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처럼 수련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온전히 직시할 수가 있게 됩니다. 스스로의 어둠과 빛을 그 어떤 과장이나 숨김없이 왜곡됨이 없이 그대로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빛과 어둠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하지만 이 세상의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유일한 존재이기에 남도 유일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 세상 모든 것은 고유의 존재성과 소중한 가치를 품고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때문에,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모두가 유일하고 소중하기 때문에 내가 남보다 나을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며, 남보다 못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유일한 존재입니다. 단지 서로 간에 맡은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따라서, 남보다 위에 있으려하지도 않고, 군림하려고도 하지 않고, 남보다 잘났다는 것을 알리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존재성과 존재가치에 따라서 묵묵히 세상 속에 녹아들 뿐 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사람의 몸에 비유를 해보겠습니다. 우리들 자신이 입이라면 다른 사람들도 다 입이 되어야 된다고 우리는 착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코가 먹지 못하는 것을 답답하게 생각합니다. 또 눈은 입이 보지 못함을 답답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것을 항상 잊고 삽니다. 코로 있기 때문에 몸이 숨을 쉴 수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것은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오직 자신의 입장에서 왜 나는 먹을 수가 있는데 남들은 먹지를 못할까를 우리는 고민하고 갈등합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입이 최고라고 떠들어 대게 됩니다. 코가 코처럼 생기고 코의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내가 입이라는 것을, 또한 상대가 코라는 것을 모르기에 즉,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상대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서로 간에 고집을 부리고 싸우며 갈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련을 통해서 내가 입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상대방이 코이며, 눈이며 팔 다리이며 심장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비로소 수련을 통해서 자신과 타인의 존재를 존재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나의 본래 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나의 진면목을 알게 된다는 것과 다르지가 않습니다.
이처럼, 수련을 통한 승화라고 하는 것은 내가 밝아져서 남보다 우월해지는 것을 남보다 나아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온전히 바라보고 자신과 화해할 수 있는 의식의 개화를 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하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조물주란 이러한 관점에서 사람의 몸 전체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세포 하나일수도, 눈 일수도 코일수도, 입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모두가 조물주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수련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며칠 전에 실무진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저는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도통하기 전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어냐고 말입니다. 저는 바로 대답했습니다. 도화재 들어온 것을 제일 후회한다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 스스로는 원래 이미 온전했습니다. 완전한 것이 아니고 온전했습니다. 그런데 그거 하나 알기 위해 10년이 넘도록 이 고생을 했습니다. 아주 억울합니다. 물론, 이 말은 불가에서 색즉시공을 이야기하고, 모두에게 불성이 있다고 이야기하듯이, 도통을 했기 때문에 저 스스로를 온전히 바라봤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두 번째 이야기를 드릴까 합니다.
바로 체득한 자로서의 빛나눔 이라는 부분입니다. 앞서서 저는 각자가 다 유일한 존재로서 존재성과 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시키는 대로 가 아니고, 남이 저렇게 하니까가 아니고 자신이 체득한 만큼 세상 속에서 내 마음껏 내 재량껏 빛을 나누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 조차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안해도 그만입니다. 공부가 되면 된 만큼, 빛이 승화되면 승화된 만큼 의식이 개화되면 개화된 만큼, 일선에서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은은하게 빛을 나누는 것이 진정한 빛 나누기입니다.
길가에 가로등을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길가에 가로등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길에 나누어 서 있기에 길 전체를 밝힐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우리 도화재는 공부가 되면 될수록 세상과 멀어지고 현실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어느 한군데 다함께 모여서 외톨박이로 모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길가에 가로등이 한군데 다 모여 있다면 그 가로등은 이미 가로등이라는 이름을 잊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빛을 나눈다는 개념이 세상 사람들에게 석문도법을 알리는 것이 다일까요?
석문 무엇 무엇이라는 프랭카드나 전단지를 통해서 석문호흡이라는 그 이름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다일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러한 직접적인 활동도 물론 필요합니다만 우리가 정말 잊어서 안 될 것은 바로 자신의 자리에서의 은은함 그 향기입니다.
바로 문주님이 말씀하시는 4무정신 말입니다. 수련을 통해서 삶에 대한 의식이 확장되게 되면 그에 따라 할 수 있는 일들은 무궁무진하게 많아 질 것입니다. 각자가 느끼는 대로, 체득한대로 자유롭게 여유롭게 또한 충만 되게, 각자의 행복을 또 행복나누기를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석문도법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것이다라는 석문도법만을 고집하는 어리석음도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누구에게나 고유의 존재성이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는 것과 다른 말이 아닙니다. 만약 내 주변에 누군가가 무당집에 가서 기도를 하면서 마음이 안정되고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는 올바른 길 필요한 것이 될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종합병원이 내 집 옆에 서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아프지 않는다면 그 병원엔 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대학 옆에 산다고 하더라도 내가 대학공부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대학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대학에 가지 않는다고 해서 좋은 병원에 가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어리석다고 바보라고 인생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고 비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빛을 나눔에 있어서 정말로 깊게 생각해야 할 것은 옳다 그르다, 낫다 아니다가 아닌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는가 입니다. 각자가 소중하고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상대방이 나와 같아졌을 때 상대방은 그 상대방의 존재성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내가 누군가를 흉내 내고 누군가를 따라가고자 했을 때 나의 존재성은 존재가치는 사그라지게 됩니다.
석문도법이 위대한 것은 어떠한 모델을 정해놓고 모두가 이 모델이 되어야 한다라고 강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각자 스스로를 온전하게 완성시킬 수 있는 그러한 길이기에 석문도법은 위대하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정말 깊게 생각해야 할 것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 입니다. 상대방에게 필요한 말, 필요한 것을 해 주어야 우리는 비로소 본질적인 빛 나누기를 하고 있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주변의 모든 존재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남위에 군림하고 고립되고 나 혼자 방안에 틀어 앉아서 이것이 옳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이 아니고, 보다 은은하게 향기 나는 세상 속에서의 예의를 도인들이라면 더더욱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항상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여러분 모두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올바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고자 하는 것이 하고 싶은 일이 바로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유일한 존재이며, 여러분 모두는 조물주입니다.
자, 이제 몇 시간 후면 새로운 한 해가 밝아옵니다. 내일 아침 새로운 새해의 태양이 떠오르듯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도 보다 밝고 충만한 내면의 빛이, 의식의 개화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는 잘하실 겁니다. 그리고 다 잘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도시속 신선이야기라는 책을 지으신 분이신데 지금은 도화재 내에서 활동하지는 않고 개인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