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국토 순례중인가
11월 2일은 일요일.
과음으로 인해 전날 새벽에 떠나지 못했기에 이번 주는 작파할
요량이었으나 잠이 깬 새벽녁에 배낭을 꾸리고 있는 늙은 이.
동서울터미널에서 삼성 경유 첫 버스에 올랐다.
삼성에서 대야리고개 까지는 또 택시 이용이 불가피했다.
한남금북에 들어가려 준비할 때부터 가진 작은 고민이 있었다.
집을 떠날 때뿐 아니라 대야리고개에서도 그 고민을 지닌 채로
정맥으로 진입했다.
어찌 하려고?
현장에서 동전 던지기라도?
고개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만난 차도에서 비로소 결정이 났다.
'다홍산 약수가든 1km' 안내판이 가리키는 다홍산 길을 버리고
높은봉을 향해 남행하기로.
선(先)주자들이 밟은 다홍산~마봉산~우등산의 동쪽 코오스에
대한 어느 종주자의 이의 제기가 있은 후 오룡골 까지의 두 길을
두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었는데.
윗두리실 차도를 건너 임도를 따르다가 583번 차도를 만나고, 동
남으로 멀찍이 보이는 높은봉을 겨냥해 지그재그를 반복했다.
밭일 하는 사창리 주민들에게 높은봉을 확인하고 높지 않은 봉이
높은봉이 된 연유를 물었으나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don't know.
무얼 가르치고 배우는 건지 '전문건설공제조합 직업전문학교'가
개간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높은봉 앞에서 여전한 궁금증을 나름대로 풀어보았다.
정맥이 통과하지만 오르기가 지난하여 148m도 높은 것이라고.
다시 만난 583번도에서 높은봉 고개에 올라 시멘트길로 들었다.
도농 불문하고 이미 생필품인 각종 차량들이기에 이런 시골에도
폐차장이 있는지 길가에 안내판이 있다.
일요일이라 조용한 쌍봉초교 담에 기대어 잠시 휴식을 취했다.
학교 담을 끼고 직진하다가 밭을 통과해 583번 도로로 진출했다.
코니아일랜드 공장, 우리밀제과 안내판과 나란히 걷다가 도로를
건너 제수리로 내려선 후 오른 143m 봉은 삼각점 덕에 버티고
있는 것 아닐까.
쌍봉초등학교
밭과 묘, 임도 다음엔 포장도로, 그 주변엔 당연히 공장들이다.
지방도로라 그러는 건가.
583번 도로는 도대체 몇번이나 만나고 건너야?
공군부대 정문에서 다시 583번 도로를 따르다가 정맥으로 올라
붙었으나 이내 다시 도로다.
내가 지금 정맥을 타는 게 아니고 국토 순례중인가.
터벅터벅 아스팔트길이 도드람사료공장과 SK주유소를 지나기
까지 계속되었다.
찜질방으로 찾아 온 장문현
마침내 583번과는 작별인가.
지겹도록 마주치고 따라붙던 도로를 떠나 잠시 동산에 오르는
기분을 느끼려 했으나 또 공장.
임도를 이리 저리 휘젓다가 한솔신약 앞을 지나 금왕농공단지
정문 앞으로 내려섰다.
82번 도로상의 방아다리란다.
정맥을 찾는다고 도로를 떠나 숲으로 올라섰으나 바로 절개지에
4처선 도로다.
공장부지인가 주택단지일까.
아직도 진행중인, 지평선을 연상케 하는 광활하고 거대한 단지
조성으로 156봉은 흔적도 없다.
부지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목우촌 앞 4차선 도로를 따라 진행
하는데 한 현수막이 번뜩 눈에 들어왔다.
'월드 보석 사우나<찜질방>'의 신장 개업 알림이다.
관광지도 아닌 이런 시골에 찜질방이라니?
공과(功過)는 차치하고 편안한 숙소가 마련된 셈이어선가.
특유의 석양 핏치가 시작되었다.
통신중계탑을 겨냥해 올랐다.
모처럼 산길을 걷는 느낌이었다.
약간 헷갈리는 곳에서는 운에 맡긴다는 기분이었다.
오룡골 영풍아파트 우측으로 떨어져 21번 국도로 내려섰다.
국도를 따라 금왕읍 무극리로 갔다.
우선 갈증을 풀어야 했다.
생맥주 한 잔을 마시려 든 집은 치킨전문 맥시칸의 금왕점.
낙동정맥 종주 때 안동과 호남정맥 때 구이에서 처럼 한 잔
마시는데 일부러 안주 주문은 하지 말라는 젊은 여주인.
짠 개시 손님이 돌아가면 소금뿌린다는데 선한 인심들이다.
시골 중화음식점 치고는 대형인 '손짜장 하림각'에서 식사하며
장문현에게 전화했다.
이 곳 금왕 출신으로 K은행을 정년 퇴직 후에 귀향했지만 영농
에는 별무 관심이고 Pro-hunter(전문 수렵가)라는 타이틀이
어울릴 만큼 사냥에 탁월한 그다.
찔질방은 의외로 지근 거리에 있었다.
통신중계탑 바로 아래 절개지에 있으니까 아까 중계탑 오르는
도로에서 바로 코앞이다.
매번 확인되는 것은 후발일 수록 좋은 시설이라는 것이다.
이 곳 찜질방도 마찬가지다.
시골 찜질방 치고가 아니라 어느 대도시에 비해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시설 아닌가.
부재중이라 통화가 되지 않았던 장문현이 전화한 후 곧 찾아왔다.
잔 정은 없어도 속 정이 깊은 사람이다.
맺고 끊는 일이 워낙 정확하여 때로는 차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人至察則無徒를 연상케 하는 성품이다.
밤참 먹으며 나누는 나의 산 이야기, 그의 사냥 이야기에 날이
바뀌는 것도 몰랐다.
술을 거의 하지 못하는 그가 나와 대작하느라 맥주까지 마셨다.
심야에 돌아갈 때에는 겨울용 등산 양말 한 켤레를 놓고 갔다.
다시 찾은 산타는 맛
어제는 정맥을 탔다기 보다 언덕길, 밭둑을 걸었다는 말이 합당할
하루였다.
야산들이 대부분 개발되어 연속성이 없다.
공장이 가로 막고 더러는 폐공장으로 전락돼 볼성 사납게 남아서
눈쌀을 찌푸리게 했다.
광대한 단지가 정맥을 삼켜버려 지그재그 했다.
고산준령을 탄 것보다 더 피로한 것은 난도당한 정맥에 마음이
저렸기 때문이리라.
뒤죽 박죽이 말끔히 풀린 새벽 고마운 찜질방을 나섰다.
너무 일찍 서둘었나.
어제 종료한 지점에 도착했으나 여전히 미명이었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잠시 21번 도로를 따랐다.
주막거리 지난 후 도로를 떠나 정맥으로 들어서서 346m 봉을
겨냥했으나 새까만 인삼밭이 가로 막았다.
어제도 숱한 삼밭을 지났지만 여기처럼 우회하게 하지는 않아
그리 부담이 없었는데.
가장 난감한 경우가 인삼밭과 수확기의 과수원 통과다.
채소밭이나 딴 작물처럼 가로지를 수 없을 뿐 아니라 근접마저도
곤란하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머얼리 우회할 때는 고백컨대 짜증스럽다.
인삼의 재배는 개성, 풍기, 강화, 금산 등 특정한 지역에 국한된
것으로 알려진 종래의 상식을 넘어 전국적이다.
한 참을 돌아 가파르게 오른 346m봉에서 남서로 계속 전진하는
동안 간혹 양쪽으로 21번 도로, 봉곡리와 백야리가 눈에 잡혔다.
300m대에 불과하나 산타는 맛도 났다.
어제와 대조적이기 때문이리라.
432m 소속리산(小俗離)은 왜 300리가 넘게 멀리 있는 속리산을
빌어왔을까.
산세나 높이, 아무 것도 닮지 않았는데.
잠시 남하를 계속하다가 동으로 틀었다.
보현산이 멀지 않게 들어왔다.
백야리 상촌과 동음리 승주골을 잇는 임도 이후의 정맥은 슬금
살금 키를 키우며 북동진하다가 활을 그리면서 동으로 뻗는다.
300m 대에서 400m 대로 올라선 정맥은 37번 국도로 이어지는
임도를 지나 남동으로 한 차례 오르게 한다.
자주 모습을 바꾸던 보현산 정상에 올랐다.
산불감시초소에 감시원이 있을 리 없다.
계약직인 그들의 계약시기가 아직 아니기 때문이다.
잊을 뻔 한 '작은 모임'
남릉을 타고 400m 봉으로 내려섰다.
소여리 큰말과 삼생리 뱀거리 사이의 고개(뱀거리재) 아래에
있는 보현약수터에 들렸다.
청결하게 관리되고 있으며 잘 알려진 약수터인 듯 물을 떠가는
차량이 빈번했다.
普賢漢錦亭도 있다.
보현산과 한남금북정맥 정자의 합성어?
정맥 종주자들에겐 비할 데 없는 오아시스리라.
보현산약수터의 普賢漢錦亭
오래 머물고 싶어 미적거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오늘이 첫 째 월요일임을 상기시키는 전화다.
<작은모임더불어>의 모태인 '작은 모임'이 있는 날.
소위 IMF 이후 매월 첫 째 월요일 밤에 모여 안부를 확인하며
소주잔 기울이기를 7년째 계속하는 조그마한 모임이다.
하마터면 잊을 뻔 했다.
걸음이 빨라졌다.
안골 임도에서 37번 국도로 탈출할까 망설이다가 좀 더 빨리
걷는 쪽으로 기울었다.
걷는 건지 달리고 있는 것인지.
곧 당도한 돌고개 이후가 문제였다.
표석 앞에서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을 들어 볼려 해도 지나가는 차량이 있어야지.
다가오는 찦차를 향해 든 내 손이 애원으로 보였나.
이미 만원인 차가 정지했으니 말이다.
좁혀 앉으며 자리 하나를 만들어 주었다.
그들은 음성의 교육청(?) 직원들로 군내 학생 마라톤대회의
코오스 사전 답사중이라 했다.
2003년 11월의 '작은 모임'을 정상적으로 갖게 된 것은 전적
으로 음성 시외버스터미널 앞까지 돌아서 간 고맙기 그지없는
그들 덕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