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철엔 산골도 때론 섬이다.
이렇게 눈보라와 혹한으로 길이 막히면 고립무원의 외로운 섬이된다.
12월 21일 새벽 6시 쯤부터 시작한 싸락눈이 곧 함박눈이 되어 하염없이 내렸다.
첫눈은 거의가 수줍은 소녀처럼 모습이 보일락 말락 날리다 마는데 ,
올해 첫눈은 아예 작정하고 폭설이다.
금새 온 천지가 설국으로 변했다.
혼탁스런 세상을 잊고 잠시 새하얀 동심의 세계로 눈을 돌리라고 하느님이 내려주신 선물인 것 같다.
오랜만에 보는 주먹같은 함박눈이라 나도 모르게 앞마당으로 나갔다.
두팔 벌려 온몸으로 흠뻑 맞았다.
생각보다 그저 무덤덤하다. 나이 탓인가!
이 눈 그치면 당장 할 일이 급하다.
노인네들을 위해 제일 젊은 우리 두 내외가 마을 고샅길부터 멀리 큰길(버스정류장)까지와
경로당 가는 눈길을 치워야 한다.
동지冬至날 이틀이나 지나 면소재지 방앗간에 쌀을 빻아와서 팥죽을 끓었다.
지난 태풍 힌남노를 이겨낸 팥이라 애착이 더 컸다.
10여 리 가 넘는 길, 얼고 막혀 내왕이 불편해서 겨우 다녀왔다.
동지팥죽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는 옛날 어른들 말이 떠올랐다.
이번 팥죽을 먹고나면 예순 아홉의 나이다.
정성스레 새알을 비벼서 군불삼아 황토방 아궁이 가마솥에 참나무 장작으로 팥죽을 쑤었다.
동네 어른들과 나눠 먹기 위함이다.
첫 한그릇을 먼저 떠서 싱크대 옆에 올려놓고 조왕신에게 절을 했다.
어머니가 하던 것을 늘 보아왔던 터라 이제는 내가 대신했다.
농경생활 중 한 해의 마지막 행사가 동지팥죽 쑤는 일이다.
이제는 할 일이 크게 없는 농한기의 계절이다.
12월 초에는 메주를 쑤어서 처마에 매달았고,
저 지난 주에는 배추 150포기로 김장을 담궜다.
딸네미 집과 서울 사돈네, 처제 등 기다리는 곳이 많아 해마다 연례행사로 담곤 했다.
갈수록 우리 두 내외가 작업하기엔 힘이 부친다.
어느덧 세밑이다.
올 한 해를 회고해 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첩첩 산중에서 1,000여 평 밭농사를 지어 수확한 농산물은 이렇다.
고추 95근(말린 것), 배추 200포기, 들깨 30되, 참깨 10되, 감자 10kg, 고구마 40kg, 메주콩 60kg, 서리태 12kg, 옥수수, 토마토, 오이, 땡초 등 모든 농작물을 자급자족했다.
거기에 토종닭 20마리를 키우다 보니 계란이 항상 남아 집에 찾아 온 지인들에게 선물을 했다.
올 늦봄의 가뭄과 9월의 큰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어 전년도의 반(1/2)도 못 한 수확에
금전으로 따지자면 총 합계 200만원도 안되지만 그래도 감지덕지다.
밭농사는 그런대로 평년작이라 마음에 들었지만 글농사는 시원찮았다.
일년 내내 수필이라 쓴 것이 5편 정도 쓴 것이 전부다.
( 그것도 마음에 든 것은 하나도 없다)
낮에 일하고 밤에 글쓴다는 것 생각보다 녹녹지 않았다.
대신에 책을 많이 읽은 것(1년동안 150권 정도 단석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과
사색과 성찰을 많이 한 것 같다.
그래도 아직 두 눈과 머릿 속에는 도시물이 다 빠지지 않았다.
맨날 산과 하늘, 별님과 달님을 쳐다보며 흙을 밟고 일을 하면서도 자연과의 일치나 동화가 힘겨웠다.
농민의 그 순박한 눈빛을 닮으려면 얼마나 많은 수행과 세월의 흐름이 뒤따라야 할까!
누에가 길고 긴 시간 동안 뽕잎을 먹으면서 잠만 자는 것 같아도 나중에는 비단실을 토해내듯이
언젠가는 절세의 문장을 표출하고자 꿈을 간직하고 있음에 산골 생활도 지겹지 않다.
외딴 섬에 사는 이유로 집 앞 개울에 사는 죄없는 사고디, 버들치와 피래미, 뿌구리가
외로운 사나이와 친구처럼 지내다 내 술안주로 희생을 당한 것에 애도를 표한다.
나이 한 살 더 먹었다고 몇 번 치과에 들락거렸고 혈압약 탄다고 내과방문이 잦았다.
생전처음으로 이의빈후과에서 가서 곰팡이균 환자로
(머리감고 물이 들어 간것을 모르고 면봉으로 들이쑤셔서 감염됨)
호출받아 대기석에서 뭇사람을 웃음짓기도 했다.
나이를 먹으니 병원신세와 타 먹는 약이 점점 증가하여 내 삶과 반비례한다.
결국 나이듬에 따라 수반되는 모든 고통과 질병, 어쩌면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드리면서 살아야지...
도연명의 귀거래사중 마지막 귀절을 음미해 본다.
樂夫天命復奚疑(낙부천명복해의)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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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및 마지막 귀절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차용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