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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탄생· 출가
어탄생
니치렌대성인님께서는 1222년 2월 16일 아와 지방(나가사군 도죠향 가타우미- 치바현 카모가와시)의 어촌에서 미쿠니노 다이후 시게타다(누키나지로 시게타다)를 아버지로, 우메기쿠뇨를 어머니로 하여 탄생하시어 어릴 적 이름을 젠니치마로라 하셨습니다.
대성인님께서는 당신의 출생에 관해
『 니치렌은 금생에는 빈궁하천한 자로 태어나고 전다라의 집에서 출생하였느니라』(사도어서 어서 580)『 니치렌은 아와지방 도죠 가타우미의 바닷가 천민의 자식이니라』(선무외삼장초 어서 438) 고 하시며, 당시의 신분 중에서 가장 낮은 계층 출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대성인님께서 「시동범부」입장에서 하근하기(下根下機)의 말법시대의 일체중생을 구제한다는 불법상의 깊은 뜻에 의한 것입니다.
대성인님 탄신(誕辰) 당시의 사회 상황은 바로 전년(1221년) 조정이 호죠 요시토키 등의 가마쿠라 막부 (1192년부터 1333년까지 가마쿠라를 본거리로 하여 존속했던 일본 최초의 무인정권)에 패하여 고토바, 츠치 미카도, 쥰토쿠 세 상황(上皇)이 유배당하는 미증유의 대사건-죠큐의 난이 일어나는 등 하극상의 혼란이 바로 오탁악세(五濁惡世) 말법의 양상을 보이고 있던 때였습니다.
대원(大願)을 세우시고 불문(佛門)에 드시다
젠니치마로의 유년기· 소년기 때 세간에서는 비참한 사건이 끊이지 않고 엄청난 폭우와 가뭄 등의 자연
재해로 대규모 굶주림이 발생하는 등으로 인해 사회 불안이 더해질 뿐이었습니다. 총명하신 젠니치마로께서는 죠큐의 난을 비롯한 여러가지 사회 혼란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이들 사회 혼란을 해결하고자 1233년 12세 때 「일본 제일의 지자(智者)」가 되기 위해 학문에 뜻을 품고 가타우미에서 가까운 세이쵸지 도젠보 문하에 들어가셨습니다. 입문 후 젠니치마로꼐서는 주로 죠켄보, 기죠보 두 사형으로부터 일반적인 교양과 불교 경전을 중심으로 읽고 쓰기를 배우셨는데, 타고난 재능과 구도심으로 날로 지해(智解)가 깊어지셨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입문 전부터 품으셨던 의문이 젠니치마로의 마음 속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일었습니다. 그것은 첫째 죠큐의 난 때(1221년) 천황(조정)측이 진호(鎭護)국가를 표방하는 천태,진언 등의
고승들이 조복(調伏)의 기도를 있는대로 해대지만, 가마쿠라 막부측에 참패하여 세 상황이 섬에 유배당하고 만 것은 왜일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둘째는 아와지방에서 염불을 부르는 행자의 임종이 번민의 모습, 악상을 띠는 것은 왜일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셋째는 석존(석가모니 세존) 한 분께서 설하신 가르침이 여러 종파로 갈라져 서로 자기 종파가 뛰어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원래 석존의 본 뜻은 하나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출가· 여러 지방 유학
젠니치마로께서는 16세 때 이 의문을 풀고 불법의 진수를 연구하기 위해 출가득도 하시어 이름을 제쇼보 렌쵸(是聖房蓮長)로 바꾸시고 수행에 정진하면서 불철주야 학문 연마에 힘쓰셨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 봄, 세이쵸지에 소장된 경전 및 서적을 모두 독파한 렌쵸께서는 더욱 깊은 연구에 뜻을 품고 여러 지방으로 유학 길을 떠나셨습니다. 이 때의 유학은『가마쿠라·교·에이잔·온죠지·고야·텐노지 등의 지방들 절들을 대략 돌며 익혔더니』(묘호비구니어반사 어서 1258)라고 훗날 말씀하시듯이, 많은 불교 경전과 서적을 열람하시고자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던 가마쿠라와 당시 불교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히에이잔(히에이산) 엔랴쿠지(延曆寺)를 비롯한 고찰을 두루 찾는 길이었는데, 그것은 무려 14년간에 걸친 여정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기나긴 수학(修學)을 하시는 동안 획득하신 것은 첫째로 여러 종파가 석존의 본뜻을 어기고 있으며 모든 재앙의 뿌리라는 것, 둘째로 말법에 넓혀야 할 법은 법화경의 핵심이 묘법오자(妙法五字)인데 당신 자신이 바로 이 요법(要法)을 가지고 탁악한 말법 세상을 구제할 「지용상행보살(地涌上行菩薩)」의 재탄(再誕)이라는 것을 자각하신 것입니다.
2. 종지건립(宗旨建立)
종지건립
유학을 마치신 렌쵸께서는 겐쵸(建長) 5년(1253년) 봄 성수 32세 대 고향의 세이쵸지로 돌아오시어 깊은 사색을 거듭하신 끝에 대난(大難)이 다투어 일어나더라도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대법을 홍통하겠다는 불퇴전의 결의를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3월 28일 렌쵸께서는 이른 새벽 세이쵸산 가사가모리 숲 위에 오르시어 떠오르는 태양을 비롯한 법계를 향해 「남묘호렌게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내증에 갖춰진 제목을 개선(開宣)하시고, 세이쵸지에서 염불무간의 법문을 설하시고, 1개월 후인 4월 28일에는 일체중생으로의 일기홍통(一期弘通)의 제목을 개시하시고 종지를 건립하셨습니다.
이 때의 심경을 뒷날 니치렌대성인님께서는
『이것을 한마디라도 입 밖에 낸다면 부모·형제·사장에게 국주의 왕난이 반드시 닥치리라. 말하지 않으면 자비 없음과 같다고 사유함에, 법화경·열반경 등에 이 두 곳을 맞추어 보니, 말하지 않으면 금생은 아무 일 없더라도, 후생은 반드시 무간지옥에 떨어지리라. 말한다면 삼장사마가 반드시 다투어 일어날 것이라고 알았도다』(개목초 어서538)라고 술회하고 계십니다.
대성인께서 부르기 시작하신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는
『불기(佛記)를 좇아서 이를 생각하니 이미 후오백세의 시작에 해당하도다. 불법이 반드시 동토(東土)에서 나올 것이니라』(현불미래기 어서 678)
『니치렌이 자비 광대하다면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는 만년을 지나 미래까지도 유포하리라. 일본국의 일체중생의 맹목(盲目)을 여는 공덕 있느니라. 무간지옥의 길을 막노라 』(보은초 어서 1036)고 말씀하시듯이, 일체중생 구제를 위해 동토 일본에서 출현하여, 말법 만년· 미래제에 걸쳐 전세계에 유포되어 갈 고금 미증유의 독일본문(獨一本門)제목이었던 것입니다.
「니치렌(日蓮)이란 두 글자」
종지건립을 계기로 렌쵸께서는 이름을 새롭게 「니치렌」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법화경 용출품 제15의 「불염세간법(不染世間法) 여연화재수(如蓮華在水)」[세간법에 물들지 않는 것이 (마치) 연화가 (흙탕)물 (속)에 있(으면서 더러운 흙탕물에 물들지 않고 청정한 꽃을 피우)는 것과 같으니라]라는 경문과, 신력품 제 21의 「여일월광명(如日月光明) 능제제유명(能除諸幽冥) 사인행세간(斯人行世間) 능멸중생암(能滅衆生闇)」[일월(=해와 달)의 빛이 능히 모든 어둠을 제거(하여 밝게) 하듯이 이 사람(=상행보살)이 세간에서 행하여(=법화경을 홍통하여) 능히 (일체)중생의 어둠을 멸하리라](법화경 516)이라는 경문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에 관해 대성인님께서는 『밝음이 일월보다 뛰어날 소냐. 청정함이 연화보다 나을 소냐. 법화경은 일월과 같고 연화니라. 고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라고 이름하느니라. 니치렌 또한 일월(日月)과 연화(蓮華)와 같으니라 』(시죠킹고여방어서 어서 464)고 밝히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함자를 「니치렌」이라고 하신 것은 마치 태양이 모든 어둠을 밝히고 연화가 더러운 흙탕물에서 돋아나 청정한 꽃을 피우듯이, 니치렌대성인 당신이 바로 말법 만년에 걸쳐 일체중생의 어둠을 밝히고 탁악한 세상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 출현한 상행보살의 재탄이라는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리고 『니치렌이라고 자칭하는 일은 자해불승(自解佛承)이라고도 말해야 하리라』(쟈쿠니치보어서 어서1393)고 말씀하시며 당신이 부처의 경애 (경애 : <불교>밀교에서, 불보살의 가호를 정하여 일가친척의 화평을 비는 수법. 편집자주) 라고 밝히셨습니다.
입종선언(立宗宣言)
니치렌대성인님께서는 4월 28일 오시(午時)에 세이쵸지 쇼부쓰보의 지불당에서 처음으로 묘법홍교를 위해 설법좌에 오르시어,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에 의해서만 구제받을 수 있고, 법화경이야말로 최고의 법이며, 말법 중생은 이것 이외의 가르침에 얽매이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나타내셨습니다.
이 설법을 들은 염불종 강신자인 지두(地頭) 도죠 가게노부는 미친 듯이 격노하여 대성인님의 신상에 위해를 가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법화경 권지품 제13에 「유제무지인(有諸無智人) 악구매리등(惡口罵詈等) 급가도장자(及加刀杖者)[무지한 뭇 사람들이 악구매리등을 하고 칼과 몽둥이를 가하는 자가 있을 것이옵니다]」(법화경 375)라고 설해져 있는 경문이 그대로 사실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성인님께서는 죠켄보, 기죠보 두 사형 등의 도움으로 이 위기를 벗어나시어 도죠 가게노부의 영지 밖인 하나부사 땅에 몸을 의탁하셨습니다.
그 후 대성인님께서는 부모님께 참된 효도를 하기 위해 부모님께 차근차근 법의 도리를 말씀드리며 교화하시어, 아버님께는 「묘니치(妙日)」, 어머님께는「묘렌(妙蓮)」이라는 법호를 드렸습니다.
3. 가마쿠라 시기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 -제1국간(國諫)
대성인님께서는 1253년 8월경 가마쿠라·나고에 마쓰바가야쓰에 작은 초암을 마련하시고 가마쿠라 거리에 나가시어 「염불무간(念佛無間)」,「선천마(禪天魔)」그리고 파사현정의 가르침을 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비방과 욕을 하며 방해했지만, 머지않아 닛쇼, 니치로가 제자가 되고 도키죠닌, 시죠깅고 등 많은 사람들이 신도가 되었습니다.
가마쿠라 시대(1192~1333) 중기인 겐쵸(建長:1249~1256)·고겐(康元:1256~1257)·쇼카(正희嘉:1257~1259) 무렵은 큰 화재, 폭풍우, 큰 지진과 돌림병 등이 유행하는 등 일찍이 없었던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비참한 재난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가마쿠라 막부는 여러 종파에 명하여 재액(災厄)을 물리칠 기도를 하게 했지만, 재난은 전혀 그칠 줄 몰랐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쇼카 원년(1257) 8월 23일 미증유의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대성인께서는 이와 같은 재난이 일어난 원인을 명확히 밝히시기 위해 다음해 2월 스루가 지방 이와모토(현재의 시즈오카현 후지시) 짓소지(實相寺) 경장(經藏)에 드시어 일체경을 열람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때 근처의 시쥬쿠인에서 수행하던 13세의 호키공(닛코상인)이 대성인님의 고매한 인품과 존귀한 모습에 감화되어 제자가 되어 시봉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분노(文應) 원년(1260) 대성인께서는 필생의 서 「입정안국론」을 완성하시어, 그 해 7월 16일 야도야입도를 통해 당시의 최고 권력자 호죠 도키요리에게 이를 주정(奏呈)하였습니다.
「입정안국론」에
『세상은 모두 정(正)을 배반하고 사람은 모두 악(惡)에 귀(歸)하였도다. 고로 선신은 나라를 버리고 다 떠났으며, 성인은 거처를 물러나서 돌아오시지 않느니라. 이로써 마(魔)가 오고 귀(鬼)가 와서, 재(災)가 일어나고 난(難)이 일어나느니라』(어서 234)고 하시며, 사람들이 정법을 버리고 악법에 귀의하여, 선신이 나라를 버리고 떠나고 악귀마신이 찾아들어 전대미문의 재난이 일어난다는 것을 설해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재난을 없애려면, 당시 가장 유행하던 염불의 사의(邪義)를 끊고 법화일실(法華一實)의 정법에 귀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정안국론」에서 설해 밝히셨습니다. 또 여래의 금언(金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방법(謗法)을 대치(對治)하지 않으면, 약사경, 인왕경 등에서 예언한 칠난(七難) 가운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자계반역난(내란)과 타국침핍난(타국으로부터 침략을 당하는 난) 두 가지 난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국가의 주권자에게 예언하셨습니다.
대성인께서는 「입정안국론」을 제출하여 막부(무인정권)에 간(諫)하여, 사법(邪法)에 귀의하는 잘못을 설해 밝히셨습니다. 이것이 대성인님 일기(一期) 화도 가운데 첫번째 국주간효(國主諫曉)입니다.
마쓰바가야쓰 법난
기성 불교에 집착해 있던 막부 위정자들은 「입정안국론」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대성인님에 대해 앙심을 품고 은밀히 음흉한 모략을 꾸몄습니다.
그리하여 1260년 8월 27일 밤 가마쿠라 막부 6대 집권자(최고 실권자) 호죠 나가토기의 아버지, 호죠 시게토키(고쿠라쿠지입도)의 뜻을 받아 염불자 등 방법 무리들이 마쓰바가야쓰에 있던 대성인님의 거처를 습격하였습니다만, 목숨을 위협하는 이 위기에서 대성인님께서는 불가사의하게도 상처 하나 입지 않으시고 그 자리를 벗어나셨습니다.
대성인께서는 이 법난에 대해
『밤중에 니치렌(日蓮)의 소암(小庵)에 수천인이 몰려와서 살해하려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날 밤의 위해도 모면했노라』(시모야마어소식 어서 1150)고 술회하셨습니다.
그 후 대성인님께서는 한동안 시모사(지금의 치바현)의 도키죠닌 댁에 몸을 의탁하시면서 그 일대를 절복 교화하시어 오타 죠묘, 소야 교신 등을 입신하도록 교도하셨습니다.
이즈 유배
마쓰바가야쓰 법난을 당하신 다음 해(1261년) 봄 대성인님께서는 가마쿠라로 돌아오시어 다시 홍교(弘敎)를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막부 집권 호죠 나가토키는 이를 알고서 권력을 휘둘러 그 해 5월 12일 대성인님을 붙잡아 단 한 번의 취조도 하지 않고 이즈 가와나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대성인께서는 이즈 유배를 당하시는 동안을
『거년(去年)의 5월 12일부터 금년 정월 16일에 이르기까지, 이백사십여일동안은 그 주야(晝夜) 십이시(十二時)로 법화경을 수행한다고 생각하였느니라. 까닭은 법화경때문에 이러한 처지가 되었으니,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법화경을 읽고 행하는 것으로 되느니라. 인간으로 생을 받아 이만한 기쁨은 또 어떤 것이 있을 소냐 』(사은초 어서 266)라고 말씀하시듯이 「법화경 신독(身讀)」「여설수행(如說修行)」의 때로 여기시고 즐거워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접한 닛코상인은 대성인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와 상수급사(常隨給仕, 항상 따르면서 시중을 드는 것)를 하는 한편 절복홍교에 힘써 아타미에서 진언종 승려 콘고인 교만을 개종시키는 등 이토 주변에서도 많은 사람을 귀의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 대성인님께서는 「사은초(四恩抄)」,「교기시국초(敎機時國抄)」「현방법초(顯謗法抄)」등 많은 어서를 지으셨습니다.
고마쓰바라 법난
1263년 2월 호죠 도키요리의 사면을 받아 다시 가마쿠라 초암으로 돌아오신 대성인님께서는 다음 해(1264년) 가을 어머님 묘렌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접하시고 12년 만에 급히 고향 아와로 향하셨습니다.
대성인님께서 고향 집에 당도하셨을 때 어머님께서는 위독하시어 곧 임종하실 상태이셨지만
『니치렌(日蓮) 비모(悲母)를 기념하였더니, 현신(現身)에 병을 고칠 뿐 아니라, 사개년(四箇年)의 수명을 늘였느니라』(가연정업어서 어서 760)고 말씀하시듯이 대성인님의 기도로 병세가 회복되어 수명을 4년간 연장하셨습니다.
그 후 대성인님께서는 아와 지방에 머무르시면서 묘법홍통에 전념하셨습니다. 이 때 아마쓰의 영주로서 신심 돈독한 신도 구도 요시타카가 대성인님의 귀향 소식을 듣고 한 번 왕림해 주실 것을 청하였으므로, 대성인님께서 11월 11일 십 수명의 일행을 데리고 구도 요시타카 저택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런데 전부터 대성인님을 염불의 적으로 생각하여 노리고 있던 지두(地頭) 도죠 가게노부가 이를 알고서, 대성인님 일행이 저녁때 고마쓰바라(지금의 치바현 카모가와시 광장 부근)에 접어들었을 때, 무기를 든 수백 명의 염불자를 거느리고 덤벼들었습니다.
이 때의 상황에 관해 대성인님께서는
『십일월 십일일 아와국 도죠의 마쓰바라라고 하는 대로(大路)에서, 신유시(申酉時), 수백인의 염불자들이 숨어 기다리고 있었는데, 니치렌은 오직 한 사람이었고 십인 정도의 사람과 함께 있었지만 소용 있는 자는 불과 삼사인이니라. 쏘는 화살은 내리는 비와 같고, 내려치는 칼은 번개와 같도다. 제자 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고, 두 사람은 큰 상처 입었느니라. 자신도 베이고, 맞아서, 마지막인 듯 하였는데 』(난죠효에시치로전어서 어서 326)라고 말씀하시듯이, 그들이 휘두르는 칼에 제자 한 사람이 죽고 두 사람이 중상을 입고, 대성인님 당신께서도 오른쪽 이마에 중상을 입으시고 왼쪽 팔을 골절 당하시는, 목숨을 위협하는 대난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은 법화경 권지품 제13에서 설하는
「악세에 정법을 넓히는 사람에게 도장(刀杖)을 가하는 자가 있으리라」(법화경 375 취의)는 경문 그대로의 양상이었습니다.
몽고의 첩장(牒狀)과 11개소에 보낸 직간장(直諫狀)
1268년 1월 몽고 사신이 일본에 와서 복종을 요구하는 위협적인 내용의 국서(國書)를 막부에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대성인님께서 이미 8년 전에 「입정안국론」에서 예언하신 타국침핍난(타국이 침략해 오는 난)이 바로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몽고에서 첩장(국서)이 왔다는 소식을 들으신 대성인님께서는 그 해 4월 5일 막부 요인(要人)이었던 호캄보에게 「안국론어감유래」를 적어 보내시고, 8월과 9월에는 야도야사에몬입도에게 서장(書狀)을 보내시어 재차 간언하셨습니다. 그러나 막부 측으로부터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성인님께서는 10월 11일 막부 최고 수뇌부인 호죠 도키무네· 헤이노 사에몬노죠 요리쓰나· 야도야입도· 호죠 야겐타 및 칠대사(七大寺)라 불리던 고쿠라쿠지(極樂寺) 료칸· 겐쵸지(建長寺) 도류· 대불전 별당· 쥬후쿠지(壽福寺)· 죠코묘지(淨光明寺)· 다호지(多寶寺)· 쵸라쿠지(長樂寺) 이상 11개소에 간장(諫狀-간효하는 서장)을 적어 보내시어 공장대결(公場對決)로 법의 정사를 가려 하루 빨리 정법에 귀복하도록 간하셨습니다.
대성인님께서 이들 간효의 서장을 적어 보내신 참뜻은
『제종(諸宗)을 멸여(蔑如-업신여기거나 하찮게 여겨 깔봄)함이 아니라 오직 이 나라의 안태(安泰)를 생각할 뿐이니라』(쵸라쿠지에의 어장 어서 380)고 말씀하시듯이, 몽고 내습이라는 나라의 큰일을 당하여 오직 나라의 안녕과 민중의 평안을 바라는 일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 수뇌부는 대성인님의 간효장에 대해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오히려 뒤에서 대성인님을 욕하고 비웃었습니다.
기우(祈雨)
1271년 5월경부터 전국적으로 큰 가뭄이 계속되자, 막부는 당시 사람들이 생불(生佛)로 우러러 받들던 고쿠라쿠지 료칸에게 기우제를 지내게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으신 대성인님께서는 이를 기회로 불법의 정사(正邪)를 만인에게 알리고자 하시어 료칸에게 『7일 안에 (비를) 내리게 하시면 니치렌이 염불무간이라고 하는 법문을 버리고 료칸상인의 제자가 되어 250계를 가지리라.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그 승(僧)은 지계(持戒)인 듯하지만 대광혹(大誑惑-크게 남을 속여 홀리는 것)인 것이 분명하니라. (중략) 또한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오로지 법화경을 믿으시라』(요리모토진장 어서 1131)고 기우제에 즈음하여 약정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를 수락한 료칸은 많은 제자들과 함께 온 정성을 다하여 기우제를 지냈으나 약속한 7일은 커녕 7일을 더 달라고 하여 그 기간이 다 지났는데도 오라는 비는 오지 않고 오히려 전보다 훨씬 더 가뭄이 극심해지고 게다가 폭풍마저 휘몰아쳐 사람들을 더욱 괴로운 지경에 빠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료칸의 기우는 참패로 끝났습니다.
제2국간(第二國諫)
기우제에 패한 료칸은 맺은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여러 종파 승려들과 모의를 하여 대성인님에 대한 갖가지 악구참언(惡口讒言)을 막부 요인에게 해댔습니다.
그리하여 대성인님께서는 1271년 9월 10일 효죠쇼(評定所)에 소환되어 헤이노 사에몬노죠 요리쓰나의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대성인님께서는
『부처님의 사자(使者)인 니치렌을 박해하면 반드시 불천(佛天)의 벌을 받아 자계반역· 타국침핍 이난(二難)이 일어나리라』(종종어진무어서 어서 1057, 취의)고 엄하게 간효하시고, 이어서 그 다음 다음 날인 9월 12일 역시 헤이노 사에몬노죠에게
『대저 귀하는 지금 천하의 기둥인데 어찌 나라 안의 훌륭한 인재를 손상하려 하느뇨. 속히 현명한 생각을 짜내어 모름지기 이적(異敵)을 물리쳐야 하십니다』(일작일어서 어서 477)라는 서장을 보내시어 재차 반성을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대성인님의 이와 같은 간효에 대해 헤이노 사에몬노죠는 더욱 더 증오심을 일으켜 그날로 무장한 수백명의 군사를 이끌고 마쓰바가야쓰 초암을 쳐들어왔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승려를 붙잡으려 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마어마했고, 병사들은 경권(經券)을 짓밟는 등 포악하기 짝이 없었고, 특히 헤이노 사에몬노죠의 부하 쇼우보가 대성인님께서 품고 계시던 법화경 제5권을 빼앗아 그 경권으로 불경스럽게도 대성인님의 머리를 세 번 내리쳤습니다. 그런데 이 법화경 제5권에는 말법 시대에 법화경을 홍통하면 도장의 난 등을 당한다고 설한 권지품이 들어 있었는데, 이 점에 관해 대성인님께서는 훗날 쇼우보를 경문부합(經文符合)의 은인이라 하셨습니다.
헤이노 사에몬노죠 등의 폭거가 계속되는 가운데 대성인님께서는 큰소리로
『허참 재밌구나 헤이노 사에몬노죠가 실성하는 것을 보라, 나리님들, 바로 지금 일본국의 기둥을 쓰러뜨리오』(종종어진무어서 어서 1058)라고 갈파하셨습니다. 이것이 제2국간입니다. 난폭하기 짝이 없이 마구 난동을 부리던 헤이노 사에몬노죠와 그 부하들도 대성인님의 기백에 압도되어 일순 꼼짝도 하지 못했습니다.
4. 사도(佐渡) 시기
다쓰노구치(龍口) 법난 - 발적현본(發迹顯本)
1271년 9월 12일 헤이노 사에몬노죠는 니치렌대성인님을 중죄인처럼 마쓰바가야쓰 초암에서부터 가마쿠라 거리로 조리돌리더니 효죠쇼로 연행하여 사도 유배를 명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평결이었고 실은 은밀히 대성인님을 참수에 처하려는 음모가 이미 꾸며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밤이 이슥해지자 대성인님을 처형하기 위해 다쓰노구치로 호송해 갔습니다.
도중에 쓰루가오카 하치만구(鶴岡八幡宮) 앞에 접어들었을 때 대성인님께서는 말에서 내리시어 드높은 목소리로 『과연 팔번대보살은 진정한 신(神)인가』(종종어진무어서 어서 1059)라고 하시며, 법화경 행자를 수호한다는 것은 어찌 된 것인가 하고 팔번대보살을 간책(諫責)하셨습니다.
그리고 유이가하마를 지나서 대성인님께서는 쿠마오마루라는 동자를 시죠킹고에게 보내시어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소식을 접한 시죠킹고는 즉각 대성인님께 달려와, 삼가 따라 죽을 각오로 형장까지 모시고 뒤따랐습니다. 급기야 형장에 당도하자 그만 왈칵 목메어 슬피 우는 시죠킹고에게 대성인님께서는
『생각없는 분이로고. 이처럼 기쁜 일이니 웃으시라. 어찌하여 약속을 어기느뇨』(종종어진무어서 어서 1060)라고 타이르셨습니다. 그런데 처형하려는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에노시마 섬 쪽에서 달처럼 빛나는 광채가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쭉 환하게 비추며 건너갔습니다. 그러자 칼을 든 망나니는 그 강렬한 불빛에 눈이 아찔하여 쓰러져 땅에 엎드리고, 에워싸고 있던 병사들은 겁에 질려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도망치고, 어떤 자는 꼼짝 못하고 그냥 넙죽 엎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대성인님을 시해할 수 없었습니다.
대성인님 신상에 일어난 다쓰노구치 법난은 상행보살의 재탄이라는 그때까지의 임시의 모습[수적신(垂迹身)]을 떨쳐내고 「구원원초(久遠元初) 자수용보신여래(自受用報身如來) 즉(卽) 니치렌(日蓮)」이라는 진실의 모습[본지신(本地身)]을 나타내신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이것을 「발적현본(發迹顯本)」이라고 합니다.
이에 관해 대성인님께서는
『니치렌이라고 했던 자는 거년(去年) 구월 십이일 자축의 시에 목이 잘렸느니라. 이는 혼백(魂魄) 사도국에 이르러서』(개목초 어서 563)라고 밝히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혼백이란 구원원초 자수용신으로서의 혼백인데, 대성인님께서는 다쓰노구치 법난이라는 목숨을 건 법난을 겪으신 가운데 구원원초 본불(本佛)님으로서의 경애를 여신 것입니다.
사도 유배
다쓰노구치 법난 후 대성인님께서는 사가미 지방 에치(현재의 카나가와현 아쓰기시) 혼마 저택에서 약 1개월 가까이 구류되어 계셨습니다. 그리고 1271년 10월 10일 에치를 떠나 사도로 유배를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달 28일 사도 마쓰가사키에 도착하시어 11월 1일 유배지 쓰카하라 삼매당에 드셨습니다.
혹한의 땅 사도 섬 삼매당에서의 생활은
『쓰카하라라고 하는 산야(山野) 가운데에 낙양(洛陽)의 연대야(蓮臺野)처럼 사자(死者)를 버리는 곳에 일간사면(一間四面)의 당(堂)이 있는데, 부처도 없고 지붕은 판자가 맞지 않으며 사면의 벽은 낡아 헐었고 쌓인 눈은 녹는 일이 없느니라. 이러한 곳에 모피의 깔개를 깔고 도롱이를 걸치고 밤을 새우며 날을 보내느니라. 밤에는 눈·우박·천둥 번개가 그칠 사이 없고, 낮에는 햇볕도 들지 않는 불안한 거처이니라』(종종어진무어서 어서 1062)고 적고 계시듯이 더없이 혹독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사도 섬 사람들 중에는 염불종 신자가 많이 있어서 대성인님께서는 항상 신상의 위협에 직면해 계셨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대성인님께서는 다음해 1월 16일 쓰카하라에서 영주 혼마로쿠로자에몬이 입회한 가운데 수백 명의 여러 종파 승려들을 상대로 문답(問答)을 하시어, 그들을 간단히 물리치셨습니다. 문답이 끝나고 물러나려는 혼마로쿠로자에몬에게 대성인께서 가까운 시일 안에 가마쿠라에 전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로부터 1개월 후 대성인님께서 하신 예언은 호죠 일가가 서로 죽이는 「2월 소동(騷動)」이라는 싸움이 일어남으로써 적중하였습니다. 이로써 사도 섬 사람들 가운데에 대성인님을 삼가 외경하는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사도 시기의 저술
니치렌대성인님께서는 사도 유배 중에 『생사일대사혈맥초(生死一大事血脈抄)』,『제법실상초(諸法實相抄)』,『당체의초(當體義抄)』등 50편이 넘는 많은 어서를 지으셨습니다. 그 중 『개목초(開目抄)』,『관심본존초(觀心本尊抄)』가 대표적인 것입니다.
『개목초』는 1272년 2월 종이와 붓, 먹 등도 여의치 못하신 가운데 혹한의 땅 사도섬 쓰카하라 삼매당에서 지으셨습니다. 이 어서는 당시 가마쿠라의 제자와 신도 가운데 대성인님께서 사도 유배를 당하신 것을 보고 신심이 동요하는 자가 생겨나는 등 대성인님 일문(一門)이 위기에 처하자, 그들을 교도(敎導)하고 나아가 불법에 무지한 말법 중생의 맹목(盲目)을 열게 하기 위해 지으신 것입니다.
『개목초』에서는 목숨을 위협하는 법난을 겪으신 니치렌대성인 당신이 바로 법화경 행자라는 것을 설해 밝히시고, 나아가 주사친(主師親) 삼덕(三德)을 겸비한 말법의 부처는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명시하셨습니다. 그래서 『개목초』를 「인본존(人本尊)개현(開顯)이 서(書)」라고 합니다.
『관심본존초』는
『니치렌(日蓮) 당신(當身)의 대사(大事)』(관심본존초부장 어서 662)라고 설해 밝히신 중요한 어서인데, 그 내용은 말법 시대 초에 본불 대성인님이 출현하시어 일체중생을 위해 수량문저하종(壽量文低下種)의 본존을 건립하신다는 것을 설해 밝히신 것입니다. 그래서『관심본존초』를 「법본존(法本尊)개현의 서」라고 합니다.
대성인님께서는
『법문(法門)의 일은 사도국에 유배되기 이전의 법문은, 다만 부처의 이전의 경이라고 생각하시라』(미사와초 어서 1204)고 말씀하시며, 발적현본하시기 이전과 이후의 법문과 화도(化導)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교시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유배 이전은 상행보살의 재탄으로서 제목(題目) 홍통을 중심으로 하는 거동이었고, 발적현본을 하신 이후는 본존님을 도현하시고 말법의 본불님으로서의 경계에서 화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면(赦免)
1274년에 다시 몽고의 사자(使者)가 일본에 옴으로써 타국침핍난이 현실감을 띠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천변지요(天變地夭)가 끊이지 않고 세상의 움직임이 더욱 혼란스러워져 민중들은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모습은 대성인님께서 예언하신 그대로였으므로, 집권 호죠 도키무네는 대성인님을 더 이상 유배 상태로 놓아둘 근거가 없음을 알아차리고 2월 14일 사도 유배의 사면장을 발부하였습니다.
3월 8일 사면장이 도착하여 대성인님께서는 13일 이치노사와를 떠나셨습니다. 돌아오시는 도중에 에치고와 시나노 지방의 염불종 신자들이 대성인님을 시해하려고 젠코지(善光寺)에 집결하여 매복하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호송하던 병사들이 굳게 경호하여 대성인님께서는 26일 가마쿠라에 무사히 도착하셨습니다.
2년 반 동안의 사도 유배 중 닛코상인님께서는 대성인님 시중을 드시고, 아부쓰보 부부, 고우입도 부부,
사이렌보, 나카오키입도 등이 대성인님께 귀의하였습니다.
5. 미노부 시기
제3국간(國諫)
1274년 3월 26일 가마쿠라로 돌아오신 대성인님께서는 막부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으시고 4월 8일 헤이노 사에몬노죠를 비롯한 막부 요인들과 대면하였습니다.
다쓰노구치 법난 때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듯이 위세 등등하던 헤이노 사에몬노죠도 전과는 달리 태도를 누그러뜨려 대성인님을 맞아들여 이전경으로 성불득도할 수 있는지, 몽고 내습의 시기는 언제일지 등에 관해 질문을 해 왔습니다.
이에 대해 대성인님께서는 이전경을 믿는 모든 종파는 성불할 수 없다는 것, 지금까지와 같이 진언종 승려들에게 기도와 조복(調伏)을 하도록 한다면 일본은 무너질 것이고 천(天)의 노여움을 적잖이 사게 될 것, 몽고의 내습은 반드시 금년 안에 있을 것이라고 단언하시고, 하루빨리 사법(邪法)에 집착하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정법(正法)에 귀의하도록 간효하셨습니다.
막부는 대성인님의 이와 같은 간언(諫言) 가운데 예언하신 말씀이 적중할 것만을 두려워하여 대성인님께 도고 저택 옛터에 당사(堂舍)를 지어 드릴테니 다른 종파 승려들처럼 국가의 안녕을 기도해 달라고 했으나, 대성인님께서는 이러한 막부의 제의를 일축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대성인께서 세간적인 명성이나 권력의 비호를 바라신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들의 불행의 원인인 사교(邪敎)를 퇴치하고 정법을 신수하게 하여 평화로운 국토를 건설하는 것을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미노부산(身延山) 입산
대성인님께서는 세 번에 걸친 간효를 하셨으나 막부가 이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국가에 세 번 간(諫)해도 받아들이지 아니할 때는 산림(山林)에 들어간다」는 고사에 따라 1274년 5월, 53세 때 미노부산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미노부는 가이지방(지금의 야마나시현 미나미코마군)에 속하며 닛코상인의 교화를 받은 하기리 사네나가가 지두(地頭)를 지내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대성인님께서는 높은 산들에 둘러싸인 한적한 미노부에서 사은보사(四恩報謝)의 독경 창제를 하시면서 미래 만대에 걸친 영법구주(令法久住)· 광선유포(廣宣流布)의 대계(大計)를 꾀하셨는데, 특히 『법화취요초』에서 상행보살의 출현에 의한 본문의 본존· 계단· 제목이라는 「삼대비법(三大秘法)」의 명칭을 처음으로 설해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법문을 설해 밝힌 어서 집필과 제자 육성에 전념하셨습니다.
미노부에서의 대성인님의 생활은 식료품은 부족하였고 게다가 겨울에는 매서운 추위와 싸우는 나날이었습니다. 각지에서 신도가 공양물을 올리기는 하였지만 많은 제자를 육성하기에는 넉넉하지 못하여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 무렵의 생활에 관해 대성인님께서는
『소무(蘇武)와 같이 눈을 먹으며 목숨을 잇고 이능(李陵)과 같이 도롱이를 입고 나날을 지내느니라. 산림에 들어가 나무 열매가 없을 때는 공복(空腹)으로 이삼일을 지내고 사슴 가죽이 찢어지면 알몸으로 삼사 개월을 지냈느니라』(단의초 어서 904)고 적고 계시며, 또
『이 미노부산에는 돌은 많지만 떡이 없고, 이끼는 많으나 깔 것이 없느니라』(연삼매어서 어서 1592)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혹독한 가운데서도 대성인님께서는 주야로 법화경을 독송하시고 강의하셨는데, 그 강의를 청문하는 제자와 신도들이 차츰 늘어 갔습니다.
몽고 내습(來襲)
미노부에 입산하신지 5개월 되는 1274년(문영 11년) 10월 드디어 대성인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2만 5천 여명의 몽고 대군이 일본에 내습[이 동란을 일본 역사에서는 '분네이(文永)의 역役'이라 함]하였습니다.
몽고군은 10월 5일 쓰시마에 상륙, 14일 이키에 쳐들어와 무방비 상태의 섬 사람들을 살육하고 20일에는 여세를 몰아 하카타만 서부에 상륙하여 다자이후(太宰府)까지 진공해 왔습니다. 이 전란으로 쓰시마 섬의 수호(守護)[당시 일본 각 지방의 경비와 치안을 담당하던 관직, 또 그 관직에 있던 사람]와 진서봉행(鎭西奉行)[당시 일본 큐슈 지방의 치안 등을 담당하던 기관, 또는 그 기관장]을 비롯한 많은 무장과 병사들이 전사했습니다.
대성인님께서는 이와 같은 비극의 원인을
『이는 오로지 불법(佛法)의 사견(邪見)에 의한 것이니라』(소야입도전어서 어서 747)고 단언하시며, 하루빨리 나라 안의 방법(謗法)을 그만두고 정법에 귀의해야만 한다고 호소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7년 뒤 1281년(홍안 4년) 5월에 몽고가 분네이의 역을 상회하는 대군으로 다시 내습[이 동란을 일본 역사에서는 '고안(弘安)의 역(役)'이라 함]했습니다.
아쓰하라(熱原) 법난
1274년 대성인님께서 미노부에 입산하신 뒤 닛코상인은 가이, 쓰루가, 이즈 방면의 절복 홍교를 전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특히 닛코상인님이 어릴 적 수행하던 후지 지방 간바라 시쥬쿠인, 이와모토 짓소지(實相寺)를 중심으로 교세가 비약적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1275년경에는 천태종 고찰 류센지(瀧泉寺) 사가승(寺家僧) 시모스케보 닛슈, 에치고보 니치벤, 쇼우보 니치젠 등이 개종하여 귀복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절복은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 퍼져 나가 아쓰하라향 농민들이 신뢰하던 진시로, 야고로, 야로쿠로 3형제가 귀의하는 등 입신하는 사람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위기감을 느낀 류센지 주지 대리였던 교치가 막부 요인이었던 헤이노 사에몬노죠의 후원을 얻어 정소(政所, 가마쿠라 막부의 재정· 소송 등을 담당하던 기관)의 관리들과 결탁하여 반법화당(反法華黨)을 조직하여, 아쓰하라 법화강중을 깨뜨릴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1279년 9월 21일 교치는 많은 법화강중이 시모스케보 닛슈의 논에 벼 베기를 돕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무사들을 모아 현장으로 우르르 몰려와 마구 난동을 부려 농민들에게 부상을 입혔습니다. 그때 진시로 이하 20여명이 현장에서 붙잡혀 시모카타 정소에 구류되었습니다.
그리고 교치는 사전에 회유해 둔 진시로의 형 야토지의 이름으로 진시로 등을 죄인으로 꾸며 낸 비열한 소장(訴狀)을 만들어, 가마쿠라 문주소(問注所, 가마쿠라 막부의 재판을 담당하는 기관)에 고소하고 아울러 농민들을 그날 중으로 가마쿠라로 압송했습니다.
이 사건 소식을 접한 닛코상인님은 곧바로 그 상황을 미노부에 계시는 대성인님께 보고를 올렸습니다.
보고를 받으신 대성인님께서는 아쓰하라 신도들을 생각하시어 즉시 「성인어난사(聖人御難事)」를 지으시어 문하의 모든 사람들에게 단결할 것과 분발할 것을 촉구하시고 아울러 닛코상인에게 「류센지신장(瀧泉寺申狀)」을 정서(淨書)하게 하시어 문주소에 사건의 진상을 호소하셨습니다.
「류센지신장」을 제출한 10월 15일, 헤이노 사에몬노죠는 사저(私邸)에서 신문하면서, 사건의 진상에 관해서는 캐묻지도 않고 "너희들은 속히 법화 제목을 버리고 염불을 부르거라. 그렇지 않으면 중죄로 다스릴 것이니라" 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평소 법화경 신앙을 배워 온 진시로 등은 조금도 겁먹지 않고 일편단심으로 제목을 불렀습니다.
이렇듯 농민들이 변함없이 부르는 제목 소리에 격노한 헤이노 사에몬노죠는 당시 13세였던 둘째 아들 이누마 한칸 스케무네로 하여금 우는 화살(쏘면 퓨우 하고 오싹 오싹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는 화살)을 농민들에게 쏘게 하여 고문을 가햇습니다. 그러나 법화강중의 신념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고 부르는 제목 소리는 더욱더 높아만 갔습니다. 이에 광란할 대로 광란한 헤이노 사에몬노죠는 끝내 무참히도 농민들의 중심자였던 진시로, 야고로, 야로쿠로 3인을 참수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아쓰하라 법난은 당시 하위층이었던 농민들이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정법수지를 관철했습니다. 특히 고결하게 순사(殉死)한 이 세 사람은 「아쓰하라 삼열사(三烈士)」라 하며 후대 신도의 귀감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평생 대성인님을 박해해 온 헤이노 사에몬노죠는 진시로 등을 참수한 지 14년 뒤인 1293년 법화(法華)의 현벌(現罰)을 받아 일족이 모두 멸망하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본문계단의 대어본존
대성인님께서는 입신한 지 얼마 안 된 아쓰하라 농민들이 목숨을 위협하는 대난을 당하여 목숨을 바쳐 끝까지 정법을 지켜낸 신심을 가상히 여기시어 마침내 하종불법(下種佛法)의 궁극의 법체(法體)를 건립할 큰 인연의 때가 왔음을 감지하셨습니다.
이에 관해 대성인님께서는 그 해(1279년) 10월 1일에 적으신 「성인어난사」에
『이 법문을 말하기 시작한지 지금 이십칠년, 고안(弘安) 이년 태세 기묘년이니라. 부처는 사십여년, 천태대사는 삼십여년, 전교대사는 이십여년에 출세(出世)의 본회(本懷)를 이루셨느니라. 그 사이의 대난(大難) 말로 다할 수 없느니라. 오래 전에 말한 것과 같으니라. 나는 이십칠년이니라』(어서 1396)고 말씀하시며, 지금이 바로 출세의 본회를 이룰 수 있는 때라고 예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쓰하라 법난의 탄압이 한창 거세게 가해지던 때 1279년(弘安 2년) 10월 12일 출세의 본회인 「본문계단의 대어본존」을 도현하셨습니다.
「본문계단의 대어본존」은 말법만년의 유포를 생각하시어 두꺼운 장목(樟木, 녹나무) 판자에 도현하시어 제자 닛포시(日法師)에게 조각하게 하셨습니다.
본문계단의 대어본존에 관해 총본산 제26세 니치칸상인(日寬上人)님께서는 「고안(弘安) 2년의 본문계단의 어본존은 구경(究竟)중의 구경, 본회중의 본회이며, 이는 이미 삼대비법의 으뜸이니라. 더군다나 일염부제 총체의 본존이기 때문이니라」(관심의 본존초문단 어서문단 197)고 말씀하시며, 대성인님 일기(一期)의 본회 중 본회(本懷)라고 교시하고 계십니다.
6. 입멸
니치렌일기홍법부촉서(日蓮一期弘法付囑書)
1282년(弘安 5년) 9월 대성인님께서는 제자 가운데 닛코상인(日興上人)에게 본문계단의 대어본존을 부촉하시고, 아울러 당신 입멸 후 문하를 통솔하고 정법 정의를 후세에 전해 가도록 후사(後事)를 맡기셨습니다. 그 증좌로서 닛코상인에게
『니치렌 일기(一期)의 홍법(弘法), 뱌쿠렝아쟈리(白蓮阿闍梨)에게 부촉하노라. 본문홍통(本門弘通)의 대도사(大導師)일지니라. 국주(國主) 이 법을 세우시면, 후지산에 본문사(本門寺)의 계단을 건립하셔야 하느니라. 때를 기다릴 뿐, 사(事)의 계법(戒法)이라 함은 이것이니라. 특히 나의 문제(門弟)들은 이 장(狀)을 지켜야 하느니라.
고안(弘安) 5년 임오(壬午) 9월 일
니치렌(日蓮) 화압(花押)
혈맥(血脈)의 차례(次例) 니치렌(日蓮) 닛코(日興) 』
(어서 1675)라는 「니치렌일기홍법부촉서」를 주시며, 대성인님 불법의 모든 것을 혈맥상승(血脈相承)하셨습니다. 본문계단을 건립할 곳에 관해서 그때까지는 「영산정토(靈山淨土)를 닮은 최승지(最勝地)」라고만 밝히셨는데, 「니치렌일기홍법부촉서」에 구체적으로 『후지산에 본문사의 계단을 건립』이라고 유명(遺命)하셨습니다.
이처럼 대성인님께서 닛코상인에게 불법의 모든 것을 상승하신 것은, 많은 제자 가운데 닛코상인이 대성인님께 절대적인 귀의와 사제상대(師弟相對)의 거동으로 상수급사(常隨給仕, 제자가 항상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고 따르며 시중을 드는 것)를 하신 것, 그리고 깊은 학해(學解)와 고결한 인품 등 모든 점에서 가장 뛰어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가르침을 후세에 틀림없이 전하기 위해 불법의 규범에 따라 단 한 사람을 선정하여 상승하신 것입니다.
부슈 이케가미(武州池上)
만년에 병환을 앓으신 대성인님께서는 제자들이 히타치(지금의 후쿠시마현 이와키시) 온천에 가셔서 병환을 치료하실 것을 간곡히 청해 올리자, 이를 받아들여 1282년 9월 8일 닛코상인을 비롯한 제자들의 시중을 받으시며 미노부산을 출발하였습니다. 도중에 그 달 18일 부슈 이케가미(지금의 도쿄도 오오타구 지두 이케가미 에몬노타이후 무네나카) 저택에 도착하셨습니다.
대성인님께서는 이 이케가미 저택에서 제자, 단나에게 그 달 25일부터 「입정안국론」을 강의하셨습니다. 이 때의 「입정안국론」강의는 문하 일동에게 신경법중(身輕法重), 사신홍법(死身弘法)의 정신으로 광선유포 실현을 향해 정진하라는 뜻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옛부터 「대성인님 생애는 입정안국론으로 시작해서 입정안국론으로 끝난다 」고 말해져 오고 있습니다.
미노부산 부촉서(身延山 付囑書)
대성인님께서는 1282년(弘安 5년) 10월 8일 본제자(本弟子) 6인[닛쇼(日昭), 닛코(日興), 니코(日向), 닛쵸(日頂), 니치지(日持)]을 선정하신 후, 이미 법사(法嗣)로 선정된 닛코상인에게 「어본존칠개지상승(御本尊七箇之相承)」, 「법화본문종혈맥상승사(法華本門宗血脈相承事)」[본인묘초(本因妙抄)]를 윤허(允許), 수여하셨습니다.
그리고 10월 13일 이른 아침 대성인님께서는 당신의 입멸이 가까웠음을 느끼시고 닛코상인에게
『석존(釋尊) 오십년 설법, 뱌쿠렝아쟈리 닛코(日興)에게 상승하노라. 미노부산 구온지(久遠寺)의 별당(別當)이 될지어다. 거역하는 재가 출가들의 무리는 비법(非法)의 중(衆)이 되는 것이니라.
고안(弘安) 5년 임오(壬午) 10월 13일
부슈 이케가미(武州池上)
니치렌(日蓮) 화압(花押)』
(미노부산부촉서 어서 1675) 라고 미노부산 구온지 별당(주지)을 부촉하셨습니다.
「미노부산부촉서」로 유수일인(唯授一人) 혈맥상승을 받은 닛코상인을 따르지 않는 문제(門弟), 단나(檀那)는 대성인님 당신의 불법을 위배하는 비법(非法)의 무리요, 방법(謗法)의 무리라고 엄하게 훈계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닛코상인님께서는 「니치렌일기홍법부촉서」로 법체(法體) 부촉을 받으시고, 「미노부산부촉서」로 문하 전체의 통솔자를 부촉받으셨습니다. 이 두 가지 상승은 모두 닛코상인님이 유수일인 혈맥부법(血脈付法)의 본문홍통 대도사임을 명확히 밝히신 것입니다.
입멸(入滅) · 장례(葬禮)
1282년(弘安 5년) 10월 13일 진시(辰時, 오전 8시경) 모든 화도(化導)와 상승(相承)을 마치신 대성인님께서 제자, 단월(檀越)이 창제하는 가운데 61세를 일기로 안상히 입멸하셨습니다. 그 때 갑자기 대지가 진동하고 초겨울인데도 때 아닌 벚꽃이 일제히 피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본불(本佛)이신 대성인님의 입멸은 비멸(非滅)의 멸(滅)[멸 아닌 멸]이자, 멸하심으로써 상주(常住)의 묘상(妙相)을 나타내신 지극히 깊은 뜻이 있습니다.
다음 날 14일 술시(戌時, 오후 8시경)에 입관(入棺), 자시(子時, 밤 12시경)에 장송(葬送), 다비에 부쳐져 회골(灰骨)은 보병(寶甁)에 담겨져 장의는 순조롭고 엄숙하게 거행되었습니다.
장의의 모든 절차는 대성인님께서 유명하신 대로 닛코상인님이 적적부법(嫡嫡付法)의 대도사로서 총지휘를 하셨는데, 그 때의 모습을 닛코상인님 스스로 「종조어천화기록(宗祖御遷化記錄)」으로 남기셨습니다.
그 후 닛코상인님께서 초칠일기(初七日忌) 법요를 봉수하시고 그 달 21일 이른 아침 회골을 모시고 이케가미를 출발하시어 25일 미노부에 귀산하였습니다.
본문홍통(本門弘通)의 대도사(大導師)
미노부산 구온지(久遠寺) 별당(주지)으로 돌아오신 닛코상인께서는 본문홍통의 대도사로서 본문계단의 대어본존님을 수호하시면서 대성인님 회골을 모실 묘소를 정하시는 등 모든 지휘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후 수 년을 경과하자, 닛코상인님의 초발심(初發心)의 제자인 지두(地頭) 하기리 사네나가가 육노승의 한 사람인 민부 니코(民部日向)의 꾐에 넘어가 여러가지 방법을 저지르며 누차에 걸친 닛코상인님의 훈계도 듣지 않고 적대하게끔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닛코상인님께서는 더 이상 미노부에 머물러 있다가는 대성인님의 가르침이 자칫 방법 투성이가 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시어, 영법구주(令法久住)와 광선유포를 위해 1289년 봄, 본문계단의 대어본존님을 비롯해 대성인님 회골, 어서 및 그 밖의 모든 유물을 봉지(捧持)하시고, 니치모쿠상인(日目上人), 닛케(日華), 닛슈(日秀), 니치존(日尊) 등 여러 제자와 함께 미노부산을 떠나셨습니다.
그리하여 1290년 10월 12일 닛코상인님께서 후지 우에노 지두 난죠 도키미쓰(南條時光)가 공양한 후지산 기슭 오오이시가하라에 대석사(大石寺)를 창건하시어 대성인님 불법을 유포할 기초를 닦으셨습니다.
<출처 : 일련정종 입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