하늘과 남산을 바라보며 친구들과 잠시 이야기하다 뛰어 놀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하늘에서 콩 볶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하고 하늘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소리 나는 곳을 추적했다. 한강 위쪽이었다. 자세히 보니, 비행기 두 대가 재주를 부려가면서 비행기의 꼬리를 물면서 총을 쏘는 것이었다. 어린 마음이라 그랬는지는 몰라도 신나게 구경을 했다. 약 5분쯤 보았을까 했는데, 비행기 한 대가 김포 쪽으로 달아난다. 다른 비행기가 그 뒤를 좇아 뒤따라갔다.
나는 공중에서 우리 공군 비행기끼리 훈련을 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때 마침 담임선생이 옥상으로 뛰어 올라왔다. “너희들 총 맞아 죽고 싶으냐? 빨리 교실로 들어가지 못 해”라고 소리를 질렀다. 더 구경을 하고 싶었지만 담임선생의 엄명이라 거절할 수 없어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교실로 뛰어 내려갔다. 공부 시간이 됐으니까 공부하러 교실로 들어가라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공부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교무실로 간 담당선생은 들어오지 않았다. 약 30분쯤 뒤에 담임선생이 들어왔다.
담임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이북에서 인민군들이 쳐들어와 전쟁이 일어났다. 북한에 있는 조만식 선생과 남한에 있는 이주하, 김삼룡과 개성(38°선)에서 오늘 맞교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느닷없이 인민군들이 남한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너희들은 집으로 당장 돌아가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있어라. 별도 지시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전달될 것이다.”(그 당시에는 텔레비전은 존재하지 않았음)
이날은 1950년 6월 25일이었다.
담임선생의 이런 말을 듣고 어린 마음에도 서울역으로 가면 무슨 상황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집으로 가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서울역으로 뛰며 걸으며 허겁지겁 향했다. 서울역은 아수라장이었다. 곳곳에서 애국가 울려 퍼졌다. 확성기 소리도 요란했다.
“국군 장병 여러분, 지금 전쟁이 일어났으니, 이 방송을 듣는 즉시 소속부대로 즉시 귀대하기 바랍니다. 휴가 장병 여러분 지금 전쟁이 일어났으니, 이 방송을 듣는 순간 즉시 소속 부대로 귀대하시기 바랍니다.”
라는 확성기 소리가 몇 시간이고 계속 울려 퍼졌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도 모두 긴장된 얼굴로 애국가를 힘차게 불러댔다. 우리들도 애국가를 목이 터져라 따라 불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군인들은 군용트럭에 가득 타고 있었다. 트럭 차체와 군인의 몸에는 나무를 꽂아 적군이 식별하지 못 하도록 위장하고 있었다. 군인 트럭이 남대문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니, 북쪽 전선으로 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군인들 입에서는 군가와 애국가를 목청이 터지도록 교대로 불러대며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북쪽을 향해서 힘차게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이런 엄청난 모습은 처음 보았다. 겁이 더럭 났다. 친구들과 집에서 부모님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집으로 빨리 돌아가자고 의견을 모으고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 와보니 아버지는 직장에서 귀가하지 않으셨다. 저녁 10시쯤 돼서야 돌아오셨다. 아버지의 얼굴도 상기되고 긴장된 모습이셨다. 이 날은 전쟁이 발발한 것에 대해서만 말씀을 하시고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 가만히 있으라고 하셨다.
저녁때가 되자 어두움은 온 천지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라디오도 몇 집 걸러 한 대가 있을 정도였다. 내 집에도 라디오가 없었다. 무슨 연락 사항이나 지시 사항이 있으면 동네 전신주에 가설된 확성기를 통해서 라디오 방송을 들려주었다. 그 확성기에서도 “국군 장병 여러분 지금 전쟁이 일어났으니, 이 방송을 듣는 즉시 소속 부대로 귀대하시기 바랍니다.…” 와 군가 그리고 애국가가 계속 울려 퍼졌다. 그 방송을 듣는 국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힘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가 발표되었다. 지금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과 국군이 인민군을 무찌르면서 황해도 쪽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내용, 그리고 국민들이 동요하지 말고 라디오 방송을 잘 들으면서 정부의 지시에 따라 달라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6 · 25 발발 일은 이런 혼잡한 상태로 지나갔다.
전쟁이 일어난 다음날이었다. 하루 종일 집에서 하는 일 없이 때때로 흘러나오는 확성기 소리를 들으면서 지냈다. 전쟁 발발 첫날은 혼란 속에서 지나갔다. 다음날도 혼란은 계속되었다. 모든 상황이 궁금하기만 했다. 그렇게 하루가 또 지나갔다. 밤 11시경이었다. 멀리서 “쿵 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의정부 쪽에서 나는 대포 소리라고 생각했다. 이때만 해도 이것이 인민군들이 의정부 가까이 쳐들어온 것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방송 소리만을 믿고 국군이 북으로 진격하고 있는 줄만 알았다. 성능이 좋은 대포로 서울 가까이에서 북쪽을 향해 쏘는 국군의 대포 소리라고만 생각했다.
전쟁 발발 사흘째 되는 날이다. 새벽 4시경이 되었다. 남산 정상에서 대포 소리가 들려 왔다. 이때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남산 중턱에 있었기 때문에 큰 대포 소리에 집이 들썩들썩 흔들렸다. 그야말로 전쟁이 실감났다. 나는 남산에서 대포 소리가 들려도 인민군이 서울 가까이 쳐들어 왔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 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사흘만에 인민군이 서울까지 쳐들어왔으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밖에 나가 보았다.
거리는 너무나도 조용했다. 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조용한 거리의 정적을 깨는 것은 우르릉 우르릉거리는 인민군 탱크의 굉음과 옆에 별이 그려진 군용트럭이 위용을 자랑하면서 서울의 큰 거리를 위풍당당하게 휘졌고 있었다. 큰 집채만한 괴물이 거리를 굴러다니는 모습을 보니,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탱크와 군용트럭이 거리를 누비더니, 얼마 안 되어 인민군들이 서울 곳곳에 쫙 깔렸다. 그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섬뜩해지면서 무서웠다.
방송에서 국군이 이북으로 밀고 올라간다고 한 것은 정부가 국민들에게 감쪽같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전쟁이 일어난 지 삼일 만에 우리의 수도인 서울이 인민군에게 함락되고 만 것이다. 이 날부터 사흘 동안 한강을 경계로 하여 국군은 노량진과 영등포에서 인민군은 마포와 남산과 용산 부근에서 서로 포격전을 벌였다.
내가 살고 있던 집은 후암동 339의 5호로 남산 중턱에 있었다.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낮에는 요란하고 방정맞은 따발총 소리와 “따콩 따콩”하는 아카보 소총 소리만이 시내의 엄숙하고도 긴장된 분위기를 깨면서 시민들을 놀라게 했다. 밤이 되자 포격전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따콩 따콩…, 드르륵 드르륵…, 쿵쾅 쿵쾅…” 소리들이 뒤엉켜 소름끼치고 혼을 빼는 듯 총소리들이 뒤범벅되어 조용하던 서울의 밤을 밤이 새도록 갈기갈기 찢어놓고 말았다. 게다가 밤에는 총성과 함께 신호탄이 섞여 하늘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시민들을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 넣었다.
이런 중에 미처 한강을 건너가지 못 한 국군들이 서울시내 곳곳에서 인민군과 시가전을 벌이는 총소리도 있었고, 나중에는 인민군들이 공격해 피할 수가 없게 되자, 인민군들에게 총살을 당하느니 우리끼리 죽자고 해 전우를 서로 총을 쏘아 자살 한 국군들도 많았다.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은 6 · 25 사변이 발발한 지 채 사흘이 되지 않아 정부가 짐을 싸들고 수원으로 피란을 가면서 새벽에 한강 인도교를 폭파하여 끊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일어난 지 6일이 흘렀다. 그렇게 심하게 들리던 총소리가 갑자기 딱 멈추고 별안간 조용해졌다. 언제 전쟁을 했느냐 할 정도였다. 알고 보니 인민군들이 노량진과 영등포를 점령하고 남으로 계속 진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서울시민들은 피란 갈 새도 없이 인민군 세상에 꼭 갇혀버리고 말았다.
인민군들이 서울을 쳐들어오게 되자,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는 서둘러 남으로 피란을 떠나고 말았다. 떠나기 직전 이승만 대통령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서울 시민들에게 짧은 시간 안에 서울을 다시 탈환할 것이니, 시민들은 동요하지 말고 안심하고 기다리라고 했다.
서울을 버리고 대통령 이하 국무위원들과 국회의원들은 인민군들이 서울에 도착하기 직전에 차를 타고 서울을 다 빠져나갔다. 방송만 믿고 있던 시민들만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높은 사람들이 한강을 건너간 직후 국군 공병단에서 서둘러 한강 인도교를 새벽에 폭약으로 폭파하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시민들은 새벽 야음을 타 차를 타고 전속력으로 피난 가다가 한강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 한강에 떨어진 차가 쌓여 강물 위로 올라와 인도교 위로 올라왔다. 그 당시에는 승용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정부 요직에 있는 사람들과 돈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일반시민들은 감히 차를 가지고 있을 꿈도 꾸지 못 했다. 이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은 것이다. 한강 다리를 이렇게 서둘러 절단하지 않아도 되는데, 너무 서둘러 절단했기 때문이다. 다리를 절단했으면, 그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렸어야 하는데, 알리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국군들이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자, UN군의 B 29가 새까맣게 날아와 한강기차 철교와, 미쳐 절단하지 못 했던 인도교에 폭탄을 투하해 절단하였다. 인도교에 맞는 폭탄은 열꽃을 내면서 폭발했지만, 명중시키지 못한 폭탄은 강물에 떨어져 폭발하였다. 폭발할 때마다 그 치솟는 물줄기는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장관을 이루었다. 폭탄을 투하한 B29는 서울역으로 향해 그곳에 다시 폭탄을 퍼부었다. 유엔군 비행기들이 폭탄을 투하할 수 있는 것은, 지상에서는 인민군들의 소련제 탱크의 위력이 너무 강해 국군들이 형편없이 밀렸지만, 비행기만큼은 이북 비행기가 UN군의 비행기를 당할 수가 없었다. 제공권을 유엔군이 완전히 장악해 인민군의 비행기는 날아다니는 것을 전쟁 첫날 보고 그 다음부터는 보지 못 했다.
나는 시내 상황이 궁금했다.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서울역으로 다시 향하였다. 서울역 철길은 UN군의 B29가 폭탄을 투하해 철로는 엿가락처럼 휘었고, 큰 연못만한 웅덩이가 나뒹구는 철길과 함께 처참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서울역 광장도 연못 크기 만한 웅덩이 7개가 패었다. 그런데도 B29는 계속해서 철길과 광장에 폭탄을 투하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나는 겁이 덜컥 나 집으로 황급히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인민군 장교와 마주치게 되었다. 인민군 장교는 “야. 너 이리 와봐”라고 해 오금을 바르르 떨면서 그 앞으로 다가갔다.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내 가슴에서 배지를 발견하고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일민주의(一民主義) 배지라고 대답했다.
인민군 장교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그게 무엇을 뜻하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은 다 같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뜻이라고 대답했다. 인민군 장교는 그런 말을 들어보지 못한데다가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듯 한참 생각하더니, 당장 떼어버리라고 호통을 쳤다. 나는 눈치를 보아가며 그 자리에서 배지를 떼어 학생복 상의 주머니에 넣었다. 더 이상 서울 거리를 돌아다니다간 무슨 일을 당할는지 몰라 황급히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 인민군 치하의 서울
인민군들이 서울을 점령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서대문 형무소를 개방한 것이다. 서대문 형무소에는 사상범도 있었지만, 살인범을 비롯한 각종 민사범과 형사범이 많이 수감되어 있었다. 인민군 세상이 되자 모든 범죄자들이 모두 사상범으로 바뀌어 인민군들의 앞잡이가 됐다. 이들 중 공산주의가 뭔지, 사회주의가 뭔지 알지도 못 하면서 자기들이 살아남기 위해, 붉은 완장을 차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행동한 것이다.
인민군들의 뒤를 따라 팔에 붉은 완장을 차고 기세등등하게 내무서원들과 인민위원회 사람들이 서울에 나타났다. 이들은 계획을 수립하고 남하한 것 같다. 서울 시내 행정구역 단위로 이북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시장을 비롯해 반장에 이르기까지 하루 이틀 사이에 모두 임명하고는 반동분자라고 하여, 정부 인사, 공무원, 기업가, 유명 학자, 사상적으로 동조하지 않는 인사, 자기네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평소에 원한을 가졌던 사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색출해 내무서원과 인민위원회에 넘기기 시작한 것이다.
넘겨진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을 거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북으로 납북 당해 갔거나, 살해된 예가 부지기수였다. 이런 광경을 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몸을 숨기기 시작했고, 피란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국민들을 동원하여 그 유명한 인민재판을 감행했다. 인민재판이란 가장 민주주의인 척하면서 인민들의 의사에 따라 처벌한다는 형벌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민들의 의사에 따른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뒤에서 인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자기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만약 재판에 비협조적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도 똑같이 인민재판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된다. 자기네들 세상을 만난 것이다. 이용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북송해 갔다. 이런 식으로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붉은 기의 앞잡이들이 붉은 완장을 차고 날뛰는 꼴은 가히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매일 저녁마다 학습을 했다. 학습이란 김일성 주체사상을 배우고 행동하는 것과 공산주의에 관한 노래를 배우는 것이다. 낮에는 강제 노동인 부역에 강제로 동원되어 복구 작업을 하든가 방공호와 교통호를 만드는 일들이었다. 이런 동원에 불참해도 인민재판에 회부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인민재판은 참으로 편리하게 사람들을 때려잡는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 인민군 치하의 등교
6 ․ 25사변이 일어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등교하라는 연락이 왔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등교하라니까 세상은 바뀌었어도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해서 학교에 나갔다. 교문을 들어서자 교실로 가지 못 하게 하고, 인민군 장교와 학교 선생들이 강당으로 모이라고 명령하였다. 강당에 가 보니 벌써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선생들이 있나 하고 찾아보았더니, 몇 명이 있을 뿐이며, 대부분의 선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10시경이 되었다. 나는 선생들이 들어와 무슨 말을 해 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들은 단 위에 나타나지 않고 인민군 장교가 단상에서 하는 짓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의 기대를 깨고 인민군 장교가 강단에 올라가서 말했다. 그의 모습은 붉은 줄을 두른 인민군 모자를 썼고, 계급장도 붉은 바탕에 계급이 표시되어 있었고 군복 가장자리에도 붉은 줄이 눈에 선뜻 띄었다.
“서울은 우리가 해방을 시켰다. 이제 서울 인민과 여러 학생들은 빈부의 차별이 없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맞이했으니, 앞으로 마음 놓고 잘살 수 있는 좋은 세상이 되었다. 우리 인민군은 남반부 인민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계속 남쪽으로 남쪽으로 진격하고 있다. 강력한 탱크를 앞세워 용맹한 우리 인민군들이 붉은 기를 앞세워 싸우고 있으니, 앞으로 15일 후면 부산까지 모두 점령, 해방시킬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니 앞으로 여러 동무들은 김일성 수령이 영도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인민으로 살아갈 것이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이런 식으로 일장 연설을 했다., 여러 학생 동무들도 민족 해방 운동에 동참하기 위해서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고 하더니, 북한에서 부르는 노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적기가’(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 ‘김일성 장군의 노래’(장백산 줄기줄기 피 어린 자국----) 등 혁명과 수령을 찬양하는 노래들을 가르쳤다. 어린 마음에 영문도 모르고 겁을 먹은 채 큰소리로 따라 배웠다. 노래 곡조가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오전 내내 연습하던 노래를 그치더니, 운동장에 집합시켰다. 노래하던 전교생(등교한 학생들)을 이끌고 교문을 나섰다. 어디로 가나하고 궁금했었는데, 도착한 곳은 수도여자중고등학교였다. 강당에 들어가 보니, 역시 그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인민군들이 부르는 노래를 인민군 장교의 지시에 따라 여학생들이 목이 터져라 힘차게 불렀다. 우리도 합세하여 한참동안 같이 노래 불렀다.
노래를 마치더니 16살 이상 먹은 학생들은 앞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내 나이가 그 당시 한국 나이로 16살이었다. 나갈까 말까하고 망설이다가 무엇 하는 것인지 몰라 눈치만 보다가 나가지 않았다. 그때 나는 나이에 비해 키가 작은 편이었다. 앞에 나간 학생들에게 수건을 하나씩 나누어주고는 머리에 두르도록 했다. 수건을 머리에 두른 학생들은 앞장을 섰다. ‘이승만 타도’를 외치면서 시내로 향했다. 한 시간 정도 걸었다. 도착한 곳은 광화문과 종각 사이 북쪽에 위치한 수송국민학교이었다.
운동장에는 학생들이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가득 모여 있었다. 그곳에 머무르려고 해도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수건을 머리에 두른 학생을 제외하고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나는 그들 뒤를 따라가면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러 가면서 분위기를 조성한 꼴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류제한, 조선어학회에 근무하고 계셨다)에게 그런 말씀을 드렸더니, 의용군(義勇軍) 뽑아 가는 것 같다고 하시면서 내일부터 학교에 나가지 말라고 하셨다. 아버지 말씀대로 나는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며칠 동안을 보냈다. 이때 내 나이가 16살이라고 해서 앞으로 나갔었다면 틀림없이 의용군으로 끌려 갔을 것이고 낙동강 전투에서 죽었거나 아니면 철의 장막인 북한으로 가 죽지 못해 사는 생활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삶에 있어 순간의 선택이 생사를 갈라놓는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이때 영문도 모르고 의용군으로 끌려간 젊은이들은 총 쏘는 연습도 하지 않고, 총도 모자라 지급받지 못 한 채, 인민군을 호위하면서 남으로 남으로 향하여,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전쟁할 때 유엔군의 전투기에서 5m 간격으로 쏟아 붓는 폭탄 투하로 인해 젊음을 펴 보지도 못 한 채 거의 개죽음을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인민군들과 함께 이북으로 후퇴하였다고 한다.
* 피란길
날이 갈수록 북한의 내무서원들은 유명인사와 지식인들을 납치해 가 서울에 그대로 있다가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집안 식구들을 모아놓고 말하였다.
"아무래도 피란을 가야겠다. 서울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 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피난을 같이 가야 할 사람이 있다. 내 그분을 만나고 올 것이다."
말을 마치자 밖으로 나가셨다. 다녀오신 후에 누구를 만나셨나 하고 알아보았더니, 바로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과 한글학회 이사인 건재(健齋) 정인승(鄭寅承) 선생이었다.
위당에게 함께 우리 고향으로 피란을 가자고 말했더니, 책 정리를 하고 가겠으니, 먼저 가면 내가 뒤따라가겠다고 해서 할 수 없이 그냥 돌아오셨다는 것이다. 건재 정인승 선생은 며칠 뒤에 류 선생 고향으로 갈 것이니 그리 알라고 약속을 받아 가지고 돌아오셨다. 하는 수 없이 우리만 피란을 가기로 했다.
* 위당 정인보 선생은 민족사관에 의해 우리 역사를 바로잡아 가는 애국적인 역사학자이면서 우리나라 대 문장가이기도 하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집에서 책을 정리하다가 북한 내무서원에게 납치되어, 이북으로 끌려가다가 너무 늙고 병약해서 도중에서 돌아갔다고 한다.
* 건재 정인승 선생은 유명한 국어학자로서 한글학회 이사와 전북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우리 일행보다 며칠 뒤에 나의 고향으로 피란을 왔다.
그 해 6월 24일은 할아버지 제삿날이어서 둘째, 셋째 작은아버지가 서울 후암동 집에 다 모였다. 아버지가 장남이라서 우리집에 다 모이신 것이다. 처음 계획은 모처럼 서울에서 다 모였으니, 서울 구경이나 하고 내려가야 하겠다고 마음먹고 며칠 머무르려고 작정했었다. 그런데 25일 새벽에 전쟁이 터지자 서울에 머무르고 있다가는 큰일 날 것 같다고 하면서 서둘러 서울역에 가서 부산 가는 마지막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그 날 바로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았다면, 며칠 뒤에 걸어서 나의 집 식구와 함께 갈 수밖에 없었을 텐데 참으로 잘 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피란 가기로 결정한 날은 6월 30일이었다. 29일은 피란보따리를 싸기에 바빴다. 피난보따리래야 무엇이 있겠는가? 미수가루, 건빵, 쌀 조금, 당장 갈아입을 여름 옷가지 몇 개, 설탕, 종곡(술 만드는 원료) 등이었다. 한강 인도교가 끊어져 있기 때문에 낮에는 한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UN 군의 ‘쌕쌕이’(F80)가 나타나 인민군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하고 군수물자나 무기를 나르는 것으로 알고 민간인들에게도 심한 폭격을 가하기 때문에, 날이 새기 전에 한강을 건너야 했다. 새벽 4시에 집을 출발했다.
한강에 도착해 보니, 피란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이 건너야 할 배는 몇 척 되지 않았다. 서로 배를 타려고 아수라장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누군가가 소리를 쳤다. “우리가 이러다가는 한강도 못 건너고 다 죽는다. 질서를 지켜야 산다. 도착하는 대로 줄을 서자”고. 그러자 어느 정도 질서가 유지됐다. 그런데 사공들이 문제였다. 돈을 많이 내는 순서대로 강을 건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돈이라는 것은 시도 때도 없이, 나이도 가리지 않고 좋은 것인가 보다. 그 아우성 속에서도 날이 밝을 무렵 우리는 남보다 돈을 더 지불하고 배를 타고 겨우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때 끊어진 한강 다리는 물에 다 들어가지 않고 교각에 걸쳐 있었고, 끊어진 다리 아래로 다리가 끊긴 사실을 모르고 차를 몰고 달리다가 한강으로 빠진 차들이 물 위에까지 솟아 오른 것을 보았다. 어린 마음에도 전쟁이라는 것이 바로 저런 것이구나 하고 그 처참함을 처음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한강을 건넌 우리는 걸음을 재촉하여 국도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영등포를 벗어나자 국도 옆 고랑에 국군인지 인민군인지 알 수 없는 시신들이 즐비하게 누워있었다. 똑바로 누워 있는 시신도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고랑에 쑤셔 박혀 있거나, 엎어져 있고, 가만히 앉아 있는 듯 고개만 숙인 경우도 이었고, 언덕에 걸쳐 큰 대자를 하고 있는 시신도 있었다. 그 참담한 모습은 눈뜨고는 바라볼 수 없었다. 인간이라는 것이 전쟁 앞에서 저렇게 무력하게 죽어 갈 수 있단 말인가?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다. 수원에 들어가기 전에 고개가 하나 있었는데, 길옆에서 인민군 탱크가 유엔군 전투기인 쌕쌕이(F80, 일명 호주기라고도 함)의 포격을 받고 시꺼먼 연기를 토하면서 활활 타고 있었다. 나는 잔뜩 긴장이 됐고 소름이 끼쳤다. 온 몸이 움츠러드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옆에서는 당장이라도 인민군들이 뛰쳐나와 따발총을 우리에게 겨눌 것만 같아 무서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부지런히 걸었다. 해가 넘어가 어두워질 무렵에 수원 북문 밖에 도착했다. 그 집은 모두 피란을 떠나 아무도 살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이 빈집에서 짐을 풀고 짐에 기대 쉬었다. 짐을 지고 처음으로 많이 걷다가 보니, 팔과 다리는 아파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수원까지 걷는 동안에는 인민군을 별로 보지 못 했다. 거의가 최전방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피란민만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잠을 자려고 하지만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우리가 머무르는 곳은 큰 국도 바로 옆이었기 때문에 언제 인민군들이 들이닥쳐 우리를 해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즐겁게 여행을 가는 것이라면 몰라도 처량하고 참담하게 가는 길이니, 이런저런 생각이 앞을 가려 아버지, 어머니는 밤새도록 한숨만 쉬고 계셨다.
날이 훤하게 밝아오자 싸 가지고 간 건빵으로 아침 끼니를 간단하게 때우고 또 걷기 시작했다. 수원을 지나 병점역에 도착했다. 평소에 술을 들지 않는 셋째작은아버지가 피로해서 도저히 갈 수 없다고 하시면서 주막에서 막걸리 한 잔 하고 갈 테니, 먼저 가라고 해서 서서히 먼저 떠났다. 우리가 병점역을 2, 3백 미터쯤 벗어났을 때였다. 남쪽 오산(烏山)의 하늘을 바라보니, 잠자리 같은 것이 하늘을 이리저리 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유엔군의 F80 전투기였다. 하늘을 한 바퀴 빙 돌아 땅으로 향하고 나면 폭음 소리와 함께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오산역을 폭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비행기가 별안간 방향을 틀어 병점(餠店)역으로 향하였다. 정면으로 날아오는 모습을 보니, 가운데는 큰 동그라미, 양쪽으로 작은 동그라미 해서 동그라미 세 개가 우리를 향해서 들이닥치는 것이 아닌가. 너무 놀라서 숨을 곳을 찾아보니, 10m쯤 거리에 큰 바위가 있었다. 그 바위에 꿩이 숨듯 머리만 감추고 숨었다. 우리에게 폭격을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비행기는 병점역을 강타했다.
순간 큰일났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아버지가 막걸리를 마시다가 폭격을 당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온 몸이 흙투성이가 된 채 허둥지둥 달려왔다. 이유를 물어보니, 폭격을 당하여 그 바람의 힘으로 몇 미터 밖 논에 날아가 떨어져 그렇다는 것이다. 그는 겁에 질려 그 말만 내 뱉고는 옆도 안 보고 그대로 달아나듯 달려갔다. 그 말을 들으니 더욱 작은아버지가 걱정되었다. 조금 있으니까 작은아버지도 허겁지겁 달려왔다. 나는 괜찮다 어서 빨리 가자고 하셨다. 한시름 놓았다.
철길을 따라 걷다가 국도로 접어들었고, 이어 지방도로를 걷고 걸어 저녁나절쯤 입장읍(笠場邑)에 도착했다. 어두움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입장면 사무소 앞을 지나갈 무렵이었다. 인민군 장교가 길에 버티고 서서 피난민들의 보따리 검사를 했다. 우리도 피할 수 없었다. 여자와 아이들은 그냥 가라고 하고는 아버지의 보따리를 조사했다. 그러더니 아버지를 내무서(파출소와 같음)로 데리고 갔다. 우리는 하루 저녁 묵을 방을 정해 놓고 내무서 앞으로 나가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오시지를 않았다. 한 시간쯤 기다렸다. 아버지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우리에게로 다가 오셨다. 나보고 빨리 가자고 하셨다.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해 정해 놓은 숙소로 왔다. 아버지는 안심이 안 되었던지 더 가자고 하셨다. 어두운 밤길을 한 시간쯤 더 걸어서 시골 초가집에 숙소를 정하고 투숙했다.
무슨 일이야고 물었더니,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는 것이다. 보따리를 인민군 장교가 보더니,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이 직접 붓글씨를 써서 아버지에게 기증한 ‘백범일지’를 보고는 김구가 애국자인 줄 아느냐, 회색분자인 김구에게 책을 기증받은 것을 보니, 반동분자가 틀림없다면서 죽일 듯이 총부리를 겨누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더라는 것이다. 아무리 살려달라고 사정을 해도 들어주지 않자 들고 가던 설탕 5근 모두를 줄 테니 좀 봐달라고 하자 마음이 누그러진 인민군이 마지못해 허락하는 것처럼 표정을 짓더니 가보라고 해서 풀려났다는 것이다. 언제 뒤를 밟아와 또 시비를 걸지 모르기 때문에 숙소를 옮기자고 하신 것이다. 이 날 밤은 언제 인민군이 들이닥칠지 몰라 자는 둥 마는 둥하고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거른 채 고향으로 고향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천원군 병천면 용두리 만마루 고향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경이었다. 둘째 작은아버지 내외분이 반갑게 맞이하셨다. 아무 일 없이 도착해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위로를 해 주셨다. 걷지 않다가 햇볕을 받으면서 걷고 나니, 팔과 종아리는 타서 물집이 잡혀 아팠고, 많이 걸은 탓에 발에도 물집이 잡혔다. 열흘이 넘도록 쓰리고 아파 고생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피란생활은 고향에서 시작되었다.
서울을 버리고 옮겨 갔던 정부는 수원에 잠시 머물렀다가 인민군의 계속된 남침으로 대전으로 옮겼고, 나중에는 대전마저도 인민군들의 공격이 심해지자, 다시 대구로 내려갔다. 낙동강을 전선으로 전투가 험악하게 계속되자 다시 부산으로 옮겼다. 정부는 9 · 28 수복이 될 때까지 부산에서 머물러 있었다.
* 고향 생활(6 ․ 25 피난 생활)
고향에는 다행히 그 전에 살던 집이 남아 있었다. 내가 고고의성을 울리면서 태어난 곳이다. 안채, 사랑채, 헛간 등이 많이 훼손됐지만 아쉬운 대로 쓸 만했다. 이 집에서 앞으로 얼마 동안을 견뎌야 할 지 모르는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고 마음먹고 마음에 내키지 않는 생활을 시작했다.
도착하자 당장 먹을 양식이 없었다. 둘째 작은아버지가 쌀 한 가마를 주셨다. 앞으로 한 달 동안은 별 문제 없이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고향에 도착한 날은 7월 3일이었다. 학교를 바쁘게 다니다 한적한 고향에서 생활 하게 되니, 모든 일이 생소하기만 했다. 당장은 할 일이 없었다. 작은집에서 하는 농사일을 조금씩 도와주면서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교과서, 노트 등 학용품이 하나도 없었다. 전쟁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리니, 시간이 비록 난다고 해도 공부할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 했다.
고향에 도착하고 바로는 조용하기만 했다. 그러나 인민군들의 세상을 벗어나지 못 했다. 열흘 정도 지났을 때다. 이때부터 인민군들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직 체계가 서서히 갖추어지더니, 내무서의 지시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일 주일 정도만 있으면 부산까지 공화국이 관장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는 우리 모두가 다 평등하게 잘 사는 나라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 힘을 합해 공화국 건설에 앞장서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는 일에 반기를 드는 사람이 있을 때는 가차 없이 처벌할 것이니 그리 알라고 호통을 쳤다.
이때부터 공산당의 공포분위기가 서서히 조정되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부역을 나오라는 것이다. 부역의 내용은 교통호를 시골길 옆 산허리를 쭉 둘러가면서 파는 것과 군수물자와 무기를 운반하는 일이다. 그 일에 참여하지 않으면 반동분자로 몰아 인민재판을 하겠다는 것이다. 피난 온 사람들도 다 내무서에서 파악했기 때문에 불참하면, 명단이 상부에 비밀리에 보고되고 있었다. 아버지의 나이가 40대 초반이셨다. 아버지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참석하지 않으셨다. 그것이 다 공산사상을 가지고 내무서의 앞잡이 노릇을 한 동네 사람들에 의해 내무서에 보고되어 불온 사상자의 리스트에 올랐다.
내무서의 지시에 비협조적인 사람은 그래도 꽤 되는 것 같았다. 나중에 8월 15일을 기해 비협조적인 사람들을 일시에 살해하려고 비밀로 대나무 창을 만들어 숨겨놓은 것을 나중에 확인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만들어 놓은 대나무창의 숫자가 수 백 개에 이르렀다.
그런데 다행히도 8월 15일 유엔군이 북쪽으로 진격하면서 천안군 병천면을 입성한 것이 바로 그날이었다. 인민군은 유엔군이 들어오기 전에 북쪽으로 도망을 쳤고, 내무서원들과 그들에게 협조하던 동네 사람들도 도망을 쳤다. 그 바람에 죽을 번했던 주민들이 죽음을 모면하게 되었다.
피난 생활을 한 지 약 두 달이 지나 7월말경이 되자, 수군수군하면서 암암리에 들려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유엔군이 부산 쪽에서부터 북진을 하고 있는데, 약 20일 정도면 이곳이 유엔군에 함락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유엔군이 진주하기 사흘 정도에서부터 설치고 다니던 내무서원들과 인민군들이 별안간 보이지 않았다. 소문이 실제로 맞았다.
유엔군이 병천을 지나간다고 해서, 동네 사람들은 병천으로 달려갔다. 나도 달려갔다. 조금 있으니까 진천 방향에서 천안 방향으로 가는 군인 트럭이 끝도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유엔군들은 손으로 "V" 자를 그리면서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주민들은 두 손을 높이 들어 “만세~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쳐댔다. 군인들의 모습을 보니, 먼지로 뒤범벅이 되어 동양 사람인지 서양 사람인지 깜둥인지, 흰둥인지 알 수 없었다. 만세를 부르는 우리를 향해 상자를 많이 집어던져 주었다. 하나를 집어 뜯어보니, 소위 말하는 레이션 박스였다. 미군들이 식량을 담아 가지고 다니는 박스였다. 쇠고기 통조림, 돼지고기 통조림, 껌, 코코아, 커피, 설탕 등 골고루 들어 있었다. 그것을 친구들과 먹어 보니 너무나도 맛이 있었다. 나는 그런 것들을 처음으로 먹어 보았다. 그런 기쁨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무서원들과 그 앞잡이들이 설쳐대지 않는 것만 보아도 너무 살 것 같았다. 바로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갈 수 없었다. 유엔군이 서울까지 진격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동안에 어린 동생이 폐렴으로 세상을 떴다. 이 동생의 이름은 후상(厚相)이었다. 후상의 ‘후’자는 후암동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딴 것이고, ‘상’자는 돌림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서울서 살 때에도 몸이 약해 병원엘 자주 다녔다. 이런 와중에 피란을 가게 되었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 하고 환경도 말할 수 없을 만큼 몹시 열악하였다. 감기가 걸렸다. 병원에도 갈 수 없고 약국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며칠 앓더니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 하고 헉헉거리고 있었다. 급성폐렴이 온 것 같았다. 급히 서둘러 백방의 노력을 해 보았으나 그 동생을 살릴 어떤 방법은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꿈을 펴보지도 못 한 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6 · 25만 아니었으면 이런 일이 생길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참으로 원통한 일이었다.
* 9 ․ 28 수복
6 ․ 25 사변 때 인민군들은 동쪽으로는 포항, 안강까지, 경부선 쪽으로는 낙동강을 지나 왜관까지, 서쪽으로는 하동을 지나 진주에까지 진격을 해 인민군들이 차지하지 못 한 지역은 부산과 대구였다. 우리 땅 거의가 인민군들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유엔군은 부산까지 포기하고 전선을 일본으로 옮기고, 유엔군을 재정비하여 북진을 하자고까지 했었다. 그러나 이때 내무장관을 하던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 박사가 대구를 끝까지 사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이 이상은 후퇴할 수 없다고 말이다. 유엔군도 하는 수 없이 대구와 부산을 사수하면서 다시 작전을 세웠다. 심사숙고 끝에 동쪽은 원산, 서쪽은 인천으로 상륙 작전을 펴 인민군의 보급로와 지휘체계를 끊어 놓기로 하고, 함포 사격과 더불어 상륙 작전이 성공을 거두어 인민군 진격로의 허리를 자르게 되자, 더 이상 남진할 것을 포기하고 북으로~ 북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 포항(浦港)과 안강(安江)은 우리의 학도병이 대다수 투입되어 인민군과 전투를 벌였다. 학도병은 군사 훈련을 사흘 정도 받고 전투에 임했다. 심지어는 총알을 장진할 줄 몰라 “소대장님 총 다 쐈습니다. 총알 장진해 주십시오”라고 할 정도로 훈련이 미흡했다고 한다. 이런 학도병들이 전투를 하고 있으니, 많은 희생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부대에서 살아남은 사람을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말은 후에 포항전투에 참석했다 돌아온 사람에게서 들었다.
그런가 하면 추풍령을 지나, 낙동강으로 밀어붙였던 인민군은 낙동강을 경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의용군으로 끌려갔던 남한의 젊은이들이 인민군과 더불어 이 전투에 대거 투입되었다. 남진을 하려면 낙동강을 건너지 않고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낙동강을 경계로 진을 치고 있던 인민군이 이곳에 다 모여 있었다. 이런 좋은 기회를 유엔군에서 놓칠 리가 없었다. B29 중폭격기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많이 떠 5m 간격으로 포탄을 퍼부었다고 한다. 이때 희생된 인민군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희생된 인민군의 피가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강물이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그런 죽음을 무릅쓰고 인민군들은 낙동강을 넘어 왜관에까지 남진을 하였으니, 인민군들의 죽은 수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노도와도 같이 밀어붙이던 인민군들도, 인천과 원산 앞바다에서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작전을 펴며 쏘아 대는 유엔군의 함포사격과 상륙 작전으로 허리가 잘리고 나자 맥을 추지 못 하고 북쪽을 향해 밤을 틈타 도망칠 수밖엔 없었다.
밤이 되었다. 마당에 나와 뒷산 능선을 바라보니, 인민군 패잔병들이 시작도 끝도 없이 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저녁 어두워질 무렵부터 새벽 날이 훤히 샐 때까지 계속되었다. 약 열흘 정도 이런 현상은 계속되었다. 얼마나 많은 패잔병들이 지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이들이 다행히도 마을로 내려오지 않고 산 능선을 타고 도망친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산이 끊긴 곳에서는 들로 지나갈 수밖에 없어 밭으로 논으로 지나갔다. 패잔병이 지나간 논과 밭은 큰 길이 생겨났다. 곡식은 전부 쓸어져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건너 마을 40대 후반쯤 되는 어른이 패잔병들에게 잡혀갔다. 데리고 갈 때는 우리가 이북으로 가는 길을 모르니, 길 안내를 좀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길을 적당히 안내하고 돌아올 줄 알았던 그는 끝내 돌아오지 못 했다. 패잔병들이 다 지나갔다. 동네 사람들이 그를 찾아 나섰다. 패잔병들이 흔적을 크게 남기고 지나간 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약 3km 쯤 되는 곳에 그의 시신이 길가에 쓸어져 있었다. 그곳에서부터 길을 안내할 수 없게 되자 살해하고 버리고 간 것이다. 객사를 했다고 해서 시신을 집에 들이지 않고 밖에서 장례를 치렀다. 이렇게 당한 사람은 패잔병들이 도망친 루트에는 여러 명이 있었다.
안내를 해줘서 고맙게 생각하고 곱게 집으로 돌려보내 주어야 하는 것이 상례이겠으나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고 죽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살려서 돌려보내면 패잔병들이 어디를 통해서 어디로 도망쳤다는 것을 군관에 알려 줄까봐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전쟁이란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다른 방도가 없는 것인가 보다.
* 9 ․ 28 수복과 상경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한 유엔군은 인민군 공격 루트의 허리를 잘라 서울을 향했고, 남으로부터는 유엔군과 국군들이 북으로 밀고 와 9월 28일에 드디어 서울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중앙청 돌탑 위에 걸려 있던 인공기를 끌어내리고 태극기를 다시 게양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서울은 다시 자유세계의 품으로 돌아왔다.
당시 서울의 상황은 폭격과 총탄의 세례를 받아 큰 건물마다 성한 것이 별로 없었다.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건물, 지붕만 날아간 건물, 유리창만 날아간 건물, 한쪽만 파괴된 건물,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폭삭 주저앉은 건물들로 성한 집이라고는 거의 없을 정도였다. 중앙청과 같이 돌로 튼튼하게 지은 건물도 유리창이 다 깨지고, 벽의 돌이 부분적으로 파괴되어 볼썽사나웠다. 우리의 돈을 관리했던 한국은행도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백화점 건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의 거리도 부분적으로 웅덩이가 파져 있었다.
서울을 함락한 국군과 유엔군은 북을 향해 계속 진격했다. 개성을 함락하고, 평양을 함락하고, 정주를 함락하고, 만포진에 이르렀다. 동쪽으로는 길주, 청진, 혜산진까지 진격해 압록강 물을 퍼마셨다.
이렇게 파죽지세로 북진을 계속하자, 다시 국군이 밀려 내려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 하고 우리 식구는 서울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아버지는 서울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10월말 경에 상경하셨고, 나는 약 한 달쯤 뒤인 12월에 아버지로부터 상경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피난 갈 때와는 달리 상경할 때에는 기차를 타고 갔다. 병천서 천안까지 약 19km는 버스가 다니지 않아 걸어서 갔다. 당시는 전시이기 때문에 일정한 기차 시간이 없었다. 몇 시간이고 기다리다 기차가 도착하면 승차했다. 서너 시간 기다린 것 같았다. 기차가 도착된다는 안내 방송을 듣고 부지런히 기차에 올랐다. 타고 보니 승객들이 얼마나 많던지 설 곳도 제대로 없었다. 올라가는 계단에까지 사람들이 매달렸다. 피곤하면 쭈그리고 앉았다가, 오금이 저려오면 다시 일어서기를 수없이 했다. 천안서 서울까지는 직산, 성환, 평택, 서정리, 오산, 병점, 수원, 군포, 안양, 시흥, 영등포, 많은 역이 있었고, 기차는 이 역마다 모두 쉬었다.
천안역을 출발한 기차는 그 많은 역마다 쉬면서 영등포역에 도착한 것은 사흘 뒤였다. 기차는 달리는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더 많았다. 달려가다가 쉬게 되면, 사람들은 일제히 기차에서 내려 점심을 짓고, 저녁을 짓고, 아침을 지어 먹었다. 겨울이라 추워서 담요나 얇은 이부자리를 덮고 의자에 혹은 바닥에 눕고 앉고 하면서 몸으로 스며드는 추위를 이겨냈다. 드디어 영등포역에 도착했다.
한강철교가 절단되어 서울역까지는 갈 수 없었다. 영등포역에서 내려 걷다가 한강이 나오자 배를 타고 건넜다. 그리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용산, 삼각지, 남영동, 용산중학교 입구를 거쳐 후암동 집에 도착했다.
* 후암동 집 포격
후암동 집은 남산 중턱에 있었다. 집에 도착해 보니, 이층집 한 구석이 크게 허물어졌다. 집이 쓰러져 주저앉기 직전이었다. 겨우 지탱하고 있다는 표현이 옳았다. 영등포와 노량진에서 서울의 인민군을 향해 국군이 쏟아 부은 포탄에 맞아 허물어진 것이다. 그 좋았던 2층 가옥이 엉망이 되었다. 마음이 심란했다. 집 옆 채마밭을 보니, 두 군데 흙이 모아져 있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시신을 묻은 자리였다.
6 ․ 25 사변 전에 집에 전세를 놓았었는데, 전쟁 중에도 피란 가지 않고 있다가 인민군들이 들어오자, 인민군 치하에서 동네 반장을 지냈다고 한다. 그의 딸은 여성동맹 위원 노릇을 하면서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국군과 경찰이 서울에 들어와 공산당에 협조한 사람을 색출하게 되었는데, 이때 발각 되었다. 딸은 어디론가 숨어서 죽음을 면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잡혀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해 이곳에 묻힌 것이다. 그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 집에 들어가기가 무서웠다.
그 동네에는 일제치하에 파놓은 방공호가 여러 개 있었다. 우리 집에서 네 번째쯤 위에 유재승 박사(그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공학 박사가 둘밖에 없었는데 그 중의 한 분이다. 독일 여자와 결혼해서 살았으며, 슬하에는 딸 둘에 아들 하나가 있었다. 모니카 유 자매와 윤복희와 결혼해서 살던 가수 유주용이다. 이들의 생김새는 독일인을 닮았다.)의 집 뒤에는 수십 명이 들어가 피할 수 있는 아주 큰 방공호가 있었다. 그 방공호에 시신이 가득 차 있었다. 인민군들이 붙잡았던 남한 인사들을 죽여 이곳에 집어던지고 갔다고 한다. 국군이 서울에 들어오면서 공산 정권에 협조한 사람들을 총살해 그곳에 또 집어던졌다는 것이다. 방공호마다 거의 시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앞이 캄캄해 졌다. 사람의 목숨이 개, 돼지만도 못 한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서글프기 짝이 없었다.
* 9 ․ 28 이후의 학교
서울이 수복되고 난 후 처음으로 학교에 갔다. 선생들도 몇 명 눈에 띄지 않았다. 눈에 띄지 않는 선생 중에는 전쟁이 나자 인민군에 대항하여 전쟁을 하기 위해 학생들과 함께 학도병으로 나간 경우가 있었고, 또 다른 경우는 인민군 치하에서 학생들을 의용군으로 데리고 갈 때 함께 끌려간 선생도 있었다.
같이 학교를 다니거나 선생으로 근무했던 사람들이 인민군의 남침으로 하루아침에 동료와 친구들이 영문도 모른 채 서로 적이 되어 총부리를 겨누고 오래 전부터 원수였던 것처럼 죽이고 살리는 처지가 됐으니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二律背反的)이며 아이러니한 일인가?
학생들도 오분의 일 정도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전쟁 중에 학교에 간 것이어서 한적하고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선생과 학생들 모두 기쁜 표정을 짓는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변으로 인해 책과 노트는 전부 분실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냥 몸만 왔다 갔다 하는 정도였다. 공부가 될 리 없었다. 전쟁 중이니까 학교에 가면 그래도 무슨 신통한 소식이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냥 등교하곤 했다. 이렇게 한지 열흘 정도 되었다. 바로 겨울방학이 되었기 때문이다.
* 1 ․ 4 후퇴
국군과 유엔군은 동으로 함경남도 혜산진을 함락하고, 함경북도로 진격을 계속하고 있었다. 중북으로는 만포진(중강진)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서쪽으로는 정주를 거쳐 신의주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12월 하순경이 되자 중공군(中共軍)이 한반도의 전선에 참전하면서 전세(戰勢)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인해전술(人海戰術)을 이용하여 주로 밤에 아군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밤중에 징과 꽹가리를 치고 피리를 불면서 포위하고 공격해 왔다. 밤중이라 이런 일이 벌어지는 방향을 알 수가 없었다. 중공군은 몇 십만인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불안에 빠진 아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아침이나 저녁 무렵 중공군이 진지를 향해 밀려오는 것을 보고, 기관총으로 인정사정없이 사격을 했다. 그들은 쓰러지기 시작했다. 앞에서 쓰러지면, 그 뒤에서 계속해 밀고 나왔다. 얼마나 많은 중공군이 죽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계속해서 밀고 내려왔다. 나중에는 기가 질려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어 국군은 밀리고 밀려서 다시 인민군과 중공군은 서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서울에 와 있던 시민들은 다시 피난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 와 있던 정부도 다시 피난을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1 ․ 4 후퇴(1951. 1. 4)다.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나도 다시 피란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한글학회의 일을 마무리 짓고 내려오려면, 며칠 늦겠다고 하셔서 나 혼자 피란길에 오르게 됐다. 아버지는 나에게 한글학회의 ‘우리말큰사전’ 원고를 가지고 고향으로 가라고 해서 짊어지고 길을 나섰다.
우리말 큰사전 원고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그것도 모자라 우리말과 글을 말살하려고 들자, 조선어학회(한글학회의 전신)를 중심으로 한 한글학자들이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1929년부터 광복을 되찾을 때(1945)까지 수집 ․ 정리해 놓은 우리나라 최대의 우리말 사전의 원고이다.
조선어학회에서 큰사전 원고를 애초에 두 질을 만들었다. 6권 중 1,2,3권은 사변 전에 출간이 됐고, 나머지 부분의 원고 한 질은 외솔 최현배 선생이 고향인 경남 울산으로 가지고 피란하셨고, 나머지 한 질은 나의 고향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라 나누어 보관하기로 하였다. 사변이 끝난 후 원고를 서로 서울로 가지고 갔다.. 그 원고를 기본으로 우리말 큰사전 4,5,6권은 1957년 10월 9일 한글날을 기해 완간되었다.
아버지는 피란 다니면서 학식이 높은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말 큰 사전 원고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고는 만일 내가 피란 중에 사고가 날 경우에는 원고를 한글학회에 알려 큰사전을 완성하는데 도움이 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셨다. 사고가 없이 후에 사전을 완간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한강 다리는 인도교, 철교 할 것 없이 비행기 폭격으로 인해 끊겨 있었던 그 상태대로였다. 겨울이라 한강은 꽁꽁 얼어붙었다. 수천 명이 걸어 다녀도 깨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도 걸어서 한강을 건넜다. 노량진을 거쳐 영등포역에 도착했다. 차표를 미리 끊어 놓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떠나는 차가 있으면 아무기차나 타야 했다. 오후 2시경 화물열차가 출발해서 뚜껑도 없는 기차를 탔다.
타고 보니, 일선으로 포탄과 탄약을 싣고 다니던 칸이었다. 그날따라 눈이 많이 내리고 몹시 추웠다. 포탄 탄피 위에 쪼그리고 앉아서 눈을 맞으며 내려왔다. 기차는 간이역까지도 빼놓지 않고 쉬는데, 출발 시간은 기약이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추워서 못 견딜 정도인데, 기차가 달리면 더욱 추워 견디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사람들의 입 언저리에는 성에가 껴 있고, 숨 쉴 적마다 담배를 피우는 것 같이 김이 나왔다. 평상시 같으면 낭만적인 분위기이겠지만 그런 느낌이 들기에는 너무나 살벌했다. 화약을 싣던 칸이기 때문에 잘못 하여 폭발이 될까 해서 담배 피우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담배 피우는 것을 자제하였다.
천안역에 도착한 것은 밤 12시경이었다. 아버지는 아무래도 밤중에 천안에 도착하게 될 테니, 그렇게 되거든 6촌 누이가 천안에 살고 있으니, 그곳을 찾아가서 자라고 말했다. 그렇게 할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전쟁 중이라 가로등 불빛도 없는데, 몇 번이고 길을 오르내리다가 순경의 단속에 걸렸다.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었기 때문에 밤 12시만 되면 아무도 길을 다닐 수 없었다. 사정 얘기를 했더니 가라고 해서 겨우 집을 찾았다. 한 밤중이니 대문을 두드리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추운 날씨에 길거리에서 잘 수는 없었기 때문에 마음을 굳게 먹고 대문을 두드렸다. 잠을 자고 있는지 인기척이 없었다. 두드리는 것을 알고 있다고 쳐도 전쟁 중이니 누군들 문을 쉽게 열어 주었겠는가. 두드리는 것 가지고는 대문이 열릴 것 같지 않아서, 이번에는 발로 찼다. 10여분 동안 이렇게 하자 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거 누구유?”
“도연네 집이 맞습니까?”
“야, 그런디유?”
“나는 고동골댁 손잡니다. 피난 가는 길인데, 천안역에 한 밤중에 도착해서 찾아 왔습니 다. 늦게 도착하면 누님을 찾아가라고 해서 염치불문하고 찾아 왔습니다.
“어서 들어와유. (내 손을 만지면서) 그래 얼마나 추웠어? 이불 속에 손을 녹여유. 배고프 지 않아? 내 밥을 가져 올 테니 한 술 떠 봐.”
극구 사양을 해도 굳이 가져와서 너무나도 고맙게, 맛있게 먹고 잤다.
친누이보다도 더 반갑게 대해 주어서 지금도 그때 그 누이의 온기가 내 몸에서 살아지지 않고 있는 것을 느낀다. 아침 일찍 밥을 먹고, 원고를 짊어지고 고향으로 향하려 하자 누이는 피곤할 텐데 하루 더 쉬었다가라는 것이다. 중공군이 아직 천안까지 밀고 내려오지 않았으니 쉬었다 가도 괜찮다는 것이다. 나는 마음이 바빠 고집을 피워 고향으로 출발했다. 천안에서 고향까지는 약 19km에 이른다. 우리말큰사전 원고를 짊어지고 쉬고 또 쉬고 하면서 고향에 도착하니, 어둡기 시작했다. 이때 고향 내 집에는 넷째 작은어머니가 살고 계셨다. 고향 집에서는 내가 태어났고 어린 시절 자란 곳이다. 내가 도착하자 친어머니 못지않게 반가워했다. 나보다 일주일쯤 뒤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고향에 도착하셨다.
고향에 도착해서 며칠을 보내니, 서울이 다시 괴뢰군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그리고 남으로 진군한다는 소식이다. 먼저 인민군 치하에서 고향 생활을 하다 죽을 번했던 생각이 났다. 피란 가지 않고 고향에 있다가 인민군들이 또 통치하게 되면 이제는 틀림없이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피란 가기로 결심하셨다.
아버지는 도착한 다음날 여기서도 또 피란을 가야 되기 때문에 ‘큰 사전’ 원고를 인민군들이 내려와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겨 놓아야 한다고 하면서, 사랑채 밑에 큰 구덩이를 동네 사람들도 모르게 파고 큰항아리를 묻고 그 속에 원고를 집어넣고 뚜껑을 잘 닫고 묻었다. 아버지는 둘째 작은아버지에게 같이 피란 갈 것을 종용했다. 작은아버지는 피란 가서 농사꾼이 살 곳이 어디 있느냐며 극구 사양하셨다. 그러나 여기 있다가 큰일 당하는 것보다 피난 가서 고생하는 것이 그래도 낫다고 하시면서 끝까지 설득한 결과 같이 피란길에 오르기로 했다. 피란길에 오른 사람은 아버지, 어머니, 나,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순상, 성식, 현식 모두 아홉 명이었다.
* 고향에서 남으로
우리는 둘째 작은아버지 식구와 같이 당장 입고 먹을 것을 챙겨 소에다 가득 싣고, 그리고 사람이 지고 갈 만한 것은 지고 고향도 등진 채 부산으로 향해 떠났다. 송정리, 강정이, 번골, 오창을 지나 청주에 도착했다. 청주를 지나 보은 나들이길 근처에 이르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가는 것은 무리여서 그곳에서 쉬어 가기로 했다. 쉴 집을 여기저기 물색하였으나, 피난민들로 가득 차 아무리 잘 곳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궁리 끝에 뜰에 앉아서라도 자야겠다고 마음먹고 자려고 했다. 너무 추워서 도저히 잘 수 없었다. 옆을 보니, 소여물간이 있어 들어가 보았다. 바람이 별로 없었다. 뜰보다는 이곳이 나을 것 같았다. 식구들 반 정도는 이곳에서 자기로 했다. 여물을 덮고 있으니까 솜이불을 덮은 것처럼 따뜻했다. 웬만한 초가 안방에서 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여자들은 바가지를 들고 동네 집을 다니면서 밥을 얻어왔고 그것을 우리는 맛있게 먹었다. 워낙 많은 피란민들이 밥을 얻어먹으면서 피란을 가고 있으니 밥을 얻어먹는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밥을 못 얻게 되자 어머니는 땅에 주저앉아 신세한탄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워낙 험악한 세상인지라 누구 하나 가엽게 거들떠보는 사람도 없었다.
부산으로 가려고 했으나, 그 길은 군인들이 전투준비를 하느라 바쁘기 때문에 길이 막혀 갈 수가 없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보은 쪽으로 가지 못 하고 방향을 틀어 회인으로 향했다. 간밤에 눈이 많이 내렸다. 길을 걸으려니 미끄러워 잘 걸을 수가 없었다. 겨우 동네를 벗어나 큰길에 이르렀다. 길을 보니 눈이 많이 내린데다 군용트럭이 질주하여 길은 곤죽이 되어 있었다. 이곳부터는 길보다 논이 양쪽 다 낮았다. 좌우에는 4~5m의 언덕이었다. 길이 아무리 나빠도 피란을 가지 않을 수가 없어서 그대로 떠나기로 했다. 가면서 보니 트럭이 지나갈 적마다 흙 곤죽이 양쪽으로 튀었다. 배가 물 위를 지나갈 때, 물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것과 같았다. 곤죽이 덜 튀는 곳에서 트럭이 지나가는 것을 피했다가 다시 가곤 했다. 높은 길을 1/3쯤 갔을 때다. 군용트럭 세 대가 달려왔다. 흙 곤죽을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흙 곤죽이 물살을 갈랐다. 나는 길 아래로 피해 급히 내려갔다. 내려가다 미끄러져 짐을 진 채 그만 구르고 말았다. 짐은 머리 위를 지나 논바닥에 내동이쳐졌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아래 논에서 한동안 서 있다가 둑을 오르려고 했다. 미끄러워 올라갈 수가 없었다.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지고 하면서 겨우 길 위로 올라왔다. 좀 천천히 달리지 나쁜 놈들 같으니. 아무리 전쟁도 좋지만 국민들을 위해 싸워야 할 것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길을 꽉 메운 피란민들을 피해가면서 전쟁을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니, 내 욕심만 떠올린 것 같아 참자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머지 뚝방길은 트럭이 지나가도 피하지 않고 흙 곤죽을 뒤집어 쓴 채 그냥 걸었다. 온 몸은 흙 두베기가 됐다. 발은 흙에 빠져 엉망이 되었다. 식식거리며 뚝방길을 다 지난 우리는 보은으로 해서 부산으로 가려고 했으나, 그곳을 가려면 피발령 고개라는 큰 고개를 넘어야 했다.
고개가 시작되는 곳에서 쉬어 힘을 비축하기로 했다. 쉬니까 진흙탕에 빠졌던 발이 너무 시려 견딜 수 없었다.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고갯길은 처음은 완만해서 걸을 만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경사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숨을 몰아쉬며 올라가고, 쉬고 또 올라가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 후 오후 2시경에 고개 마루에 도착했다. 점심은 굶었다. 고개를 올라가는 동안은 땀이 많이 흘렀지만, 쉬는 동안에는 땀이 식자 추워지기 시작했다. 바람까지 우리를 괴롭혔다. 잠깐 쉬고는 이어 고개를 내려갔다. 오후 5시경에 회인에 도착했다. 회인읍을 벗어나 시골 마을로 들어갔다.
어느 초가에 들어가니 아무도 없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집주인도 오늘 아침에 피란 갔다고 한다. 집안을 둘러보니 광에는 고구마가 가득 있었다. 우리는 생각 끝에 주인이 없으니 눈치는 보이지만 동네 사람들의 허락을 받고라도 고구마를 쪄 먹기로 하였다. 동네 사람들은 주인도 피란을 갔으니, 댁들이 안 먹어도 다른 사람들이 먹게 될 것 아니냐며 순순히 허락했다. 배고프던 차에 아주 좋아서 가마솥에 물을 약간 붓고 고구마를 물에 닦아 우리가 먹을 만큼 찌고 있었다.
그런데 피란 갔다던 주인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 주인은 우리에게 말했다.
우리 : “피란 가는 사람입니까?.”
주인 : “당신들 누구슈? 뭐 하는 거유?”
말하는 투나 행동으로 보아 주인이 틀림없었다. 우리는 주인이시냐고 물었다. 퉁명스레 그렇다고 했다. 우리는 말했다.
우리 : “점심을 굶고 지금까지 견디다 보니, 너무 배가 고파서 주인어른의 허락도 받지 못하고 고구마를 찌고 있습니다. 피란을 가셨다고 해서 동네 사람들에게 물 어보고 괜찮다고 해서 고구마를 찌고 있습니다. 대단히 죄송하게 됐습니다.”
주인 : “그래두 그렇지 남의 물건에 손을 대면 어떻게 하는 거유?”
우리 : “대단히 죄송하게 됐습니다.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평생 그 은 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몇 번이고 사죄를 했다.
주인 : (급기야 주인도 안 됐던지 허락을 하면서) “나라가 어지러울 때이니 우리 가 다 같이 나눠 먹어야지 어떻게 한 대유?”
라고 하면서 마음을 열어 놓았다. 너무나 고마웠다.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면서 찐 고구마를 주인과 같이 나눠 먹으면서 밤이 깊도록 피란에 관한 이야기,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다정하게 나눴다.
그 다음날은 노독이 나서 주인의 허락을 받고 하루 더 쉬기로 했다. 그 날 저녁이었다. 볼 일이 있어 화장실을 갔다. 화장실은 마당 건너 끝에 있었다. 일을 보다 보니 안채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일을 보는 둥 마는 둥하고 “불야! 불야!를 외치면서 물을 떠날라 모인 사람들이 불을 껐다. 불은 아궁이에서 나무 쌓아 놓은 곳으로 옮겨 붙고 있었다. 불은 다행히도 잡혔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우리가 하루 더 쉬지 않고 떠났더라면 어찌 됐겠는가? 주인은 우리에게 고마운 인사를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우리는 큰일을 막아 주인에게 조금이나마 보답한 것 같아 기뻤다.
그 다음날 우리는 영동(永洞)으로 향했다. 영동으로 가는 큰길에 이르자 민간인은 다닐 수가 없다고 했다. 알고 보니 군용차들이 군인과 군용물자를 실어 나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산으로 피란 가려는 꿈은 여기에서 접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옥천(沃川)으로 다시 방향을 틀러 거슬러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작은아버지는 시골에서 농사만 짓는 분이라서인지, 처량한 신세한탄을 하면서 죽어도 고향에 가서 죽을 테니 형님네나 피란을 가라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극진한 만류를 뿌리치고 작은아버지는 식구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제부터는 우리 식구들만 남았다.
옥천에 도착해 보니 그곳에서도 머무를 곳이 마땅치 않아 대전으로 거슬러 올라오고 말았다. 대전에는 마침 아버지의 친구이면서 큰 고모의 사촌시동생이 살고 있어 물어물어 찾아갔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대전시 동구 신흥동(大田市 東區 新興洞) 17번지였다. 도착한 날로부터 며칠 동안은 주인집에서 먹을 것을 대 줘 잘 견뎠다. 그러나 주인한테 신세를 계속 질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대로 호구지책(糊口之策)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어 궁리를 했다. 마침 아버지가 일가 사람한테 피란 오기 직전에 종곡을 선물 받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팔기로 하였다. 6천환을 받았다. 그 후에 화폐개혁이 두 번 있었으니까 지금으로 따지면, 얼마 정도인지 알 수가 없다.
* 종곡은 옛날 술 만들 때에 사용하던 누룩과 같은 것인데, 개량해서 성능이 아주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에는 6천환이면 좌판장사는 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나는 그 돈으로 좌판을 하나 샀다. 고운 겨로 만든 까만 비누와 초를 샀다. 처음에는 이 둘만을 가지고 신흥동 시장입구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전쟁 중이라서 전기불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초는 그런 대로 팔렸다. 비누도 시꺼먼 것이 보잘것없는 것이었지만 그런 대로 팔렸다. 그러나 이 두 가지만으로는 목구멍에 풀칠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나와 같이 그곳에서 피란생활을 하고 있던 이경환(큰고모의 삼촌 조카이면서 아버지가 그 천안경찰서장을 지낸 이석배 씨이다. 이경욱(나의 고종사촌 동생)의 사촌 형)과 주인 집 아들인 이광범과 함께 좌판장사를 했다. 그 친구와 같이 신흥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양담배와 초콜릿을 받아서 팔았다. 그 물건이 가세하니 겨우 먹고 지낼 정도 벌이는 되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물건을 사용하거나 팔 경우 발각되면, 처벌을 받기 때문에 이런 물건들은 좌판 밑에 숨겨 놓고 암암리에 팔았다.
이때 어머니는 시장에 가서 콩나물 장사를 하셨다. 밤에는 식구들이 모여 앉아 나무에 매달린 과실을 싸주는 봉투를 만들어 팔았다. 이렇게 세 달 정도 지냈다. 그런 정도의 장사만으로는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 이웃의 권고를 받아들여 가짜 담배를 만들어 팔기로 하고 담배 만드는 틀을 샀다. 처음에는 매끈하게 만들어 지지 않아 실수를 많이 했다. 그러나 며칠 가지 않아 진짜 담배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잘 만들었다. 담배는 전매청에서만 만들어 팔아야 하는 것인데, 일반인이 만들어 팔게 되면 전매사업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게 된다.
나는 몰래 만든 가짜 담배를 들고 이번에는 신흥시장보다 규모가 훨씬 큰 대전 중앙시장으로 진출했다. “담배 사려, 담배 사려”를 연발 외치면서 팔았다. 좌판 장사를 하는 것보다 몇 갑절 수입이 늘어났다. 순경이 나타나면 붙잡히지 않으려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순경이 살아지면 또 시장 바닥에 나타나 “담배 사려”를 몇 번이고 외치면서 시장을 누비고 다녔다.
그 당시 대전은 인민군과의 치열한 전투로 인해 변두리에 있는 개인 주택이 몇 남아있을 뿐 중앙지대에 있는 건물들은 폭삭 무너진 상태였다.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극장의 굴뚝과 큰 건물들의 앙상한 벽뿐이었다. 그래도 피란민들이 워낙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먹고살기 위해 시장은 북적거렸다. 그 덕분에 우리는 6개월 남짓 대전에서의 피난생활을 그런 대로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이후에는 인민군들이 평택까지 쳐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괴뢰군은 다시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런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울은 아군에 의해 다시 탈환되었다. 서부 전선은 임진강, 중부전선은 동두천, 동부 전선은 춘천과 강릉을 경계로 하여 낮에는 공군력을 이용한 아군이 밀고 올라갔고, 밤에는 야음을 틈타 괴뢰군이 밀고 내려오기를 장기간 했다. 더 이상은 밀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다. 장사할 때 쓰던 도구는 전부 처분한 채 우리는 대전을 떠났다. 마음속으로는 몹시 서운했으나, 후련한 마음도 들었다. 약 6개월 동안의 한 많은 대전 생활은 이로써 끝이 나게 되었다. 고향으로 간다고 해도 신통할 것은 조금도 없었다. 서울로 돌아갈 수 없으니, 마지못해 가는 고향이었다. 대전역을 지나 회덕을 거쳐 신탄진, 부강, 조치원, 전동, 수신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에 도착하니 피란길에서 먼저 돌라온 둘째작은아버지 내외분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후부터 4년 동안 나는 고향에서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 고향에서의 피란 생활(2)
우리가 고향에 도착한 때는 가을이었다. 가을이다 보니, 농사를 지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작은아버지는 우리에게 쌀 1가마와 보리쌀 1가마를 주셨다. 우리 네 식구가 이것을 가지고 견딜 수 있는 기간은 두 달이 채 안 되었다. 다음해 봄까지는 어떻게든지 버텨야 했다. 그래야 전에 아버지가 산 농토를 작은아버지로부터 돌려받아 조금이나마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으로 끼니를 때운 때가 빈번했다. 한편 아버지는 동네 아이들에게 한문(漢文)을 가르치시기로 했다. 아이들은 의외로 10여명이 되었다. 국민학생, 중 ․ 고등학생들이었다. 배운 대가로 아이들 부모는 보리쌀, 감자, 호박, 옥수수 등을 가져왔다. 그런 것을 가지고 겨울을 그런 대로 날 수 있었다.
나도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한문을 배웠다. 배우는 방법은 옛날 서당에서와 같았다. 아버지는 옆에 채찍을 놓고, 가부좌를 하고 앉아 목청 높여 가르쳐 준 대로 책을 읽도록 하셨다. 아이들은 대체로 잘 따라 했다. 그러나 개중에는 장난을 치다 아버지한테 야단을 맞는 경우도 있었다. 아버지는 한문만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 옛날 훌륭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때때로 말해 주셨다. 한 번 들을 때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예절 교육을 받다 보니, 아이들의 행실이 많이 달라졌다. 그때 진도를 많이 나간 아이들은 맹자까지 나갔다. 짧은 기간 동안이지만 성과는 컸다.
나는 한문을 처음 배우기 때문에 천자문에서 시작했다. 천자문은 한문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한테 가장 기초가 되는 한자 1,000자를 골라 뜻이 통하도록 만든 기초 한자서이다. 천자문 제일 앞에 나오는 天地玄黃, 하늘 천, 따지, 검을현, 누를황과 천지현황을 번갈아 가면서 소리 높이 외치기 시작했다. 바로 다음에 나오는 宇宙洪荒, 日月盈昃, 辰宿列張, 寒來暑往, 秋收冬藏을 차례대로 그렇게 또 외웠다. 한 달 남짓해서 천자문 맨 끝에 나오는 焉哉乎也까지 딸딸 외웠다. 천자문을 다 마쳤을 때 나의 기쁨은 하늘을 날 것 같았다.
뒤이어 ‘계몽편’(啓蒙篇)을 배웠다. 계몽편은 조선 시대 서당이나 향교에서 학동(學童)들에게 천자문 다음으로 가르치는 교재다. 책이름에 나타나듯이 ‘계몽’ 즉 교훈적인 것을 주로 다룬 교재이다. 그 내용은 수편(首篇), 천편(天篇), 지편(址篇), 물편(物篇), 인편(人篇)으로 구성되었으며, 문장이 짧고 내용이 비교적 쉽다. “上有天 下有地 天地之間 有人焉 有萬物焉……”로 시작된다. “위에는 하늘이 있고 아래에는 땅이 있으며 하늘과 땅 사이에는 사람이 있고 만물이 있으니……”라는 풀이와 함께 역시 목청 높여 외웠다. 천자문을 배워서인지는 몰라도 천자문을 암기하는 것보다 쉽게 느껴졌다. 얼마 안 되는 양이라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은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웠다. ‘동몽선습’은 학동들의 계몽을 위해 우선적으로 배우는 책으로, 박세무(朴世茂)가 숙종대왕의 명을 받아 지은 책이다. ‘동몽선습’은 ‘계몽’을 위한 학습이라는 점에서는 ‘계몽편’과 유사하다고 하겠으나, 문장이 계몽편보다는 좀 어려워 그 다음으로 배우는 책이다.
제일 앞에 나오는 “天地之間 萬物之衆 惟人而最貴 所貴乎人者 以其有五倫也 是故 孟子曰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에서부터 끝까지 열심히 배웠다. 단계적으로 배워나가기 때문에 그리 어려움을 느끼지는 못 했다. ‘동몽선습’ 다음으로는 ‘明心寶鑑’을 배워야 하나 배우지 않고 ‘小學’으로 건너뛰었다. 물론 아버지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한 가지는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갈 때가 다가와서 ‘소학’(小學)까지는 진도를 나가게 하고 싶으셨던 것과 ‘소학’으로 건너뛰어도 충분히 소화해 낼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이유에서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小學’은 ‘四書三經’ 중에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귀감(龜鑑)이 될 만한 것을 뽑아 내용을 분류하여 놓은 한서(漢書)이다.
* 나에게 할아버지인 삼수공(三羞公) 봉석(鳳錫)은 평생을 소학을 존중하여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사셨다.
소학부터는 제법 문장이 어렵고 한문 배우는 맛이 났다. 그 내용은 효종 14년(1187)에 유자징(劉子澄)이 그의 스승인 남송(南宋)의 주자(朱子)의 지도를 받아 편찬한 것으로, 어린이들에게 수신(修身)과 예절, 충(忠), 효(孝), 신(信) 등을 가르치기 위해, 예기(禮記), 논어(論語) 등에서 가려 뽑아 편찬한 것으로 일종의 수신서(修身書)이다.
그 내용은 6권 5책으로 되어 있다. ‘小學’도 “古者小學 敎人而灑掃應對進退之節……”로 시작된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보면 맞지 않는 것도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생활해 나가는 데에 유익한 내용이 너무 많아 그 내용을 실생활에 익히도록 노력하면서 열심히 배웠다.
한문 공부만 하고 1년 동안 학교를 다니지 않고 쉬었다. 학교를 쉬는 동안 아버지가 서울 올라가시기 전, 그러니까 3학년 중간쯤 되었을 때다. 약 1년 반 동안 한문을 배웠다. 그때 배운 한자 실력이 대학을 다닐 때까지도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피란과 아버지의 덕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성식(四寸)과 같이 산에 가 나무를 했다. 처음에는 뒷동산에 올라가 나무를 했다. 지게는 어른들이 사용하는 큰 것이었다. 나는 열여섯 살이라고는 하지만 그때는 키가 작은 편이었다. 그런 나에게 어른들이 사용하는 지게는 너무나 컸다. 산에서 소나무를 잘라 가득히 지게에 얹고 지고 내려왔다. 지게가 너무 커 처음에는 고생을 많이 했다.
동네 뒷산에 가 소나무를 베어 지게에 욕심껏 지고 산을 내려오는데, 지게다리가 너무 길어 언덕에 걸렸다. 지게를 등에 진 채 360° 한 바퀴 굴러 떨어졌다. 힘에 부치는 것을 짊어지고 겨우 내려오다가 이런 일을 당하고 나니, 화가 나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눈물이 핑 돌았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흐트러진 나무를 추슬러 다시 겨우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 져 보는 지게인지라 흔들려서 겨우 집까지 도착했다. 어깨도 아프고 목줄도 당겼다. 그러나 나로서는 대견한 생각도 들었다. 생전 해 보지 않던 일을 성취한 보람이라고나 할까.
마르지 않은 소나무(청솔가지)를 아궁이에 넣고 불을 때니 잘 탈 까닭이 없었다. 아궁이가 불을 잘 빨아들이면 그런 대로 잘 타겠지만, 그렇지 못해 연기가 굴뚝을 통해서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 역류하여 아궁이로 되돌아 나오는 것이 훨씬 많았다. 그 연기를 들이마시면서 불을 때려니 섧지 않은 눈물만 났다. 부엌은 온통 연기에 그을린 그름으로 천장과 벽이 검게 되어 있었다. 이런 생활을 하지 않고는 밥을 해 먹을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추운 방에서 겨울을 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불을 때 봤자 안방 아랫목만 겨우 따뜻하다가 밤 열두 시도 안 되어 냉골이 되고 만다. 문은 제대로 맞지 않아 외풍이 술술 들어와 몸이 웅크러질 대로 웅크러져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추위와 싸우는 것이다. 잠을 자고 나도 잔 것 같지 않다.
동네 뒷산에 있는 나무는 동네 사람들과 내가 합세해 베어왔기 때문에 해올 나무가 전부 없어졌다. 민둥산이 된 것이다. 동네 앞산인 약사산(藥師山)에 가서 나무를 했다. 그곳도 두 달이 채 안되어 역시 민둥산이 됐다. 계속해서 일을 하고 나무를 하다 보니 기운이 제법 생겼다. 나중에는 나무하는 데에도 이골이 났다. 동네 근처 산에는 나무할 곳이 없어졌다. 드디어 20리가량 되는 작성산으로 지게를 지고 원정을 떠났다. 점심을 지게 다리에 매달고 매일 같이 그곳으로 갔다. 하루걸러 집에 가져다가 때기도 했고, 병천 장(아우내장터)에서 팔기도 했다. 이런 생활은 내가 고등학교 1학년말까지 계속되었으니 약 4년 동안 계속된 셈이다.
나중에는 고구마 온상을 해 고구마 농사를 지었다. 이 고장에는 고구마 농사를 별로 짓지 않았다. 아버지가 책방에 가 고구마 기르는 법에 대한 책을 사 오셨다. 고구마 농사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나의 사촌 동생인 흥식(興植)의 외삼촌인 정두석(鄭斗錫)씨와 상의하여 본격적으로 고구마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밭은 연태네 집 뒤 산기슭에 걸쳐 있는 조그마한 것이었다.
웅덩이를 파고 쇠똥, 오줌과 볏짚으로 썩혀 만든 퇴비다. 겨울에도 손을 그 속에 넣어 보면 뜨끈뜨끈하였다. 썩으면서 열이 나기 때문이었다. 그 거름을 웅덩이 밑에 깔고 흙을 덮었다. 또 그 위에 인분을 들어부었다. 그리고는 고운 흙으로 50cm 정도 고르게 덮었다. 그 속에 고구마를 눈을 중심으로 잘라 심었다. 날씨가 춥기 때문에 그대로 그냥 놔두면 얼어 죽기 때문에 짚으로 두껍게 덮어 주었다. 요즈음 같으면 비닐이 있어서 그것을 덮어 주면 되겠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것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짚을 두껍게 덮은 것이다. 얼마 되지 않아 고구마에서는 새순이 흙을 비집고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낮에는 계속해 물을 주었다. 싹은 쑥쑥 잘 자랐다. 이윽고 봄이 다가와 날씨가 따뜻해졌다. 온상에서 자란 고구마를 밭에 옮겨 심었다. 밭은 산기슭에 있는 것이라서 빨간 적토(赤土)로 되어 있었다.
날이 갈수록 고구마 줄기는 자라 덩굴을 이루게 되었다. 덩굴이 약 1M 정도 자라니까 초가을이 되었다. 흙을 비집어 고구마의 크기를 보니, 제법 실하게 자라 있었다. 열흘쯤 지나서 온 집안 식구들이 나서 고구마를 캤다. 아주 작은 밭인데도 24 가마나 캤다. 쪄서 먹어보니, 밤 맛보다도 더 맛이 좋았다. 4 가마만 남겨 놓고 전부 저장하기로 했다. 저장하는 방법을 몰라 정두석 씨의 자문을 받아 그대로 하기로 했다.
물이 나오지 않는 메마른 땅을 5-6m 정도 깊이 파고, 고구마를 그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공기가 통할 수 있도록 굴뚝을 만들어 밖으로 내 놓고 흙으로 덮었다. 겨울에는 춥기 때문에 파볼 수가 없어서 겨우내 그대로 두었다. 봄이 돼서 고구마를 꺼내려고 흙을 제쳤다. 싱싱한 고구마가 웅덩이 속에서 나올 것을 예상하면서. 그런데 조금 파니, 이상한 냄새가 났다. 아버지와 나는 자못 긴장하게 되었다. 흙을 파면 팔수록 냄새가 더 심하게 났다. 흙을 파내고 보니, 우리가 기대했던 고구마가 아니라 전부 썩어 흐느적거렸다. 그리고 냄새가 진동을 해 제대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한 해 농사가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이때 우리의 심정은 하늘이 꺼지는 것 같았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이렇게 허무할 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정이 떨어져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어떤 동네 아저씨가 녹말을 만들어 국수를 해 먹으면 될 것 같다는 의견을 내 놓아 차선책으로 그렇게 하기로 했다.
크고 넓은 그릇에 썩은 고구마를 떠다 가라앉혀 녹말을 만들기로했다. 아무리 별 수단을 써 녹말을 만들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은 퇴비장에 버려 퇴비를 만들고 말았다. 처음 짓는 농사라 모든 것이 서툴러 그렇게 됐으니 누구를 탓 하겠는가? 다음 해부터는 저장고를 만들지 않고 안 쓰는 방에다 그대로 저장을 했다. 고구마는 추위에 약해 조금만 얼어도 잘 썩었다. 그래도 방에 쌓아 저장하는 편이 훨씬 낳았다. 몇 해 동안 이런 식으로 저장해 겨울에 먹었다.
고구마 농사와 병행해 호박 온상을 했다. 호박은 재래종이 아니라 외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위에 좀 강한 편이었다. 봄에 이식을 하니 의외로 잘 자랐다. 덩굴이 뻗어나가는 대로 꽃이 피고 호박이 열렸다. 재래 호박과 같이 크게 자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탐스럽게 많이 달렸다. 남들보다 먼저 따는 호박이기 때문에 지게에 지고 시장에 내다 파니 잘 팔렸다. 아쉬운 대로 수입도 그런 대로 괜찮았다. 고구마와 호박을 팔아 번 돈으로 학비를 댔다. 교과서도 없이 공부하는 학비이지만, 나의 공부는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 병천중학교(竝川中學校) 생활
피난생활을 하다 보니 언제 서울로 다시 올라가게 될지 몰라 학교에도 들어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일 년을 쉴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학교에 들어간 것은 1953년 봄이었다. 그 동안 서울에서 내노라 하고 으스대며 학교를 다니던 내 신세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서울에서 2학년에 피난 내려왔기 때문에 다시 2학년으로 병천중학교에 들어갔다.
병천중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학교로부터 허락 받았으나, 모자, 교복, 가방, 책 등 어느 것 하나도 갖추어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학교에 가라는 것이다. 나는 학교에 갈 생각이 도저히 나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갈수 없었다. 갖추어진 것이라고는 전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학교에 가서 무엇을 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학교에 가지 않자, 아버지는 우격다짐으로 학교에 가라고 하셨다. 나는 안 가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아버지는 나를 때리려고 몽둥이를 들으셨다. 나는 동네 뒷동산으로 도망을 쳤다. 아버지는 뒤따라오시다가 포기하셨다. 나는 풀 위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얼마 동안을 울었는지 모른다. 결국 그날은 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러자 셋째작은어머니가 까만 물을 들인 담요로 모자를 만들어 주셨다. 책은 없이 노트를 한 권 사주어서 학교를 다니기로 했다. 내가 아무리 버텨봤자 나만 손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노트를 책보에 싸고,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담요로 만든 모자를 쓰고, 교복도 입지 못한 채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책이 없으니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숙제가 있을 경우에는 성식(사촌 동생)이 같은 학년이기 때문에 가서 빌려보았다. 그것도 당분간이었다. 자주 가니까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공부는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동네 맨 윗집에 사는 화상(華相, 일가 동생)에게 가서 숙제도 하며 공부를 했다.
시험 때가 되면 영어시험은 주로 해석하는 것이 출제되었기 때문에, 책이 없는 나는 화상에게 달려가 영어 참고서를 빌려 무조건 암기할 수밖에 없었다. 화상이도 공부를 해야 되기 때문에 내가 오랜 시간을 가지고 공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책을 빌려주면서 한 번도 싫어하는 눈치를 보이지 않아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참고서를 암기하다보니, 해석을 시작하는 곳은 알겠으나, 끝나는 부분을 잘 알 수 없어 어느 때는 지나쳐 해석하기도 했고, 어느 때는 덜 해석하기도 했다. 수학 같은 과목은 그래도 영어보다는 나았다.
학교에 들어가서 보니, 건물도 제대로 없어 초가집 비슷한 데서 중학교라고 인가를 내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니 무슨 공부가 되겠는가? 학교에 가면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병천 내(竝川川)에 가서 집 지을 때 쓰는 자갈을 들것에 실어 나르고, 작도로 짚을 썰어 흙으로 벽돌을 만들었다. 일하는 어른들은 벽돌을 쌓고, 학생들은 물, 흙, 짚을 섞어 흙벽돌을 만들었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학교 건물은 제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거의 한 학기가 지나자 건물은 완성됐다. 한 학년의 학생 수가 60여명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교실이 세 개 그리고 교무실 한 개만 있으면 됐다. 이렇게 해서 내가 공부할 교실을 지었다.
그러나 학교 분위기나 공부할 학용품이 전혀 없는데다 마음의 자세까지 잡히지 않아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집에서는 학교에 가기 전에 거름을 논과 밭에 지게로 져다 뿌렸다. 농사짓는 데에 거름으로 쓰기 위해서다. 게다가 곡식을 쌓아 놓을 곡간과 소를 기를 수 있는 외양간을 짓기 위해서 흙벽돌을 만들고 해서 같은 해에 집에서도 집을 한 채 지었다. 우물에 가 물도 길어 와야 했고, 밥 할 때 아궁이에 불도 때야 했다. 가을에는 칠월나무라고 해서 겨울준비 나무를 해야 했다. 여름에는 감자를 수확하고 가을에는 고구마와 벼를 수확해야 했다. 겨울에는 나무를 하기 위해 20리가 넘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하여, 하루는 집으로 가져오고, 하루는 병천시장에 가져다 팔고 했다. 이러다 보니, 손은 낫으로 찍히고, 나무에 긁혀서 엉망진창이 되었다.
공부를 한창 할 나이에 공부하고는 상관이 없는 이런 일들을 해야 했기에 그 갈등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불만을 토로할 상대도 없었다.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3학년을 마치고 졸업을 했다. 용산중학교 졸업장이 아닌 병천중학교 졸업장이었다.
신학기가 시작될 때가 다가왔다. 이때 아버지는 혼자 서울에 가 계셨다. 어머니와 나는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공부를 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었다. 나는 속으로 서울로 올라가 다닐 수 없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서울에 계신 아버지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병천고등학교(竝川高等學校)에 입학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로 올라갈 가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고등학생이 돼서도 시골서 농사를 지으면서 학교를 책 없이 다닐 수밖에 없는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동네 어른들에게 성실하다고 또 효자라고 칭찬을 받으면서 생활했다. 어린 마음이라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기분이 좋았다.
이런 생활은 1953년 가을까지 계속되었다. 가을이 되어 벼를 걷어 들이고 멍석을 깔고 타작기를 마당에 가져다 놓고 한창 타작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가 눈물을 글썽대고 나에게 편지 한 장을 건네주셨다. 타작을 하다 말고 편지를 읽었다. “네가 서울에 와서 공부를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으나, 나에게 돈이 없으니 네가 서울에 와서 공부한다면, 학비를 겨우 댈 수 있을 정도이고, 고향에서 공부를 한다면 참고서는 사줄 수가 있겠다. 그러니 네가 알아서 해라”라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를 보고는 어머니는 나 없이 농사지을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하셨던 모양이다. “네가 서울로 가면 나는 어떻게 농사를 지으란 말이냐? 고향에서 그대로 공부했으면 좋겠다”고 만류하셨다.
나는 편지를 읽고 난 즉시 농사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농사고 뭐고 당장 때려치우고 서울로 올라가야 되겠다는 생각만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래서 손을 잡고 사정을 하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서울로 올라가기로 결심하였다. 나의 각오를 안 어머니는 포기할 수밖에 없으셨다. 그래서 나를 서울로 올려 보내기로 마음을 먹고 다음날 떡을 해서 나에게 먹였다. 그것을 먹고 나는 광란이 일어났다. 창자에 있는 똥물까지 토해내며 어찌 할 줄 몰랐다.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바늘을 가져다 사관을 놓아주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점점 배 아픈 것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밤 늦게서야 배 아픈 것이 멈췄다. 다음날 서울로 올라갈 것을 생각하니, 너무 기뻐 잠이 오지 않았다.
서울로 올라간다고 하니 어머니는 시장에 가서 사지 양복 한 벌을 사오셨다. 그 당시에는 교복이 모두 사지로 만든 것이었다. 시골서 제일 싼 것을 사서, 입어보니 바람만 조금 불어도 흐늘흐늘하여 몸에 칭칭 감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제 어머니가 준비한 보따리를 보니, 이부자리, 당장 입을 옷, 먹을 곡식, 당장 해 먹을 냄비와 바가지다. 사지 교복을 입고 담요로 만든 모자를 쓰고 이 보따리를 지고 봉이 김선달처럼 새벽같이 길을 떠났다. 이것이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학교 다니며 살던 마지막이었다. 나는 서울역에 내리자 아버지가 알려 주신 대로 남대문, 을지로 입구, 화신을 거쳐 안국동 옆에 있는 서울시 종로구 화동 129-1의 집을 찾았다. 길을 찾는 데는 내가 서울에 살았던 탓으로 그리 어려움이 없었다. 집에 도착하기까지 용산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을 많이 보았다. 보따리를 짊어진 내 모습이 좀 쑥스럽고 부끄러웠으나, 내일부터 저 친구들이 다니는 학교를 나도 다니게 된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집에 도착하고 보니, 아버지는 출근하고 안 계셨고, 골방에 모르는 아주머니가 살고 있으면서 그 동안 아버지 밥을 해 드리고 있었다. 내가 누구라는 것을 설명했더니,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밝혔다. 알고 보니, 과부로 혼자 사는 사람인데 골방에 세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혼자서 식사를 해결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서 좀 도와드렸다는 것이다. 저녁이 돼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나를 보더니 아주 반가워했다. 내일 당장 학교에 가자고 하셨다. 그리고는 골방 아주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다.
나는 학년이 끝날 무렵 용산고등학교 1학년으로 배정 받아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이때는 전쟁이 종식된 상태이나, 그 후유증은 대학을 입학하는 데에까지 크게 미쳤다.
용산고등학교로 옮기기는 하였으나, 1학년은 곧 겨울 방학이 되었다. 결국 1학년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새봄이 돌아오자 겨우 교과서만 샀다. 책은 책보에 싸가지고 다녔다. 모자는 여전히 셋째작은어머니가 물들인 담요로 만든 것을 쓰고 다녔다. 교문에서 아침마다 기율부 학생에게 지적을 받는 것이 얼마나 신경 쓰였는지 모른다. 본 교사는 미군이 사용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군용천막으로 만든 교실에서 난로를 피우지 못 한 채 떨어가면서 공부를 했다. 이렇게 학교를 다녔으니 중고등학교는 소용돌이 속에서 시간만 보냈으니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었겠는가. 참으로 고통스럽고 원망스럽고 한스런 6 · 25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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