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노래하고 꽃피운 시인, 박인환
맹문재(시인, 안양대 교수)
1.
박인환 시인은 사랑이 인간 사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여기고 추구했다. 가족은 물론 다른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대했고, 그 토대 위에서 민족해방과 한국전쟁의 격변기를 직시하면서 시인의 길을 걸어갔다. 연극, 영화, 미술, 사진, 음악, 번역 등에도 사랑을 꽃피웠다.
박인환의 사랑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형, 세화, 세곤이나 잘 놀고 있습니까? 밤마다 당신과 애들을 꿈에 보고 헛소리를 합니다. 참으로 보고 싶습니다.”(「정숙이」)라고 쓴 데서 여실히 볼 수 있다. “만일 애인이 있다면 무슨 프레젠트를 하고 싶습니까?”라는 설문에는 “현재 애인이 있어도 프레젠트를 못 하는 저의 심정으로서는 어찌 이런 질문에 답할 길이 있겠습니까”라고 에둘러 답변할 정도였다. 얼굴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내의 코를 아름다워했고, 가지고 싶어 하는 만년필을 마련해준 아내에게 고마워했다. 편지를 쓸 때마다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사랑하는 나의 정숙에게”라고 부른 그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박인환의 사랑은 가족의 울타리를 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좋은 일을 한 것을 밖에서 듣게 되면 집에 돌아와 아내와 아이들에게 전해주었다. 미담이 없는 사회를 안타까워하며 알린 것이었다. 한국전쟁 때 부산에서 피란 생활할 때 한 소녀에게 인정을 베푼 일도 있었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귀가하는 골목길에서 소녀의 울음소리가 들려 다가가 보니 아버지가 세상을 떴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박인환은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돈을 모조리 꺼내 조위금으로 내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뒤 가까이 지내던 친구 변윤식이 익사한 일에 무척 슬퍼했고, 이봉구 소설가에게 다정다감한 편지를 보내곤 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강원도 인제의 푸른 산과 맑은 물과 순박한 고향 사람들을 항상 그리워했다.
2.
박인환 시인의 사랑은 시대 인식과 민족의식으로 확대되었다. 박인환은 동인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의 서문에서 해방기의 정국을 “자본의 군대가 진주한 시가지”에 “증오와 안개가 낀 현실”로 파악했다. 그리하여 일제의 식민지 지배 상황을 외면한 서정시를 배제했고, 시민 정신을 그 극복 방안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식민지 지배를 받아 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월남, 캄보디아, 홍콩 등의 아시아 국가들과 연대를 추구했다.
자유와 자기 보존을 위해서만이 아니고
야욕과 폭압과 비민주적인
식민 정책을
지구에서 부숴내기 위해
반항하는 인도네시아 인민이여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라
―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 부분
300년 동안 포르투갈, 네덜란드, 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착취 받아 온 인도네시아 국민에게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라”라고 호소한 것은, 결국 조선인들에게 해방기의 정황을 직시하고 맞설 것을 호소한 목소리였다.
박인환의 시대 인식은 한국전쟁 동안 『경향신문』 기자로 활동하고 작품화한 데서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성장해온 그 어떠한 시대보다 혼란하였으며 정신적으로 고통을 준 것이었다”(『선시집』)라고 밝혔듯이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실제로 3년 1개월간 지속된 전투로 말미암아 참전국 사망자가 200만 명에 달했을 정도였다. 박인환은 그 전쟁의 폭력성을 고발한 것이었다.
박인환은 1955년 3월 5일부터 4월 10일까지 대한해운공사의 상선을 타고 미국 여행을 다녀왔다. 올림피아, 터코마, 시애틀, 에버렛, 아나코테스, 포트엔젤레스, 포틀랜드 등을 돌아보았다. 여행하는 동안에도 한국전쟁으로 인해 황폐된 조국의 상황을 잊지 않고 “서울로 빨리 가고 싶”(「어느 날의 시가 되지 않는 시」)어 했다.
박인환은 귀국한 뒤 미국의 무성한 삼림, 높은 질서 의식, 약속 시간의 엄수 등을 여러 매체에 소개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인이 정신적인 면에서나 지식적인 면에서 미국인에 비해 수준이 낮지 않다고 보았다. 그만큼 민족의식이 견고했던 것이다.
3.
박인환 시인의 사랑은 예술 분야에서 꽃피었다. 박인환은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평양의학전문학교의 학업을 그만두고 상경해 마리서사(茉莉書舍)를 개업하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시대를 반영한 시인 정신으로 모더니즘 시 운동을 주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48년 김경린 김경희 김병욱 임호권과 함께 동인지 『신시론』을, 1949년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했다. 1955년 개인 시집 선시집도 간행했다.
박인환은 모더니즘 시 운동을 심화하기 위해 외국의 문예 사조, 시인과 소설가, 그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엘리엇, 스펜더, 오든의 시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장 콕토의 삶과 예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작품 등을 수용한 것이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목마와 숙녀」에서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라거나,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목마와 숙녀」)라고 노래한 것이 좋은 예이다.
박인환은 시, 소설, 기행문 등의 번역에도 성과를 내었다. 그중에서 윌러 캐더의 장편소설 『이별』은 예술에 대한 사랑을 잘 보여준다. 소설의 주요 인물인 루시 게이하트는 18세의 나이에 시카고로 음악 공부를 하러 간다. 루시는 시카고의 아우어바흐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는데, 어느 날 선생의 친구인 클레멘트 세바스찬의 독창회를 보게 된다. 루시는 그의 노래에 매료되어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바스찬의 연습 시간에 피아노 반주를 맡는다.
박인환은 59편의 영화평론을 발표해 독보적인 지위를 확립했다. 1954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의 정기총회에서 상임 간사도 맡았다. 그의 활동은 한국 영화평론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박인환은 외국 영화와 영화배우를 소개하는 것은 물론 한국 영화의 형편을 진단하고 전망했다. 제작자, 감독, 시나리오, 배우 등 영화 제작뿐만 아니라 영화 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발전 방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1955년 제1회 금룡상의 심사위원이기도 했다.
박인환은 1955년 1월 18일부터 1월 27일까지 열린 <이중섭 작품전>(미도파화랑)을 관람하고 예술인들과 어울렸다. 이중섭의 첫 개인전이자 마지막 개인전이었다. 또한 정종여의 동양화 개인전을 보고 “동양화가 정종여는 현 우리 화단에 있어 가장 빛나는 화가의 한 사람”(『자유신문』)이라고 평했다.
박인환은 예술가들과 어울려 시 「세월이 가면」을 노래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이진섭이 작곡했고, 테너 임만섭과 가수 나애심이 불렀다. 송지영, 이봉구, 김광주를 비롯해 명동을 드나들던 예술가들이 합세해 이 노래는 불후의 애창곡이 되었다.
박인환은 「보도 사진 잡고(雜考)」도 발표했다. 무역과 교통이 발달하고 지식과 사상이 고도화됨에 따라 뉴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는데, 기존의 회화보다는 사진이 뉴스의 기록적 가치를 갖는다고 진단했다.
박인환은 연극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극단 신청년이 미국 사회에서 흥행하였던 클리퍼드 오데츠의 <골든 보이(黃金兒)>를 공연한 것을 관람한 뒤 악조건에서도 성의를 다한 배우들을 응원했다. 대구에서 공연한 신협(新協)의 <맹 진사댁 경사>를 관람한 뒤 감상평을 썼고,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현대인의 욕망을 반영한 연극으로 소개했다. 박인환은 신협이 1955년 8월 26일부터 31일까지 공연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번역도 맡았다.
박인환 시인은 사랑을 최고의 인간 가치라고 인식하고 실행했다. 그가 살아가던 시대는 정치적으로 혼란했고, 사회적으로 갈등이 심했으며, 경제적으로 궁핍했기에 사랑을 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인연을 소중하게 여겼고, 견고한 역사의식과 예술 정신으로 밀고 나아갔다. “내 사랑아/너는 찬 기후에서 긴 행로를 시작했다. 그러므로/폭풍우도 서슴지 않고 참혹마저 무섭지 않다.”(「사랑의 파라볼라(Parabola)」)라고 노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