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충무로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배우는 단연 김윤석이다. 일반관객들에겐 아직 이름과 얼굴이 완전히 매칭되기까지는 좀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지만, 영화를 좀 본다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사람, 김윤석의 연기가 늘 화제가 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김윤석은 요즘 나오는 영화마다 독특한 개성과 연기력을 원없이 선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요 며칠사이 김윤석의 연기가 또 한번 화제가 된 것은 바로 <타짜>때문이다. <범죄의 재구성>을 만든 최동훈 감독의 신작 <타짜>에서 김윤석은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하고 징글징글한, 그래서 극중 이름도 끔찍한 '아귀' 역을 맡아 열연했다. 자신과 화투를 치다가 지는 상대방은 그 자리에서 귀를 잘라버리거나 팔을 끊어낸다. 그래서 아귀 곧 악귀인 것이다.
인물의 성격도 참으로 극악무도하지만 이를 표현해내는 김윤석의 연기는 더 무시무시하다. 한치의 망설임이나 주저함 없이 캐릭터를 밀어붙이는데 그 힘이 스크린을 뚫고 나와 보는 이의 피부에 닿을 듯 강렬하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을 만큼 무서운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포크레인 운전석에서 내려 동구(류덕환)에게 펀치를 날리던 <천하장사 마돈나>의 아버지도 잊을 수 없는 얼굴이긴 마찬가지다. <범죄의 재구성>에서는 수사반장 천호진의 부하로 나오는데 거기서 김윤석은 진짜 형사처럼 군다. 정의고 나발이고 일단 범인부터 잡고 보는 극악스런 형사. 그런 김윤석을 보면서 사람들은 형사가 배우가 된 건지, 아니면 배우하다가 형사로 전업할 사람인지 헷갈린다고들 했다. 아침드라마 <있을 때 잘해!!>의 하동규도 저밖에 모르는 참 지긋지긋한 남자다. 그 징글맞은 연기 때문에 요즘 김윤석은 TV 앞에 모여 앉은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못된 놈', '나쁜 놈', '죽일 놈'이 다 됐다.
그 무서운 얼굴을 마주할수록 인간 김윤석의 '진짜' 얼굴이 궁금해졌다. 21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못된 놈'으로 떠오른 배우 김윤석과 인터뷰를 가졌다.
- 대한민국 '나쁜 놈'은 혼자 다 맡아 하는 것 같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악역 몇 개가 한꺼번에 겹치게 됐다. 사실은 스케줄이 빡빡하다 보니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결과물이 좋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일하는 건 좀 자제하려고 한다. 내가 힘들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도 피해가 가는 것 같다."
김윤석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인기는 실감하나. "하도 욕을 얻어 먹다 보니 내가 인기가 있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웃음) 어쨌거나 기분 좋다. 요즘 출연하는 TV 드라마에서 본처 오순애(하희라)를 버리는 역할로 나오다 보니 하희라씨 또래 젊은 사람들한테는 '찢어 죽일 놈'이라느니 별별 얘기 다 듣는다.(웃음) 그런데 또 나이 드신 분들이 보실 때는 귀여워하시는 것 같다. 식당 같은 데 가면 밥도 더 주시고 좋아해주시고 그런다."
- 악역에 대한 가족들의 평가는? "아내는 돈 많이 가져다 주니까 좋아한다. 결혼하면 그게 최고 아닌가.(웃음) 바람만 안 피우면 된다. 딸이 둘인데 하나는 5살, 하나는 이제 14개월 됐다. TV에 내 얼굴이 나오면 "아빠 나온다"하고 알아보긴 하는데 아직 인기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그런 거 잘 모른다. 오히려 내가 딸 재롱 보는 재미에 산다."
- 연극하던 시절부터 송강호, 설경구, 황정민, 유오성 등과 가깝게 지낸다고 들었다. "맞다. 하지만 요즘엔 다들 자기 먹고 살기 바빠서인지 잘 못만나고 산다.(웃음) 축하인사? 글쎄? 만나면 술이나 먹지 그런 얘기 잘 안 할 거다. <타짜>는 아직 개봉을 안 했으니 더욱 그런 인사 못들었다. <천하장사 마돈나>를 보고는 영화가 잘 나왔다고 좋아들 하더라."
- <천하장사 마돈나>의 동구 아버지는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무거운 현실을 대표하고 있는 인물이다. "동구 역을 맡은 류덕환과 세트 촬영 때 처음 만나서 내가 한 첫마디가 "너 이제부터 지옥이다"였다. 동구에게 아버지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가는 동구와 아버지가 만나는 첫 장면에서 다 설명이 된다. 동구가 자전거를 끌고 가다가 아버지가 만나고 있는 포크레인을 맞닥뜨리지 않나. 거기서 동구가 자전거를 놓치고 두려움에 떤다. 동구에게 아버지는 무서운 사람인 거다. 포크레인처럼 거대한 괴물 같은 존재인 거지."
- 눈빛도 그렇고 동구를 때리는 장면에서도 그렇고 연기가 굉장히 실감났다.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연기했다. 왜 동네에 보면 술 먹고 행패 부리고 그런 사람들 꼭 한 명씩 있지 않나. 그 중에서도 제일 많이 떠올린 게 중학교 때 선생님들이다. 나도 386세대의 한 사람인데 우리 세대 중에 학교 다니면서 안 맞고 큰 사람이 없다. 고등학생만 돼도 중학생들 참 어려 보이지 않나. 이 나이가 돼서 보면 중학생들은 다 애기 같다. 근데 그 때 선생님들은 그 애기 같은 학생들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때린 거다. 때리는 데 큰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뭐 조금 떠들었다고 해서 불러다 때린 거다. 그게 다 그 때 선생님들이 강박증을 느끼고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닌가 싶다. 괜히 학생들이 자기 자존심을 긁었다고 생각하는 거지. 동구 아버지도 그와 비슷하다. 한때 잘나가는 권투 유망주였다가 부상 때문에 꿈이 좌절됐지, 학력이 낮아서 변변한 직장을 잡은 것도 아니지, 거기다 다니던 회사에서도 잘리지, 뭐 하나 되는 게 없는 인물이다. 그런 상황에 자식마저 날 무시한다고 생각하니 사람이 이상해 지는 거다. 한 마디로 폭발 일보직전의 상태라고 할까."
타짜 ⓒ프레시안무비
- <천하장사 마돈나>의 동구 아버지나 <타짜>의 아귀, <있을 때 잘해!!>의 하동규까지 연달아 연기한 악역에 묘한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세 역 모두 남들에게 무서울 정도로 자신의 규칙을 강요하는데 마지막에 가서 그게 어긋나니까 당황하는 지점이 있다. "그 지점이 바로 악역의 묘미다. <천하장사 마돈나>의 동구 아버지도 동구가 립스틱을 칠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오히려 놀라서 아무 말을 못하고 문을 닫고 나간다. <타짜>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아귀는 고니가 왜 이렇게 패를 돌렸을까를 고민하느라고 손목에는 관심도 없다. <있을 때 잘해!!>의 하동규도 마찬가지다. 하동규는 타인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오순애가 자신의 생각과 달리 완전한 이별을 통보하자 놀라는 거다. 그 찰나의 순간에 세 인물들의 논리가 벗겨지는 거다. 완전하다고 생각했던 자기 논리가 얼마나 나약하고 얇은 거였나를 들키는 거지. 근데 세 사람 모두 그걸 끝까지 자신들의 아집으로 찍어 누르고 있다. 그러한 장면 때문에 세 악역들의 두꺼운 아집이 드러나는 거라고 생각한다."
- 그 중에서도 <타짜>의 아귀가 제일 무시무시하다. "아귀는 인간적인 면모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캐릭터다.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논리대로만 움직인다. 영화에서 고니가 평경장(백윤식)의 복수를 하려고 하니까 "복수는 뭔 놈의 복수, 복수가 너네 아버지 이름이야?"그러지 않나. 복수라는 인간적인 감정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는 거다.
- 연극 할 때도 악역을 많이 맡았나? "아니다. 연극 할 때는 주로 지식인, 시인 그 중에서도 퇴폐적이고 허무주의자 같은 캐릭터를 연기했다. 왜 흔히들 '니마이'라고 하는 역할들을 많이 했다."
김윤석 ⓒ프레시안무비 김정민 기자
- 인상이 웃을 때와 웃지 않을 때가 굉장히 다르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평소엔 잘 웃고 편한 성격인데 가끔씩 어떤 일에 집중할 때 표정이 굉장히 달라진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하희라씨는 내 얼굴에서 선과 악이 다 보인다고 그러더라. 배우로서는 좋은 얘기라고 생각한다."
- 진짜 모습은 어떤가. "그냥 옆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남자다. 잘 웃고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고 술 먹는 거 좋아하고."
- 권투와 화투와 바람 피우는 것 중에 뭐가 제일 어렵고 뭐가 제일 쉬운 것 같나? "제일 힘든 건 권투다. <천하장사 마돈나> 때문에 권투를 한달 정도 배울 때 느낀 거다. 체육관에 가서 권투 해보면 안다. 딱 20분만 해도 죽을 것 같다. 제일 쉬운 건 화투다. 아귀는 속임수를 잡아내는 인물이지 속임수 쓰면서 화투하는 역할이 아니었으니까."
- 바람 피우는 건? "난 그저 바람 피우는 사람들이 존경스러울 뿐이다.(웃음) 바람도 부지런해야 피우는 거 아닌가. 난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이 못 된다. 아내한테만 신경 쓰기도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