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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어머니와며느리 원문보기 글쓴이: 환이
향수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1927년>
이동원과 박인수가 노래로 불러 더 유명해진 정지용(1902~1950)의 '향수'는 이십대 초반의 시인이 일본으로 유학 가기 전 고향인 충북 옥천을 다니러가며 쓴 시다. 이제 곧 떠나야 할 고향이기에 더욱 간절했을 것이다. 검정 두루마기를 즐겨 입고 정종을 좋아했던 그는 몇 순배의 술잔이 돌고 나면 낭랑한 목소리로 이 '향수'와 함께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로 시작하는 '고향'을 즐겨 낭송했다 한다. 신석정 시인은 "지용같이 시를 잘 읊는 사람은 보지 못했노라" 회고한 바 있다. "시의 신비는 언어의 신비"라고 믿었던 그는 우리 현대시사에서 언어와 감각의 탁월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이 시 또한 소리내어 읽노라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는 ㅂㅂㅂ 말을 달리는 듯하고,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함추름 휘적시던 곳'은 ㅎㅎㅎ 흩어져 있는 듯하다. 실개천을 '옛이야기 지줄대는' 소리로, 황소를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으로, 아버지를 '엷은 졸음'으로 감각하는 솜씨 또한 일품이다. '해설피'가 해가 설핏할 무렵인지 느리고 어설프게(혹은 슬프게)인지, '석근' 별이 성근(성긴) 별인지 섞인 별인지 애매하지만 그 질감만은 새록하다.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아버지와 검은 귀밑머리를 날리는 누이와 사철 발벗은 아내가 집안에 있고 집밖으로는 넓은 벌과 실개천이, 파란 하늘과 풀섶 이슬이, 석근 별과 서리 까마귀가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이미 마음의 고향이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를 후렴처럼 노래하며 '그곳'을 그리듯 보여주는 단순한 시 형식은 음악적 울림은 물론 애틋한 향수의 정감을 쉽고 실감나게 전달하기에 안성맞춤이다. '흙에서 자란 마음'을 서늘옵고 빛나게 '이마받이'해보는 아침이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춘설(春雪)')롭지 아니한가. <출처: 조선 Waple Life>
이동원 & 박인수 / 향수(鄕愁)
작사 정지용
넓은벌 동쪽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흙에서 자란 내마음(내마음)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같은
하늘에는 성근 별
-----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를 허문 "향수(鄕愁)"
(작곡가 김희갑씨가 <향수>를 작곡할 당시를 회고하며 쓴 글) 향수는 잊을 수 없는 작품 중 하나다. 1988 년, 박강희 PD와 신광철 PD가 찾아왔다.
이들은 당시 정지용 시인 추모 작업을 준비중이었다.
월북 작가로 묶여있다가 해금이 된 천재 작가를 위해 곡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두 사람은 정지용 시인을 좋아하는 모임의 회원이었던 것 같다. 이들은 나와 만나기 전에 이미 다른 작곡가에게 곡을 부탁했으나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반드시 대표작인 <향수>에 멜로디를 붙여야 된다는 요구까지 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던 곳…" 시(詩)는 아름다웠지만 노래로 만들기는 어려운 시였다.
노래도 글자 수를 맞춰야 한다. 하지만 <향수>는 기존의 틀에 맞지 않는 곡이었다.
그렇다고 시를 훼손해가며 노래를 만들 수도 없는 노릇. 고민에 고민이 이어졌다. 두 사람의 요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곡을 통해 명예회복을 해야겠다는 얘기와 음반으로 제작하고 싶다는 뜻도 비쳤다. 당시에 한창 인기를 얻고 있었던 팝송 "Perhaps Love" 처럼 만들어 달라는 부탁과 함께
"Perhaps Love" 는 플라시도 도밍고와 존덴버가 함께 불러 세계적인 히트를 했던 작품이니 가수 역시 이동원과 성악가인 박인수씨가 내정됐다. 박인수씨는 외국에서 10 년 이상 공부한 사람인데다 활발한 활동으로 꽤 명성을 얻었던 성악가였다. 피아노 앞에서 날마다 음을 긁적거렸지만 <감>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10 개월이 흘렀다. 그만 포기하고 싶었다. 아내는 머뭇거리는 나를 보고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책임을 져야지 그만 둔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협박성' 충고를 했다. 10 달이 흐르자 내게 곡을 부탁했던 신PD도 다급해졌다.
두사람은 내가 없는 사이에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거의 끝나가는 모양" 이라며 "녹음 날짜부터 잡아라"라고 얘기를 했다.
아직 미완성인 곡을 두고 녹음 날짜까지 잡아뒀으니 어찌됐든 일은 끝내야 할 판이었다.
결국 곡을 넘겼다. 결과는 미지수였으나 이동원과 박인수씨는 만족해 했다. 이동원에게는 주문을 많이 했다.
"시인의 뚜렷한 사상이 담긴 노래이니 '터프하게'노래를 해라.
미성(美聲)으로 꾸밀 필요가 없다." 가수가 처음부터 완벽하게 노래를 소화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악보를 받고 자기 노래로 만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습이 필요하다. 노래 한곡이 탄생하는 데 1∼2년이 걸리기도 한다. 악보를 받아 든 가수 역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마음으로 노래를 만들어 가야한다. 이동원은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다. 차를 타고 강원도 일대를 쏘다녔다.
탁 트인 들판, 얼룩백이 황소가 노니는 목장, 이런 곳이 보이면 그 자리에서 차를 멈추고 나가 감정에 몰입했다. "아마 수천번은 불러봤을 겁니다. 그렇게 열심히 노래를 해본 적도 없어요."
이 노래가 성공한 뒤에 내뱉은 이동원의 고백이다.
허스키한 듯하면서도 맑은 음색을 가진 이동원과 힘이 들어 있는 테너 박인수 교수의 듀앳으로 부른 <향수>는 묘한 조화를 이뤄냈다. 89 년 10 월 3 일, 정지용 시인의 흉상제막식에서 이 노래를 공연했다.
발표와 함께 <향수>는 엄청난 반향을 몰고 왔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를 나누는 것조차 무의미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여기 저기 열리는 콘서트에 불려 다녀야 했다. 그러다 박교수가 국립오페라단에서 제명을 당했다. 국립오페라단의 정식 단원은 국내 최고의 성악가들만 누릴 수 있는 영예였다. 성악가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제명을 당했지만 인기는 오히려 더 높아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립오페라단의 정식단원제마저 없어져 버렸으니 결과적으로는 그가 이긴 셈이었다. 향수 - 이동원 & 박인수
<출처: mathsch님의 블로그>
시대에 갇힌 천재시인- 정지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