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옥포해전
옥포해전은 조·일 7년전쟁에 있어서 조선수군이 승리한 최초의 해전이었다. 옥포는 거제도 동북방의 포구이며 가덕도와 마주보는 곳으로 오목형 해안을 끼고 있는 경상우수영 관할 해역인 것이다. 이순신이 인접해역 함대사령관인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적 침공통보를 접한 것은 적이 부산에 상륙한 다음날 밤인 1592년 4월 15일 23시경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군사와 병선을 정舟構? 전라병마절도사(전라도지역 육군사령관) 이광과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인 이억기에게 상황을 통보하는 한편, 연해안의 고을과 포구에 공문을 보내 출전준비를 지시하였다. 그 당시의 군사제도상 조정의 출전지시가 없는 한 인접해역에 원정작전을 지원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원균으로부터 이때 통보 받은 적정은 일본수군의 함선 약 500척이 낙동강 하구에 집결해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원균은 8관 16포의 수군 1만 2천여 명과 76척이나 되는 전선의 대함대를 자리하고서 3척만 거느리고 사천 쪽으로 도망쳐와 있었던 것이다. 4월 27일 새벽에 비로소 경상도 해역으로 출전하라는 유서(작전명령서)를 받은 이순신은 즉시 경상우수사 원균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문의공문을 보냄과 동시에 예하 5관 5포의 단위 지휘관에게 4월 29일까지 여수 앞 바다에 집결토록 준비명령을 하달한 것이다. ① 경상도 해역에 이르는 가장 신속하고 안전한 수로 ② 경상우수군과 만날 장소 ③ 원균의 작전계획 원균이 4월 28일 발송하여 이순신이 4월 29일 접수한 회신공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물론 이 회신내용 중에는②, ③과 ④는 허위·조작된 것이었다. 원균의 거짓말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군 지휘관의 허위문서 보고나 통보는 군사작전을 망치는 선봉이다. ① 적선은 500여 척임 ② 적선은 현재 양산과 김해의 낙동강 하구에 유박중임 ③ 경상우수군 함대를 지휘하여 적선 10여 척을 격침시킴 ④ 해상결전을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경상우수영이 함락됨 ⑤ 당포(통영앞 미륵도)에서 양도수군이 상봉 합류하길 바람 4월 28일 공문발송 당시에는 아직 일본수군이 김해강까지 진출하기 3일전인 바, 그곳에서의 적선 10척 격침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고, 그 당시의 모든 관련사료가 싸우지 않고 함대를 자괴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원균은 싸우다 역부족으로 후퇴했다니 언어도단이다. 아무튼 이순신은 4월 30일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그리고 포작선(鮑作船) 46척을 여수 앞 바다에 집결시켜 함대 기동편성을 하고, 최종점검을 마친 다음 작전계획을 토론하였다. 이때 포작선은 전선이 아니라 민간어선으로서 함대세력이 너무 고약함으로 함대를 후행하여 위장 지원함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이순신은 드디어 5월 4일 새벽 2시에 역사적인 해상결전장으로 출항하였다. 그때까지 입수된 정보판단으로는 적이 낙동강 하구에서 서진하고 있는 것으로 보나 어디까지 접근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당포까지의 직선항로를 택하지 않고 남해도와 창선도 그리고 사장도의 서부경상도 다도해 연안을 무려 380여 킬로미터나 2일간 밤낮으로 샅샅이 수색하면서 5월 5일 낮 12시경 원균과의 약속장소인 당포에 닿았던 것이다. 원균은 당포 맞은편 고성에 숨어 있으면서도 원거리를 항해해서 약속시간 내에 도착한 이순신을 외면하고 그 다음날 겨우 전선 4척과 협선 2척을 이끌고 나타난 것이다. 이때 비로소 적 주력이 옥포(거제도 동북연안)에 주박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최초 작전에 원균은 늦게 통합함대 편성에 합류했으나,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출전준비가 되지 않아 합세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순신은 원균의 함선 4척을 통합하여 새로운 진영을 짠 다음 5월 6일 오후 당포를 출항하여 한산도를 지나 진해 앞 바다의 가덕도로 우회 접근하지 않고 바로 거제도 남단의 모아포와 송미포를 거쳐 밤을 세운 다음 5월 7일 낮12시경 옥포로 기습 진격하였다. 이때 일본수군은 옥포만에 대소선 50여 척을 정박시켜 놓고 상륙하여 포구의 민가를 약탈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순신은 적이 반격태세를 갖추기 전에 양익 포위의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적선 26척(대선 16, 중선 8, 소선 2척)을 일거에 격침시켰던 것이다. 나머지는 혼비백산하여 큰 피해를 입고 부산 쪽으로 도망쳤다. 이날 오후 4시경 옥포로부터 12마일 남쪽의 영등포로 이동하여 그 곳에 유박하려 했으나 적 패잔선 5척이 마산 앞 바다로 달아나는 것을 발견하여 이들을 추격 끝에 합포(마산) 앞 바다에서 5척 모두를 잡아 불태운 다음 10마일 남쪽의 남포(창원군 구산면)에서 밤을 세우고 5월 8일 아침 일찍 진해만을 통해 한산도 쪽으로 항진중 적자포(통영군 광도면) 앞 바다에서 적선 13척과 조우하여 단숨에 11척을 격침시키는 추가전과를 올린 것이다. 따라서 5박 6일간의 옥포해전에서 이순신 함대는 단 한 척의 피해도 없이 적선 42척을 격파한 대전과를 수립했던 것이다. 이순신은 5월 9일 무사히 본영으로 귀진했다. 그러면 이상과 같은 역사적인 이순신 함대의 제1차 출전인 옥포해전 경과를 [표-1]에서 6하 원칙에 의해 일목요연하게 도표로 집약 제시해본다.
[표-1] 옥포해전 경과
본서에서 각 해전에 있어서 적군을 죽인 인원수는 최석남 장군(예)의 산출법에 따랐다. 일본의 여러 사료에 근거하여 일본수군의 당시 대선(아다케라 불렀는데 배수 톤수는 330톤, 조선수군은 100톤내외)의 평균 탑승원을 200명, 중선은 100명, 소선은 40명으로 각각 산정하여 상실된 함선수로 곱한 것인데, 조·일 7년전쟁을 통한 이순신 함대의 총전과를 합산하면 935척 126,380명인데 이는 일본군 참전 연인원이 1·2차 침공을 통틀어 44만여 명인데, 일본 스스로가 그 절반 또는 1/3의 손실을 입었다고 자인한 자료를 전제한다면 진주성 전투나 행주산성 전투에서 조선관군과 의병이 합세하여 국부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명나라 군대가 일부 전과를 수립하기는 했으나, 해전처럼 승선한 인원이 몰살한 경우의 확실한 전과에 비교하면 지극히 미미한 숫자이다. 따라서 7년전쟁을 통하여 44만의 일본군중 절반인 22만이 죽었다면 해전에서 죽은 자는 이순신 함대의 전과 12만여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지상전 전사자가 아니면 병사·아사자 일 수밖에 없다. 같은 맥락에서 일본 참전군인중 1/3이 손실되었다면 약 15만 명인데 이순신의 전과 12만여 명은 확실함으로 나머지 약 3만 명은 기타 손실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해상에서 배를 침몰시켜 수백 명을 몰살시키기는 간단하지만, 지상전의 경우 우세한 조총의 위력아래서 활이나 칼로서 적의 목을 베어 전과 보고하는 상황인 바, 수백 명의 전과를 일시에 올린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것이므로, 이순신 함대에 의한 전과보고 산정이 결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님은 강조하는 바이다. 이하의 나머지 8대 해전에서도 전과는 같은 방식으로 산출 제시한 것인 바, 오해나 부정적 시각을 갖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또 유의할 것은 당시의 목선은 철선처럼 격파되어도 완전 침몰하지 않으나, 여기에서 격침이란 표현은 대파되거나 불타서 운항 불가능한 상태에 이른 배를 말한 것이지 완전히 물 속으로 가라앉은 것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에서 승조원은 더 이상 생존이 불가능한 것이다. 아무튼 이순신 통합함대의 제 1차 출전은 전선 45척(포작선 46척은 4∼5명이 타는 비무장 어선으로서 실전에 참여하지 않고 후방에서 지원 및 연락임무를 수행함)으로 142척의 적 전선을 전무의 피해로 격파한 것은 대단한 전과였다. 이것도 모르고 선조는 서울을 탈출하여 북향 몽진 중이었는데, 5월 7일 평양에 도착하여 1개월 4일간 머무는 동안인 5월 23일 비로소 늦게 이 승전보를 접하고 너무도 감격하여 5월 23일 정4품의 장수를 3계급 특진시킨 일약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 발령했으니, 장관(將官)급 장수가 판서(判書)급인 오늘날의 차관(次官)급 장수로 파격적인 영전을 하게 됐던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의 옥포해전 승리직후 제시한 방위정책 변경 건의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순신은 당시 조정에서 방왜육전론을 도입하여 수군의 연안방어를 소홀히 해왔음을 지적했다. 그 부당성과 함께 진관(鎭管)체제로의 환원을 주장하면서 제1차 옥포승첩을 알리는 장계에서 다음과 같이 수군의 운용개념 변화와 육군의 전마(戰馬) 양성에 의한 기동력 확보를 강력히 호소했던 것이다. 그러나 멍청한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마이동풍이었던 것이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적을 막는 방책에 있어서 수군이 작전을 하지 않고 오직 육전에서 지키는 방비에만 전력하였기 때문에 나라의 수백년 기업이 하루아침에 적의 소굴로 번지게 된 것이니 생각이 이에 미치매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적이 만일 뱃길로 본토를 침범해 온다면 신이 해전으로서 결사적으로 담당하겠으나, 육지로 침범해 오면 본도의 장수들은 전마가 한 필도 없어서 대응할 도리가 없습니다........ 」 이는 전쟁발발 10여년 전에 이율곡이 시무육조(時務六條)로 건의한 바에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내용인즉 비전마(備戰馬)란 제하에 군마양성과 마적 재정비에 의한 육군의 기동력 확보 필요성과 당위성을 제시한 것이었다. 만약 7년전쟁 초기부터 수군에게 기병으로 증강된 연안의 일부 육군을 배속시켜 이순신에게 통합 지휘토록 했더라면, 오늘날의 해병대와 같은 기능으로 필요한 시간과 장소에 연안상륙작전을 실시하여 해안선을 돌파 상륙한 적을 효과적으로 포위·섬멸할 수 있었을 것이고, 또한 중요한 해상 접근로를 연한 해안선에다 차단진지를 점령 배치케 함으로써 대상륙작전(對上陸作戰)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러하지 못했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오늘날 거대한 옥포 조선소가 위치한 이곳 거제도에서 행하여진 옥포승첩을 통하여 해상작전과 연안작전으로 적을 상륙하기 전에 저지·격멸함이 가장 효과적이란 것을 실증하고 향후 대책을 건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원수니 도체찰사니 하는 옥상옥의 중간 군령계통 상급지휘 제대는 물론 비변사나 병조판서 같은 군정계통의 지휘계통 벼슬아치들이 모두 문관이었던 바, 숭문천무사상에 투철할 뿐만 아니라 야전실무 경험이 없는 이들인지라, 현지 해전지휘관의 건의나 요구가 묵살되고 왕에게는 탁상공론만 왜곡 전달됨으로써, 결국 이순신은 이때부터 미움을 사기 시작했다. 조정의 부유들은 궁극적으로 맹인모상할마(盲人摸象 馬)를 일삼더니 임진역장(臨陣易將)에 절족복속(折足覆 )의 회복할 수 없는 비극을 자초했던 것이다. 즉 말하자면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본 주제에 외눈박이 말을 타고서 밤길을 가다가 전쟁중인 장수를 바꿔치기 하더니 밥하던 솥의 발이 부러져 밥이 쏟아지고만 자업자득과 인과응보의 극단적인 사태로 치닫고 말았던 것이다. 옥포해전 직후라도 과감하게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자세로 대비책을 강구했더라면, 7년간이나 전쟁을 끌면서 명나라에 나라의 운명을 맡겨둔 채 이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약]
1. 옥포해전 (玉浦海戰)
1) 해전일
1592년 5월 7일 정오무렵 (낮 전투)
2) 해전경과
이순신의 첫 해전, 원균과 연합함대 조선군은 판옥선 27척과 대소 협선 60여척으로 구성 상대는 도도다카도라(등당고호)부대 30여척! 이순신의 기습전으로 적함 26척 격침
3) 해전의 특징 : 기습포격전
일본군은 조선군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일본군 공격, 그러나 옥포만이 비교적 길어 조선군이 나타나면 적도 충분히 대비할 수 있을거라는 전제하에 어선으로 가장한 조선 특공대가 먼저 적의 대장선을 공격, 혼란에 빠뜨린 후 전격적인 포격전 개시 이순신도 적의 전력을 완벽히 파악 못한 상황에서 개전초기 조심스레 접근 그러나 함포가 없는 것을 알고는 돌격점 감행 해안선을 따라 일본군이 퇴각할 것을 짐작, 함대의 일부를 매복시켜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전투. 서전의 승리는 앞으로의 전투에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이순신은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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