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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삶과 죽음은 인류역사의 진원지이며 인생의 희로애락이다. 우리는 아직도 삶과 죽음을 잘 모른다. 특별한 교육도 없었고 더구나 죽음을 준비할 마음의 여유조차 갖지 못해 죽음에 부딪히면 원초적 본능이나 관습에 따라 처리되어 왔다. 과연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 쌓여 살아가고 있다.우리가 원치도 않았는데 이 세상에 와서 살고 있고 예약하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떠나야 한다. 삶과 죽음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안인데도. 구체적이고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서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오래, 의미 있게, 그리고 더 건강하게 살기를 원한다.
더 오래라는 뜻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유예시켜 보자는 것이고,
더 의미 있게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삶의 방향과 가치 설정에 몰두하는 것이다. 더 오래, 더 의미 있게 살기위서는 무엇보다 건강이 우선 돼야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뒷받침해 준다. 삶이란 법칙이 있는 것이고 꼭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듯싶다.
죽음은 자신이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삶이 달라지고 의미가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종교적인 배경, 혹은 막연한 두려움으로 죽음을 대하고 그에 맞은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그러기에 죽음은 삶을 대하는 척도가 되고 있다.
죽음은 누구나 다 공포의 대상이라 믿고 또한 본능에 가깝게 영혼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죽음이 의미하는 바는 달라진다.
인간 생명의 질은 높이지 않고 양만(장수) 높이는 것은 노인 정책에 모순을 낳고. 전체적으로 고령화가 긴병의 일종으로 변모 하고 있는 우리들의 현실이다, 한국도 평균 연령이 높고 노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데, 이는 죽음을 사고(思考)할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연장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깊은 의미를 지닌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인류 역사 태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종교인들과 철학자들이 제시한 해석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그 안에 가장 풍부하고 다각적이며 독창적인 인간사고의 보고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음이 비록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는 죽음이 과연 모든 것의 종말인가 하는 것이다.
불이 그냥 꺼져 버린다고 하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을 우리 인격은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만들어 낸 것이다. 본색을 모를 때일수록 우리는 그런 마음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덮어 버리려 한다.
죽음이란 의식이 표출되었다가 조용히 지는 것이다. 영혼이란 존재 하지도 않으며 단지 하나의 믿음일 뿐. 환생의 희망을 가지는 것도 육체적 죽음에 대한 우리들의 두려움이 반영된 것이다. 사람들은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을 두려워 할 뿐이며. 그 자체도 마음이 해내는 것뿐이다. 죽어서도 우리는 존재한 다는 것을 다 마음에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니까 영혼의 관념은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해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려면 생에 집착하지 말고, 삶을 소유물로 인식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왔다 가는 나그네처럼” 그네는 온 것만큼 가고 간만큼 온다. 한 치의 에 누리도 없고 덤도 없다. 인생도 그런 것 같다.”라고 덤덤히 생각하면 될 것을, 사람은 보다 더 무엇인가를 알려고 과학. 철학. 종교계가 서로 연구하고 살아온 것이다.
동양에서는 자연을 가장 완전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밖에 다른 세계를 설
정하지 않았다. 죽음이란 이 세상 밖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동양에서는 대부분의 사상이 기독교처럼 내세를 말하지
않는다. 전통 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최고 단계를 보더라도 유가의 성인이나, 노장
의 신선은 죽음 다음에 되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서 되는 존재다. 서양은 현실과 사
후 세계를 분리 했으며, 종교적으로는 천당과 지옥이 사후 세계에 대한 설명이었다.
동양에서는 氣가 흩어지는 것이 죽음이고, 모이는 것이 삶이라고 보았다. 유가의 우
월성은 실천 행위에 대한 죽은 뒤 복을 받기 위한 실천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
한 실천뿐이다.
자신이 무엇을 하든 죽음이란 것은 언제나 자신의 삶에 붙어 다닌다. 죽음은 삶의
그림자다. 죽음을 직시하라, 신과 함께 있으려면 자신이 신의 것이어야만 한다.
한편에서는 우리 모든 것이 생명과 함께 끝나는 것이 않이고 오히려 죽음에 의해서 그 모든 것이 현존하는 아름다운 질서로 돌아가는 것이고. 또한 죽음이야 말로 영원히 자유로워지는 것이며 현실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일이라고 믿고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안이라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며.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고 떠나 버리는 두려움 때문이다.
현실은 온갖 사물이 서로 뽐내며 살아가고 있지만 모두가 각자의 뿌리로 돌아가게 된다. 뿌리로 돌아가기 때문에 고요하다(靜). 고요하기 때문에 본성을 회복한다고 보고 본성을 회복하는 것을 자연의 도리라고 하며, 이 자연의 도리를 아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낙엽은 떨어져 뿌리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낙엽은 생명의 소실, 즉 죽음을 의미한다. 뿌리(根)라는 글자는 도가에서 자연무위를 의미한다. 그리고 죽음은 삶의 절정이자 마지막 자신을 새롭게 순례하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은 삶보다. 더 신비스럽다. 죽음과 삶은 더 높은 행태로 가고자 하는 생명 자체의 싸움일 뿐이다.
죽음은 삶의 거울이다. 죽음에 대한 의식이 날카로움을 잃을 때 우리의 삶은 떠오르는 아침 해 앞에서 빛을 잃은 별들처럼 생기를 잃게 될 것이다. 사람이 죽는 방법은 그 사람의 방식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의 내부에 죽음이 찾아오면 더 이상 개체로서의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을 존재의 한계로 보려고 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경계선을 뛰어 넘으려한다.
죽음에 대한 종교학적 이해 죽음이란 보편적인 인간 현상으로 어느 공동체나 체험하는 사자(死者)와의 완전한 단절을 말한다. 문화권에 따라 죽음관이 구분될 수 있을 정도로 각 공동체의 세계관이 이 안에 집약 되고. 생명(生命)의 소멸인 죽음은 삶과 상반되는 개념이지만,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그 공동체가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따라서 각기의 종교 전통이 죽음에 대해 어떤 해석을 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는 일은 삶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각을 확인하는 하나의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이런 최초의 단면을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 고대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화, 페르시아의 심판사상 및 고대 중국인의 조상신 사상에서 살펴볼 수 있다. 죽음에 대한 가장 오래된 해석을 문자(文字)로 통해 기록으로 남긴 고대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죽음을 실질적으로 삶의 끝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죽음 후의 세계를 아랄루라고 불렀는데, 먼지를 먹는 어두운 지하 세계, 즉 모든 기쁨이 사라진 그림자의 나라라고 생각하였다. 신(神)이 인간에게 부여한 운명인 죽음에 도전한 길가메시(Gilgamesh) 서사시의 끝은 길가메시 역시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평범한 사실보다도 운명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체득된 지혜가 그의 삶을 그만큼 풍부하게 해 주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시 말해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죽음을 신(神)들이 결정한 인간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했지만, 그런 인간의 한계성 인식이 현 존재를 무의미하게 하기보다는 더 지혜롭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죽음은 예나 지금이나 생명에 대한 애착을 표출한 인간 본성 깊이 뿌리박힌 강한 본능인 반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필연적 사건으로 보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애착이 강할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강해질 수밖에 없다.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역시 죽음은 우리를 언제 불러 갈지 모르며 죽음의 그림자는 언제나 삶 위에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죽음 후의 세계에 대해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궁금증에 비해 해석도 다양하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생물들은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지고 죽는다. 죽더라도 제대로 죽고 사라지더라도 멋지게, 최소한 추하진 않게 사라져야 한다. 그러려면 “나는 무엇으로 또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가?’“하는 물음 앞에 분명하게 답해야 하고. 그런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돈 많고 힘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면 돈과 권력에 편승하겠지만, 정녕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면 자기만의 향기를 뿜어야 한다. 꽃향기는 천리를 간다지만 사람의 덕과 가치는 만년 동안 향기로운 법이다.
우리의 마지막 임종은 언제일지 모르며. 오늘일 수도 있고 내일이나 모레일 수도 있다. 지나간 삶을 후회해도 아무 소용없다. 이제 남은 세월을 재조명해 볼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죽음이란 적당한 시기에 모든 것이 미리 준비된 상태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에 들러 쌓여 편안히 죽음을 맞으며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결론적으로 건강하고 즐겁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몰입하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는 것이다.
삶은 죽음 속에 녹아든다.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
죽음 너머의 세계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죽음이 인간으로서 가장 근원적인 고민 중 하나인 만큼 지금까지 수많은 철학자와 선현들이 이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해 왔지만 아직 속 시원한 답은 없다.
* (쇼펜하우어)삶의 진정한 목적은 죽음이다 그의 염세주의 적인 주장은 삶의 고통
으로부터 해방감을 추구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인간이란 하나의 욕망
덩어리다. 끝없는 욕망 때문에 지속적인 만족이 근본적으로 없기 때
문에 인간은 고통스럽게 느낀다. 따라서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궁핍
에 대한 투쟁이다.
* (스피노자) “철학자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명상이 아니라, 삶에 대한명상이다. 즉 죽음은 “성장의 마지막 단계”라고
* (아폴로니우스)겉으로 보이는 것, 모양 말고는 어떤 것도 죽지 않는다. 본질에서 자연계로 건너가는 것은 탄생이요, 자연계에서 본질로 돌아가는 것은 죽음처럼 보일 뿐. 실제로 창조 되거나 사멸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다만 눈에 보이거나 안보이게 될 뿐이다.
* (스코트)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로써는 죽음이 변화 한 다고 믿는다. 낮에서 밤으로 변화하듯이 언제나 또 다시 다른 날로 변화 되며 두 번 다시 같은 날로 오지는 않지만 오늘이 가면 또 내일이 온다, 사람의 몸에는 생명력이 빠지면 먼지로 바뀌지만, 다른 모습을 띤 삶이 그 생명력을 이어 받고,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변화는 우리 몸으로 보 아서는 끝이지만, 같은 생명력이 더 높은 단계에 접어드는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되살아남 또는 이어 짐을 믿네, 우리 삶은 이렇게 계속되는 것일세, 우리는 불편함 속에서 울음으로 인생을 시작하지만, 떠 날 때는 적어도 우리의 목표를 이룬 가운데 위엄과 완전함을 지닌 체 갈 수 있고. 죽음은 우리가 지향해온 우리 삶의 일부분인 것처럼 느낀다.”라 고 그는 말 한다.
* (빅토르 위고)무덤은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열려 있는 여행길이며, 해질 무렵에 닫쳤다가 동이 트면 다시 열린다. 내일은 이제 시작이며 겨우 기초 를 닦았을 뿐이다. 무한에서 갈망에 의해 무한을 증명한다.
* (키르케고르)인간은 불가피하게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일컬어지는 절망 속에 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점이 꾸준한 성실감을 지속 하게 만든다.
한편 죽음에 대한 인식은 바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에, 죽음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삶의 영역이 확장되는 생사(生死)관이기도 하다. 사람이 죽으면 당연히 육체는 소멸하고, 다음 단계로 옮겨가는 것은 마음인데, 그 마음에서 느껴지는 죽음을 두려워 말고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죽음은 삶의 연장이자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삶이 탐(貪).진(瞋).치(癡) 삼독에 매여 있으면 죽음도, 그리고 다음 생도 번뇌의 덩어리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수행과 선업을 통해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맑게 하면 죽음도, 다음 생도 청정하고 행복하게 맞이할 수 있다. 나아가 삶을 자재하면 죽음도 자재되고, 다음 생도 자재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해탈이다
“부처님이 설한 윤회는 실체의 윤회가 아닌. 실리적 윤회. 에너지 흐름으로서의 윤회”라며 “죄를 지어서 마음이 괴로우면 이것이 실리적 윤회이고, 나의 시체를 개가뜯어 먹으면서 나를 이루고 있던 에너지가 개의 에너지로 바뀌면 이것이 에너지 흐름으로서의 윤회”라고 설명했다.
소원 성취를 위해 관음보살을 외우고. 죽어서 극락가기 위해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며. 병의 치유를 위해 약사여래불을 염송하는 것 따위가 힌두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불교의 본질과는 관계없다는 것이다.
일부 학자는 석가모니가 돌아가시면서 “나에게 의지하지 말고. 진리와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말하자 근기가 약하고 의지심이 많은 일반 신도들이 당황하고 방황했을 것이며, 어느 선지자가 이런 신도들의 마음 상태를 달래주는 하나의 방편으로 보살이라는 의지 처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고 주장한다.
그는 “깨달음이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필연인 자연 법칙을 제대로 알아 죽음을 편안히 받아들이며, 무지에 의한 고통에서 해방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며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진리를 미리 알고 바르게 살아 편안히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죽음의 불안과 공포를 벗어난 해탈이요 열반“이라고 강조했다.
죽음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은 죽음을 기피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에 대한 깊은 사고(思考)에서 생긴다.
어느 철학교수는 “영혼의 문제는 수천 년 전부터 철학이 주제가 되어 왔으나 그 결론은 뇌의 기능을 간접적이나마 볼 수 있게 된 최근 20년 전후 사이에 나타났다.”며 “영혼은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뇌의 기능으로서 사용되는 기능적 단어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유란시아 서)에서 말한 사후 세계
기록에 보면 죽는 순간은 전혀 고통 없이 스스로 잠드는 것과 같다. 죽은 모습이 고통스러워 보이는 것은 살려는 신체적 반응일 뿐, 죽어가는 것에 대한 반응은 아니다. 자연적인 죽음에는 고통을 못 느끼는 것이 순리다.
인간이 죽음이란 관문을 통과 할 때 육신을 늙게 하는 과정을 왜 주었을까?
빼앗기지 않으려고 부둥켜 앉았던 행동들이 어리석은 짓으로 드러나는 과정(늙음)을 말 한다. 세상 것을 아무리 움켜쥐어도 결국 빈손이 된다는 웅변이다. 그 체험을 통해서 사후의 세계에 관심을 돌리고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내면 깊숙이 속삭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불편했던 이웃과 주름들을 펴 보고. 싶어지는 것이 늙음이 주는 놀라운 깨우침이 아니겠나.
물리적 관점에서는 육체와 정신은 분리되기 어려우며. 영혼이나 전생이 있다 해도 육체에서 비롯된 기억이 없다면 현재 살아있는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본다. 그래서 사후세계는 의미가 없다. 한마디로 육체가 생체 기능을 중지하는 순간 영혼은 사라지는 것이며, 정신과 영혼, 이 모두 육체에서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다.
반면 인간을 육체. 인격, 영혼의 관점에서 바로보고 인격의 종말을 죽음으로 정의 한다면 인격이 사라지고, 영혼만 윤회하는 불교, 힌두교. 등의 환생 논리 역시 육체의 죽음이 완전한 죽음이란 논리와 다를 바 없다. 결국 나와 연결된 기억. 욕구 등이 포함된 인격이 사라진 채 영혼만이 영생을 한다면 현재의 나와 인격을 찾기가 힘들다.
영생은 좋은 것인가?
죽음은 삶에 희소성이라는 가치를 부여해. 죽음의 특성이 삶을 아름답고 가치 있게 만들어 실지로 삶이 소중한 이유가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 때문이다. 따라서 삶이란 내 사후에도 존재할 의미를 갖는 일을 성취한 후에야 바로 그것이 의미 있는 삶이라고 본다. 이것이 바로 영생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나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죽고 나면 그동안 가졌던 모든 좋은 것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죽었다면 그것을 누릴 수 있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더 좋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육체적 아픔에 심한 고통을 받는 이에게 죽음이 과연 나쁘다고만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자연스레 자살이라는 문제로 이어졌다. 자살은 죽음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논의를 통해 죽음을 직면하고, 비로소 삶이 소중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삶이 완벽하지 않아도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
(영혼은 죽지 않는가? )라는 케이건 교수의 이론이다.
“삶이 끝난 후에도 삶은 계속되는가? 라는 질문은 사실 ”육체적 죽음 뒤에도 영혼은 살아남는가?“를 의미하므로 영혼불멸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논증으로 프라톤은 물질적이고 감각적이며 개별적인 세계와 대비되는 비물질적이고 초월적이며 보편적인 실재(實在) 즉 이데아(idea)를 제시했다. 프라톤에 따르면 영원하고 완벽하며 결코 변하지 않는 실체(實體), 예컨대 절대적인 정의나 선(善), 아름다움 등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아닌 이데아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이성이 비물질적이라는 것은 곧 영혼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영혼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 프라톤의 영혼불멸 논증 중 형상의 본질에 관한 주장이다. 이 논증은 “영혼은 파괴되지 않는 순수하고 단순한 존재이기 때문에 소멸하지 않는다.”는 영혼의 단순(單純)성 주장으로 이어지는데 케이건 교수는 파라톤의 이 같은 논증을 흥미진진하게 소개하고는 결국 논리적 모순으로 이뤄진 치명적 오류를 찾아내 정확히 끄집어내 펼쳐 보인다.
다음은 케이건 교수의 말을 인용하기로 한다.
(죽음의 본질에 관하여)
우리 주변에 널리 퍼져있는 죽음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것은 대표적으로 “나는 결코 죽지 안는다”라는 주장과 “인간은 모두 홀로 죽는다.” 라는 명제다.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당연히 아직 죽음을 경험하지 못해서 죽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다시 말해 죽어있는 상태 자체를 떠올릴 수 없다. 이는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얼토당토 않는 믿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케이건 교수는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The Death of ivan Ilyich)을 들어 죽음에 임박하는 순간에도 죽음을 부인하고자 하는 인간 심리의 이중성을 살펴보고 죽음 직전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죽음과 삶이 어떤 식으로 맞닿아 있는지 살핀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보편적 주장인 “인간은 모두 홀로 죽는다.”라는 명제를 분석하면서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의 이야기 A tale of tow cities” 등의 비유를 통해 이 속에는 그 어떤 심오한 진리도 담겨있지 않으며 진실도 아니라고 역설한다.
(죽음은 나쁜 것인가?)
셀라 케이건 교수는 본격적으로 죽음의 본질로부터 삶의 의미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논의한다. 첫째로 우리가 죽음을 바라보는 대표적 시각인 “죽음은 나쁜 것인가라는 의문을 파헤친다. 즉음이 나쁘다면 무엇 때문에 나쁜지 그 동안 이어져왔던 여러 철학적 주장들을 살핀 후 ”삶이 가져다주는 좋은 것들을 앗아가기 때문에 나쁘다“는 박탈 이론(deprivation account)을 죽음이 나쁜 유일한 근거로 제시한다.
또한 “나쁘다는 것은 존재하는 대상에게만 가능한 평가인데. 죽고 나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게 아니다”라는 에피쿠로스(epicurus)의 입장과 죽음이 나쁘려면 마찬가지로 비존재 상태인 태어나기도 전의 상태도 나빠야 한다는 루크레티우(lucretius)의 비판을 통해 박탈이론을 확고히 한다.
(영원한 삼은 좋은 것인가)
죽음이 나쁘다면 그 반대인 영생(永生),즉 영원한 삶은 좋은 것일까? 케이건 교수는 우리가 영원하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반문하면서, 소위천국이나 극락과 같은 영원히 행복한 삶도 막연히 좋은 것으로만 주입됐을 뿐 세부적으로 묘사 하게 되면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올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어떤 형태의 삶도 영원히 지속된다면 그 매력을 잃어버리게 되며. 무한한 삶은 그 어떤 고통보다도 가혹한 형벌임을 강조하고 모든 좋은 것들은 그것이 유한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삶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삶을 살아갈 만한 가치가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가?
삶에서 본질적으로 좋고 나쁜 것은 무엇인가?
그는 우선 이와 관련한 대표적 철학 이론인 쾌락주의(hedonism)의 입장을 소개한 뒤 쾌락(快樂)이 본질적인 행복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삶의 가치는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삶 속에 채워지는 내용물에 달려 있다고 설명한다.
피할 수 없는 무거운 죽음을 나쁜 것으로 보게 만드는 죽음의 네 가지 특성에 대해 알아본다.
“반듯이 죽는다.”는 죽음의 필연성(必然性. inevitability)
"얼마나 살지 모른다.“는 죽음의 가변성(可變性 variability)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죽음의 예측불가능성(豫測不可能性 unpredictability)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죽음의 편재(偏在性 ubiquity)성을 설명한다.
이러한 죽음의 특성을 이해할 때 유한한 삶을 인정하지 않고 죽는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이 과연 우리의 삶에서 적절한 태도인지 묻는다.
또한 “죽음은 반드시 삶을 영위하고 삶이 끝난 다음. 그 다음에 죽음을 맞이한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은 삶 자체나 죽음자체가 아니라.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과정”이라고 역설한다. 아울러 삶과 죽음은 긍정적. 부정적 상호효과를 모두 갖고 있으며 우리가 부정적 상호 효과만을 받아들일 때 삶은 나쁜 것이 돼버린다고 지적한다.
(죽음을 마주하고 산다는 것)
우리는 “나는 반듯이 죽을 것이다.”라는 사실에 대해 부정하거나 인정하거나 무시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정당한 감정인지. 다시 말해 죽음이 공포의 대상인지 논의 한다.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므로 공포가 죽음에 대한 정당한 감정도 아니라고 설명한다. 때문에 적절치 못한 감정으로 인생을 허비할 까닭이 없다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그리 많은 시간이 주어져 있지 않기에 삶을 가능한 많은 것들로 채워 넣어서 최대한 많은 축복을 누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살은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행위인가)
자살에 관해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한다. 자살이란 것은 궁극적인 자기 증오의 방편이라면서 혐오감을 갖게 한다.
첫째는 자살이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느냐며
둘째 도덕적으로 정당한 행위인가다.
합리성은 나와 관련이 있으며 도덕성은 남과 관련이 있다. 그는 우선 자살이 합리적 선택이 될 수 있으려면 죽는게 더 나은 삶이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삶과 죽음을 상대적으로 비교해 둘 중 어느 것이 나은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자살이 도덕적으로 정당한 행위가 될 수 있는지 공리주의(功利主義)와 의무론(義務論)의 관점에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논의해야 한다.
“삶은 죽음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완성되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목적이며, 죽음의 본질을 이해하면 가치가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내가 만약 한 달 후에 죽은 다면 난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좋은 것들을 누리면서 살지?
먼저 자신이 소중히 생각하고 아끼는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능히 할 수 있는 그리고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음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나?)
마음의 근본재로는 의식(순수 의식)으로 이루어 졌다.
삶 속의 경험을 여러 번 겪으면서 순수 의식 속에 그 경험의 흔적을 기록해 놓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마음이다. 그러나 마음이 자기 내면에서 소멸하게 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자기 마음이 자기 자신이 않임을 알게 될 때에, 살아서 깨달은 자는 분명히 자기 내면에서 과거 자기가 자기라 여겼던 그 마음의 덩어리들이 소멸해 버리거나 흔적만 남아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살아서 죽은 자요. 영원한 근본주의와 하나 된 깨달은 자며 구원을 얻은 자의 상태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라는 죽을 수밖에 없는 개체의 죽음이며, 그 죽음의 대가로 당신은 자신이 내면에 원래 있던 영원한 신성을 드러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개체(個體)의 죽음이다.
(죽음이란 무엇일가?)
자신을 무엇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 질수 있다. 만일 당신이 자기를 육체로 여긴다면 그것은 육체의 기능이 정지 또는 소멸이 곧 죽음이고 자기를 나라는 생각 즉 의식의 지속성 여부로 여긴다면 그에게 있어서는 의식의 지속적인 중단이 죽음이다
일반인들은 대개 자기를 자기 육신과 동일시하므로 보통사람에게 있어 죽음이란 사실은 우주 허공에서 피어났다가 소멸해 가는 꽃과 같은 존재로 우리 의식이 일시적으로 머물면서 세상을 체험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 보는 것이다.
불교
철학자들과 다르게 기존 종교계인 불교에서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 어느 종교보다 구체적이고 정밀하게 접근하고 있는데, 이는 불교가 기본적으로 ‘윤회’사상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섯 세계로의 윤회를 거치고 열반하여 최종 목적은 해탈이다. 따라서 죽음을 준비하는 최상의 자세는 당연히 윤회로 부터의 해방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공空’의 체득에 있다.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모두가 헛것(幻)이고, 가짜(假)임을 깨달을 때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유교나 도교와 달리 내세관이 뚜렷하다. 죽음은 곧 다른 삶의 시작이요. 종말이 아니라고 본다. 전생의 업보에 따라 금생에 태어나 다시 업을 짓고 죽으면 그 업과에 따라 내세가 열리지만, 반듯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안이라고 말하며. 다음에 윤회(輪廻) 유전(流轉)한다고 한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요. 하나라는 미학으로 승화되고 “삶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스러지는 것이요” 라고 말한다.
한편 죽음에 대한 인식은 바로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에, 죽음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삶의 문제까지 확장되는 ‘생사관’이기도 하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고 떠나 버리는 두려움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현상을 세속에 대한 갈애이고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의 無明이라고 설명한다. 무명 때문에 자신에게 집착하고, 나가 세속에서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에 집착하게 된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無我 無私다
儒敎( 유교)
유교에는 천지만물이 陰陽(음양) 五行(오행)이라는 氣의 집합으로 생겨나고 또한 그 기의 흩어짐으로 없어진다. 사람도 기의 모임으로 태어났다가 그 기의 흩어지는 현상을 죽음이라 하는 것이다. 유교에서는 혼과 백의 분리로 죽음을 규정 하고 있다. 혼은 정신의 주체가(양) 魄은 몸의 주체자고 陰이다. 양(陽)은 하늘로 올라가고 음은 땅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유교의 생사관은 天. 地에 근거한다.
유가의 우월성은 실천 행위에 대한 사후 보장이 없다. 즉은 뒤 복을 받기 위한 실
천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한 실천뿐이다.
그 기에는 맑고 흐리고, 깨끗하고 더럽고, 순수하고 잡된 것이 있는데 사람은 그 중에서 맑고 깨끗하고 순수한 것만을 받았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 되었지만 기의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생겨나고 없어지는 점에 있어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더불어 다 같은 자연의 일부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혼은 날아가고 넋은 흩어진다(魂飛魄散)하여 날아가는 혼을 불려 들이려고 망인의 체취가 베인 옷을 들고 지붕에 올라가 흔들면서 혼을 부르는 초혼(招魂)의 절차를 밟은 풍습이 있었다. 대가 끊어지는 것은 영생(永生)이 단절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들을 못나면 아내를 쫓아내는 칠거지악이나 다른 여인에게서 아들을 받아오는 씨받이 같은 풍속이 생겼다.
생(生)과 사(死)를 천명에 따른 기의 집산으로 볼 때 인간의 죽음 역시 자연의 기(氣)로 돌아감이다. 자연은 인간의 모태(母胎)요. 고향이다. 따라서 죽음은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우주 자연 영원한 합일(合一)이요. 우주는 영존(永存)하는 것이므로 우주와의 합일인 인간의 죽음은 인간의 변형된 영존의 시작이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유교의 생사관은 인간에 의해서가 안이라 天에딸려 있다고 보고 있다.
도교(道敎)
유교와 더불어 중국에서 발생한 도교 역시 내세보다는 현세에 중점을 둔 종교다. 유교가 내세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을 천명으로 받아들이고 자자손손 대를 이어 감으로서 영속성을 유지하려 했다면, 도교 역시 내세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죽는 것이 너무 허무해서 영원히 죽지 않는 장생불사의 성(成)선(仙)의 길을 택한 것이다. 노자가 말한 “생명이 열매를 맺고 떨어지게 하라.”라는 말이 근본사상이라 볼 수 있다.
힌두교
인더스 문명과 함께 기원전 2500년경에 발생하여 바라문교와 융합하고 불교를 파생시킨 인도의 토착 종교는 4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인도 10억 인구의 83%가 이를 신봉하고 네팔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믿고 있다.
삶은 삶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은 곧 잘 죽어야 한단 말이요. 잘 죽어야 한다는 말은 다시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말로 그것이 곧 해탈이다. 이런 뜻으로 인도인들은 믿고 있다.
기독교
고귀한 영혼이 비천한 육신 안에서 옥살이하는 질곡(桎梏)이요. 죽음은 한 육신감옥에서 풀려나는 경사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원죄설에 입각해서 그리스 철학자들이 믿었던 영혼불멸설(靈魂不滅說)이 들어와 기독교의 정통교리가 되었고. 그러므로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은 것이다.
이슬람교
기독교와 그 뿌리를 같이 하면서도 가장 크게 갈등을 빚으며, 교리가 곧 법이요. 생활규범이어서 사람의 일상생활을 극도로 불편하게 함에도 불구하고 중동 국가를 비롯해서 15억 신도를 가진 세계 3대 종교다.
땅에 내려온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인 사람은 신의 뜻에 따라 땅에서 신이 위탁한 임무를 수행하다가 정해진 기간에 자기임무를 마치면 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천국의 환경이 땅과 다르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내려올 때 변했던 것처럼 그들도 천국의 환경에 적합한 형태로 변화해야 한다.
비록 원죄는 없더라도 본의 안이게 오염된 때(허물)와 자기 스스로 지은 죄가 씻김을 받지 않고서는 순결(純潔)무구(無垢)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으로 천국으로 가는 길목에는 연옥(煉獄)과 유사한 단계를 거처야 하고, 여기에서 사함을 받는 변화과정이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죽음이다.
(기독교에서는 사람이 나면서부터 원죄(原罪)설을 주장하는데 반하여 이슬람교에서는 죄란 현세의 일상생활 속에서 가정환경이나 사회 환경에 오염되거나 인간의 자유의지로 만들어 내는 자기 자신의 범죄(犯罪)가 있을 뿐 원죄가 없다고 한다.)
이러한 모든 이론과 경험을 토대로 볼 때
모든 명상과 종교의 믿음은 자신을 죽음의 고통에 벗어나 즐거운 마음과 육체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방편일 것이며. 낙원에 대한 믿음은 오히려 많은 재앙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당신이라면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하고 묻는다면,
“죽음은 휴가를 떠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죽음은 삶이 부여 했든 것을 도로 가져가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인생이 걸어가는 길인 것이다.
죽음에 대한 동양의 사고방식은 자연을 가장 완전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
외에 다른 세계를 설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동양에서는 대부분의 사상이 기독교 처
럼 내세를 말하지 않는다. 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최고 단계를 보더라도 유가의
성인이나, 노장의 신선은 죽음 다음에 되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서 되는 존재라고
믿고 있는 반면. 서양은 현실과 사후세계를 분리해서, 종교적으로는 천당과 지옥으
로 사후 세계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지만. 우리 동양적이고 과학적인 면에서 볼 때
氣가 흩어지는 것이 죽음이고, 모이는 것이 삶이라고 본다. 이 모든 변화가 자연 속
에서 이루어짐으로 내세에 대한 사고(思考)는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이 무서워서가 안이라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며. 바로 죽음은 삶의 거울이
며, 삶의 그림자다.
실제로 자신들이 진정으로 살아온 적이 없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려면 생에 집착하지 말고, 삶을 소유물로 인식 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한편에 있는 사람들, 즉 신(믿음)과 함께 있으려면 자신들은 신의 것이 되어야
만하고. 그렇게 그와 같이 행동함으로 영생할 것이라 보여 진다.
실은 노자가 “생명이 열매를 맺고 떨어지게 하라.”고 말한 말씀이 귀에 익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