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년 종업식이 끝난 1967년 2월 23일 부터 약 1주간인 봄방학 기간동안, 나는 한양엘 가보았어요....ㅎ
2월21일날 경무와 같이 우등상장을 받고, 이튿날 22일 학교에 오니 경무는 결석을 했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경무는 춘천으로 전학 갔기 때문에 못본다고 하셨다. 서운했지, 나와 아주 가깝게 지냈는데,
그리고 그 이튿날 부터 봄방학에 들어 갔기에 23일 이다.
옥개살던 경무 아버지는 공무원 인것 같았다.
경무와는 등교시에도 충주네 마당위 3거리에서 만나고, 하교시에도 늘 거기서 헤어졌다.
23일 일찍 조반을 마친 나는, 부친과 함께 읍내 가는 길을 서둘렀다.
꽤 쌀쌀한 날씨여서 당시 유행하던 까만 털신을 신었지만, 장갑 없는 손은 주머니에 쿡 찔렀다.
길에 깔린 서릿발을 '오도독 오도독' 밟으며 입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 올랐지만,
가벼운 발걸음은 이내 신작로(新作路)에 접어 들었다.
신작로는 연미정에서 옥림리 명선집이 있던곳 까지의 구간을 말한다. 일제시대에 길을 새로 만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이곳 만이 아니고 전국에 신작로라고 붙여진 곳이 많다.
아마 이것이 태어나 3-4번째 강화읍 나들이 인것 같았다.
읍내에 버스 정류장은 강화차부(江華車部)와 인항차부 2개로 나뉘어 져 있었다.
지금있는 우리은행 오른쪽에 대합실이 있고, 그옆에 인항차부 자리인데 강화군내 버스가 주류가 아니었나 싶고,
강화차부는 주로 시외버스 인것 같았다.
버스는 3가지 종류 였다.
1- 합승버스 ......이것은 25인승 정도로 작은 버스, 속도가 빨라 요금이 비싸다고 했다. 댓수는 많지 않은듯.
2- 완행버스 ...... 현재 완행과 같은것.
3- 급행버스 ...... 70년 이후에 직행으로 바뀜.
모든 버스는 총각인 남차장과 아가씨 여차장, 기사 아저씨 이렇게 3명이 있었다.
여차장은 요금받는일이고, 남차장은 짐을 든 승객이 많았으므로 짐을 싣고 내리는 일을 주로 맏았다.
차가 빠꾸할땐 남차장이 버스 뒷쪽에 가서..
아아~~~ 우라이우아~~으~~~ (아...흉내내기 어렵네....간단히 오라이 하면 될것을....ㅋ)
1970년 이후로 남차장 제도는 없어진것 같음.
인천행 하고도 급행에 몸을 실었다.
부친께서는 나를 기차와 전차 모두를 태워 주시기 위해 일단 인천으로 방향을 잡았다.
서울인천간 경인선 기차.
당시 읍내만 포장도로 일뿐, 가꾸지 쪽 현재 강화군청 앞으로 조금만 벋어 나면 비포장 이었다.
비포장길 먼지와 비올때 흑탕물 처리 때문인지 버스 내부에는 청소도구가 실려 있었다.
승객은 10여명 정도로 그리 많지는 않았다.
비포장에 들어서니...
길에서 나는 소음, 유리창 덜덜 거리는 소음. 청소도구인 빠께스에 빗자루와 비누통이 담겼는지..
좌우지간 3종 셋트, 소음요소는 기가 막힌 화음을 연출했다....와달달달.....
기사 아저씨는 재미 붙였나 보다......와달달달....
불평하는 승객은 없었다.....와달달달....
이건 급하게 가는 급행이여...그래서.....와달달....
'엠뽀드'를 아시나요?
우여곡절 끝에 가꾸지 나루터에 당도 했다.
현재 사용중인 강화대교가 있는자리다.
친구 여러분 다리는 없어요...착각 마시길....
당시 차량이라는건 대부분 버스 였고, 승용차나 찝차는 별로 없었다.
우리보다 먼저와서 기다리는 차량은 대여섯대 정도로 많지는 않았다.
내판단에는 6.25이후 부터 인걸로 생각 되는데 인천상륙작전에 사용되었던 LCM을 이용해서 차량과 행인을 건네 주었다.
그런데 LCM을 민간측에서 아마도 'LCM 보트'로 부르다가, 말을 줄여서 'M보트', '엠뽀드' 라고 불린듯 하다.
(내가 군시절 LCM을 많이 타보았으므로 LCM은 글을 달리해서 추가 설명 하겠슴.)
엠뽀드는 버스나 트럭은 1대만 실을수 있고, 작은 승용차는 2대를 실을수 있었다.
차를 먼저 태우고 좌우 빈공간에 행인이 타고, 내릴 때는 반대로 행인이 먼저 내리고 차가 후에 내리면,
텅빈 엠보드에 반대 행선인 차가 먼저 타고 빈공간에 행인이 탔다.
지금은 걸어서 강을 건너는 행인이 극히 없지만, 당시는 걷는 행인이 많았다.
즉 강화와 군하리 정도가 행선인 사람은, 버스를 이용치 않고 걸어 가는것 같았다.
차비 절약일수도 있고, 원래 옛날부터 그리했으니까...? ..ㅎ
차례가 되어 우리가 탄 버스는 승선을 위해 바다에 내려가는데, 온통 작은 바위돌을 깔아 놓은듯 했다.
바위돌 사이를 타이어가 통과 하니 버스는 좌우로 심하게 요동 쳤다.
배는 물때가 않맞아서 인지, 육지와 몇미터 떨어져 바다에 있었고, 철썩이는 파도에 타이어를 적시며 엠보드에 승선 했다.
차가 승선완료하면 빈공간에 행인이 타고 앞에 출입문을 닫는다.
엠보드는 시커먼 연기를 내 뿜으며 바다로 깊이 내려가 방향을 바꾸고,,,,드디어 김포쪽 성동나루로 전진.....
뱃소리도 요란 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성동 나루에 당도할 무렵 뭔가 높이 쌓고 있는 시커먼 건축물이 있었다.
부친에게 물어 보니 강화다리 공사중이라 하셨다.
그 다리가 바로 1969년 1월1일 개통했던 강화 구대교의 공사중 장면 이었다.
이 건(件)으로 심도직물 김재소 사장이 강화군 국회의원을 오래 한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3학년 겨울 방학 때인데 그때 얘기를 잠깐 하자면....
그때 박대통령이 온다고 해서 대통령 본다고 동네 꼬맹이들을 데리고 무려 20리 길을 간적이 있다.
당시에 가꾸지 뒷산은 민둥산이어서 나무도 없고, 나는 대통령을 보기 위해 높은곳으로 올라 갔다.
그야 말로 人山人海 였다.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픈데 마침 내주머니에 10원 짜리 지폐가 한장 있었고, 양은 다라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사과 장사 아주머니에게 사과 1개를 사서 애들과 쪼개 먹었다.
너무 힘들고,다리 아프고, 배도 고프고 해서, 대통령도 못보고 애들을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 왔다.
무려 40여리를 고무신으로 걸은 것인데,
동네에 도착하니 애들 없어 졌다고 난리가 난 모양이다.
다시 엠뽀드 얘기로 가서.....
배의 앞부분에 붙어 있는 쇠창살 같은 문은, 올려서 문을 닫고, 내리면 그위로 행인과 차량이 딛는 발판 역할을 한다.
문을 내리면 창살 사이로 파도가 쳐 올라 오므로 행인은 발을 적실수도 있다.
성동 나루에 도착하여 역시 행인이 먼저 내리고 우리가 탄 버스가 좌우로 요동치며 내렸다.
내눈에 행인이든 차든 배삯을 내는 장면은 보지 못했다. 무료였나 ??
가꾸지 나루터를 건너는데 걸리는 시간은??
기다리는 시간 + 도강시간 하면....대략 40분 정도.?..잘모르겠다.
사실 나는 이보다 훨씬(?)전인 5세 전후에 엠뽀드를 행인 입장에서 4번 정도 타보았다.
외가집이 김포 보수꾸지(보구곳리)인데 옥개 방죽에서 건너다 보이는 김포쪽에
옛날에 방앗간 기계 소리가 들리곤 했는데 바로 그 방앗간 윗집이다.
왕리물(관이 옥경이가 사는 동네)경유해서 천석다리를 건너 가꾸지를 가고, 거기서 엠뽀드로 건너서
보수꾸지를 가는 것이다. 아마 40여리는 될것이다.왕복은 80리.
거기는 내또래의 손녀가 있었는데 이름이 '조덕자'라고 했다. 그애와 재미있게 놀았는데 놀이 방법이 강화와는 조금 달랐다.
5세 무렵 첫번 만났을 때는 친하게 놀았는데, 6-7세 무렵 두번째 만났을때는 나를 기억 못하는 듣했다.
기억하는 내가 이상한 건가?
내가 18세 되던해에 그곳에서 온 어느 사람에게 덕자 얘기를 꺼내니 그런 애는 없다고 하면서.
'조수자'라는 애는 있다고 했다. 그럴리가, 아니 무슨 소리야?
내기억은 틀림 없는데 ...그럼 내가 귀신과 놀았나 ??
아마도 그애는 후에 죽었거나, 부모를 따라 다른곳으로 이주 했거나 겠지....
당시는 개명 같은건 않하던 시대이니....
외가집 어느 할아버지가 철종, 고종임금 시절에 벼슬을 하셨다고 했다.
오래된 족보를 뒤져보니 벼슬명이 다음과 같이 씌여 있었다.
'祖通政大夫'(조통정대부)
도둑질이나 나쁜짖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볼기를 치고 주리를 틀었다 하니, 요즘으로 말하면 경찰서장+면장 정도 ??
2회에....
투 비 콘티뉴.....
산에 나무만 없다면, 당시 가꾸지 나루터와 유사하다....ㅎㅎ
Landing Craft Mechanized (LCM).
첫댓글 ????
와우...넘나 놀라운 기억력에....!
지민친구의 이렇게 놀라운 기억력을 보니...
불교 경전들이..부처님 말씀들이 잘 전해져 오늘날 우리가 수행 하는데
큰 지침서가 되는 이유가 이해가 되네...^^
당시에 아마도 지민친구같은 훌륭한 분들이 많아서...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고..오고 하여 ...하다가 기록으로 남겨지고 ..지고..하다보니..
오늘날 천만다행으로 나같은 사람들도 편하게
그 때의 상황을 상상하며 ,지금 내가 늘 사경하며
행복하고 즐거운 놀이의 감사를 하는거니...^^
과분한 말씀을.... 대부분들 기억하는거 아니겠소?
아,,, 저 배에 탄 기억은 조금 난다. ㅎㅎ
근데..저런 사진을 어데서 다 구하고...? ^
나에게 사진이 좀 많은편 이라오...... 관리하기 힘들어서 그렇지......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