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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천명으로 알고 외길 걸어온 중산 이운룡 시인
“팔순의 나이지만 저는 현재진행의 시인이고 문학평론가라고 자부합니다.”
전북 문화계의 큰 어른 중산 이운룡(82) 시인은 “문학은 나의 인생이고 나의 인생이 문학이었다.”며 50여 년 동안 올곧게 걸어온 문학인으로서의 삶을 회고했다.
등단 이후 1334편의 시를 발표한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성취욕으로 오로지 ‘시인의 사명’에 삶의 의미를 부여했다. 한평생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담금질하며 옆걸음 치거나 유유자적하지 않았다. 이운룡 시인을 일컬어 ‘문학을 천명으로 알고 살아온 외골수’, ‘향토문화계의 산증인’으로 부르는 이유다.
“시란 대상을 미의식으로 표현한 언어예술이며 인간을 위해 차려진 진·선·미의 진수성찬입니다. 존재의 인식임과 동시에 미적 진실을 추구하는 산물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이운룡 시인은 “우주론적 인식을 함축성이 강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시의 생명이고 예술의 진수”라며 “나의 시는 감각적 묘사보다는 세계정신을 담아내기 위해 진화와 변모를 계속하고 있다. 모든 욕망으로부터 해방되니 이제야 시가 쉽게 나온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운룡 시인과의 일문일답이다.
—향토문화계의 큰 어른이다. 문학인생을 뒤돌아본다면?
“문학은 나의 인생이고 나의 인생이 문학이었다. 내가 추구해온 시세계는 네 항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자연과 문명과 인간이 조화된 세상 구현, 둘째 전인격적 존재 인식을 표현하는 총체시학總體詩學 확립, 셋째 바르고 아름다운 문학사회 건설, 넷째 분명한 이념과 조화를 이룬 중도적 편집성 고양高揚 등이다. 문학인은 정신적 자양과 삶의 향기를 체득하여 당시대는 물론 역사적 문화 전통과 통섭하고 교감하는 데서 그 의미와 가치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한 의미와 가치는 영원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나와 시, 시와 나는 분리할 수 없는 일원적 일체유심一體唯心으로 보편적 인생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중학생 때부터 8순까지 지칠 줄 모르고 전심전령 시에 몰두했다. 그 결과 1964〜69년《현대문학》시 3회의 추천을 완료하고 등단한 이후 2016년 8순 기념으로 800편의 시를 묶어낸 『이운룡 시전집』 1,2권과 2018〜19년까지의 시 534편을 2025년『이운룡 시전집』3권으로 묶어낼 예정이다.
문학을 천명으로 알았던 나는 문학을 위해, 나를 위해 한평생 담금질하여 무쇠가 칼과 괭이가 될 때까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목적에 전념하였다. 나의 삶은 정도正道 직선과 긴장의 질주였다. 옆걸음 치면서 타인의 어깨 너머를 넘보지 못하였고, 유유자적 느림의 미학도 탐할 수 없었다. 나의 꼼꼼한 성격은 하나의 일이 끝나야 다음 일을 시작하였다. 시작하면 끝장을 내고 그 향내를 맡아야 직성이 풀렸다. 그렇게 철두철미했고 외곬이었고 성취욕이 강했다. 작품 집중력도 그랬다. 나의 준비성과 완벽주의 성격은 창조적 상상을 위해 쉼 없이 전력투구하였다. 나의 시창작 본심은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고 형상화하려는 의장意匠에 있다. 시란 존재의 본질 인식임과 동시에 미적 진실을 추구하는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숨 돌리고 인생과 문학을 정리할 때가 왔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불청객 세월이 가르쳐준 결과다.
시인은 시를 찾는다. 시는 도처에 있다. 명상하고 숙고한다. 긴장의 끈을 졸라맨다. 그 다음부턴 주제의식에 따라 언어를 구조화하면서 첨삭을 거듭한다. 시상詩想을 더 정확하고 풍부하게 표상하기 위해서다. 이때가 바로 대상의 본질 탐색을 위한 집중력과 철학적 안목, 시정신의 심화 확충, 밀도 높은 치밀한 언어를 필요로 하는 단계이다. 그처럼 신중하고 꾸준한 지속성 가운데 새로운 변모를 추구, 내면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하면서 한 편, 한 편의 시를 위하여 전심전령 언어의 형상화에 투신했다. 마음속에 무르익은 시를 쓰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에서 정리해 놓고 한참 잊어버리고 있다가 다시 몇 번을 수정한다. 그쯤 돼서야 나는 후회하는 일을 덜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으로서, 문학인으로서 그 폭 넓은 활동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그 열정의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가?
“릴케의 말처럼 시는 곧 나의 체험에서 온다. 체험 없이는 시도 존재할 수 없다. 나의 시는 언어와 미와 철학 또는 역사의식과 그 융합에 있다. 대상(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생의 의미와 가치를 미적으로 인식하려는 정신에서 시가 태동한다. 그래서 대상이 내포하고 있는 본질적 의미가 무엇이냐에 집중하게 된다. 그에 따라 시의 근저에 깔려있는 최소한의 관념은 자연스러운 개연일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명상과 체험을 통해 인식된 원관념과 언어 감각을 결합하는 보조관념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소, 즉 시의 주제의식을 담아내기 위해 필요한 관념인 것이다. 나는 외계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대상(사물) 또는 우주 현상의 본질적 실재를 미적 감각과 시 정신으로 탐구해 보자는 미의식에 의하여 형상화된 언어 예술이 나의 시詩인 것이다.
존재란 내가, 우리가, 여기에 있고 가족과 이웃이 있는 공간, 그래서 사회 질서와 규범에 따라 실재하는 현실, 각자 다르게 생각하면서 하는 일도 다르고, 거기에 물 나무 돌 산 하늘 바람 햇빛 등의 자연이 있고, 그 자체 어떤 모양을 짓고 영향을 주어 변화와 진화를 이끌어내는 표현수단, 그것이 시가 내포하고 있는 존재 그 자체이고 존재 의미일 것이다. 그런 총체적 현상을 포괄하고 있는 이 세계와 우주와 유 · 무기물 등이 존재의 실재일 것이며, 궁극적으로 ‘나’라고 하는 사람은 여기에, 이렇게 있는 하나의 자연, 그 실존이고 실재이고 존재 자체가 아닐까? 돌아보건대 어렸을 때의 적극성, 탐구심, 승부욕, 성취감 등이 나를 키운 동기였다. 왜냐하면 농촌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성공적인 인생을 찾아 꾸준히 매진한 노력과 집념으로 그만한 시적 성취와 위상을 확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8순 중반의 나는 아직도 현재진행의 시인이고 문학평론가라고 자부한다.”
—역사적 혼란기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시와 인연을 맺게 된 동기는?
“6 ‧ 25 한국전쟁 때이다. 전주로 이사 간 뒤 초등학교를 다니다 가족이 다시 고향집으로 피란 온 옛 친구 백택현의 완산초등학교 교지를 읽어보았다. 나는 여러 종별의 글들이 수록된 책을 처음으로 읽었다. 감동이었다. 특히 동시童詩에 매료되었다. 난생 처음 읽어본 아름다운 글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동시에서 “하늬바람 불어오면 /전깃줄은 쓰르렁 피리 불고요.”라는 구절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진석상 선생이 담임이었던 5,6학년 때 학급 문집과 인연을 맺은 이후 나는 지금까지 시와 함께 한평생을 동반자로 살아왔다. 6학년 때 선생께서 철필鐵筆로 눌러쓴 학급 문집 글벗은 국판 크기로 표지까지 8면쯤 되는 얄팍한 등사판이었다. 3집까지 찍어낸 그 문집에는 나의 최초의 동시 「달밤」이 수록되어 있다, 완산초등학교 교지에서 읽은 동시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었다. 어린 나로서는 가끔가다 살별이 밤하늘에 일직선을 긋고 떨어지다 자취를 감추는 별들의 고향, 둥근 달이 미세한 은가루를 뿌리는 듯 하늘 가득 쏟아져 내리던 들판과 앞산, 그 뒤의 갓봉(관암봉)과 서쪽으로 해 걸음을 따라 길고 튼튼한 팔의 근육처럼 뻗어 내린 마이산 줄기, 밤의 고요에 짓눌려 엎드린 건너 마을 양지뜸과 재뜸의 옹송그린 초가지붕들, 땅거미가 내릴 무렵 울타리와 허청이 거무스름 어두워지면서 집집마다 밥 짓는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고, 배고픈 아이들이 밥 달라고 조르는 울음소리, 걸음마다 출렁이던 섶다리 건넌 마을에서 개들이 달을 보고 짖는지, 낯선 사람을 보고 짖는지 간헐적으로 짖을 때면 아련히 되받아오던 산울림, 그러한 산촌에서의 서정과 달밤의 신비세계를 배경으로 살아온 내 생애 최초의 정서가 녹아든 언어, 그 작품이 「달밤」이라는 동시였다.
진석상 선생은 작가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것 같지만, 두툼한 문학서들이 방안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던 기억을 상기해보면 선생은 문학청년이었고, 독서를 많이 한 총각 선생이었다. 당시에는 책상과 의자가 모두 불태워 없어지고 운동장에는 군용차와 국군들이 진을 치고 왔다 갔다 하는 한국전쟁의 와중이었으며, 식사 때면 군인들이 노랗게 생긴 단무지를 스텐 양동이 가득 담아 들고 가는 것을 처음 본 나는 왜 무를 노랗게 물들여 먹는지 참 별스럽다고 생각했다. 우리 학생들은 교실의 난로를 중심으로 마룻바닥에 빙 둘러앉아 공부할 때였다. 정규 수업 시간이 끝나면 담임선생은 학생들을 그대로 앉혀놓고 이광수의 소설을 실감나게 읽어주셨다. 그때 나는 소설이란 픽션을 처음으로 만났으며, 줄거리 자체를 현실로 이해하였다.
당시는 한국전쟁 휴전 중이었는지라 제트기가 학교 뒷산 너머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와 우화정이 있는 앞산 너머로 굉음을 내며 하늘을 찢어놓고 번개처럼 사라지던 때였다. 나는 제트기 조종사가 부러웠다. 나도 크면 조종사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중학교 2학년 때에는 현대식 축사를 갖춘 대규모 양돈 사업가가 되어야겠다는 희망으로 바뀌었다. 먼저 아파트를 지어 가난한 우리 일가친척들로 구성된 직원들이 배불리 먹고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두 번째의 꿈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입학 후 시인이 되겠다는 희망으로 바뀌었다. 중학생 때 진안읍내 서점에서 처음으로 산 두 권의 책을 읽고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D · 카네기의 인생 독본과 허균의 홍길동전이었다. 홍길동전은 내가 읽은 최초의 흥미진진한 소설이었다.
두 번째 읽은 소설은 이광수의 사랑이다. 사춘기의 나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아름다운 충격 그 자체였다. 그리고 D · 카네기의 인생독본은 어떻게 사는 것이 성공적인 인생인가에 대한 잠언과 인생 체험을 통한 정신적 깨어남, 또는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는 교양서였다고 기억된다.
앞서 말한 제트기 조종사와 양돈사업의 꿈은 짧은 기간에 지워졌고, 고등학교와 대학까지 집요하게 따라붙어 다닌 것은 시인이 되겠다는 희망이었다. 그 꿈이 이루어졌으니 그야말로 나의 운명은 인생이 문학이고 문학이 내 인생이 된 셈이다.”
—등단하기까지의 과정은?
“나는 195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북대학교 문리과대학 국문학과 입학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등록금을 납부할 수 없어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 해 시인 이철균 선생의 주선으로 무주괴목초등학교 강사로 발령을 받아 교단에 서게 되었다. 2013년 전북일보 사장으로 퇴임한 김남곤 시인은 그 당시 적상산 너머 적상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학교와 청산옥이라는 하숙집에서 또는 적상산 안국사에서 만나 외로움을 달래고 이불 몇 채를 덮고 자듯 따뜻하고 푹신한 우정과 추억을 겹겹이 쌓아갔다.
이듬해 나는 전북대학교 국문학과 진학의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같은 마을 독지가 이홍의 어르신이 대학 4년 동안의 등록금을 대납해주시겠다고 우리 집을 방문하셨고 1학년, 1,2학기 등록금도 납부해 주신 어르신은 나의 하늘이요 지상의 천사이셨다. 그러나 2학년 초 4·19혁명으로 공화당 정권이 무너지고 정치사정이 악화되자 나의 등록금은 1학년을 끝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어르신의 친동생 이옥동 씨가 자유당 진안지역 국회의원이었고, 국회가 해산되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런 악순환을 예상치 못한 나는 데모대의 앞잡이가 되어 스크럼을 짜고 ‘부정부패 자유당 물러가라.’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나는 전주 중앙시장 삼거리에서 사복 경찰에 체포되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 결과는 등록금 중단이라는 사태로 이어졌으며, 나의 무덤을 스스로 판 꼴이 되고 만 것이다.
1960년 6월 혁명이 잠잠해질 무렵 육군에 입대하였다. 입대하면서도 마냥 즐거웠다. 원하던 대학생이 되어 학병學兵만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1년 6개월의 만기 제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꽉 닫힌 대학 입학의 철문을 활짝 열어주신 고향의 독지가 이홍의 어르신, 시를 지도하고 직장도 알선해주신 시인 이철균 선생님, 대학 입학을 허락하여 향학열을 불태워주신 문학평론가이며 전북대학교 교학처장이셨던 김교선 교수님, 1964〜69년《현대문학》을 통하여 추천 등단 시켜주신 김현승 교수님 등 네 분 어르신은 나의 생애 행운의 열쇠를 안겨준 은사들이시다. 그러니까 오늘의 ‘나’를 위해 뒤에서 밀고 앞에서 끌어준 그 위력, 그 은혜, 어찌 생각하면 운명적인 필연이었고 나의 크나큰 축복이 아니었던가!
대학 1학년생인 나는 ‘신영토’ 동인에 참여,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1962년 군 복무를 마치고 2학년 1학기에 복학, 2〜3학년까지 서울에서 초빙된 시인 김현승(숭실대), 문학평론가 조연현(동국대), 언어학자 이숭녕(서울대) 교수들의 집중 강의를 2년 동안 받았다. 김현승 교수는 한국문단에서 시와 시론의 정상에 있었고, 조연현 교수는 월간 문예지《현대문학》주간이면서 동국대학교 교수로서 문학평론의 정상에 있었으니 나는 전북대학 출신이면서도 한국문단 최고의 명교수들로부터 강의를 받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특히 김현승 교수의 ‘시론’과 ‘시창작론’ 강의를 받는 동안 시의 눈이 번쩍 뜨이는 개안을 의식하였다. 한국 최고 명교수의 강의를 지방대학에서 받을 수 있었으므로 나야말로 행운아였고 복덩어리였던 것이다. 그 또한 김교선 교수님께서 제자들의 장래를 위해 초빙해주신 덕택이었다.
사실 1950년대 말, 가난한 고졸 출신의 시골뜨기 앞길이란 좌절과 절망뿐이었다. 당시에는 산업화, 공업화의 생산력이 지극히 열악했다. 그처럼 낙후된 후진국 전후戰後 사회에서 나는 지게를 지고 아버지의 농사를 거들거나, 돈벌이를 위해 떠돌아야 마땅했을 형편이었다. 자유당 말기의 부패한 정치사회는 돈과 배경이 판을 치는 세상이었다. 돈과 백(배경), 두 가지 중 하나도 가진 게 없는 나에게는 앞길이 막막했다. 이철균 선생님은 ‘너는, 네 자신이 배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충고해주셨다. 뼈아픈 충격이고 교훈이었다. 이 말은 아직까지도 가슴속에 각인되어 뜨겁게 울먹인다.
이후 전북대학교에서 김현승 선생님의 시론과 시창작 강의를 들으면서부터 나의 시는 환골탈태하기 시작했다. 1962년 2학년 때의 10월, 경북대학교 주최 제5회 전국 대학생 문예작품 현상 공모에서 시 「기도」가 김춘수 시인의 심사로 당선되었다. 사실은 이 시 3연의 한 구절만 수정해오면《현대문학》에 추천하겠다는 김현승 교수님의 언질이 있었지만, 이미 작품을 투고한 뒤였는지라 후회해도 돌이킬 수가 없었다. 다시 시작詩作에 몰두했다. 4학년 졸업반이 되었다. 드디어 1회 추천 시가 발표되었다. 「방황의 시간」(1964, 3)이다. 「아침에」(1965, 7)라는 2회 추천 시도 그 이듬해 발표되었다. 그로부터 4년 뒤 3회 추천 완료시 「가을의 어휘」(1969, 4)가 발표되었다. 그렇게 오래 묵혀놓고 발표해 주실 줄을 내 어찌 예상했겠는가.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김현승 시인으로부터 추천을 받으려면 보통 6년 이상 걸렸다고 들었다. 그만큼 기초를 튼튼히 닦아야 수많은 시인들 가운데서 살아남는다는 현실을 아무 말씀도 없이 침묵의 세월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밖에도 구상 시인은 나를 자식처럼 애지중지 사랑하셨다. 그 사랑과 정성을 어찌 말로써 다 갚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나의 한평생 은인이며 은사이셨던 인연은 이철균李鐵均 선생님, 고향의 이홍의李弘儀 어르신, 김교선金敎善 교수님, 김현승金顯承 교수님, 구상具常 교수님이시다.
다섯 분 은사님은 가난을 극복하고 문학의 앞길을 열어주신 나의 큰 어르신들이다. 2018년「꺼지지 않는 불꽃」이란 시가 나왔다. 고인이 되신 은인들이 울컥 가슴에 치밀어와 쓴 시이다. 비유된 꽃들은 모두 행운을 상징한다.”
시골집 앞마당에 놓고 간 꽃다발은
영영 시들지 않는 꽃이었다.
잠긴 철문을 열어주고
구겨진 꿈을 빳빳이 다려
건너야 할 물가에서 손을 던져 잡아주었다.
나는 악마의 이빨을 딛고 강을 건넜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허공이었던 하늘에
무지개가 떠올랐다.
아, 내 생애의 가슴속 무지개 꽃다발
은방울꽃 이철균李鐵均, 고구마꽃 이홍의李弘儀, 토란꽃 김교선金敎善, 커피꽃 김현승金顯 承, 행운목꽃 구상具常이라는 별
행운의 별 그 꽃들!
무지갯빛 꽃떨기는
내 가슴속 꺼지지 않는 불꽃이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좋은 시 쓰려고 고뇌하였던 혈기는 과거의 열정과 의욕이었다. 인생을 숙고하고 성찰하면서 우주에 충만한 존재 문제에 천착하려는 시정신과 시작詩作 태도가 나이든 시인의 소명임을 늦게야 깨달았다. 이제야 시가 어려움 없이 나온다. 모든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 거침없는 자유의지,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시를 쉽게 쓸 수 있다고는 꿈에도 기대하지 않았다. 나의 인생은 문학이었음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날마다 시공간을 의식하면서 하루 또 하루 밤과 낮이 의미심장하다. 시가 나의 빛이고 찬란한 날개와 같다.
매슈 아놀드는 ‘시는 인생의 비평’이라고 정의하였다. 나의 시작詩作 태도는 인생의 비평적 성격을 띠고자 노력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삶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만물 만상과 등가等價의 실존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등 범신론적 미의식과 존재론적 심상으로 본 이 세계와 우주와 삶의 문제들이 시의 대상이다. 좀 더 심화시켜 당시대 현상과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휴머니즘으로 옹호하고자 한다.
‘시를 쓴다’는 것의 의미, 그것은 세계정신과 전인격적 인생, 존재의 총체성을 내포한 시를 쓰려는 점에 의미와 가치를 두고자 노력하는 편이다.”
—시의 본질을 정의한다면?
“시란 대상(사물)을 미의식으로 표현한 언어예술이다. 한평생 인간의 삶과 목적이 단순히 먹고 잠자는 일이라면 존재의 본질이 무의미하고 허망하지 않겠는가? 진선미, 그것은 인간이 존재해야 할 근본이고 영장이 누려야 할 지상적 목표가 아니겠는가 싶다. 모든 예술의 근원은 진선미에 있다. 시는 인간을 위해 차려놓은 진선미의 진수성찬이다.
때문에 ‘좋은 시란 무엇이고, 좋은 시가 탄생하려면 어떤 배경과 과정이 필요한가?’를 묻는다면 먼저 시는 진선미의 총체라고 전제하고 싶다. 그 배경은 인간적인 삶과 인생, 자연, 삼라만상 등일 것이다. 그러한 우주론적 인식을 압축과 함축성이 강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시의 생명이고 예술의 진수다. 진선미는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 절치 절명의 부단한 추구와 탐색의 정신력에 의하여 어느 정도 성취될 수 있는 생의 근원적 숙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소설, 수필이라는 산문과 다른 점이다. 그림으로 말하면 산문은 일종의 구상화이고 시는 추상화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동작으로 비유하면 산문은 보행이고 시는 무용일 것이다. 보행은 목적 행위의 동작이지만 무용은 동작 그 자체가 예술인 점에서 서로 다르다.”
—시작 과정은?
“시인은 끊임없이 시를 찾아 고뇌하고 방황한다. 시는 도처에 숨어 있다. 명상하고 사유한다. 긴장의 끈을 졸라맨다. 그 다음부터 주제의식에 따라 언어를 구조화하면서 첨삭을 거듭한다. 시상을 더 정확하고 풍부하게 표상하기 위해서다. 이때가 바로 대상의 본질 탐색을 위한 집중력과 철학적 안목, 시정신의 심화 확충, 밀도 높은 치밀한 언어를 필요로 하는 단계이다. 신중하고 꾸준한 지속성 가운데 새로운 변모를 추구, 내면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하면서 한편, 한편의 시를 위하여 전심전력 언어의 형상화에 투신한다. 마음속에 무르익은 시를 쓰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에서 정리해놓고 한참 잊어버리고 있다가 다시 몇 번을 수정한다. 그쯤 돼야 후회하는 일을 덜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겨울 아침 뜨락에 나와 앉았다.
덜 깬 꿈을 쫒듯
나무는 장신長身의 귀 밑에 달린
말방울을 울리고 있다.
가끔씩 고요를 잡아채면서
겨울 낮
가운데
한 발 들여놓고 있는
뜨락,
몇 마리 햇빛이 내려와
쫑알거리며 노란 깃을 접었다.
마악 모이를 들고 나온
신의 손바닥 위에
모여든다.
아, 나날은
빛나는 부리
어느새 쪼아 먹은 신의 말씀.
“제2단계, 1970년대 이후 암울한 정치적 시대상과 급격한 산업화에 의한 농촌 인구의 도시 집중, 농촌의 황폐화 등 부조리한 사회현실에 반기를 들고 풍자와 비판의 시를 쓰기 시작했다. 대표 시집은『산불 · 산불』,『이 가슴 북이 되어』,『버버리의 노래』등이 이에 속한다. 억압사회를 풍자한 시「이 가슴 북이 되어」를 보자.”
이 가슴 울리지 않는 북이 되어
한 천 년쯤 두들기면 소리 날까요?
멍들어 시펄시펄한 세월
먹피를 사발로 퍼내면서
한 주일 내내 두들겨 맞고
미사에 나가면
우리 하느님도 날 미워하시는지
악기소리가 안 난다고 짜증이고
소리 나면 곱지 않다고 윽박지르니
북이여, 나의 가슴이여!
둥둥둥 둥둥둥 울려만 다오.
곤장을 맞으면 몇 개가 더 부러져야
이 가슴 북이 되어 울릴 것인지
억울한 울음에도 소리 나지 않고
혼자 코 먹은 눈물 훌쩍이는 나의 북이여.
“제3단계, 1990년 이후 시의 중력이 나 자신의 내면세계로 돌아온 시기이다. 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 때이다. 대표 시집은『성자聖者, 반눈 뜨고 세상을 보다』,『풍경은 바람을 만나면 소리가 난다』,『산새의 집에는 창이 없다』,『사랑이 詩를 품다』등의 시집이 이에 속한다. 시「기다림」을 보자.”
기다림이란 나와 당신이
가까워지고 있는 시간의 틈새에 있다.
가까이 좀 더 가까이
기다림의 너트nut를 조인다.
시간을 늦추거나
이미 다른 길로 마음을 휘었다면
십 년 백 년을 기다렸다 해도
기다린 것이 아니다.
목마른 시간만 허공으로 날렸을 뿐
기다림이란 참는 아픔이다.
아픔이 없는 화살은 순간을 못 참아
긴 시간을 뚫고 날아간다.
가서 뉘 가슴 한복판을 뚫는다, 하지만
부활의 시간은 영원을 참는다.
당신을 기다린다, 영원의 후일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목숨을 소화해야 할까.
주검이 눈동자를 파낸다 해도
나의 기다림은 썩지 않을 빛일지니
당신을 기다린다,
영원 그 후일까지.
“제4단계, 2012년 이후의 시가 이에 속한다. 순수 가치에 대한 재인식, 인간 존재와 사물의 본질 해명, 삶에 대한 성찰 등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존재의 내면을 투시하려는 데 집중한 시들이다. 시집『어안漁眼을 읽다』,『물빛의 눈』등이 이 계통에 속한다. 시「가을의 향기」를 보자.”
가을에는 슬픔도 향기롭고 달다. 쓰레기장에서 빈 과일 상자를 차곡차곡 접는 할머니 이마에 맺힌 땀방울에도 쓸쓸한 향기가 배어 있다. 슬쩍 어깨를 치고 떨어져 누운 낙엽 에서는 주검의 냄새가 눈부시다. 시장바닥에도 끼어들지 못해 틈새를 비집고 앉은 알토 란 고구마 마늘 깻잎 생강 냄새가 상큼하지만 혀를 빼물어 눈먼 지팡이처럼 더듬더듬 짚어가며 여기가 어디야! 하고 세상맛을 보려는 다슬기의 눈 그늘에서도 어두운 향내가 닳은 국물처럼 쓰고 짜다.
저녁 햇볕에 말라 가는 바람의 살결도 향기롭고 달다. 투명한 주홍을 터져라 쟁여 넣 은 홍시, 향기만을 톡톡 터뜨리는 포도에도 가을 향기가 물들어 있다. 새까맣게 달 다. 당신의 손에서는 사과 깎는 냄새가 오물거린다. 얼굴에서는 햇볕의 향기, 가슴에서는 사랑의 향기가 익는다. 오곡백과가 노랗고 붉고 검게 타는 것은 가을이 방화했기 때문 이다. 심지에 불붙이지 않고 눈짓만으로도 말랑말랑 인화된다. 가을에는 저녁연기도 향기롭다. 밥이 다 된 냄새, 당신의 사랑 한 공기도.
“제5단계, 2017년 이후의 시다. 말기의 시는 놀랄 정도로 한꺼번에 쏟아져서 나 자신도 믿기 어려울 정도다. 중장년 시절에는 한 편을 쓰기 위해 몇 날 몇 주일 걸렸다. 그런데 80순에 들어서부터 욕심 없이 자유를 찾자,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였고, 잠에서 1시나 2시쯤 깨어 화장실을 다녀온 뒤부터는 컴퓨터 앞에 앉아 무엇을 쓸까 명상하는 한편 전에 쓴 시를 수정하고 신작을 구상하기도 한다. 이때 나의 잠이 깨어남과 동시에 감각도 깨어나 시정신이 투명해진다. 그런데 평소 잠자리에 들어서나 낮 시간에도 무엇을 어떤 제재로 쓸까를 궁구한다. 떠오르면 즉시 컴퓨터에 입력한다. 2018년 제자의 피아노연주 초청을 받아 얻은 영감을 메모하였다. 돌아와 5개의 제재를 컴퓨터에 입력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한 편씩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점심때까지 5편을 쓰고 오후에 1편을 더 보태어 하루 6편을 썼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이 들어 자유를 찾게 되고, 밤에 깨어나 시를 썼고, 입력해놓은 제재가 있기 때문에 시가 술술 나오는구나! 하는 경험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후부터 끊임없이 샘솟는 시상 때문에 아내는 건강을 걱정하여 그만 쓰라고 참견하였다. 나는 그만 둘 수가 없었다. 2018년과 19년 무려 534편을 썼다. 1964년 이후 2016년까지 800편을 발표한 작품 수와는 차이가 크다는 점에서 나 자신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시집 『틈 ‧ 생명의 집』, 『푸른 별 노둣돌』 등이 2018〜19년에 나온 시집이다. 2019년의 시「새떼」는 나이를 극복한 시라고 생각되어 옮겨본다.”
바다에서 솟아오른 새떼가
하늘 끝자락에 묻은 얼룩무늬처럼
희미한 점, 점들로 영점零點 처리된다.
푸른 공염불을 접었다 폈다
생의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도
모를 일만 남았을 뿐
한 점
나마저 잃어버린 저녁 그늘처럼
온 바다를 깔고 뭉개던 새떼는
어디로 스며들었을까.
바다 책장을 낱낱이 넘기고 뒤져보아도
물결의 갈피에서조차
흔적이 묻어나지 않는다.
지난 시간들만 마른 잎처럼 떨어져
옹송그리다 착 가라앉는 동안
하늘로 날아오른 점자點字들은
날개를 접은 별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별 하나의 깃털 속
눈을 뜨지 못한 허虛와 무無일는지
아니, 구름의 한 입자일는지
그냥 모를 일만 남았을 뿐.
“이러한 내 시의 진화와 변모의 실상은 나의 의도적인 추구정신과 탐구력의 반영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시집이 출판되고 나면 그 시들은 며칠을 못가서 나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다음 시집이 나올 때까지 잊어버려야 했다. 왜냐하면 어제라는 과거를 버려야 오늘을 맞이함과 동시에 새로운 시가 나오기 때문이다. 더 깊고 정확한 심층적 탐색, 치밀한 구상과 명쾌한 표현을 위한 자아 혁신의식이 그처럼 나를 옥죄었던 것이다.
나는 주제의식이 명쾌하고 분명하게 암시된 시를 쓰려고 노력한다. 주제가 없는 시는 시의 형태만 있고, 내용이 없는 공허감을 줄 염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단순한 시 형상의 묘사력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어예술이란 영혼의 산물이기 때문에 주제가 결여된 시는 영혼이 없는 생명처럼 공허한 느낌을 줄 것이다. 사물 대상에 집중된 통찰의 안목으로 그 내면의식을 표상해야 한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한 신념이고 시관詩觀이기도 하다. 때문에 대상의 본질 해석에서 비롯된 개성미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 과제라 할 수 있으리라.
덧붙여 말하면 직관 사물에서 인식된 감각적 묘사보다는 세계정신을 담아내려고 의도하기 때문에 아무리 하찮은 사물일지라도 거기에는 본질 해석을 위한 상징과 아이러니와 풍자적 해석, 그리고 묘사 ‧ 진술의 언술 형태를 배제할 수가 없다.
쉽게 생각하면 너와 나,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와 삼라만상, 생사에 대한 내면세계로 시의식이 집중된다고 해야 할까? 나 자신도 인생을 좀 더 숙고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느낀다. 현상계의 사물 묘사보다는 대상을 현상 너머의 더 넓고 깊고 큰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쪽으로 시상의 머리를 돌려 투시한다.”
—시가 소설, 수필 등 다른 장르와 구별되는 매력은?
“시란 대상을 미의식으로 표현한 언어예술이다. 모든 예술의 근원은 진·선·미에 있다. 진·선·미는 인간이 존재해야 할 근본이고 누려야 할 지상 목표다. 시는 인간을 위해 차려놓는 진·선·미의 진수성찬이다. 우주론적 인식을 함축성이 강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시의 생명이고 예술의 진수다. 압축된 언어는 절체절명의 부단한 추구와 탐색의 정신력에 의해 성취된다. 생의 근원적 숙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소설, 수필이라는 산문과 다른 점이다. 그림으로 말하면 산문은 구상화이고 시는 추상화라고 할 수 있다. 동작으로 비유하면 산문은 보행이고 시는 무용일 것이다. 보행은 목적 행위의 동작이지만 무용은 동작 그 자체가 예술인 점에서 서로 다르다.”
—지금까지 발표된 시와 발간된 저서는?
“등단 이후 올 10월까지 1334편의 시를 발표하였고, 현재도 발표 중에 있다. 단행본 시집은 『가을의 어휘』를 비롯해 15권. 이미 써놓은 시도 많이 적체되어 있다. 2020년부터 해마다 5권의 새 시집 『새떼』, 『빛 또는 찬란한 날개』, 『사과의 길을 걷다』, 『먼 솔바람 귀명歸命』, 『집으로 들어온 숲』 등을 발간할 예정이다. 그리고 2025년에는 이미 발간된 2권의 시집 『틈 ‧ 생명의 집』, 『푸른 별 노둣돌』의 시와 함께 7권의 시를 묶어 세 번째 『이운룡 시전집』을 발간하려고 한다. 문학이론서 및 시비평서는 『시창작 이론과 실제』, 『한국시의 의식구조』, 『직관 통찰의 시와 미』 등 12권이 있다.”
—수많은 작품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시가 있다면?
“나의 모든 시는 살아있는 나의 영혼이다. 한편, 한편 다 애착이 간다. 대표시를 물어오면 나의 모든 시가 대표시라고 대답한다. 어버이가 어떤 자식이 제일 예쁘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까? 그와 같은 심정에서다.”
—문학도 역사와 함께 변화하고 진화한다. 시의 흐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앞부분에서 질문한 ‘—시작 과정은?’과 다소 중복되는 질문이다. 내 시의 변화와 진화의 실상은 의도적인 추구정신과 탐구력, 철학적 안목과 사상이 반영된 것들이다. 더 깊고 정확하고 치밀한 심층적 구상과 명쾌한 표현을 위한 자아 혁신의식이 나를 옥죄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시대별 변화와 진화도 5단계로 집약된다.
제1단계는 1964년 이후 등단 초기로, 자연 사물의 대상에 관한 즉물적, 감각적인 이미지, 즉 관상에 의한 사물 형상의 순수서정이 시의 주조였다.
제2단계는 70년대 이후 암울한 정치적 시대상과 급격한 산업사회로의 과도기 불협화음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부조리한 현실에 반기를 들고 풍자와 비판의 시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감수성과 언어의 예술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제3단계는 1990년 이후 시의 중력이 사회현실이나 타자로부터 나 자신의 내면세계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시기다. 다시 말하면 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 시기다. 인간의 삶과 개별성에 천착하여 존재 문제에 탐닉, 본질적 의미와 가치와 미의식을 표현하고자 했다.
제4단계는 2012년 이후부터다. 시정신이 견고하고 확실해짐에 따라 순수가치에 대한 재인식, 인간 존재와 사물의 본질 해명, 삶에 대한 성찰 등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존재의 내면을 투시하려는 데 집중했던 시들이다.
제5단계는 2017년 이후 오늘날까지 쓴 시가 이에 귀속한다. 시적 고뇌와 정진의 자세로부터 해방되어 좋든 좋지 아니하든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자고 마음을 정리했다. 이후 아주 수월하게 시상이 줄을 서서 잡혀 나왔다. 나 자신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시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언어의 품격을 저해하는 노년기 푸념이 자꾸 개입하여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제지할 능력이 없다보니 그냥 쓸 수밖에.”
—창작 활동은 언제, 어떤 마음으로 하는지?
“나는 원고를 청탁 받았다 해도 아무 때나 시를 쓰지 못한다. 오랜 체험과 사유의 과정이 넘쳐날 때 문득 시 한 구절 또는 한 토막의 제재가 떠올라야 쓴다. 그러한 긴장감을 유지하려고 고뇌에 찬 밤낮을 보낸다. 몇 주일, 몇 달을, 근래에는 한두 해까지 이어간다. 2000〜01년, 2018〜19년에 그러했다. 평생의 시작생활에서 가장 빛이 번쩍인 때다. 2019년 10월에 발표된 최근의 단시「한 걸음」을 옮겨본다.”
개미새끼가 한 걸음씩
200억 광년 우주로 뛰어간다.
나의 한 걸음
빛의 한 걸음
존재의 존엄은 다를 게 없다.
번쩍!
무량한 관음 찰나의 눈빛이여!
—시의 소재는 어디서, 어떻게 찾는가?
“시의 소재는 때와 장소를 구별하지 않는다. 어디에나 있고 무엇이든 소재가 된다. 다만 어떻게 보느냐 하는 내면의 시각차만 있을 뿐이다. 일상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대상을 탐색하다 보면 소재가 아닌 것이 없다. 영감에만 의존하지 않고 의도적이고 적극적으로 탐구하면 시의 소재는 자신의 내면에 얼마든지 살아있다고 믿는다. 최초의 한 구절을 발견하면 그 다음부턴 쉽게 풀려나온다. 쉽다고 하여 함부로 쓰는 문제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문단 활동은 어떻게 하시는지?
“활발한 편이다. 지역에 국한된 문학행사이지만 충실한 시인, 문학평론가가 되려는 심정에는 변함이 없다. 한국문인협회, 한국현대시인협회, 미당문학회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문학인들을 위해 많은 배려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동기는?
“문단활동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열악한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과거에는 중앙집권적 문단활동이 심화되어 있을 때다. 신인 추천이나 작품 발표 지면이 턱없이 부족할 때였다. 그래서 중앙문단의 명성 있는 문인을 초청, 만2년 동안(1979〜80) 매월 전주가톨릭센터에서 문학 강연을 실시한 바 있다. 그것은 중앙과 지방의 연결고리를 맺고 스스로 창작 의욕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둘째는 신부나 수녀들은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신앙과 타인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데 나는 무엇을, 누구를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성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열린시문학회’ 시창작 교실을 개설하여 만 22년 동안 시 이론과 작품을 지도했다. 시창작교실은 전북지역 문인 배출의 산실이었다. 1989년부터 2019년까지 만30년 동안 2370명이 수료했다. 전국 10개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자 19명, 즉 조선일보(1명), 문화일보(2명), 한국일보(1명), 불교신문(2명), 전북일보(4명), 전북도민일보(3명), 전주일보(3명), 전남일보(1명), 광주일보(1명), 경남신문(1명) 등을 통하여 등단하였고, 문예지《월간문학》,《한국문학예술》, 《문예연구》 등에서 신인상 당선 101명으로 2019년까지 120명의 기성시인을 배출하였다. 전국 단위 문학상 수상자 100명, 연간 열린시집 발행 29집, 문학세미나 30회, 시낭송회 29회, 초청인 특강 34회 등을 개최하였다.
셋째는 지방에서도 중앙을 능가하는 문예지를 만들기 위해 1979년 문학평론가 고故 이상비 원광대 교수와 필자가 중심이 되어 ‘표현문학회’를 창립, 당해 12월 31일 무크지 창간호 《표현》을 보광출판사(사장 김종순)에서 발행하였으나 이후 전주교도소 출판부에서, 전라문화사(사장 김종량) 등에서 발행하다가 9호부터 현재까지 계간지로 확대, 회장인 소재호 시인이 주간을 겸하여 신아출판사(사장 서정환)에서 발간하고 있다. 회원은 230여 명이다.”
—‘중산문학상’을 매년 시상하고 있다. 그 의미와 향후 계획은?
“세 자녀가 아버지 문학상을 제정하자고 의견을 모아 지원하고 있다. 2012년부터 1인을 선정, 창작지원금 500만원을 2019년 제8회까지 시상하였다. 자녀들에게 고마울 뿐이다.
제정 목적은 자연과 사람의 존엄성을 문학작품으로 구현, 문학의 사회적 위상, 작품성, 한국문학 발전에 기여한 문인을 찾아 격려하기 위해서다. 문단사회의 꽃은 문학상이다. 문학상은 좋은 작품을 발표하려는 의욕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문단에서는 필요불가결한 견인차 역할을 한다. 작은 상이지만 지역 문학풍토가 활기차고 희망적으로 발전하기 위하여 계속 이바지하길 바란다.”
-서울신문 / 2019.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