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로 다리를 놓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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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미 씨 목소리는 가슴 깊이까지 스며든다. 아주 맑으면서 슬픔이
마디마디 차있다. 거기
엔 그녀의 삶, 재일교포들의 삶,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과
행복과 한숨이 담겨 있다.
시커먼 강물 위에
네칸 짧은 그림자 비추며
오늘도 달려가는 케세이선 낮은 철교 밑에
슬픔이 묻힌 채로 잠들어있네
에헤이요 에헤이요
<케세이센(京成線)> 중에서 -
케세이선이란 나고 자란 카츠시카(葛飾)를 달리는 전차다. 그건 이정미 씨의 탯줄이다. 어린 이정미는 현실로부터 늘 도망치고 싶었다. 고물상집 딸. 천민촌의 지저분하고 가난한 사람들 속에 자신이 있었다.
그게 부끄러웠다. 재일교포 2세인 그녀는 가수가 꿈인 아버지를 두었다.
늘 커다란 오디오가 방안을 크게 차지하고 있었고, 주말이 되면 아버지는 마이크를 들고 목청이 터지도록 노래했다. 때때로 사람들을 위해 노래부르러도 다녔다.
<목포의 눈물>이며 <돌아와요 부산항에> 같은 노래를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었다. 그런 탓인지 그녀는 어릴 적부터 늘 노래했다.
"저는 어릴 적 꿈이 가수였지만, 그렇다고 진짜 가수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피아노 선생님이 권해서 처음으로 성악을 하기로
결심했어요. 오페라를
해서 상류사회로 상승하고 싶었다고 할까. 하여간 제가 어릴 적 부터
살아온 신물나게 가난
한 동네로부터 떠나고 싶었어요."
가츠시카는 그녀가 벗어내지 않으면 안될 무거운 어둠의 딱지 같은
것이었다. 고등학교까지
조선학교를 나온 탓에 음대 입학이 불가능한 걸 알고 들어간 게 도립
미나미가츠시카고등학
교. 이 야간고등학교에서 사무치도록 공부를 했다. 투병생활하는 어머니도 나몰라라 하고 공
부에 매달렸다. 2년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견딜 수 없는 죄의식이 그녀를 가만히 놓
아두질 않았다. 기어이 구니다치음악대학(國立音樂大學)에 들어갔지만, 마음은 언제나 괴로
움 속에서 신음했다.
그래도 대학시절, 노래가 하나의 버팀목이었는지 모른다. 광주민중항쟁과 관련된 집회 같은
데에서 별 목적도 없이 노래했다. 주로 운동가요나 김민기 씨 노래를
많이 불렀다. 오페라가
그랬던 것처럼 운동가요를 부르면서도 뭔가 속시원치 않은 씁쓰름함이 남았다. 내 노래가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인지 가수가 될 생각은 못했다. 가끔씩 주어지는 무대는 그저 부업같
은 것이었다.
사실 서른살 때 남편과 이혼하고 달랑 세살된 딸과 남았을 때는 완전히 노래를 포기한 거나
진배 없었다. 야간에는 조선어 가르치고, 낮에는 높은 빌딩에 대롱대롱 매달려 유리창을 닦
았다. 그 생활을 10년이나 했다. 본인은 그게 고생이라기 보다는 즐거웠다고 했다. 이런저런
잡생각 없이 집중할 수 있는데다, 땀흘리는 노동이어서 참 개운했다.
그전까지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 멋진 만남이 있었기에 아주 의미 깊은 시간이었고.
"그럴 때 우연히 시인 야마오 산세이 씨가 <기도>라는 시를 낭독하는
걸 들었어요. 생전
처음으로 노래로 부르고 싶은 대상을 찾았어요. 시에 스스로 곡을 붙여 불렀어요. 그후 자꾸
자꾸 노래하고 싶은 게 생기더라구요. 뭐랄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
게 됐다고나 할까. 한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 표현할 수 없는 나만의
색깔을 가졌다는 점에
서 재일교포로 태어난 데 오히려 감사하게 됐죠. 그래서 1997년에 낸
CD 「나는 노래한다
(わたしはうたう)」는 거의 자작곡이에요."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하기만 하면 돼
음~ 마음이 이렇게 투명해져 와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하기만 하면 돼
음~ 눈에 비추는 세상이 새로와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하기만 하면 돼
음~ 모든 생명이 소중해
아무도 믿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방황해도
내일은 틀림없이 다시 태어날 수 있어
- <있는 그대로의 나> 중에서 -
록음악 싱어송 라이터인 고무로 히토시 씨가 그녀를 담박에 알아보았다. 그의 콘서트에 가
수 이정미를 다시 세웠고, 그녀에게 민요와 장구를 들게도 한 장본인이다. 그게 서른 다섯살
때일이니, 가수로서는 꽤나 늦깍이라고 해도 좋을 게다. 1년에 100번
이상 무대에 설만큼 성
장한 지금도 라이브 중에 민요 한두 곡은 꼭 부른다. 다들 좋아하기 때문에 부르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노래를 더 많이 아껴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다.
그녀 삶의 이야기에
공감해주기를 바라는 게다.
"관동대지진의 아픔이 아직도 다리 밑 유골로 남아 있고, 부락민들의
어두웠던 삶이 그리움
으로 남아 있는 가츠시카가 제 고향이죠. 제가 살고 있는 이곳을 계속
노래할 겁니다. 그리
고 한국과 일본의 아름다운 시들을 제 눈으로 느끼고 표현해내고 싶어요. 노래는 바로 제
삶이니까요."